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가이드17]



지젝과 바울(IV)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사랑이 뭐길래


    지젝을 다루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지젝이 말하는 세계 그리고 그 세계가 안고있는 문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문제를 잘 꿰뚫어 본 종교인 유대교와 바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지젝이 말하는 그 문제를 해결할 묘수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간단히 말한다면 그 묘수란 그야말로 닳고 닳은 단어인 ‘사랑’이다. 지젝이 바울의 입을 빌어서 말하는 그 사랑이라는 것이 뭐길래, 만병통치의 묘약이 되는 것일까? 

   수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등에서 자주 쓰이는 말인 ‘진정한 사랑’이란 것을 상상해보자. 그리고 지금 아주 통속적인 장면 하나를 그려보자. 한 부유하고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 말을 타고 (또는 고급 차를 타고) 외딴 길을 지나가고 있다. 그때 한 젊은 처녀를 지나치게 된다. 그 순간 부자 청년을 둘러싼 시간이 천천히 흐르면서 그 청년의 눈길은 그 처녀에게 머무르게 된다. 그 순간에 관객은 또는 독자는 쉽게 알아차리게 된다. 아! 청년이 사랑에 빠졌구나. 너무 로맨스 소설같은 느낌이 들지만 이것이 바로 지젝이 바울을 통해 말하는 묘약, 사랑에 가까운 의미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이 있다. 먼저 청년이 사랑에 빠진 조건은 아마도 처녀의 아름다움이었겠지만 이 아름다움을 빼야만 더욱 사랑에 가깝다. 즉,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에 여타의 사회적 조건을 빼어버린 것. 그것이 사랑이다. 여기서 사회적 조건이란 아주 쉽게 표현하면 상징계를 뜻한다. 바로 여기서 사랑이란 인간의 언어와 사회적 질서로 만들어 놓은 모든 상징의 세계를 꿰뚫고 전혀 다른 경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절대 위와 같은 감성적인 로맨스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위의 예는 그야말로 쉽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미 부자 청년의 계급과 젊은 처녀와의 관계에 우선된 가부장적, 여성차별적 구조가 선행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진정한 사랑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이방인의 지혜, 그리고 기독교


   지젝이 말하는 이방인의 지혜(The very core of pagan Wisdom)[각주:1]는 플라톤이나 여타의 정치제도와 법률을 통해 인간 사회를 만들었던 사상들이나 종교를 뜻하며, 멀게는 인도의 힌두이즘 (카스트 제도를 바탕으로 한 우주론적 계급사회)나 가깝게는 그리이스 철학 (사회적 갈등들을 철학적 담론으로 순화시키는것)을 뜻할 것이다. 지젝은 기독교가 이러한 계급의 질서를 혁파하고 각 개인들이 “보편성 (universality)에 직접적으로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소개하였다고 말한다.[각주:2] 여기서 보편성이란 성령 또는 오늘로 말하면 인권이나 자유와 같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을 뜻하는데, 바로 이 성령의 보편성을 확증함으로써 기독교는 종래의 사회조직들이 기반하고 있던 상징적 질서를 벗어날 수 있는 (unplugging)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이다.[각주:3]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질서의 바깥에서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어떤 목사는 아마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은 가난한 자와 버림받은 자, 병든 자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이셨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부자와 건강한 자들에게 더욱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사회에 대한 전복적인 효과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난하기 때문에, 병든 것 때문에, 또는 버림받은 것 때문에 사랑받게 되는 것일까?

    지젝은 만약 사회적 타자라는 것이 사랑받는 조건이 되는 것을 지젝은 ‘휴머니즘’적 생각이라고 말한다.[각주:4] 아마도 누군가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아무 ‘조건’ 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젝에게 이러한 사랑은 현재의 사회구조를 개혁하는데 큰 의미는 없다. 결국 사회의 밑바닥을 위로 역전시키는 구조는 진정한 사회구조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버림받은 자들이 필요한, 또는 버림받은 자들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결과만을 낳기 때문이다.[각주:5] 만약에 버림받은 자들이 선택 받아 힘을 가진 자들이 되면 다음에는 이전의 힘을 잃어버렸던 자들을 사랑할 것인가? 지젝은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unplugging’ (상징계로 부터 벗어남)을 ‘uncoupling’(상징계로 부터의 단절)이란 말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이 ‘언커플링’은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 (고린도 후서 5장 17절)이란 개념에서 명확해진다. 성령의 신자들은 율법에 대해여 죽고, 더이상 인간의 관점으로 서로를 보지 않는다. 바로 새로운 피조물로써 서로를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 사회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 현실 사회와 단절된다면 사회적 개혁할 수도 없고 또한 현대 정치에서 그러한 단절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지젝이 바울의 탁월성을 발견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고린도전서 7장 29-31절, 새번역)


    새로운 사회정치구조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사회속에서 대안적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은 외형적 법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에 내장되어 있는 외설적 보안재 (obscene supplement), 즉 위반을 통해서 사회와 법체계를 유지하는 방식을 정지(suspend)시키는 것이다.[각주:6] 정리하면, 바울의 방식은 사회와의 단절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도착적 가능성을 정지시키는 것이라 할 것이다. 만약에 내가 누군가를 대할때 그의 사회적 지휘와 가치를 마치 없는 것처럼 대할 수 있다면, 나 자신의 모든 소유와 가치를 마치 없는 것처럼 대할 수 있다면,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 가족이나 친구등이 마치 나의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것처럼 대할 수 있다면, 사회라는 상징계의 도착적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발견한 대안이란다.


잠깐,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위와 같은 바울에 대한 설명이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대안의 부분에서 지젝은 마치 대충 유명하고 대충 진보적인 부흥사처럼 보인다. 또한 이러한 지젝의 생각을 설교중에 한다고 해도 보통의 청중들은 그리 어렵다거나 이상하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지젝을 마치고 지젝이 이해한 바울의 유용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지젝의 아주 발칙한 일면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려면 아주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더 물어야 한다. “정말 그런 완벽한 ‘아닌 척’하는 행동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젝에게 바울이 대안이 되려면 바울은 아주 완벽하게 신의 전능성을 부정하고 그의 죽음을 확신한 사람이어야 한다. 신의 죽음과 불능성이 선행되지 않으면 지젝에게 바울이 말하는 언커플링은 불가능하다. 이전 장에서 말했듯이 신의 불능성을 깨달은 것은 욥이었지만 그 비밀은 유대교 안에서 숨겨졌다. 이후에 그 비밀은 유대교가 ‘율법’이라는 독특한 체계를 계속적으로 발전시켜서 다른 정치나 사회구조 속으로 편입되는 것을 막았다. 그들은 ‘디아스포라’로써 또는 이방인으로써 다른 국가에 편입되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비밀이 완전히 드러나게 되는데,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지젝에게 화육 (신의 인간됨, incarnation)은 욥이 발견한 신의 불능이 급진화된 형상이다.[각주:7] 보통의 기독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humanity)과 신성(divinity)의 분리될 수 없는 융합이며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 인간의 죄를 해결해주는 존재이지만, 지젝에게 그리스도의 인성은 바로 욥이 발견한 신의 불능의 부산물 (fallout)이다. 바울이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선언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은 신의 불능이 죽음으로 클라이맥스에 이르게 되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이다.[각주:8] 신 (big Other)에게서 벗어난 인간이 되어야 비로소 상징계를 벗어나서 리얼(Real)에 기반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각주:9]  

    지젝에게 현대의 교회는 바울의 혁명성이 사라지고 다시금 ‘도착화’된 곳이다.[각주:10]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해결이자 자유를 의미했지만, 이제는 기독교는 정확하게 자신이 해체시키고자 한 이방인의 지혜, 도착적 상징계가 되어 죽었던 신과 그리스도를 살려내고 인간을 신과 그리스도에게 값을 수 없는 빚을 진 존재로 만들었다. 다시금 율법 (신에 대한 의무)과 향유를 기반으로 한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바로 ‘도착적 핵심’이 지배하는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지젝에게 성령은 오로지 신의 죽음 이후에 탄생하는 것이다. 진정한 성령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는 기독교는 그가 분투했던 종교적 구조에 다시금 갇혀버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 오로지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지젝이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Slavoj Žižek, The Fragile Absolute, Or, Why Is the Christian Legacy Worth Fighting For? (London; New York: Verso, 2000), 120. [본문으로]
  2. Ibid. [본문으로]
  3. Ibid., 121. [본문으로]
  4. Ibid., 126. [본문으로]
  5. Ibid., 125 [본문으로]
  6. Ibid., 130. [본문으로]
  7. Adam Kotsko, Zizek and Theology, 1 edition (London ; 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8), 97. [본문으로]
  8. Ibid. [본문으로]
  9. Ibid., 98. [본문으로]
  10.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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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6]



지젝과 바울(II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도착에 빠진 세계와 기독교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쾌락에 대한 욕구가 있는데, 이는 되도록이면 고통은 피하고 쾌락은 더 느끼려하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이를 쾌락원칙이라고 하였다.[각주:1] 여기에서 프로이드가 말하는 쾌락이란 보통의 흥분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쉽게 설명하면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프거나 짜증이 나거나 하면 인간은 흥분상태가 된다. 이것이 고통의 상태, 또는 불쾌한 상태이다. 그런 증감된 흥분을 낮추어 주는 것이 바로 쾌락의 상태로 가는 것이다. 물을 마시거나 밥을 먹거나 스트레스를 풀거나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쾌락의 상태로 간다는 것은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각주:2] 이렇게 보면 쾌락-불쾌는 ‘같은 차원’에 속하는 경제학적 관계에 있다. 불쾌함의 강도, 즉 흥분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쾌락의 폭도 증가한다. 즉, 불쾌함을 열심히 저축하면 더 많은 쾌락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각주:3] 어린이는 즉각적인 해소를 위해 노력하지만 그 어린이가 커서 현실사회에 적응하게 되면 불쾌를 참아내면서 자신에게 허용된 쾌락을 즐기게 된다. 그리고 그 허용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회의 도덕법 (Moral Law)이다. 만약에 인간이 그 허용치를 넘어서까지 쾌락을 느끼려 한다면 더 이상 쾌락원칙이 통하지 않게 되고 고통이 시작된다. 라깡은 그 이후 부터의 어떤 상태를 쾌락이란 말과 구분되기 위해 향유(Jouissance)라는 말로 표현된다.[각주:4] 이제 쾌락을 넘어선 향유는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을 동반하게 된다.[각주:5] 그래서 향유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의 의미를 담게 되는데, 하나는 어떤 중요한 법에 대한 위반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그에 따른 고통과 죄책감을 뜻한다. 위반과 그 위반을 통한 고통에 따라오는 즐거움. 아마 이것이 향유에 대한 간단한 정의가 될 것이다. 바로 쾌락과 불쾌의 차원을 넘어서서 고통 속에서 쾌락을 즐기는 것을 말하는데, 바로 이러한 불쾌를 넘어서는 고통인간은 바로 이런 향유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며 이 밑바닥에는 ‘죽음에 대한 충동’이 자리하고 있음을 말했다.[각주:6] 아담 커스코는 다음의 예를 통해 지젝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이 향유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도덕법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히 살아가려는 한 구도자를 상상해 보자. 일체의 욕망과 욕구를 끊어버리고 오로지 타자에 대한 사랑과 희생만으로 그 삶을 채우려 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큰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도무지 욕구와 성적 욕망을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더 깊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산 속이나 사막으로 들어가 세상과의 모든 연결을 끊고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육체를 고문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정상적인 삶도 아니고 건강한 삶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향유의 행위가 필요하다. 즉, 어느 정도 주어진 법을 어기는 것을 즐기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지젝은 ‘inherent transgression’ (내장된 위반)이라 하였다. 예를 들면 규정속도 시속 100킬로미터의 고속도로에서 5킬로 정도는 더 과속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듯이, 철저한 법에 대한 준수를 요구하는 신의 목소리에는 이미 약간의 위반을 전제하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라깡은 여기에서 더욱 나아가 바로 초자아적 목소리 (법을 지켜라!)에는 “향유를 즐겨라!”라는 목소리가 숨어있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를 ‘외설적 초자아의 보완재’ (Obscene superego supplement)라 하였다.[각주:7] 기억해 두자. 이러한 향유와 초자아, 달리 말하면 ‘big Other’ (대타자)의 관계가 더 과도해지는 것을 지젝은 ‘도착’ (Perversion)이라 부른다.  

   자, 이제 지젝과 기독교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함에 있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Perversion (도착)이라는 개념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원래 프로이드는 이성애에서 정상적인 성행위를 벗어나는 것을 도착이라 불렀으나 라깡은 이후 프로이드가 내린 정의를 변형시켜 성적 행위의 형식이 아니라 하나의 임상적 구조로 정의하였고, 자연적인 기준으로 보면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지만 분명 존재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였다.[각주:8] 이 단어가 지젝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향유(jouissance)와 대타자(the big other)의 관계를 나타내는 정신분석학적 진단중 하나를 ‘도착’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가지가 있는데, Psychosis, perversion, and the two forms of neurosis: obession and hysteria가 그것이다.)[각주:9]


   이러한 향유의 차원은 상징계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바로 상징계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적 기구 (The big other)안에서 결여를 찾고자 하는 끊임없는 충동으로 인해 나타난다. 여기에서 도착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지는 것은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면서’ 향유적 존재인 인간을 여전히 이데올로기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 바로 ‘도착’이란 증세이기 때문이다. (정신병은 아예 상징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외되며 히스테리, hysteria에 대해서 지젝은 자주 언급하지만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아담 커스코는 도착이라는 개념에 지젝이 점점 집중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의 유명한 말인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 (the perverse core or Christianity)으로부터 지젝과 기독교의 다리놓기를 시도한다고 말한다.[각주:10] 커스코는 여기서 지젝에게 도착이라는 것은 완전한 윤리적 실패 (the ultimate ethical failure)란 것을 강조한다.[각주:11] 지젝에 따르면 도착이란 스스로를 타자의(the Other’s) 향유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외설적 초자아의 보완재’로 직접 동일시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공식적인 이데올로기 텍스트의 경계들 사이를 읽고 도덕적 법이 실제적으로 위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즉, “도착은 바로 ‘내재된 위반’인 것이다.”[각주:12] “이데올로기적 판타지는 공식적 도덕법을 지탱하고 도착은 법을 강화하고 심지어 필요로 하며 도착적 쾌락은 바로 그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착은 전복이 될 수 없다.”[각주:13]

    지젝은 가장 도착적인 예로서 종교적 근본주의 (religious fundamentalism)를 든다. 도착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고 그것을 정치적 실천의 안내로써 이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한편으로는 수긍할만한 공개적인 얼굴 (예수는 사랑을 가르친 ‘좋은 사람’)을 놓고 그 밑에는 외설적인 향유 (바로 복수하는 하나님)를 놓아두는 것이다.[각주:14] 동성애자들을 죄인으로 혐오하고 심판을 외치는 사랑 많은 목사님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 (증오와 사랑)은 드러난만큼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는데, 바로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것 자체가 좀 더 높은 목표를 위해서 상식적인 도덕 따위는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다종교사회에서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외치는 기독교 근본주의는 타종교에 대해 비방과 증오를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 겉보기에도 모순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교도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 때문이다. 그러기에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 (단군상의 목을 자르거나 타종교의 성지에서 땅밝기를 한다거나)에 책임지기를 거부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상식이나 도덕에 비추어 보았을때 부끄러운 행동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강력한 필요성 (하나님 나라를 위한)에 의해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지젝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정확히 그 겉 사랑에 있지 않고 바로 이러한 도착적 구조에 있다고 지적한다.[각주:15] 결국 위반을 통한 고통을 포함한 쾌락 (향유)에 의해 기독교 근본주의는 유지되는 것이며 이를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라고 말한 것이다. 자, 여기서 앞장에서 논했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의 예로서 기독교를 기억해보자. 신앙인이 교회에 들어가 교회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면 그들은 하나님, 또는 교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교회가 보기에, 또는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신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며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길은 그것을 가로질러 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결국 비어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비록 계속 교회의 이데올로기에 머문다고 해서 그것이 악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타자가 원하는 것에 자신을 맞추어가는 것은 노이로제나 신경증 (neurosis)적 증상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 책임을 본인에게 지울수는 없기 때문이다.[각주:16] 그러나 도착적인 상황은 다르다. 바로 윤리적 책임을 요청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말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도착적 상황이 편만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현대사회에 이데올로기에 대한 탈출구를 찾을 수도 있다. 바로 ‘인간은 스스로의 향유에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라는 지젝의 말이 무서워지는 순간이다.[각주:17] 

    바로 이 지점이, 나의 판단에는, 지젝의 담론으로 윤리와 신학이 파고 들어오는 곳이다.


지젝의 바울, 도착적 기독교의 해결책



    지젝과 신학의 관계가 밀접하다 못해 지젝이 신학을 이용하여 그의 철학의 탈출구를 찾으려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지젝과 신학’ [Zizek and Theology]을 쓴 아담 커스코이다. 커스코는 지젝이 자신의 체계와 진리담론의 한 예로써 바울을 이야기한 것과는 달리 (바디우는 다음편에서 논할 예정이다.) 지젝은 신학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고 말한다.[각주:18] 지젝의 책, [The Puppet and The Dwarf] (한국어책 제목: 죽은 신을 위하여),의 서론은 그 유명한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역사철학의 첫번째 테제로 시작한다.[각주:19]

    장기를 두는 인형이 있다. 그리고 이 인형은 절대 인간과의 장기게임에서 지는 법이 없다. 알파고를 상상해도 된다. 그 테이블 안을 들여다 보면 한 난장이가 이 인형을 조종하고 있다. 벤야민은 이 인형이 역사유물론 (historical materialism)이고 그 안의 난장이는 바로 신학 (theology)라고 말한다. 벤야민의 이 유비는 여러가지로 설명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지젝이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이다.

    우리는 이미 앞장에서 기독교를 하나의 상징계의 산물로써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을 통해 이해해보았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자. 기독교의 역사 서술은 벤야민의 지적처럼 ‘승자의 기록’이다. 여기서 승자의 기록은, 바로 살아남은, 또는 상징계 안에 알맞게 포섭되어 기억된 자들의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지젝이 이미 지적하였듯이 상징계는 결핍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에 그 핵심은 텅비어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우리가 적은 방식과는 반대의 어떤 역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잊혀진, 사라진 역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지젝이 보기에 아마도 현실의 상징계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판타지를 가로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말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 유일한 한 사람이 발터 벤야민이라는 것이다.[각주:20] 앞으로 발터 벤야민은 조르지오 아감벤을 다룰때 더욱 심도 깊게 이야기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핵심은 역사적 유물론의 진정한 힘은 바로 신학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인데, 이는 당시의 맑스와 엥겔스가 말하던 원시공산사회로 부터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져 결국에는 공산사회가 된다는 필연적인 역사유물론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벤야민의 역사론을 지젝은 ‘억압된 것의 귀환’ (return of the repressed)을 응용하여 과거의 실패한 혁명적 시도들과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것들의 귀환이 바로 실재적인 혁명의 상황의 가능성이고 바로 그러한 잊혀진 과거의 실패한 시도들이 구원받는 것이 혁명의 상황이라 말하였다.[각주:21]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는 역사유물론이 퇴조되고 있는 현시대에서 벤야민의 난장이 유비를 거꾸로 볼 것을 주장한다. 곧 신학이 장기 인형이고 그것을 조종하는 것은 바로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것이다. 즉, 과거의 벤야민의 시대에는 역사적 유물론을 통해 신학을 재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잊혀진 과거를 ‘구원’하는 것이 혁명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시대에는 신학으로 부터 역사적 유물론을 재발견하는 것이 혁명적 사고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젝은 기독교의 ‘도착’적 사고로 인해 언제나 패배할 수 밖에 없는 게임에서 그 안에 숨어있는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난장이를 붙잡음으로 혁명에 다가간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지젝은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나는 유물론자이고 어쩌고 저쩌고해서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kernel) 이 하나의 유물론적 접근으로도 가능하다라는 것이 아니다. 나의 주제는 더 강력한 것이다. 바로 이 핵심은 오로지 하나의 유물론적 접근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이 유물론적 접근은 기독교적 핵심으로서만 접근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통해야만 한다!”[각주:22]


    다시 ‘도착’이란 개념으로 되돌아가보자. 지젝이 말하는 ‘도착’은 매우 중요한 두가지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가 된다. 첫번째는 왜 지금 기독교인가? 두번째는 왜 바울인가? 이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간단히 표현한다면, 지젝이 보기에 기독교는 매우 도착적인 성격이 강한 종교이고 현대는 그러한 도착적 증상이 사회 전체에 편만한 상황이다. 즉, 현대의 가장 큰 문제는 ‘도착’인데 기독교에 이미 그러한 ‘도착’적 증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도착’의 할아버지 정도 되는 존재이다. 두번째의 답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에 내재해 있는 ‘도착’에 대해 이미 알아차리고 반응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이다. 고로 바울이 ‘도착’을 해결한 방법이 현재에도 가능하다면 바울이야말로 현대 사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처방이 된다는 것이다. 차근 차근 따져보자. 

    커스코는 현대 사회에 대한 지젝의 진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현대사회는 곧 대타자 ‘Big Other’가 죽은 사회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떠받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사라진 사회이다. 원래 대타자의 역할은 주체가 상징계에 잘 안착하고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 내려진 법 (신의 법)을 어기는 향유를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이다.[각주:23] 예를 들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교회에 두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삶의 목표를 교회를 통해 공급 받으면서 조금씩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쾌락을 누리며 (예배를 빠진다거나, 이웃을 미워한다거나)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나 대타자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지켜야 할 신의 법도 이를 어기며 얻는 쾌락도 존재하지 없다. 갑자기 자신이 믿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을 상상해 보자. 단순히 ‘신이 없다’는 생각이 그/녀를 더 자유롭고 주체적인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죽으면 그만’이라는 허무와 부모의 지갑에서 몇만원을 훔치던 스릴과 회개의 기쁨이 없는 무료한 삶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현대의 인간은 스스로 법을 세우고 그 법을 어기는 방법으로 대타자의 죽음을 해결해 보려했는데 이것이 정확히 지젝이 지적하는 ‘도착’적 행위이다.[각주:24] 간단한 예를 들어본다면, 보수적인 교회들에서 동성애를 비판할때 이를 수간(동물과의 성행위)으로 연결하여 폄하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이를 매우 ‘도착’적인 행위로 보는데, 여러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의 섹스 스캔들에는 무감각하면서 동성애를 이러한 수간과 같은 매우 원초적인 금지에 대해서는 맹렬하게 반응한다. 곧 그들 스스로 전통적인 법을 세워두고 그것을 완전히 위배하는 것과 같은 경우에만 반응하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보면 그들이 대타자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고 대신에 스스로의 향유(쥬이상스)를 위해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 행위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을 믿으면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할 수 있다는 기독교 번영주의도 ‘도착’적 행위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으면 성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어쩌면 복음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이러한 생각이 오히려 전통적인 기독교 정신이라 여겨지는 것 자체가 ‘도착’적 사고가 편만한 것을 의미한다.

    지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사회의 ‘도착’적 현상이야말로 기독교가 생존해온 방법이라고 밀어붙인다. 아니 더 나아가 하나님이야말로 도착적이라고 말한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기독교 신의 방법은 좋은 것을 위해서 언제나 악한 것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구원이란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것을 내버려두고 예수가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 유다에게 스승을 배신하는 길을 걷게하지 않았던가? [죽은 신의 위하여]의 부제가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인데 지젝은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야말로 ‘뭔가 악한 일을 하고 좋은 결과가 오기를 바라는’것 이라고 말한다. [각주:25]그리고 지젝은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바울이 찾았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제 본격적으로 지젝의 관점과 그 처방을 살펴보자.[각주:26]

    지젝이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유대교의 특이성으로 주목하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아니라 욥이다. 모세나 다윗과는 달리 욥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나 다윗은 공동체와 국가를 신의 법과 법칙 위에 세운 인물들이지만 욥은 정면으로 신의 법에 대해 질문하고 의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말하기를, 모든 종교나 국가는 어떠한 법을 토대로 이루어졌고 그 법은 언제나 신의 명령을 통한 금지를 바탕으로 세워지는데 그 저변에는 어떠한 폭력적 살해의 사건이 기반하고 있다고 하였다.[각주:27] 그렇다면 신의 법을 열심히 지키려는 욥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주고 시험하는 신의 존재는 프로이드의 초자아와 같은 외설적인 존재이다.[각주:28] 예를 들면, 욥기의 신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원수를 사랑하지 못해 몸부림치는 인간을 득의의 웃음으로 바라보는 신이다. 욥기의 마지막 40-42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욥에 대한 해석은 달라지겠지만 지젝이 말하는 욥기의 해석은 성서학에서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마지막에 욥이 신의 존재와 전능성을 인정하긴 하지만 신 스스로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욥 42:7,8)라는 말로 욥의 불평과 신에 대한 질문이 옳았음을 말했기 때문에, 지젝은 욥이야말로 신의 전능하지 못함을 드러내고 고발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즉,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것은 욥이 아니라 야웨였던 것이다.[각주:29] 여기서 우리는 유대교에 두가지 핵심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법을 통하여 국가를 유지하고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생존을 추구하는 ‘도착’적 핵심(Perverse Core)과 그 법의 이면에 존재하는 외설적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 신의 전능성에 의문을 던지는 ‘전복’적 핵심(Subversive kernel)이 그것이다. 지젝은 욥기의 마지막에서 욥이 고개를 숙이고 신의 법에 수긍하면서 유대교의 전복적 핵심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본다. 욥은 비밀을 알았지만 사회의 보전과 공동체의 생명이 더욱 중요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교황이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차라리 알면서도 수긍해 주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이후에 용기있게 신의 죽음을 말한 자가 유대교에 나타났으니, 그는 예수와 그의 뒤를 이은 바울이었다.[각주:30]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로마서 7:24)로 대표되는 로마서 7장은 보통 유대교인이었던 바울이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토로하면서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복음을 발견하게 되었던 과거를 회상하는 구절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최근의 로마서 7장의 해석은 바울이 스스로의 유대인됨을 부끄러워하거나 죄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에 착안하여 본문을 율법폐기론적 (율법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입장) 구절이 아니라 율법의 선함을 강조하면서도 그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해석하거나 이방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율법의 장단점 정도로 해석한다. 지젝은 로마서 7장이 정확하게 바울이 발견했고, 이미 욥이 발견한 율법과 야웨신에 존재하는 ‘도착’성에 대한 것으로 해석한다.


    “나는 내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여기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로마서 7장 18~23)


    욥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결국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불능(Impotence)을 발견했던 것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법(율법)을 따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을 어길수 밖에 없는 법칙이 그 속에 존재함을 발견했다. 즉,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에 대해 반대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가 율법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비밀한 입장을 소개했던 것이다.[각주:31] 정리하면, 바울이 발견한 유대교의 비밀은 바로 전복적 핵심 (kernel)이며 그것은 한마디로 ‘전능한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로마서 7장 25절)이라고 말할 때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을 통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 27장 46절) 신의 불능성이 드러났고 바야흐로 신의 아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바야흐로 바울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을 발견함으로 새로운 비전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오로지 역사적 유물론으로서만 기독교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바로 그 비전을 지젝은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열쇠라고 보는 듯하다. 이는 다음 웹진에서 논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Dylan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1 edition (London ; New York: Routledge, 1996), 150. [본문으로]
  2. Sigmund Freud,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And Other Writings (PENGUIN CLASSICS, 2007), 66–67. [본문으로]
  3. 김상환, 라깡의 재탄생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2), 102. [본문으로]
  4. 이현우는 그런의미에서 향유라는 번역보다 ‘향락’이라는 번역이 더 원뜻에 가깝다고 하는데 원래 Jouissance라는 단어가 성적쾌락에 대한 의미도 있기 때문에 필자는 옳다고 본다. 그러나 향유라는 말이 많이 쓰이므로 여기서는 향유라고 쓰겠다. https://blog.aladin.co.kr/mramor/category/1216428?CommunityType=MyPaper&page=161&cnt=801 [본문으로]
  5.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93. [본문으로]
  6. Ibid., 102. [본문으로]
  7. Adam Kotsko, Zizek and Theology, 1 edition (London ; 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8), 57–58. [본문으로]
  8.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141. [본문으로]
  9. Kotsko, Zizek and Theology, 61. [본문으로]
  10. Ibid., 62. [본문으로]
  11. Ibid. [본문으로]
  12. Ibid. [본문으로]
  13. Ibid. [본문으로]
  14. Ibid., 63. [본문으로]
  15. Ibid. [본문으로]
  16. Ibid. [본문으로]
  17. Ibid., 61. [본문으로]
  18. Ibid., 74. [본문으로]
  19. Slavoj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The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 (Cambridge, Mass.: MIT Press, 2003), 3. [본문으로]
  20.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Second Edition edition (London; New York: Verso, 2009), 151. [본문으로]
  21. Ibid., 158. [본문으로]
  22.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6. [본문으로]
  23.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85. [본문으로]
  24.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53. [본문으로]
  25. Kotsko, Zizek and Theology, 88. [본문으로]
  26. 필자는 많은 부분 아담 코스트코의 ‘지젝과 신학’ [Zizek and Theology]의 3장 ‘The Christian experience’부분을 참고했다. 아담 코스트코는 이 장에서 [죽은 신을 위하여]이전의 지젝이 평가하는 유대교에 대해 서술한다. 원래 프로이드의 저서 [Moses and Monotheism]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평가하였으나, 그 이후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는 프로이드를 참고하면서 율법에 대한 논의를 통해 유대교의 특이성을 평가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Ibid., 88–90. [본문으로]
  27. 이경재, 욥과 케보이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193. [본문으로]
  28. Ibid. [본문으로]
  29.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126–127. [본문으로]
  30. Kotsko, Zizek and Theology, 95. [본문으로]
  31. Ibid., 9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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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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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aecceitas
    2016.06.10 11:5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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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Adam Kotsko는 코스트코/카스코 중 하나로 택일하거나 아니면 코츠커 정도로 음역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
  2. 한수현
    2016.06.12 11:3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네. 알겠습니다. 원고를 몇번에 나누어 쓰다보니 미쳐 고치지 못했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극과 구원을 변주하는 새로운 신학의 내러티브를 위하여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점점 재난으로 파괴되어가고 묵시록의 파국적 이미지가 막연한 불안을 넘어 현실적 공포를 자아내고 있는 현재, 수많은 이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자연 일반의 재난 앞에서 이런저런 질문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앞으로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이 파국적 공포 앞에서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는가?” 물론 그 모든 질문들도 정작 재난을 직접적으로 당한 사람들 앞에선 살아남은 자들, 그래서 미래를 염려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자들에게나 해당하는 사치스러운 질문에 불과할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재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가까운 가족과 이웃과 친구를 방금 막 잃어버린 자들에게서 우리가 듣게 되는 가장 절실한 물음은 바로 ‘왜?’라는 질문이 아닐까. 그런 사건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가를 완벽하게 복기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인간은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된다.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일 텐데,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먹고 사는 존재이므로. 그런데 과연 이 ‘왜’라는 질문 앞에서 정직하게 이유를 말할 수 있는 담론이나 학문이 존재할까. 물론 나 역시도 “이유가 없다는 것”. 혹은 “인간사의 불가해한 비극 앞엔 그 어떤 초월적/외부적 원인도 없다는 것”. 그래서 “그 이유 없음, 그 무의미함이 가장 잔혹한 ‘실재’(real)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니힐(Nihil)한 답변들이 갖고 있는 윤리적 가치에 대해서도 충분히 긍정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리스도인인 이상 왜 인간은 특히 유신론자들은 그와 같은 니힐한 답변에 여전히 만족하지 못할까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러한 니힐리즘적 답변들에선 니힐을 신의 부재로 보든, 타자와의 완벽한 통합의 불가능성 또는 인간 커뮤니티의 완벽한 조화의 불가능성으로 보든, 또는 온전한 만족이나 행복, 인간 존재의 영원이나 불멸의 불가능성 등으로 보든, 결국 그것은 애당초 소유하지 않았던 그 무엇이 없음을 확인하게 되는 계기를 의미한다. 욥이 자신의 고난에 사실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처럼 말이다.

The Patient Job by SEGHERS, Gerard
Oil on canvas, 192 x 242.5 cm, National Gallery, Prague

한데 만일 진실이 그런 것이라면 비극적 사건 앞에서 ‘신의 부재’를 말해온, 더 나아가 ‘신의 부재 가운데 현존’을 주장해온 신학의 전통은 그야말로 우울증적 주체들의 병리적 증상 밖에 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우울증적 주체가 어떤 대상을 애도하는 과정에서 범하는 결정적인 오류는 '상실'과 '결핍(결여)'을 혼동하는 데 있다. 우울증은 소유했던 대상의 상실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대상을 결핍하고 있었다는 데서 비롯된다. 결국 우울증은 “마치 결핍된 대상을 과거에 소유했지만 나중에 잃어버리고 만 것처럼” 행하기 때문에 일종의 '기만'인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대상이란 그 자체로서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실재'로서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울증은 대상이 처음부터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다시 말해, 대상의 출현은 그 대상의 결핍과 함께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대상은 공허/결핍을 긍정하는 것 이외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대상은 결국 그 '자체로' 실존하지 않는 왜상(歪像)적 실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울증의 패러독스는 결핍이 상실처럼 기만적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마치 대상을 소유했던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데 있다. 그러한 우울증의 패러독스로 인해 “기만적인 스펙터클”이 나타난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애초부터 결핍된 대상, 우리가 결코 소유하지 않았던 대상을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우리가 아직 소유하지 않은 대상을 마치 잃어버렸던 것처럼 행동하는 데 있다. 이처럼, 정상적인 애도 과정의 작동에 저항하는 우울증자는 정반대의 형식을 취한다. 대상을 잃어버리기도 전에 그 대상에 대해 지나치고 과도하게 슬퍼하는 기만적인 스펙터클의 형식 말이다(지젝,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220-221쪽).

그런데 정말 이것이 모든 종교인들의 '신 부재' 경험에 그대로 다 적용될 수 있을까? 적어도 난 아니라고 본다. 신의 부재에 관한 경험은 결코 근원적인 결여의 문제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애초부터 없던 것을 나중에 가서야 원래 있었다고 착각하는 '결핍'(lack)이 아니라 오히려 정말로 있음을 경험해온 것을 갑작스럽게 잃어버린 '상실'(loss)이라고 봐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의 부재만큼이나 신의 현존 역시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현재적인 경험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이제는 흔적만 남은 것이라 할지라도 신의 현존은 신의 부재만큼이나 명확한 인간의 경험이다. 우리는 수많은 비극의 사건들 속에서 반드시 신의 부재만을 경험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곳에서 비통한 눈물을 흘리며 희생당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으로 육화하는 신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의 부재 가운데 현존”(God's presence in absence)이라고 하는 신학의 오래된 통찰은 억압된 것의 귀환 같은 것으로서, 현존을 경험해온 신을 상실한 것, 혹은 그의 떠남/죽음에 대한 인간의 애도이자 신의 귀환을 염원하는 존재론적 갈망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 근원적인 부재의 상실감은 신의 현존에 관한 경험만큼이나 역시 원형적인 차원의 것일 테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떤 것이 먼저라고 말하기 힘든 비선형적 시간의 구조 속에 존재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현존-부재-상실감-애도”의 순환 고리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역사적(사회적, 자연적) 사건을 경험하며 그 가운데 초월적/원형적 사건에서 무의식적으로 원인을 찾게 마련이다. 그만큼 인간사에서 부딪히게 되는 다양한 차원의 비극적 사건들, 자연재해건 사회적 시스템의 위기에서 초래된 재난이건 인간관계 안에서의 불행한 사건이건 간에 그런 사건들엔 언제나 해석의 잉여 혹은 공백의 지점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고대 이래 전통적으로는 종교나 신화가, 그리고 근대를 거치면서 종교를 제치고 정신분석학이나 문학이 인간이 겪는 문제상황을 정의하고 해석하는 새로운 상징체계로 기능해왔다. 즉 종교/신화/정신분석학/문학이 계속하여 불가해한 사건 앞에서 해석의 공백을 채우려는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에 대해 가장 공감적인 그러나 비합리적인 인과관계의 답변을 제시해왔던 것이다. 이를테면, “일본의 대지진은 우상숭배에 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홀로코스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죄과이다”, “홀로코스트는 지라르가 말한 희생양메커니즘의 세속적 회귀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것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유대-그리스도교 모두의 신이었다”, “남자 유아들의 거세불안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이다”, “전태일이 예수다”, “9ㆍ11은 뉴욕 시민들을 실재의 사막으로 초대한 것이다” 등등. 출처와 맥락은 다를지라도 하나 같이 합리적 인과관계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거칠게 말해서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관념론과 유물론이 한데 뒤섞인 그런 진술들이다.

역사 너머에 있는 원형적/초월적 진실, 그 검증도 반박도 불가능한 사건을 역사적(사회적, 자연적) 사건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 짓는 사고. 그럼으로써 규범화된 역사적 논의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초역사적 설명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사람들은 그런 해석을 여전히 욕망하며 또한 그것을 긍정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종교/신화/정신분석학/문학은 설명 불가능한 사건의 잉여/공백을 둘러싸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초월적 원인과 역사적 원인을 융합하고 때론 둘 간의 인과관계를 구조화한 내러티브를 제시해왔고, 소위 탈주술화된 계몽의 시대를 살고 있는 근대인들조차도 여전히 그것을 계속 수용해온 것이다.

물론 각 내러티브 간에도 윤리적, 이데올로기적 편차가 있기 마련이고, 그 가운데는 아주 폭력적이고 비윤리적 얘기에서부터, 한결 세련되고 정교하게 발전된 얘기도 있다. 예컨대, 지금 일본의 대지진 앞에서 그것이 우상숭배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일부 한국의 개신교 목사들처럼 아주 저열한 해석도 존재한다. 이들의 내러티브가 고통의 당사자들에 대한 일말의 윤리적 책임도 결여하고 있다는 그런 비판은 일단 차치하고라도, 너무나도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게 문제이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니다. 원형적 비극이 역사를 초월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역사적 개연성은 갖고 있어야 한다. 우상숭배와 그것의 징벌로서 재앙이라고 하는 현실적 비극의 인과관계에 관한 히브리성서적 전망은 그것이 써질 당시의 세계에나 적용 가능한(물론 그것도 이스라엘민족 입장에서나) 논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초월적 비극과 역사적(혹은 사회적, 자연적 비극) 비극을 혼동하지 않으면서도 양쪽을 모두 감안하는 그런 신앙적 시각을 우린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신학은 이러한 해석의 현상에 관해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학문 중 하나일 텐데, 문제는 해석에 관한 해석의 단계에 멈춰야 하는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신학도 초월적/원형적 사건과 역사적 사건 간의 인과관계 혹은 조응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자기만의 해석적 내러티브를 생산할 것인가 하는 것. 역사적 비극의 사건의 경우 초월적 사건을 부재하는 원인으로 설정 할 때 해석의 위험성이 분명 뒤따른다.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비극을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의 죄과라고 하는 그리스도교적 역사론의 맥락에서 표현하려는 내러티브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그랬듯 특정 대상의 희생이라는 결론을 처방으로 제시한다. 무언가가 우리로부터 부재한다는 그 상실감의 조건이 특정한 역사적 비극으로 응축되고 치환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특정한 집단이나 인물을 희생양으로 삼는 근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도미니크 라카프라(Dominick LaCapra)식으로 홀로코스트의 불가해성을 나치 이데올로기의 초월적 측면, 즉 전도된 형태의 숭고라는 개념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근대화/세속화와 더불어 억압되었던 제례, 희생, 구원, 폭력, 속죄양, 정화, 숭고 등의 종교적 요소들이 근대국민국가의 합리적 메커니즘으로 재활성화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홀로코스트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성찰을 진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시 문제는 자연적 재해이다. 자연적 차원의 비극을 위와 같은 식으로 초월적 차원과 매개시키는 것이 과연 윤리적/정치적으로 정당한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선 신학조차도 일단은 침묵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물론 대지진이 일어난 원인이 결국 피해자 자신들에게 있다고 하는 그 어떤 종류의 사이비신학도 우리는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당분간은 침묵 가운데 고통의 당사자들을 최대한 애도하고 위로하면서, 고통에 공감하고자 노력하며, 또한 그들의 회복을 위해 연대하고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준비를 조금씩 해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겪는 현실적 비극에 대해 다양한 종류의 합리적 설명들이 주어지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결코 놓지 않고 있다. 초월적인 것과 매개된 설명이 많은 경우 부정적인 결과를 낳아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고통의 당사자들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그들이 정말 원한다면, 초월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애써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윤리적 정당성을 잃지 않는 선에서 신학적-합리적 설명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인문학으로서 신학이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논리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는 앞으로의 과제겠지만, 설사 성서의 내러티브를 우리가 다 버리고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을 살리는 그런 대안적 해석의 내러티브를 제공할 책임이 신학에겐 있음을 잊지 말자. 각축하고 있는 다양한 해석의 현상들 자체를 해석하고 또 각 해석들을 비평하는 것을 넘어, 신학은 자신의 해석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할 텐데, 대단히 섬세하고 지난한 작업이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실마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무고한 한 사람의 죽음은 온 인류의 죽음과 같다.” 어쩌면 이러한 반(反)신학적 통찰 위에서부터 비극과 구원을 변주(變奏)하는 새로운 신학의 내러티브를 짜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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