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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1.22 [비평의 눈] 심장의 시간 (심범섭)



심장의 시간



심범섭



    어느 고생물학 강연에서 강사가 화석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물었다. “이 화석이 몇 년 된 건지 아시는 분 있나요?” 그러자 한 사람이 대답했다. “100만 7년 되었습니다.” 강사는 “어떻게 그렇게 구체적으로 알고 계시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7년 전에 그 화석이 100만년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이 사람은 고생물학의 시간 표현을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런 특이함 덕분에 이 이야기가 우스갯 소리가 된다. 고생물학보다는 덜하지만 인간 역사를 말할 때에도 많은 경우 시간의 양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 역사가 5천년 되었다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이 적어도 36년 전인데 그 후로 내 나이는 한 해 한 해 꼬박꼬박 많아져도 아직도 우리나라 역사는 5천년이라고 한다. 이광수의 <무정>이 출간된 것이 1917년인데 누가 “<무정>이 나온지 100년이 되어 . . .”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실은 99년인데 왜 1년을 더하느냐?’라고 따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몇 만 년 차이까지에도 관대하던 분들도 100미터 달리기 세계 기록인 9.58과 내 평생 최고 기록인 13.80 사이의 4초 남짓한 차이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시간 감각 또는 시간 리듬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시간’이란 표현에는 여기 예를 든 것처럼 객관적으로 측정되는 시간이라는 일차적 의미도 있지만 ‘시간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일’ 같은 의미도 있다. 우리 시대 큰 인문학자인 김우창 선생은 여러 해 전 어느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가운데 “우리가 말하는 ‘시간 여행’은 사실은 역사 여행이지요. 시간 자체는 아무런 내용이 없으니까.”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면 ‘시간여행’ 같은 표현에서 ‘시간’은 ‘특정한 시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 등의 뜻을 지니는 대유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 “한 아이가 태어나는 건 새로운 시간이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때에도 시간은 시간에 실려 펼쳐지는 이야기를 뜻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수치로 표현되는 양적 시간에 대해 여러 가지 감각과 틀이 존재하듯이 이야기를 뜻하는 질적 시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인식의 틀과 리듬이 존재한다. 정치가의 시간, 기업가의 시간, 학자의 시간, 농부의 시간은 각각 그 구성방식과 질감이 다르다. 그리고 이런 시간에는 이를 직접 경험하는 사람 또는 이를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으로부터 일관된 의미가 부여되는 경우가 많다. 이 의미는 해당 시간을 경험하는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거나 이해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곤 한다.  

    이청준의 단편소설 “시간의 문”에서도 “시간”은 삶의 이야기를 의미한다.[각주:1] 이 소설의 주인공은 유종열이라는 사진작가인데 그는 미래의 시간을 찍는 사람이다. 그가 미래를 찍는 방법은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해석을 보류하고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에야 사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의 촬영 행위는 “해석이 행해지는 그 미래의 현실에 속하는 것”이 되는데, 그가 이렇게 현재를 “미래의 이름으로” 사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로부터 “압살을 모면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사람이 아닌 자연물의 사진을 찍으며, 길고 추상적인 자연의 시간 리듬에서 미래로 가는 시간의 문을 찾아 현재로부터 자기 실종을 꾀하지만 동시에 이 실종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유종열은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기만 하고 미래로 진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카메라의 숙명” 때문에 시간의 문을 찾지못하면서 고민하다가 자연의 시간보다 더 역동적인 사람의 시간을 찍는 데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월남전 취재를 자원하여 비극과 참상 가운데 고통받는 사람을 촬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카메라는 “대상의 시간을 정지시킬 뿐 . . . 그 시간의 벽을 뚫고 대상 안으로 들어가 함께 흐를 수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카메라가 인간의 치열한 현실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사진찍기를 포기할 수도 없는데, 전장의 극단적 고통 가운데 울부짖는 사람들의 얼굴이 그에게 촬영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그는 전쟁 후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월남 난민을 촬영하기 위해 취재여행을 떠난다. 일본인을 선장으로 하는 화물선에 편승해 사진을 찍던 그는 어느날 실종되고 만다.    

    그로부터 5년 후 유종열의 아내에게 이 일본인 선장으로부터 그가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의 필름과 그가 실종된 구체적인 사연이 담긴 편지가 찾아온다. 유종열은 처음에는망원 렌즈를 이용해 근처를 지나는 난민선을 촬영하기만 했으나 어느 날 카메라를 남겨두고 직접 한 난민선에 홀로 배를 타고 건너가기로 한다. 그가 바다안개 속에서 멀어져 가는 모습을 선장이 겨우 사진으로 찍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된다. 유종열의 아내와 옛동료인 ‘나’는 그가 사라진 연유를 듣고 그가 마지막으로 찍었던 사진들을 보면서 그가 마침내 미래로 가는 문을 찾았고 대상과 함께 미래로 흘러갔으며 “그 자신이 미래의 모습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소설의 복잡한 의미망을 내가 제대로 파악했다는 자신은 없지만 나름대로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가오는 의미를 오늘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우리’와 연관시켜보고자 한다. 유종열이라는 개인은 몇 단계에 걸쳐 성장하는데 그것이 오늘 대한민국에서 깨어서 살고자 하는 우리의 이야기로 번역될 수 있는 부분은 그의 사진이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미래로 가고 싶어하는 지점부터이다. 처음에 그는 현실의 무게에서 도피하고 싶었고 이 탈출구를 자연의 시간에서 구했지만, 어느덧 미래를 사람의 시간에서 구하게 되었고 특히 월남전 취재 이후에는 바로 지금 보이는 사람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박애적 의지를 지니게 된다. 미래의 시간은 그에게 “구원”의 시간이며, 따라서 대상과 함께 흘러가는 미래는 대상과 함께 구원받는 미래이다. 그리고 오늘 대한민국에서 소외받고 억압받는 이들과 우리가 함께 가고자 하는 미래도 같은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이런 미래로 들어가는 문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기 실종이라는 단계를 통과해야만 한다. 이는 유종렬에게 두려운 것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두려운 것이다. 이 자기 실종을 제대로 이루기 위해 유종렬은 카메라로 대상을 찍는 것마저 포기하는데, 이를 작품 안에서는 “절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표현한다. 사진 찍기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대상에게로 다가감으로써 난민들과 미래를 함께하는 유종열의 모습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물론 우리는 유종열이 몸으로 건너감을 우리 모두가 소외받는 이들의 삶의 물리적 현장에 뛰어 들어가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을 저만치 떨어져 있는 관찰과 논평의 대상으로 보기만 하는 이상, 곧 우리 마음에 구별의 벽이 서있는 이상 그들과 같은 시간을 흐를 수는 없다는 뜻으로 새기고 싶다. 우리는 자기 부인으로써 그들과 같은 차원에 서서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  

   사실 유종렬이 미래로 가는 시간의 문을 찾았다는 사실을 그의 아내와 ‘나’는 그의 마지막 사진들만 보고서는 깨닫지 못한다. 일본인 선장이 보내준 편지를 읽고서야, 곧 유종렬의 마지막 행동의 정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서야 그의 “성취”를 알게 된다. 이 점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인생에서 어떤 의미있는 성취가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되려면 반드시 그것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전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오늘의 소외받는 사람들과 시간(역사)을 함께 하는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이를 더 넓은 세상과 후세에 알리지 못한다면 아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 생각은 소설 안에서 유종렬의 아내가 남편의 성공이 보편적 적용이 가능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연결된다.


만약 종열씨에게 그 미래의 시간이 열리고 있었다면, 아까 허선생님도 말씀을 하셨듯이, 그 미래의 시간이라는 것은 다만 유종열씨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내야 할 만인 공유의 것이 되어야 하니까 . . . (182-83)

  

    실제로 작품에서는 유종열 개인이 도달한 미래의 시간에 다른 사람도 따라갈 수 있다라기보다는 그의 성공이 다른 사람도 각각 자기만의 미래의 시간을 찾아가는데 영감을 준다라는 결론을 암시하는 듯 하다. 분명한 것은 유종열이 이룬 일을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이 그들도 미래로 가는 문을 찾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며,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성취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전해야 한다는 뜻을 취할 수 있다고 본다. 소설에서는 유종렬과 그의 마지막 행적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사람이 서로 다르고 유종열은 이 사실조차 모르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는 반드시 이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서는 유종열과 일본인 선장이 하나가 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청준이 소설에 담은 심원한 의미를 너무 쉽고 단순하게 번역하지 않았나하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해석 부분의 첫문단에서 미래의 시간은 구원의 시간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조금 더 상술하고자 한다. 곧,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다가가고자 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미래가 구원의 시간이 될 것인가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 질문에 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 텐데 그 중 하나를 다음 싯구를 통해 생각해보고 싶다.   


사랑이 낳아준

눈물 속에

하도 잘 익어서

별로 뜨는

나의 시간들[각주:2]

  

    여기에서 “시간들”은 어떤 특정한 시간대의 경험들로 이해되는데, “잘 익어서 별로 뜨는” 과정을 거쳤으므로 이미 발생한 경험들, 곧 과거의 “시간들”이라 할 수 있다. 시적 화자의 과거 이야기는 사랑에서 솟은 눈물에 변용되었다. 이 변용 과정이 “잘 익”는 것이었음은 그 눈물이 매우 뜨거운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누군가가 시적 화자의 과거를 뜨겁게 사랑함으로써 이 시간을 별로 탈바꿈시켰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별”은 초월적이고 영원한 원리 및 이상으로 해석할 수 있고, 따라서 미래까지 포함하고 또 초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별이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대상이므로 이 원리는 보편적 적용력을 지닌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구체적 경험이 누군가의 깊은 사랑에 의해 시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지도적 원리를 낳게 된다는 의미를 끌어낼 수 있다. 이런 원리를 구원의 원리라고도 이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이 해석에서 “사랑”이라는 막연한 개념은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이 사랑에 ‘선하고 희생적인 의지’나 ‘대상과 하나되려는 뜻과 실천’ 같이 긍정적이나 여전히 막연한 의미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인 뜻을 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랑에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예수가 열 두 제자를 파송하면서 한 말의 의미를 담고 싶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 가운데 순결이 조금 더 기독교의 본질에 어울리는 덕목인 듯한 것은 나에게만 국한된 느낌이 아닐 것이다. 뱀 같은 지혜는 날카로운 판단력, 예민한 분별력, 깊은 사고력 등을 뜻하는 듯한데 이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익숙한 기독교에서는 그리 강조하지 않는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나운 악의 세력이 들끓는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확장하려 할 때 순결한 마음만으로는 현실을 바꾸기 힘든 것 같다. 그리고 엄밀하게 말해서 순결이 지혜보다 얻기 쉬운 덕목인 것도 아니다. 두 가지 다 성실한 노력과 고도의 훈련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가치이다. 제대로 사랑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주요 종교에서 사랑을 최고의 가르침으로 강조하는 이유는 사랑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세상에 참사랑이 워낙 드물기 때문이기도 해서인 듯 하다.  

    며칠 전 이화여대 후문 맞은 편에 있는 필름포럼이라는 극장에서 <나쁜 나라>라는 기록영화를 보았다.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유가족분들이 투쟁하신 이야기를 담은 작품인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김진열 감독님과 유가족분 가운데 영만 어머님(이분 본인의 이름도 들었지만 기억이 안남)과 함께 하는 질의응답 시간도 있었다. 영화와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서 절실히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가 상식과 정의를 외면하는 권력자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비범한 지혜도 있어야겠다는 것이었고, 이 생각이 나로 하여금 과거를 미래의 구원의 원리로 통합하는 사랑의 의미에 뱀같은 지혜도 포함시키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각주:3]  

    세월호 참사로 고통받는 분들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의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 구원의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는 비범한 지혜와 비범한 순결이 있어야겠다. 이런 사랑으로 우리는 먼저 이들의 지나온 역정에 뜨거운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김우창 선생은 한국 소설의 시간을 논하는 한 글에서 성숙한 소설의 시간을 “구체적인 사건과 사람과 사물들 사이에서 자라나오는 사건 전개의 내적 원리”[각주:4]로, 그리고 더 간략하게 “내면적 유기적 시간”으로 이름한다.[각주:5] (이 개념이 비록 다른 영역에서 쓰인 것이지만 해석적 관점이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글에서 말하는 시간과 같으므로 여기 빌려와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는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사건과 사람과 사물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자라나오는 사건 전개의 내적 원리”를 파악해야겠으며, 동시에 이 사건, 사람, 사물, 원리를 재창조해야겠다. (“재창조”라는 표현은 남의 경험을 멋대로 편집하자는 말로 들리는 위험도 있지만, 경험이 구원의 미래로 이어지는 최선의 해석의 틀을 찾자는 뜻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쁜 나라> 같은 영화를 만드는 일, 이런 영화를 보는 일, ‘416 가족협의회 기억저장소’에서 주관하는 “기억과 약속의 길”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양적 시간을 측정하는 준거로서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해와 달의 움직임, 추의 왕복, 심장 박동처럼 주기적인 운동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심장 박동은 개인적인 현상이며 심장이 정서의 근원지로 간주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동시에 질적 시간을 비유하는 개념으로도 쓰일 수 있다고 본다. 한 사람의 독특한 시간 리듬이 있는 이야기를 그 사람의 심장의 이야기, 심장의 시간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간에 동참하는 것을 그와 심장의 고동을 같이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로마서 12장 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라는 권고는 곧 그들과 심장의 시간을 함께하라는 권고가 아니겠는가?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억압받는 이들과 새로운 미래의 시간, “내면적 유기적 시간”, 심장의 시간을 창조하기 위해 자기 부인의 용기, 비범한 지혜와 비범한 순결, 정확하고 정직하게 기억하고 전달하는 실천이 필요하다고 소박하게 제안해보았다. 우리가 갈 길은 참으로 멀고 험한 듯 하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뿐이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이청준, <1982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사상사, 1982, pp.134-206. 이 문단에서부터 여러 문단에 걸쳐 작품의 내용을 요약 또는 해석하면서 직접 인용이 많이 등장하는데 독자분들이 글을 원활하게 읽으시도록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는 않기로 했다. [본문으로]
  2. 이해인, “너에게 가겠다”, <작은 위로>, 열림원, 2008, p.30. [본문으로]
  3. 영만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가운데 특히 가슴 아픈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병무청에서 남학생 희생자 가운데 아직 사망신고가 안된 사람 중 일부를 대상으로 징집 신체검사 통지서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이들 누구에 대해서도 신규주민등록증 발급을 위한 통보는 없었다는 사실도 언급하시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또 하나는 참사 이후 싸우는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배보상 문제에 대한 일부 국민들의 비뚤어진 시각이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언급하신 한 예였다. 유족 가운데 어떤 분은 세탁기가 고장이 났지만 배보상과 관련하여 안좋은 반응을 일으킬까 두려워 몇 달 동안 손빨래를 하셨다고 한다. 첫번째 예는 국가의 잘못이지만 두번째 예는 보통 사람들의 문제이다. 영화 제목 “나쁜 나라”에서 “나쁜”이라는 수식어가 과연 권력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비록 영화 제작자의 의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평범한 시민에게도 적용가능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본문으로]
  4. “한국 소설의 시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솔, 1992, p.253. [본문으로]
  5. 같은 책, p.26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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