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서평 2 


우리 사회의 딜런들을 위하여



신윤주*


 

좋은 양육이라는 신화


    대량살상을 저지른 열일곱 살의 딜런 클리볼드. 그의 어머니 수 클리볼드는 문제아의 부모가 대단히 잘못된 양육 방식을 갖고 있을 거라는 통념과는 달리 20세기의 미국 사회가 제시한 기준에 매우 부합하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수는 진보적인 평화주의자로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두 아들이 약자를 배려하는 삶을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쳤다. 또 워낙 매사에 조심성이 많은 편이었기에 자녀들이 좋은 버릇을 기를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했다고 한다. 그는 전공 분야 덕에 인간 심리에 관한 지식을 평균 이상으로 지니고 있었으며 그러한 지식을 아이들을 관찰하고 대하는 데 적극적으로 사용했다(119).[각주:1]

    그럼에도 콜럼바인 사건을 피할 수는 없었다. 비극적인 사건 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수는 우연히 한 육아 잡지를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윤리적 육아”에 관한 퀴즈가 실려 있었다. 열 개의 문항 중 아홉 개의 대답이 정답이었다. 단 하나, ‘아이의 사적인 일기를 읽는지’에 관한 질문에는 오답을 냈는데, 그 역시 딜런이 살아있을 때에는 정답으로 맞췄을 법한 질문이었다(322).  

    수 클리볼드는 좋은 시민이었고 자신이 알고 있는 옳음의 기준에 따라 아이들을 양육했다. 그것은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어야 마땅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해설을 쓰기도 한 임상심리학과 교수 앤드루 솔로몬이 밝힌 것처럼, 콜럼바인 사건은 마치 쓰나미처럼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 없는 성격의 재앙이었다.  


나는 속으로 클리볼드 부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했다. 이 사람들을 좋아하게 된다면 이 일이 두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우리 중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는 말이 되니까. 그런데 두 사람은 정말 너무 좋은 사람들이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에는 콜럼바인 학살을 일으킨 정신이상은 어느 가정에서라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측하거나 알아본다는 건 불가능했다(9). 


    그러므로 딜런이 저지른 만행의 원인을 부모와 연관 짓는다면 그것은 수 클리볼드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기보다, 수의 아들이었음‘에도’ 그렇게 되었다고 말해져야만 할 것이다. 딜런 클리볼드는 범죄자의 부모가 어딘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통념에 맞서기라도 하듯 아니, 어떤 아이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될지 ‘당신들은 모른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기라도 하듯 범행에 가담하고 준비하고 실행에 옮겼다.   


양육 주체는 사회화 주체인가


    그런데 우리는 과연 ‘좋은’ 양육을 통해 자녀가 어떤 아이로 성장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 오늘날 부모의 역할은 통상 자녀의 성공적인 사회화를 돕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경우 양육을 돕는 1차적 주체primary agent의 자리에는 ‘사회 공동체’가 놓인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사회가 기대하는 바에 대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념이나 가치, 관점에 따라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 인식시킨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부모들은 ‘잘 자란 아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들의 역할과 책임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잘 자란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잘 듣고, 말썽을 부리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고, 학업을 완수하며, 독립적이고 성공하는 어른이 된다. 부모들은 자신이 독재에 가까운 사회적 요구에 복종해왔던 것처럼 아이들도 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사회 공동체에 대한 강조로부터 시선을 옮겨 더 확장된 생태계에 속한 동등한 주체로서 부모와 자녀를 바라본다면 어떨까? 특히 초기 양육 관계에서 감정적인 그리고 심리적인 측면을 함께-조절co-regulation하는 일에 방점을 둔다면? 그렇다면 양육은 부모가 자녀에게 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동 자신도 발달의 주체로서의 참여하고 상호 작용하는 것이 될 수 있다.[각주:2]  

    딜런의 경우, 콜럼바인 사건이 있기 1년쯤 전에 이미 조금씩 문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수가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으로 기억하는 것은 딜런이 주차 중인 차에서 전자장비를 훔친 일로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다. 죄목은 중죄인 1급과 무단침입, 절도, 그리고 경범죄인 범죄성 높은 장난이었다. 


딜런이 한 행동이 잘못이라는 걸 딜런이 알기를 바랐다. 나는 딜런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려고 하면서 누가 네 물건을 훔쳐 가면 기분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딜런, 살면서 다른 규칙은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십계명은 따라야 한다.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말라.” 나는 십계명 가운데 또 어떤 것이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려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쯤해서 그만두기로 했다. “이런 건 반드시 따라야 하는 규범이야.” 딜런이 말했다. “알아요.” 우리는 잠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내가 다시 말을 했다. “딜런, 나는 걱정이 되는구나. 어떻게 하면 네가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딜런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자기가 충동적으로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놀란 듯했다. 비참한 심정인 것 같았다. 그때에 나는 더 이상 분노를 느끼지 않았고 딜런이 안쓰럽기만 했다(316).


   회고적인 진술은 지나간 상황을 충분히 재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럼에도 이 대목에서 두 사람 사이 발화 비중의 차이는 마음을 복잡하게 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당면한 문제적 상황이나 미래에 반복될 일에 대한 걱정, 혹은 부모로서의 역할이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일 자녀가 말하지 못했지만 문제를 통해 전해야만 했던 어떤 메시지가 있다면,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부모는 자녀의 삶의 환경을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 설계자로서 그 혼돈스러운 여정을 함께 헤쳐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선도의 형태가 아니지만 무관심이나 태평함과는 다르다.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아이들은 이미 대부분의 정답을 알고 있다. 다만 아직 구성되어 가고 있는 자신의 내면의 힘과 복잡성을 끌어안고 분투하는 것뿐이다.


매뉴얼의 한계


   양육 주체에 관한 문제와 함께 재고할 부분은 양육의 ‘매뉴얼화’이다. 매뉴얼은 우리에게 위험 요소를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무탈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지지해주기도 한다. 매뉴얼은 개별성과 예외성을 지우고 사태를 단순화하기에 좋은 도구이기 때문에 효율성과 생산성 등의 가치에 주도되는 현대 사회에 친화적이다. 일례로 2015년에 발표된 “동시대적 양육 모델을 향하여”라는 논문에서 저자들은 양육 행위에 관한 포괄적인 평가 지표 개발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오늘날에는 부모들과 자녀들이 각종 광고와 매체, 신기술에 노출되면서 양육에 관하여 서로 모순된 정보와 조언을 접하기 때문에 ‘좋은’ 양육의 정의가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의 아동은 30년 전의 아동들에 비해 여러 방면에서 우수해졌음에도 유아기 우울이나 불안 등의 적응 문제 및 심리 문제를 더 많이 겪고 있다. 저자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양육에 관한 핵심 요인들을 추출하고 양육 행위에 관한 포괄적 평가 지표를 개발하는 일의 중요성을 주장한다.[각주:3]

    그러나 매뉴얼은 양날의 검이다. 그것은 큰 흐름 속에서 사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돕지만 한편 개별 사례의 특수성을 간과해도 되는 근거로서 작동할 수 있는 맹점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맹점은 양육에 있어서 치명적일 수 있다. 모든 아이, 모든 부모, 그리고 모든 상호작용이 지니는 고유한 성질과 양상이 지니는 중요성 때문이다. 매뉴얼에 대한 과신 탓에 현실 속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문제의 전조를 발견하더라도 자신의 감각을 바탕으로 판단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매뉴얼의 유용성을 인정하여 참고하거나 사용할 때에도 일반화의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간주될 수 있음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매뉴얼의 이용자는 행위 주체인 인간의 한계를 유념해야 한다. 세계는 언제나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하고, 습득한 지식은 실천의 범위를 초과하기 마련이다. 매뉴얼의 이상은 인간의 의지와 실천, 통제의 한계에 종속된다. 양육자 개인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일반적 이상이 양육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사실상 무언가 알아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매뉴얼이라기보다 낯설게 바라보는 법이 아닐까?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낯설게 배워가고, 자신의 앞에 놓인 타자를 새롭게 배워가는 태도야말로 서로의 주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나아갈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사회화를 돕는 과정으로 양육을 이해하거나 양육 기준의 매뉴얼화를 지향하는 것은 미국의 주류 양육 담론에서 발견되는 특징이다. 딜런 클리볼드를 키운 이러한 양육 담론은 이데올로기로서의 국가주의 및 자본주의와 맞닿아있다. 자본주의는 꾸준히 진화를 거듭해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 자본주의의 핵심인 자본의 의미는 후기자본주의에서 초기의 그것과는 상당히 거리 먼 것으로, 이제 돈은 더 이상 교환가치가 아닌 ‘동원mobilization’이라는 개념과 연동된다. 동원은 국가가 전쟁 상황에 처했을 때 활성화되는 국가-사회체의 상태인데 후기자본주의는 이러한 군사적 논리를 경제 일반의 영역으로 이식했다. 그 결과 불안정한 일상은 전시의 경쟁이라는 하나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고 인간 사회의 에너지는 “살아남기 위해 모든 타인과 싸운다는 목표에 징집”당한다.[각주:4]  

   콜럼바인 고등학교는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을 지닌 곳이었다. 학술 자본의 축적을 추구하고 학원 사회의 기준에 따라 학생들의 계급을 나누며 종교적으로는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한 불관용의 사회였다. 그곳에서 딜런은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심각하게 수줍음을 많이 타고 불안의 정동을 강하게 느꼈던 딜런은 자라면서 친구들을 사귀었지만 사회 적응에는 여전한 어려움을 겪었다. 머리가 좋은 학생이었지만 열등감을 많이 느꼈고 자기혐오가 심하기도 했다. 딜런의 일기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고 모욕하는 것 같다는 표현,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기대 같은 것들이 발견된다. 콜럼바인 사건 2년 전의 일기에서는 자살에 대한 생각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자살을 생각하면 다음 생에 가게 될 그곳엔 내 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나 자신, 세계, 우주와 치루는 이 전쟁도 비로소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딜런은 심각한 상태의 우울을 겪고 있었으며 자가 처방으로서 몰래 보드카를 마시기도 했다.[각주:5] 학내의 질서를 따라 강자의 대열에 들지 못한 그는 자연히 낙오자로 낙인 찍혔고 이는 콜럼바인에서 곧 속수무책으로 괴롭힘을 당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모든 우울한 사람이나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테러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딜런도 에릭의 영향이 아니었다면 테러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딜런과 에릭, 두 사람 모두가 일기를 남겼기 때문에 사건을 맡은 심리학자들은 이들의 일기를 분석할 수 있었다. “딜런의 일기는 에릭의 일기와 내용이나 문체 면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에릭은 자기애적 오만과 살기 띤 분노로 가득한 반면 딜런의 일기는 외로움, 우울, 반추, 사랑에의 갈구 등에 초점을 맞춘다. 에릭은 무기, 스와스티카, 군인을 그렸다. 딜런은 하트를 그렸다. ......딜런은 진정한 사랑을 갈망했다”(272). 

(캡쳐 이미지 출처 https://m.youtube.com/watch?v=zHRcF-pFGYI&autoplay=1)


    그런데 자기혐오가 강하고 우울한 청소년이었을 뿐이었던 딜런이 가학적인 성향의 에릭과 함께 움직이면서 증오의 방향을 외부로 틀게 되었다. FBI 조사반 자문이었던 퓨질리어 박사는 사건 당일 두 아이의 심리상태를 이렇게 진술했다. “에릭이 사람을 죽이러 학교에 갔고 그러다 자기가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반면, 딜런은 죽으러 학교에 갔고 그러다 다른 사람도 같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280). 에릭과 딜런은 심리학적 견지에서 거의 양쪽 극단에 위치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둘은 결국 하나의 욕망을 공유하게 되었기에 함께 행동할 수 있었다. 그것은 죽음에 관한, 곧 죽이고 싶은 욕망, 죽고 싶은 욕망이었다.[각주:6] 


누가 자살 테러를 저지르는가?

 

    딜런과 에릭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자살 테러범의 유형은 단일하지 않다. 형사 사법 분야의 전문가인 랭크포드 박사는 자살 테러를 크게 네 범주로 분류한다. 이는 가장 전형적인conventional 자살 성향을 보이는 유형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테러, 강압적인 집단의 폭력에 시달리다가coerced 가담하는 테러, 절망적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escapist 자행하는 테러, 처형을 당하기 위한 간접적인 덫indirect으로 기능하는 테러 등이다. 각각의 유형과 사례들에서 고유한 독특성이 발견되지만 그럼에도 전체를 아우르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이러한 테러가 이미 자살 충동을 느끼던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고, 둘째, 그들이 처한 상황이 매우 절박했다는 것이다. 자살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은 외부 현실의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경우 실행을 지연하지만 고통스러운 정신적 현실에서 벗어날 만한 기회를 찾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똑같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신의 삶에 조금 더 애착을 가지고 있는 주체라면 고르지 않을 법한 선택지를 택한다.[각주:7]  

    전형적인 테러의 형태가 아니어도 정신적으로 취약한 인물이 반사회적인 폭력 사태를 야기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아주 많다. 이때 행위화는 촉발의 계기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 안에서 문제적인 사태가 자주 발생한다면 그만큼 그 사회가 취약한 이들을 자극할 만한 요인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장이라는 뜻일 것이다.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취약한 이들에게 얼마나 안전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곳인가? 베라르디는 오늘날의 남한 사회를 경제적 신조가 정체화의 토양인 곳으로, 동시에 완벽하게 고립되고 완벽하게 연결된 개인들로 이루어진 디지털 사회로 진단한다. 한국은 일본제국주의와 한국 전쟁을 겪은 후, 폐허 위에 국가를 재건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과거의 정체성이 사라진 아노미 상태에서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와 경제성장이라는 시뮬라시옹을 성공적으로 구사했고 이후 남한 사회는 폭발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단 두 세대 만에 서구 사회에서도 가장 선두에 있다는 나라들에 견줄만한 부를 축적하고 또 소비 수준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한국이 치르는 대가는 일상의 사막화, 리듬의 과잉가속, 생애의 극단적 개인화, 노동시장에서의 걷잡을 수 없는 경쟁 같은 것들이다. 젊은 세대는 이러한 고립, 경쟁, 무의미의 감각, 강박, 실패라는 유산으로부터 탈출하고자 시도하지만 고작 10만 명 중 28명만이 탈출에 성공한다.[각주:8]  


모든 구성원에게 자리를


    고백하건대 이 글을 시작할 당시에 나는 딜런 클리볼드의 문제가 누구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인지 밝히고 싶었다. 부모의 실책이었음이 자명할 것도 같았고, 주체 자신의 선택이라는 항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수 클리볼드가 스스로를 증언석에 세우면서까지 말하고자 했던 바를 독자로서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과거를 되짚어보는 일은 중요한 작업이지만 어떤 부분은 순전히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하며 사회 공동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몫이 따로 있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예수가 소경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경유해 글을 맺고자 한다.  

    요한복음 9장은 제자들과 길을 가던 예수께서 소경을 만난 일화로 시작된다. 이 소경은 눈이 먼 채로 태어난 사람인데 제자들은 그이가 누구의 죄 때문에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인지 궁금해 했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해가 있는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 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각주:9]  

    잘못 놓인 결과를 보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야기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런 접근은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수히 반복하는 과정이며 무엇보다 예방의 차원에서 유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접근은 조금 달랐다. 예수는 발화의 시점에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의 명제-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를 제시함으로써 예기치 못한 미래로 향하는 가능성을 열었다. 공동체의 층위에서 과거를 묻지 않는 행위는 구성원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셈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타자를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질문을 괄호 안에 넣은 채 그를 환대하는 것을 말한다. 타자가 도덕적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이러한 환대를 통해서이다. 타자는 사회 안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우리의 몸짓과 말을 통해 비로소 사람이 되고, 도덕적 주체가 된다.”[각주:10]  

    다수의 가해자들은 본디 피해자였던 사람들이다. 애초에 그들이 피해를 입은 것 역시 그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들이 무뢰한이어서 벌어진 일이라기보다 개인의 한계와 사회의 한계가 일으킨 상승효과가 낳은 비극적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한계, 인간 세상의 한계 속에서 좀처럼 벗을 수 없는 굴레 같은 것. 한 사회의 성장이 역사와 세월의 무게를 단번에 거슬러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개인의 성장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양육자들 개개인에 대하여 그 자신의 역사를 초인적으로 극복해내고 일정한 표준에 해당하는 양육을 해내야 한다는 식으로 요구하거나 기대할 수 없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닿지 못하는 한계들에 대하여 가혹하게 단죄하는 것은 역시나 해당 구성원의 자리를 없애는 일이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명백한 범법 행위는 법리에 따라 다스리되 우리 사회의 취약한 구성원들이 가해자로 몰락하지 않도록 건전한 사회를 구성해가는 일이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일상이 사막화되지 않도록 고삐를 단단히 쥐고 분자화된 개인의 삶을 랜선 너머로 연결하며 정체성의 바탕을 다원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 모든 성원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는 일. 다음 생에는 자신의 자리가 있을지 모른다고 되뇌는 우리 사회의 딜런들을 위하여.  


    * 필자소개  

메모광. 학부에서 국제어문학을, 석사과정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향후 프로이트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홍한별 옮김 (반비, 2016). 이하 괄호 안에 페이지 번호만 표시하는 경우 같은 책. [본문으로]
  2. Arminta Lee Jacobson, “Contemporary Models for Positive Parenting”, Journal of Family and Consumer Sciences 96(4), 2004. [본문으로]
  3. Carly A.Y. Reid, Lynne D. Roberts, Clare M. Roberts, Jan P. Piek, "Towards a Model of Contemporary Parenting: The Parenting Behaviours and Dimensions Questionnaire", PLoS One 10(6), 2015 [본문으로]
  4.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죽음의 스펙터클』, 송섬별 옮김 (반비, 2016), 38쪽. [본문으로]
  5. Adam Lankford, The Myth of Martyrdom: What Really Drives Suicide Bombers, Rampage Shooters, and Other Self-destructive Killers, Palgrave Macmillan, 2013: 133-136. [본문으로]
  6. Ibid., 133. [본문으로]
  7. Ibid., 125-147. [본문으로]
  8. 베라르디, 『죽음의 스펙터클』, 231-240쪽. [본문으로]
  9. 요 9장 1-5절(공동번역) [본문으로]
  10.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211-21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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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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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윤주
    2016.10.18 13: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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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글을 너무 편집하시기 복잡하게 해서 드리지요... 죄송합니다 ㅠㅠ 전반부 인용 부분에 지난번에 쓴 글이 약간 묻어있어서 수정을 부탁드려야 할 것 같아요.

    소제목 <양육 주체는 사회화 주체인가> 부분의 인용구 아래 "특히... (250)"은 저번 호에 냈던 부분이더라구요.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 2016.10.19 14:1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신윤주 필자님.
    수정완료했습니다. 이런 일이 생겨서 필자님께 죄송해요.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3. 신윤주
    2016.10.19 16:0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ㅠㅠ 수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서평 1 : 양육 너머의 문제들



신윤주*



   그러므로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병적 사랑과 새로운 삶을 위한 급진적 자기 포기로서 죽음 사이에 선명한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 한 알카에다 대원은 "부당한 행동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더 많은 피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하면서 "너희가 삶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죽음을 사랑한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그의 선언 앞에서 죽음충동과 정치적 전략은 나란히 공존하고 있다.[각주:1]

- 테리 이글턴, 『성스러운 테러』 -  


 

    지난 7월 26일, 프랑스 북부의 생테티엔 뒤 루브래 성당에서 이슬람의 이름으로 테러가 자행되었다. 올해로 열아홉 살인 두 청소년이 공모한 테러였다. 이들은 오전 미사를 집례중이던 자크 아멜(84) 신부의 목에 자상을 입혀 살해했고 세 명의 수녀와 한 노부부를 인질로 잡았다. 신고를 한 것은 잡혀있던 인질 중 탈출한 어느 수녀였다. 이후 두 청소년은 당국에 의해 사살되었다. 공모한 청소년 중 아델 케르미슈Adel Kermiche는 지난 2015년에 시리아에 있는 극단주의 그룹에 합류하기 위해 시도하다가 구류되었다가 풀려나면서 보호관찰 하에 전자발찌를 하고 있었고, 반면 동부 프랑스 출신의 공범, 압델-말릭 쁘띠장Abdel-Malik Petitjean의 경우는 관련한 특이사항이 없다. IS의 대표적 선전 매체로 알려진 아마크 통신은 두 청소년이 IS에 충성을 맹세했다는 내용의 증거 동영상을 공개했지만 NBC 뉴스는 이 사건이 IS에 의해 구체적으로 지시된 정황은 없다고 보도했다. 쁘띠장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IS에 관해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각주:2]

    그리고 약 17년 전인 1999년 4월 20일, 미국의 콜로라도 주의 한 도시인 리틀턴에서 일면 유사점이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다.[각주:3] 마찬가지로 두 명의 청소년이 공모한 이 사건은 이후 모방 범죄의 모델이 되어 더욱 문제가 되었던 콜럼바인 고등학교의 총격 사건이다. 콜럼바인 사건을 다소 상세하게 정리해놓은 위키피디아 페이지에는 "콜럼바인 고등학교 대량살상"[각주:4] 이라는 표제가 붙어있다. 계획이 모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총기 외에도 폭탄으로 사용할 프로판 가스통, 아흡아홉 개의 폭발 장치, 자동차에 설치한 폭발물의 사용을 시도했으며, 결과적으로 총기를 사용하여 열두 명의 학생과 한 명의 교사를 사살했고 스무 명 이상에게 부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두 명의 사망자가 있다. 바로 이 사건의 두 공모자, 18세의 에릭 해리스Eric Harris와 17세의 딜런 클리볼드Dylan Klebold이다. 이들은 계획한 일을 마친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올해 2월, 딜런 클리볼드의 어머니인 수 클리볼드는 콜럼바인 사건과 아들 딜런에 관하여 쓴 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책은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A Mother's Reckoning』(반비)라는 제목으로 지난 달에 한국에서도 출간되었다.[각주:5] 출판사 서평에서 소개되고 있는 바와 같이, 올해는 콜럼바인 사건이 일어난 해로부터 17년이 지난 시점이다. 이 기간은 저자의 아들 딜런이 이 세상에 살았던 17년과 동수이기도 하다. 콜럼바인 이후 그날의 참혹한 비극을 애도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너무나 잘 안다고 믿었으나 결코 알 수 없었던 아들을 오롯이 헤아리기 위해 저자에게는 열일곱 해의 세월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부모가 그 무엇보다도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 세상에서 나만큼 더 잘 아는 부모가 없을 진실이 있다. 바로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다. 나는 딜런을 무한히 사랑했지만 그래도 딜런을 지키지 못했고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살해된 열세 명도, 그 밖에 상처입고 고통 받은 사람들도 구하지 못했다. 나는 딜런이 심리적으로 악화되어가는 징후를 파악하지 못했고, 만약 내가 제대로 보았다면 딜런이나 딜런에게 희생된 사람들이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을까.(23)  


   우리는 아이들에게 치아 관리, 영양 균형, 용돈 관리의 중요성 등을 가르친다. 아이들에게 자기 뇌의 건강을 잘 살피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자기 뇌건강을 건사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몰랐다. 내 삶에서 가장 큰 후회는 딜런에게 그걸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442)


   위에 옮긴 첫 번째 인용문은 펴내는 글을 통해 저자가 전하고자 한 말이고, 두 번째 인용문은 442쪽의 여정을 지나 마지막 장의 마지막 문단을 통해 해야만 했던 말이다. 특히 마지막 문장에서는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회한이 압축적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이 두 문단에는 어떤 '변화의 결과'와 '변화의 어려움'이 공존한다. 사건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딜런과 에릭의 가정을 의심했다. 딜런의 어머니인 저자 역시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양육 방식을 의심하고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량살상을 계획한 이 청소년에 관한 책임을 단순히 특정 부모의 양육방식parenting에 돌리기에는 상당히 복잡 다단한 사회적 문제들이 한데 얽혀있다.

    나중에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콜럼바인 고등학교는 학내 괴롭힘의 문제가 심각한 곳이었다. 약한 아이들은 운동부 학생들로부터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고 육체적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스스로 도덕적 엘리트임을 내세운 복음주의 기독교 학생들은 일부 아이들에게 으름장을 놓거나 개종을 강요하곤 했다. 한 학생의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가 머리에 불을 붙이는 식으로 괴롭힘을 당해 심하게 화상을 입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복도에서 폭력적인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교사들은 못 본 척했다. 딜런의 경우에도 괴롭힘을 당했다는 정황들이 있는데 일례로 게이라는 조롱, 옷에 케첩을 뿌리는 일, 차를 찌그러트려 퓨즈박스를 망가트리는 일 등이었다.[각주:6]  


    학교 폭력 문제 외에도 총기류에 대한 노출의 문제가 콜럼바인 사건에 영향을 미쳤다. 우선 다양한 종류의 영상물과 비디오 게임을 통해 청소년들이 폭력적 장면과 자극에 노출되고 있는데, 특히 미국의 경우에는 만 13세 이상의 청소년들이 총기를 사용하는 폭력적인 장면에 노출되는 경우가 30년 전에 비해 세 배 증가했다고 한다. 물론 폭력적인 영상물에 대한 접근성이 바로 콜럼바인 사건과 같은 일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을 구매하는 비율 자체는 일본의 청소년 사이에서 더 높게 나타나지만 일본에서 대량살상이 일어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총기를 소지할 수 있다는 변인이 폭력에 대한 노출이 비슷한 상황에서 대량살상이 가능한 조건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실제로 미국 내 학교에서 총기사사용건을 일으킨 학생들의 68퍼센트가 자신의 집이나 친척으로부터 총을 입수했다고 한다.[각주:7]  

    그러므로 콜럼바인 대량살상은 특정 지역사회 내에, 한 국가 안에, 현 시대의 문화 속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형성되어 있던 폭력성이 면밀히 상승효과를 만들어냈기에 가능했던 비극적 사건으로 조명해야 마땅하다. 그런 측면에서 부모의 역할은 수 클리볼드가 지적한 바, "치아 관리, 영양 균형, 용돈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속한 지역사회와 국가와 문화와 매체의 흐름에 주목하고 아이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연대하고 노력함으로써 자녀들 개인으로서 가정 밖에서도 자신의 삶을 안정감 있게 실험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기 위하여 작은 참여와 실천들에 힘써야 할 것이다. 

    물론 저자가 본문에서 치아 관리나 용돈 관리 등에 관한 것과 더불어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사회적 연대는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뇌의 건강"에 관한 관심이다. 저자는 아마도 딜런의 일차 양육자로서 가장 직접적인 대답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 되었던 것인지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었던 수 클리볼드에게, 뇌과학은 그의 질문에 가장 적절한 길을 열어주었다. 수 클리볼드가 잃어버린 단 하나의 퍼즐 조각을 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전체 그림을 조망하는 데 다른 어떤 조각보다 큰 역할을" 하는 어떤 하나의 조각이 있었다면 그것은 뇌건강의 문제였다. 물론 뇌건강 문제가 "딜런이 한 행동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폭력과 광기를 자동적으로 연결짓는 것이 옳다고 믿는 것도 않는다. 다만 정신질환과 폭력의 교집합이 발견되는 적은 비율, 4퍼센트의 경우에 딜런이 해당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고 여긴다.[각주:8]

    특히 뇌건강 문제와 총기 난사 사건 사이에 접점이 있다. 1999년, 콜럼바인 사건이 계기가 되어 미국국토안전부 비밀경호국과 교육부가 '안전한 학교 계획'을 발표했다. 37건의 학교 총격 사건을 검토하여 재발을 막고자 하는 계획이었다. 연구 과정에서 "범인들 대부분이 자살을 시도했거나 자살 충동을 느낀 이력이 있으며 극도의 불안 혹은 좌절을 경험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뇌건강 상태 진단과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폭력을, 그리고 자살, 섭식장애, 약물·알코올 남용 등 십대들이 마주한 여러 위험을 예방하는 데 핵심이 될 수 있다. (250) 

   저자는 '정신질환', '정신건강'이라는 말 대신 '뇌질환', '뇌건강'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선호한다.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기술하지는 않지만 "도움을 구하는 사람에게서 사회의 낙인을 벗겨내고", 그러면서도 폭력적 행동을 취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기 위한 대안으로 적절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가정하고 있는 것은 자살로 죽겠다는 욕망을 할만큼 심각한 우울에 빠진 바로 딜런과 같은 사람들을 포함한다. 신경과학자 제러미 리치먼 박사가 수 클리볼드의 접근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 '정신' 대신에 영상으로 보고 측정하고 수량화할 수 있는 물리적 증거가 있는 '뇌'에 집중하여 이해의 범위를 "뇌건강과 뇌질환이라는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세계로" 옮겨가야 한다고 주장했다.[각주:9]

   그러나 정신역동의 개념과 신경과학적 메커니즘을 연결하는 일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신과 뇌를 통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인 신경정신분석Neuropsychoanalysis이 있다. 일부에서는 신경정신분석을 1985년에 프로이트가 발표한 『과학적 심리학 초고』의 프로젝트를 잇고 완성하는 작업으로 본다. 정신현상과 뇌라는 두 차원을 잇는 매커니즘은 불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현상의 신경 상관물을 찾는 것은 언제나 설명되지 않은 부분을 남기며 실재하는 것은 언제나 "일단 한 번 가공된 이후에야 그것을 지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경계의 활성은 '언어'를 통해 가공되어 정신현상으로 변형된다는 사실은 널리 인정되고 있으며 동시에 언어로 가공되지 않은 채 아직 활성화 되지 않은 신경계가 간과될 수도 없다. 약물치료는 이렇듯 비활성화 상태인 신경계를 활성할 수 있다. 하지만 신경계의 활성 자체가 곧장 주체성의 발현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신경정신분석의 입장에서는 약물치료를 통해 기대되는 효과가 증상개선을 위한 하나의 옵션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뇌과학의 발전과 그 결과물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적용대상이 인간 주체인 이상 정신분석은 여전히 필요하다.[각주:10]

    향후 이어질 글에서는 수 클리볼드가 뇌과학을 통해 우울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던 것과는 다소간 결을 달리하여 정신분석적 관점으로 우울을 포착해보고, 이러한 우울이 테러리즘으로 이어지는 어떤 경우들에 관하여 논의를 좀더 이어갈 것이다. 도대체 어떤 모호성 혹은 복잡성 때문에 수 클리볼드를 만나거나 그의 글을 읽은 다수의 독자들은 '모른다'는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었을까?  


 한때 좋은 삶이라는 게 있었어. 좋은 아빠가 되어 주말엔 피크닉을 가고, 잠자리에서 이야기 책을 읽어주고, 그렇게 아들을 품위있고 충실한 사람으로 키우는 것. 그게 미국이었어. 그리고 당신은 모든 것을 제대로 했지. 그러므로 이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어. [각주:11]

- 라이오넬 슈라이버, 『케빈에 대하여』 -  


    * 필자소개  

메모광. 학부에서 국제어문학을, 석사과정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향후 프로이트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테리 이글턴, 『성스러운 테러』, 서정은 옮김 (생각의나무, 2007), 195쪽. [본문으로]
  2. http://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274168, http://www.nbcnews.com/storyline/isis-terror/france-church-attack-abdel-malik-petitjean-was-known-potential-radical-n618661 [본문으로]
  3. 최근에 있었던 프랑스 성당 테러의 케이스에 관한 조사는 좀더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적어도 이 두 사건은 청소년 가해자 두 명이 짝을 이루어 움직였다는 점, 그리고 둘 중 좀더 주도적인 한 명이 가학적 성향을 보이고 나머지 한 명은 쉽게 영향을 받는 성향인 듯하는 점을 통해 유사성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었다. 콜럼바인고등학교 사건을 계기로 2001년에 학교 총격 사건의 청소년 가해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이 연구에서는 가해자 중 25%가 짝을 이루어 움직였다는 점, 그리고 두 아이 중 한 명은 사이코패스이고 나머지 한 명은 영향을 쉽게 받고 의존적 성향이 있고 우울에 시달린다는 점이 밝혀졌다고 한다. (forensis.org를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에서 인용한 것을 참조) [본문으로]
  4. https://en.m.wikipedia.org/wiki/Columbine_High_School_massacre [본문으로]
  5.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홍한별 옮김 (반비, 2016) [본문으로]
  6. 수 클리볼드, 위의 책, 302-307쪽. [본문으로]
  7. FULL INTERVIEW 20 20 Diane Sawyer Sue Klebold Mother of Columbine Shooter Dylan ABC 2/12/16 (https://m.youtube.com/watch?v=zHRcF-pFGYI&autoplay=1); 더불어 총기소유에 관한 역사적, 신학적 통찰이 담긴 서보명 교수의 글의 일독을 권한다. (제3시대 웹진 87호, [비평의 눈: 미국의 묵시록 6] 총의 묵시록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m/post/647)) [본문으로]
  8.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249-250쪽. [본문으로]
  9. 수 클리볼드, 위의 책, 251쪽. [본문으로]
  10. 김규호, "뇌과학과 정신분석," 「FiLUM」 3(2015), 19-21쪽. [본문으로]
  11. 라이오넬 슈라이버,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 송정은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2), 595쪽. 2011년에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이 소설은 공교롭게도 콜럼바인 총격 사건이 일어날 즈음에 기획되었다고 한다. 이 책을 출판사에서는, 모성 이야기와 심리 스릴러가 절묘하게 혼합된 "소시오패스 아들을 둔 어머니의 독백"이라는 충격적이고 독특한 설정의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인용한 부분은 서간문으로 써진 이 소설의 화자인 에바(케빈의 어머니)가 수신자인 프랭클린(케빈에 의해 살해된 자신의 남편)을 향해 건네는 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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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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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윤주
    2016.08.18 00:3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필자입니다.ㅎㅎ 마지막 단락은 인용문과 인용문의 미주였는데 편집 과정에서 혼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 편집 간사님께서 댓글을 확인하신다면 수정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수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2. 2016.08.18 00:52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죄송합니다. 수정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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