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우파'와 대형교회, 네 번째[각주:1]


주권교인과 캐릭터 교회들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주권교인'과 교회의 캐릭터화


    지난 글에서 ‘주의 종’들의 천민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기서 ‘주의 종’이란 성직자를 지칭하는 한국 개신교의 독특한 용어다. 이 표현 속에는 역설적으로 대중에게는 주(主)를 대리하는 자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 특히 설교는 ‘주님’을 대언하는 행위로서 여겨졌다. 한데 ‘주의 종’들의 학력 저하와 교회 대중의 학력 상승이라는 지적 비대칭성의 심화는 설교에 대한 교회 대중의 불신을 초래했다.

    실제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던 1990년대는 대학생 수가 가파르게 상승했고 출판 시장도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다. 신학교에서 현대신학의 논의들을 외면하는 가운데, 신학적 고급 정보가 담긴 교양서들이 속속 출간되었고, 심지어 교양서적 시장에서 반기독교적 과학서들이 불티나게 팔렸다. 합리성과 과학성에 대한 낙관적 태도가 절정에 이른 1990년대에 이러한 대중적 지식의 고급화의 대열에 고학력자가 많은 개신교의 신자들이 대거 참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반면 그 얼마 전까지도 교회 성장의 한 축을 이루었던 부흥회가 도시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고, 폐업하는 산기도원의 수가 급격히 늘었다. 즉 1990년대의 교회 대중은 목사와 그의 신학적 주도권에 깊은 의심을 품고 있었다.

    한편 이 시기는 민주주의적 제도화를 향한 열망이 거센 풍랑처럼 밀려들던 때였다. 낡은 권위주의를 청산하려는 거대한 파도가 그 선두에서 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는 낡은 권위주의를 대표하는 구지배적 질서의 표상이었다. 시민사회는 교회를 향하여 따가운 눈길을 던졌고, 매스미디어는 교회에 얽힌 추문들을 앞 다투어 들춰내고 있었다. ‘주의 종’들의 부패와 비리, ‘나쁜’ 종교적 행동들, 성적 추행 등이 연일 세간에 폭로되었다.

   많은 교회 대중은 ‘주의 종’들이 허술한 설교자들일 뿐 아니라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인들일 수 있다는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에 대한 교인들의 가장 소극적인 저항은 설교를 경청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 활동에 적극적인 교인들 몇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놀랐던 것은, 과거에는 메모하면서 설교를 경청했던 이들이 바로 며칠 전 목사의 설교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행동들도 많았다. 여러 교회의 설교들을 비교하면서 비평적 평가를 서로 나누는 이들도 많아졌다. 2천 년대 초 기독교 잡지 기획자 한종호와 신학자 정용섭이 합작하여 만든 ‘설교비평’ 프로젝트가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설교비평 붐을 일으킨 것은 이러한 현상의 직접적 여파였다. 

   이렇게 각기 설교비평가들이 된 이들이 더 나은 설교를 찾아 교회를 옮겨 다녔다. 지난 글에서 명명했던 ‘주권교인’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주권교인’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첫 번째 기준은 설교였지만, 그것이 유일하거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이들 까다로운 교인들,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서 적극적 비평가가 된 이들을 유치하기 위해 교회들은, 설교의 내용과 설교자의 테크닉에만 의존하지 않고, 예배 형식, 예배음악, 예배당의 공간 배치, 음향・조명・시각효과 등을 캐릭터화하는 데 큰 힘을 기울였다. 나아가 교인 프로그램이나 교회건축물에서도 그 교회만의 개성을 추구했다. 바야흐로 이 시기에 성공한 교회가 되려면 자기만의 캐릭터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1990년대 이성적 기획과 감성적 기획의 시대에 성공한 교회들


    1990년대 중반, 교세가 정체 혹은 감소하고 있던 시절, 하여 개신교 교계에서 위기론이 솔솔 번져나가던 시절, 교인들 사이에서 두 교회에 관한 입소문이 널리 퍼져가고 있었다. 이사를 하든, 귀국을 하든, 진학을 하든, 기독교인이 서울로 오게 되면 어느 교회를 방문할까? 이때 추천 1순위의 교회가 바로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다.

   1940~50년대 한국개신교를 대표하는 교회라면 영락교회였고, 1970~1980년대를 상징하는 교회가 (여의도)순복음교회(1958년 대조동 산동네에서 시작해서, 1961년 서대문로터리로, 그리고 1971년에 여의도로 교회당을 옮겼다)라면, 이 두 교회는 1990년대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락교회는 월남이주자들에서 시작해서, 군선교와 도시 중상위층 선교의 성과로 이룩된 교회였고,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이농이주자들의 신자화에서 시작해서 도시 중상위층의 신자화로 이어지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교회다.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신자 규모를 가진 교회다. 하지만 내부 갈등과 사회적 지탄이 겹치면서 이 슈퍼울트라급 초대형교회의 성장세도 꺾이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빠르게 성장세를 탔을 뿐 아니라, 무수히 많은 교회들에 영향을 미친 새로운 주역이 등장한 것이다. 우선 이 두 교회의 성장은 새신자의 유입보다는 여러 교회들을 순방하던 ‘주권교인’들을 정착시킴으로써 이룩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도대체 무엇이 까다로운 ‘주권교인’들의 마음에 든 것일까? 나는 앞에서 이 시대 성공한 교회들은 캐릭터화의 성공과 맞물린다고 보았는데, 바로 이러한 성공을 대표하는 교회가 이 두 교회였다. 단순화하여 말하면 사랑의교회는 ‘제자훈련’이라는 캐릭터로서, 그리고 온누리교회는 ‘귀족영성’이라는 캐릭터로서 ‘주권교인’을 사로잡았다. 전자는 이성의 기획으로, 후자는 감성의 기획으로 1990년대 교회 대중으로부터 열광을 받았다.

   이 얘기를 하려면 1990년대 한국사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시기에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식 인프라가 급성장했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민주주의가 사회적 제도화의 중심논리로 부상한 시기이기도 했다. 또한 국민의 시민적 주권의식이 급상승했다. 게다가 소비사회로의 급속한 이행기를 맞아 시민 각자의 취향에 대한 권리의식도 크게 신장했다. 이 시기에 사회에는 이성의 기획들이 난무했고, 이는 민주주의적 사회설계를 둘러싼 논쟁들이었다. 물론 1980년대에도 이러한 논쟁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논쟁은 진보적 사회운동의 공론장에 한정된 것이었다. 한데 1990년대 이후 이 논쟁은 범사회적인 공론의 장에서 진행되었다. 한편 이러한 정치적 사회설계를 둘러싼 공론장의 양성화는 논쟁 주체의 전문가화를 촉진했다. 동시에 많은 대중은 지적 관객이 되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전문가화’ 현상, 이것은 정치적 사회설계 논쟁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 전 부문에서 전문가화 현상이 빠르게 확산되었고, 그만큼 시민들은 각기 전문적 기능들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제 학생들은 거리에서 시위자가 되기보다는 도서관으로 몰려들었고, 시민들의 재교육 붐이 활성화되었다. 부모들의 자녀들에 대한 사교육 열기도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전례 없이 전 사회적 기조로 치솟게 된 이성의 기획은 전문가로 살아남기 위한 전사회적 경쟁과 맞물리게 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이성주의의 강화와 경쟁 시스템으로의 빠른 전환 속에서 사람들은 감성적인 위로를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 특히 사회적 낙오자만이 아니라 상승 가능성이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라는 감성의 기획이 요청된 것이다. 이렇게 이 시기의 이성의 기획과 감성의 기획은 사회 엘리트층이라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신앙의 이성적 기획으로서의 '제자훈련'과 1990년대




    그런데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는, 이 교회들의 각기 다른 캐릭터는 이 두 기획에서 굉장한 성과를 이룩하였다. 먼저 제자훈련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제자훈련’은 일종의 신앙에 대한 이성적 훈련 프로그램을 표상하는 용어다. 그 기원은 딕 요크(Dick York)라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독립선교사에게서 유래한다.

    그는 1960년 대구에서 선교학교를 열었는데, 거기서 10여명의 제자들을 훈육한 훈련 아이템은 성서 읽기와 전도로 요약된다. 성서 읽기 훈련이란 ‘묵독’하고 그 의미를 깊게 되새기는 신앙훈련이다. 그때까지 한국에선 음률에 따라 흥얼거리며 낭송하는, 일종의 전근대 구술사회 선비들의 책읽기 같은, 성서 읽기가 일반적이었는데, 딕 요크의 제자들은 근대적인 문자사회적 읽기 특징인 ‘묵독’의 훈련을 받은 것이다. 낭송이 발성되는 소리의 외면적 효과가 의미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독서법이라면, 묵독은 내면화를 통한 의미 형성이 강화되는 독서법이다. 4-4조니 7-5조니 하는 외면 사회의 관행적인 음률에 따라 낭송되는 글의 호흡과 리듬이 글의 느낌을 만들어내고 그 의미의 기조에 영향을 미친다면, 묵독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던 개인적 기억들이 내면에서 글과 어우러지면서 의미를 만들어내게 하는 것이다. 이런 묵독의 훈련은 당시 지적인 성향의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1980년대 대학가에서 널리 확산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흥회식 감성 폭발을 강조하던 교회에선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낯선 신앙 양식으로 취급되었다.  

    한편 딕 요크의 전도 훈련은, 부흥회처럼 감성이 분출하는 이벤트 전도와는 달리, 구원의 교리로 설득하는 방식의 포교법을 수련하는 것이다. 이는 성서 묵독과 맞물린다. 즉 묵독하는 이는 내면의 상처와 사투를 벌이면서 그 상흔을 극복하게 했던 구원의 논리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 논리를 타인에게 전하는 것이 전도였다. 당연히 그이는 확신에 차서 매우 논리적 어법으로 타인을 설득하는 방식의 전도를 수행한다. 한데 당시 한국교회는 이런 낯선 전도 방식의 수행자들을 가리켜 구원파라고 비아냥댔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 중 몇이 스스로를 ‘구원파’라고 주체화하면서 신앙분파들을 만들었다. 지난 2014년 침몰한 세월호를 소유한 회사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커다란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던 유병언을 교주로 하는 기독교복음침례회도 이런 ‘구원파’의 일파였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선교전문의 신앙단체들을 만들었다. 이 선교전문 신앙단체들에서 딕 요크 방식의 성서 읽기와 전도 훈련을 ‘제자훈련’이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이성적인 지적 신앙양식은 1980년대까지는 아직 일부 소수의 지식층 사이에서만 활성화될 뿐이었다. 그런데 위에서 말했듯이 1990년대에 이성적 기획이 주도하는 시대와 맞물리면서 제자훈련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그것을 주도한 것이 바로 사랑의교회였다. ‘구원파’로 낙인찍힌 이단화된 집단들과 선교전문 신앙단체들의 훈련 프로그램으로 일부 지식인 신앙대중에 국한된 현상이었던 것이, 사랑의교회와 더불어 교회의 캐릭터로 부상했고, 보다 폭넓은 교회 대중, 특히 교회들을 떠돌던 주권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음 글에서는 ‘신앙의 감성적 기획으로서의 귀족영성과 1990년대’를 온누리교회 현상과 관련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첫번째 글로, [주간경향]에는 <대형교회는 강력한 웰빙 문화공간이다>(1183호. 2016. 07. 05)로 게재되었습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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