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들로 세일즈하게 하라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영성 마케팅


    마케팅학계의 구루라고 불리는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의 책 《마켓3.0》은 산업사회의 ‘마켓1.0’과 소비사회의 ‘마켓2.0’에 이어 ‘마켓3.0’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보면서, 각 시대를 특징짓는 키워드를 각각 ‘이성’, ‘감성’, 그리고 ‘영성’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영성’이라고 함은 기능성이나 욕망을 넘어서 가치를 상품에 담아 판매하는 것이라고 코틀러는 해석한다. 역시 마케팅학계의 구루답게, 현상의 징후를 아름답게 그려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가 그리는 미래의 자본주의는 참 매혹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코틀러의 해석은 차라리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영성 마케팅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최근에는 코틀러의 예측처럼 비약적으로 확대되어 향후 시대의 대세가 될 것처럼 보인다. 한데 이때 영성 마케팅은 ‘종교적 신비체험의 상품화’라고 하는 게 더 객관적 지적이다. 즉 종교적 신비체험이 하나의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으로서 시장에서 매매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점술가가 복채를 받고 고객의 길흉화복에 대해 조언해주는 것이 가장 일상적인 영성 마케팅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한 스마트폰 회사 경영자는 아이폰의 등장을 스마트폰의 감성화라고 해석하면서 향후의 스마트폰에서 대중은 영성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스마트폰이 추구하는 미래 마케팅 전략은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는 고객이 종교적 신비체험과 같은 종류의 감성 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코틀러의 ‘마켓3.0’론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상품화 능력의 탁월성, 아니 전능성일 것이다. 하여 인간의 체험 중 영성까지 상품화한다는 것은 상품이 되지 않고 남은 인간의 체험은 더 이상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자아내게 한다. 하여 우리는 향후에 이런 자기계발의 명령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영들로 세일즈하게 하라!”


〈사도행전〉 16장 읽기. 정신의학과 역사학적 비평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 주목하게 된다. 이 텍스트는 ‘영성 마켓’에 관한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것은 우리 시대의 ‘마켓3.0’의 논점을 비판적으로 읽는 데 훌륭한 전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에는 ‘프뉴마 퓌토나’ 들린 여성이 등장한다. 한글 새번역 성서는 “귀신들려 점을 치는 여종”이라고 묘사되어 있는데, 그 헬라어 성서본에는 “프뉴마 퓌토나 들린 파이디스케”로 되어 있다. ‘파이디스케’(παιδισκη)는 인신이 타인에게 예속된 어린 여성을 뜻하니 ‘여종’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다만 고대로마 사회에서 여성의 결혼가능 연령이 12세 이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녀는 아마도 12세를 넘지 않은 소녀였을 것이다. 

    문제는 ‘퓌토나’(πνευμα πυθωνα)인데, 인접어인 ‘퓌톤’(πυθον)이 ‘점쟁이’를 뜻하고 ‘퓌토네스’(πυθωνες)가 복화술사를 의미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프뉴마 퓌토나’는 입을 열지 않고 말을 하는 점술사, 그 안에 들어가 점술을 하게 하는 영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 구절은 입을 열지 않고 소리를 내는 방식의 점술행위를 하는 노예소녀를 의미하는 것이겠다. 

    점술은 일종의 예지능력이다. 그것을 고대인들은 현상세계 이면의 세계와 대화하는 능력으로 보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 예지능력자가 현상세계 밖의 존재, 즉 영과 접신한 결과라고 이해했다. 하여 이 소녀는 접신자였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녀 속에 프뉴마 퓌토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사도행전〉 16장의 텍스트로 돌아가 보자. 그녀가 바울을 몇날 며칠을 쫓아다니면서 그의 사역을 방해한 모양이다. 이제까지 바울은 아라비아와 시리아, 그리고 소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했다. 특히 시리아 북부와 소아시아 동부는 바울의 활동 본거지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소아시아의 서부 해안에도 활발히 활동한 결과 바울의 주요 거점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서쪽, 이오니아 해를 건너, 생면부지의 땅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역으로 길을 떠났다. 모험심이 강한 사람이니 많이 설렜겠다. 그렇게 떠난 길의 첫 목적지가 바로 ‘빌립보’다. 과거 알렉산드로스가 난 곳, 어쩌면 바울은 이 도시가 한때 세계 정치의 중심지였던 것처럼 그리스도 복음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게 하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당도한 곳이다. 한데 이곳엔 야훼의 회당(쉬나고그)이 없다. 단지 성밖으로 흐르는 지각티스(Zigaktis) 강가 한 곳에 기도처(프로슈케, προσευκη)가 있었을 뿐이다. 이스라엘 교포사회가 형성되지 않았고 소규모의 비공식적 예배 모임 정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잠잘 곳, 먹을 곳, 만날 사람 등 모든 것이 막막했다. 그러다 프로슈케에서 루디아(소아시아 서부 지역) 출신의 한 여성 사업가를 만났고, 그녀로 인해 비로소 기식할 곳이 생겼으며 사람들을 소개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에게 또 다른 난관이 있었다. 거리에서 겨우겨우 뭔가를 말하려 하는데, 그때마다 한 소녀가 따라다니면서 그의 말을 방해한다. 그녀가 말한 ‘내용’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바울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녀의 말이 상황에 부적합한 것이라는 데 있다. 일종의 ‘경계선 장애’ 증상이 바울과 사람들과의 대화를 가로막았던 것 같다. 바울은 부아가 치밀었던 모양이다. 하여 그녀를 향해, 아니 일반적인 통념처럼 이 점술가의 몸속에 들어가서 그녀를 지배하는 영, 본문이 말하는 바로는 ‘프뉴마 퓌토나’를 향해 버럭 소리 지른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니, 이 여자에게서 나오라.” 

    한데 이 축귀 발언 직전의 그의 심사를 본문은 이렇게 표현한다. “귀찮게 여겨서”(디아포네떼이스. διαπονηθεὶς). 여러 영어 성서본들은 이 단어를 훨씬 더 강한 불쾌감과 적대감을 드러내는 단어인 annoy로 표현한다. 그녀에 대한 애틋함이 전혀 없이, 단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도로서의 소명을 방해하는 자에 대한 분노가 축귀행위로 나타난 것이다. 성서의 축귀 장면들에서 이처럼 인간애가 결여된 텍스트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 텍스트에서 소녀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이 사건 이후에 소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텍스트는 무관심하다. 오히려 텍스트가 관심 갖고 있는 것은 그녀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이 복수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필경 그녀가 점술사 길드에 속한 노예였다는 뜻일 것이다. 여기서 길드(guild)란 동직조합을 의미하는데, 고대로마 사회에서 사용된 용어로는 콜레기아(collegia)다. 콜레기아(collegia)는 지중해 해안 지역 도시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데, 인구 혼합이 크게 진척되면서 스스로의 안전과 이해를 위해 형성된 일종의 자체결사체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종족적, 종교적 콜레기아다. 하지만 국제무역이 발달하면서 동직조합 성격의 콜레기아도 무수히 만들어졌고 그것이 일종의 길드인 셈이다. 그리고 빌립보에서는 점술사 콜레기아들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소녀는 그중 한 점술사 콜레기아에 속한 노예겠다. 그렇다면 아마도 점술 능력이 무력화된 소녀에게 일어난 일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무능력해진 많은 노예들의 운명처럼, 그녀는 죽임을 당했거나 매춘업자에게 팔려갔거나 했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 그렇다면 바울의 축귀 행위는 소녀를 둘러싼 저간의 사정, 나아가 이 도시의 사정을 염두에 두지 않은 섣부른 행위로 평가될 수 있다. 

    좀더 이 도시의 사정을 살펴보자. 바울이 간과한 것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서 말이다. 이 텍스트가 주목하는 것은, 말했듯이, 소녀의 주인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바울 일행을 당국에 고발한다. 그 이유는 그녀로 인해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데 그 이후 사태의 전개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그 소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의 행동은 고작 영업 방해일 텐데, 그들은 “우리 도시를 소란스럽게 했다.”고, 일종의 소요죄로 고발했다. 일단의 도시주민들이 그들의 주장에 따라 동조시위를 했다고 하니, 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과장이 주민들에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국도 그 황당한 고발을 받아들여 바울 일행에게 체형을 가한 뒤에 구금해 버렸다. 체형이란 사람들에게 당국의 지엄함을 과시하기 위한 체벌이고, 고대로마 도시들에서 이는 죽을 만큼 혹독한 매질을 의미했다. 결국 바울 일행은 거의 초죽음이 된 몸으로 감옥에 갇혔다. 

    이런 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인가? 내가 보기엔, 이것을 이해하는 하나의 가능성은 이 도시 주민들이 그 천한 소녀에 덧씌워 있는 ‘퓌토나 프뉴마’에 대한 공격을 자신들에 대한 공격과 동일시하는 ‘무의식적 과민증상’을 집단적으로 표출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그 직전까지의 이 도시의 역사적 체험 때문에 그러하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 도시가 겪은 역사적 체험에 대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이 이 도시에 나타난 때로부터 90년쯤 전 이곳에선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인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와 카시우스(Caius Longinus Cassius)가 이끄는 10만 명의 대군과 이들을 궤멸하려고 온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12만 명의 대군 사이의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다. 정규군 전사자만 무려 2만 명이나 되는 치열한 전투였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잘 훈련된, 하나하나가 살인병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로마제국의 정예병사 20여만 명이 맞붙었다. 《풀루타르쿠스 영웅전》의 묘사를 분석하면 이 전투는 전략이 부재한 대군이 단순 충돌한 전투였다. 그만큼 치열했고 피해는 막심했다. 1세기 중반 빌립보 시의 인구는 15,000~20,000명으로 추산된다. 그들에게 이 어마어마한 전투는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전투의 희생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살아남은 자들도 죽은 자 못지않은 혹독함이 뒤따랐다. 한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후 이 도시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절대1인이 되기 위한 정치적 격변이 세 번이나 벌어졌다. 그때마다 지배층의 급격한 변동이 있었고, 그들과 얽힌 서민들의 삶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자신들의 의지나 행동과는 상관없이 느닷없이 닥쳐온 재앙, 그것에 대항할만한 아무런 수단도 가질 수 없었던 철저한 무력감,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체험, 이러한 상황에 놓였던 이들 가운데 나타나는 신체와 정신의 장애 현상으로 대표적인 것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이하 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다. 아마도 기원전 42년과 그 이후의 사건들을 경험했던 빌립보의 많은 사람들은 심각한 트라우마로 인한 PTSD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PTSD의 전형적 증상의 하나는 과거의 특정한 기억이 때로는 언어적 이미지(가령 특정 진술이나 상황)로 또 대로는 비언어적 이미지(가령 특정 색깔, 냄새 등)로 끊임없이 현재의 삶 속에 침입해 들어와(침습기억, intrusive memory) 안정된 생각과 행동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증세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이(transference)되곤 하는데, 전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무의식적 동일화’(unconsciousness identification)다. 예컨대 1980년 광주사건을 겪지 못한 광주의 후예들이 부모나 이웃 어른의 트라우마적 불안 증상을 접하면서 그것에 무의식적 동일화를 체험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때로는 간접체험자 가운데 병증적으로 감정이 전이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프뉴마 퓌토나 들린 소녀’는 그러한 병증적 전이로 인해 90여 년 전의 트라우마, 그것의 기억에 끊임없이 침습(侵襲)되는 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무속인들의 자기 진술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이나 가족, 혹은 타인의 트라우마적 기억에 대한 무의식적 동일화 체험이 영계의 언어를 읽어내는 ‘무(巫)의 감수성’을 갖게 하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이들의 ‘무의 감수성’에 의해 접신한 이가 발설하는 언어는 그 사회의 대중, 그들의 집단적 기억이 투사된 영적 언어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즉 그 접신자를 매개로 사회와 프뉴마 사이의 무의식적인 감정적 공감대가 형성된다. 트라우마적 집단기억은 침습기억처럼 그때의 기억조각을 불쑥불쑥 드러내곤 하지만 그것은 파편적(fragmented)이어서 서사성(narrativity)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PTSD를 겪고 있는 이들의 일반적 증상의 하나는 서사화(narratization)의 붕괴 현상이다. 이것은 특정 사건을 이야기로 풀지 못하는 데서부터 그런 상태가 점점 확대되어 모든 말을 횡설수설하는 식의 언어 장애를 나타내는 데까지 다양하다. 전자에서 후자로 증상은 점점 악화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한데 ‘무’의 감수성을 가진 접신자의 영적 언어를 사람들은 자신들의 단절된 기억과 동일시되는 다른 언어, 즉 환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프뉴마 퓌토나 들린 소녀의 말이 도시주민들의 억제된 기억의 환유로 여겨졌다면, 그녀의 영적 언어 능력을 무력화시킨 바울의 호령에서 사람들은 과거 그들의 부모와 이웃어른들에게 덮쳐와 언어 능력을 무력화시킨 사건들과 무의식적인 동일화를 체감했을 수 있다. 하여 바울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은 그의 언행이 그들의 무의식적 상처를 도지게 했던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이 도시 주민들에게 점술에 대한 친근감과 의존성은 크게 확대되었다. 이는 점술산업의 비약적 확대를 가져왔다. 점술자 길드가 속속 만들어졌고, 노예든 자유인이든 점술자들이 고용되었다. 요컨대 영성 마켓이 활성화된 것이다. 

    그것은 프뉴마 퓌토나 들린 소녀가 점술능력이 무력화되는 순간 점술조합의 주인들에게는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사회의 고통을 품은 소녀의 몸은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그 사회의 영성 마켓에서 창출하는 이윤만이 그녀의 가치를 대변할 뿐이다. 

    하여 점술조합의 주인들이 바울을 고발한 동기는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끊어진 것”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도시 주민들과 당국을 설득한 언어는 “우리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했듯이 그 도시 주민들의 파괴된 기억, 그럼에도 그들로 하여금 존재가 붕괴되지 않고 살아낼 수 있게 한 하나의 비결이 그들의 봉쇄된 기억을 환유적으로 나타내는 그녀 같은 접신자들의 영적 언어 때문이라고 한다면, 도시 대중은 바울의 소행을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고, 하여 당국도 그를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겠다.    


빌립보의 바울과 오늘의 교회, 실패의 내력


    이런 관점에서 〈사도행전〉 16장을 읽는다면, 우리는 오늘 시대를 보다 깊게 보는 성찰에 이를 수 있다. 필립 코틀러가 말했듯이 우리 시대는 점점 영성 마켓이 활발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영적 체험들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세일즈에 동원하라는 요구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더욱 그러하다. 우리 근대사에서 점술업 단지가 만들어진 것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피난 온 맹인 역술가들이 영도다리 밑 노상에서 점술 거리를 만든 데서 유래한다. 이후 우리사회는 거듭된 격변을 거쳤고, 특히 최근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점술산업은 엄청나게 확산되었다. 2012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점술가 50만 명, 그 매출액이 4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또한 영화나 드라마, 소설, 만화 등에서 좀비나 빙의 소재가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도 영성 마켓이 널리 확산되고 있는 증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개신교를 포함한 많은 종교들에서 영성운동 혹은 성령운동이 열광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코칭 프로그램, 힐링 프로그램 등이 종교계 안팎에서 크게 확산되고 있다. 요컨대 영성은 한국사회에서 이미 거대한 마켓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데 이러한 영들로 세일즈해야 하는 사회, 특히 영성 마켓을 거대하게 창출하는 오늘의 사회는 깊고 구조적인, 개개인으로서는 도무지 대처할 수 없이 다가오는 사회적 고통의 결과라는 데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영성 마켓의 부름을 받는다. 살아남기 위해 영적 체험까지도 마켓에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자신, 우리의 체험들, 결국은 우리의 영적 체험들까지도 그것이 발생시키는 부가가치로만 존재 의의가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프뉴마 퓌토나 들린 소녀처럼 영적 능력이 시장에서 무력화되는 순간 우리의 고용주는 우리를 용도폐기할 것이고, 사회나 국가는 그것을 묵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무능력한 존재로 전락해 버릴 때 그런 자신을 불러일으키고 자존적 주체가 되도록 일으켜 세울 내적 동력인 영마저도 그렇게 시장적 가치로 환원되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 소녀의 개인사, 그리고 그 소녀가 살고 있는 도시의 역사를 주목하지 않은 채 섣불리 그녀의 삶에, 나아가 그녀에게 투사된 그 도시사회에 끼어들었다. 선교사라는 그의 소명이 그리스도를 매개로 타인의 삶에 끼어드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방식은 타자의 삶에 끼어들기 위해서 그 자신이 그 타자가 되었다. 한데 바울은 그녀의 고통과 그 도시의 비극적 역사를 묻지 않은 채 자신의 능력을 과시적으로 드러냈다. 하여 그는 뼈저린 자기 성찰이 필요했고, 〈빌립보서〉 2장의 저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는 바로 그 자신의 처절한 자기 성찰의 기록이다. 그 성찰을 간략히 말하면, ‘자기 비움’(케노시스)이다. 

    오늘의 그리스도교도 빌립보에서의 바울의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 사회와 개인이 겪고 있는 아픔들과 절망, 그것이 환유적으로 표출된 종교성을 단순히 귀찮은 것으로 취급한다. 그리고는 너무 큰 소리로 ‘불신 지옥, 예수 천국’을 부르짖는다. 그러는 사이 자본주의는 영성 마켓을 확대하고 사람들의 삶 곳곳에 끼어든다. 그리고 나아가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영적 자원을 판매하는 자가 되라고, 영들로 세일즈해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다. 하여 피로사회에서 존재가 고갈되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가능성을 부추기는 내적 동력이 되어야하는 영조차도 자본주의적 가치의 평가 아래 귀속시키고 있다. 하여 그리스도교 복음의 실패는 결국 사람들의 고통에 다가가지 못하는 종교, 곧 그리스도교의 실패로 귀결될 것이다. □ (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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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포럼 취지

14인의 비평가와 신학자들이 지은 『사회적 영성』은 우리 사회 감성의 흐름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 책입니다. 이제 좀 더 많은 독자들과 책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그 실천적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하여 대화마당을 마련하였습니다. 지난 12월의 1차 대화마당에서는 주로 신학적 · 종교적 차원에서 ‘영성’의 ‘사회적’ 전환에 관해 토론했다면, 이번 제2차 대화마당에서는 반대로 사회적인 것 안으로 영적인 것이 도입될 필요성과 그 가능성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타자의 고통을 기억하고 신체와 언어에서 배제되어 있는 진리들에 응답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주체를 불러내기 위한 새로운 정치적 기획으로서 ‘사회적 영성’이라는 문제설정이 얼마나 타당성이 있을지를 함께 살펴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자본의 욕망을 넘어서 영성의 사회학, 영성의 정치학을 고민하는 모든 분들을 초대합니다. 


날짜: 1월 26일(월), 저녁 7시30분

장소: 한백교회 안병무홀 (서대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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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럼취지

    본 연구소는 최근 몇 년 동안 '사회적 영성'(social spirituality)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방식의 연구활동을 진행해왔습니다. 지난 해에는 이 주제를 가지고 인문-신학 아카데미에서 강좌("무통ㆍ무감ㆍ무지의 세계를 넘어: 사회적 영성으로 보는 우리 시대")를 열었던 바 있고, 그 연장선상에서 현재 단행본 비평집을 출간하고자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사회적 영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만족할만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진 않습니다. 그냥 '영성'이라고 해도 다양한 함의가 존재하는데, 거기에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니 더 정의내리기가 쉽지 않은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여 이번 제179차 월례포럼에서는 '사회적 영성'이 왜 그토록 정의내리가 어려운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물론 사회적 영성을 자기-완결적인 하나의 이론이나 개념으로서 매끄럽게 정의 내리는 시도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발표자는 '사회적 영성'이 영성적인 것, 윤리적인 것, 사회적인 것이라고 하는 상이한 개념틀을 새로운 구도 안에서 접합시킴으로써 각각의 것들에 대한 지배적인 가정, 생각, 관점, 또는 상황을 전면적으로 재배치하고, 쟁점이나 문제를 재규정하려는 비판적 문제설정에 가깝다는 것을 말해보려 합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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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취지

기업사회라 불릴 만큼 사회 전반에 대한 기업의 지배력이 강화된 오늘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전제로 공동의 운명을 결정하는 체제로서 민주주의는 퇴행하고 있다. 1987년 이후, 일인에게 집중된 권력은 분산되었지만 권력은 하나의 강고한 체제로서 자신을 재구축하였고, 바로 그 체제는 사실상 시장권력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생존하기에 급급할 뿐 공동운명에 대한 공감능력을 키워갈 수 없게 되었다.
2014년 4월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트린 세월호 사건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권력의 이동이 철저한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귀결되지 못하고 단지 기존의 지배체제 내에서의 배분에 지나지 않았고, 급기야는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국가 자체가 전적으로 자본의 지배하에 놓인 기업국가가 된 우리 현실에서 빚어진 비극이다.
이번 포럼은, 바로 그와 같은 한국사회와 상호작용하는 교회의 권력이동 문제를 영성권력이라는 차원에서 분석하고 그 대안의 방향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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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취지_

이 글에서 질문할 사회적 영성의 위치는 세월호의 상흔과 그것을 잊기를 종용하는 욕망 사이의 어느 지점이다. 자극하지 않는다면 쉽게 망각으로 끌려가 버릴 그 불균형한 힘에 개입한다.  상흔과 망각. 그 두 힘의 대립을 나는 예수의 시신이 사라진 무덤 앞에서도 발견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을 배반하고, 죽어 가던 그를 유기하고, 제각기 살길을 찾아 떠났다. 그 날의 수치를 견디지 못해 서둘러 망각으로 도망치던 제자들을 제어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약했던 그들이 어떻게 망각을 멈추고 기억을 붙잡을 수 있었을까? 스승이 이미 떠난 자리에서 진리는 어떻게 잊혀 지지 않고 살아 남았으며. 어떻게 그 모래알과 같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져 나갈 수 있었을까?  이 질문들을 사회적 영성이란 화두와 연결하며, 우리 시대의 빈무덤, 세월호의 기억을 지속하고 확장시킬 신학적 언어들을 재고해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빈무덤 앞의 제자들처럼 혼란스럽고 수치스러운 우리들 또한, 그들이 예수에 관한 기억을 놓지 않았듯, 그날의 기억을 공동체의 기억으로 재구성하고 공감의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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