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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05 [시평] 그들의 전쟁 (김진호)


그들의 전쟁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강도떼가 숨어서 사람을 기다리듯, 제사장 무리가 세겜으로 가는 길목에 숨었다가 사람들을 살해하니, 차마 못할 죄를 지었다. ― 「호세아서」 6장 9절

이스라엘 국이 멸망하기 직전의 혼란 상황을 묘사하는 텍스트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수수께끼 같습니다. 세겜 길목에서 제사장들이 사람들을 살해했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세겜’은, 과거 블레셋 군과 사울 군이 싸울 때 양군의 진영이 있었던 저 유명한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의 기슭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유다국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국의 수도인 사마리아로 가고자 할 때 도로가 세겜을 지나가게 되어 있지요. 더 나아가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이르는 내륙 대상로가 이 지역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여 ‘세겜 기슭’이란 남에서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으로 혹은 사마리아 성에서 유다 국으로 가는 길목인 셈이지요.

호세아 예언자는 이곳을 통과하는 이들을 제사장들이 살해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을 통과하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남에서 북으로 가는 이들일까요 아니면 북에서 남으로 가는 이들일까요?

이것을 알아내는 일은 간단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국은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전 국토가 유린당하고 있었습니다. 분노한 제국의 군대는 끈질기게 저항했던 성읍을 불태웠고 지도자들의 몸둥이를 기둥에 꿰어 성벽에 내걸어 놓았으며, 그곳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해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근 농지를 불살랐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또 노예로 끌고 갔습니다.

한때 시리아-팔레스티나의 패권국으로 광대한 영토를 병합했던 제국 이스라엘은 거의 모든 영토를 빼앗겼고 단지 사마리아 성과 그 인근지역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호세아서」는 내용상 1~3장과 4장 이후로 나뉘는데, 1~3장이 이스라엘 국이 아직 번성하고 있던 때를 반영하고 있다면, 4장 이후는 아시리아 군의 침공으로 전쟁의 참화 속에서 멸망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상황을 다루고 있지요. 앞이 이스라엘의 영토가 방대했던 때였다면, 뒷부분은 사마리아 지방으로 쪼그라든 때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1~3장에서는 ‘에브라임’이라는 용어가 한 번도 사용되지 않는데, 4장 이후에서는 무려 36번이나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大) 이스라엘’이던 시절이 지나고, 왕국 말기에 사마리아 인근의 에브라임 지역만을 통제하고 있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겜의 길목이란 남쪽으로 향하는 백성들이 국경을 통과하는 길목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북쪽에서 아시리아 군이 밀고 내려오니 사람들은 세겜을 통해 남으로 피란을 떠나는 것이지요. 살기 위해서, 군대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 파괴의 잔혹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곳을 제사장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왕의 군대가 아니라 제사장들이 말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왕궁의 녹을 먹던 사제들이었겠지요. 국가가 번영하던 때 연일 정복지에서 온 전리품이 이곳을 통과해서 왕실로 갔고, 봉신국이던 유다국 등의 공납물도 여기를 거쳐 지나갔습니다. 또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서 시작해서 시리아로 가는 대상도 이곳을 지나갔지요. 그때마다 막대한 기부금이 왕실의 이름으로 제사장들에게 하사되었습니다. 하여 그들은 이곳의 강력한 종교귀족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실이 몰락할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왕실과 운명을 같이할 것입니다. 그러면 야훼께서 축복을 주셔서 이스라엘을 다시 번성케 할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했고 또 그렇게 믿었습니다.

한데 백성들이 도성을 피해 남으로 피란을 떠나려 합니다. 사제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하여 세겜 길목을 지키며 그곳을 지나는 백성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해댑니다. 왕실과 성전의 운명을 공유하지 않는 불신실한 이들을 신의 이름으로, 거룩한 이스라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살육을 합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바로 그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그런데 ...... 길르앗은 폭력배들의 성읍이다. 발자국마다 핏자국이 뚜렷하다.”(6~8절)

제사가 신실함의 표상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국란 상황에서 제사에 몰두하며 그것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무참히 죽였던 것입니다. 신정국가 사회에서 제사는 국가의 이데올로기이자 미래의 청사진이었습니다. 그 이데올로기와 청사진이 추구하는 것은 ‘풍요’였습니다. 신은 풍요를 주는 분이었고, 제의는 그러한 풍요를 표상하는 방식으로 화려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의를 주관하는 제사장들을 우월한 계급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호세아는 바로 이러한 제사종교의 폐단을 비판합니다. 그가 얘기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헤세드)‘과 ’하느님을 아는 지식‘(다아트 엘로힘)입니다. 그것은 풍요나 계급의 신, 그것을 보증하는 격식으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의) 구원과 (위계질서로부터의) 해방을 선사한 ’출애굽의 신‘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전쟁에서 탈출하려는 이들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회피하려는 이들의 행동을 저주하고 그 몸을 죽음의 계곡으로 내동댕이치고 있습니다. 그러한 피비린내 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살고자 하는 노력을 가상히 여기고 그들에게 구원과 해방을 선사하는 신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텍스트는 오늘 한국의 대형교회 지도자들이 벌이는 행동들을 연상하게 합니다. 한국에서 교회는 지난 1990년 이전까지는 온갖 번영과 풍요를 누렸습니다. 그때 교회는 궁핍에서 풍요를 선사한 하느님을 선포했고 그 선포가 실현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또한 교회는 그 풍요와 영적 구원을 동일시하는 한국적 교리를 제도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견고한 풍요의 성전 외부로 떨려난 이들을 저주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 이단들, 타종교인들, 성적 소수자들 등이 그들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축복과 저주의 담론을 예배 속에 제도화했고, 그것을 통제하는 관리자, 곧 성직자를 통해 그러한 배타적 성전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그런데 풍요의 시대가 가고 환란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자본의 광풍이 사람들을 헤어 나올 수 없는 저주의 늪으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국가와 국민은 위기에 처했고, 지구자본체제라는 제국의 질서 속에서 공공 영역이 점점 와해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1990년 이후 저성장 상황에 놓여 있다가 1995년에서 2005년 사이에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시민사회는 교회에 대한 신뢰를 폐기했고 심지어 혐오스러워 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교회의 대응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미국발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인 번영신학의 철저한 순응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일상에까지 관철시키는 생활태도와 신앙태도로 무장하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실패자에게 무관심하거나 냉혹한 신앙제도로 교회를 재정립하도록 이끕니다.

둘째는 배제주의 이데올로기를 일상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념의 타자, 종교의 타자, 인종의 타자, 계급의 타자, 성적 타자에 대해 무자비한 종교제도를 추구하는 신앙을 낳습니다. 최근 한국교회는 이러한 대열에서 이탈하려는 자들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일부 대학교수들을 강단에서 쫓아냈고, 이념의 타자들을 사냥하기 위해 온갖 색깔론을 발명해냈으며, 타종족․기층대중․성소수자 등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풍요의 신학을 재천명하고, 물량적인 축도의 종교로 사람들을 다시 끌어들이려 합니다. 하여 자본주의와 반공주의, 귀족주의, 성직자 중심주의를 추구하는 신앙제도 속에서 사람들을 묶어두려 합니다.

해서 우리는 호세아 예언자처럼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 하느님에 관한, 성서에 관한 지식을 왜곡하는 이들과 양보 없는 일전을 벌여야 합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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