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성서 뒤집어 읽기』

지은이 : 김진호

펴낸날 : 2010년 7월 14일
페이지 : 286쪽
정  가 : 12,000원
펴낸곳 :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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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김진호 저자가 뒤집어 읽은 성서에는 성적 억압, 가부장주의, 보수적 민족주의, 보복의 정치, 권력과 지배 이데올로기의 야합, 다수성을 용인하지 않는 공동체주의 등이 판을 친다. 이에 저자는 그런 야박한 현실에 짓눌리고, 스러져 간 이름 없는 인물들의 삶을 되살려 낸다.

곧 천상의 복음 아래 은폐된 폭력을 해부하고, 일개 조연으로 또는 무명으로 사라져 간 성서 속 인물들을 복권해, 성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성서를 읽으려는 것이 책의 주제다. 단순한 성서 비판서도 아닌, 그렇다고 교조적인 성서 찬양서도 아닌 <인물로 보는 성서 뒤집어 읽기>는, 성서의 내적 한계를 조망하면서 그 심오한 의미를 재발견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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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反)역사'로서의 역사학적 성서 비평을 말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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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제3회 여성미술제 ‘판타스틱 아시아―숨겨진 경계, 새로운 관계’(2005.6.16~7.3, 성곡미술관)에 출품된 작품 중에 시마다 요시코(Shimada Yoshiko)의 <비밀스런 욕망들>이라는 설치작품이 있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오른편 구석엔 커튼이 쳐진 테이블이 있고, 왼편엔 꽤 커다란 서랍장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자그마한 상자가 하나 있다.

서랍장 속엔 타이핑된 이야기가 적힌 종이와, 이미지나 작은 물체 등이 들어 있다. 관람자들이 익명으로 적어 놓은 상당히 은밀한 성적 비밀들(딸의 남자친구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고백, 성적 불감증 고백, 레즈비언 고백, 낙태경험 고백, 남편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여인의 고백 ...)이 작가에 의해 타이핑된 종이, 그리고 작가가 글의 내용을 연상하면서 임의로 만든 이미지나 상징물이다. 실은 이것은 일본에서 전시할 때 관람자들이 적은 천여 편의 비밀 중 시마다 요시코 씨가 추려낸 십여 편의 이야기들이다.


[그림] 시마다 요시코의 설치작품. <비밀스런 욕망들>의 일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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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른편의 테이블은 새로운 관람자들이 자기 가족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를 적는 자리다. 다 적은 글은 가운데의 상자 속에 넣으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작가에 의해 추려지고 타이핑되어 다른 장소에서 전시될 때 이미지나 상징물과 함께 서랍장 속에 배치되어 다른 관람자들에 의해 읽힐 것이다.

내게 이 작품이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작가의 설치작품은 결코 자기 완성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거기에는 과거의 관람자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있다. 작가가 주문한 주제였지만, 그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람자의 몫이다.2) 작가는 내용에 개입할 수 없고, 상상조차 못한다. 물론 그 속에는 작가로선 어느 것 하나에도 끼어들 수 없는 관람자들 각자의 체험, 아픈 기억이든 즐거운 기억이든, 다양한 체험이 배어있다. 작가는 그것을 읽으면서 그 속에 서린 배경을 알 수 없고, 다만 추측만 할 뿐이다.

작가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은, 말한 것처럼, 포괄적이나마 주제를 제시하고, 주제에 따른 관람자들의 비밀 이야기를 선별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녀가 상상한 상징물이나 이미지를, 그녀의 설치물 속에 함께 전시한다.

관람자의 이야기를 읽는 이는 그것을 적은 이 자신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경험의 소유자다. 물론 시간적으로도 다음 전시회의 관람자니, 얼마의 시차든, 이후의 사람이다. 게다가 글이 익명으로 쓰였고, 그(녀)의 필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작가가 타이핑해 놓은 종이가 대신하고 있고, 작가가 만든 이미지나 상징물이 있어, 새로운 관람자의 글 읽기는 이러한 다른 질감의 대체물에 영향을 받는다.

요컨대 설치물은 고유한 작가도 작품도 없으며, 고유한 관람자의 이야기도 없다. 또한 관람자가 보고 읽는 설치물은 항상 변화하기 마련이다. 대신 존재하는 것은 설치물 속의 과거 관람자의 이야기와 새 관람자의 독서가 만난다. 물론 그들은 서로를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다. 또 그들은 전혀 다른 체험을 내포한 사람들이다. 한데 그들은 이 설치물을 통해 만나고 상상하며 의미를 떠올린다. 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서로 소통하는 대화가 아니라, 제각기 상상하는 대화다.

작가는 그들을 중개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만들고 배치하지만, 그 관심이나 취향이 관람자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극히 적다. 하여, 여기서 또 한 번 말할 수 있는 것은, 시차를 달리하는 생면부지의 관람자간의 대화는 작가가 끼어듦으로써 가능하며, 그런 점에서 이 설치작품은 두 부류의 관람자와 작가, 이들 삼자가 벌이는 대화를 내포한다. 물론 이 대화는 서로 소통하는 대화가 아니라 제각기 상상하는 대화다. 즉 각자의 의미가 수렴하여 합의에 이르는 대화라기보다는 서로 이야기의 실마리를 얻어 각자 자기의 의미를 떠올리는 대화인 것이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여기서 오늘날의 역사가와 그의 역사 서술의 효과에 관한 상상을 이어갔다. 역사 서술은 시차를 달리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 간의 대화이다. 과거의 사람들과 지금의 독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서로 살아간 시기도 장소도 문화적 맥락도 다르다.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없고, 다만 과거의 사람들에 관해 서술된 역사를 통해서만 후대의 독자들은 저들 과거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

‘과거인’들의 삶과 체험 모두가 역사 서술 속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숱한 정보들이 있지만, 그것이 저들의 삶 전체를 반영한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숱한 정보들은 ‘파편적’이다. 더욱이 그 파편적 정보들은 역사가에 의해 일부가 취사선택되고 재배치되며, 또 역사가의 상상력에 의한 보완적 설명과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역사 서술이 된다.

물론 역사가는 부재하는 사료를 날조할 수 없다. 그것은 과거의 누군가의 이야기며, 삶의 기록이어야 한다. 비록 그(녀)의 변화무쌍한 삶 전체일 수는 없지만, 어느 한 순간의 기억을 담고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는 본래의 고유한 의도에 따라 선택, 배치, 보충설명을 일관되게 하지 못한다. 사료에 영향을 받아 그의 본 취지가 변화하기 마련이다. 또한 전체적인 서술 과정에서 그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들 요소들이 어우러진 전체로서의 텍스트가 만들어지는데, 이 최종결과물은 역사가 자신이 애초에 혹은 과정에서 의도한 것이 아니다. 자신 이 활용한 제재의 질감에 따라 설치물이 미술가의 의도를 벗어나 탄생하듯이, 역사 서술도 작가의 의도의 단순한 반영물이 아니다.

요컨대 역사 서술은 역사가와 과거인 사이의 대화인데, 그 대화는 과거인의 본래적인 무엇이 밝혀지는 것을 지향하는 것도, 역사가 자신의 사상의 단순한 반영인 것도 아니다. 양자의 대화는 양자의 상호얽힘이자 분열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역사 서술은 역사가와 과거인 사이의 ‘의도하지 않은 대화’, 아니 ‘대화들’이다.

한편, 이들 양자, 역사가와 사료간의 의도하지 않은 대화는 문헌으로 출판된다. 출판되지 않는 역사 서술은 ‘실패한 역사’다. 그것은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개봉되어지길 기다리는 비극적 운명의 존재다. 그리고 이렇게 개봉되기 전까지는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요컨대 역사 서술은 텍스트이어야 하며, 독자와의 대화 속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여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역사 서술이라는 텍스트는 과거인과 현대의 독자 사이의 대화다. 그리고 이 대화는 서로 얽혀 있되, 분열적으로 연루된 것이다. 또한 독자는 여기서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텍스트의 의미를 읽어낸다.


역사란 이런 것이다. 적어도 현대의 역사학은 이러한 역사 철학적 성찰에 이르게 됐다. 한데 많은 역사가들이 착각하듯, 성서 연구자들도 성서에서 과거인의 고유한 사실로서의 역사를 알아내려고만 한다. 그리고 그 결과 성서 역사학은 성서 연구자들 자신에 의해 파산선고를 받았다. 이미 백 년 전에 말이다. 결국 그 연구 성과들은 실패한 역사요 비역사인 셈이다.

한편 그러한 실패에 대한 우회로로, 많은 성서 연구자들은 ‘반역사’로서의 성서 읽기를 모색했다. 예컨대 과거인의 시공간적 맥락에서 자유롭게 성서 텍스트를 읽고, 그것을 독서자의 상상력과 대면시켰다. 이때 텍스트는 역사 서술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학적 서술이다. 그러므로 역사 비평 대신에 문학 비평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역사학이 이러한 문학적 비평에 착안함으로써 새로운 비평 방법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역사 서술 자체가 과거인과 현대 독자 사이를 매개하는 대화의 소재라는 인식에 기반을 둔 비평 방법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역사와 반역사를 넘나드는 비평 방법이다. 역사와 반역사를 넘나들며 구성한 역사 서술로서의 텍스트, 그리고 독자와 텍스트 간의 의도하지 않은 대화를 지향하는 역사적 혹은 반역사적 독서를 추구하는 방법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곧 출간될 나의 책 『인물로 보는 성서』(가제)의 머리글로 저술된 것이다.

2) 그렇다면 그(녀)는 더 이상 단순한 관람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시마다 요시코 씨와 함께 이 작품의 공동 창작자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그(녀)를 관람자라고 부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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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종희
    2009.07.18 17:2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제겐 몇개의 스토리가 겹쳐지는 글이네요
    가령, 은밀한 성적 욕망과 환타지를 기록하되 사회교양의 레이다에
    공개되는 일 없는 익명의 공개와 작가에 의한 편집의 매개, 그리고
    관람자의 연결고리 없는 상상의 독서가 릴레이식으로 이어지는
    시마다 요시코의 페미니즘 작품과
    반역사적 성서비평의 관점을 가진 반신학적 신학자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동조받는 윗글이
    마치 다층적 흐름이있는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보면,
    시마다 요시코의 작품과 김목사님의 글을 서로다른 관점의
    또 다른 합일체처럼 느끼는 '나'역시 흐름의 과정에 있는 거 겠네요~^^
    • 올빼미
      2009.07.20 17:2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이미 많이 알고 계신 것처럼,저는 성서를 읽는 사람의 창의적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요. 성서학이나 역사학은 그러한 창의적 생각을 위한 하나의 힌트이고요. 시마다 선생의 작품은, 제가 보기엔, 독자의 그러한 흥미진진한 읽기가 어떻게 수행되는지를 멋지게 보여주는 설치작품인 듯해요. 그리고 저와 같은 중계자들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멋지게 드러내준 것 같아요. 그이 같이 멋드러진 작품을 쓰는 만들어 내는 것이 저의 바람이지요. 오종희 님은 몇 번의 대화에서 신학에 대한, 그리고 나와 같은 연구자에 대한 잘 준비된 독자의 힘 있는 해석을 드러내 주었지요. 아시는지요. 대화를 통해 제가 더 많은 것은 배우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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