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와 개신교 극우주의 1 : 서론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극우주의? 


    극우주의는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권위주의와 독재 정치를 추구하며, 약한 타자를 향한 증오와 공격적 행위를 조장하는 대중정치 현상이다. 이러한 대중정치 현상이 불타오르는 출발점에는 대중의 집단적인 ‘절망과 좌절의 상황’이 있다. 하지만 절망과 좌절에 빠진 모든 대중이 언제나 극우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중으로 하여금 절망과 좌절을 ‘공포’로 해석하게 하고 그것을 다시 누군가를 ‘증오’하고 ‘공격’하도록 선동하는 자를 통해 대중은 극우주의자들이 된다. 이때 증오와 공격의 대상은 근원적으로는 외부에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내부에서 색출된다. 그리고 색출된 ‘내부의 적’은 ‘외부의 더 큰 적’에 연계된 자라고 지목된 자들이다.

   

    한데 대중의 이러한 해석에는 굉장한 비약이 있다. 일종의 집단적 환각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 그런 비약이다. 여기서 이러한 집단적 환각의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종교적 열광주의’에서 본다. 이는 양자를 동일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종교적 열광주의는 대중의 집단적 환각작용을 가능하게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극우주의를 해석하는 데 종교정치학적 분석이 유용하다는 뜻이다. 

    아무튼 종교적 열광주의는 ‘예언자’ 또는 ‘메시아’를 필요로 한다. 예언자는 집단적 해석을 촉발시키는 자라는 점을 강조한 표현이고,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의 구원 감정을 주목할 때는 메시아가 적합하다. (이에 대하여는 이 연재의 뒷 부분에서 좀 더 상세히 다룰 것이다.)  



    한데 대중이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과 좌절 상황에 있고 예언자 혹은 메시아가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구원을 선포한다고 해도, 대중이 그것에 휩쓸린다는 보장은 없다. 다른 요소들이 필요하다. 하나의 요소는 메시아로 인한 구원의 기억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래된 것이든 비교적 최근의 것이든 상관없다. 가령 한국에서 1997년 이인화, 조갑제, 김정렴 같은 천재적인 해석자들이 박정희에 대한 기억을 구원에 관한 메시아적 기억으로 재해석하고, 그것이 그 해 대선국면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래 박정희 메시아니즘은 이후의 한국 정치사에 중요한 변수로서 자리잡았다.(이에 대하여는 이 연재의 뒷 부분에서 좀 더 상세히 다룰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 예언자 혹은 메시아의 해석과 구원론을 열렬히 전달하고 다른 주장들을 왜곡 변조시켜 어떤 다른 가능성도 무의미한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담론의 장치들이다. 이러한 담론의 장치들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회자되고 소통되는 과정에서 대중은 정치적 주체가 되곤 한다. 이렇게 대중을 극우정치적 주체로 만들어내는 장소를 나는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에 대하여는 이 연재 곳곳에서 좀 더 상세히 다룰 것이다.)




세계의 극우주의, 그리고 한국의 극우주의


    최근 이러한 극우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더욱이 그 현상이 두드러진 곳은 다름 아닌 유럽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을 경유하면서 나치즘과 파시즘이라는 극우주의 현상의 가공할 파괴력에 질려버린 유럽에서 극우주의는 발도 들여놓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한데 1990년대 이후 유럽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은 놀라울 정도로 달라지고 있다. 특히 2천년대 이후에는 극우주의의 약진이 유럽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2014년, 28개국의 3억 8,200만 명의 유권자가 참여하는 5년 주기의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프랑스, 그리스, 이탈리아, 노르웨이, 핀란드,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헝가리, 덴마크, 영국, 체코 등 많은 나라들에서 극우주의 세력이 선전함으로써 유럽연합(EU)이 생기고 처음으로 극우주의 정당이 원내교섭단체가 되었다. 한편 미국 대선국면에서 거세게 불고 있는 트럼프(Donald Trump) 열풍은 미국에서도 극우주의의 망동이 위험 수위를 향해 치닫고 있음을 시사한다.

    유럽과 미국의 여러 매스미디어들은 이런 현상에 우려하면서,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던 1930년대와의 유사성을 지적하곤 했다. 이렇게 극우주의가 약진했다는 것 자체가 우려스러운 것은 비단 광기어린 지도자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다. 보다 심각한 것은 그것이 대중현상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극우주의적 대중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위기와 공포심을 타자에 대한 증오와 공격성으로 표현한다. 1930년대와 지금의 위기는 근원적으로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야만적 광풍이 불러일으킨 것이지만, 1930년대 극우주의자들은 유태인을 향해 증오심을 표출했고 오늘 유럽과 미국의 극우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무슬림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1930년대 대중적 증오의 정치는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모두를 공멸하게 하는 대재앙으로 귀결되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의 극우주의는 어떤 재앙을 초래할지 걱정이다. 바로 그러한 재앙을 예방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극우주의를 문제제기하는 이유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폭력성에 괴로워하는 이들은 유럽인과 미국인들만이 아니다. 그리고 고통당하는 대중이 극우주의에 동화되는 현상은 다른 많은 곳에서도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그중 한국과 일본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아시아의 소제국들은 극우주의 세력이 약진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집권 세력이 되었다. 반파시즘 기조의 시민적 합의가 견고했던 서구와는 달리 한국과 일본은 극우적 세력들이 정계, 군부, 법조계, 학계, 그리고 시민사회 내에 두루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면서 오랜 기간 존속해 왔는데, 최근 이들이 결속하여 권력연합을 형성함으로써 집권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일본에서 대중의 극우화는 막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극우적 엘리트들이 결속함으로써 일으키고 있는 저 극우주의적 소용돌이에 대중이 휘말려든 측면이 강하다.


위기의 대중→극우적 대중정치→극우주의


    이렇게 대중으로 하여금 극우적 정치의 열광에 빠져들게 하는 장소들을 나는 앞에서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들’이라고 불렀다. 여기서는 ‘적’(敵)’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담론들이 춤을 춘다. ‘우리’를 둘러싸고 점점 죄어오는 적들의 압박을 막아내기 위해 우리 일상 속에 스며들어와 암약하는 적들을 색출하고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가 몰락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이런 극우적 담론들이 생성되고 유통되며 확산되는 대표적 장소들로는 대다수 종편 방송들과 극우신문들이 있다. 또 한국자유총연맹이나 대한민국어버이연합, 한국자유연합 등 극우적 시민단체들이 있으며, ‘일베저장소’ 같은 극우화된 인터넷커뮤니티 등도 최근 급부상한 극우주의 담론의 장소다. 하지만 다른 어느 곳보다도 한국을 대표하는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는 상당수의 극우성향의 개신교 교회들과, 한국기독교총연맹(한기총)을 필두로 하는 개신교 교회연합체들, 그리고 에스더기도운동본부나 선민네트워크 같은 개신교계 극우 시민단체들이다. 이들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들의 공통점은 극우주의의 ‘적’을 공산주의로 지목하고 있다는 데 있다. 최근 유럽의 극우주의가 이슬라모포비아를 축으로 한다면, 한국의 극우주의는 반공주의를 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여기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을 생산하고 ‘종북세력’에 대한 적개심을 확산시키며 그것이 행동으로 표출되도록 부추기는 담론들이 난무한다. 물론 동성애자나 무슬림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곁들여지곤 하는데 이 경우 저들은 ‘변종의 종북세력’(‘종북게이’ 같은 터무니없는 비난이 그 예다.)으로 해석된다. 즉 ‘빨갱이’가 독립변수로서의 ‘적’이라면, 동성애자나 무슬림 등은 종속변수로서의 ‘적’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대중을 극우화하는 전제조건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것은 대중의 ‘심각한 위기의식’이다. 평상시의 정치행위로는 도무지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위기감이 극화될 무렵 대중 사이에서 극우주의가 싹트곤 한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이런 위기의 대중이 다른 방식으로 주체화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가령 위기의 대중이 들고 일어나 성난 물결처럼 지배체제의 방파제를 향해 돌진하는 경우다. 이때는 ‘해방적 대중정치’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반면 ‘해방적 대중정치’가 활기 있게 작동하는 대신 ‘극우적 대중정치’가 더 활기를 띠어서 극우적 담론들을 활기 있게 생산하고 증폭시키는 순간이 오면 성난 대중은 지배체제가 아닌, 극우적 담론들이 지목하는 ‘적’을 향해 분노를 뿜는다. 1930년대 유태인이 그런 대상이라면 오늘 한국에서는 이른바 종북세력이 극우주의적 대중정치에 의해 적으로 지목된 실체다. 요컨대 극우적 대중정치는 대중의 극대화된 위기의식을 극우주의로 표출되게 하는 경로를 지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산당들'을 폐하라


    이 글은 이러한 극우적 대중정치가 작동하는 장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개신교의 로컬처치(local-church)들과 파라처치(para-church)들에 주목한다. 나는 얼마 전 출간한 책에서 이와 같은 대중적인 극우정치의 장소들에 대항하는 성서 속의 투쟁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고대 유다국 요시야 왕정 때에 ‘산당’을 둘러싼 싸움이 바로 그것이다. 

    요시야 정부는 증조부인 아하스 왕 이후 유다국에서 빠르게 진행되고 있던 양극화 현상을 억제하고 몰락한 소농을 복원하려는 대중적 개혁정책을 드라이브했다.



    그 무렵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스라엘국 유민들이 대대적으로 남하하여 유다국의 수도 예루살렘 인근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불가피하게 당시 예속농으로 추락하고 있던 유다의 농민들과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자들이 되었다. 하여 유다의 많은 토착 농민들 사이에서 이들 이민자들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유다 농민 대중의 증오감의 근저에는 속속 몰락하고 있던 소농의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고대국가로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지주세력들이 빠르게 강화되고 있던 권력을 남용하여 소농의 땅을 빼앗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요시야 왕실은 그렇게 해석했다. 하여 아하스 왕 이후 유다국의 성장지상주의가 초래한 사회 양극화를 중단시키지 않으면 사회의 몰락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본 요시야 정권은 소농을 보호하고 몰락농민의 복원 정책을 추진했다. 〈신명기〉는 바로 그러한 사회정책을 담은 왕실의 법률적 문서였다. 그리고 그런 기조의 선사 및 역사 문헌들을 편찬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1성서(구약성서) 최초형태의 문서군은 이렇게 탄생했다.

    특기할 것은 이 법률적, 선사・역사적 문서들 속에는 이스라엘의 유민들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정책이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여 요시야 왕실이 편찬한 문헌들 속에는 유다국 부족들의 조상인 이삭과 이스라엘 부족들의 조상인 야곱이 부자관계로 엮이어 있다. 즉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대중은 이삭의 후손인 유다족속들의 자녀뻘 되는 혈연관계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유다국이, 멸망한 이스라엘의 대중을 포용하는 것은 부모국으로서 의당 해야 할 당연지사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그것은, 유민들의 포용만이 아니라, 멸망한 뒤 무주공산이 된 이스라엘국 영토의 병합까지를 염두에 둔 정책이다.

    한데 문제는 많은 유다의 농민들이 소농친화적인 요시야 정부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것은 지방의 농민들이 왕실의 친서민정책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 농민에게 전달된 정보는 왕실의 메시지가 아니라 왕실에 대해 비판적인 메시지였던 것이다. 그것은 대중이 중앙의 정치에 다가갈 수 있는 주된 소통의 장이 바로 ‘산당’이었기 때문이다. 산당에서는 제사장들이 제사 예전을 수행하면서 하느님의 신탁을 전달하였는데, 그들은 지역 대지주들인 토호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산당’에서는 대중으로 하여금 대지주들의 편에 가담하여 요시야 왕의 편에 편입된 이스라엘계 유민들을 향해 증오를 쏟아 붓게 하는 담론이 생산 유포되었다. 이것이 요시야 정부가 ‘산당의 철폐’를 위한 싸움에 적극 나선 이유였다. 이렇게 제1성서 속의 산당 철폐론의 배후에는 지주친화적인 세력에 대항하는 소농친화적인 세력의 투쟁이 담겨 있다.


바알세불의 힘을 빌리다?


    제2성서(신약성서)에도 극우적 대중정치로 인한 기억의 왜곡과 편견 현상을 읽어낼 수 있는 텍스트들이 있다. 이 점에서 특히 〈누가복음〉 11,14~23이 눈에 띈다. 흔히 ‘예수와 바알세불’이라는 소제목으로 알려진 이 텍스트에서 예수가 귀신들린 이를 치유한 것을 두고 적대자들은 예수를 “바알세불(baalzeboul)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내쫓는” 자라고 비난한다. 예수를 공격하는 이러한 어법은 병행하는 텍스트들인 〈마가복음〉 3,20~27과 〈마태복음〉 12,22~30에서도 똑 같이 나온다. 그리고 이 세 텍스트들은 바알세불을 “악령들의 우두머리”(archōn tōn daimoniōn)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즉 신적 존재이지만 악령들의 최고신이라는 뜻이다.

    이 신이 이스라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매우 오래 전이다. 아마도 기원전 12~11세기 경, 이스라엘이 부족동맹체였던 시절, 이스라엘의 가장 위협적인 적인 블레셋 부족동맹체 중 에크론 족의 수호신이었다. 〈열왕기하〉 1,2은 그 신의 이름을 ‘바알세붑’(Baal-zebub)이라는 히브리어로 표기하고 있다. 물론 에크론 족의 신명이 바알세붑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슷한 발음이었겠지만 이스라엘인들은 그 신에 대해서 조롱조의 말장난을 하여 ‘바알세붑’이라고 변형시켜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변형된 조롱조의 신명의 뜻은 ‘파리떼의 바알’이다. 죽은 시신이 있는 곳에 들끓는 파리떼를 적의 신과 동일시한 것이다. 해서 〈열왕기하〉 1,2에는 이스라엘국 군주인 아하시야(아합의 아들)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을 때 야훼가 아닌 에크론의 신에 의지하여 몸의 회복을 꾀하다 죽었다는 얘기를 담고 있다. 즉 그 신은 ‘죽게 하는 신’이라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그런데 이 바알세붑의 헬라어 번역어가 바로 바알세불이다. 그러니까 예수를 비난하는 이들은 예수가 살림의 신인 야훼가 아니라 죽음의 신 바알세불에 의지해서 병자의 악령을 쫓아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세 복음서에서 예수의 적대자들은 병자를 고친 예수를 살림의 신이 아니라 죽임의 신이라고 폄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수를 비난한 자들은 누구였는가? 〈누가복음〉에는 ‘시골마을의 대중’이 그들이다. 반면 〈마태복음〉에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이고, 이 두 텍스트의 원본으로 알려진 〈마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루살렘 중앙성전 만이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율법 전문가들로, 중앙성전 이데올로기에 기초하지 않은 모든 종교행위, 특히 악령 들린 이들에 대한 구마행위를 죽음의 신의 파멸적 치유에 다름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에는 ‘예루살렘 성전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는 야훼 대 죽음의 신 바알세불’이라는 이분법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갈릴리 촌읍의 질서를 대변하는 마을 유지격되는 사람들로 예루살렘과 시골마을을 매개하는 존재들이었다. 즉 한편에서는 시골마을을 대변하는 자인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중앙의 율법해석을 번안해서 시골마을에서 실행에 옮기는 자였다. 그런 점에서 이들 시골마을의 대표자들이 예수를 적대하는 태도를 취하였다는 것은 예루살렘 중심 이데올로기가 갈릴리 촌락회당의 수호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뜻한다.

    문제는 시골의 ‘대중’이다. 모든 복음서들에는 공히 예수 주위엔 시골의 대중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예수는 그들과 더불어 먹고 마셨으며 그들에게 숱한 치유의 은사를 베풀었고 축복을 선포했다. 예수는 분명 편파적으로 시골 대중의 편에 선 예언자였으며 많은 대중은 그런 예수를 따랐다. 그럼에도 모든 대중이 예수를 따른 것은 아니다. 특히 〈누가복음〉의 텍스트는 어느 시골 마을에서 예수가 말 못하는 이를 치유했을 때 대중이 그이를 적대하였다고 전한다. 요컨대 그런 이분법의 생각을 하는 이들이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만이 아니라 평범한 대중도 그랬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예루살렘 이데올로기의 수호자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무지렁이 대중까지도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 〈누가복음〉에는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 논리에 기반을 둔 비판에 대해 예수는 그 논리의 허점을 들추어낸다. 그 논리는 단지 이념을 위해 존재하는 세계를 대변할 뿐이다. 그 이분법적 세계 속에서 보지 못하고 말 못하는 대중의 고통은 묵살된다. 종말의 때에야 치유될 것이라는 허망한 약속 아래 끊임없이 구원은 유예되고 있다. 이에 예수는 그이에게 구원을 선사한다. 그 현실의 고통에서 탈출하는 구원이다. 즉 예수가 주목하는 것은 대중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고통이다.


극우주의를 넘어서


    이 연재에서 나는 박근혜 정권에 이르는 한국사회의 극우주의적 현상의 배후를 살피려 한다. 특히 내가 주목하는 것은 한국개신교다. 그것은 오늘 한국사회가 극우주의 드라이브를 하게 되는 것, 그것의 배후에는 지속적이고 강한 영향력을 지닌 사회적 단위로 한국개신교가 견고히 자리잡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개신교 서북주의’의 등장 및 헤게모니화의 문제다. 개신교 서북주의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개신교운동이 하나의 신앙적, 사회적 주체로 부상한 것을 가리키는데, 다음 장에서 더 이야기하겠지만, 평안도-황해도의 근본주의적 장로교 신앙이 반공주의와 결합되고, 특히 이 이데올로기적 적개심이 공격적 행동주의로 재조직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나타난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나의 용어다. 이러한 ‘개신교 근본주의 신앙 + 행동주의적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의 형성은 한반도의 분단국가 형성 과정과 밀접히 연관된다. 즉 개신교 서북주의의 탄생 및 헤게모니화는 한국의 분단국가화와 얽히면서 서로를 강화하는 요소였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분단국가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개신교 서북주의의 헤게모니는 크게 약화되었다. 개신교 근본주의는 여전히 반공주의적 성향을 지녔지만 공격적 행동주의는 더 이상 신앙의 핵심적 요소로서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이 연재를 쓰게 된 주된 동기는 최근 개신교 서북주의의 부활 및 재헤게모니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MB 정권의 탄생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이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들이며, 이 세력은 동시에 MB 정부의 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이는 극우주의 정부인 박근혜 정부의 등장과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MB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에 이르는 일련의 개신교 극우주의에 대한 이해는 최근 한국사회의 극우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하여 이 연재는 한국개신교 서북주의의 전개를 따라 한국사회의 극우주의적 전개를 살펴봄으로써 극우주의가 우리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특히 그 폐해는 어떠할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극우주의의 폐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를 ‘우리’와 ‘적’으로 양분하고 그 간격을 극대화하여 ‘적’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는 대중적인 이념의 프레임이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권위주의와 친화적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파시즘으로 귀결되곤 한다. 현 한국정부는 파시즘적 정권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분명 극우적인 권위주의 정부다. 하여 집권 기간 내내 종북마케팅이라고 정리할 수 있는 공포와 증오의 정치를 통해 정권을 유지했으며 끊임없이 우리와 적이라는 이분법의 정치를 펴고 있다. 지난 2016년 4.13총선에서 활용된 ‘진실한 사람’ 마케팅도 그런 ‘우리 대 적’의 이분법의 일상화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극우주의적 정치는 대중의 안전이나 대중의 행복에 별로 관심이 없다. ‘적’의 색출에 초점을 둔 정치는 안전이나 행복보다는 증오나 척결 등과 연계된 정치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사회의 극우주의 정권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이 연재의 후반부에서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박근혜 정부를 탄생시킨 권력연합의 이율배반적 성격이 그렇다. 하지만 극우주의 정부의 집권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기고 사라져갈지 우려된다. 하여 조금이라도 그 상처에 대한 사회의 자가 .치유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우리사회의 극우주의에 대한 더 높은 경각심과 비판의식이 필요하다.

    또한 극우주의 정부는 끝나더라도 극우주의적 대중정치의 장소들은 더 오래 동안 우리의 일상에서 증오와 공격성을 부추기는 담론의 도가니로서 작동할 것이기에, 그러한 극우주의로부터 사회를 지켜내는 일 또한 오늘 우리가 짊어져야 할 주요 과제의 하나다. 이 연재는 그러한 생각을 나누고자 하는 작은 문제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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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임스강
    2016.05.31 16:0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생각을 갖게 하는 글이 되겠네요..^^ ... 앗시리아와 이집트, 바빌론과 이집트 .. 두 강대국들 틈바구니 속에서 양쪽을 잘 넘나들며 약소국 남쪽 유대를 무려 56년간 지켜냈던, 므낫세 왕, 이런 사람이 외교술의 명수가 아니겠는가? .... 한국에도 이런 술책을 주무르는 배짱 두둑한 선구자적 인물이 나와야 함!!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703379559920391&set=p.1703379559920391&type=3
  2. 개독교도
    2016.06.13 09:1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한국의 대표극우단체인 연세중앙교회에선 얼마전 김무성 에스더운동본부등 총동원되어 이슬람이나 동성애자퇴출운동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갈등을 부추기면서 결집을 하는 개신교 단체들은 종교의 세금 징수면제 법에의해 공짜로 돈벌이하면서 이미 거대한 세력으로 등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자잘한 사회일탈횅위들을 일삼는 개신교들 이모두가 종교와는 상관업없는 정치장악의도행위들이죠.
    예를들어 미스바 구국기도운동이란걸 하면서 청년들에게 위기의식을 고양시키고 진주만 폭격 그영화의 가미가제 그부분만을 편집해서 집중 보여주면서 충성을 맹세하는짓도 있었습니다.
    그명령의중심엔 윤석전이란 개신교 종교지도자가있습니다.
    정말 정치권에서 손을 보지않는다면 국가가 저런 일개종교단체에의해 통제하기 힘든 지경이 올수가있습니다.
    종교의 정치계장악은 절대로 있으면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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