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가이드13]



성서학에서 철학으로


- 바울 이해를 위해 다리놓기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베커를 마지막으로 성서학에서 논하는 바울에 대한 논의를 일단 마감하려 한다. 필자가 소개한 학자들 이외에도 바울에 관해 논할 가치가 있는 학자들은 많다. 여기에서 마감하는 이유는 앞으로 논의할 바울연구에 대한 글들에 대한 충분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후로 논할 학자들은 성서학의 외부에서 바울에 대하여 논의하는 바디우, 지젝, 아감벤 등이 될 것이다. 보통의 성서학자들에게 이들의 바울읽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현상은 당황스러울 것이다. 이전의 성서학의 결과물들을 완전히 무시한 결과물들이 인기리에 읽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약에 필자가 “자 지젝의 바울 읽기는…” 이라고 글을 시작한다면 이는 성서학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러한 단절을 거부하고 필자는 이전까지의 웹진의 글들과 이후 철학적 바울읽기에 대한 다리를 놓는 작업을 이번 웹진에서 감행한다.  

   다리를 놓기 위해 필자가 데려올 학자는 스테판 무어 (Stephen Moore) 라는 학자이다. 미국 뉴저지의 드류(Drew)대학의 신약학자로서, 보통의 성서학자들과는 다르게 데리다, 포스트모던 철학, 탈식민주의등의 현대적 담론에 익숙하며 선구적으로 성서학과 비평이론들 사이에 간문학적 연구를 시도해온 학자이다. 그가 몇년전에 쓴 [The Invention of the Biblical Scholar] 라는 책은 부제인 ‘critical manifesto’(비판적 선언) 라는 말에도 볼 수 있듯이 작금의 성서학에 대한 혁명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중심주제는 성서학이나 성서학자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학문이자 학자들인데, 그 목적은 성서에 대한 불경스런 질문들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보통 보수적이라 불리는 성서학자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학이라 불릴 수 있는 거의 모든 학문을 통틀어 지칭한다. 참으로 논쟁적이고 발칙한 생각을 던진 이유는 자신이 몸담고도 있는 성서학에 대한 자살적 충동때문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주제는 “왜 성서학은 현대의 이론이나 철학적 담론과는 대화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고민하다가 생겨난 것이란다.

    한국의 주류 성서학은 아직도 전통적인 역사비평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역사비평학이란 근대부터 발달한 성서를 연구하는 방법론을 뜻한다. 간단히 설명하면, 역사비평학은 성서 텍스트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그 역사적 근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역사비평에는 크게 본문 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 등이 있는데, 텍스튜얼 비평은 텍스트의 원래 모습을 추적해 들어가는 비평을 말한다. 성서텍스트가 역사적 발전을 거친 것이라고 한다면, 실지로 그러한데, 가장 초기의 판본을 추적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한 추적을 거듭한 결과 성서 텍스트는 여러 조각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예를 들면 복음서는 예수의 기적이야기,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와 기도문, 예수의 구전 비유, 초대 교회 예배문 등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 그 조각들이 하나의 양식으로 그 양식들은 각기 신앙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보여준다. 이러한 양식들의 전승과 기능을 연구하는 것이 양식비평이며, 편집비평은 양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편집의 결과로 나타난 복음서 등의 최종본의 편집의도를 살피는 것이 되겠다. 이러한 방법들의 공통점이 존재하는데 바로 성서 이면에 존재하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연구의 기본 목표로 삼는다. 무어는 이러한 성서학의 역사에 대한 관심 속에 사실 다른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고 말한다.

    이른바 근대의 시대에 이르러 계몽주의의 발달로 학자들은 성서에 대해 여러 이성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는데,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바로 성서의 권위에 관한 문제였다. 원래 성서의 권위는 성서를 토대로 하는 교황의 권위를 뜻하고 성서가 계시하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존했다. 즉, 하나님의 책이니 복종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근대의 시대에서 종교의 권위가 지배력을 상실하자 기독교는 문화를 통해서 자신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문화적 주도권을 가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서학이라는 학문을 필두로 기독교는 근대라는 거대한 파도를 넘으려 한 것이다. 무어의 성서학에 대한 비판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무어가 진단하기에 근대의 초기에 성서가 당면한 최대의 위협은 성서의 비도덕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여기서 근대의 도덕성(Morality)란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보편의 단계까지 확장되는 보편적인 도덕성(윤리)를 뜻한다. 즉, 인간이 지구에서 살건 화성에서 살건 기본적으로 지켜야할 보편적 삶의 도덕을 뜻한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성서의 여러 이야기들, 딸을 강간했다고 한 마을을 몰살시킨다거나 (야곱의 딸 디나, 창 24:1-41), 자신의 며느리와 동침하여 아이를 낳는다거나 (유다와 다말, 창 38:1-30), 이방인 민족을 가축과 아이까지 모두 죽이라고 하나님이 명령한다거나 (사무엘상 15장), 또한 그 명령을 어겼다고 역정을 내는 하나님의 이야기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게다가 인간의 죄성이 최초의 나무열매 하나 먹은 것 부터라는 설명은 애매하기 그지 없다. 무어는 이러한 시대에 등장한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오히려 기독교에게는 구원이었다고 말한다. 즉, 차라리 그 이야기들은 역사적인 증명할 수 없는 실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성서의 권위를 지키기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보통 성서학과 그 방법론을 이야기할때, 영어로는 biblical studies, biblical scholarship, 그리고 biblical criticism이라고 하는데, 무어는 ciriticism이란 표현을 쓰지 않는다. 무어가 보기에는 성서학은 역사비평에서 비평이란 의미의 수행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결국 주류성서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서에 비도덕성에 대한 질문과 비평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고 무어는 말한다.[각주:1] 

    신학교에서 처음 오경이 여러 문서들의 조합이라는 말을 들으면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무어에 따르면 차라리 문서설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몰두하는 것이 그 이야기들속에 나타난 성서의 비도덕성에 대해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은혜스러웠다는 말이다.[각주:2] 성서가 통일되고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고민하는 것보다 차라리 성서가 문학적으로 통일된 문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덜 고통스러웠다는 말이다.[각주:3] 옛날에는 은혜스럽던 기적 이야기들도 보편적 도덕과 종교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누구는 살려주고 누구는 내버려두는 신의 모습은 애매모호한 도덕일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적이야기는 '역사적이지 않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솔직한 비평이기 보다는 기적에 대한 보편적 도덕의 모순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각주:4] 차라리 “그런 일 따윈 없었어!”라고 하는 것이 성서는 '도덕적이지 않다'라고 하는 것보다 덜 아프기 때문이다.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성서의 창세기의 천지창조의 기록들은 실제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이야기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시험에 들곤 한다. 홍해가 두 쪽으로 갈라진 이야기가 실제로는 갈대바다라는 비교적 건너기 쉬운 바다를 잘못 표현한 것이라든가,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은 그저 이야기로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충격을 받는다. 이것들은 이른바 성서학자들이 역사적 비평의 결과로 말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역사비평은 신실한 성도를 넘어뜨리는 자유주의적인 신학이라 욕을 먹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성서의 허구성을 밝혀주는 용감무쌍한 학문다운 학문이라는 평을 들어오기도 했다. 무어에게는 이러한 구도를 다시 뒤집어 그 용감무쌍한 학문의 숨겨진 의도를 파헤친다. 곧, 이렇게 이야기하는 진짜 의도는 하나님이 왜 홍해를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구해주고 이집트인들은 죽였냐는 질문보다 대답하기 쉽기 때문라고 말한다. 오히려 성서의 역사성을 가지고 문제삼고 논하는 것이 성서가 가지는 비도덕성에 질문을 던지는 것보다 성서를 보호하기 쉽기 때문에 역사비평학적 연구가 근대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근대에 이르러 성서는 철학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하기 보다는 회피하였는데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성서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비평에서 성서에 대한 ‘역사’적 관심은 진리에 대한 추구에서 생겨난 것이기 보다는 근대의 역사적 상황속에 생겨난 필연적인 선택이 된다. 성서의 여러 문제성 있는 텍스트들은 비판과 비평의 대상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 연구의 무대에는 고대의 언어학, 철학, 고고학, 문헌학, 역사학, 문화학, 지리학등 수많은 전문분야들이 난무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그 연구 결과들은 전문성 없이는 읽기 어려운 것들이 되고 자연스럽게 보통의 신앙인들의 영역에서 분리되게 된다. 성서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구약이냐 신약이냐, 복음서냐 바울 서신이냐, 역사 비평학의 어떤 분야냐, 교회론이냐 그리스도론이냐, 복음주의냐 진보주의냐 등등 수없이 쪼개어진 분과 학문과 연구 주제 사이에서 선택해야 학위라도 하나 받을 수 있다.[각주:5]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떤 논의의 끝자락에서 예수의 이런 말은 이런 의미가 있다거나, 바울의 이런 말은 이런 이런 신학적 의미가 있다는 식의 연구논문을 내어놓게 된다. 비판이나 공격보다는 어떠한 가르침이나 신앙적 양상에 대해 동의하는 것으로 끝마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성서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성서학은 사전에 차단하고 스스로의 생태계를 만들어 무슨 무슨 학회, 무슨 무슨 위원회등으로 그 생태계를 유지한다. 결국 이제는 아무도 성서학의 결과물들에는 큰 관심이 없다. 기독교 서점의 많은 부분들은 천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는 복음에 대한 쉬운 설명집이나 설교문 모음집으로 채워진다. 

    신약을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매력적인 주제이자 일세를 풍미했던 예수연구에 대한 무어의 평가 또한 엄혹하기 그지 없지만 그의 책의 주제를 명확하게 해준다. 슈바이쪄가 이전까지의 예수연구를 단순히 근대 연구가들의 '자기 얼굴 그리기'라고 평가하고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라고 하였을때 의도는 하지 않았을지라도 결국 예수의 삶의 윤리적 가치를 무시한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슈바이쳐는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로 규정하고 그의 죽음을 새로운 시대로 향하는 역사를 수래바퀴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와 함께 예수의 가르침과 윤리를 종말론적 시대의 윤리라 평하였다. 즉, 예수가 말한 윤리와 도덕, 즉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으로 주고 헐벗은 자에게 겉옷을 벗어주는 윤리에 대해 엄숙하게 고민하기 보다는 현대에는 맞지 않는 종말의 시대의 윤리로 제한해 버린 것이다.[각주:6] 결국 슈바이쳐의 학문적 성과또한 근대 성서학의 숨겨진 목적을 벗어나지 않는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끊임없이 “예수는 누구였는가?”로, 또는 예수처럼 살기는 현재에는 불가능하지만… 이라는 말로 환원된다.

    결국 처음에 잘못 꿰어진 단추구멍처럼 성서를 과거의 역사에 대한 연구로 제한해버린 것이 오히려 성서의 가르침을 제한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 무어의 진단일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무어는 정치적 비평, 문학비평, 구조주의 비평, 해체주의 비평, 3세계 비평 등을 아우르며 모두 역사적 필요성에 의해서 생겨났지만 성서학 안으로 들어오면서는 성서의 도덕성에 대한 질문들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채 성서안에서 과거의 문제들과 씨름하게 되었고, 결국 성서는 과거의 거룩한 책으로 남게 되었다고 말한다. 예를 든다면 문학에 대한 해석에서 독자들을 강조하는 혁명적인 경향은 성서학으로 들어와서는 ‘현재의 독자’보다는 ‘내재적 독자’를 강조하는 경향으로 바뀐다. 아무리 현대적 방법론이 성서학으로 들어와도 결국은 과거의 사건의 재구성이라는 성서학의 기본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것은 성서를 현재적 사건으로 바꾸려는 충동을 무력화시킨다. 이 원인은, 다시 강조하자면, 성서에 대한 보편적 도덕성을 처음부터 묻지 않게 하기 위해 성서를 과거의 기록이자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서학 안에 윤리학, 정치학, 더 나아가 신학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무어는 말한다.

    그런 와중에 불현듯 새로운 사조가 일어났는데 인종, 젠더, 또는 계급이 인문학을 이끌던 시대에서 갑자기 종교로 담론의 관심이 변한 것과 발맞추어, 알랑 바디우, 아감벤, 지젝, 야콥 타우버스등이 성서를 읽기 시작했다. 무어는 이를 The Second Wave 라고 표현한다. 성서학을 깨우기 위한 첫번째 이론의 물결은 20세기 후반에 시작되었지만 결국 페미니즘을 제외하고는 성서학 자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스러져갔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두번째 물결이 나타난 것이다. 이전에는 이론을 성서학이 받아들여 해석을 생산하였다면, 이 두번째 흐름의 특징은 해석까지도 성서학 외부에서 이루어졌다.
    이 두번째 흐름들은 성서학 밖에서 다시금 보편성과 역사의 개념을 중심으로 근대에서 생겨난 수많은 분열들, 개인과 공동체, 종교와 정치 사이의 장벽을 허문다. 그리고 역사적 비평이나 성서학의 연구물들과는 별개로 성서를 ‘철학적 또는 이론적’으로 접근하여 근대의 시대에 성서로 부터 퇴출되었던 유령들을 불러모아 성서와 다시 만나게 한다.[각주:7] 이러한 철학적 접근을 무어의 평가를 필자의 논리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에 근대의 시작에 생겨났던 보편적 도덕이라든가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든가 이성과 감성의 분리등에 대해 제대로 비판하고 성서를 좀 더 열린 자세로 읽었더라면 성서는 그저 신화를 담은 이야기로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을까? 오히려 지례 겁을 먹고 성서의 권위를 보호하기위해 감싸기만한 결과로 성서는 침묵하는 책이 되버린건 아닐까? 그렇다면 다시금 근대가 만들어낸 여러 장벽들을 벗어나 성서를 읽으려 하는 일군의 철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 좋은 기회는 아닐까? 그들이 근대의 여러 장벽들을 비판하고 성서를 솔직하게 바라볼때 찾아낸 것들과 성서를 다시 읽으며 새롭게 열리는 종교적 담론에 귀기울여 보는 것이 우리 성서학자들을 다시 돌아보는데 필요하지 않을까?[각주:8] 이러한 권유로 무어는 결론을 맺는다. 그는 지젝이 옳다고도 바디우가 낫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왜 우리가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담담하게 논할 뿐이다. 물론 지나칠 정도로 성서학을 몰아붙이기는 하지만.
    원래 무어의 이러한 논지는 하나의 질문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왜 성서학은 인문학의 발전으로 인해 나타난 여러 비평의 관점들과 철학적 담론에 무관심한가?” 라는 질문이다. 보통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의 힘에 굴복한 수많은 이론적 성과들,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 해체주의, 맑스주의등이 현시대에 이르러 이렇다할 대안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는 것에 찾는다. 강력한 저항을 외쳤던 락과 힙합이 지금은 소수의 뮤지션들에게 부를 가져다주는 상품으로 전락하고, 강력한 비평의 도구로 서구의 철학적 이데올로기를 혁파했던 해체주의가 데리다의 죽음 이후로 텍스트 읽기의 유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맑스가 말하던 새로운 사회가 오기는 커녕 급속한 환경파괴로 인류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지금, 문화 현상과 텍스트 비평를 통해 새로운 사회와 인간을 꿈꾸고자 했던 이론의 영향력은 그 힘을 잃은 것 같다. 그래서 쉽게 성서학은 이론의 종언과 함께 성서학의 부흥을 외치곤한다. “다시 성서로 교회로 돌아가자!”란다. 무어는 질문한다. “언제 제대로 이론을 수행한 적이라도 있었나?” 스스로 기독교 가치의 보호자를 자처한 성서학은 스스로를 비판하거나 그러한 시선을 놓는 것 자체를 거부해왔다. 그런 성서학에게 이론을 통한 반성도, 대안이 없다는 반성을 위한 반성도 수행한 적이 없는 성서학의 모습이 지금의 성서학이라 말한다.
    긴 호흡으로 보면 어떤 역사이든 냉혹하다. 철학사의 수많은 천재들이 나타났고 세상을 종합화하는 멋진 담론들을 내어놓았지만 이내 역사의 장강속에 그 한계를 드러내며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러한 이들이 있었기에 냉정한 반성역시 가능했고 새로운 담론의 생산이 가능했었다. 성서학은 과연 스스로를 냉혹하게 반성한 적이 있었던가? 그 반성이 성서학 내에서 가능하지 않다면 (필자의 입장은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지만- 물론 아주 어려울 것이다.) 외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대화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필자가 공부한 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바울수업을 Ted. Jennings교수에게 들었을때, 수업 첫 시간에 그가 강조하는 것이 있다. 너의 삶의 가장 힘든 순간에 우연히 발견한 어떤 이의 편지를 무심코 넘기면서 읽은 것처럼 바울의 편지를 읽으라… 그말을 들으면서 떠올랐던 것은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한 장면이었다. (스포가 될수 도 있으니 평이하게 설명하면) 감옥에 갖힌 여주인공은 생사가 불분명한 가운데 조그만 감옥의 벽돌 사이에서 누더기와 같은 어떤 편지를 발견한다. 그 편지는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라고 시작하는 그 이전에 감옥에 갇혀 있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와 소망이 담긴 편지였다. 당신이 기독교가 무엇인지 예수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선교사나 목사들의 설명없이 “신의 뜻을 따라 예수 메시아의 사도로 부름받은 나 바울이…” 라고 시작되는 편지를 읽는다고 생각해보라. 과연 바울의 말중에 당신은 무엇을 깨닫게 될까?

   다음 웹진부터 지젝을 필두로 이른바 기독교의 눈이 아닌 눈으로 바울을 읽은 사람들을 소개할 것이다. 이들의 글들이 바울신학에 대한 필자의 글의 마지막 부분이 될 것이나 그것이 이들의 글이 다른 성서학자들의 글들에 비해 더 우월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재의 입장에서 더욱 면밀하게 검토되고 숙고되어야 할 것이다. 대신 안전벨트를 꽉 조이자. 생각보다 어지러운 여행이 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Stephen D Moore and Sherwood, Yvonne, The Invention of the Biblical Scholar: A Critical Manifesto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11), 47. [본문으로]
  2. Ibid., 52. [본문으로]
  3. Ibid. [본문으로]
  4. Ibid., 58–59. [본문으로]
  5. Ibid., 85. [본문으로]
  6. Ibid., 67. [본문으로]
  7. Ibid., 127. [본문으로]
  8. Ibid., 129–13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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