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에 깃든 해체성[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한신대 겸임교수)

 


 

    종교개혁은 신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을 선언한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유럽이 국민국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던 도화선이었습니다. 그 후 유럽은 국민국가의 틀 속에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경쟁적으로 도입하게 됩니다. 즉, 근대의 가장 큰 외형적 특징은 국민국가와 자본주의의 확립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의 시작이 종교개혁이었다는 것이죠. 이것이 종교개혁이 갖는 정치-사회학적 의미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위에서 언급한 종교개혁을 둘러싼 해석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종교개혁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이 실제로 이렇게 거창한 목적의식을 갖고 종교개혁을 진행시켰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실제로 루터는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양분되는 종교개혁 이전의 유럽과 이후의 유럽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소박하게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을 뿐이죠. 이런 자기의 시도가 중세의 종말을 고하는 비약적 사태로 확대되는 것에 대해 루터는 적잖이 당혹스러워 하지 않았을까요? 

    1517년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의 문에 붙여 놓은 95개 논제로 된 “면제부의 효력에 관한 반박문(Disputation)”에서 루터는 면죄부의 효력을 지적하는 95개 논제를 제시했습니다. 루터의 반박문이 파괴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인쇄술의 발달이 한몫을 차지합니다. 1450년경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루터의 반박문을 독일 전역으로 확장시키는 데 일조하였습니다. 원래 루터의 반박문은 라틴어였으나 독일어 번역으로도 인쇄되어 전파되면서 독일국민들에게 넓리 읽히면서 반향을 일으켰는데 아마도 루터는 그 파급력에 적잖이 놀랐을 것이고, 이를 계기로 독일어 성서번역에 대한 상상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저는 비텐베르크 대학교회에 붙은 95개조 반박문은 종교개혁의 예고편이었고, 진정한 종교개혁은 루터의 독일어성서 번역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중세 천년을 지배했던 라틴어 성경, 라틴어 강론, 라틴어로 구성된 각종 교회언어들에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즉 텍스트에 대한 해체가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으로 도모되기 시작한 것이죠.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대타자의 목소리, ‘아버지의 이름으로’상징되는 교회의 권력은 일차적으로 경전이 갖는 권위와 숭고함으로부터 나옵니다. 하지만, 루터에게 있어 믿음이란 교회의 권력과 전통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이란 성경의 믿음뿐입니다. 루터는 이 믿음을 기초로 교회와 사회와 문화 활동 전반이 운영되기를 기대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급선무였고, 이러한 신념아래에서 루터는 성경번역에 착수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성경에 대한 번역은 당시로서는 그 자체로 교회 권력에 대한 도전을 의미했습니다. 언어란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사고의 방식과 삶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이런 이유로 역사에 등장했던 거의 모든 권력은 언어를 지배하고자 했습니다. 언어가 곧 정신이기에 그렇습니다. 루터 당시 라틴어는 1000년 가까이 전 유럽을 지배했던 삶의 조건이자 전제였습니다. 권력은 이에 대한 누수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루터의 독일어판 성경은 교황의 명령으로 독일 전역에서 소각되어졌고, 영어로 성경을 번역했던 윌리엄 틴텔(1484-1536)은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언어가 단순한 담화의 도구가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와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루터에 의해 감행된 독일어 성서 번역은 신앙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견인하면서 중세의 해체를 선언한 사건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루터가 외쳤던 Sola Scriptura! (오직 성서!)가 해체주의자 데리다의“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각주:2]라는 말과 상동성이 있다고 봅니다. 통상 해체주의는 파괴, 전복,폭력 등의 용어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어렵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데리다를 옹호하는 학자들마다 제일 먼저 시도하는 것은 해체주의에 대한 선입견을 불식시키는 작업입니다. 데리다에게 있어 해체란 즉물적인 의미에서 무엇인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 해체란 기존 텍스트 안에 묻혀있었던, 저자 조차도 의도하지 못했던 진실을 발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텍스트 해석의 지평을 확장하는 과정 혹은 절차 일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데리다가 지니고 있었던 문헌학자로서의 특이한 이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후설, 하이데거, 소쉬르 등의 책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기존의 관점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그들의 텍스트를 읽어냅니다.[각주:3] 데리다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Timaeus』를 읽으며 플라톤조차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코라(Khora)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각주:4] ‘코라’는 조물주인 데미우르고스가 우주를 창조 할 때 물질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세상은 이데아의 모방(imitation)이고, 세상속에서 이데아가 구현되는 터, 질료, 대지가 바로 “코라”입니다. 이데아가 질서(Order)라면 코라는 혼돈(Chaos)을 상징합니다. 흔히 서양 철학의 오래된 질문이라 할 수 있는 형상과 질료, 주관과 객관의 조화란 범박하게 말하면 이데아를 코라에 이식함으로 코라의 혼동을 극복하고 현실가운데 안정과 질서, 그리고 통일을 가지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데리다는 플라톤 스스로도 의도하지 못했던 코라의 의미를 찾아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발견한 것이‘코라 없이는 이데아도 없다’는 것입니다. 코라는 지금까지 논외의 영역이었고, 단지 이데아가 발현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것으로 치부되었었는데, 데리다의 꼼꼼한 텍스트 분석에 의해 코라는 이데아 못지않은 위상을 부여받게 된것이죠. 코라에 이데아가 심겨져야 비로소 그것이 발현되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렇듯 그동안 묻혀있었던 텍스트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 혹은 그 과정 일반을 데리다는 ‘deconstruction’이라 불렀습니다.  

    데리다의 해체를 좀 더 해석학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존 재현의 형이상학은 텍스트 밖에 로고스로 상징되는 빛이 있어 텍스트 안으로 그 빛을 비추어 텍스트 속에 숨어있는 천상의 진리를 발견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자궁에 있는 태아가 탯줄에 의지해 산모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천상의 진리인 이데아는 이성의 원리인 로고스에 의해 인도되어 텍스트로 들어와 진주처럼 박혀 있는 것이죠.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진리들을 우리의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것을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이라 부르는데, 데리다에게 있어 로고스중심주의는 플라톤이래로 서구철학을 근거짓는 지침이었습니다. 로고스중심주의 하에서는 ‘말하는 것’(시니피앙)과 ‘말하려는 의미’(시니피에)가 일치합니다. 이것이 대상과 인식의 일치, 주관과 객관의 통일을 매개하여 진리에 대한 확증을 보증하면서 서구 형이상학을 지탱하는 믿음으로 자리잡았던 것입니다. 데리다는 이러한 로고스중심주의가 이룩한 연쇄고리를 서구 정신사가 성취한 허상이라 지목하면서 그것에 대한 해체를 주장하였던 것입니다.[각주:5]

    데리다가 텍스트 밖에서 텍스트를 짓누르는 로고스 중심주의에 저항하면서 텍스트의 의미를 재조명했던 것처럼, 루터의 독일어 성서번역은 텍스트 밖에 존재하면서 텍스트를 강제하던 교회의 권력과 라틴어 중심주의에서 텍스트를 해방시켰던 사건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텍스트를 텍스트이게 끔 했던 사건, 즉 텍스트 스스로가 말하게끔 선언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갇혀 있었던 성서해석의 올무를 풀어줌으로써 말씀은 드디어 회중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각 사람들과 소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각각의 이해와 반응과 행동이 첨가되면서 성서는 이전의 사물화되었던 경전이 아니라 비로소 살아 숨쉬는 말씀으로, 박제화된 관념이 아니라 이 땅을 변혁시키는 사건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은 이러한 영감을 우리들에게 선사하면서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성서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 땅의 변혁을 꿈꾸게 합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감리교 기관지 <기독교세계> 4월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본문으로]
  2. “There is nothing outside of the text”-Jacques Derrida, Of Grammatology. Corrected edition. Trans. Gayatri Chakravorty Spivak ,(Baltimore and London: Johns Hopkins Press, 1997), 158. [본문으로]
  3. “내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독해하고자 했던 방식은 이러한 유산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반복하고 보존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떻게 그들의 사유가 작동하고 있는지 또는 작동하지 않는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그리고 그들이 남긴 언어 자료 안의 긴장, 모순, 이질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그런 하나의 분석이다”- Jacques Derrida, Deconstruction in a Nutshell. Ed. John D. Caputo,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97), 9. [본문으로]
  4. “나는 플라톤을 연구하는 매 순간마다 그의 작품 안에 있는 이질성(heterogeneity)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티마이오스에 등장하는 코라가 어떻게 플라톤이 전제하고 있는 체제 속에서 양립할 수 없는지 찾으려고 한다. 나는 플라톤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플라톤을 충실히 이해하기 위해 그의 작품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을 공히 분석한다.”- Ibid. [본문으로]
  5.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18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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