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넘어 삶으로



심범섭



    미국 소설가 헤이븐 키멀(Haven Kimmel 1965 ~ )은 2002년 <일찍 떠남의 위안 (The Solace of Leaving Early)>이라는 작품을 출간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인 랭스턴(Langston)은 서른 살이 다 된 미혼 여성인데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박사 학위 취득 직전에 몹쓸 일을 겪고선 공부를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다. 이제 그가 하는 일은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 다락방에서 시와 소설과 다른 심오한 글을 쓰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마을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어린 두 딸 아이를 둔 젊은 부부가 총기 사고로 죽고 만 것이다. 두 아이는 갑자기 고아가 되었고 이들을 누가 돌보아야할 지 난감한 상태이다. 이때 랭스턴의 어머니가 딸에게 이 두 아이를 적어도 몇 달 동안 돌봐주라고, 시 쓰는 것보다 그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며 강권한다. 랭스턴은 그 일은 자신의 천성에도 안맞고 집필 일정과도 전혀 조화가 안된다고 하며 반발한다. 화가 난 나머지 이제 집을 나가겠다고 소리친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제 울기까지 하는 딸에게 이렇게 말하여 그의 마음을 돌려놓는다.  


하지만 사실 이건 너, 나, 심지어 그 아이들의 문제도 아니야. 이건 인생의 문제야, 랭스턴. 인생이 무턱대고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무게를 견뎌야만 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거야 . . . (But really this isn't about you or me or even those children, it's about life, Langston, the way life just bears down upon us and we are forced to withstand its weight . . .) [각주:1]  


    랭스턴 어머니의 이 말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고아가 된 두 아이를 돌보는 것 같은 큰 일, 당사자의 삶에 크게 간섭하는 일이 그 사람에 관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말에서 쓰이는 부정은 문자 그대로 부정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긍정하는 요소를 강조하고 부각시키는 한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랭스턴 어머니는 삶의 어떤 거역할 수 없는 원리, 개인을 넘어서는 원리를 딸에게 인식시키려는 것이다. 이 원리의 구체적인 내용은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빠져있고 우리가 그를 도울 수 있다면 반드시 도와야 한다’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돕는 반응이 지극히 당연함을 “강요받는다(are forced to)”라는 표현이 전달한다.  

    다른 사람을 돕는 동기가 그의 개인적 특수성이 아니라 삶의 원리라면 이때 돕는 사람의 개인성 또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삶이 본질이 될 때 돕는 ‘나’도 사라지고 도움 받는 ‘너’도 사라진다. 도움은 필요한 곳으로 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물처럼 곧바로 흘러들어갈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양의 옛 철학자 맹자가 제시한,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에 대한 논의를 떠올릴 수 있다.  


사람이 모두 남에게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령 지금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면 깜짝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며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반대로 어린아이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비난을 싫어해서도 아니다.[각주:2]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이 곤란에 처한 것을 보았을 때 반사적으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를 도와주려는 마음이 있다고 맹자는 주장한다. 사람에겐 이런 이타적인 마음의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원리를 랭스턴 어머니의 말을 참조해 삶의 원리라고 이름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맹자가 이런 이타적인 반응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곧 하나의 근본적인 원리로 여기고 있음은 그가 이 가상의 상황에서 아이를 구하는 사람의 동기를 기술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리 이얼리(Lee Yearley)라는 학자가 지적하듯이 맹자는 여기에서 돕는 사람의 동기를 부정적으로 정의한다.[각주:3] 곧 그 사람의 동기가 아닌 것을 나열하지 그 동기를 긍정적으로 집어 말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맹자는 이 동기 자체를 굳이 명시적인 표현을 통해 규정하지 않아도 자신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맹자가 언급하는 세 가지 이유, 곧 새로운 인간 관계 형성, 더 좋은 평판 얻기, 현재 평판 유지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개인과 관련이 있다. 특정한 사람과 인간 관계를 맺고 평판에 신경 쓰는 사람은 자신의 특수성을 의식하며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개인’이다. 도움을 받는 아이도 특정한 사람을 부모로 둔 특수한 개인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아이를 구할 때 이런 이유들이 부정되는 것은 돕는 사람과 도움 받는 사람의 개인성이 부인됨을 뜻한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도 그를 구하는 나도 개인이 아니다. 또한 인간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개인을 부정하는 것, 다시 말해 관계적 인간을 부정하는 것을 우리는 공동체를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인간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맹자의 논의에서 우리는 고유한 자아를 잊은 인간, 공동체적 인성을 넘어서는 인간을 만난다.  

    이런 인간에 대해 더 이야기하는 데 도움을 얻고자 신약성서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논의하고자 한다. 누가복음 10장 25-37절을 읽어보자.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는 예수와 한 율법교사의 대화가 있고 그 안에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알려진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뭔가 앞뒤가 안맞는다는 느낌이 드는 요소가 있다. 예수가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꺼내게 된 이유는 율법교사가 “내 이웃이 누구 ”냐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이웃이란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할 이웃을 말한다. 곧 내가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베푸는 사랑의 수혜자가 되는 이웃이다. 이 의미 구조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A의 이웃이 B일 때 A는 B를 자신처럼 사랑한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마친 다음 예수는 이 율법교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묻고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문답을 요약하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그를 도운 사람이다’가 되는데, 이 명제를 추상적으로 표현한다면 ‘A의 이웃이 B일 때 A는 B에게서 도움을 받았(는)다’가 될 수 있다. 이를 위에서 먼저 제시한 추상 명제와 비교해 보면 A와 B의 역할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첫번째 명제에서는 이웃이 내가 사랑해야할 사람이었다가 두번째 명제에서는 이웃이 나를 사랑한(하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말해 예수가 누구의 이웃을 정의하는 방식은 미세한 차원에서 일관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어긋남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신학적 윤리학자 폴 램지(Paul Ramsey)는 이 어긋남을 통해 “당연히 사랑받아야 하는 사람의 특성을 정의하는 것으로부터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한 사람 자신이 이웃이 되야 한다는 구체적 요구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기독교인의 사랑은 이미 존재하는 이웃이 누구인가 밝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으로서 섬기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램지는 주장한다. 저기 어딘가에 먼저 이웃이 있어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섬길 때 이웃 관계가 형성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웃에 대한 사랑(love for neighbor)”이라는 표현은 이웃이 누구인가 따지게 하므로 더 이상 쓰지 말고 대신 “이웃으로서의 사랑(neighbor-love)” 또는 “이웃적인 사랑(neighborly love)”이라는 표현을 써야한다고 말한다.[각주:4]  

    그런데 내가 사랑해야할 이웃이 이러이러한 조건으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이웃의 조건을 나 자신의 선호에 따라 선택하는 위험이 아닐까 한다. 다시 말해 내가 사랑하기 편한 사람을 ‘내 이웃’이라는 범주의 (주요) 구성원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는 그의 산상 설교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태복음 5:46-47)  


    여기에서 예수는 사랑하기 편한 사람만 사랑하는 쉬운 사랑의 예를 보여준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 간 제사장과 레위인도 이런 사랑에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편의주의적인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램지의 해석처럼 이웃이라는 범주의 선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미리 설정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가 이웃이 되는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의 특수성이 개입하지 않는 사랑, 관계적 인성을 넘어서는 사랑이며, 따라서 공동체 개념을 넘어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를 넘어선다는 것은 이 개념과 분리할 수 없는 역사, 전통, 관습, 이야기(서사) 등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이런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관점, 전제, 해석, 의미, 시간의 흐름 등도 넘어섬을 뜻한다. 비록 사람은 이야기와 의미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지만 이야기와 의미는 때로 우리가 본질적인 원리를 인식하고 그를 실천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공동체는 우리에게 소속감과 의미있는 서사를 제공하는 중요한 원천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사랑이 활달하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가로막는 경직된 범주가 될 수도 있다. 공동체는 익숙함과 편안함의 강한 인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키멀의 소설 한 구절, 맹자의 논의 한 대목, 누가복음의 한 대목을 살펴보면서 개인과 공동체를 넘어서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이 어려움이 키멀의 글과 누가복음 텍스트에 이런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비록 맹자는 사람이면 누구나 위기에 처한 타인을 반사적으로 돕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은 자신을 도움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 랭스턴이며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을 슬쩍 피해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이다. 그리고 겉으로는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그 내면에서도 전혀 사심이 없기는 어려운 것이 인간 마음의 참모습이다. 저명한 천주교인 사회운동가 도로시 데이(Dorothy Day)는 그의 자서전 <긴 외로움(The Long Loneliness)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자신의 노력에 이기적인 동기도 숨어 있었음을 이렇게 토로한다. “나는 . . .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이 세상에 내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이 모든 것에 얼마나 큰 야심과 얼마나 많은 자기 추구가 있었던가!”[각주:5] 

    그러나 완벽할 수 없다고 해서 완벽을 향한 노력, 향상을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어떤 이유로 도저히 100점 만점은 받을 수 없는 시험이라 하더라도 90점을 받는 것이 70점을 받는 것보다 더 나은 법이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대상의 특수성이 강조되는 이러한 범주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동시에 이러한 범주를 해체하고 넘어서서 삶의 원리에 먼저 주목하고 그에 바탕해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삶의 원리란 생명의 원리, 곧 생명을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원리이다. 위의 누가복음 텍스트 앞부분에서 예수가 율법교사에게 이르는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는 말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더하여 우리 곁에 이러한 성숙하고 담대한 사랑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랭스턴 어머니가 딸에게 했듯이 더 근원적인 시각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을 미처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가 율법교사에게 했듯이 이런 사랑의 예화를 들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가서 우리 이와 같이 합시다”라고 말해야 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Haven Kimmel, The Solace of Leaving Early (New York: Doubleday, 2002), 137. [본문으로]
  2. 신영복, 강의 (경기도 파주: 돌베게, 2004), 224-25. [본문으로]
  3. Lee H. Yearley, “Ethics of Bewilderment,” Journal of Religious Ethics 38.3 (2010): 436. [본문으로]
  4. Paul Ramsey, Basic Christian Ethics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0), 93. [본문으로]
  5. Dorothy Day, The Long Loneliness: An Autobiography of the Legendary Catholic Activist (New York: HarperCollins, 1952), 6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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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문서는 2011년 한백교회 성탄절 예배에서 사용했던 선찬 예식서입니다.



20111225일 성찬식

*성찬상 설치

[교회공간의 정 중앙에 테이블을 길게 놓는다. 흰 보를 덮고 그 위에 포도주 잔을 40 여개 놓는다. (증편)을 한 입에 들어갈 수 있게 썰어놓은 접시를 세 곳으로 나누어 놓는다.]


*
사회자의 멘트(김현숙)

오늘은 2000년 전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이 기쁜 성탄절에 드리는 성만찬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한 청년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만찬을 하였던 그 시간은 어떠하였을까? 그 시간에 더 살고 싶은 욕망은 없었을까? 더 좋은 세상을 꿈꾸지 않았을까? 아마도 제자들, 여인들, 후견인들 그리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인생의 회한에 젖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만찬의 시간에 삶을 생각하려 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탄생과 죽음이 만나는 성만찬을 시작하겠습니다.


1_
여는 의식

단위의 촛불을 성찬상으로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여는음악, 위의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짧은 곡: 연주자(박경민,리코더)]
[단위의 촛불을 성찬상으로 가져온다.(양미강)]


2_하늘 뜻 나누기

이어서 양미강목사님의 하늘 뜻 나누기가 있겠습니다.

아가야, 우리 봄을 기다리자[누가복음 1:46-55]”(양미강)

[이어주는 음악1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연주자(박경민,바이올린)]


3_
성만찬을 기리는 시간: 탄생을 생각하며...

낭독
(도홍찬)

너는 기다림이었다.

척박한 팔레스틴에서, 고난의 한반도에서 너는 해방의 메시아였다.

너는 기쁨이었다.

불임의 부부에게, 노산의 어미에게 너는 산고 끝에 오는 환희였다.

너는 황망함이었다.

열정에 사로잡힌 연인에게, 어설픈 신혼부부에게 너는 삶의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너는 슬픔이었다.

가난 속에서, 폭력 속에서 너는 고통의 씨앗이 되기도 하였다.

 

누군가는 사랑의 맨 얼굴을 너에게서 본다.

누군가는 무심하게 너의 옆에 그냥 서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힘들게 너의 존재를 끌어 안는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내 발견한다.

너의 얼굴은 영원의 순백이 아니라, 애욕과 세파 속에서 골이 깊이 패인다는 것을.

 

우리들은 깨닫는다.

사랑은 지독한 소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고통의 연단 속에서 삶은 지극히 깊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때로 우리는 방관하고 삶에서 퇴거할 자유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너의 탄생에 부친다.

너의 삶은 고지되거나 예정되어 있지 않다.

불안이 너의 영혼을 좀먹지 않게 하거라.

죄의식 속에서 신에게 기대지 말라.

너는 가능성이고 자유이다.

 

채워도 차지 않는 곳, 도달해도 남는 곳, 만나도 떠난 그 자리에서

하느님은 당신에게 조용히 말을 걸 것이다.

[이어주는 음악2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연주자(김선우,가야금)]

 

4_성만찬을 기리는 시간: 삶을 생각하며...

낭독(김현숙)

<이것은 김진숙의 기도입니다> @JINSUK_85 김진숙 의 트위터

-열여덟 살,옷 공장, 신발공장, 가방공장, 조선소용접공 대공분실 해고, 징역, 수배, 다시 징역, 장례 치르고 추모사 하다 보니 쉰. 20년 지기가 정리해고 반대하며 129일 매달려있다. 목을 맨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 다시 정리해고 반대하며 올라 와, 울다가 웃다가.

-땅멀미는 서서히 나아가고 있는데 허리가 아파서;; 2.퇴원날짜는 아직 기약이 없어요.

-재키, 자야할 시간일텐데, 여긴 비가 내려요. 크레인에선 아주 작은 빗소리도 크게 들렸는데 창을 열어보고야 비가 오는 줄 알았네요. 재키한테 김장김치를 보내주고 싶단 생각을 자꾸해요.^^

-크레인이 24시간 흔들렸거든요. 바람불면 멀미도 심했구요. 그런데서 살도록 몸이 이미 적응을 해서 이제 정지한 것들을 못견뎌 하는 거 같애요. 사람 몸이 참 희안하면서도 신비롭습니다.^^

-오전에 노사 잠정합의 했습니다.자세한 합의내용은 조합원 찬반투표 과정에서 공개가 될 거 같습니다. 300일 넘게 기다려 오셨는데 몇 시간만 더 두근두근 기다려 주세요.^^

낭독(이종원)

<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 입니다> 누가복음 22.41~45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5_
성만찬

이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성찬상을 중심으로 둥글게 서시기 바랍니다.

성찬 테이블에 둘러선 채 배병과 배잔을 동시에 다함께 그리고 자유롭게 하려고 합니다.

우선 잔을 들으세요. 그리고 양미강목사님께서 건배사를 해주시면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 떡 을 집어서 원하시는 분에게 다가갑니다.

우선 눈빛을 나누세요. 그리고 그 분에게 다가가서 속삭이듯이, 위로와 축하의 말을 건네세요. 그런 후에 또 다른 분에게 다가갑니다. 적어도 두 분 내지 세 분을 만나십시요. 다가가면서 상대방에게 떡 과 위로 그리고 축하의 말을 건네세요. 테이블보를 거두어주십시오.

[성만찬이 차려진 테이블보를 걷는다.(김봉숙,최종봉]

[건배사
:포도주와 빵을 들고 성찬의 의미를 되세김(양미강)]

[배경음악: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중주:연주자 (박경민,김선우)]

떡과 포도주 못 드신 분 계신가요? 다 드셨으면 제자리로 돌아가시겠습니다.

이제 오종희 선생님의 낭독이 있겠습니다. 

 

5_성만찬을 마치는 기도: 죽음을 생각하며...

낭독(오종희)

태어나 이 땅을 꾹꾹 밟고 살아가야 비로소 전해지는 메시지가 있는 것처럼 죽어 이 땅 밑에 꾹꾹 밟혀 묻혀야 비로소 전해지는 메시지도 있습니다. 구원을 갈망하는 우리는 이천년 전 당신이 죽음을 거뜬히 초월한 구세주였음을 기억한다 하지만 당신 앞에 놓인 잔 하나 옮기지 못하는 걸 보면 당신도 비존재의 충격 앞에 그저 순응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오늘 당신의 생일에 죽음을 생각합니다. 보통, 아이들의 돌잔치에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천년만년 영화가 보장된 어느 나라 왕족처럼 아이도 부모도 화려한 드레스를 걸칩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돌잔치는 점점 디즈니랜드 성처럼 반짝거리는 환타지를 닮아갑니다. 부모의 주머니를 털어 안간힘을 다해 몇 시간 동안의 구원을 구매하고 소비 하는 겁니다. 성탄절에 죽음을 말하는 건 그런 유사 구원을 거부하는 최소한의 각성 장치인지 모르겠습니다. 뻑뻑한 삶을 살다 보면 때론 유사 구원도 반짝거리는 환타지도 필요 하건만 당신에게서 만은 다른 것을 원합니다. 당신의 탄생에 죽음을 생각하고 당신의 죽음에 삶을 생각 하겠습니다. 옛날 옛날에 무력한 핏덩이로 태어나 외면 받은 삶을 살다가 권력의 폭력으로 살해당한 당신의 메시지가 왜 아직도 읽혀지고 전해지는지 생각하겠습니다.


너무 높이 고양되어 우리가 이름 부르기도 불경한 신이 아닌 죽임 당한 구세주로서
,

아파하는 자들과 힘없는 자들과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과 함께 기꺼이 상관는 그런 주로 임하소서, 예수여~.

[이어주는 음악 (박경민,리코더)]

이제 테이블보를 다시 덮어주시고 촛불을 다시 단으로 가져감으로서 성만찬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6_맺는 의식

[성만찬이 차려진 테이블보를 닫는다. (김봉숙,최종봉)]

[촛불을 다시 단으로 가져간다. (양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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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처에, 당신, 당신, 당신들 뿐


(연구집단 CAIROS)



 태초에 말이 있었다.

 나는 항상 이 문장이 궁금했지만, 왜냐는 물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어떤 말이었을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내게 일어났던 ‘어떤 일들’, 그리고 그 ‘일’들에 대한 내 ‘감정들’까지 나는 말할 수 없었으니까.
 “말하지 마. 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십 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온 금기는, 내게 사랑하는 것보다도 먼저, 나를 사랑해주는 모두에게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를 가르쳤다. 단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숱한 사례로 교육받아왔다. 나의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곳은 오로지 나 자신, 그리고 아무도 없는 어둠 속ㅡ장롱 안 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장롱 안에 있었다. 장롱 안에서 말을 던지면, 목소리는 뿌연 안개와 같은 메아리로 내게 돌아왔다. 나는 그 목소리가 좋았다. 그래서 자주 나에게 묻고, 나에게 대답하는 식으로 어둠에 대화를 걸었다.
 장롱 안은 어두웠지만, 문틈의 빛줄기가 칼날같이 날카롭게 반을 가르는 곳이기도 했다. 장롱 안에서 나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는데, 가끔 누군가에게 발칵 문이 열릴 때면, 하릴없이 튀어나와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하지만 혹시나 백마 탄 왕자님이 마음 넓게 귀를 쫑긋 세워줄지도 모르니까. 빛줄기가 문 앞에 선 누군가에게 가려져 완전한 어둠이 될 때, 나는 공포와 설렘으로 마음이 뛰곤 했다.

 죽음과 삶이 있다.
 언제나 단절된 것이었을까. 나는 이것도 궁금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어둠 속이었으므로, 나는 생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는 죽음이 내게 가까웠고, 나는 장롱 속에 들어가듯 죽음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죽음을 동반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알지 못했지만, 확실히 삶은 죽음보다 훨씬 먼발치에서 그 자신을 방조하고 있었다.

 삶은 언제나 나를 짓눌렀지만, 죽음은 늘 따뜻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죽음에 귀 기울였다. 그러면 죽음은 슬그머니 다가와 내게 말을 들려주었는데, 그건 반쯤은 우렁찬, 검은 강의 물소리였다.

 
1.

 여자의 강이었다. 《The Hours》(스티븐 달드리, 2003)의 강이라거나, 《시》(이창동, 2010)의 강이라고만 부를 수는 없는. 두 여자가 내처 몸을 맡긴 것만큼 중요했던 건, 그들의 편지였다. 각각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고 있었고, 그와 함께 세상과, 그녀들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는 《The Hours》에서 낭송되었던 것과는 다른, 버지니아 울프의 실제 유서 중 한 단락이다.

“(전략)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 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했고, 당신[각주:1]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애를 느껴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녀가 죽음을 선택한 건, 정신병 때문이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죽어갈 생명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강물에 발을 내디뎠을 때, 그녀와 함께 했던 건 단 한 장의 편지-그리고 편지를 읽는 하나의 목소리, 그러니까 내게 다가온 ‘말’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의 저작 『자기만의 방』에서,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을 상상했었다. 셰익스피어만큼의 열정과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녀의 ‘불우한 성별’은 그녀를 예술가로 만들어줄 수 없었고, 끝내 그녀는 이름 없는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의 상상은 단지 비극으로 그치지는 않았다. 오히려는 희망찼는데, 그건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에게 언젠가 이름을 불러줄, 그리고 이름을 넘어 그녀 자신만의 방, 누구에게도 점유되지 않는 그녀만의 온전한 몸을 돌려줄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만약 한 세기가 더 지난 후, 우리 모두에게 일 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신만의 방이 주어지고, 우리가 자유를 습관으로서 가지고, 또한 생각하는 그대로 글로 써내는 용기를 지닌다면, 현실 속 서로의 관계에서 인간을 파악하고, 사실을 사실로서 바라보고, 우리를 이끌어줄 팔은 없으니 결국 홀로 걸어가야 하며, 현실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인식한다면,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이었던 죽은 시인은 그녀의 버림받았던 육신을 다시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 믿습니다.[각주:2]

 여기에 하나의 진실이 있다. 버지니아는 글로써 저항하다가 절필과 동시에 몸을 던졌고, 그것은 분명 삶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삶들을 사랑하는 의미였다. 그녀에게 ‘몸’은 매초마다 펌프질하는 심장이 아니었다. 오히려는 언제든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물로) 걸어가는 것은 오로지 ‘홀로’였음에도, 걸어갈 ‘육신’은 다른 이들의 자가 인식을 통하여, 그러한 인식들이 뒷받침되는 세상을 통하여 다시금 획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생명을 위한 자살’이라는 건 결코 모순이 아니었다. 온몸을 던진 그녀의 투쟁을 통해, 그녀는 재차 반전과 평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혼들에 대한 인식의 울림, 거듭된 각성에의 요청이었다. 오로지, 생(生)들을 위한.
 이러한 맥락에서, 《시》의 <아네스의 노래>는 물에 뛰어든 소녀의 육신을 되살려냈던 진정 시/노래였다. 누구의 귀에도 와 닿지 않았던 소녀의 말은 무던히 허공을 떠돌다가 이윽고 미자(윤정희 역)와의 시/노래로 드러난다. 그제야 그녀는 그녀의 사랑했던 것들과 작별 인사를 건넬 목소리를, 그리고 몸을 얻게 되는 것이다.
 미자는《시》에서 항상 두 차원의 공간을 떠돌아다닌다. 남성성이 지배하는 일방적 권력의 현실과, 그녀와 사물이 편견 없이 공존하는 시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양 쪽 모두 언어의 장이었고, 실제로 그것은 분명히 드러나지 않도록 혼재되어 있었지만, 양쪽의 경계가《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던 건 미자의 망각 덕택이었다. 그녀는 현실을 끊임없이 망각했고, 그 망각의 순간동안 대신 그녀는, 그녀가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 집중했다. 꽃, 새소리, 나무, 살구…미자는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살피며 글들을 메모했고, 그것은 바로 그녀가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그리는 방법이었다. 동백꽃을 단순한 조화가 아니라 짙은 고통으로 보고, 살구를 땅으로 뛰어들은 하나의 몸으로서 대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소녀가 뛰어들었던 강을 만났을 때 그녀의 메모지를 채운 건 어떤 글귀가 아니라, 단지 물방울이었다. 침묵이 아닌 깊은 애도, 말로서 꺼내질 수 없는 하나의 슬픔을 그녀는 마주쳤던 것이다.
 <아네스의 노래>는 그녀와 소녀의 고통으로 탄생한 노래다. 생전에는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두 여성이, 서로의 고통이 겹쳐지는 순간, 현실과 시 양자의 관계를 뒤바꾸어 놓는 몸의 말을 발화하는 것이다. 시는 작중에서 언제나 무시당하기 일쑤였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 그 어떤 논리로도 접근 불가능한 것, 즉 정복할 수 없는 잉여의 것으로 남는다. 시를 쓰기 위해서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강사의 말은 “어렵다”에 내포된 논리와 해석의 위계들을 단숨에 무력화시킨다. 바로 이 안에서 ‘말’이 떠오른다. 어떤 이해관계에도 포섭되지 않으면서, 순수하게 관계를 마주할 수 있을 때, 우리들의 몸 저 쪽 끝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고통의 소리.
 성서의 누가복음 7장에는 한 청년이 등장한다. 과부의 아들로 지칭되는 이 청년은 죽어 관에 실려 나가는 중이었다. 예수가 관에 손을 대고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했을 때, 청년은 일어나 앉아 ‘말’을 했다고 한다. 죽음에서 막 깨어난 그가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각주:3] 
 과부의 아들로서 어떤 삶을 살아냈을 지, 그 이른 나이에 어떤 이유로 죽었을 지, 아무도 몰랐지만, 예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 고통들을 감싸 안고, 그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렀을 때, 그는 이윽고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다. 몸의 일어남과 동시에 터져 나왔던 그 말들은, 어떤 말이었을지 감히 추측할 수도 없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은 바로 고통 자체, 몸 자체인 말이었다는 사실이다.

2.

 그리고 말은 흐른다. 편지가 끝난 후에도 강은 여전히 흐른다.
 여기에서 물음은 남는다. 이 물소리는 왜 미자에게만 들렸을까. 소녀의 어머니조차 다가서지 않았던 곳에, 소녀와는 일면식도 없었던 미자가 그 자리로 다가갔을까. 혹은, 왜 버지니아 울프가 죽었어야 했을까. 전쟁터와는 다소 먼 시골에서 살았던 그녀가, 그녀 자신과는 상관이 없었던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왜 그녀를 던져야 했을까. 혹은…그 청년으로 하여금 말하게 한 것이 왜 예수였던 것일까. 잉여의 물음에 잉여의 언어로 대답한 것은, 이 ‘강’에 대해 오래 생각했던 유하였다.

사라지는 것만이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서둘러 노을의 하늘을 갈아치우는 잠자리의 눈동자
흔들릴 때마다 나뭇잎 속에 깃드는 푸른 신성같은 것,

세상은 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지만,
끝내 그 어디에도 다다를 순 없었다
가는 곳까지만 길이었을 뿐,
덧없는 물살에 덧없는 마음의 지느러미만
하릴없이 놓아 주다가

다만 물고기는 간데없고 남아 있는
비늘의 번득임만 안타까이 건져 올리듯
기어코 그리운 사람 하나 떠올릴 때,
사라짐보다 더 아픈 정지의 순간이 오고
치자꽃 향기 밟으며
온 강에 멎을 듯 내려앉는 별빛의 나비떼

스쳐가는 바람이 거기 없었다면
송두리때 제 넋을 흔들어 구원받는 갈대를
누가 알기나 했으리[각주:4]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의 목소리가 도저히 사회의 그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시》에서 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숨 막힐 듯 사방을 가로 막은 남성들의 목소리들 사이에서 미자의 말은 어디에도 가 닿을 수 없었다. 실은 버지니아 울프와 미자도, 전쟁터에서 죽어갈 사람들, 그리고 강으로 뛰어든 소녀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조차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도처에 흐르고 있지만 여전히 들리지 않았던 말들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단지 스쳐지나갈 뿐, 어느 순간 있었는지도 모르게 잦아들을 뿐인 바람이 있었기에 갈대가 보였던 것처럼.


3.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다시 읽는다. 여기에서 그녀의 말을 들었다. 나는 내 몸의 상처를 자극적인 서사로 재구성해 던지곤 했는데, 그건 타인을 향한 발화의 두려움에서 발로했던 자기방어였다. 어이없게 웃으면서 술안주 삼아 던지는 이야기들에는 내 감정이 없었고, 따라서 내 말도 없었다. 모든 고통을 배제시키고 사건들만 부각시키는 서사적 말하기는, 여전히 나의 고통을 진짜 ‘고통’으로 수용하기를 보류하고 있었다.
 고통을 말하기. 고통으로서 말하기. 그리고 고통을 위해 말하기.
 장롱에서 말하고 장롱에서 돌아오는 내 자폐적 서사를 깨뜨렸던 건 오로지 그녀의 말이었다. 한 세기를 건너 나와 공감할 수 있었던 그녀의 말은 나로서 내 고통마저 사랑하게 만들었다. 이 상처들로 인해서 말할 수 없었지만, 말할 수 없었기에 그녀의 말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녀의 말은 한 세기를 건너, 그보다도 더 멀리 계속해서 살아 숨 쉬고 있던 것이다. 더 넓은 진폭으로, 보다 많은 생을 만나기 위해. 그렇다면 FTA를 반대하는 말들, 쌍용차의 해고를 규탄하는 말들을 포함하여, 전-지구적으로 외쳐지는 반(反)생명에 대한 우리의 울림들도 결코 공중에서 흩어지는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모든 말들은 강물처럼 도처에 흐르고 있다가, 또 다시 말 못하는 이의 귀에 희망으로 닿으리라.


4.


 태초에 말이 있었다.
 몸이 태어날 말이었다. 머리가 아니라, 고통이, 사무치는 아픔들이.

 그러므로 내가 만났었던 것처럼, 그 어떤 죽음에도 침묵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생보다도 훨씬 가까운 곳에서, 생만큼이나 우렁차게 외쳤던 볼륨이었다. 오로지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기 위하여, 더 큰 삶을 사랑하기 위하여 말이다. 그리고 그 말 안에서 바로 내가, 우리가, 태어났던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편지는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 직전, 그녀 인생의 동반자였던 레너드에게 부친 것이었다. [본문으로]
  2.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본문으로]
  3. 2010년 9월, 충정로 맑은샘교회의 렉시오디비나 성서 나눔에서 공유된 이야기임을 밝힌다. [본문으로]
  4. 유하, 「7월의 강」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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