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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08 [시평] 산당을 폐하라 (김진호)



산당을 폐하라[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산당’(山堂)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바마’(bamah)는 제1성서(구약성서)에서 80회 이상 등장하는데, 거의 모든 경우에 극단의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되고 있다. 도대체 산당이 무엇이길래 성서가 그토록 위험시하고 있을까? 더욱이 그렇게 위험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거의 모든 왕들은 문제의 산당 예배를 철폐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기원전 7세기 유다국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특히 기원전 639~609년 재위에 있던 요시야 왕정의 사관실로 찾아가보자. 이곳에서 유다국 역사상 처음으로 왕국 역사가 편찬되었다. 또한 선사(先史), 그리고 예언자들의 문서 등도 편찬되었다. 이 문서들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1성서의 토라(오경), 〈사무엘기 상/하〉 〈사사기〉 〈열왕기 상/하〉, 그리고 〈이사야서〉 같은 예언서들의 최초 문헌본이다.  

    이들 요시야 왕실 사관들은 유다국과 이스라엘국의 선왕들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을 ‘산당’의 처리 문제에 두었다. 이에 따라 오직 두 명의 왕, 유다국의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산당 철폐를 추진한 이로서 칭송되고 있다. 또 이사야, 미가, 호세아, 아모스 등의 예언집들에서도 한결같이 산당은 치명적인 사회문제의 온상처럼 언급되어 있다. 심지어는 왕국 시조의 한 사람인 솔로몬조차 산당을 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린 것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열왕기상〉 3,3) 그리고 모든 왕들 가운데 이 일로 가장 극렬한 비판을 받고 있는 이는 바로, 요시야 왕의 아비이자 선대왕인 므낫세다.

    여기서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산당 문제가 요시야 왕실 정치의 가장 예민한 의제였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므낫세의 정치와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요시야 왕실의 문헌 편찬 작업이 왕성하게 펼쳐지고 있는 당시에도 이 문제를 놓고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제1성서에 나오는 산당에 대한 비판적 논점은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요시야, 이 네 명의 왕 시대에 벌어진 격렬한 논쟁을 히스기야-요시야의 시각에서 기술한 결과다. 하여 이 시대 이전의 산당에 대한 기술도 이 시대의 시각에서 재평가된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산당이라는 장소의 존치와 철폐를 놓고 벌인 정쟁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주지할 것은 이스라엘 부족동맹 시대의 가장 위대한 제사장이자 예언자였던 사무엘의 본거지가 실로의 산당이었다는 사실이다.(〈사무엘기상〉 9,19) 그러니까 요시야 왕실 사관들의 주장과는 달리 모든 산당이 우상숭배의 장소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이 생기기 훨씬 전에 산당은 야훼의 전형적인 성소였다. 

    말했듯이 요시야 왕실이 문제시한 산당은 므낫세의 산당이었다. 그곳에서는 당시 유다국을 식민화하고 있던 아시리아 제국 풍의 일월성신 의례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요시야가 므낫세의 산당을 철폐한 것은 유다국 내에서 친아시리아 세력을 거세시키려는 의도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은 역사를 좀더 앞으로 돌려야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므낫세의 아비이자 선왕인 히스기야는 당시 강력한 세력으로 메소포타니아 전역과 이집트 지역을 크게 위협하던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었다가 처절하게 패배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이 전쟁 이후 히스기야는 그냥 왕위만 유지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식물통치자에 다름 아니었다. 이때 공동통치자로 그의 아들 므낫세가 등극하지만, 그 나이가 12세에 불과했으니 사실상의 권력은 아시리아를 지지하는 귀족당파가 장악했을 것이다. 필경 므낫세 모친의 가문은 친아시리아 정파의 유력 가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9년이 흘렀고 히스기야가 사망했다. 그리고 어린 므낫세는 어느새 권력의 핵심으로 성장했다. 이후 그가 단독 왕으로 다스린 기간은 무려 46년이다. 도합 55년간 왕으로 군림했던 이는 유다국은 물론이고 이스라엘국에도 전무후무하다. 그 긴 시간은 친아시리아 당파가 정국을 주도한 시기였다. 하지만 아마도 어느 때부턴가는 므낫세 자신이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유다국은 친아시리아 동맹의 열렬한 일원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히스기야식 정치가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적지 않은 히스기야의 잔당들이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한데 그가 죽은 뒤 아들 아몬이 즉위했다가 2년 만[각주:2]에 궁중정변으로 살해당하자, 민중적 농민세력(암하아레츠)이 들고 일어나 정변을 수습하고 다른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추대[각주:3]했는데, 이때 요시야를 추대한 세력은 히스기야를 추종했던 반아시리아파 귀족들과 예루살렘 성전의 귀족들, 그리고 민중세력 등이었다. 하여 이 왕은 므낫세에 반대하고 히스기야를 계승하는 정책을 폈다. 

    여기서 요시야가 왕이 되는 데 민중적 농민세력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그것은 선왕 므낫세의 정치가 친아시리아적일뿐 아니라 반농민적이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필경 그가 피를 많이 흘린 통치자라는 점(〈열왕기하〉 21,15; 〈역대기하〉 33,9)은 정적을 가혹하게 처벌했을 뿐 아니라 반민중적 정책으로 많은 농민들이 희생되었다는 의미도 포함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히스기야-므낫세-요시야로 이어지는 산당을 둘러싼 갈등의 배후에는 대(對) 아시리아 정치만이 아니라 농민의 권익을 둘러싼 정치도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요시야로 이어지는 네 명의 유다국 군주 시대에 산당을 둘러싼 격렬한 갈등의 역사가 시종 ‘몰렉 제사’ 문제와 얽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열왕기하〉 21,6; 〈역대기하〉 33,6)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몰렉 제사는 절체절명의 긴박한 위기에 처한 이들의 제사 형식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런 인신제사는 대체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한데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왕국과 이스라엘 연합군이 공격해 들어왔을 때 국가는 존폐의 위기에 놓였고 히스기야의 부친인 아하스 왕이 장자를 제물로 바치는 의례를 지냈다. 한데, 거짓말처럼 적들이 물러간 데다, 그 침공자들이 아시리아에 의해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퇴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아시리아라는 제국이 유다를 구원하기 위해 야훼가 불러일으킨 제국이라는 신앙을 낳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브라함처럼 아들을 죽이기까지 스스로를 희생한 왕 아하스의 신실함 때문이라는 여론을 낳았다. 게다가 그는 유다국 역사상 처음으로 강국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장본인이었다. 

    한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그가 유다국을 번성케 할 때, 이 나라의 기득권세력이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만을 갖춘 것이 아니라 권력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담론적 장치를 보유한 세력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대중의 수탈자임에도 대중의 지지를 유지할 수 있는 담론적 장치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산당’이라고 묘사된 ‘성소’다. 풍요제의를 드리고 온갖 사적 공적 재앙에서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신의 장소가 성소인데, 그곳이 이들 기득권층의 이해를 위해 종사하는 사제들에 의해 장악되어 대중을 포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아하스의 인신제사를 칭송하고 대중의 수탈을 정당화하는 장소가 바로 산당이었던 것이다. 

    히스기야가 이 성소, 곧 산당을 철폐하고자 했던 것은 아하스의 정치, 곧 귀족 중심의 정치를 종식하려는 것을 의미했다. 한데 이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아하스 대에 형성된 기득권 세력이 친아시리아파였고, 아시리아의 개입에 의해 반아시리아를 표방한 히스기야가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  

    므낫세의 부상은 친아시리아파의 승리를 의미했고 민중의 절망을 뜻했다. 그런 점에서 요시야의 반므낫세 정치는 곧 반아시리아 노선의 개혁세력이 부상했다는 것을 뜻하고, 대중 중심의 정치의 부활을 의미했다. 

     2013년 한국에서 산업화 시대의 전통적인 극우정부가 재집권했다. 복지를 주장했고 경제민주화를 부르짖었음에도, 이 정부가 기본적으로 기득권층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지향하고 있다는 데 의심의 여지는 없다. 알다시피 박정희 정부 때 한국에서 산업화 시대의 기득권체제가 안착되었다. 이 정부는 본래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압도적인 권력집단으로 부상한 군부세력에서 나왔지만, 1970년대 영동(강남권) 개발 과정에서 신흥부유층이 관료, 법조계, 정치계, 학계, 언론계를 아우르는 기득권세력으로 부상하게 되고, 군부와의 동맹체제를 구축하게 되면서 산업화 시대의 기득권세력이 형성된 것이다. 이후 민주화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기득권 동맹이 와해되었다가 다시 군부와 기타 엘리트 세력이 재동맹을 맺고 등장한 것이 바로 박근혜 정부인 것이다. 

    이 정부의 탄생은 다양한 요인들이 우연히 서로 얽히면서 나타난 것이지만, 국가정보원이 특정 정치세력의 집권을 노골적으로 지원하여 선거개입을 했던, 이른바 ‘국정원 사태’는 가장 전형적인 산업화 시대적인 기득권체제의 행동양식이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체제의 복사판이다. 하지만 이 정부의 다른 점은 과거와는 달리 거대한 기획자가 없는 가운데 군부, 경찰, 언론 등이 서로 공명하면서 이 사건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는 그렇게 추정된다. 한데 박근혜 정부는 현재까지 줄곧 이래적인 가공할만한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계속되는 정책적 정치적 실패와 서투름, 그리고 추문들이 끊이지 않음에도 지지율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대중을 흡수하는 장소들, 7세기 유다국의 산당 같은 장소들을 기득권 세력이 견고히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른바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가 어느 때보다 잘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론이 그 대표적인 장소다. 한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또 다른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가 교회, 특히 대형교회라는 점이다. 교회는, 고도성장기에도 주된 대중의 공간이었지만, 아직은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로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한데 민주화 이후 교회에는 대중이 없고 귀족주의적 대중정치만 남았다. 그리고 그 무렵 극우주의가 대형교회를 주도했다. 하여 교회에는 산업화 시대적인 기득권체제의 수호자들이 들끓고 있다. 오늘 교회가 또 다른 우리 시대의 산당이 된 것이다. 하여 오늘의 히스기야에 의해, 오늘의 요시야에 의해 교회는 철거될 운명이 놓여 있게 되었다. □ (올빼미)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경향신문의 1월 22일 칼럼 <산당을 폐하라>(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1222059065&code=990100&s_code=ao048)의 원고를 보완수정한 글입니다. 앞으로 경향신문과 더불어 웹진 <제3시대>에서도 연재될 예정입니다. [본문으로]
  2. 유다국의 연대계산법에서 2년은 햇수계산방식에 따른 것이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재위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새해가 되면 재위 2년째로 계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몬이 2년 만에 살해되었다는 정보로 24개월 안에 살해된 것인지 며칠 만에 살해된 것인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그는 재위한 지 얼마 안 돼서 궁중암투의 희생자가 되었다. [본문으로]
  3. 민중적 농민세력이 아몬이 죽임당한 정변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이 이들이 요시야를 추대하는 주역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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