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타자성의 관점에서 본 신약성서 2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3. 포괄주의적인 기독교적 동일자로서 복음서 읽기 : 지라르의 『희생양 』 및 『나는 사탄이』


     지라르만큼 폭력의 문제를 집요하게 탐구한 이는 드물 것이다. 이것은 『폭력과 성스러움』, 『희생양』, 그리고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와 같은 그의 저서들이 폭력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그에게 종교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종교란 폭력이 내장된 성스러움에 대한 추구라고 정의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그는 대뜸 화를 낼 듯하다. 종교만 그렇겠는가라고 하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그는 현대의 사고가 폭력을 멀리하면 할수록 폭력은 오히려 귀환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탈신화화되었다고 믿지만 현대세계는 결코 폭력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고, 다만 애써 외면할 뿐이라고까지 말한다. “스스로를 성스러운 것에서 생겨난 유일한 사회라고 믿지 않는 사회는 하나도 없다.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은 결코 사람이 아닌 이유이다. 우리라고해서 이 보편법칙, 보편적인 무지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각주:1] 단지 “어떤 식으로든 항상 폭력에 종속되어 있는 어떤 무지 속에서 폭력을 피하고” 있을 뿐이다. 원시문화에서부터 현대까지 아우르는 폭력에 대한 그의 논의를 접해본 사람이라면, 다소 과장일 수 있지만, 폭력의 문제를 성찰하는 데 있어 지라르만큼 독보적인 사상가는 별로 없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처럼 폭력을 사유한 사상가이지만 지라르는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환영받는 인류학자다. 사랑의 종교라 불리는 기독교가 폭력을 사유한 사상가를 환영하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하지만 독일의 일간지 디 벨트(Die Welt)는 ‘지라르가 기독교를 구했다’고 극찬했다. 심지어, 정일권은 “다른 신화와 종교를 초월하는 ‘십자가’의 의미가 드러나면서, 세계 인류는 ‘유일한 진리’를 얻게 됐다. 다원주의 상대주의, 곧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힘을 잃게 된 것이다.”[각주:2]라고 까지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지라르 사상의 무엇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극찬하게 만든 것일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각주:3]


복음서는 인간의 폭력을 진정으로 문제삼은 유일한 기록이다. …이런 것과는 달리, 구약의 요셉이나 욥 혹은 예수나 세례 요한 그리고 다른 희생양들을 보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토록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그토록 격분한 군중들에 의해 왜 추방을 당하거나 학살을 당하는 것일까? 기독교의 계시는 그 전에 있던 신화와 제의 같은 것뿐만 아니라 그 후에 오는 다음과 같은 것까지 다 밝혀주고 있다. … 예수의 수난 이야기는 이 세상의 왕의 비밀을 밝히고 모방 작용과 희생양 메커니즘의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인간 질서의 기원을 전복시킨다.


     한 마디로, “인류학자가 인문학을 통해 다른 종교나 신화의 한계를 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주창“[각주:4]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야단법석과 달리 차분하게 한번 물어보자. 다른 종교나 신화의 한계가 대체 무엇인지를 말이다. 뒤집어 표현하자면, 어떻게 복음서가 유일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지가 될 것이다. 일단, 『희생양』이란 저서에서 그는 <로이 드 나바라의 판단>이라는 유대인 박해에 관한 기욤 드 마쇼의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이 텍스트에 나타나 있는 모든 표현들 간에는 상호 합치, 즉 단 하나의 가설로써만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일치가 존재한다. 우리가 읽은 이 텍스트는 분명 박해자의 시각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실제로 일어난 박해에 근거하고 있는 텍스트다. 박해자의 시각은 자신들의 폭력의 정당성을 믿고 있다는 점에서 당연히 잘못된 시각이다. 스스로를 재판관이라고 여기는 그들에게는 그러므로 유죄의 희생물이 필요하다.“[각주:5]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런 판단은 『폭력과 성스러움』의 연장일 수도 있는데, 여기서 그는 인류의 종교적 활동뿐만 아니라 다른 활동들도 폭력으로 인해 붕괴될 위기에 처한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 하나의 예방책으로 소위 희생할만한 희생물에게로 폭력의 욕망의 방향을 돌리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 희생물들에는 ”전쟁포로도 있고 노예도 있으며 아이, 총각, 신체장애자도 있고, 그리스의 파르파콘처럼 인간 쓰레기도 있으며 어떤 사회에는 왕도 있다.“[각주:6]는 점은 잘 알려진 흔한 이야기다. 요약하자면, 희생양메커니즘이란 공동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복수의 분노를 희생제물인 공동체 내의 약자나 외부인에게 전가시킴으로써 공동체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호폭력을 예방하고 정화하는 수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지라르는 복음서의 이야기가 다른 종교텍스트들처럼 이와 같은 희생양메커니즘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박해자가 아닌 희생자의 시각을 보여주기에 다른 것들과 분명하게 구분되며 그렇기에 진실에 관한 유일한 기록물이라고 평한다. 다시 말해, 복음서의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기욤 드 마쇼의 텍스트 류의 것들이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점이다. 지라르의 판단에 따르면, 복음서는 다른 것들과 달리 철저하게 희생자의 시각을 보여주기에 박해하는 자들의 잘못된 시각을 폭로하고 교정해주는 진실한 기록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놓고 말한다. ”신학자들에게 너무 오랫동안 잊혀져왔던 복음서의 인류학 영역에 대한 나의 이 연구는 간접적으로만 신학적이다.“[각주:7]라고 말이다.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하기도 했다.[각주:8]


그리스도의 적은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약속만 하고 가져다주지 않은 평화와 관용을 자신은 주고 있다고 자랑한다. 아닌 게 아니라 희생을 극단적으로 운운하는 오늘날의 풍조가 가져다준 것은 사시살 낙태, 안락사, 유니섹스, 엄청나게 많은 곡마단 놀이들과 같은 예전 이교도의 온갖 풍습으로의 회귀다. 그러나 여기에는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같은 기술 덕택에 진짜 희생양이 없다. 이 새로운 이교는 십계명을 비롯하여 유대 기도교의 모든 모럴을 참을 수 없는 폭력으로 추정하고 이런 계명을 완전히 없애는 것을 제일 목표로 삼는다.


     기독교인들에게 얼마나 은혜롭게 들릴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때문에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정일권도 “다른 신화와 종교를 초월하는 ‘십자가’의 의미가 드러나면서, 세계 인류는 ‘유일한 진리’를 얻게 됐다. 다원주의 상대주의, 곧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힘을 잃게 된 것이다.”[각주:9]라고 까지 말했던 것이다. 기독교적 변증으로선 손색이 없다.

     하지만 복음서에 대한 지라르의 변증과 이런 변증을 극찬하는 신학자들에 대해 누군가는 민망했을 수도 있다. 한 예로, 월터 윙크는 "나는 희생양 주제가 전 세계의 신화들의 바탕이라거나 혹은 유대교-기독교 성경이 폭력에 대한 비판을 독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비폭력적인 신화도 있어서(하나만 예를 들면 Hopi 인디언의 탈출신화), 기독교가 설명한 것들 못지않게 참된 것들도 있으니 지라르가 말하는 기독교 승리주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각주:10]라고 일침을 가했다. 특히,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바울의 이해 역시 박해자의 시각을 고발한다는 지라르의 주장에 대해서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하여 어떤 모호함을 드러낸다. 지라르는 그 모호함의 한 면을 강조했고 그의 비판자들은 그 다른 면을 강조했다."[각주:11]면서 균형 잡힌 비판을 보여주었다. 흥미롭게도, 오래 전 이미 다른 쪽에 속했던 포이에르 바하는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각주:12]


일반적으로 인간희생을 폐지했다는 이유로 기독교를 칭찬하는 사람이 있다. 기독교는 그러나 피를 흘리는 인간희생 대신에 다른 종류의 희생, 육체적인 인간희생 대신에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인간희생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현상에만 얽매이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이교의 종교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세상에 가져다놓았다고 믿지만 그것은 하나의 환상일 뿐이다.


     게다가 희생자의 시각을 드러내 주기에 복음서의 예수의 수난이 박해자의 폭력을 고발한 것이라고 본 지라르와 달리, 포이에르 바하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각주:13]


기독교는 고통의 종교다. 우리가 오늘날 아직도 모든 교회 안에서 만나게 되는 십자가상은 우리에게 구원자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사람, 고통받는 사람을 제시할 뿐이다.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는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의식이 지배적인데 그것은 심리적으로 깊게 뿌리박혀 있는 그들의 종교관에서 오는 결과다. 십자가상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서 자기자신 또는 타인을 십자가에 못 박고 싶다는 욕망이 왜 생기지 않을 것인가?


     기독교의 역사를 참고한다면, 포이에르 바하의 이런 지적은 꽤 설득력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지라르의 말대로 희생자의 시각을 드러내주기에 복음서가 『티아냐의 아폴리니우스의 생애』와 같은 박해자의 텍스트들보다 더 뛰어난 것이라면, 왜 교부들은 이런 텍스트를 읽으면서도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저주를 내뿜었던가. 기독교의 도덕을 원한의 도덕이라고 불렀던 니체를 씹어대면서 복음서는 결단코 니체가 말한 바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격찬한 지라르는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인용한 터툴리안에 대해선 대체 뭐라 말할지 궁금하다.[각주:14]


그날이 오면 물론 또다른 구경거리가 있다. 최후의 영원한 심판의 날인 그날에 이교도들은 뜻하지 않게 자신들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보게 되고, 그토록 낡은 세계와 그토록 많은 소산이 거대한 불길 속에서 송두리째 타버리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얼마나 엄청난 장관이 눈앞에 펼쳐지겠는가! 얼마나 탄복하겠는가! 얼마나 웃어야 할까!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주님을 욕되게 한 그들을 그 때문에 하염없이 지켜보고 싶은 심정이다. 이 자야말로 목수나 매춘부의 아들, 안식일을 파괴한 자, 사마리아인이자 귀신들린 자이다. 이 자야말로 그대들이 유다에게서 사들인 자다. …내가 생각한 바로는 그것은 원형 경기장이나 두 개의 무대 관람석보다도, 또는 다른 어떤 경기장보다 더 재미있는 광경이다.


     터툴리안 뿐만이 아니다. 니체는 토마스 아퀴나스도 서슴없이 인용했다. "천국의 축복받는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진 자들이 벌 받는 것을 보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축복을 더욱 기쁘게 여기리라."[각주:15] 마찬가지로, 이러한 원한의 도덕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을 때 역사는 가장 비극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확실히, 역사는 유대인을 향한 증오가 기독교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그 중에서 가장 파괴적인 인간으로 히틀러를 꼽을 수 있지만 실은 근본적인 싹은 이미 피어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예로, 4세기 교부 크리소스토모는 “(유대인은)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야비한 이들로… 음탕하고 탐욕스러우며 게걸스럽고 배신을 일삼는 강도이며 …상습적인 살인자에다 파괴자이며 악마에 사로잡힌 이들로서… 그들은 사나운 짐승의 잔인성을 능가하며 자기 자손을 죽여서 악마에게 희생물로 바친다.”[각주:16]는 끔찍한 독설을 퍼부었다. 불행하게도, 이런 독설은 시간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히려 뿌리 깊게 박힌 하나의 기독교적 신앙의 원형이라는 것을 루터는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각주:17]


그대는 유대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하며, 그들이 어디서 음모를 꾸미는지 알아야 한다. 그곳은 바로 악마의 소굴이며 거기에는 헛된 자만, 교만, 거짓, 비방만이 난무할 뿐이다. 만일 그대가 유대인을 보았고 그들을 가르치는 것을 들었다면, 그대는 사람의 얼굴에 독을 뿌려 죽이는 살인 뱀을 본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외에도 루터가 뿜어낸 유대인을 향한 증오의 말들을 참고하면, 불행히도 20세기의 히틀러와 사실상 별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루터의 견해에 따르면 유대회당과 학교는 불태워져야 하고 더 나아가 하느님께 우리의 진실을 보여드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지옥불 속으로 던져버러야 한다. 유대인의 집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유대인이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고통 속에 사로잡힌 존재라는 것을 깨닫도록 집시들처럼 지붕 아래 또는 헛간에 머물게 해야 한다. 유대의 기도서와 탈무드 서적 그리고 성서마저 유대인들이 비방하기 위해 사용하기 때문에 압수해야하고 랍비들에게는 절대로 가르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통행로나 거리에서 유대인을 발견하면 즉시 체포해야 한다."[각주:18]

     안타깝게도, 이처럼 터툴리안에서 루터에 이르까지 기독교의 역사에 나타난 유대교를 비롯한 타종교에 대한 가해의 텍스트를 들이댄다 할지라도, 지라르는 그것은 그들이 복음서의 진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체로 기독교의 역사란 타인을 십자가에 못 박고 싶은 욕망을 폭력으로 해결한 역사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반유대주의 문제는 지라르가 말한 바와 같이 대충 넘어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라르는 대놓고 이렇게 말한다.[각주:19]


반유태주의, 선민의식, 반진보주의나 희생물이라 할 수 있을 무고한 인류에 대해 복음서가 범했을지도 모르는 어떤 범죄를 들추어내려는 모든 작업들이 흥미로운 것은 그것들의 명백한 상징성 때문이다.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스스로 명쾌하게 해결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바로 그 텍스트에 의해 바로 자신이 해석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인간의 헛된 사업들 중에서 이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절망스럽게도 "20세기를 통틀어서 가장 센 모방의 힘은 나치도 아니고, 희생양 근심에 들어 있는 유대교적 기원을 잘 알고 있으면서 이 근심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던 나치의 이데올로기도 아니다."[각주:20]라고 까지 말한다. 그렇다면 "신앙은 본질적으로 당파적이다. 그리스도를 찬성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사람이다. 나를 찬성하든가 또는 나를 반대하든가 둘 가운데 하나다. 신앙은 적 또는 친구만을 알고 있을 뿐 비당파성을 알지 못한다."[각주:21]는 포이에르 바하의 말을 지라르에게 헌정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모방하는 경쟁과 충돌, 그리고 희생양에 대한 그의 이해는 우리 시대의 가장 심오한 지적 발견의 하나”[각주:22]라는 윙크의 지적은 명심할 필요가 있다. 사실, 희생자의 시각을 복음서가 다른 텍스트들보다 더 잘 드러내고 있다는 주장이 완전히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럼에도 현대의 모든 비평이 이교적이고, 반유대주의를 파헤치는 작업은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는 그의 지적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이 지경이 된 이유는 제의의 위기로 인해 발생한 폭력에 대해 종교들이 추구했던 해답의 차이를 역사적으로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다시 말해, 복음서가 유대전쟁 와중에 혹은 그 이후에 쓰인 것이라면, 유대교의 희생제의의 위기를 반영하는 일종의 논쟁적 이야기임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설령 했다하더라도 신화들의 비교를 통해 보는 방법론이 역사를 보는 감각을 망쳤을 수도 있다. 고로, 지라르는 브라이트의 다음과 같은 물음을 좀 더 신중하고 철저하게 고려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각주:23]


유대교가 실제로 추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의 남은 외길뿐이었다. 그것은 바리사이파가 지적한 길이니, 율법적 유대교, 곧 미쉬나와 탈무드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구약성서신학은 탈무드에 결합되어 그 열매를 맺은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대답이 있다. 그것은 크리스챤의 답이며, 또 크리스찬으로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답이다. 즉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사람이 기다려 온 대로 하느님의 절대적인 구원권능이 인류역사에 결정적으로 침투한 그 사역 자체요, 모든 시대의 분기점인 대전환점이라고 선언한다. 요컨대 크리스찬의 대답은 그분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의 신학적 종착점이라고 확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디로? 라는 물음에 대해 이와 같은 상반되는 두 가지 답이 있다.


     이처럼 지라르와 달리 브라이트가 좀 더 겸손한 해법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브라이트는 "크리스챤과 유대인이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바로 이 문제에 관해서다. 비록 견해를 달리하더라도 양자가 사랑과 상호이해 속에서 각기 자기 입장을 지키도록 하자."[각주:24]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지라르 자신의 연구의 다산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개념들, 즉 짝패/쌍둥이, 제의의 위기, 초석적 폭력, 희생자의 시각에서 박해자를 고발하는 텍스트로서의 복음서 등은 기독교의 역사에서 발생한 반유대주의를 비롯한 타자에 대한 여러 폭력들을 성찰하도록 해 주는 소중한 유산이고, 그렇기에 브라이트의 겸손한 해법보다 좀 더 생산적인 해법을 내놓을 수 있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지라르 그 자신은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보다 우월하다는 전통주의적인 기독교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는 한 때는 희생자였던 이들이 다른 때에는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몰랐던 것일까? 설령 희생자라 하더라도 폭력적 성향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내다보지 못했던 걸까? 이미 기독교의 역사는 이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비록 르낭처럼 유대교에 대해 독설을 내뿜거나 인종주의적인 색채를 풍기진 않았다할지라도 적어도 기독교 승리주의는 숭배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를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우월한 기독교라는 이념을 충실히 대변한 변증론자로 자리매김 해야 할 것이다. 이미 그 자신도 그렇게 말한 바 있지만 말이다.


4. 다원주의적 타자로서 복음서 읽기 : 프로이트의 『인간모세와 유일신교』 


     프로이트는 『인간모세와 유일신교』를 여러 차례에 걸쳐 썼고, 최종 저작본에는 서문을 두 개나 포함시켰으며, 더욱이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하기 직전에 완성했다.[각주:25] 때문에 이 저서에서 반유대주의가 다루어지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살펴봐야 할 대목은 반유대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모세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프로이트의 폭탄과도 같은 발언이다. 프로이트 역시 이런 발언이 아주 충격적이고 위험한 짓이라는 점을 잘 숙지하고 있었는지 이 책의 첫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각주:26]


한 민족이 자신들의 겨레붙이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을, 그 민족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행위는 잘 하는 행위도 못될뿐더러 함부로 할 행위도 못된다. 적어도 그 민족에 속한 사람에게는 특히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국민적 이득으로 추정되는 것을 위해서 진실을 도외시한다는 비난을 당해서도 안된다. 더구나 실세 사태의 해명이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베풀 수 있는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자 그렇다면 모세란 누구였단 말인가.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세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프로이트가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모세가 만약 이집트인이었다면 이라는 전제를 달고 연구를 진행했다. 또한, 자신의 이런 전제가 매우 불충분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의 연구는 이 불충분하고 더구나 불확실한 결론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이다."[각주:27] 더구나 "잡지 이마고에 이 글이 게재되는 근거는 이것이 정신분석학의 적용을 그 내용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근거는 정신분석학적 사고에 익숙한 극소수의 사람들, 정신분석학의 성과를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만 인정받을 수 있을 것"[각주:28]이라고까지 말했다. 다시 말해, 역사학적으론 극히 빈약한 자료에 기초한 주장일 수 있겠지만 정신분석학적으론 충분히 타당한 연구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역사학이 보지 못한 진실을 정신분석학은 볼 수 있도록 해준다는 일종의 자긍심이 깔린 말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처음엔 "모세가 이집트인이었다는 통찰에서 파생하는 모든 추론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각주:29]는 신중한 자세를 취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새로운 종교를 마련해 준 모세가 이집트 인이었다면 우리는 그가 마련한 이 새로운 종교는 이집트 종교였다는 가정을 뿌리칠 수 있을 것인가?"라며 본격적으로 실마리를 풀어가는 논의를 전개했다. 그리고선 결론을 내렸다. "만일에 모세가 이집트 인이었고, 그가 자기 종교와 유대 인에게 전했다면 그 종교는 아케나덴의 종교, 즉 아덴교였다는 것이다."[각주:30]

     이런 결론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겐 분명 충격이었을 것이다.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말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끌어들여 나름대로 증명하고자 애썼다. 증명을 위해 역사비평학의 논의를 살펴볼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이것은 "우리 앞에 놓인 성서의 보고는 참으로 귀하고 가치 있는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지만, 이 기록은 어떤 목적을 향한 강력한 의도의 영향 아래 형편없이 왜곡되고 문학적인 창작의 산물에 의해 지나치게 미화되어 있다."[각주:31]는 그의 진술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래서일까, 성서의 이야기에서 "탈락, 신경에 거슬리는 반복, 명백한 모순"[각주:32]을 잘 읽어내고 있다. 그런데 프로이트에게 이런 탈락, 반복, 모순은 단순히 사료 처리의 문제가 아니라 흔적의 제거나 왜곡과 같은 정신분석학적 개념들과 만나게 해주는 현상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흔적의 제거와 왜곡이라는 개념을 견지하고 성서의 이야기를 분석한 결과 프로이트는 모세가 이집트인이라는 논제보다 더 충격적인, 즉 유대 민중이 모세를 살해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이런 살해가 죄의식을 불러일으켰고 결국엔 야훼숭배에 이르도록 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살해와 숭배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또 다른 변형이라는 점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종교가 분명히 정신병적 증후의 성격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각주:33]

     이쯤이면, 한 가지 질문을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프로이트는 대체 왜 이런 일을 착수했을까하는 물음을 말이다. 더욱이, 당시의 유대인들이 충격과 분노를 보일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예감했음에도 말이다. 이를 위해, 일단 『토템과 터부』 히브리어판 서문을 참조해 보자.[각주:34]


이 책의 독자는 성서의 언어에 무지하고, 자기 조상의 종교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 있으며, 민족주의적 이상을 공유할 수 없는, 그러나 아직까지 결코 자기 민족과 의절한 적이 없고, 자신의 본질적인 천성에 있어 한 사람의 유대인이라고 느끼고 있으며 그러한 본성을 바꾸고자 하는 어떤 욕망도 없는 저자의 감정적 위치에 자신을 올려놓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만약 그에게 당신이 당신 동포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모두 버렸으니, 당신에게 유대적인 무엇이 남아 있소라고 질문한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많은 것이 남아 있소. 그리고 아마 그 정수도 말이오.


     유대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한 프로이트의 복잡한 심경을 읽어볼 수 있는 글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이 글에 대한 로즈의 평은 『토템과 터부』뿐만 아니라 『인간모세와 유일신교』에서 프로이트가 행한 작업이 갖는 의미를 잘 포착해 내고 있다. 들어보도록 하자.[각주:35]


프로이트는 여기서 현대의 세속적 유대인에 대한 가장 충격적인 자기규정의 하나를 보여줍니다. 즉 언어적․종교적․민족적 정체성이라는 치장을 벗겨내는 것이 그를 덜 유대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유대적으로 만드는 유대인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이처가 말했듯이 세계의 틈새들에 거주하는 비유대적 유대인입니다. 이 비유대적 유대인은 자기 자신에게 유대인성의 정수가 있음을 주장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그것의 후견인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소유물로서 그것에 대한 권리를 강경하게 주장하며, 자신이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바로 이런 권리주장을 통해 특정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1930년대의 위기에 대응한다는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부터 프로이트는 스스로를 보편화하는 것이 유대인적 특수성의 과업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모세와 유일신교』의 모세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한 프로이트 자신을 투영한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모든 해석이 해석자가 처한 정황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을 굳이 참조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분명한 것은 로즈가 말했던 것처럼 비유대적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특정한 공간에다 박아놓지 않으려는 프로이트의 이러한 정체성 모색은 민족의 시원인 모세를 새롭게 읽고 정의해내는 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에 대한 사이드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길지만 들어보도록 하자.[각주:36]


도이처는 유대주의 내부의 주요한 이의 제기의 전통이 스피노자, 맑스, 하이네, 그리고 프로이트와 같은 이단적인 사상가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논합니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의해 박해받고 파문당한 예언자이자 모반자였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강력한 사회비판이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도이처는 그 사상 콤플렉스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치유불가능한 국외이산적 특성, 고향에서 추방당했다는 특성이 그것입니다…유대인적 관점에서 비롯된 비유럽인에 대한 프로이트의 성찰과 주장은 내가 생각하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나 필사적으로 뛰어들고 싶어하는 민족주의적이거나 종교적인 집단 속으로 정체성을 용해시켜 넣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러한 관점이 수반하는 것에 대한 감탄할만한 스케치를 제공해줍니다. 더욱 대담한 것은 가장 잘 정의될 수 있고, 가장 식별가능하며, 가장 강고한 집단적 정체성조차도 거기에는 그것이 하나의 오직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완전히 병합되는 것을 방해하는 내재적인 한계가 존재한다는 통찰에 대한 프로이트의 심오한 예증입니다. 프로이트에게 있어 그러한 한계를 상징하는 것은 유대인 정체성의 정초자 그 자신이 비유럽적인 이집트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인간모세와 유일신교』에 대한 사이드의 이러한 지적이 프로이트에게만 해당되고 마는 일일까. 다시 말해, 우리에겐 적용되지 않는 사안일까. 앞서 본 것처럼 탈락, 신경에 거슬리는 반복, 명백한 모순을 야기하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을 흔적의 제거 및 왜곡이라는 정신분석적 관점을 동원해 해체함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민족을 민족이라는 틀을 넘어 좀 더 보편적인 맥락에 위치시킨 프로이트의 작업은 복음서를 읽는 우리에게도 상당히 의미하는 바가 크다. 사실, 프로이트가 모세를 이집트인으로 해석한 작업은 개신교 성서학, 특히 역사적 예수 연구가 예수를 해석해 온 역사와도 일치한다. 한 예로, 예수가 유대인으로 와서 유대인으로 살다가 죽었다는 벨하우젠의 논제를 들 수 있다. [각주:37]분명, 이것은 모세가 이집트인이라는 프로이트의 논의만큼이나 예수를 기독교의 창시자로 본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낯설거나 혹은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논제는 벨하우젠 이래로 표준적인 이해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르낭적인 논의, 즉 예수가 유대교에서 출발한 것은 맞지만 그 정신은 유대적인 것과의 단절이라는 주장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심지어, 벨하우젠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이런 이해는 역사적이기보다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고수하기 위한 신학적 이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이런 이해는 할 수만 있다면 특정한 어떤 한계선 안에 가두어 놓으려 하기에 타자에 대한 이해를 배제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쩌면 홀로코스트 이후 계속 제기되고 있는 반유대주의 문제에 대한 치열한 역사적 신학적 싸움은 이것을 반증하는 예일 것이다. 그렇기에 자기민족의 시원인 모세를 이집트인이라고 칭한 프로이트의 작업은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이야기를 던져주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모세와 유일신교』가 전해주는 의미는 이 뿐만이 아니다. 오스트리아로 침공해 오는 나치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프로이트는 이 저서를 통해 반유대주의와 관련해서도 의미 있는 비판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 비판과 관련해 레너드는 중요한 설명을 곁들였는데, 들어보도록 하자.[각주:38]


프로이트는 유럽 중심의 설명은 물론 유대인 중심의 설명에서 드러나는 배제의 수사를 거부했던 것 같다. 프로이트는 긴 역사에 걸쳐 그리스인과 유대인 모두 순수성을 고집하는 사고에 반기를 들면서 이집트인 모세로 하여금 그리스인이 아니면서도 유대인에 대한 반유대주의적 고정관념을 확실히 헛갈리게 하는 잡종 인물을 만들어냈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의 다신교가 아닌 유대인의 유일신교 덕분에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는지 강조함으로써 지성의 역사와 관련해 아주 도발적인 주장을 펼쳤다. 프로이트는 앞서 시대의 멘델스존처럼 유대교를 이성의 종교로 회복시키려 했던 것이다. 더구나 멘델스존과 마찬가지로 유대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적대감과 관련된 광범위한 담론이라는 맥락에서 이러한 주장을 펼쳤다. …프로이트 자신은 유대인의 지적 자신감, 곧 그들의 우월한 이성을 그리스도교의 반유대주의적 원천으로 여겼다. 혹자는 그리스인에게만 독점적으로 이성의 속성을 부여하는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교의 반유대주의 산물인지 보여주려 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를 잡종적인 인물로 만듦으로써, 게다가 모세의 유일신교가 갖는 이성적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반유대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던 프로이트의 이러한 관심은 바울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도 드러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바울이 만든 "새로운 종교는 선행하던 유대교에 대한 문화적 퇴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각주:39] 이제 프로이트는 대놓고 말한다. 바울의 기독교가 갖는 "현상은 수준이 낮은 새로운 인간집단이 다른 집단에 침윤하거나 침윤의 허락을 받아 낼 때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유대교는 정신성의 정점에 이르러 있었지만 기독교는 이같이 높은 수준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아덴교와 여기에 이어지는 모세교와는 달리 미신적, 마술적, 신비적 요소의 침투를 거부하지 않았다."[각주:40] 바로 이 지점에서, 어쩌면 경계인으로서의 유대인이라더니 결국 프로이트도 원한에 섞인 증오를 감행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게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세속화된 유대인으로서, 그리고 종교란 극복되어야 할 구시대의 유물로 보는 인간에게 그런 의문은 자칫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프로이트 역시 "기독교는 인간이 이룬 하나의 진보였고, 이때부터 유대교는 화석으로 전락했다."[각주:41]고 지적한 바 있다.

     바울뿐만 아니라 프로이트는 복음서에 대해서도 메스를 가했는데, 이 부분은 아주 짧지만 빛나는 통찰을 지니고 있다. 그에게 복음서란 사람들을 반유대주의에 오염시켜 유대인에게 원한을 퍼붓게 한 주범이다. "복음서가 유대인 사이에 있었던 일, 오로지 유대인만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원한의 전이를 훨씬 용이하게 만들었다."[각주:42] 하지만 원한의 전이보다 좀 더 주목해야 할 대목은 복음서가 순전히 유대인만 다루고 있다는 프로이트의 통찰이다. 왜냐하면 어쩌면 이것은 프로이트가 기독교 경전이란 폭력이 배제된 깨끗하고 순수한 영성적 언어가 아니라 논쟁적이며 배제와 차별이 담긴 담론적 투쟁의 장소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경전이 하나의 투쟁의 장소라는 점은 큄멜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유대교와 관련한 논쟁으로서의 경전에 관한 논의는 아니지만 말이다.[각주:43]


마르시온이 이미 바울의 경전적인 권위를 확립했다고 하는 사실은 틀림없이 이미 교회 내에 있는 경향, 즉 사도적인 문헌들을 복음서의 문헌들과 같은 수준에서 평가하고, 이러한 새로운 성경을 분명하게 구분하려고 하는 경향을 아주 정확하게 강화해준 것뿐이다. 이러한 발전은 몬타너스주의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서 계약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성에 의해서 더욱더 요구되었다.


     마르시온과 몬타너스주의 뿐이었겠는가. 그렇지 않다. 페이절스는 『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에서 네 가지 복음서를 주장하는 정통파의 주장이 영지주의를 배제하려는 시도였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정통파가 주장하는 사도적 승계는 경전의 형성을 도모하는 주된 논지였고, 정통파 자신들이 인정한 신약성서만이 "미래의 모든 교리와 형식을 결정하는 정전"[각주:44]이라고 믿었고, 이로 인해 신약성서 안에 있는 "네 가지 복음서 이외에 어떠한 복음서도 인정하지"[각주:45]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복음서가 유대인의 문제만을 다루고 있기에 원한의 전이를 일으키는 텍스트라는 프로이트의 지적은 『신앙과 형제살인』이라는 류터의 책에서 직접적으로 확인된다. 게다가 류터의 이 책은 희생제의의 위기에는 쌍둥이/짝패에 관한 담론이 출몰한다는 지라르의 논의를 멋지게 보여주는 책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자기정립의 행위로서 아버지 유대교에 대해 아들 기독교가 행한 살해를 이만큼 잘 보여주는 책은 흔치 않을 것이다. 들어보도록 하자.[각주:46]


우리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죽음에 대한 비난을 로마 정치 당국으로부터 유대인의 종교적 지도자들에게로 전이시키려는 욕구가 복음서에 두드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역사가들은 대개 이러한 이유를 이방 선교의 긴박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 그러나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할 점은 책임 전가가 단순히 로마당국으로부터 유대 당국으로 넘겨진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부터 종교적 당국으로 넘겨진 것이다. … 이것은 이 책임 전가의 목적이 단순히 이방인들에 대한 변증적인 목적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유대 종교적 전승에 대한 논쟁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변절한 이스라엘의 종교당국은 항상 예언자들을 살해했으며, 따라서 대메시아적 예언자를 죽임으로써 그 배교적 유산의 정점을 이루었다는 사상은 모든 복음서 안에 들어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 방향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만 이 지경일까? 사실 반유대주의가 아닌 다른 관점을 동원하더라도 문제가 돌출하지 않는 것은 없다. 뤼드만은 신약성서의 다른 본문들이 불관용을 조장한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각주:47] 윌스 역시 신약성서에는 그들과 우리를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가 깊게 스며있다고 주장한다.[각주:48] 그렇다면, 기독교 경전인 신약성서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반유대주의 및 불관용을 설파하는 신약성서의 어떤 이야기들을 무조건적으로 따라야만 하는가?

     불행하게도, 이것은 단순히 경전의 문제만이 아니다. 게르드마에 따르면 역사비평적 성서연구의 초기에 속하는 제믈러로부터 불트만을 거쳐 그룬트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학자들이 앞서 본 르낭처럼 유대교에 대한 복음서의 폭력적 서사를 암묵적으로 승인했음을 보여준다. [각주:49]수잔나 헤셀은 히틀러 시대에 망령처럼 떠돌아다니던 아리안 우월주의에 맞게 기독교 신학을 개작하고, 그럼으로써 유대인 학살에 간접적으로 기여하고만 신학자들을 추려내어 적극적으로 비판했다.[각주:50] 때문에, 미쓰오의 다음과 같은 말은 핵심을 찌른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각주:51]


지금까지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유대교에 대한 비판적 경향이, 기독교의 많은 성서해석에서 무비판적으로 계승되어 신약성서 전체의 해석을 위한 단서로 여겨졌습니다. 아직까지도 신약성서의 이러한 비판을 기독교적· 신학적으로 본질적(W. 윌켄스)이라고 언명하는 신약학자도 없지 않습니다. 신약성서의 반유대교적 발언이 기독교 신학에 던지는 문제에 정면에서 답하려는 시도는 지금까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이 화제가 되기 시작한 이후, 겨우 최근에 이르러 조직신학 차원뿐 아니라 성서신학의 차원에서도 이 문제가 다루어지게 되었습니다.”[각주:52]는 미쓰오의 지적은 기독교 신학이 반유대주의를 성찰하고 청산하기가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객관적인 학문을 수행한다는 전제 하에 행해진 작업들 가운데서도 유대교를 비방하고 저주했던 루터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태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역사적 예수 연구 제 3의 탐구시기 이전까지는 그랬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 예수의 성전사건을 제외한 나머지, 특히 율법과 관련한 논쟁들은 역사적 예수가 아닌 교회의 시기를 반영하는 논쟁이라고 못 박은 샌더스의 저작 『예수와 유대교』 이래로 이 분야에서 나름의 반성이 생겨났던 셈이다. 훌륭하게도, 샌더스는 “보다 납득할만한 가정은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행한 그들의 일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봉사로 보았다는 것과 바리새인들이 진심으로 그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마 그들도 모두가 정상에 오르고자 원했고, 그것을 확고히 하기 위해 합리적인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바리새인과 맞선 논쟁을 보다 면밀히 검토할 경우, …그들의 실제적 동기에 관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각주:53]고 말했다. 물론 그 이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일어났던 유대교에 대한 천주교의 반성도 빠질 순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각주:54]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천주교는 놀랍게도 유대교에 대한 선교 자체를 포기하는 선언을 감행하기까지 했다. 독일 개신교도 이런 선언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적 시선이 신학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서해석학의 역사에 대한 고찰의 결론으로서 동시에 버트챌의 말을 인용하면서 티슬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55]


버트챌에 따르면 많은 영역에서 학자들을 혼란시키는 지점은 개별적 인간의 사건이 하나님과 인간의 연계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뿌리에 있는 문제는 성육신이다. 우리는 가현설과 아리우스주의를 동시에 피해야 한다.


     따라서 여전히 기독교 신학에 내재해 있는 이런 배제적인 해석학적 작업을 참조한다면, 경계인으로서 프로이트가 수행했던 작업은 꽤 의미 있는 과제를 던져준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경전에 박힌 타자를 배제하는 언어들에 함몰되어 배타적이고 포괄적인 기독교 승리주의를 발설하기 보다는 부정적으로 서술된 타자, 정신분석학적으로 본다면, 흔적이 제거되고 왜곡되었을 수 있는 타자를 고려하는 읽기의 가능성을 프로이트가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특히, 혐오와 배제가 경전을 통해 더욱 힘을 얻고 있는 한국 교회의 현실에선 말이다.


III. 마치며


     후설은 『데카르트적 성찰』에서 "일상적인 실천적 삶은 소박하며, 그 삶은 미리 주어진 세계 속으로 들어가 경험하고, 생각하고, 평가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 경우 모든 것에서는 경험작용의 지향적 작업수행들이 익명적으로 실행되는데, 이 작업수행들을 통해 사물들은 단적으로 현존하게 된다. 즉, 경험하는 자는 이 작업수행에 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마찬가지로 작업을 수행하는 사유에 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각주:56]고 말 한 적이 있다. 평균적인 보통의 사람들이 자기가 처한 역사적 상황이나 환경을 객관적으로 성찰해서 판단하지 않고, 대체로 상황이나 환경이 제공하는 선입견을 그대로 수용해 해석을 감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퇴락에 빠지기 쉬운 존재이고, 보통은 선입견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인 것이다. 이로 인해 타자는 해석자의 선입견에 의해 포착되고 해석되며 점령당한다. 설령, 비판적 성찰을 거쳐 보편적 인식에 관한 감각을 기른다할지라도, 후설이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이란 우선은 "모나드적 자기인식"을 거쳐야 하는 존재이며 상호주관적 인식은 단지 공감을 통해서만 실행될 뿐이다. 이것은 일상성에 빠져 사는 보통의 인간이 자기를 반성하고 타자를 포용함으로써 자기를 넘는 하나의 보편적 인식과 이해를 획득하기란 쉽지 않음을 가르쳐 준다. 아무튼, “보편적 자기성찰을 통해 세계를 다시 획득하기 위해서는 판단중지를 통해 세계를 상실해야" [각주:57]하지만, 분명히 인간이란 선입견 속에서 움직이며 그것을 토대로 끊임없이 판단을 수행하는 존재다. 하이데거식으로 고친다면, ”해석은 그때마다 하나의 앞서 가짐에 근거하고“[각주:58]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펴본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적 자기 이해는 후설에 따르면, 타자를 고려한 상호주관성이기보다는 기독교적 자아에 의해 구성된 일종의 모나드적 자기인식일 것이고, 하이데거라면 기독교적 앞서 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로이트를 따라 정리해 본다면, 이런 모나드적 자기인식 혹은 앞서 봄은 이미 반유대주의적 색채가 담긴 현상이었고, 이 현상이 반영된 아버지 유대교 살해에 관한 이야기들이 유포될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이었으며, 복음서 저자들은 자신들 보다 앞서 유포되고 있던 이런 이야기들을 자신들의 신학적 구상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하고 심화시켰고, 그리고 이를 통해 들어서게 된 원한과 증오가 다른 민족들에게로까지 전파되고 만 역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로 인해 기독교 초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을 향한 박해가 지속적으로 있어왔고, 최후엔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학살이 자행되었음을 상기하면, 오늘날 전투적 무신론자들이 추천하는 바와 같이 단순한 하나의 신화적 이야기로만 치부하고 끝내기엔 너무나 비극적이고 무서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심각하게는 이러한 비극이 다른 형태로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들이 얼마나 많이 타자들을 향한 혐오를 쏟아내고 있는가. 여성안수, 동성애, 이슬람 등과 같은 이슈와 관련해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담론들을 무수히 양산해내고 있다. 세월호와 관련해서도 어처구니가 없는 설교를 한 교회들도 상당한 수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과연 이 모든 일들이 성서를 잘못 해석한 인간들 탓에 생겨난 것일까? 그렇게만 본다면 너무 안일한 인식이 아닐까? 복음서에 나타난 반유대주의를 초점 삼아 지금까지 논의를 진행해 온 이유도 타자와 관련해 오늘날 교회들이 쏟아내는 혐오적인 발언이 이것과 무관치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복음서 자체가 이미 유대인이라는 타자를 정의하고 대처하는 방식들과 관련해 다소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쪽으로 가르쳐 주고 있기에, 유대인이 아닌 다른 타자들에 대해서도 혐오와 배제를 실행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다. 때문에, “차이는 있어도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모두가 거룩한 경전에 너무 많은 권위를 부여하는 위험을 안고 산다.”[각주:59]는 폴마이어의 지적은 한국 교회의 현실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는 게 아닐까. 경전이 제공하는 배타성에 함몰되어 타자를 배제할 위험성이 너무 많은 것이다. 더욱이 근본주의적 성서 이해가 판을 치는 이 사회에선 더욱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해석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본 것처럼 성서 자체에 이미 타자에 대한 배제의 담론이 투영되어 있다면, 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의 답변으로 프로이트적 독법을 제안한 것이 고작이라 자괴감이 밀려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다원적이고 개방된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이런 독법이 최선이지 않을까.


ⓒ 웹진 <제3시대>



  1.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김진식․ 박무호 옮김, 민음사, 1997, pp.483~484 [본문으로]
  2. 정일권, "르네 지라르 '십자가 승리' 주목하라",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2703 [본문으로]
  3. 르네 지라르,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김진식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4, pp.230~231 [본문으로]
  4. 정일권, "르네 지라르 '십자가 승리' 주목하라",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2703 [본문으로]
  5. 르네 지라르, 『희생양』, 김진식 옮김, 민음사, 1998, p.17 [본문으로]
  6.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p.25 [본문으로]
  7. 르네 지라르,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p.240 [본문으로]
  8. 르네 지라르, 같은 책, p.226 [본문으로]
  9. 정일권, "르네 지라르 '십자가 승리' 주목하라",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2703 [본문으로]
  10. 윌터 윙크,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한성수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p.250 [본문으로]
  11. 윌터 윙크, 같은 책, p.249 [본문으로]
  12. 포이에르 바하,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강대석 옮김, 한길사, 2006, p.130 [본문으로]
  13. 포이에르 바하, 『기독교의 본질』, 강대석 옮김, 한길사, 2008, p.141 [본문으로]
  14.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학』, 홍성광 옮김, 연암서가, 2011, pp.61~63 [본문으로]
  15.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책, p.61 [본문으로]
  16. 레너드 스위들러, 앞의 책, pp.230~231 [본문으로]
  17. 이스마 엘보겐, 『로마제국에서 20세기 홀로코스트까지 독일 유대인의 역사』, 서정일 옮김, 새물결, 2007, p.115 [본문으로]
  18. 이스마 엘보겐, 앞의 책, p.115 [본문으로]
  19. 르네 지라르, 『희생양』, p.189 [본문으로]
  20. 르네 지라르,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p.225 [본문으로]
  21. 포이에르 바하, 『기독교의 본질』, p.401 [본문으로]
  22. 윌터 윙크, 앞의 책, p.251 [본문으로]
  23.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하)』, 김윤주, 분도출판사, 1979, pp.358~359 [본문으로]
  24. 존 브라이트, 앞의 책, p.359 [본문으로]
  25. 데이비트 스태포드 클라크, 『한권으로 읽는 프로이트』, 최창호 옮김, 푸른숲, 1997, p;.245 [본문으로]
  26. 지그문트 프로이트, 『종교의 기원』,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5, p.257 [본문으로]
  27. 지그문트 프로이트, 앞의 책, p.267 [본문으로]
  28.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책, p.261 [본문으로]
  29. 지그문트 프로이트, 앞의 책, p.270 [본문으로]
  30.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책, p.281 [본문으로]
  31.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책, p.305 [본문으로]
  32.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책, p.307 [본문으로]
  33.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책, p.362 [본문으로]
  34. 재클린 로즈,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응답」, 『프로이트와 비유럽인』, 주은우 옮김, 창비, 2003, pp.99~100 [본문으로]
  35. 재클린 로즈, 앞의 책, pp.100~103 [본문으로]
  36. 에드워드 사이드, 『프로이트와 비유럽인』, pp.80~83 [본문으로]
  37. Julius Wellhausen, Einleitung in die Drei Ersten Evangelien, Berlin: Druck und Verlag, 1905, pp.108~115 [본문으로]
  38. 미리엄 레너드, 『소크라테스와 유대인』, 이정아 옮김, 생각과 사람들, 2014, pp.333 [본문으로]
  39. 지그문트 프로이트, 『종교의 기원』,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5, p.366 [본문으로]
  40.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책, pp.366~367 [본문으로]
  41. 지그문트 프로이트, 앞의 책, p.367 [본문으로]
  42.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책, p.371 [본문으로]
  43. W. G. 큄멜, 『신약정경개론』, 박익수 옮김,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p.493 이와 관련해 바트 어만의 책, The orthodox Corruption of Scriptu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3은 이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책이다. [본문으로]
  44. 일레인 페이절스, 『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 하연희 옮김, 루비박스, 2006, p.62 [본문으로]
  45. 일레인 페이절스, 같은 책, p.61 [본문으로]
  46. 로즈메리 류터, 『신앙과 형제살인』, 장춘식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1, pp.124~125 일레인 페이절스는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서가 반유대주의와는 관계가 없다고 선을 긋는다. 이에 대해서는 사탄의 탄생, 권영주 옮김, 루비박스, 2006, p.52를 참조하라. 하지만 뤼드만은 마가복음서에서 수난사화는 반유대주의적 성향이 스며있다고 지적한다. Gerd Ludemann, The Unholy in Holy Scripture, trans by John Bowden, Louisvill: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pp.85~90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47. Gerd Ludemann, Intolerance and the Gospel, New York:Prometheus Books, 2007 [본문으로]
  48. Lawrence Wills, Not God's People, United kingdom:Rowman& Littlefield Publishers, 2008 [본문으로]
  49. Anders Gerdmar, Roots of Theological Anti-Semitism: German Biblical Interpretation and the Jews, from Herder and Semler to Kittel and Bultmann, Leiden: Brill, 2009 [본문으로]
  50. Susannah Heschel, The Aryan Jesus,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8 [본문으로]
  51. 미야타 미쓰오, 앞의 책, p.50 [본문으로]
  52. 미야타 미쓰오, 같은 책, p.49 [본문으로]
  53. E.P. 샌더스, 『예수와 유대교』, 황종구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8, p.458 [본문으로]
  54. 이와 관련해 펠리칸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어떠한 때 어떠한 자료이든, 가령 그 자료가 로마카톨릭 교회의 과거 공적인 자료를 포함하더라도 유대인에 대한 증오, 박해, 또 반유대주의의 표명을 슬퍼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또 예수의 죽음을 당시 살았던 모든 유대인이나 현재의 유대인의 탓으로 돌리는 일체의 시도를 단죄하고 유대인을 하나님이 부정하고 저주한 자들로 여겨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는 점을 기술하고 있다. 야로슬라프 펠리칸, 『예수의 역사 2000년』, 김승철 옮김, 동연, 1999, p.364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55. 앤서니 티슬턴, 『앤서니 티슬턴의 성경해석학 개론』, 김동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2, p.528 [본문으로]
  56. 에드문트 후설, 『데카르트적 성찰』, 이종훈 옮김, 한길사 2002, p.227 [본문으로]
  57. 에드문트 후설, 앞의 책, p.233 [본문으로]
  58.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p.208 [본문으로]
  59. 잭 넬슨-폴마이어,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 한성수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12, p.147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폭력과 타자성의 관점에서 본 신약성서 1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1. 시작하며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평했다. 세월호 이후를 사는 우리 역시 그렇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세월호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절망적이게도 300여 명의 아이들이 수장된 현실을 애도하기는커녕 혐오스러운 말을 쏟아내는 교회들을 돌아보면서 야만이 아닌 살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의심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교회는,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 해온 신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앙리 레비의 말대로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으로 전락해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세월호 사건을 향한 교회의 혐오스러운 발언들은 교회뿐만 아니라 신학에서 신앙적인 것으로 공공연히 통용되던 타자를 향한 평상시의 폭력적인 이해가 표출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고 말이다. 또한, 자연스럽게 이러한 의심은 내게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를 다시 묻도록 만들었다. 어쩌면 타자를 향해 혐오스러운 말들을 내뱉도록 하는 하나의 근거로 이미 성서가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하나의 깊은 회의가 찾아왔던 것이다. 다행인 걸까. 바로 그 순간 다음과 같이 물었던 스퐁의 말이 떠올랐다.[각주:1]

 

우리는 궁극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서구 종교계에서 그렇게 널리 존중되고 있던 이 성경책이 어떻게 또 다른 악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성경을 악용하는 것을 막고 중지시킬 수 있을까? 성경은 다시 한번 생명의 원천, 그것도 궁극적 원천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미 늦었고 성경도 이미 너무 더럽혀졌나? 나는 이 책에서 이런 주제들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당연히 스퐁의 이러한 질문들 중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닌 “이미 늦었고 성경도 너무 더럽혀졌나?”라는 그의 물음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 르낭, 지라르, 그리고 프로이트의 복음서 해석은 꽤 유용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내게 타자에 대한 기독교적 폭력의 시초가 반유대주의라는 점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기독교적 동일자로 신앙을 일궈온 내게 이것은 아주 신선한 충격이었다. 믿고 따랐던 복음서가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일으키는 근거가 되었다는 점은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타자에 대한 폭력의 문제가 성서에 이미 내장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였다. 사실 이런 나와 달리, 이미 교회의 역사에서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아주 오래된 하나의 전제였다. "반유대주의는 결코 근대에 생겨난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함께 오랫 동안 몇 천년에 걸쳐서 그들의 존재를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이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는 다양한 변종을 하고는 했습니다. 오래전 신을 죽인 백성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회나 교부들의 적의에서 시작된 그것은 이윽고 세속화되어 유럽 정신사의 그림자 부분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각주:2] 하지만 교부들에서야 비로소 이 문제가 돌출했을까? "바울의 선교행동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원시 기독교회는 저들을 유대교에서 떼어놓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에 걸쳐 발생한 원시 기독교회의 유대교 회당으로부터의 분리 단절은 그 후 수많은 트라우마를 야기했던 기독교적 반유대주의의 배경을 이루는 사건입니다."[각주:3]는 지적을 참조하면, 애초에 복음서부터가 유대교를 하나의 타자로 놓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반유대주의 문제는 복음서가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이미 얼룩져 있음을 보여주는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 문제뿐이겠는가. 여성과 동성애도 성서에 내장된 타자에 대한 폭력을 보여주는 예들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이 부분에 대해 도킨스를 비롯한 전투적 무신론자들이 엄청난 열을 올리고 있음을 참조한다면 말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이고, 관용을 모르며, 인종차별주의, 부족주의, 편협성과 손을 잡고, 무지라는 옷을 입고, 자유로운 탐색을 적대시하고, 여성을 경멸하고, 아이들에게는 강압적인, 조직화된 종교는 양심에 커다란 짐을 지고 있어야 마땅하다."[각주:4]는 히치스의 말을 인정하고선 성서를 찢어버려야 하는 걸까. 마치 2세기의 마르시온처럼 말이다. 하지만 무시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참조한다면, 성서 역시 악으로 혹은 폭력으로 더럽혀져 있다는 점을 너그럽게 인정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어떻게 읽고 해석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해진다고 봐야하는 건 아닐까. 사실 이런 일이 비단 성서에만 적용되는 일이겠는가. 다른 종교의 경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투적 무신론자들이 유대교뿐만 아니라 이슬람 경전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을 가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아가 종교의 경전들뿐만 아니라 실은 모든 텍스트가 떠안고 있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복음서의 폭력성을 인지시키고, "반유대주의적 편견의 뿌리로 만들려 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그대로 동일시할 수 없는" 해석을 제안하는 일이지 않을까.

     이를 위해, 본론에서 독서행위에 관한 논의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독서행위는 읽고 있는 텍스트를 그대로 따르는 행위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육영수가 지적한 것처럼 독서행위는 "흰 종이 위에 고정된 검은 글씨를 인지하는 지각 행위가 아니라 개인의 취향과 경험, 교육과 가치관 등에 비추어 텍스트의 복잡한 의미를 적극적으로 발굴하는 능동적 행위"[각주:5]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비록 폭력에 오염된 성서구절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늦깍이 신학생 마르틴 루터는 어느날 수도원 다락방에서 오직 신앙에 의한 의로움이라는 성경 구절에 벼락 맞아 면죄를 구원의 보증수표로 선전하는 가톨릭 천년왕국에 분연히 도전"[각주:6]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루터가 유대인을 향해서는 "전 그리스도교국에 대한 굶주린 경찰견이자 살인마이며, 완전 고의로 … 그들은 물과 우물에 독을 풀고, 아이들을 유괴하며 토막 내었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의 피로 은밀하게 자신의 분노를 삭이기 위해서였다."[각주:7]는 악랄한 저주를 퍼부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가 유대인에게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한때 그는 유대인을 약속의 자녀로 꽤 극찬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루터는 독서행위는 단순히 텍스트를 따르는 행위가 아니라 이 보다 좀 더 복잡한 행위라는 육영수의 지적을 잘 보여주는 예이지 않을까. 아무튼, 독서행위에 관한 논의는 우리에게 성서가 나쁜 텍스트이기에 찢어버리거나 애초에 믿지 말아야 하는 열등한 경전이라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전투적인 무신론자들보다 좀 더 복잡한 물음과 답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계속되는 논의에서 독서행위가 텍스트를 단순히 반복하는 행위가 아닌 좀 더 복잡한 행위라면 대체 성서를 어떻게 읽고 이해해야 하는지를 모색하기 위해 르낭, 지라르, 그리고 프로이트를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이들을 반유대주의가 복음서에 내장되어 있음을 보여준 사람들로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복음서를 읽고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서로 달랐다. 기독교적 사고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 킴볼의 논의에 기대어 보자면, 르낭은 배타주의적 사고에, 지라르는 포괄주의적 사고에, 그리고 프로이트는 다원주의적 사고에 속한다. 킴볼에 따르면 배타주의적 사고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정당한 구원의 방법을 제공해준다는 신념”[각주:8]인데, 특히 배타주의에서도 극단에 위치한 입장인 문자주의는 “종교적 다양성이 야기하는 복잡한 이슈들을 해결해보려 애쓰는 태도는 찾아보기”[각주:9]어려운 그런 사고를 갖고 있다. 포괄주의적 사고는 "과거 수백 년 동안의 많은 다툼과 불화를 잊고 상호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며 함께 힘을 합쳐 평화, 자유, 사회적 정의, 도덕적 가치관을 보존하고 장려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각주:10]하는 입장지만, 그럼에도 "모든 종교에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과 역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완전하고 결정적인 계시를 모두 인정"[각주:11]한다. 다원주의적 사고는 "기독교를 구원의 유일한 수단으로 보지도 않고, 다른 종교의 완성형으로 보지도 않는다. 구원을 얻기 위한 다양한 행로가 모두 실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인정한다."[각주:12] 물론 르낭, 지라르, 프로이트를 이 유형들에 딱 들어맞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에 나타난 반유대주의를 어떻게 대면하고 해석해 가야하는지를 모색함에 있어 중요한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하나의 결론적 제안을 도모할 것이다. 반유대주의를 비롯해 타자에 대한 폭력을 하나의 성스러운 종교적 경험으로 제안하는 신약성서의 이야기들을 읽을 때 어떤 독법이 권장될 수 있는지와 관련해서 말이다. 특히, 개인의 거룩한 종교적 행위로서의 성서 읽기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함께 고려하면서 말이다.


2. 중심글


   1. 종교적 체험으로서의 독서행위 : 배제인가 포용인가


     엘리아데는 종교적 체험을 성스러움에 대한 경험이라고 했다. 물론, 그에 따르면 성스러움은 혼란스러운 것들을 정돈해주는 일종의 방향잡기 혹은 자리 잡기로 정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방향잡기는 소위 신들이 행한 것들을 그대로 따르려는 소위 모방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엘리아데의 논의를 참조할 때 비로소 이해가 가능해진다. “인간 행위의 의미와 가치는 있는 그대로의 물질적인 여건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행위의 재현, 신화적인 전범의 반복이라는 인간 행위의 특성과 결부되어 있다. 영양섭취는 단순한 생리작용이 아니라 일종의 성찬식의 되풀이이다. 혼례와 집단적인 오르지도 신화적인 원형들의 반향이다. 그런 행위들이 반복되는 것은 태초에 신들, 조상들, 영웅들에 의해 그 행위들이 축성되었기 때문이다.”[각주:13] 한 마디로, 종교적 체험은 신들이 행한 행동들을 그대로 따르려는 인간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책의 종교인 기독교는 성서를 읽음으로써 이런 욕망을 실현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 특히 오직 성서만으로를 외치는 개신교는 이런 현상이 좀 더 심하게 나타난다. 스펄전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자.[각주:14]

 

다른 모든 책이 한곳에 모아져 불에 태워졌다고 해도 그것은 거룩한 책 한 페이지를 소거했을 때보다 세상에 끼치는 손실이 적습니다. 다른 모든 책은 아무리 좋더라도 단지 금박과 같아서 금 1온스를 얻기 위해서는 다량의 책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순금입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들의 정신적인 부라 해도 그 안에는 계시의 진리와 같은 보석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성서가 다른 어떤 책보다 귀하고 중요하다는 논지는 기독교인들이라면 대체로 수긍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지가 좀 더 확대되면 성서는 영감 받은 책이기에 오류가 없고, 성서만으로 충분하며, 최고의 책이고, 일관되고 참된 세계관을 주는 유일한 책이라는 주장으로까지 번진다. 성서는 일종의 나침반으로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해석해주는 결정체가 된다. 이렇게 되면 이미 스펄전의 말에서도 드러나듯 다른 모든 것은 열등하고 하찮으며 성서에 비춰서 이해되어야 하는 부차적인 것이기에 배타적인 태도가 쉽게 형성된다. 성서가 말하는 바가 무조건 옳다는 식으로 정립되고 나면 성서가 말하는 모든 문자는 진실이고 진리이고 따라야 할 기준이 되는 것이다. 특히, 개신교인들에겐 성서와 일치시키는 삶이 하나의 종교적 체험임을 상기하면 때론 꽤 위험한, 심지어 폭력으로까지 비화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예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때문에 개신교에서 독서, 특히 성서읽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알다시피, 점차 사회가 다원화되고 개방되어가고 사람들 역시 그러함에도, 교회는 배타적인 방식의 성서읽기만을 추천함으로써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측면이 많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성서읽기가 배타적이 아닌 타자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일단 자기가 읽는 성서에 대해 거리를 두고 심지어 비판적으로 읽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읽기의 묘미는 설사 문자 그대로를 따른다하더라도 읽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폭력적인 본문을 읽는다하더라도 누군가는 그냥 지나칠 것이고, 누군가는 그대로 따라할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성서를 문자 그대로 따르려는 사람들이 교회에선 신앙심이 깊은 걸로 존중받는다. 그렇기에 나쁘게는 성서읽기란 무엇이며 어떤 태도로 성서를 읽어야 타인과 소통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에 관한 고민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게 된다. 오늘날 교회에서 드러나는 소수자와 타종교를 향한 끊임없는 혐오는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 중심을 잡아주는 성스러운 종교적 체험으로서의 성서 읽기가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는 읽기가 되기 위해선 어떠해야 하는지를 르낭, 지라르, 그리고 프로이트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또한, 이 세 사람을 통해 서문에서 독서란 흰 종이 위에 고정된 검은 글씨를 인지하는 지각 행위가 아니라 개인의 취향과 경험, 교육과 가치관 등에 비추어 텍스트의 복잡한 의미를 적극적으로 발굴하는 능동적 행위라는 육영수의 말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같은 복음서를 읽었음에도 이 세 사람은 전혀 다르게 읽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2. 배타주의적인 기독교적 동일자로서 복음서 읽기 : 르낭의 『예수의 삶』


     1863년 에른스트 르낭은 초자연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순전히 인간적인 모습만을 묘사한 『예수의 삶』을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엔 당연하게 보이지만 당시에 이 저서는 많은 사회적 논란을 야기했다. 왜냐하면 당시 프랑스의 가톨릭은 이 책을 금서목록으로까지 지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바이처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아주 감동적인 사건으로 묘사한다.[각주:15]

     르낭의 예수의 삶은 세계 문학의 한 사건이었다. 그는 지금까지는 단지 신학자들만 관심을 가졌던 문제를 전 교양인의 세계에 제시한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의 예수상을 제시했는데, 그 예수는 생활한, 그가 문예작가로서 갈릴리의 푸른 하늘에서 만난, 감동된 붓으로 포착한 예수였다. 세상은 감동을 받았으며 살아있는 예수를 보는 것 같았다. 세상은 르낭과 함께 푸른 하늘을, 물결치는 누런 곡식들을 먼 산들과 화려한 백합들을 게네사렛 호수 주변에서 보았으며, 그와 함께 살랑거리는 갈대밭에서 산성 설교의 영원한 선율을 들었다.  

     확실히, 르낭은 슈바이처의 이런 찬사를 받을 만하다. 그는 이 저서를 쓰기 위해 갈릴리 지역을 자주 여행했음을 강조하고, 특히 역사비평의 원칙을 고수했음을 분명히 밝힌다.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기까지 우리는 역사비평의 원칙, 즉 조차연적인 이야기는 말 그대로 허용될 수 없으며 그것은 항상 고지식함이나 속임수를 내포하고 있고, 역사가의 임무는 그것을 해석하고, 그것이 품고 있는 진리와 오류가 어떤 것인가를 찾아내는 것이라는 원칙을 고수할 것이다.”[각주:16] 따라서 독자는 1세기 갈릴리에서 살았던 한 인간을 객관적이고 편견이 없는, 마치 살아있는 실제의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특히, 자신의 저서에 묘사된 예수는 기독교의 교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그가 주장하는 대목에선 더욱 그러할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기독교 기원에 관한 역사를 구상했을 때, 하고 싶었던 것은 요컨대 인물이 거의 관련이 되지 않은 교리의 역사였다. 그러나 그 이후 역사란 추상적인 개념의 단순한 유희가 아니며, 역사 속에는 교리보다는 인물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종교개혁이 만들어 낸 것은 은총 받음과 속죄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루터와 칼빈인 것이다.”[각주:17]

     그러나 르낭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슈바이처의 찬사는 길어봐야 한 페이지를 넘지 않았다. 이후 슈바이처는 줄곧 르낭을 비판하기에 여념이 없다. 르낭은 자신이 역사적 원칙을 견지했다고 불평하겠지만, 슈바이처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르낭이 취급한 방법들에게는 역사적 계획에 관한 언급을 볼 수 없다. 말은 모두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되는 곳이면 어디나 삽입해 넣었다. 한 마디 말도 거저 버려두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적 상황에 맞는다고 본 것은 한 마디도 없다. 개체 장면들을 너무나도 마음대로 짜 맞추고 있다.”[각주:18] 심지어, 찬사를 보낸 뒤 바로 거침없는 혐오를 내뿜었다. “르낭의 예수의 생애처럼 무미한 것들이 꿈틀거리는 책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혐오한 책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것은 예술이라는 말이 가진 가장 추악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교적 예술품이다.”[각주:19] 또한, 르낭에 대한 콜라니의 비판을 전하며 확인사살을 감행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기대에 부풀어서 관심을 가지고 르낭의 책을 읽었으나 가장 분격된 실망으로 그 책을 덮었다.”[각주:20] 슈바이처가 이렇게까지 비판하는 이유는 르낭이 그린 예수가 1세기 유대교의 맥락이 아니라 19세기 서구의 도덕적 이상향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1세기 유대교의 묵시적인 세계상을 고려하고자 했던 슈바이처에게 “그가 실현하려는 혁명은 언제나 정신적인 혁명이었다. …사실 그가 세운 것은 내가 영혼의 나라라고 부르고 싶은 하느님 나라였으며, 예수가 세웠던 것, …바로 이것이 영혼의 자유라는 교리”[각주:21]라는 르낭의 진술은 "단순한 세계에서 살기 위해 감상으로 향유를 바르고 화려하게 꾸며야 했던 것“[각주:22]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 같은 슈바이처의 비판엔 가혹한 측면이 있다. 1세기 유대교의 맥락을 르낭이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을지라도, 르낭의 『예수의 삶』은 슈바이처 자신도 인정한 바와 같이 대중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비판적으로 조사된 예수의 생애』를 썼다가 독일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대학으로부터 쫓겨난 슈트라우스마저도 르낭의 필체를 본받아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으려 했을 정도니 말이다. 더군다나, “이교적이지만 공손함으로 가득한 종교의 역사를 만들고자 하며, 18세기의 메마른 합리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신학의 엄격함으로부터 종교를 보호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랑송은 르낭이 비종교적인 과학으로 이 작품을 종교적으로 만들었다고 쓸 수 있었던 것”[각주:23]이라는 박무호의 지적을 기억하면, 르낭은 19세기의 일반적인 서구 기독교 대중들에 맞는 새로운 기독교를 제시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특히, 당시의 기독교 교리에 염증이 난 일반 대중들에게 1800년 동안 기독교는 보편적이고 단순한 영혼의 가르침을 설파한 예수를 교리로 혹은 철학으로 가두어왔다는 르낭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가슴을 뛰게 하는 한편의 시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각주:24]

 

     예수는 교리의 창시자가 아니라 상징의 제작자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정신을 가진 세상의 선구자인 것이다. 한편으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덜 기독교적인 사람들은 4세기부터 기독교를 형이상학적인 유치한 토론의 수단으로 몰아 버린 그리스 교회의 박사들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서로부터 거대한 대전이라는 수백만 개의 논문을 끌어내려 했던 중세 라틴의 스콜라 철학자들이었다. 어떤 예외적인 운명에 의해서 18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여전히 순수한 기독교가 보편적이며 영원한 종교라는 특성을 지닌 채 나타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기독교는 완전히 자발적인 영혼들의 운동의 결실이며, 태어날 때부터 교리의 속박이라고는 없었고 300년 동안이나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해 왔기 때문에 기독교가 겪어온 타락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그 탁월한 기원의 결실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새로워지기 위해서 기독교는 복음서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이 때문에, 다시 말해 기독교가 보편적이고 영원한 종교라는, 따라서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복음서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르낭의 인식은 다른 종교, 특히 유대교를 꽤 폭력적으로 다루는 토대가 된다. 역사가 아닌 인간의 보편적 정신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르낭은 "예수가 유대교에서 출발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교의 계승자라기보다는 그의 업적이 특징짓고 있는 것을 보면 유대 정신과의 단절인 것이다."[각주:25]라고 선언해 버린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건방지고 오만하며,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나 신학자들처럼 논쟁과 궤변을 일삼기를 좋아할 뿐 영혼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 것도 모르는 얼간이들로 전락하고 만다. 샴마이 학파는 편협하고 배타적이다. 이들의 율법은 구시대적 악습이고 철폐되어야 하는 유치한 것이다. 때문에 율법이란 단지 기독교 탄생의 필수적인 근원만을 보유한다는 의미에서만 좋은 것이다. 이 외에는 위선이고 광기이고 오류인 것이다. "유대인들이 미치광이에 가까울 정도로 율법을 사랑했던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 자체에 휩싸여 버린 낡은 엄격함은 유치한 것에 불과했다. 엄격함을 유지하고 있던 유대 회당은 단지 오류의 산실에 불과했다. 융통성이 없는 위선과 예수와의 투쟁은 지속되었다."[각주:26] 심지어 유대교에 그치지 않고 이슬람과 교묘하게 겹쳐놓고선 이 두 종교에 대해 독설을 퍼붓기까지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1세기 유대교의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예수의 생애를 다루었다는 슈바이처의 지적은 정확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 “르낭이 예컨대 유태인이나 이슬람교도에 관한 의견을 서술하고자 하는 때면 언제나 그의 마음 속에는 셈족에 관한 현저히 신랄한 비판이 숨어 있었다. 인도 유럽어에 비하면 셈어는 윤리적으로도 생물학적으로도 타락된 형태이고 …르낭의 자아에서 셈어가 유럽인의 동양지배의 상징이며 또 자신이 속하는 시대를 지배하는 것의 상징이기도 했다는 점을 우리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각주:27]고 지적한 사이드의 말을 참조하면, 르낭이 『예수의 삶』에서 왜 그렇게 유대교와 이슬람을 다음과 같이 헐뜯었는지도 이해가 된다. [각주:28]

     조그만 갈릴래아인 집단은 이곳이 상당히 낯설었다. 당시의 예루살렘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현학적인 태도, 신랄함, 논쟁, 증오, 그리고 영혼의 왜소함 등으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그곳에서는 광신이 극에 달해 있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결국 궤변가의 문제로 귀착되어 버리는 율법연구가 유일한 공부였다. 이러한 문화는 영혼을 연마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은 회교도들의 부질없는 교리, 즉 회교 사원 주변에서 발생되는 공허한 지식과 다를 바 없었으며, 많은 시간과 추리력을 소비하면서도 손실만을 초래할 뿐, 영혼에 대한 교리에는 이용되지 않았다. 유대박사와 율법학자들의 지식은 완전히 미개한 것이었으며 도덕성이 완전히 결여된 보상없는 부조리였다.  


     인류를 고양시킬 수 있는 보편적인 영혼의 종교를 예수를 통해 찾고자 했던 르낭이 어떻게 유대교나 이슬람교를 이렇게까지 왜곡하고 저주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물론 <예수의 삶>의 저자로서 유명하고, 그것이야말로 기독교와 유대인에 관한 그의 기념비적인 역사서술의 선두를 장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의 삶이 사실은 일반사와 완전히 동일한 유형의 업적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각주:29]는 사이드의 말을 거치면 놀랍지 않다. 차라리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사이드는 르낭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다. "민족지의 발생과 함께, 차이가 분류되고 다양한 진화 과정이 확장되었다. 즉 진화는 원시종족으로부터 종속 인종을 거쳐 마지막으로는 우등 인종 또는 문명 민족으로 나아간다. 고비노, 메인, 르낭, 흄볼트는 핵심이다. 원시, 야만, 퇴화, 자연, 반자연과 같은 일반적으로 사용된 범주도 여기에 속한다."[각주:30] 그렇다면, 르낭이 그린 예수는 유럽중심이고, 심하게는 인종주의적인 측면까지도 내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이를 확인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각주:31]

 

     자국민보다도 현명하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사람은 스스로의 조국에 대하여 고통을 느낄 수 없다. 국민들에게 가혹한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과 함께 과도하게 바르게 사는 것보다도, 도리어 국민과 함께 오류를 범하는 쪽이 낫다.  


     이제, 기독교가 보편적이고 영원한 영혼의 종교라는, 따라서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복음서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르낭의 말은 이전과 달리 아름답게만 들리지 않는다. 한번 물어보자. 과연 그는 자신이 말한 바대로 복음서로 되돌아갔는가. 되돌아갔음에도 복음서에 서술된 초자연적 요소를 배제해 버리는 그의 시도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까지의 논의를 참조한다면, 복음서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그의 말은 차라리 어떤 의도, 즉 교리나 철학을 던져버리고 단순한 영혼의 세계에 살고자 하는 소망을 강렬히 키워야 하는데, 그 영혼의 세계란 다른 어떤 장소도 아닌 유럽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유럽의 타자인 유대교가 열등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더구나 복음서마저도 유대교를 비판해주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가. 문명 대 야만이라는 19세기의 서구적 서사를 이미 승인한 르낭에겐 말이다. 서구 백인 기독교라는 동일자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사유했던 르낭에게 유대교에 대한 복음서의 폭력적 서사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고 오히려 예수의 선한 영혼을 선명하게 부각시켜주는 촉진제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폭력과 타자성의 문제는 예수의 고귀한 영혼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었고, 할 수만 있다면 짓밟아도 상관없는 배경이지 전경은 결코 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존 쉘비 스퐁, 『성경과 폭력』, 김준년․ 이계준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7, p.31 [본문으로]
  2. 미야타 미쓰오,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다』, 박은영·양현혜 옮김, 한울, 2013, p.18 [본문으로]
  3. 미야타 미쓰오, 앞의 책, pp.58~59 [본문으로]
  4. 크리스토퍼 히친스, 『신은 위대하지 않다』, 김승욱 옮김, 알마, 2008, p.90 [본문으로]
  5. 육영수, 『책과 독서의 문화사』, 책세상, 2010, p.40 [본문으로]
  6. 육영수, 같은 책, p.21 [본문으로]
  7. 레너드 스위들러, 『절대 그 이후』, 이찬수·유정원 옮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3, p.234 [본문으로]
  8. 찰스 킴볼, 『종교가 사악해질 때』, 김승욱 옮김, 에코리브르, 2005, p.286 [본문으로]
  9. 찰스 킴볼, 같은 책, .p286 [본문으로]
  10. 찰스 킴볼, 같은 책, p.289 [본문으로]
  11. 찰스 킴볼, 같은 책, p.288 [본문으로]
  12. 찰스 킴볼, 같은 책, p.291 [본문으로]
  13. 미르치아 엘리아데, 『영원회귀의 신화』, 심재중 옮김, 이학사, 2003, p.15 [본문으로]
  14. 토니 레인케, 『독서신학』, 김귀탁 옮김, 부흥과 개혁사, 2012, p.40 [본문으로]
  15. A. 쉬바이처, 『예수의 생애연구사』, 허혁 옮김, 대한기독교출판사, 1986, p.188 [본문으로]
  16. 에르네스트 르낭, 『예수의 삶』, 박무호 옮김, UUP, 1999, p.47 [본문으로]
  17. 에르네스트 르낭, 같은 책, p.48 [본문으로]
  18. A. 쉬바이처, 같은 책, p.190 [본문으로]
  19. A. 쉬바이처, 같은 책, pp.188~189 [본문으로]
  20. A. 쉬바이처, 앞의 책, p.196 [본문으로]
  21. 에르네스트 르낭, 앞의 책, p,132 [본문으로]
  22. A. 쉬바이처, 같은 책, p.198 [본문으로]
  23. 에르네스트 르낭, 같은 책, p,420 [본문으로]
  24. 에르네스트 르낭, 같은 책, pp.348~349 [본문으로]
  25. 에르네스트 르낭, 같은 책, p.356 [본문으로]
  26. 에르네스트 르낭, 앞의 책, p.273 [본문으로]
  27.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옮김, 교보문고, 1999, pp.256~257 [본문으로]
  28. 에르네스트 르낭, 같은 책, pp.189~190 [본문으로]
  29. 에드워드 사이드, 같은 책, p.264 [본문으로]
  30. 에드워드 사이드, 『문화와 제국주의』, 박홍규 옮김, 문예출판사, 2005, p.229 [본문으로]
  31.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p.268 이와 관련해 르낭의 예수 연구가 인종주의에 오염되어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켈리의 연구는 주목할 만하다. Shawn Kelly, Racializing Jesus, London: Routledge, 2002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예수가 사랑한 남자 - 신약성서의 동성애 이야기』

▷ 원서 : The Man Jesus Loved - homoerotic narratives from the new testament
▷ 지은이 : 테오도르 W. 제닝스 지음 / 옮긴이 : 박성훈
▷ 장르 및 쪽수 : 신학 / 456쪽
▷ 판형 및 제본 : 신국판 / 무선제본
▷ 가격 : 16,000원
▷ 펴낸곳 : 도서출판 동연

             * 책 소개 보러가기

책 소개

세계적인 퀴어 신학자가 파헤친 신약성서의 동성애 이야기

1990년대 초 퀴어신학은 미국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등장하였고 테오도르 제닝스는 그 개척자의 한 사람이다. 그가 저술한 이 책은 퀴어신학에 관한 그의 주요 저서 가운데 하나로, 동성애혐오적/이성애중심적 성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신약성서, 특히 복음서들에 수록된 예수 전승 속에서 예수를 동성애자로서 해석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는 동성애자였다

이 책은 요한복음에 중심을 두고 논의를 편다. 고대 사회의 동성애적 관습을 참조한다면 요한복음이 재현하는 예수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동성애적 행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퀴어신학의 관점에서 그 텍스트와 성서 안팎의 관련 자료를 꼼꼼히 읽어보는 일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예수가 사랑한 남자에 관한 텍스트들이 그렇다.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이 예수의 품에 기대고 누워 있던 장면을 검토하고, 예수 제자 집단 내에서 가진 그의 지위/역할/정체를 살피며, 예수 전승 내에서 그가 갖는 의미를 주목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이때 신약성서 내/외부의 자료들을 해석에 동원하면 예수의 동성애적 행위가 추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분명 여러 예수 전승을 살펴볼 때 예수가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수가 “동성애자였다” “동성애자가 아니었다”라는 단순한 대답을 이 책에서는 기피한다. 이 책은 기존의 성서 해석 방식을 뒤집는 학문적 접근을 통해 우리 사고의 큰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그 과정을 좇다 보면 “예수가 동성애자였다, 아니었다”는 물음은 자연스레 그 의문이 풀린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교회는 게이와 레즈비언 그리고 양성애자를 희생양 삼아 성(性)을 죄악시해왔다. 그것은 교회가 창안해낸 한 편의 신화다. 이 신화를 통해 교회는 가족의 다양한 가치들에 대해 질문할 여지를 차단해왔다. 다시 말해 게이, 레즈비언들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 취급을 받았고, 그들을 그들 자신의 성적 취향 그대로 가족의 일원으로 삼는 것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하여 괴로움 속에서 그들은 정체성에 혼동을 일으키며 급기야 자살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성서를 다시 읽고, 그 속에 새겨져 있는 교회의 성적 신화의 껍데기를 벗겨내어 해석할 여지를 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교회의 동성애혐오의 또 다른 희생자는 성서 그 자체다. 교회는 오랫동안 노예제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여자들의 완전한 성적 평등을 부인하기 위해 성서를 이용했다. 다시 말해 인류가 현재 일구어 온 보편타당한 상식의 진리 속에는 교회의 성서 오독과 악용이 덧칠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여 이 책은 그러한 잘못을 바로잡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35)
특집 (8)
시평 (96)
목회 마당 (61)
신학 정보 (139)
사진에세이 (41)
비평의 눈 (59)
페미&퀴어 (25)
시선의 힘 (139)
소식 (154)
영화 읽기 (34)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5)
새책 소개 (38)
Total : 381,760
Today : 55 Yesterday : 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