죽음 앞에 선 사랑,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Amour, 2012)




이희승*



  영화 보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다음부터 종종 어떤 영화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물어보는 사람들의 시선 너머로 제 영화 취향을 통해 저라는 사람, 즉 제 소양과 인성, 그리고 세계관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을 봅니다. 새로 만난 연인들 사이에 ‘무슨 영화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이 빠지지 않는 것 또한 서로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상대방의 문화적 취향을 통해 알아보려는 의도가 다분하지요. 하물며 영화를 보는 취향으로도 그 사람의 됨됨이를 측량하는데, 영화를 만드는 취향이야말로 영화 만드는 이의 혼을 송두리째 보여주는 거울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애정과 존경, 그리고 경외심을 가지고 신작을 가급적 챙겨 보는 감독들 중 하나가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하엘 하네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감독”이라는 별칭이 있는 하네케 감독은, 처음 본 지가 거의 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제목을 떠올리면 등줄기가 오싹해 오는 ‘퍼니게임’(Funny Game, 1997)으로 기억되는, 잔혹할만치 냉철하게 사회와 인간의 본성을 카메라 앞에서 낱낱이 노출시켜 온 영화작가입니다. 그래서인지 2012년 유수의 국제영화제를 떠들썩하게 만든 하네케 감독의 신작 제목이 ‘아무르’ (Amour, 사랑)라는 소식을 접하고는 살짝 제 귀를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칠순을 넘겨도 사람이 쉽게 변하는 법은 없건만, 갑자기 왠 ‘사랑’ 영화를 만드셨을까?


  물론, 사랑만큼 예술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난해한 주제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일을 업으로 하는 정신분석가들 또한 이 ‘사랑’을 놓고 각자의 이론이 분분합니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아’에서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는 가장 흔한 예로써 사랑에 빠진 상태를 설명합니다. 사랑 앞에서는 서슬이 퍼런 자존심과 자의식도 무장해제를 당하고 만다는 낭만적인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마취를 당한 듯이 자아가 무방비 상태에 노출되는 심각한 위험을 두고 한 말이기도 하겠지요.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사랑이란 자기가 갖고 있지도 않은 무언가를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주는 것’이라고 기술합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자기 자신의 존재의 핵인 근원적인 결핍을 발견하고 그 공백을 서투르게 공유하는 관계가 사랑인 셈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완벽한 불완전함’을 상징하는 메타포라는 라캉의 정의를 읽을 때마다, 내 것도 아닌 것을 손에 쥐고는 ‘자, 이게 바로 네가 원하는 거야’라며 원하지도 않는 선물을 상대에게 들이미는 천진난만한 연인들이 가면으로 얼굴을 감추는 것도 모자라서 두 눈을 가리는 안대까지 쓰고서 사랑을 찾겠다고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세익스피어 풍의 코메디가 떠오릅니다. 연인 사이의 사랑 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메타포로 맺어진 모든 관계에서 우리는 라캉이 암시한 막막한 무지와 몰이해, 안타까운 오해와 그로 인한 불행한 폭력, 이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절박함과 그 절박함이 빚어낸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환상 혹은 허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조르주와 안느는 누구나 그렇듯, 다소 달뜨고 어설픈 연인으로 만나, 이제는 서로의 불완전함을 평화롭게 협주하는 지경에 이른 노부부입니다. 파리 한복판에 있는 고풍스런 아파트에서 우아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이 음악가 부부에게 죽음은 무자비하게 현관문 자물쇠를 비틀고 침입한 도둑처럼, 어느날 불쑥 모습을 드러냅니다. 매무새가 단정하고 고상한 취향과 애교있는 위트를 갖춘 아내 안느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뇌경색으로 노부부가 공유하던 고즈넉한 세계는 빠르게 관 속처럼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으로 조르주가 넋이 나간 아내를 발견하고 ‘왜 그래?’라고 물으며 황급히 안느의 촛점 잃은 시선속에서 평생을 함께한 명민한 아내를 되찾으려 애쓰는 장면에서 하네케 감독은 마치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어둠의 세밀한 깊이를 표현합니다. 빛의 화가라는 렘브란트의 그림들이 그 애칭이 무색하게 하나같이 어둠을 담은 것처럼, ‘사랑’이라는 촌스러우리만치 정직한 제목을 단 이 영화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사랑에 관한 센티멘탈리즘 따위는 깨끗하게 걷어내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애초부터 놓여 있던 플라톤의 동굴처럼 어두운 ‘공백’을 카메라 앞에 꺼내 놓습니다. 뺨이 붉고 머리채가 빛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찬란한 사랑의 대단원에서 안타까운 젊은 죽음이 비극의 화룡정점을 찍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이라면, 칠순을 넘긴 완벽주의자 하네케 감독이 제시하는 사랑의 해부도인 이 영화는 무표정한 안느의 텅빈 동공을 통해 사랑은 애초부터 누구나 생의 가운데 숙명처럼 품고 살아가는 불가지 혹은 죽음의 부분집합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굼뜨고 노쇠한 몸을 이끌고 조르주는 산 채로 죽음을 맞이하는 아내를 묵묵히 돌보기 시작합니다. 손 끝에서 섬세한 음악을 빚어 내던 피아니스트 안느가 가장 기본적인 신체 활동도 하지 못하고, ‘엄마’와 ‘아파’이외에는 자신을 표현할 언어조차 모두 잃어 버리게 되자, 조르주는 사랑하는 아내 안느의 이미지가 죽음으로 잔인하게 치환되는 과정을 손놓고 지켜 보는 고통을 마주합니다. 이제 말을 잃은 안느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이 삶인지 죽음인지, 조르주는 가늠할 수가 없게 됩니다. 아내의 남은 생을 사려깊게 마감해 주고 싶지만, 이제 안느의 죽음이 더이상 선택이 아닌 것처럼 자신의 죽음 역시 정해진 운명임을 깨닫기 시작하지요. 그 어떤 절망보다도 조르주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이 불가지한 죽음에 관한 해석이 온전히 자신의 책임으로 남겨 졌다는 사실입니다. 영화는 죽음에 갇힌 안느의 절망과 두 죽음을 혼자 처리해야 하는 조르주의 막막함을 공간의 제한과 관계의 단절로 표현합니다. 즉, 부부가 음악회에 참석하는 첫 장면을 제외하고는 빛과 소리 그리고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부부의 적막한 아파트에서 하네케 감독은 단 한발짝도 내딛지 않습니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이 둘다 유사 죽음에서 깨어나지만, 입구가 영원히 봉인된 무덤에 갇혀 늙어 죽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 주고야 말겠다는 괴상한 결의를 품은 듯이 말이죠. 역시 사람은 잘 변하지 않나 봅니다. 하네케 감독의 ‘사랑’의 비둘기는 ‘퍼니게임’의 달걀과 골프채처럼 트라우마를 남기고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다가갑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투명하게 존재하던 공백이 죽음이라는 실체가 되어 다가왔음을 깨닫는 그 순간, 조르주는 죽어가는 안느가 아니라 안느의 죽음을 끌어 안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 안에는 자신의 죽음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 들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떠난 후, 중년의 딸 에바가 텅빈 아파트를 돌아 보다가 아버지 조르주의 의자, 그 고뇌의 자리에 털썩 주저 앉습니다. 삶과 죽음의 연쇄고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요. 영화를 보고 온 밤, 음악회에서 돌아와 얼핏 죽음을 예감한 안느가 그랬듯이, 쉬 잠이 들지 못하고 침대에 앉아 잠든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습니다. 죽음을 전제로 유한한 생을 함께 하기로 한 나의 동지가 안쓰러워 이불을 살며시 덮어 주었더니 5초도 되지 않아 무심히 젖혀 버리더군요. 십오년을 함께 살고도 이순간 그가 이불을 덮고 싶은지, 젖히고 싶은지 알 수가 없는 게 사랑의 명확한 한계라고 지적하는 하네케의 냉정한 ‘아무르’는 만인에게 공평한 죽음 앞에서 함께 허둥거릴 누군가를 찾는 일이, 그리고 그 누군가가 될지도 모르는 타인을 측은히 여기는 것이 한없이 중하다는 사실 또한 역설하고 있는 듯 합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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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도, 당신 호흡의 열매입니다’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아직도 어렵다. 아무리 돌이켜도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한때 아주 가까웠던 사람들 중에도 있다. 차를 몰고 가다가도 불쑥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종종 머리가 쭈뼛 서는 것 같은 전율을 동반하는 것들이다. ‘용서는 결국 다 잊는 것’이라는데, 난 아직 멀었나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3:34)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려온다. 두렵고 부끄러워진다. ‘그동안 조금도 성숙하지 않았단 말인가!’ 언젠가 읽었을 때에도, 오늘 다시 읽어도 이 말씀은 여전히 어렵다.

마음 한 가운데서부터 ‘기도하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참동안 기도를 하는데 명치끝으로부터 아주 뜨거운 덩어리 하나가 솟구쳐 오르는걸 느꼈다. 분노인 것 같았다. 잠시 후, 머릿속이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목사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때에 비로소, 용서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달은 것 같다. 용서는 상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것임도. 기도를 마치고, 다시 본문을 읽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를 죽이라고 외쳤던 사람들, 침 뱉고 조롱하는 사람들, 그토록 많은 은혜를 입고도 예수를 ‘강도’라고도 하고, ‘반역도당의 수장’이라고도 하는 ‘바라바’와 맞바꾼 어리석은 유대인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너나 구원해 보아라!’ 하고 빈정거리던 사람들, 어리석고 천박한 식민지 노예들끼리 서로 죽이고, 욕하고, 침 뱉는 장면을 지켜보며 로마시민의 우월감을 느꼈을 백부장들과 병사들. 제비를 뽑아서 그분 입으신 옷들을 나누어 가진 지독한 군인들.

이 모든 사람들을 두고 주님께서 하신 그 말씀. 그렇다. 그분은 용서마저도 아버지께 맡겨버렸다. 용서하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용서해주시도록 기도하셨다. 바로 예수님의 방법이 아닌가! 결코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용서하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맡겨버리셨다. 간음하여 돌에 맞아 죽을뻔한 여인을 구해주시고 물으셨다. ‘너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모두 갔습니다’ ‘나도 너를 용서한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단 한사람도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죽어야만 했던 그 여인을 향해 용서한다고 말씀하신 그분이다. 그런 예수님도 이 어리석은 유대인들과 잔인한 로마인들을 놓고서는 아버지께 맡기신다. 마치 깔데기를 통해 걸러져 나온 진액처럼, 주님의 이 말씀이 내 안에서 새로이 해석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도, 하나님 당신의 호흡으로 생명이 된 열매들입니다” 치유의 지점이 아닐까? 그들 또한 하나님의 입김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바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 결국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아닌가!’

이라크의 한 기자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며, 죽어가는 아이들과 여인들을 지켜본 뒤 쓴 글이다. 

‘아브라함, 모세, 예수의 아버지 위대하신 하나님! 혹은 아브라힘, 무싸, 아이싸의 위대한 알라여! 어떤 사람들은 정말 더러운 영혼을 지녔습니다. 당신께 기도합니다. 이 참상을 목격한 아이들이 어른이 되기 전에, 그들의 종교가 무엇이건, 그들의 피부가 어떤 색깔이건,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부어주소서! 그들은 모두 같은 세상, 이 거대하면서도 작디작은 세계의 시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릅니다. 자기들이 ‘단 하나의 민족, 인간이라는 종족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이웃을 용서하세요’ ‘이웃을 사랑하세요’ 이것은 결코 계명 또는 의무가 될 수 없다. 칸트는 ‘사람의 행위의 윤리성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정복한 정도에 의존한다’고 그의 윤리학에서 거듭 말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윤리적인 것은 항상 ‘너는 해야 한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느슨해진다면, 그 삶은 자연 비윤리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행하시지 않았다. 사랑도 용서도 결코 명령될 수 없다. 그것들은 항상 마음 전체를 요구한다. 혹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또는 목사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면, 나 자신에게도, 사랑 받고 용서 받는 대상에게도 참을 수 없는 일이다. 타율적인 것은 윤리적 행동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용서해야 한단 말인가!

독일의 설교자 ‘헬무트 틸리케’가 전한 이야기 하나를 인용해야겠다. 레마르크가 쓴 세계1차대전에 관한 책, ‘서부전선의 적막’의 한 장면이다. 한 독일군이 적군과 접전을 벌이다 포탄으로 패인 구덩이로 뛰어내렸다. 그는 거기서 영국군 하나를 보았다. 깜짝 놀라 총을 겨눴지만, 잠시 후, 영국 군인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상황은 달라졌다. 영국군인의 상처가 독일군인의 마음을 녹인 것이다. 그는 먼저 자기 물병을 꺼내 부상병에게 마시게 했다. 영국군인은 고맙다는 눈인사를 한 다음, 자기 옷에 달린 주머니를 열어 달라고 손짓했다. 그가 그 주머니를 열었을 때, 그의 가족사진이 들어있는 봉투가 떨어졌다. 영국군인은 죽기 전에, 그 사진을 다시한번 보기 원했던 것이다. 독일군인도 그 사람의 손에 들려진 사진 속 영국군인의 아내와 어머니 사진을 보았다. 처음 이 둘은 서로 싸우는 적이었다. 죽든지, 살든지의 선택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독일군 병사가 구렁텅이에 누워있는 이 부상당하고, 방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리고 그의 가족사진을 보았을 때, 그의 눈에 이 영국군인은 더 이상 원수나 무기를 소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두 차원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결국 두 차원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한쪽은 살기를 띤 군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다른 한쪽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한 존재’이며 ‘인격’인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셨을 때, 이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가르침의 극단적인 자기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신께서 보시는 시선이었다. 그분은 늘 그랬다. 지금 주님을 향해, 침 뱉고, 조롱하고, 때리고, 모욕을 주는 ‘이 일들’을 하고 있는 저들도, 다른 한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호흡으로 생명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해주는 일이 ‘예수의 목적’ 아니었던가! 진흙으로 뒤덮여 있는 사람에게서 진흙을 닦아내 밝고 윤기 나는 얼굴과 눈빛을 보신 분이다. 그래서 삭개오도 만나주셨고, 문등병자도 만져주셨고, 간음한 여인도 변호해주셨던 것이다. 내가 귀하듯, 저들도 귀하다.


여중생을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된 김길태라는 사람의 얼굴을 버젓이 드러내고, 그의 뒤통수를 때리는 어떤 사람을 여과 없이 보여준 방송국 카메라는 너무 저속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말장난으로 ‘초상권이 존중받거나, 존중받지 않을 조건들’을 나열하는 경찰의 대변인은 비열했다. 그를 용서하는 몫은 일차적으로 피해자의 가족들이며, 광의의 범주에서 온 국민이 판단할 일이다. ‘나쁜 놈들은 모조리 쓸어버리고, 사회에서 매장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가진 사람들의 갈증을 해결이라도 해주겠다는 듯, 카메라는 자신의 뒤통수를 때린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피의자’의 모습을 보며 조롱하고 있었다. 더러운 영혼들!

난 이제부터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더러운 영혼들을 위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심했다. 용서와 사랑은 결국 나에게서 나와,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나의 용서받아야할 수많은 기억들과 사랑받고 싶은 갈망을 위무해줄 것이다. 하긴, 진정으로 자신을 십자가 앞에 세운 사람이라면,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행위도 자기 의지만을 쫓아 함부로 지껄이고, 행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형폐지론자들이 말한다. "누가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를 주었는가?"
그러자 사형찬성론자들이 말한다. "누가 사람을 창살아래 가두어 둘 권리를 주었는가?"

다시 또 사순절 한복판에 섰다. 황지우의 시 한 편을 덧붙인다. 

소나무에 대한 예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 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建木 ;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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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독한 열정
우리의 고통은 이렇게 자본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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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렇게 욕을 보이고 나니, 암논은 갑자기 다말이 몹시도 미워졌다.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기왕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였다.
암논이 그에게, 당장 일어나 나가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사무엘기하」 13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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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지스와프 백진스키 作 <무제>

그녀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얼굴, 몸매, 목소리, 걸음걸이, 그녀에 얽힌 모든 것이 하나하나 사랑스러웠다. 저 멀리 사람들 틈에서도 금방 그녀임을 알아 볼 수 있었고, 눈을 감고 있어도 그녀의 자태가 선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그녀를 볼 수 있기 때문이고, 밤에 잠을 자는 것은 상상 속에서 그녀를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스케줄은 그가 꿰고 있는 그녀의 동선(動線)을 따라 짜였고, 그녀 때문에 국정을 배우는 일에도 더욱 열정을 다할 수 있었으며, 신체를 연마하는 데도 더욱 부지런히 준비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그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더욱 최선을 다할 의지가 북돋아졌고, 그녀가 있었기에 최고를 위한 경쟁에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모든 행동과 생각과 계획은 모두 그녀와 연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해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이복누이동생이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와 왕권을 두고 경쟁하는 이와 같은 혈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 집은 정말 재수 없는 집안이었다. 유다 왕국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는 새똥만한 나라(요르단 동북부 바산 지역에 있는 소국인 그술)에 불과한데, 그것도 왕족 출신이라고 얼마나 있는 척하는지 아니꼽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왕족이라는 점이 대신들에게 먹혀들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겐 부담스러웠고 부러웠다. 게다가 그자는 용모가 준수했고 기골이 장대했다. 말은 또 어찌나 수려한지, 감언이설에 넘어가 장자인 자기보다 그 동생을 지지하기로 한 이들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었다.

그가 왕이 되고 싶은 것은, 적어도 그 즈음에는, 이복누이인 다말 때문인데, 그가 왕이 되려는 한 그녀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녀의 친 오라비인 압살롬은 대권을 포기할 자가 아니고, 자기 또한 그럴 수 없었다.

마침내 병이 들고 말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정이었기에, 욕정은 더욱 불타올랐고, 그런 마음을 다스릴 만큼 그는 야심만만한 성품도 단호함도 갖추지 못했다.

궁이란 이런 낌새가 비밀로 지켜질 만한 곳이 아니다. 더구나 대권을 두고 싸우는 두 왕자의 일거수일투족은 궁의 모든 사람들의 표적이었다.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지만, 각자는 그 정보 하나하나를 두고 치밀한 계산을 하며, 전략을 편다. 암논, 이 영리하지 못한 왕의 장자는 자기의 약점을 노리면서 펼쳐지는 온갖 술책들을 간파할 이해력도 없었고, 사랑의 열정은 그나마 있는 부족한 판단력마저 마비시켜 놓고 말았다.

그때 왕의 노련한 책사인 요나답이 접근해 왔다.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너무나 영리한 자여서 가깝게 지내고 싶었지만, 그는 자기가 아닌 왕의 사람이다. 근데 어느 날 그가 와서 권한다. 자리에 아예 누워 앓는 시늉을 하라고, 왕이 문병 오면 다말의 시중을 청하라고 말이다. 그녀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는 단박에 그렇게 행동을 한다.

아버지 다윗은 암논의 청을 들어준다. 궁내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왕이 저 조심성 없는 장자의 간청을 들어주었다가 자칫 형제간에 골육상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을 법한데, 어찌된 일인지 왕은 요나답이 예상한 대로 행동했다. 왕의 측근의 한 사람이기에 왕이 허락할 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위에서 추측한대로, 왕의 허락이 조심성 없는 것이라면, 요나답은 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왕이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뜻밖에도 왕은 허락했다.

그렇다면 잠시 왕의 입장에서 사태를 점검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요나답이 암논의 사정을 알고 다가와 자문을 해주었다면, 다윗이 그것을 모를 가능성은 별로 없다. 말했듯이 요나답은 왕의 측근이고,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 가장 유리한 것임을 잘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윗은 그 허락이 초래할 사태까지도 계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장자인 암논은 영리하지 못한 아들이다. 나라를 맡기기엔 부족했다. 한편 다말의 친오라비인 압살롬은 너무 영리했다. 게다가 그의 어미는 그술국의 공주다. 그술국과의 친선관계가 유다 왕국에게 유리했기에 다윗은 그녀와 정략결혼을 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왕권을 그술국 공주의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왕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대신들이다. 대신들은 벌써 줄서기를 시작했다. 이 두 왕자가 왕권을 승계할 유력한 후보들이니 그들을 지지하는 파가 나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하여 왕과 책사인 요나답은 일련의 음모를 기획하였던 것은 아닐까. 두 왕자를 제거하려는 .........

아무튼 간병차 방문한 이복누이를 암몬은 충동적으로 강간해 버린다. 상사병으로 몸져 누워있던 터였다. 오직 다말 생각에 판단력이 극도로 흐려져 있던 차였다. 하여 그는 순간의 욕정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걱정이 밀려온다. 가뜩이나 압살롬에게 호감을 갖는 이들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는데, 가뜩이나 자질이 부족하다는 말이 돌고 도는데, 누이동생을 강간했다는 소문이 나면 그야말로 치명적인 사태가 예상되었다. 게다가 아버지 왕의 매서운 눈초리가 그를 몸서리치게 했다.

순간 그는 이 모든 것이 다말 때문이라는 생각에 빠져든다.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피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쩌자고 오라비의 경쟁자인 자신에게 왔단 말인가. 혹 압살롬, 그자의 간계는 아닌가. 몸을 팔아서라도 자기 오라비를 왕으로 만들려고......, 이런 창녀 같으니라고.
암논은 그녀를 사납게 밀치고 내쫓아 버린다. 남자와 성관계를 맺은 한 여인이 버림받으면 그것은 그녀의 수치이고 가문의 수치다. 해서 그녀는 뭇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아야 한다. 그게 사대부가나 왕실 여성의 법도다. 암논이 그걸 모를 리 없지만, 그 순간 그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배신은 자기가 한 게 아니라 저 창녀 같은 여자가 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충동적으로 그렇게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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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 Dine 作 <The Six Foot Heart Machine>(1991)

모든 것을 다 걸만큼 열렬했던 그의 사랑은 한 순간에 재로 변했다. 최고가 되고자 하는 열망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던 사랑의 열정은 한 순간에 최고가 되고자 하는 열망의 가장 심각한 장애물로 각인되었다. 그는 그녀를 원망했고 저주했다. 그의 사랑, 그 ‘독한 열정’은 녹아버린 더러운 눈의 잔해에 다름 아니었다.

드라마 같은 얘기다. 대개의 현실은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독한 열정만큼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열정적 사랑들이 불꽃을 일으켰다. 사랑의 열정과 열병은 누구나 거쳐 가는 통과의례처럼 다가왔다 지나간다. 삶의 커다란 동력이 되고, 가장 소중한 것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강한 충동을 일으킨다. 그런데 불꽃을 일으키며 사랑을 불태우고 있는 그 순간조차도 그 격정적 감정들은 다른 욕망들과 겹쳐지며 표출되곤 한다. 그리고 종종 열정적 사랑은 독기를 내뿜으며 증오를 일으키고 극심한 상처를 발생시킨다. 하여 사랑은, 그 앞뒤 안 가리는 열정은 가끔 독한 열정으로 변모한다.

한데 모든 열정적 사랑이 독기를 일으키며 상처를 야기하는 이별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열정적 사랑이 결혼으로, 이별을 억제하는 그 제도 안으로 안착한다. 일단 이 제도 속에 포섭되면 이별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굉장한 비용을 지불해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사랑의 완성이라는 미학적 담론으로 포장된 그 제도를 둘러싼 현실이 또한 사랑의 독성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임을 간과할 수 없다. 이에 관해서는 수많은 얘기들을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 제도로의 진입의례라고 할 수 있는 결혼예식에 관하여, 그 독성의 가능성에 대하여 얘기해보기로 하자.

열정적 사랑에 빠진 이는 결혼을 그 제도 속의 일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것을 포장하는 판타지를 통해 열망한다. 그런 점에서 결혼을 향한 열병은 현실을 유보시키는 ‘초월적인 정념’이다. 한데 누구든 그 제도 속으로 진입하는 과정에 다가서면, 그 초월적 정념은 지극히 세속화된 현실과 접속하게 된다. 물론 그러한 초월과 세속의 접속은 사랑의 열정이 진행되는 도처에서 체험된다. 사랑의 열정 자체도 그러한 계산법과 결코 분리되어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결혼예식은 그 중의 단지 하나의 체험일 뿐이다. 

최근 결혼의 상업화 현상을 연구한 한 논문에 따르면, 2003년에 결혼예식 전후 과정(상견례에서 집들이까지)을 포함하여 평균 1억 3천5백만 원 정도가 지출되었다고 추산한다. 이 중 신혼집을 구매하는 비용이 가장 높으며, 가구 가전 등 살림기구의 구매 비용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또한 예식 자체를 위한 비용도 적지 않다.

이러한 지출구조는, 1998년을 예외로 하면, 1990년대 이후 줄곧 가파른 증가추세를 띠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결혼 컨설팅 업체들의 활발한 마케팅의 소산이며, 드라마 영화 가요 뮤직비디오 등에서 이른바 ‘사랑 마케팅’이 고도로 첨예화된 탓이다. 좀더 넓게 보면,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소비사회로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고, 그로 인해 ‘일상의 상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된 하나의 양상으로 결혼을 둘러싼 소비시장이 극대화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랑은 일상의 상업화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부문임은 의심의 여지없다.

결혼이라는 판타지를 활용한 마케팅은 소비욕망을 불러온다. 이 욕망은 치밀한 ‘사랑의 계산법’과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위신의 전략’이기도 하다. 소비사회는 위신이라는 자본을 위한 비용을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 위신의 계산법은 사랑의 열정을 녹아버린 더러운 눈처럼 만들기도 한다. 아니 사랑의 열정 자체가 상업화되는 사랑의 계산법과 뒤엉키면서 이미 독성을 띠고 있기도 하다. 알게 모르게 그 열정 속에 상처 주고 상처 받는 파괴적 독기가 함유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혼비용의 과다지출은 결혼 당사자의 수입으로는 불가능한 액수다. 하여 그 비용은 많은 경우 부모로부터 나오는데, 그것은 부모세대 가계부채의 주요 요인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이로 인한 노년의 비루함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이것이 가족주의를 온존시키는 하나의 요인임을 지적고자 한다. 그런데 소비사회의 주체화된 개인들은 전통적 가족을 수용할 수 없는데, 아직 소비사회에 적합한 대안적 가족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가족주의는 여전히 전통과 접속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결혼의 과다지출은 가족 내의 갈등을 야기하는 고통의 주된 요인이 되곤 한다.

여기에서 언급한 것은 결혼비용의 과대화가 초래할 수 있는 많은 것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말했듯이 이것은 사랑의 상업화, 직접적으로 ‘사랑 마케팅’이 활성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사랑 마케팅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그 욕망은 사랑의 열정 속에 스며들어 있다. 하여 사랑의 열정은, 그 속에 담긴 사랑의 욕망은 누구나, 대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장화된 가치에 의해 잠식되어 있다. 요컨대 사랑의 욕망이 초래할 수 있는 비극의 배후에는 시장의 원칙이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암논의 욕정과 배신의 배후에는 왕권쟁탈이라는 전근대정치로서의 권력의 원리가 작동했다면, 현대인에게는 시장의 정치로서의 권력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부활을 기리면서 나는 이 시대의 고통에 관해 얘기하고자 했다. 특히 고통을 일상적 차원에서 살피고자, 그 중 두드러진 하나인 열정적 사랑과 결혼에 관해 얘기했다. 그 아름답게 포장된 정념과 제도가 담고 있는 독한 성질에 대해, 사랑하던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심지어 죽게 할 수도 있는 그 독함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속에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성찰하고자 했다. 부활을 기리는 우리의 고통은 이렇게 자본화되어 있다고 말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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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소통의 단절, 그리고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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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선애
(부모교육/MBTI 강사)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41세에 죽은 카프카가 죽기 5년 전, 36세에 45장에 걸친 장문의 편지를 아버지에게 쓴다.
철옹벽 같은 아버지에게 드리는 항의며 호소며 절규였으나 결국 부치지 못한 편지다.
아버지로 부터 겪은 것은 소소한 일상에서의 좌절이지만 상처 받은 카프카에게는 존재의 문제가 된다.
물론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와 끊임없이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노력이 불후의 명작들을 낳았지만 그 주제는 불통 속의 절망적인 실존이다.
자신을 한낱 벌레로 표현한 '변신'을 읽으면 카프카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느낌을 짐작할 수 있고 평생을 통해 자신을 지배하는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반란이 결혼이었으나 3번의 약혼과 파혼만 되풀이 하며 자신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없었으니 가족-특히,부모와의 관계에서 겪는 불통은 단지 고통을 넘어 파괴적이다.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어느 날 갑작스레 맞은 아내의 죽음. 남편은 당황한다.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린 아내의 자취는 옷과 사진첩.
"부토(원폭이후 일본에서 발생한 현대무용, 칠흑같은 어둠의 춤이란 뜻)"를 추며 찍은 사진 속의 아내는 너무나 생소하다.
아내 생전, 자신이 보기엔 낭비처럼 보여, 아내의 취미인 부토를 막아 버렸던 남편은  재산을 정리하여 아내가 가고 싶어했던 일본으로 떠난다.
아내를 위하여.
이런 아버지를 자식들은 이해하지 못하며 일상의 리듬이 깨지는 것이 싫어서 부담스러워 하기까지 한다.

작가와 감독은 가족간 단절의 숨통을 일본의 가족애에서 찾으려 한다.
벚꽃이 만발한 일본의 공원에는 나들이 나온 가족들로 가득하고 남편은 공원에서 부토를 공연하고 있는 소녀를 만난다.
소녀는 분홍 전화기를 들고 부토를 추며 그림자인 자신과 만나고 저승의 엄마와도 만나 행복한 얼굴이다.
이 소녀만이 주인공 남편과 소통한다.
남편과 소녀는 후지산으로 떠나, 자신의 모습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후지산을 기다린다.
아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몇 날이 지나고, 드디어 안개가 걷혀 환한 밤, 후지산은 선연히 자태를 드러내고, 남편은 달 빛 아래서 부인의 옷을 입고 부토를 춘다.
후지산 앞에서, 부토의 춤 속에서, 드디어 아내를 만나고 남편은 쓰러진다.
엔딩 자막이 다 올라가고도 한참동안, 어느 한 사람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사랑은 소통이다
그러나 어렵다.
때때로 칠흙같은 어둠 속에 빠진 느낌이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당연히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사랑의 상대가  눈 앞에서 사라졌을 때 상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음을 알았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또 얼마나 사랑의 상대를 좌절시켰나를 깨닫고 좌절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내 가족, 연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아파하고 있는지!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 가족, 특히 부모로 부터 상처를 받는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좌절되어서.
그리하여 내가 받은 좌절과 상처에만 급급하여 내가 사랑해야 할 상대에게 상채기를 내며 보복을 하기도 하며 많은 이들이 한생을 적개심과 분노로 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상처에 메여 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도 한다.
 
불통-다름과 차이
 
사람들은 누구나 내 잣대로 판단한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때 오해하고 상대가 잘못 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태어 날 때 기본적으로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태어난다.
이미 갈등의 소지를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얘기다.
흔히 성격 차라고 말하며 극복하기에 벅차들 하는 부분이다.
이 다름과 차이는 타고 난 것이기에 바꿀 수 없으며 그냥 그대로 받아 들여야만 하며 이 근본적인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할 때 갈등은 해소되고 소통이 가능해진다.

소통은 받아들임이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질 때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되며 사랑하는 이로부터 받는 인정과 수용은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양식이 되고 특히 유아기와 아동기에 받는 부모로부터의 인정과 사랑은 한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남편은 아내의 옷을 입고 후지산 앞에서 부토를 추며 아내를 만난다.
우리도 사랑하는 이의 옷을 입고 춤을 추며 사랑하는 이와  만나자.
물론 살아있는 오늘,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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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백승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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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19 18:4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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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승임 작가님 메일 주소를 좀 알 수 있을까요??
  2. 2014.10.20 15:26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gamunbi@nate.com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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