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하나님과 같이
- 요한복음 5장의 이야기

송진순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박사과정)

요한복음서는 분명하고 일관된 어조로 예수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빌립보서와 히브리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찬송시도 요한의 고백만큼 과감하지는 못했다. 요한의 전승을 만든 사람들과 요한의 기자는 유대적 배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에도 왜 유대인들이 보기에 신성모독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예수를 이야기했을까? 요한복음서의 청중들은 예수가 하나님과 같다는 그들의 고백을 어떻게 경험하고 이해했을까? 

   요한복음 5장 18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고발한다. 그들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으며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여긴 것에 신성모독죄를 물어 그를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다. 적어도 요한복음을 쓴 기자의 눈에는 예수가 불경스러운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은 확실하다. 물론 이 단락을 두고 L. 마틴은 예수 시대가 아닌 1세기말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반증, 곧 적대적인 주변 세계에서 고발당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정황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예수 시대와 요한의 공동체 시대를 넘나드는 요한의 두 차원의 드라마는 요한복음을 꽤 읽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무대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유대인들이 안식일 준수보다도 예수와 하나님의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그들 스스로 선뜻 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5장은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치유받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 외곽으로 난 길을 걷다 베드자다 연못 돌기둥 근처에 모인 사람들을 보게 된다. 여러 병자 중 특히 한 사람, 한눈에 봐도 그 병세가 오래된 사람을 보고 묻는다. “낫고 싶으냐?” 그는 짧은 물음에 ‘그렇다’는 답변 대신 “물이 동해야 하는데, 나를 넣어줄 사람은 없고…….”부터 시작해 꾹 참았던 말 보따리를 풀 듯 제 사연을 꺼내 보였다. 이에 “일어나 걸으라.”는 예수의 말에 오랜 병고가 무색하게 그는 치유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타이밍이다. 하필 병자가 자리를 들고 일어난 때가 안식일이었다. 승냥이 같은 유대인들이 그런 타이밍을 놓칠 리는 없다.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면 안 된다고 점잖게 훈계를 놓던 유대인들은 치유를 행한 사람이 예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 일로 인해 예수를 박해하였다(요5:16)고 요한복음서 기자는 전한다. 

   예수와 유대인들(바리새파)과의 안식일 논쟁은 요한복음서 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서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안식일 논쟁에 대해 공관복음서는 안식일의 진정한 주인을 천명하며 새로운 정결례에 대한 예수와 예수운동의 삶의 자리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들려준다(막2:23-28; 마 12:5-6; 눅13:10-17; 14:1-6). 그러나 요한의 기자에게 포착된 안식일 논쟁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할 하나의 빌미일 따름이다. 그는 유대인들만큼이나 타이밍을 정확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그는 안식일을 구실로 유대인들의 입을 빌어 요한복음의 핵심, 즉 요한의 그리스도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안식일.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는 예수의 답변에 요한복음서의 기자는 유대인들의 상황을 전한다.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더욱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았기 때문이다.”(요5:18) 

   안식일에도 우주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에 대해 반박할 수는 없었겠지만 이를 근거로 안식일을 수시로 어겼던 예수나 예수의 사람들의 행태야 유대인들에게는 분명 거슬리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정작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예수가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 자신과 하나님이 같다고 하는 바로 그 지점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의 기독교인들이야 ‘하나님 아버지’는 으레 자연스러운 호칭이기에 성서 어디든 발견되리라 생각하겠지만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신 32:6; 시 68:5; 89:26; 사 9:6; 63:16)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자연과 역사를 초월해있기에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계약을 맺었고 역사 가운데 자신을 드러냈다. 그렇기에 유대인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였으며 세계 안의 어떤 존재도 감히 하나님과 같을 수는 없었다. 물론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으로 맺어진 부자관계로 보여주었지만, 질곡의 역사에서 유대인들이 거듭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계약 관계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그런데 유대민족을 흔들었던 위기가 1세기 팔레스타인의 흙먼지 이는 척박한 땅에 다시 찾아 왔다. 이미 지중해 지역을 장악한 로마 제국의 압제가 그들 깊숙이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유대민족 내부에는 정치적 혼란과 종교적 타락 그리고 가난으로 지속적인 반란이 일어났고, 다양한 형태의 유대교적 갱신운동들이 우후죽순 퍼져가는 때였다. 또 다시 민족의 혼란 속에서 유대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선인들이 그러했듯 율법준수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정립이었다. 유대인들에게 행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와 같이 되는 것은 제일계명을 어긴 명백한 오만이며 악이었다.(2마카 9:12) 

    그러나 일반의 유대인들은 더 이상 지도자 유대인들의 언행에서,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자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 멀리 있었고 위태롭고 지난한 삶은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보다는 가난하고 소외된 낮은 이들과 동고동락하면서 함께 먹고 마시고 돌보고 그들을 치유했던 예수. 애끓는 심정으로 그들의 고통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인간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이 그들의 삶 깊이 들어오게 되었다. 요한복음 5장에서 보듯, 그것은 오래된 병자에게 먼저 다가가 몸을 낮추어 그를 살피고 말을 걸었던 예수.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병자의 말에 공감(共感)하고 눈을 맞추며 치유를 했던 예수의 자비(慈悲)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예수 시대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목도한 이들의 생생한 증언과 확고한 믿음으로 예수의 공감과 자비의 경험은 그들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 가운데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역사가 되었다. 

   이제 유대민족의 하나님이 역사와 신앙의 위기 가운데 예수를 믿는 개개인의 삶에서 자신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예수의 눈에서 하나님의 눈을, 예수의 말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투명하게 보고 들었다. 예수와 하나님, 예수와 그들 그리고 예수를 통한 그들과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하나됨의 경험-너의 고락(苦樂)이 내 것이 되고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지는 영적인 통찰을 말하고자 그들은 예수를 감히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그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은 예수였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극명한 차이와 거리를 뚫고 세상으로 들어온 예수라는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불경스러운 발언이야말로 하나님을 경험한 그들에게 진정성있는 울림이었다. 율법, 성전 혹은 회당이라는 스크린을 걷어내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내 안의 모신 자들의 말하는 방식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신성모독의 발언은 요한의 사람들의 대담하고도 발칙한 경험의 순간을 의미했다. 

   예수를 하나님과 같이. 우리에게는 닳고 닳아 진부해진 이 교리 조각은 애초 요한의 사람들의 삶을 바꿔 놓은 떨리는 고백이었다. ‘예수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경위를 두고 많은 학자들이 유대적이냐 혹은 헬라적이냐 하며 그 근원을 따져 물었다. 책상 앞에 앉은 이들의 수많은 가능성의 범주에서 요한의 예수 고백은 매번 다른 채색을 더했지만 원화를 생동감있게 복원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펄떡이는 심장박동과 고통스러운 환희를 경험한 그들의 고백이 유대세계의 박해와 축출의 상황을 넘어 요한의 신학과 신앙의 역사를 새롭게 기록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이 되는 대담한 고백의 전승자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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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거울과 예수의 지팡이

송진순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박사과정)


 

영국인은 인도를 점령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인도를 넘겨준 것입니다. ... 어떤 영국인들은 칼로 인도를 점령하고 보유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틀렸습니다. 칼은 인도를 보유하는데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들을 붙들어 두었습니다. ... 돈이 영국인의 신이라는 것을 떠올린다면 수많은 문제들을 풀 수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우리의 비천한 이익을 위해 영국인을 인도에 붙들고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가 그들과 교역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그들은 자신들의 교묘한 술책을 통해 우리를 유쾌하게 만드는 대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 간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입니다.

『힌두 스와라지』(1908년) 中.


   대영제국의 지배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고취하기 위해 간디는 먼저 인도가 영국에 패배한 이유를 알아야한다고 했다. 그는 패배의 동인(動因)이 동인도 회사의 지배, 즉 영국인들의 물질과 세계 식민화의 야욕만큼이나 이에 부합했던 인도인의 물욕과 협력에 있다고 보았다. 그 원인에서 규명되는바 영국의 지배 권력이 인도인의 협력에 의한 것이라면, 역으로 인도인의 비협력이야말로 영국의 지배를 무력하게 한다는 생각에 근거하여 그는 비협력, 비폭력의 저항운동을 펼쳤다. 간디에 따르면 ‘진정한 힘은 물리적인 능력이 아닌, 불굴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비폭력의 저항은 약자들의 저항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윤리적인 측면까지 아우르는 강력한 형태의 저항인 것이다. 그의 저항 운동은 비단 인도의 정치·경제적인 독립뿐만 아니라 인도의 문화와 사상 나아가 정신적인 측면의 독립까지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항운동의 이면에는 영국으로 대변되는 강압적인 중앙정치권력과 대량생산의 산업문명체제가 얼마나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파괴하는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서려있었기 때문이다. 간디가 역설했던 인도의 ‘자치’ 혹은 ‘자립’이라는 의미의 “힌두 ‘스와라지(Swaraj)’”는 이러한 맥락에서 인도인 개개인의 정신적인 각성과 성찰을 촉구했다. 따라서 무지, 비겁함, 이기심, 나태함, 부정직함을 버리고 인도인의 자발성과 정신적인 자립, 이를 토대로 한 그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마을의 자립이라는 이상적인 현실을 실현하고자 했다. 물론 간디의 봉건적인 사상의 한계와 현실적인 대응방식의 괴리를 두고 시비를 거는 이들도 있지만, 간디가 세계흐름 속의 인도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식민현실에 눌린 민중에게 인간의 고귀함과 내면의 힘을 북돋우며 인도의 혁명과 구원이 별개의 길이 아님을 보여준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쯤 되니 1세기 로마 제국의 지배아래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민족의 식민지 현실과 갈릴리의 예수운동이 20세기 초 인도의 상황과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역사의 서재 어느 한 켠의 책을 꺼내더라도 반복되는 주제에서 벗어날 수 없듯. 당시 지중해 전 지역에 걸친 로마제국의 질서와 통치는 피정복민의 무질서와 파괴를 야기했다. 복음서에서 들려주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팔레스타인의 식민지배 현실의 농민의 삶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로마의 대리 통치자들과 예루살렘 지배자들의 수탈은 농민들을 가난과 굶주림의 아수라장으로 내몰았다. 갈릴리의 마을 공동체가 로마제국의 정치·경제적인 제도 속에 유린되면서 이스라엘 고유의 전통문화와 사회 구조는 와해되었다.

   해체되는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예수는 로마제국의 질서 앞에서 이스라엘의 계약정신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여 가족과 촌락공동체의 전통적인 삶을 부활시키고자 했다. 예수는 부자들의 착취에 날선 비판을 가했고 부패한 예루살렘에 가차없는 심판을 선언했지만, 주리고 병든 사람들에게 몸소 먹이심과 치유의 행위를 통해 새로운 희망의 온기를 불어 넣었다. 그는 갈릴리의 민중으로 하여금 제국의 질서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확신하며, 정의와 연대의 원리들과 계약전통의 가치를 실천하는 주체적인 삶을 살 것을 요청했다.
  
   뒤돌아보면 지난(至難)한 역사의 사건들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할 뿐 같은 거푸집에서 찍어낸 듯 그 행태가 닮았다. 연말까지도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접고 새해의 눈을 떴지만 우리 앞에 산적한 현실의 문제는 오히려 한 자나 자란 것 같다. 한반도의 좌와 우, 남과 북의 내적인 갈등과 이에 기묘하게 얽혀있는 주변 열강들의 꿈틀대는 힘겨루기에서 숨쉬기 벅차게 뛰어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신문 한 자락을 깔고 앉은 칼럼들이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새해의 정치·경제적인 구도를 침 튀기며 전망하여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올 한해의 삶도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안다. 성장 이데올로기는 산소마스크로 연명하게 생겼고, 대기업들의 승승장구에 비견되는 서민들의 신음 가득한 사회 경제적인 불만은 극에 달한 듯 보인다. 게다가 일자리 창출과 서민 경제 활성화를 모토로 밀어붙이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이러한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 명약관화하다.

   우리 대다수는 각자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한다. 생존이라는 근본적인 불안으로 시름하면서 우리사회의 마음의 병은 깊어간다. 그러나 더 이상 간디 혹은 예수와 같은 고결하고 맑은 소리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자본 권력의 광기에 편승해 무력한 협력과 안일한 기대를 품었던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고, 보통의 우리가 스스로 현실을 직시하고 연대하여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서로 독려해야한다. 갇힌 소리는 문을 열고, 때 묻은 소리는 몸을 닦고, 덜 자란 소리는 함께 성숙하여 ‘다르게, 다함께’ 하는 소리로 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역사라는 여정에서 간디의 ‘힌두 스와라지’라는 거울을 들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라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우리 안의 깊은 병을 몰아낼 굳은 힘을 발견하고 보통의 우리가 연대하고 상생할 희망의 전거(典據)를 끌어내려고 노력할 뿐이다. 보통의 우리가 가진 역사의 힘은 종국에는 휩쓸리는 대로 끌려가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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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들의 모임

송진순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박사과정)

From: Barbara Cloud

Next Mustard Seeds meeting will be 12/2‏
Our next Mustard Seeds meeting will be our Christmas pot luck at Louise and Pattie's on Friday, 12/2.
As usual, we plan to sing lots of Christmas carols.


   일주일 전 바바라에게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이번 “겨자씨들의 모임”은 12월의 첫 금요일, 루이스와 패티의 집에서 크리스마스 포트럭 디너로 열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단문의 메일 뒤로 백발의 볼품없이 마른 바바라가 책상에 구부정하니 앉아 동그랗고 커다란 안경을 주름진 손으로 치켜 올리며 컴퓨터 자판을 한 자, 한 자 두드렸을 모습이 눈에 선했습니다. 원래 겨자씨들의 모임은 격주 토요일에 있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금요일에 열리나 봅니다. 곧 모임의 멤버들이 한 명씩 회신을 보내왔습니다.

   턱수염이 트레이드마크인 퉁퉁한 딕. 넉넉한 웃음만큼이나 후덕한 뱃살 때문에 빛바랜 셔츠 단추들은 늘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일흔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하얗고 고운 피부의 아니타,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왕년 그녀의 변호사 시절을 짐작하게 합니다. 하지만 아니타 모녀의 음식솜씨는 환상에 가까워 멤버들은 그의 집에서 모일 때면 빠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밴더빌트 대학의 직원인 린다와 전업주부인 에드 아저씨는 참 무뚝뚝한 부부입니다. 큰 아들의 간병 때문에 간호사였던 아저씨는 자연스레 가정 일을 돌보게 되셨는데 원예에도 일가견이 있으십니다. 가끔 밭에서 수확한 토마토, 아기 주먹만한 사과를 모임에 가져오시죠. 만년 소녀 같은 루이스 아줌마는 제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곤 합니다. 70년대 말 한국의 선교사로 계시면서 이화대학에서 잠시 영어를 가르치셨답니다. 이 모임을 제게 소개해준 분이시죠. 아줌마의 막역한 친구이자 동거인인 패티 아줌마는 만나면 무조건 와락 안아주십니다. 티셔츠에서는 알 수 없는 소스냄새가 풍겨나지만, 패티와 같이 있으면 여기가 미국인지 한국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푸근한 할머니거든요. 메일을 보낸 바바라는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는 남편 프레드와 함께 이 모임의 총무입니다. 대학교수였던 프레드는 어김없이 정갈한 양복차림으로 모임에 등장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하비 아저씨는 심리학과 심신 수양에 관심이 많으신 장발의 이야기꾼입니다. 소시적 아니타와 연인이었다고 누군가 귀띔해주더군요. 시력이 거의 없는 프레드리카는 뒤늦게 아저씨에서 아줌마가 되셨는데 사람들에게 시를 읽어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작년 봄 내쉬빌의 엣지힐 교회에서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 친구들입니다.

   엣지힐 교회는 오래 전 흑인 프로젝트 지역이 시작되는 곳에 세워졌습니다. 미국의 전형적인 교회와는 다르게, 또한 한국의 전형적인 교회와도 다르게, 인종, 직업, 나이, 성적취향, 장애여부에 상관없이 한데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원래 예배가 교회공동체 구성원들 ‘누구나’ 영과 진리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라면 그들의 예배는 예배의 본래 의미에 부응하는 것이겠지요. 매 주일 예배 참여자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설교 후에는 모두가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성찬을 나눕니다. 마지막 성찬의 잔과 빵을 거두는 사람은 항상 대여섯 살의 아이들입니다. “겨자씨들의 모임”은 엣지힐 교회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이 만든 모임입니다. 함께 저녁 식사와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35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삶의 이야기는 다양합니다. 지적장애 아들이 길을 잃은 일, 산책길에 만난 사람, 이번 주에 읽은 책, 훈훈한 뉴스, 로컬 푸드 이용기, 교회 내 전기 절약, 에너지 문제, 의료 보험의 문제, 정부의 현재 이슈 등등... 하지만 펀드나 재테크, 자기 집값 상승률, 손자들의 대학 진학, 믿음과 직분의 문제는 일 년이 지나도록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순탄하거나 넉넉하기만 한 것은 아닌데도 말입니다. 은퇴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고, 이혼한 딸과 노모를 돌보느라 마음이 힘겹기도 하고, 병원 생활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더 많은 이들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이들의 삶에 귀를 기울이고 환경과 평화의 문제를 놓고 같이 기도합니다. 늘 그렇게 해왔듯이...

   예수의 이야기에 재미가 들린, 그 오래전 갈릴리의 무지렁이들도 먹고 살만하여 예수를 좇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삼중의 세금고에, 흔들리는 성전가의 타락에, 불안하고 흉흉하기만 한 정세에 마음 놓을 곳 없는 그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앞에 두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무슨 비유로 이야기해볼까?” 예수는 툭하니 질문을 던지고는 흙먼지 이는 척박한 땅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래, 그것은 세상의 어떤 씨보다 작은 겨자씨와 같은데 심고 자라면 풀보다 커져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게 될 것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좁쌀만 한 겨자씨야 한 줌씩 움켜쥐었다 둘레둘레 땅에 뿌려놓으면 금세 자라 뭉게뭉게 퍼지는 풀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일 줄이야. 레바논의 백향목은 아니더라도 올리브나무나 포도나무는 되어야 본새도 열매도 하나님 나라와 좀 비길 만했을 터인데,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굳이 겨자씨랍니다. 하기야 겨자는 얼얼하니 콕 쏘는 맛이 입맛을 돋우고 독충에 물렸을 때나 진통 소염제로는 그만한 것이 없으니 이모저모 요긴한 식물이기는 합니다. 길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노란 겨자 꽃들이야말로 그들에게는 거친 땅과 어울리는 익숙한 풍경이었겠지요. 땅 위 한 중심에 커다랗게 터를 잡고 올곧게 오르는 무언가는 아니지만 겨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친근하고 풍성한 푸성귀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너무 멋들어지게 성장해버린 하나님 나라에 우리 무지렁이들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있을까요. 있다손 치더라도 지금처럼 마음 놓고 둘러앉아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의견이 분분하다 이내 생각이 바뀝니다. ‘그래, 별 볼일 없는 우리들이 겨자씨들이고 우리들이 율법학자들보다 저 높으신 위정자들보다 더 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이지. 저 예수의 말처럼.’ 얄궂은 예수의 비유에 적잖은 실망도 잠시. 좋아라 무릎을 탁 치며 괜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땅을 밟고 사는 이들이야말로 감각적 경험의 세계에서 학자들보다 예민한 인식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손에 잡히는 겨자씨 이야기를 충실히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인종과 신분의 경계, 성전과 토라로 대변되는 거룩과 정결의 상징, 제국 앞에 선 민족의 위기가 무화되는 또 다른 세계였습니다. 작고 낮은 일상에서 누구나 누릴 수 있고 너무 흔해 지나칠 수도 있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다만 그들에게는 일상으로 들어온 신성 그리고 신성을 지닌 우리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예수의 감각적인,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야기들은 일상의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기 위한 마중물이었습니다. 예수로 인해 일상에서 세상을 뛰어넘는 환희를 경험한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어려운 사회적 현실을 외면하지는 않았습니다. 복잡다단한 삶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동경하고 그 나라의 삶을 지속시키고자 고군분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땅에서든 잘 자라 한데 어울려 요긴한 푸성귀가 될 겨자씨들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12월 내쉬빌에서는 ‘겨자씨들의 모임’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늘 그렇듯이(As usual) 저녁을 먹고 삶을 나누고 캐럴을 부르며 아기 예수의 오심을 축하할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함께 나누며 그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이어갈 것입니다. 겨자씨인 저도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고민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것입니다. 일단 마중물은 부어졌으니 새물을 올리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들도 깃들이려면 겨자풀들이 소보록하니 잘 자라야 그늘을 내어줄 수 있을 듯하니 부지런히, 늘 그러하듯 그 나라를 이루어 가고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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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과 건전한 상식

송진순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박사과정)

지난 3월 일본 동북부를 덮친 지진과 쓰나미는 대규모 인명피해와 함께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소 폭발이라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10월 13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대지진의 피해 복구비용이 향후 10년간 30조엔(약 450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원전 사고의 피해 복구에 드는 시간과 비용은 그 누구도 구체적으로 전망하기 어렵다. 30년이 걸릴 원전 폐쇄와 12만 톤의 방사능 오염수 같은 일차적인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10만 명의 피난민과 일본 전역과 바다에 확산되는 방사능에 대해 안정적인 복구를 전망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후쿠시마의 원전 폭발이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13배, 그곳에서 방출된 방사성 물질의 양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의 168배의 위용을 자랑한다면 그 참사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후쿠시마의 재앙은 우리 일상에서 빠르게 잊혀져갔다. 심심치 않게 들리는 일본의 세슘과 스트론튬 검출 보도조차 우리에게는 신문 한 구석의 국제 기사 중 하나일 뿐이다. 그보다는 9월의 정전사태를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위해 원전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정부와 원전 산업계에 막연한 기대와 수긍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원전의 안전 신화가 후쿠시마 사고로 처참하게 무너졌음에도 우리가 핵에 대해 느끼는 위험은 여전히 제자리다. 이 불감증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가난도 전쟁도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상상하는 방사능의 공포가 우리에게 얼마나 유효할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원자력에 대한 우리의 무지만큼이나 원전의 정당성을 심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부와 언론의 대응방식일 것이다: “청정한, 녹색 성장의, 연료비가 저렴한, 인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기준치에는 못 미치는...”

그러나 눈 가리고 아웅한다해도 원자력 발전의 분명한 함의에 대해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애당초 원자력을 안전하고 평화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낙관적 기대는 태생적으로 원자력의 탄생과는 모순된 것이었다. 원자핵을 인위적으로 분열시켜 발생하는 에너지인 원자력은 근본적으로 존재의 안정성을 파괴한데서 발생한다. 인간이 원하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 안정성을 희생시킨 대가로 치명적인 방사능, 영원히 끌 수 없는 재를 남겨 놓은 것이다. 불안정을 인간의 기술로 안전하게 방호한다 해도 그것은 실험실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시간을 뛰어넘는 물질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은 또 다른 은폐와 왜곡된 현실을 낳는다. 불안과 파괴라는 샴쌍둥이는 평화적으로 보일 수는 있어도 본능은 숨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자력이 핵의 다른 이름인 것처럼.

어찌 보면 자본주의의 수혜를 입은 모두가 원전 시스템의 공범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팡팡 트는 에어컨, 철철이 바뀌는 핸드폰, 가가호호 뉴모델 대형양문냉장고, 불야성의 금융시장.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성장위주의 소비 자본주의만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스러지는 경제신화 속에서도 밝히 빛나고 있다. 이에 경제성장과 에너지의 불가분의 관계는 원자력 발전이 뒷받침하리라는 논리가 버티고 있다. 따라서 자의든 타의든 모두의 합의 속에 추진되는 원자력 산업은 학문과 정재계의 권력과 맞물려 돌아간다. 맞물리는 거대한 힘은 그 어떤 목소리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말 그대로 중앙집권적이 된다. 원자력 문제의 바탕에는 거대 과학기술과 산업이 권력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비민주적인 체제가 깔려있는 것이다. 원전이 유치된 지역, 에너지의 주 소비지역, 원전 내 노동자, 방사성 물질의 피해, 원전 사고의 은폐, 원자력 정보의 편중. 어느 것 하나 민주주의와 원자력이 양립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후쿠시마 사태이후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의 유럽 국가들은 탈원전을 선언했다. 그들의 선언이 더 의미가 있는 것은 현재 인류와 미래 세대에 대해 준비된 정부와 깨어있는 시민의 힘이 공동으로 발휘된 데 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건전한 상식이 통하는 사회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건전한 상식은 무엇이 중요하고 먼저 되어야 하는지 아는 힘이다. 우리의 건전한 바람은 내 가족과 이웃이 안전한 땅에서 인간적이고 소박하게 사는 것이다. 나아가 다양한 많은 사람들과 미래에 공동의 안전을 기반으로 인간과 자연의 이야기가 어우러질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이상을 갖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삶을 꿈꿔야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에너지 집약적이고 대량폐기물로 넘치는 파괴적인 산업문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대의 동력이 되어 온 원자력 발전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진행 중인 재앙을 멈출 수는 없어도 또 다른 재앙을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상의 안정과 신뢰를 회복하고 소외된 인간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 사회의 역량을 키우는 일이 급선무가 될 것이다. 책임있는 미래는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불편을 감수하는 소박한 삶이더라도 함께 즐겁고 안전한 삶을 꿈꿀 수 있다면 우리는 말해야 할 것이다. 문규현 신부님의 말처럼 “사랑한다면 원전은 아닙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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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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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0.24 14:4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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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펜을 드셨군요. 경계밖 타자에 대해서 따뜻하고, 그 경계를 구획짓는 체제에 대해서는 완강한 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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