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4]


들뢰즈의 주체의 재구성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들뢰즈의 ‘다시쓰는 서양철학사’ 


      서구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뒤흔들기 위한 탈근대주의 철학자들의 프로젝트는 다양한 진영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때로는 푸코와 같이 지식과 담론의 계보학을 통해서, 때로는 무의식과 욕망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서구 존재론적 관념주의 철학에 대한 도전은 이어졌고, 그 결과 서구의 장구한 역사 안에서 존재론적인 형이상학을 떠받치던 개념의 파편들은 해체되어 산산이 흩어지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분해된 파편들의 흔적들을 바라보는 동안 얼마동안의 승리감에 도취될 여유는 주어졌지만, 이제는 잔해물 더미위에 올라서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졌다. 결국 남겨진 문제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에 의해 구조된 세계를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질 들뢰즈는 해체론에 의해 파괴된 전통적 개념들의 장치들을 재구성하기 위한 기획을 매우 종합적으로, 또한 정교하게 구현한 철학자로 평가된다. 그러나, 들뢰즈의 철학적 작업이 곧 탈형이상학을 급진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정신의 발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들뢰즈는 오히려 고전적 형이상학으로의 회귀와 재해석으로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의 전통의 그늘 아래에서 조명되지 못했던 비주류에 속하는 형이상학의 전통을 발굴해 내는 데로 시선을 돌린다. 말하자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늘에서 주목받지 못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를,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 대신 둔스 스코투스를, 데카르트 대신 스피노자를, 칸트와 헤겔 대신 니체와 베르그송을, 무너진 형이상학적 토대를 새로운 방식으로 구축하기 위해, 시대의 전면에 재등장 시킨다. 이러한 들뢰즈의 철학적 작업을 ‘초월론적 경험론’이라고 부른다. 초월적 경험론의 이름하에 그가 내세운 철학사의 재구성 전략은 매우 획기적이다. 그는 초월적 주체라는 형이상학적 건물을 허물고 다시 세우는 데에 힘을 소진하는 대신 초월적인 주체는 다름 아닌 경험이라는 내재성이었다고 선언한다. 물론, 지금까지 경험 역시 경험을 인식하게 하는 또 다른 주체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들뢰즈는 세계를 능동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기계와 같이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인 경험의 차이와 반복들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들뢰즈는 경험을 관찰자나 주체에게 귀속시키지 않고, 그 자체를 바로 초월적 원리로 간주하자는 전략인 것이다. 즉, 경험을 초월적 주체를 대신할 개념으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은 초월적 경험론이 된다. 이렇게 들뢰즈는 형이상학의 기본 골격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존재론적 형이상학에서 배제된 전통들을 재구성하여. 니체로부터 시작되어 해체론에 이르기까지 탈/반플라톤적인 철학을 완성하고자 한 것이다.


차이와 반복

  

    그렇다면, 이 시리즈가 애초에 던졌던 물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렇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들뢰즈에게서 탈플라톤적인 철학체계를 향한 전복적인 시도는 주체에 대한 시각을 어떻게 새롭게 만들었는가? 들뢰즈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시대 안에서 어떤 주체의 가능성을 말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복잡한 그의 철학체계를 모조리 경유하는 어려운 길을 택하기 보다는, 들뢰즈의 철학을 대표하는 핵심 개념인 ‘차이’라는 개념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아나가는 편이 수월하겠다.

    초월적 경험론으로 요약되는 들뢰즈의 사상의 전모가 드러나는 대표적인 텍스트는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 1968)’이다. ‘차이와 반복’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이, 들뢰즈가 겨냥하는 문제의식은 플라톤적인 이원론적 사유의 정점에 있는 ‘재현representation’의 개념이다. 들뢰즈는 이 책에서 차이와 반복이라는 핵심적인 개념을 통해, 재현의 방식으로 세계를 차등적으로 서열화시켜온 플라톤적 사유체계를 전복시키려는 의도를 구체화시킨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플라톤에게서 이데아는 영원불변하고 자기 동일적인 최고의 존재이며 모든 것의 원형이 된다. 이데아는 존재하는 가시적인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준거점이다. 즉, 모든 존재하는 것의 원본으로서 이데아를 상정할 때에, 모든 자연과 사물을 이데아라는 원형의 모사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세계는 이데아의 재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재현된 세계는 또 다시 원형과의 유사성에 따라 고급과 저급으로 분류된다. 인간이 동물보다, 남자가 여자, 백인이 유색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식의 차별적인 가치평가를 정당화하는 사상적 근거가 된 것이다. 결국 원본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문제의 해결은 따라서 간단하다. 원본을 거부하는 것이다. 아니면, 애초부터 원본이 없었다는 것을 입증하면 재현으로 표상되는 세계의 질서도 동시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를 위해, 들뢰즈는 재현에 상응하는 대응개념으로서 ‘차이’를 제시한다. 차이가 함축하는 의미는 세상은 원본에서 파생된 모사가 아니라, 모든 존재는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존재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곧 ‘차이’이다. 동일성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라, 동일성의 근거를 와해시키는 차이를 의미한다. 마치 실존철학에서 실존이 존재에 우선한다는 형식논리와 같다. 동일성이 차이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동일성에 우선하며 이것은 사실상 동일성의 부정을 의미한다. 들뢰즈의 ‘차이’ 개념의 발견은 존재론적 철학의 사유구조를 역전시키는 효과를 일으켰다. 사물의 존재는 원본을 통해서만 확인되었지만, 차이로서 존재하는 사물은 그 사물자체 안에 있음의 잠재성이 내재하게 되었다. 즉 이전까지 재현으로만 존재하는 세계내 사물은 ‘있다(현실)-없다(부정)’의 문제로 이분화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존재가 ‘드러났느냐(실재)-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냐(잠재)’의 문제로 시각이 달라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차이로서 드러나는 사물은 그 자체로 존재의 힘을 생성하는 개체로 인정받는다. 시뮬라르크에 지나지 않은 사물의 세계는 이로서 차이가 생성하는 힘의 무대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차이의 생성원리를 무인도의 비유를 통해 알기 쉽게 설명한다. ‘무인도의 원인과 이유’에서 들뢰즈가 던지는 수수께끼는 이것이다. 즉, “어떤 섬이 무인도가 아닌 것이 되기 위해서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가?” 그리고는 무인도에 우연히 표류하다 들어온 사람이 있다고 가정할 때, 입도의 순간에 그 무인도가 유인도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 비록 무인도에 최초로 사람이 발을 딛게 되었지만, 누구도 그 무인도를 유인도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 들뢰즈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조차 무인도라는 관념 안에 동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유인도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어떤 한 사람이 섬에 있다는 사실을 복수의 형태로 경험하는 타자가 존재해야 한다.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섬은 여전히 무인도일 뿐이다. 이 비유가 말하려는 사실은, 존재한다는 것은 나의 경험과는 다른 방식으로 경험되는 차이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타자와의 차이는 고정불변한 것으로 여겨진 무인도라는 이름을 사실상 생성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를 통한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 한, 나는 지각의 주체 혹은 경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식의 초월적 주체는 자기의 스스로의 부정할 수 없는 인식의 주체를 발견하는 데서 가능하다는 주장을 뒤집는다.



    앤디 워홀의 작품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림에서 보듯이, 같은 마릴린 먼로이지만 다른 색상으로 채색되었다. 감상 포인트는 이 네 그림 중 어느 것이 진짜 먼로에 가까운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것도 사실 먼로의 초상이기 때문이다. 이 네 초상은 먼로라는 인물의 원형이 빚어낸 시뮬라르크가 아니므로 부정되어야할 모조가 아니라, 시뮬라르크의 차이 그 자체가 먼로라는 캐릭터를 주조해 내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즉, 차이는 부정되어야하고 동일성으로 동화되어야할 대상이 아니라, 차이와 차이의 반복은 그 자체가 존재를 생성하는 역능이며 힘의 의지로 인정된다.

    따라서, 생성하는 힘인 차이의 반복은 동일성의 조명 아래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시뮬라르크의 재현과 전혀 다른 정치적 의미를 발생시킨다. 플라톤 이래 동일성의 철학은 세계의 사물을 유사성으로 배열시켜 놓고 유사성들이 공통으로 지시하는 하나의 일의성만이 존재한다고 말해왔다. 그리고 들뢰즈가 주목한 것은 영토 안에 배열된 사물들의 집합을 연결시켜 주는 코드화된 규칙성이다. 마치 푸코가 파놉티콘의 감옥이나 군대 학교 병원의 개별적 구조가 감시와 자기검열의 권력효과를 발생시키듯이 사물이 영토를 이룰 때에 거기에는 반드시 사물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힘이 발생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를 코드화라고 부르며, 보이지 않는 관계방식은 결국 억압의 구조를 발생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들뢰즈가 관심하는 것은 배치의 문제이다. 영토성과 코드가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느냐를 철학의 기본문제로 돌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때, 들뢰즈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물의 차이에 대한 긍정이 존재의 초월성으로 인정된다면, 서구철학의 주류전통이 동일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구축해온 층화(stratification)된 세계의 경계는 무너지고 뒤섞이게 되고 만다. 그리고 층을 형성하여 일종의 아성과 같이 분리된 독자적 영토를 형성하는 것을 당위적으로 받아들여 온 세계관은 일시에 정당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고정된 배치에는 일정한 변화의 길이 열리게 된다. 들뢰즈는 이것을 탈층화 또는 탈영토화라고 명명한다. 


들뢰즈의 주체는 어떻게 새로운가?


    재현을 부정하는 차이의 생성하는 힘에 근거한 들뢰즈의 사유는 동일성의 원리에서 발생하는 권력으로부터 탈주를 꾀하는 리좀(rhzome)적 주체, 혹은 노마딕(nomadic) 주체로 연결된다. 두 개념이 지시하는 바는 동일하다. 리좀은 뿌리는 땅에 있어야 하고 줄기는 뿌리로부터 땅위로 솟아 나와 있어야 한다는 식의 경직된 각 기관 사이의 획일적인 관계방식을 벗어나 자유롭게 제약 없이 뒤섞이는 방식으로 사물 사이의 관계를 창조적으로 재결합시키려는 사유방식이다. 리좀적 주체는 위계적인 지배와 피지배라는 현실의 영토화된 구조로부터 탈주하여 탈영토화하는 정치적 행동의 주체를 가능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 파악하는 인간의 욕망이 플라톤과 그것과 대척점에 서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인간의 욕망이란 이데아에 비추어 결핍된 것으로서 배제되어야할 부정적 대상이다. 헤겔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욕망은 자기의식의 절대정신이라는 목적을 위해 반드시 지양되어야하는 미성숙에 불과하다. 욕망은 결국 이성에 이해 지배되고 통제되어야 할 것으로서 다뤄져왔을 뿐이다. 부정적인 방식으로 통제되어야 했던 욕망의 담론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시대 안에서 자본의 질서에 포획된 욕망을 욕망하게 하는 지배구조 아래에 놓이게 만들었다. 욕망이 인간을 지배하는 효과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종속된 것이다.   

    들뢰즈가 보는 욕망에 대한 플라톤에 대한 비판지점은 욕망은 플라톤식으로 결핍이 아니라 생산적인 욕망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욕망을 도리어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보유한 원인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가라리와 함께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1972)’에서 들고나온 ‘생산하는 욕망’의 개념이다. 욕망은 영토화되고 코드화를 고착시키는 분절선들을 뚫고 나와 탈주하는 에너지의 원천이고 역량이다. 따라서 욕망은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직접적인 변혁의 분출시키는 모든 사회의 부분속에 편재되어 있는 힘이며 창조의 자유로운 힘으로 이해된다. 차이와 반복으로 귀결되는 리좀적 주체는 생산하는 욕망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들뢰즈는 사회 안에서 주체의 의미를 해명하는데 기여해 온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의 기능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다소 회의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들뢰즈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는 획기적인 대발견의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욕망을 너무나 쉽사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고정된 관념 안에 가둬버렸다고 비판한다. 억압된 욕망으로부터 인간의 주체는 왜곡된 채 항상 다다를 수 없는 환상을 향해 길들여지는 존재로 묘사될 때 욕망하는 주체는 욕망을 통제하는 자본주의의 억압적 시스템을 묵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라캉과 갈라서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라캉에게서 주체는 ‘욕망하는 주체’이다. 주체는 결핍을 메우기 위한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만들어진다. 욕망과 주체 사이에는 원인과 결과의 나눌 수 없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욕망하는 주체’가 아닌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을 통해, 주체는 욕망하는 주체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가 아니라, 도리어 욕망이란 사물들의 관계와 접속을 통한 생산적 활동안에서 이뤄지는 순수한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마치 공장의 기계가 어느 특정 부품이 상품을 찍어낼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계의 개별적 관계의 활동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과 같이 ‘욕망의 주체’라는 이름은 특정 사물이나 개체에 특권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들뢰즈의 주체에 대한 이해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성의 철학을 배제하고 현실세계를 동일자에 환원시켜 해석하는 플라톤주의에 대한 거부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사물의 관계 안에 내재한 탈주본능으로부터 자본주의의 억압적 시스템은 극복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들뢰즈의 ‘철학 다시쓰기’는 자본주의 시대 안에 어떠한 주체의 상을 남겨놓았을까? 그의 전략은 어떤 유의미한 돌파구를 열어주었는가? 이러한 물음으로 돌아갈 때, 누구나 떠올리게 되는 영화 한편이 있는데, 다름 아닌 ‘아바타’이다. 부족한 지구자원을 채석하기 위해서 지구와 닮은 또 다른 행성 판도라를 식민지로 개척하려는 지구의 다국적 기업과 행성의 원주민인 나비족과의 싸움을 그리는 판타지 영화이다. 이미 유명한 영화이기에 긴 설명은 필요 없을 듯 하다. 들뢰즈의 주체를 말하면서 이 영화를 떠올리는 이유은, 나비족이 지구의 다국적 기업의 총공세로 열세에 몰릴 때, 이 행성을 구원하는 주인공이 여타 영웅소재의 영화처럼 혜성처럼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다만, 아바타를 조종하는 제이크 설리는 나비족처럼 판도라 행성의 자연의 얽혀있는 그물망에 촉수를 통해 연결하여 교감을 이루는데 성공하고 그들과 일체가 되어 지구인의 폭격을 막아내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들뢰즈가 말하려는 리좀적이고 노마딕한 주체의 모습은 아마도 아바타가 행성의 모든 자연의 개체들과 촉수를 통해 교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단지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서 자연의 모든 차이는 생성의 힘을 발휘된다. 마침내 자본주의의 욕망을 꺾어버리는 변혁의 주체는 어디에선가 메시아처럼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 안에 이미 잠재되어 있는 존재의 힘을 믿고 획일화되기를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 때로는 ‘동물이 되고’ 때로는 ‘식물이 되기’도 하는 자유롭고 탈주하는 변칙적 삶 안에서 해방은 도래한다는 것을 이 영화는 들뢰즈를 대신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들뢰즈가 재현으로 굳어져온 사물의 표상을 차이와 반복으로 대체하고, 개체 각각이 지닌 생성하는 힘에 주목하여 마침내 생산하는 욕망을 자본주의의 대항할 주체의 탈주본능으로 규명한 것은 대단한 그의 통찰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탈주가 항상 해방지향적이라고 볼 수 없다. 물론, 이런 문제점을 들뢰즈도 간과하지는 않는다. 들뢰즈는 리좀적이고 노마딕한 주체의 유동성은 동시에 위험성을 감수해야 한다고 인정한다. 자유로운 탈영토화와 탈주는 광기의 위험과 죽음의 위험으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탈주를 위한 재영토화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탈주선이라는 개념은 삶의 새로운 양식과 창조하는 전복적 흐름이다. 억압적 코드의 관성적인 운동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클리나멘을 통한 새로운 창조라는 차원에서 탈주이며 탈영토화이다. 그러나,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탈주를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호하다. 혹여, 탈주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선험적 관념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그의 ‘다시쓰는 철학사‘의 전략이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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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시뮬라크르




오종희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동물


    동물권 (animal rights)을 지지하고 녹색당을 지지하며 동물원의 폐지를 주장하고 반려견의 엄마이자 육식을 서슴없이 일삼는 내가 카메라를 챙겨 동물원으로 향했던 그 날 하늘은 말하기도 힘들 만큼 파랬다. 

    이제는 클리셰가 되어버린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기 있다.”라는 보드리야르의 문장이 내 동물원 행의 최종결론이 아니길 바라면서도 표현하기조차 힘든 파란 하늘이 버스타고 가는 내내 불길했었다.  

    사회에 존재하는 일종의 이형 공간을 찍고 싶어 일주일 먼저 다녀온 과천 동물원에 비해 어린이 대공원은 규모가 작은 만큼 팬시 제품을 모아 놓은 상점처럼 예쁘장하기만 해서 원하는 이미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동물은... 동물원 동물을 어찌 쉽게 찍을 수 있을까. 육식하는 동물 애호가가 동물원에 사진 찍으러 갔으니 죄책감과 연민과 분노가 뒤섞여 허우적대기에 바빴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녀가 어렸을 적하는 관례인 ‘행복한 가족 나들이’의 짐을 벗고 혼자 하는 동물원 관람이기에 ‘가족’이라는 행복해야 만하는 코드도 떼고 ‘행복’이라는 가족의 이상도 뗀, 그 순간 불행해도 그만이고 이상을 상실해도 그만인 내 맘대로의 동물원 관람이었으니 말이다.  

    평일 이른 시간인데도 제법 유모차 부대들이 많았다. 꽃피는 계절 사람 없는 동물원을 기대한 내가 바보지, 예의 행복한 유모차 부대들 틈에서 나는 마치 시커먼 저승사자가 된 느낌이었다.  

    데려갈 날짜를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지전능하고 시크한 검은 저승사자처럼 아주 최소의 움직임과 시선으로 인간계와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저 덩치가 동물도감에서 보았던 그 코끼리라고, 저 큰 고양이가 TV에서 보았던 표범이라고 소리 지른다.  

    우리 벽 쪽 끝에서 하염없이 잠만 자는 오리지날 동물들은 ‘동물도감’처럼 실감나지 않는다. 우리 안에서 움직이더라도 일정 거리를 병리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동물들은 ‘TV 동물의 세계’에서처럼 용맹스럽지 않다.  

    당황한 부모들은 ‘보이니?’ ‘기억나니?’ ‘그게 저기 있네!’ 하면서 자꾸만, 집에서 손가락 꼭꼭 집어 가르쳐 주던 미디어 속의 동물 이미지를 상기 시키려 애를 쓴다.  

    동물원 학습은 아이들이 ‘안 보여!’ 하면 실패고 ‘어, 보여!’하면 성공이고 ‘야! 표범이다!’ 하면 대 성공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미디어’이다.   


벚꽃


    과천 대공원에서와는 달리 일주일 차이로 어린이 대공원엔 벚꽃이 난리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뮬라크르 세상인 동물원에 새하얀 벚꽃과 연녹색 나뭇잎들이 더해지니 그냥 완벽한 무대 장치였다.  

    너무 예뻐서, 너무 고와서 쳐다보기 민망했다.   

    그리고 일찍부터 나를 불길하게 했던 그 파란 하늘이 동물원 풍경을 아예 그림으로 만들어 놓았다.  

    색종이처럼 파란 하늘에 팝콘처럼 하얀 벚꽃, 이런 비유가 저렴하다면 그냥 파란 하늘에 하얀 벚꽃이 너무나 예쁜데 왜 민망해야 했을까. 왜 즐기질 못했을까.  

    파란 하늘에 벚꽃이 겹쳐지는 혼이 빠지도록 예쁜 모습에 왜 나는 다시 저승사자가 되어 인간계와 더불어 천상계와도 거리를 두고 말았던 걸까.  

    나 역시 그 기준은 ‘미디어’다.  

    카메라로 찍어 사진이란 결과물로 보면 누구나 예뻐하는 모습은 진부한 이미지로 남는다. 그러니 한 번 더 꼬인 개념을 첨가 하던지 최소한 진부함을 상쇄할 무언가로 대중적 안목 이상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서 파란 하늘에 하얀 벚꽃은 내공 없는 찍사에겐 민망한 것이 된다. 



무대



    맨 눈으로 보면 황홀한 것이 카메라를 통하면 진부한 것이 되는 반전에 겁을 내어 일 년에 단 며칠 보여주는 벚꽃의 요기로움을 외면했나보다.  

    며칠 사이 꽃이 졌다. 미세먼지로 하늘도 뿌옇다. 

    하지만 내겐 민망함을 무릅쓰고 겨우 찍었던 벚꽃 사진이 두 장 남아있다. 

    다행인건가.   


    그런데 그렇게나 크고 아름다운 동물원 동물들은 어디에 있던 애들일까. 

    아이들이 본 대로 동물도감에 있던 애들일까. 

    그럼 동물도감이 오리지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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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시뮬라크르, 그리고 제의"_ 텍스트로서의 복음서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양식비평 연구에서 미학적 의미에서의 ‘작가’라는 개념은 떠오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연구가 관심을 둔 곳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한 예로, 불트만은『공관복음전승사』에서 “삶의 자리가 개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한 공동체의 삶의 전형적인 상황 혹은 행동방식인 것처럼 문학 형태 및 형식은 사회학적 개념이지 미학적 개념이 아니다.”[각주:1]라고 썼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는 전승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법칙성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고 자신하도록 만들었다. “마태와 누가의 마가 처리에는 어떤 법칙성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Q는 마태와 누가에서의 재구성에 의존되지만, 그러나 여기서도 마태와 누가를 비교해 보면 가끔 Q에서부터 마태와 누가까지의 어록 자료의 발전이 어떤 법칙 하에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법칙성이 실제로 확인될 수 있다면, 이 법칙성은 마가와 Q에서 확정되기 전의 전승 자료에서 이미 작용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 자료의 형태로 확정되기 이전의 전승 단계에까지 소급해 갈 수 있다.”[각주:2] 그러나, 샌더스는 이러한 확신이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각주:3] 뿐만 아니라, 구테게만스는 형식주의와 구조주의 언어연구에 힘입어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는 양식비평의 방식이 과연 옳은 일인지 진지하게 되물었다.[각주:4] 또한 개별적인 전승 자료들의 문제를 넘어 문헌 구성의 문제를 물음으로써, 그는 양식비평이 가진 대부분의 전제를 반박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전승의 익명성, 공동체성, 전승의 발전 법칙 등과 같은 양식비평의 여러 전제들에 물음을 제기했던 것이다.[각주:5] 

     물론, 여기서 편집비평에 대한 언급은 빠트릴 수 없다. 막스젠에 따르면 복음서 저자들은 전승 자료들에 변화를 가하지 않고 단지 짜깁기만을 시도한 그러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순한 편집자 이상이었던 것이다.[각주:6] 때문에, 양식비평에서와 달리 복음서 저자들은 전승 자료들을 날것 그대로 보존해서 넘겨준 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관점에 맞게 전승들을 재구성한 하나의 신학적 작가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고로, 미학적 관점에 대한 고찰을 더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미학적 개념은 신학적 비평에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왜냐하면 미학적 개념은 자료들의 구성뿐만 아니라 자료들 자체에도 저자의 개성이 개입되었을 수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가 단순한 수집가가 아니라 신학적 작가의 지위로 격상된 이상 구성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전승 자료들의 신뢰성 역시 담보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절단된 개별전승들조차도 각 복음서들의 줄거리에 맞게 주조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노릇이 된 것이다. 사실,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없다는 언어연구의 관점에서 보자면 절단된 개별전승들마저도 신뢰성에 있어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적은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미 불트만은 “편집이 단지 구전으로 전승된 것만을 대상으로 했다고는 볼 수 없다……또 우리의 마가복음서가 처음 문서화된 이후에도 가필되었으리라는 가정을 반대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차적인 자료들을 전승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각주:7]라는 벨하우젠의 말을 기꺼이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일차적 자료와 이차적 자료가 분리될 수 있고 그렇기에 복음서에서 역사적으로 순수한 일차적 자료를 안전하게 분리해낼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미학적 개념에서는 일차적 자료냐 이차적 자료냐 하는 구분은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미학적 개념에서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생생한 체험, 즉 일차적 자료가 후대의 공동체의 체험, 즉 이차적 자료를 지배하고 움직이며 나아가고 있다는 가설은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미학적 개념은 그 반대의 경우를 요구할 수도 있다. 종교적 경험의 측면에서 보자면 부활에 대한 미학적 경험과 같은 것을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아우얼 바하는 “성서의 화자는 전설의 진실성에 대한 그의 믿음이 그에게 요구하였던 바로 그것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가 만들어낸 것은 본래 리얼리즘을 지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실성을 향한 것이었다. 그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 재앙있거라!”[각주:8]라고 썼다. 마찬가지로, 그는 “마가복음을 쓴 필자는 그로 하여금 예를 들어 베드로의 성품을 객관적인 사실로써 그릴 수 있게 할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일어나고 있는 일의 복판에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명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만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위에든 사건에서는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즉 베드로가 어떻게 도망할 수 있었는가를 말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다.”[각주:9]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결정타를 날렸다. “성스러운 글들의 전체 내용이 주석에 관련시켜지고 주석은 말하여진 것을 그 감각적 기초에서 떼어내는 일을 했다. 왜냐하면 독자나 청자는 실제 일어난 감각의 사건에서 눈을 돌려 그 의미를 생각하도록 요구받았기 때문이다.”[각주:10] 

     따라서 복음서 연구에서 전승의 신뢰성을 담보하는 기준으로 논의되고 있는 구전이론 역시 미학적 개념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찮은 일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바하가 지적한 것처럼 종교적인 미학적 경험은 주석을 요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날 것 그대로의 감각적인 체험은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석적 텍스트/이야기를 구성할 사명을 지닌 신학적 작가에게 대체 일차적 혹은 이차적 구분이나 구전과 같은 개념이 어떤 의미를 지녔겠는가? 과연 개별전승들의 신뢰성을 구전이론으로 방어해보고자 노력하는 최근의 보수적인 보컴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는 타당한가? 역사적인 예수와 가까웠을 수도 있는 특정한 개인들의 원초적인 목소리에 기대어 전승의 신뢰성을 설득하고자 애쓰는 보컴의 노력은 실로 눈물겹다.[각주:11] 하지만 그는 이것이 데리다가 지적한 현전의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신학적/철학적 노력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길지만 들어보도록 하자.[각주:12] 


 왜 음소는 기호들 중에서 가장 이념적인가? 소리와 이념성 사이의 아니 그보다는 목소리와 이념성 사이의 이 공모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내가 말할 때, 이 수행의 현상학적 본질에는 내가 말하는 그때 내가 나를 듣는다는 사실이 속한다. 나의 숨결에 의해 그리고 기표작용의 의도에 의해 혼이 불어넣어진 기표는 내게 절대적으로 가까이 있다. 살아있는 작용, 생명을 주는 작용, 기표의 신체에 혼을 불어넣어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표현으로 변형시키는 생기, 언어의 영혼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자기현전과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혼은 세계에 그리고 공간의 가시성에 내버려진 기표의 신체 속에서 죽음을 맞을 위험에 처하지 앟는다. 음소는 현상의 구사가능한 이념성으로 주어진다. 이렇게 영화작용이 자신에 의해 혼이 불어넣어진 것의 투명한 정신성 속에서 자기에게 현전함, 이렇게 삶이 자기 자신에게 내밀함, 이로 말미암아 말은 살아 있다고 늘 일러져 왔던바, 그러한 모든 것은 그러므로 말하는 주체가 현재에 자기를 듣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에서 데리다는 “기의의 형식적 본질은 현전이고, 소리로서의 로고스와 그것이 인접하는 특권은 현전의 특권이다.”[각주:13]라고 고쳐 썼다. 또한, 우리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자연적 문자언어는 목소리와 숨결에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것의 본성은 문자학적이지 않고 영기학적이다. 그것은 성직자의 것이고, 신앙고백의 내적인 성스러운 목소리와 아주 가깝고, 우리가 자신 안으로 되돌아가면서 듣는 그 목소리와 아주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내적 감정에 신의 목소리가 충만되고 진실하게 존재하는 현전이다.”[각주:14]라고 말이다. 신학의 구전에 대한 집착은 바로 이러한 연유때문일 것이다. 신의 목소리는 역사적 두께를 몰아내고 순수한 것을 되찾도록 최초로 믿은 자들의 음성 속에 심어놓은 것이기에 우리가 그 목소리의 목격자를 찾아낸다면 역사적 신뢰성을 충분히 담보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이미 문자로 정착된 복음서에서 때가 끼지 않은 순수한 전승을 찾는 것이 가능한가? 이와 관련해, “문자는 자신의 망각이고 외재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면화하는 즉 정신의 역사를 여는 기억의 반대[각주:15]”라고 한 데리다의 지적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비록 데리다의 논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리쾨르 역시 “직접적인 목소리, 얼굴표정, 몸짓 대신에 이러한 매개물들을 이용하는 기록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굉장한 문화적 성취이다. 여기서 인간적 사실은 사라져 버린다. 대신 이제 물질적 표식들이 메시지를 전달한다.”[각주:16]고 지적한 바 있다. “담화의 운명이 이제 목소리에서 글자로 옮겨[각주:17]”진 것이다. 하지만 글이라는 것은 이것보다 좀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것은 바로 “글로 씌어진 담화에서는 저자의 의도와 텍스트의 의미가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다.[각주:18]”는 점이다. “절대적인 지금/여기는 시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위치들의 절대적 원천이었던 화자의 목소리, 얼굴 표정, 몸짓이 외적인 물질적 표지들로 대체되면서 폐기된다. 그리고 텍스트를 작가의 현존과 분리시키며 그것을 미래의 잠재적 독자층에게 열어 놓는 텍스트의 의미론적 자율성이 생겨난다.”[각주:19] 그렇다면, 텍스트란 목소리를 통한 자료들의 신뢰성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살펴 본 작가라는 미학적 개념까지도 파괴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적한 것처럼, 텍스트란 텍스트의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개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다른 의미는 영향사를 통해 중개될 것이다. 그렇기에 영향의 불안은 텍스트 내에 잠복해 있는 하나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전의 전승들과 해석들을 위협하고 덮쳐버리는 하나의 시뮬라크르로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텍스트로서의 복음서란 개별적인 전승 자료들만의 문제도 그렇다고 저자만의 문제도 아닌 독자가 개입되는 훨씬 더 복잡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 웹진 <제3시대>

  1. 루돌프 불트만, 『共觀福音書傳承事』, 허혁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970, p.4 [본문으로]
  2. 루돌프 불트만, 같은 책, p.7 [본문으로]
  3. Sanders, The Tendencies of the Synoptic Tradi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9, pp.23~24 [본문으로]
  4. Guttgemanns, Candid Questions Concerning Gospel Form Criticism, trans by William Doty, The Pickwick Press, 1979, p.75 [본문으로]
  5. Guttgemanns, 같은 책, p.129 [본문으로]
  6. Willi Marxsen, Mark the Evangelist, trans by Roy Harrisville, Abingdon Press, 1969, p.21 [본문으로]
  7. 루돌프 불트만, 앞의 책, p.2 [본문으로]
  8. 에리히 아우얼 바하, 『미메시스』, 김우창, 민음사, 1987, p.25 [본문으로]
  9. 에리히 아우얼 바하, 같은 책, p.62 [본문으로]
  10. 에리히 아우얼 바하, 같은 책, p.62~63 [본문으로]
  11. 이에 대해서는 리처드 보컴, 『예수와 그 목격자들』, 박규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5, pp.39~79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12. 자끄 데리다, 『목소리와 현상』, 김상록 옮김, 인간사랑, 2006, pp,118~119 [본문으로]
  13. 자크 데리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4, p.42 [본문으로]
  14. 자크 데리다, 같은 책, p.39 [본문으로]
  15. 자크 데리다, 같은 책, p.53 [본문으로]
  16. 폴 리쾨르, 『해석이론』, 김윤성․ 조현범 옮김, 서광사, 1994, p.61 [본문으로]
  17. 폴 리쾨르, 같은 책, p.64 [본문으로]
  18. 폴 리쾨르, 같은 책, p.65 [본문으로]
  19. 폴 리쾨르, 같은 책, p.7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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