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신학(社會神學) 탐구 2]



사회적 고통 이론의 지형(1)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총체성 : 신에서 사회로


    지난 글의 서두에서 ‘총체성’(totality)의 개념을 매개로 하여 신과 사회를 개념적으로 동일시하는 뒤르케임의 논의를 소개한 바 있다. 특히 사회가 “우리의 주관적 의지나 인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차원의 발현적 속성”, 즉 ‘외재성’을 갖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개별 행위를 제약하는 규범적 차원”, 즉 ‘강제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사실상 뒤르케임은 사회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과거 신이 누렸던 총체성의 지위가 이제 사회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신성한 실재는 사회라 불리는 바로 그것이라고 하는 뒤르케임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사회는 사회학의 탐구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사회신학’의 기본 전제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총체성에 관한 사유는 구체적 사건이나 사물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궁극적 원인에 대한 관심, 또는 ‘부분의 합 이상’으로서 개별자를 포괄하는 동시에 우선하는 전체에 대한 관심을 반영해왔다. 다만, 근대 이전에는 그러한 총체성에 관한 사유가 신을 중심에 놓고 이루어졌다면, 근대 이후에는 사회나 사회적 체계를 그 중심에 놓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변화이다. 물론 앞선 글에서도 밝혔듯이, ‘사회신학’의 기획은 신의 자리를 대체하고 등장한 새로운 총체성으로서의 ‘사회’를 존재론이나 인식론의 차원에서 곧바로 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관통하는 핵심적 주제인 ‘고통’의 문제와 연관시켜 그 신학적 함의를 탐구하는 방식을 지향한다.

    신학적 사유체계 안에서 신정론은 신론이나 구원론에 선행하는 보다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문제의식, 즉 “왜 죄 없는 이들이 이토록 지독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러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전능한 존재인 신이 정말로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라면, 어째서 그는 이런 참혹한 고통의 발생을 허용한 것인가?” 그리고 “왜 그는 그러한 고통 속에서 구원을 부르짖는 인간의 외침에 응답하지 않는가?”라는 신의 능력과 그 성격, 더 나아가 신의 존재와 그 정당성에 관한 물음으로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고통의 원인과 이유, 그 의미 등을 본격적으로 구명하는 과정에서 신정론적 문제의식은 결국 신학의 울타리를 넘어가 버리게 되는데, ‘사회정론’(sociodicy)이라 불리는 해석틀이 그러한 신정론의 세속적 판본으로 새롭게 출현했다. 사회정론이란 말 그대로 사회학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신정론이다. 브라이언 터너와 같은 사회학자는 아예 사회적 신정론을 사회문제에 관한 사회학적 탐구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사회적 삶에서의 고통과 죽음, 사고와 불운, 불평등과 부정의에 직면하는 모든 사회학은 필연적으로 신정론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 인간 가운데 불평등의 기원과 원인에 관해 질문을 제기하고자 시도하는 모든 사회학 안에 사회적 신정론의 문제가 현존한다.[각주:1]


   사회정론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현대의 사회적 고통 이론은 개인들이 경험하는 고통의 사례들이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매개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우발적인 개인의 성향이나 인격적 결함, 또는 불운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히려 사회적 고통 이론에서는 인간의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을 일반적인 사회적 관계들 및 사회적 구조에서부터 찾는다. 사회적 고통 이론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고통은 사회적 삶의 주변부에서 나타나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잘 작동하던 사회적 체계가 어쩌다 가끔 잘못 기능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수적 피해나 역기능의 효과도 아니다. 차라리 수많은 사회적 고통의 사례들은 사회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배제시킬 수밖에 없는 사회의 외부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자기동일성 구축에 필수적인 존재조건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고통은 사회에 대하여 일종의 ‘구성적 외부’(constitutive outside)의 위상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고통의 경험을 삶의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총체적 과정 전반과 연관시켜 다루는 것이 사회적 고통 이론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다. 따라서 사회적 고통 이론이 다루는 구체적인 쟁점들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이론적으로 사회의 구성 원리와 고통의 발생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사회 개념 그 자체를 중심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는 아도르노의 사회학은 사회를 부정적 총체성의 관점에서 다룸으로써 사회의 구성원들이 교환관계의 폭력 속에서 겪는 고통의 문제를 ‘사회의 객관적 운동 법칙’과 연관시켜 탐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에 사회신학에서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총체적으로 사회화된 사회


    뒤르케임을 좇아 사회를 총체성의 관점에서 접근한 대표적인 현대의 사회학자가 바로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이다. 아도르노는 일반적으로 철학자, 미학자, 음악이론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또는 ‘비판이론’) 1세대를 대표하는 사회학자, 정확히는 비판적 사회 이론의 주창자이기도 했다.[각주:2] 우리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학 비판자’ 아도르노에게 모든 현상은 전체적 연관을 위한 자신의 기능에 의존하기 때문에, 사회는 총체성으로서 분석될 수 있는 하나의 체계로 파악되었다는 사실이다.[각주:3] 그에 따르면, 사회에 대한 비판이론의 구상은 “총체성으로서의 사회에 관한 개념과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각주:4] 아도르노는 자신의 사회 개념을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반복해서 사회의 총체적 성격을 역설한다.


    “인간의 지력, 인간의 사고에 의해, 또한 이와 동시에 사회에 의해 매개되어 있지 않은 것은 태양 아래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인간의 지력이 항상 개별적인 인간 존재에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지력, 인간의 사회에 인간이라는 종(種)의 전체적인 역사가 들어 있고 더 나아가 말해도 된다면 사회 전체가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각주:5]


    “하늘과 땅 사이에, 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서 사회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사회와 겉으로 보기에 극단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는 것인 자연과 자연 개념도 자연지배의 필요성과 이와 결합된 사회적 필요성과 본질적으로 매개되어 있습니다. 사회에 의한 이러한 매개는, 사회학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회학적 관점들에서 다루게 하는 것을 포괄하게 됩니다.”[각주:6]


    요컨대, 사회는 그것이 없이는 사회학이 아무 것도 탐구할 수 없다는 그런 의미에서 사회학의 중심 개념이다. 사회 개념은 단순히 분류상의 개념이 아니며, 모든 하위의 사회적 형식들이 그 아래에 정렬될 수 있는 사회학의 최상위 등급도 아니다. 아도르노가 “하늘과 땅 사이에, 사회적으로 매개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주장할 때, 이는 총체성으로서의 사회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사회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아도르노는 어떤 이유에서 사회가 하나의 총체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에게 총체성으로서의 사회, 또는 사회적 총체성은 각각의 고유한 욕구를 갖는 개별자들이 형성하는 기능적 연관관계를 통해서 파악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아도르노는 사회를 개별 인간의 총합, 또는 사회의 각 부분들의 합을 기술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회를 과정으로서 파악하며 기능의 연관관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도르노가 말하는 사회란 그 사회 안에서 각각의 기능을 떠맡은 모든 사람이 서로 의존되어 있는 동시에 그 각각의 기능들에 의해 모든 구성원들이 총체적으로 매개되어 이루어진 전체(das Ganze)에 다름 아니며[각주:7], 바로 이와 같이 사회를 기능적 연관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사회를 총체성으로 파악하는 출발점이 된다.


    “사회는 지난날 자유주의가 생각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총체적 기능연관으로 되었다. 말하자면 존재하는 것은 타자(Anderes)에 대해 상대적인 것이며, 즉자로서는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또는 주체가 실체성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의식 때문에, 사람들은 그 실체성과 아무 구분 없이 동일시되는 ‘존재’가 틀림없이 기능연관보다 더 오래 남으리라는 단언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각주:8]

  

   “사회 개념에 의해 의도된 대상 그 자체는 합리적으로 지속적이진 않다. 사회 개념에 의해 의도된 대상은 또한 보편 대 특수로서 사회 대 그 구성요소도 아니다. 그것은 역동적인 범주일 뿐만 아니라 기능적인 범주이다. 그리고 여전히 꽤 추상적인 근사치인 이 처음 것에, 모든 개별자들이 그들을 형성한 그 총체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좀 더 나아간 조건을 붙여보자. 그러한 총체성에서 또한 모든 이들이 다른 모든 이들을 의존한다. 전체는 그 구성원들에 의해 충족된 기능들의 통일성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각 개인이 그 실존을 지속하기 위해선 모두 예외 없이 어떤 기능을 하나씩 떠맡아야만 하며, 실제로 그 기능을 지속하는 동안 이에 대해 감사를 표하도록 교육받는다.”[각주:9]  


    아도르노가 이렇게 사회 개념을 기능적 연관관계의 관점에서 제시하자 즉각적으로 그의 사회 개념이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평범한 주장의 반복일 뿐이라는 비난이 제기되었다.[각주:10] 이에 아도르노는 자신이 견지하는 사회적 총체성의 형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사회를 기능의 연관관계로 보는 결정적 근거로 아도르노는 ‘교환원리’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를 기능적 연관관계로 만드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이 바로 자본주의적 교환원리(Tauschprinzip) 또는 교환관계(Tauschverhältnis)이다. 쉽게 말해서, 교환원리/교환관계는 각기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즉 서로 동일하지 않은 모든 것을 교환이 가능한 대체물로 만들면서 결국엔 동일한 것으로 관리해나가는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아도르노의 사회 개념은 단순히 사회 일반이 아니라 현대의 ‘자본주의적 교환사회’를 지시한다는 점이 다시 한 번 명확히 드러난다. 


    “사회, 조직화된 사회는 사회적으로 조직된 인간 사이의 기능적 연관관계일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의 존재로서, 교환에 의해 규정되는 연관관계입니다. 사회를 원래부터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은 교환관계입니다. 교환관계를 통해서 사회는 사회에 특별한 의미에서 개념적으로 기초가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실재적으로도 기초가 만들어집니다. 교환관계는 사회의 개념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잠재적으로 결합시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은 조심스럽게 표현한다면, 교환관계는 확실한 의미에서 자본주의적 사회들에 뒤이어 나타날 사회들의 전제조건까지도 표현합니다. 더 이상 교환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논의는 자본주의적 사회들에 뒤이어 나타날 사회들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임이 확실합니다.”[각주:11] 


    “사회적 분화의 모든 특수한 형태들 이상으로, 시장 체계에 함축된 교환원리의 추상화는 특수한 것에 대한 일반적인 것의 지배, 그것에 포획된 구성원들에 대한 사회의 지배를 재현한다. 환원의 실행계획, 노동 시간의 획일성의 실행 계획으로 제시될 수 있는 교환관계는 사회적으로 중립적인 현상이 결코 아니다. 인간을 교환가치의 대리자, 담지자로 환원시키는 그 배후에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숨겨져 있다. 때때로 수많은 정치경제학 비판의 범주들이 직면했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여전히 기본적인 사실로 남아 있다. 총체적 연관관계의 형식은, 만일 그들이 파괴되고 싶지 않다면, ‘이윤추구’가 그들의 주관적인 동기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교환법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한다."[각주:12]  


    사회적 총체성에 관한 사유는 “그 어떤 주어진 대상의 영역들 내부에 들어 있는 사회적인 모멘트들에 관한 성찰”, 즉 교환사회가 개별적 현상들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관한 성찰을 기반으로 한다. 교환원리의 철학적 전제는 동일성 원칙이다. 바꿔 말하면, 모든 교환관계는 곧 동일성 원칙을 구현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교환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우선 교환에 참여하고 있는 서로 다른 사물들이 어떻게든 동질적이거나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교환관계에 동일성 원칙이 적용됨으로써, 동일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동일한 것으로, 즉 교환이 가능한 ‘상품’으로 변화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러한 동일시는 다양한 실재의 대상을 가리키는 ‘사용가치’를 억압하고, 모든 종류의 다양한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를 하나의 동일한 개념에 포섭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동일성의 교환원리를 통해서 모든 사회적 관계가 교환관계로 구성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상품교환 사회는 비동일한 대상인 사용가치를 동일한 관념, 즉 가치로서의 상품의 동일성이라는 교환가치 아래로 포섭하고 있는 사회라 할 수 있다. 아도르노의 말대로, “인간의 노동을 평균 노동시간이란 추상적 보편개념으로 환원시키는 교환원칙은 동일시의 원칙과 근본적으로 유사하다. 동일시의 원칙은 교환이라는 사회적 모델을 가지고 있으며, 또 동일시의 원칙 없이는 교환도 있을 수 없다. 교환을 통해서 비동일적 개별 존재나 업적들이 통분될 수 있고 동일해진다. 이러한 원칙이 확장되면 전 세계가 동일자로, 총체성으로 된다.”[각주:13]  

    따라서 개별 인간도 교환관계에 의해 총체적으로 관리되면서 전체로서 작동하는 사회에서 하나의 기능을―개별 인간 자신이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과 교환되면서―떠맡게 된다는 것이 교환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기능적 연관관계의 기본 형식이자 사회적 총체성의 본질적인 형식이라 할 수 있다.[각주:14] 단적으로 말해서, 자본주의적 교환원리/교환관계가 사회적 총체성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매개함으로써, 다시 말해 모든 개인을 타인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교환원리를 통해 어떤 개인이나 대상도 교환관계의 외부에 거할 수 없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총체적으로 통합된 사회로 작동한다. 


부정적 총체성에서 사회적 고통으로


    이렇게 하여 아도르노가 말하는 총체성으로서의 사회란 모든 사회적 관계가 교환법칙에 따라 매개되고 작동하는 사회를 지시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아도르노에게 후기 자본주의사회는 교환원리가 지배적으로 작동하는 사회, 즉 교환관계가 “총체적으로 사회화된 사회”[각주:15]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요컨대, 총체성에 위치하지 않는 사회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던 아도르노에게 총체성이란 당연히 신이 아니라 기능과 생성의 과정으로서 파악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현존하는 사회적 총체성의 본질은 교환원리를 전면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객관적 운동 법칙’에 있다는 것이다. 사회학자 아도르노에게 총체성이란 곧 사회의 총체성이다. 그런데 이때 다시 총체성으로서의 사회는 사회적 관계에 동일성 원칙을 폭력적으로 강제하는 교환원리/교환관계에 바탕을 둔 기능적 연관관계로 설명된다. 

   나아가 이렇게 교환원리에 의해 동일성의 폭력이 관철될 때 나타나는 결과를 아도르노는 ‘물화’(物化, Verdinglichung)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마르크스의 소외 및 물신숭배 개념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아도르노의 물화 개념에 관해선 다음 글에서 보다 상세히 살펴볼 것인데, 일단 그 개념을 통해 아도르노에게 있어 총체성이란 철저하게 부정적이고 비판적 의미에서의 사회적 총체성임이 드러나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도르노에게 물화는 역사에 의해 정립된, 하나의 사회적 산물로서, 반드시 사회적 총체성의 기초 위에서 설명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사회의 총체성이 더 이상 연대적으로 유지되지 않고 인간의 대립주의적 이해관계들에 의해서, 인간의 철저한 대립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점을 명확히 지적한다. 사회는 총체성이되 계급에 의한 적대적 사회관계가 그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모순적인 총체성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총체성 개념의 재규정은 사회 개념의 재규정을 수반한다. 그리하여 이제 사회 역시 “모순들로 충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 가능한 것이며, 합리적인 동시에 비합리적인 것, 체계인 동시에 파편화된 것, 맹목적인 자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에 의해 매개된 것”[각주:16]으로 다시 설명된다. 아도르노는 사회를 단순히 어떤 구조 내지는 제도로 실체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는 그 내부로부터 인식될 수 있는 것이자, 인식될 수 없는 것 둘 다라고 주장한다.[각주:17] 사회의 모순적 속성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사회’를 중의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만일 사회가 담론의 유효한 대상으로 실체화될 수 없다면, 사회에 대한 비판은 어떻게 가능할까? 실체화될 수 없는 대상인 사회를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비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관한, 아도르노의 답변은 바로 무력한 개인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통합적 사회 또는 총체화된 사회에 관한 비판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각주:18]  

    아도르노에 따르면, 고통은 어떤 집단적 규범이 이해관계들 및 개인들의 요구와 충돌한다는 사회적 사실을 표현한다. 그러한 경험들은 육체적이고 개별적이지만, 신체적인 것(the somatic)의 계기를 통해 사회에 관한 인식을 추동할 수 있다.[각주:19] 말하자면, 아도르노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행위자들로서 존재하는 인간들과 그 본질이 객관적 운동 법칙으로서만 파악되는 총체성으로서의 사회, 그 둘을 고통이라 불리는 특수한 사회적인 사실을 통해 매개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통(Leiden)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모든 진리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고통이란 주체를 짓누르는 객관성이기 때문이다. 주체의 가장 주관적인 경험, 즉 주체의 표현이 객관적으로 전달된다.”[각주:20]라고 아도르노가 썼을 때, 그는 이론이 우리의 사회적 경험을 만족시키는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이론이 또한 고통에 관한 적절한 지식을 구축하도록 시도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음에는 사회를 부정적이고 모순적인 총체성으로 파악하는 아도르노의 사회학에서 신체적 고통의 주제가 갖는 중요성을 살펴보고, 그의 고통에 관한 사유가 어떻게 현실의 모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고통들을 ‘사회적 고통’ 또는 ‘고통의 총체성’의 관점에서 접근하도록 사회신학의 이론적 실마리를 제공하는지 검토할 것이다. 나아가 호네트(Axel Honneth), 번스타인(J. M. Bernstein), 르노(Emmanuel Renault)와 같이 사회철학 및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고통에 관한 아도르노의 논의를 주목해온 학자들의 작업을 살펴보면서 동시대 사회적 고통 이론의 주요 쟁점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 웹진 <제3시대>

  1. Bryan S. Turner, For Weber: Essays on the Sociology of Fate. London: Sage, 1996, pp.170~71. [본문으로]
  2. 본펠트는 독일 학계의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운 독해’(Neue Marx-Lektüre)의 맥락에서 아도르노의 사회학 비판 내지는 비판적 사회 이론의 기획을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비판이론적 계승으로 해석한다. Werner Bonefeld, Critical Theory and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On Subversion and Negative Reason, London: Bloomsbury, 2014; 한편, 아도르노의 사회학 저술 전반에 관한 체계적인 분석으로는, Matthias Benzer, The Sociology of Theodor Adorno,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을 참조할 수 있다. [본문으로]
  3. 하르트무트 로사 외, 『사회학 이론』, 최영돈 외 공역, 한울, 2016, 149쪽. [본문으로]
  4. 테오도르 W. 아도르노, 『사회학 강의』, 세창출판사, 2014, 74쪽. 삶의 모든 영역이 자본주의적 교환원리에 의해 조건지어진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부정적 총체성으로 파악하는 관점은 마르크스주의 전통 가운데서도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에 관해서는, Martin Jay, Marxism and Totalit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5. 아도르노, 『사회학 강의』, 36~7쪽. [본문으로]
  6. 같은 책, 143~44쪽. [본문으로]
  7. 문병호, 「옮긴이 후기」, 아도르노, 『사회학 강의』, 363쪽. [본문으로]
  8.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홍승용 옮김, 한길사, 2003, 128쪽. [본문으로]
  9. Theodor W. Adorno, “Society,” trans. F. Jameson, Salmagundi, no.10-11(Fall 1969-70), pp.144~45. [본문으로]
  10. 아도르노, 『사회학 강의』, 71쪽. [본문으로]
  11. 같은 책, 71쪽. [본문으로]
  12. Adorno, “Society,” pp.148~49. [본문으로]
  13.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222쪽. [본문으로]
  14. 문병호, 「옮긴이 후기」, 363쪽. [본문으로]
  15.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413쪽. [본문으로]
  16. Adorno, “On the Logic of the Social Sciences,” in The Positivist Dispute in German Sociology, ed. T. W. Adorno et al. London: Heinemann, 1976, p.106. [본문으로]
  17. Adorno, “Society,” p.146. [본문으로]
  18. Ibid., p.153. [본문으로]
  19. “육체적 계기는 인식을 향해 고통이 없어져야 하고 상황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아픔은 ‘사라지라’는 말을 한다. 그래서 특유의 유물론적 요인은 비판적 요소 내지는 사회적인 변혁적 실천으로 수렴된다. 불행을 제거하거나 완화하는 일은, 이론적으로 선취될 수도 없고 어떤 한계를 명할 수도 없는 일정한 정도까지, 그 불행을 느끼는 개인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이 주관적으로는 인류와 분리되고 객관적으로는 무기력한 객체의 절대적 고독 속으로 밀려나게 되는 경우에도 인류의 몫일뿐이다.”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286~87쪽. [본문으로]
  20. 같은 책, 7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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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신학(社會神學) 탐구 1]



사회에 관한 신학적 탐구를 시작하며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사회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의 출현


    일찍이 고전 사회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에밀 뒤르케임(Émile Durkheim, 1858~1917)은 사회(社會, society)가 곧 신(神, God)이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사회는 종교를 통해 개인들에게 존경심을 부여하고 그들에게 경배의 대상으로 군림하는 힘이다. 따라서 그동안 종교가 말해온 신은 단지 사회의 현실적 표현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각주:1] 요컨대, 종교는 사회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상징체계로서, 궁극적으로는 사회야말로 종교 속에서 경배의 대상이 되는 종교의 본질적 실체, 즉 신 그 자체라는 것이다. 사회를 신으로 재규정하고 있는 이런 주장에 대해 신학은 과연 어떤 답변을 내놓을 수 있을까? 그전에, 뒤르케임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되었을까? 뒤르케임이 사회를 총체성의 실재로 진술하고 있는 대목을 직접 읽어보면 보다 명확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개념의 총체적 체계에 의해 표현되는 세계는 사회가 스스로에게 그것을 재현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오직 사회만이 우리에게 가장 일반적인 관념들을 제공해줄 수 있으며, 그 관념들에 따라서 세계는 이해되어야만 한다. 모든 개별적 주체들을 그 안에 포괄하는 오직 하나의 주체만이 그러한 대상을 포용할 수 있다. 우주는 사유된 한에서만 존재하고, 또한 우주는 사회에 의해서만 그것의 총체성(totality)이 사유될 수 있기 때문에, 우주는 사회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즉, 우주는 사회의 내적 삶의 한 요소가 된다. 따라서 사회는 다른 어떤 것도 그것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없는 총체적 유(genus) 그 자체이다. 총체성이라는 개념도 사회라는 개념의 추상적 형식일 뿐이다. 사회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전체이며, 다른 모든 부류들을 그 안에 담고 있는 최상의 부류인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인간과 동일하게 위치를 부여받고 분류되어지는 기초적인 분류법들이 근거하고 있는 궁극적인 원칙이다.[각주:2] 


    마치 체계이론가인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이 훗날 사회를 가리켜 “다른 사회적 체계들 모두를 자기 안에 포함하는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각주:3]라고 규정했던 것을 예고하고 있는 듯한 위의 인용 단락에서 우리는 ‘사회’라는 단어를 ‘신’으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모든 개인 주체들을 포괄하는 주체로서, 그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총체적인 유(類)가 무엇이냐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묻는다면 당연히 그런 존재는 ‘하느님’이라고 답하지 않겠는가? 위치와 분류에 있어서 최상의 범주에 속하면서 동시에 자신 외에는 그 어떠한 외부적 발생 요인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완벽한 자기 충족적 체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왔던 하느님 그분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뒤르케임은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적 신의 관념이 누려왔던 지위, 즉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전체이자 다른 모든 부류들을 그 아래 포섭하고 있는 최상의 부류로서의 존재론적·인식론적 지위는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 이제 사회에게로 마땅히 돌려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총체성의 성격과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존재는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사회라는 것이다. 신을 변형된 사회로서 기술하는 것은 신성의 전통적 특질, 즉 신적인 총체성을 사회에게 귀속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각주:4] 그렇기에 뒤르케임적인 의미의 사회가 담지하고 있는 ‘신성한 것’(the sacred)은 하나의 사회적 사실(social fact)이나 ‘사회적인 것’(the social)에 관한 하나의 현시(顯示, manifestation)를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사회의 신성함은 사회적 사실 및 사회적인 것의 현상을 넘어 사회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상징적·도덕적 질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기술된다.[각주:5] 인용한 단락의 말미에 덧붙인 주석에서 뒤르케임은 이렇게까지 말한다. “결국 총체성(totality), 사회(society), 그리고 신성(divinity)의 개념은 사실상 동일한 관념의 단지 다른 측면들일 뿐이다.”[각주:6] 여기서 우리는 뒤르케임이 독일 관념론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거대서사를 이해하는 궁극적 범주로 표현되어온 총체성의 개념을 매개로 하여 신과 사회를 인식론적으로나 존재적으로 완벽하게 동일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각주:7]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뒤르케임은 사회라 불리는 대상이 “우리의 주관적 의지나 인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차원의 발현적 속성”, 즉 ‘외재성’을 갖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개별 행위를 제약하는 규범적 차원”, 즉 ‘강제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각주:8] 물론 그는 사회가 인간의 행위와 전적으로 무관하게 존재할 수는 없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들의 차원에서 볼 때 사회는 그들의 외부에서, 규범적 제약을 가할 정도의 강제성과 도덕적 권위의 정당성을 지니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고유한’(sui generis) 실재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뒤르케임은 사회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데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뒤르케임의 사회학이 “사회적인 것의 상상계의 중요한 요소들이 ʻ신학적ʼ 기원을 갖는다는 사실을 가장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것은 “근대적 사회신학의 정점”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뒤르케임의 저작들에서 ‘사회적인 것’은 곧 ‘신적인 것’으로서 “개인의식을 초월하여 창발하는 집합 의식, 집합 열광, 연대, 도덕 등의 ʻ사회적인 것ʼ은 그 자체로 섭리에 의해 조절되는 사회학의 보이지 않는 신”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9]


   이렇듯 과거 신이 누렸던 총체성의 지위가 이제 사회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신성한 실재는 사회라 불리는 바로 그것이라고 하는 뒤르케임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사회는 사회학의 탐구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사회가 곧 오늘날 가장 생생하게 현존하는 신성의 구현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학이 하느님의 존재를 연구하던 그 방식 그대로 사회를 연구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당연히 사회학이 사회를 말하는 방식을 신학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을 수도 없다. 가능하다면 사회학과 전통적인 신학 모두를 넘어, 전혀 새로운 신학의 방법과 논리를 통해 신으로서의 사회, 또는 사회로서의 신이라는 이 문제적 대상을 탐구해야 할 것인데, ‘사회신학’(socio-theology or theology of society)[각주:10]이란 비교적 생소한 타이틀을 내건 이 연재는 바로 그러한 사유의 모험을 시작해보려는 기획이다.


    하지만 사회가 도대체 무엇이고, 사회가 가지고 있는 신성이나 신적 본질은 또 무엇인지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방향으로 섣불리 나아갈 생각은 없다. 사회와 신을 개념적으로 세세하게 비교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너무나 방대한 과제일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고전적인 신존재 논증과 유사한 형이상학적 사변의 길로 빠져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신학과 사회학의 대화를 모색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굳이 형이상학적 사변의 길로 가지 않더라도, 신학이 사회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우리 앞에 이미 펼쳐져 있다. 다시 말해, 신학이 뒤르케임의 길을 좇아서, 곧바로 신의 자리에 사회를 대신 갖다 놓지 않더라도, 사회라는 것이 신학적 탐구의 대상임을 확인시켜주는 다른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어떤 길인가? 바로 ‘고통’이라는 이름의 길이다. ‘고통’의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거기에서 신의 존재를 사유하고자 할 때, 신학은 사회라는 대상과 필연적으로 재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적 고통 : 고통의 사회적 (재)생산 이론


    고통의 문제는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정초하고 끊임없이 활성화해온 핵심적인 모티프였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으로 육화된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럽게’ 죽었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시작된 종교이다. 죄와 사망의 굴레 속에서 고통당하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그 모든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 인간의 고통과 신적인 진리 사이의 연관성을 강화했고, 나아가 인간 육체의 생리학적이고 종교적인 잠재력에 대한 관심을 증진시켜왔다. 고통에 관한 성서의 대표적 텍스트인 『욥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이미 2세기부터 그리스도교는 고통 속에 있는 육체로서 인간의 자아를 이해하는 관점을 발전시켜 왔는데, 가령 어떻게 신자들이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대대적인 박해 속에서도 고통을 견뎌내고, 그 고통을 신앙 공동체 안에서 치유할 뿐만 아니라, 고통을 통해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차원의 구원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를 변증하고자 했던 것이다.[각주:11] 그런 의미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실존적인 물음”은 철학자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가 최초로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제시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유대-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던 원초적 수준의 ‘신정론적 질문’으로 이해될 수 있다.[각주:12]


    문제는 고통과 진리의 강한 결속을 통해 획득되던 고통에 관한 실존적 의미를 그리스도교적 경험과 실천이 더 이상 안정적으로 지켜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고통과 진리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릴 만큼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신앙적 의미의 세계 안으로 손쉽게 통합시킬 수조차 없는 그런 재난, 비참, 불행, 폭력 등을 일상적·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하느님의 존재의 정당성은 물론이고 그에 관한 진술 자체의 유효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각주:13] 인간사에서 개별적으로 반복되어온 불행과 비참이 구조적·집단적 수준으로 가해지는 재난과 고통으로 발전했을 때 전통적인 신정론의 논리, 즉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이 계획하신 구원사의 거대한 목적 속에서 이루어진 그의 섭리의 결과물이라는 주장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을 계속 지키고자 한다면, 고통에 대한 책임을 결국 하느님에게 귀속시켜야만 하는데, 이럴 경우 주권자로서의 하느님 신앙은 유지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하느님을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으로 찬양하기는 어려워진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사회적 재난이나 집단적 불행을 당사자들이 저지른(물론 그것이 무엇인지는 하느님만이 알 수 있는) 어떤 숨겨진 범죄에 대한 신적인 심판 내지는 모종의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한 훈련의 일환이라는 주장이 끈질기게 제기되고 있지만, 그런 주장들은 반박의 가치조차 없는 비도덕적이고 비합리적인 종교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삶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대다수의 결정적인 고통들은 사회적인 폭력, 즉 국가와 시장으로 대표되는 정치적·경제적·제도적 권력이 인간에게 미치는 강한 구속과 압력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이러한 권력들이 대응하는 방식에서 또 다른 2차적 고통이 야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인간의 고통은 특별히 불운한 개인들에게 벌어진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빚어지는 ‘사회적’ 고통 및 구조적 폭력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고통이 체험되고 표현되는 방식을 구축하고 조절하는 모든 맥락에 구조적 조건과 문화적 관행이 결부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고통이 명백히 사회적 (재)생산의 산물로 이해되는 현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고통’(social suffering) 이론이다. 그동안 고통당하는 인간의 현실을 통해 삶의 실존적 의미와 신적 진리의 문제를 사유해온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와 같은 고통의 사회적 (재)생산의 문제와 마주함으로써 ‘사회’라는 대상에 관한 사회신학적 탐구를 더 이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신학이 그러한 상황에서도 아무 설득력 없는 전통적인 신정론의 답변을 되풀이하고 있을 때, 사회학과 사회철학, 인류학과 심리학 등의 분과에서는 고통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동시에 비가시화되며, 그러한 고통이 행위자들의 자기 정체성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나아가 사회적 고통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설명하고 사회의 변혁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갖는 실천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심도있게 논의해 왔다. 특히 주목할 지점은 고통에 관한 사회과학적 접근이 신정론적 문제의식을 재발굴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회과학자들이 전통적인 의미의 신학적 신정론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은 아닌데,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전통적인 신정론과 구별하여 ‘세속적 신정론’(secular theodicy) 또는 ‘사회정론’(sociodicy)이라 명명하며, 이를 사회비판을 위한 윤리적·정치적 모티프로 활용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전통적 신정론이 전능하고 자비로운 신에 대한 신앙과 현실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악의 문제를 최대한 논리적으로 조화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면, 세속적·사회학적 신정론은 사회적 삶에 관한 규범적 기대와 현실 사회에서의 구조적 부정의나 소외, 착취, 불평등, 빈곤, 배제, 차별, 무시 등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고통을 종합하려는 목표를 드러내왔다. 그러나 사회적 고통의 원인과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에 따라서 사회정론의 문제의식을 활용하는 양상도 차이를 보이기 마련인데, 이는 전통적인 신정론의 붕괴 이후 현대신학에서 신정론이 여러 다양한 형태로 수정 제시되는 것과도 흥미로운 평행을 이룬다.[각주:14] 


    하여 다음 호의 연재에서는 사회신학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서 사회적 고통의 문제와 사회정론의 문제의식을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서구 학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적 고통 이론의 전반적인 지형과 사회정론적 문제의식의 다양한 활용들을 2000년대 이후 민중신학의 사회적 고통 연구와 비교하면서 서로 간의 이론적 접점 및 쟁점이 무엇인지를 짚어보게 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Émil Durkheim, Suicide: A Study in Sociology, translated by John A. Spaulding and George Simpson,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2, p.277. [본문으로]
  2. Émil Durkheim, The Elementary Forms of the Religious Life, translated by Karen E. Fields, New York: The Free Press, 1995, pp.442~443. [본문으로]
  3. 니클라스 루만, 『사회의 사회』, 장춘익 옮김, 새물결, 2014, 101~102쪽. [본문으로]
  4. David Frisby And Derek Sayer, Society(Key ideas), New York: Tavistock Publications, 1986, p.35. [본문으로]
  5. Chris Shilling and Philip A. Mellor, The Sociological Ambition: Elementary Forms of Social and Moral Life, London: SAGE Publications, 2001, p.41. [본문으로]
  6. Durkheim, op.cit., p.443. n.18. [본문으로]
  7. 이 세 가지의 개념적 범주가 뒤르케임의 철학에서 서로 어떻게 연관성을 맺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Donald A. Nielsen, Three Faces of God: Society, Religion, and the Categories of Totality in the Philosophy of Émile Durkheim, New York: SUNY Press, 1998을 참조. [본문으로]
  8. 김명희, 「마르크스와 뒤르케임의 사회과학방법론 연구」, 성공회대 박사학위 논문, 2014, 241~242쪽 참조. [본문으로]
  9. 김홍중, 「사회로 변신한 신과 행위자의 가면을 쓴 메시아의 전투」, 『한국사회학』 제47집 제5호(2013년), 21쪽. 물론 필자는 뒤르케임의 ‘사회신학’과 아렌트의 메시아주의적인 ‘행위신학’을 사회 대 인간, 또는 구조 대 행위의 이분법적 틀 안에서 대립시키는 저자의 논제에 동의하진 않는다. 뒤르케임의 사회신학에서 ‘사회’ 개념이 인간 및 인간의 행위 없이도 계속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초월적 ‘신’으로 그려지고 있다고 보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뒤르케임의 사회는 인간 행위주체에 의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결과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사회-신’론은 관계론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르케임에게 사회가 인간 행위주체를 제약하고 조건짓는 신적인 위상을 갖고 있다는 지적에는 확실히 동의한다. 마르크스주의 및 비판적 실재론 전통에서 확립된 관계론적 사회 이해에 관해서는 추후에 사회 구조의 문제를 다룰 때 본격적으로 소개될 것이다. [본문으로]
  10. 사회 및 사회성에 관한 신학적 탐구의 사례로는 다음의 연구들을 참조할 수 있다. Andrew Wernick, “From Comte to Baudrillard Socio-Theology After the End of the Social,” Theory, Culture & Society, Vol.17(6), 2000, pp.55~75; John Milbank, Theology and Social Theory, Oxford: Blackwell, 2006; Rebekka A. Klein, Sociality as the Human Condition: Anthropology in Economic,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Perspective, translated by Martina Sitling, Boston: Brill, 2011. [본문으로]
  11. 고통의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수용의 역사적 맥락과 현대적 함의에 관해서는 Chris Shilling and Philip A. Mellor, “Saved from pain or saved through pain? Modernity, instrumentalization and the religious use of pain as a body technique,” European Journal of Social Theory, Vol.13(4), 2000, pp.527~530 참조. [본문으로]
  12. 조순, 「신정론에 관한 소고」, 『신학연구』 제47집(2005), 211쪽. [본문으로]
  13. Slavoj Žižek and Boris Gunjevic, God in Pain: Inversions of Apocalypse, New York: Seven Stories Press, 2012, pp.155~156 참조. [본문으로]
  14. 오늘날 가장 급진화된 형태의 신정론과 사회정론을 비교하는 작업은 이후에 신학에서의 ‘신의 죽음’ 논의와 사회학에서의 ‘사회의 종언’ 논의를 함께 살펴볼 때 보다 자세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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