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VI)
: ‘실재(the Real)’에 관하여 (2)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이어도 사나~~

우리집은 내가 열 살이 되던 초등학교 3학년 때 제주도에서 서울 한복판 종로3가로 이사 왔다. (그 문화적 충격이란… 그에 대한 사연은 다음 기회에 또 나누기로 하고) 당시 제주에는 19세기에 출생한 팔십이 넘은 나의 증조 할머니가 생존해 계셨다.  줄곧 제주에서 사셨고, 제주에서 한일합방과 일제시대,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이승만, 박정희까지 모두 감내했던 분이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4.3까지…

할머니는 해녀였다. 지금은 제주해녀가 많이 줄었다지만, 할머니가 젊었을 때 만 해도 그냥 일상적으로 동네 아낙들이 바다로 들어가 물질(제주 해녀들이 바다로 들어가 전복, 해삼, 낙지 같은 것을 포획하는 활동을 일컫는 제주도 방언)을 하였다고 한다. 해녀가 무슨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일상이었다는 말이다. 옛날 지리시간에 배워서 알겠지만 제주도는 섬 전체가 화산섬 현무암 지대로 물이 흘러 지하로 스며들었다가 해안가에서 쏟아 오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민가들이 해안가를 따라 분포하였다. 그냥 마을 길 따라 걷다보면 바다가 나온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당시 제주 바다는 제주 인민들에게 중요한 삶의 자원이었고, 그 몫은 당연히 생활력 강한 여인들의 차지였다. 나의 증조할머니도 젊었을 때는 빈번히 물질에 참여하셨다고 당시를 회고하셨다.

그래서였을까? 할머니랑 같이 있다 보면 당시 물질할 때 불렀다는 노동요들을 가끔 들을 수 있었다. 처음 듣는 알 수 없는 곡조에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를 읊조리던 할머니에게 “그게 무슨 노래야?” 라고 버릇없이 묻던 증손자를 할머니는 마냥 귀엽다 쓰다듬으며, 그냥 옛날에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불렀던 노래라고만 답하셨다. 그 중 대표적인 곡이 바로 ‘이어도 사나’이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이청준의 소설 ‘이어도’는 전설 속 섬 파랑도(‘이어도’의 정확한 명칭)를 찾기 위해 벌이는 수색전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해군함정까지 동원된 수색작업에도 불구하고 이어도는 모습을 끝내 드러내지 않았고, 수색종결을 선언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색작업 취재차 승선했던 제주출신 천남석 기자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천남석의 아버지는 어부였다. 육지에서의 시간보다 바다위에서 생활하던 시간이 더 많았던 아버지는 이어도를 찾아 떠나야겠다며 수평선을 넘었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고,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어도를 목놓아 노래하다 밭이랑 사이에서 죽는다.   

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 모두가 섬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 이청준, ‘이어도’ 中

‘이어도’는 제주 뱃사람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피안의 섬이다.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이어도’로 갔다고 믿었다. 나의 증조할머니가 불렀던 구전가요 ‘이이도 사나’는 이어도 관련 가락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으로 ‘이어도 가니?’ ‘이어도에 사느냐?’라는 뜻이 가사에 내포되어 있다. 천남석은 섬사람들의 이 지긋지긋한 이어도를 향한 집단무의식, 당신의 아비와 어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어도’로 인한 정신의 가위눌림, 그리고 모두가 갖고 있는 이어도에 대한 부질없는 환상에 이제 그만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그래서 이어도 탐사작전에 비장한 마음으로 승선하였던 것이다.
 
전설 속 섬이었던 이어도의 실체가 처음 확인된 것은 1900년 영국 상선 소코트라호가 제주 남쪽 바다에서 암초에 걸려 좌초된 이후이다. 영국해군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마침내 1910년 수심 5m 아래 암초를 측량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이어도’는 국제적으로 소코트라 암초(Socotra Rock)’라 불린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1984년 제주대 탐사팀이 마라도 서남쪽 149Km 떨어진 곳에서 정상부가 해수면 5m 아래에 있는 4개의 봉우리로 구성된 거대한 수중암초를 확인하였다.

수심 5m아래 거대한 지대가 있다 함은 조금 높은 파도가 일면 그 형체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소설속 천남석의 아버지가 “파도로 정신을 잃어 의식이 혼미했는데 눈앞에 펼쳐진 이어도를 보고 살아 돌아왔다고…그 이어도를 다시 찾으러 가야겠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데, 탐사결과를 놓고 볼 때 영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어도는 존재하는가?

 

<검은 집>에 들어가기까지

지젝은 본인의 기념비적인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1989)의 예제풀이 성격의 책인 <Looking Awa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1991)를 <The Sublime Object…>가 세상에 나온 2년 뒤에 출판하였다. <Looking Away…>를 연습용이라고 한 이유는 대중문화, 소설, 오페라, 히치콕 등을 끌고 들어와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에서 언급한 이론적 내용들을 보다 알기 쉽게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지젝은 이 책에서 미국 작가 하이스미스의 단편소설 <검은 집>을 우리에게 소개하며 실재에 대하여,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텅 빈 실재를 메우는 환상의 역할과 기능에 관한 그의 앞으로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옛날 필자가 어렸을 때 검정 뿔테 안경쓰고 영화 해설을 하던 정영일이라는 영화평론가가 있었다. 그 분은 지금처럼 인터넷도 발달되지 않았고 씨네 21도 없었던 그 시절에 TV ‘주말의 명화’ 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던 아저씨였는데, 소년 상철이 보기에 정말 멋지고 근사하고 똑똑했었다. 그 아저씨 영화해설에 빠져 영화를 보겠다고 기다리다(보통 밤 10시 10분에 주말의 명화는 시작됨)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잠들었던 기억이 얼마였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전설적인 미남배우 알랭드롱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분명히 본 기억이 있다. 어른들의 위선, 탐욕… 뭐 그런 것들을 다룬 영화였던 것 같은데, 보고 나서 과히 기분이 좋지 않았던 영화였다.

영화 <태앙은 가득히>의 원작 소설작가가 바로 <검은 집>을 쓴 하이스미스이다. 지젝의 <Looking Away…>에서 언급한 소설 <검은 집>을 필자는 3년 전 한국 방문 했을 때 남산도서관에서 빌려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책을 읽으며 오래 전에 읽었던 이청준의 <이어도>에 등장하는 천남석이 오버랩 되었다. 왜지?

 

언덕 위 그 집에는 마돈나가 있다/없다

<검은 집>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원작의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필자 나름대로각색을 했는데 양해 바랍니다)
무대는 미국 시골 어느 선술집, 날이 저물면 마을에 사는 남자인간들이 하나 둘 그곳으로 모여 들어 언덕 위 ‘검은 집’에서 있었던 자신들의 추억을 안주 삼아 시간가는 줄 몰라 한다. 응삼이는 검은 집에 홀로 사는 마돈나와 와인을 곁들인 저녁을 함께 한 후, 테라스에 포개어 앉아 함께 바라보았던 저녁노을을 이야기하고, 갑돌이는 마돈나와 함께 새벽 산책을 나갔는데 갑자가 비가 쏟아져 몸을 급하게 숨긴 처마밑에서 우발적으로 감행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회상하고, 술에 취한 병태는 동공이 풀린 채 마돈나와 나누었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맞닥뜨리는 탁 트인 서재 건너편 첫 번째 방 하얀 커튼이 드리우져 있었던 침실에서의 정사를 고해성사 하듯 읊조린다. 

그때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던, 마을로 새로 이사온 한 젊은 엔지니어가 “내가 그 집에 가서 마돈나를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여러분, 그 집과 마돈나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함께 갈 사람 없습니까?” 그 젊은 엔지니어의 제안에 아무도 마을의 남자들은 반응하지 않았고, 결국 그 청년 혼자 언덕 위 검은 집으로 올라가는데…
여기까지의 플롯은 카프카의 <성城>을 연상시킨다. 마을 사람의 경외의 대상인 성을 측량하러 온 젊은 측량 기사 K, 그러나, 소설 ‘성’에 등장하는 K는 성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반면, 하이스미스는 젊은 엔지니어를 언덕 위 검은 집으로 과감히 올려보낸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예상했겠지만, 측량기사, 엔지니어는 근대성, 과학, 합리성, 이성…뭐 그런 것들을 상징하는 것이겠고, ‘성’과 ‘검은 집’은 신화, 전설, 전통, 무의식…뭐 그런 따위를 의미하는 것이겠지. 물론, 지젝은 이런 얕은 수에 관심하지 않는다. 좀 더 소설을 따라가보자.

언덕 위 검은 집에 도달한 젊은이는 무엇을 보았을까? 응삼이가 마돈나와 함께 저녁노을을 보았다던 테라스는 축대가 무너져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갑돌이가 새벽산책길 마돈나와의 경이적인 첫 키스의 사연이 묻어있던 처마 밑은 누군가가 쳐놓은 녹슨 철조망 때문에 접근조차 힘들었다. 2층 탁 트인 서재를 지나면 첫 번째로 맞닥뜨리는 병태와 마돈나의 하룻밤이 새겨져 있다던 그 방엔 천장에는 거미줄이 난무했고, 창문은 깨어져 있었으며 하얀 커튼은 갈기갈기 찢겨져 깨진 창문 틈 새로 들어오는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한마디로 현재 언덕 위 검은 집은 폐가였던 것이다. 그럼 마돈나는 어디에?

 

“그럴 수 밖에 없었어…”

마돈나의 자취는 그 집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집을 나오려는 찰나에 1층 화장실 깨진 거울 틈새에 꽂혀 있는 사진 하나가 그 청년의 눈에 들어왔다. 빛 바랜 흑백사진이었고, 사진 밑에 적혀있는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사진 속 주인공은 백발마녀 같은 허리가 약간 꾸부정한 노파였고, 그의 왼손에 보드카 병이 쥐여져 있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Lovely Madonna! 라는 문구가 사진 밑을 장식하고 있었다. 설마 이 노파가 마돈나?  청년은 그 사진을 들고 마을로 내려갔고, 술 집에 모여있는 그 남자인간들에게 언덕 위 폐가를 돌아본 소감을 전달한 후에, 사진을 식탁 위로 던지며 “이 노파가 당신들이 말하는 마돈나인가?”라고 도발적으로 물었다. 순간, 떠들썩했던 그 술집엔 찬물을 끼어 얹은 듯한 정적이 흘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청년은 짦은 외마디 비명소리를 내며 피를 흘리고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청년 뒤로 피 묻은 칼을 손에 들고 응삼이가 서 있었고…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오늘은 살인죄로 징역을 살던 응삼이가 석방되는 날이다. 병태, 갑돌이를 비롯한 동네 몇몇 남자인간들이 감옥 앞에서 두부를 들고 응삼이를 반갑게 맞이하고, 함께 저녁을 먹고, 새롭게 장소를 옮겨 단장한 Bar에서 축하주를 마시면서 그 동안 못다한 밀린 이야기를 하며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응삼이가 갑자기 불쑥 일어나 이렇게 말한다: “난 그럴 수 밖에 없었어…어떻게 그 놈이 그것을 건드릴 수가 있어? 어쩔 수 없었다구!” 응삼이의 최후 변론을 듣고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동의를 하면서, “그럴 수 밖에 없었지.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어. 응삼이 네가 안 그랬어도 우리 중 누군가 아마 그렇게 했을거야. 암 그렇고 말구. 그걸 수 밖에 없었어…”  그리고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술잔에 술을 채우고 브라보를 외쳤다.[각주:1]

 

에필로그: 남겨진 질문들

앞서 살펴보았던 이청준의 소설 <이어도>에 등장하는 천남석에게 있어 ‘이어도’는 어떤 의미였을까? <검은 집>에 등장하는 응삼이에 있어 검은 집과 마돈나는 무엇인가?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나? 그리고, 지젝은 무엇을 이들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가? 다음 웹진에서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들이다. <계속> 

ⓒ 웹진 <제3시대>

 

  1. [검은 집]에 대한 에필로그: 10년 넘게 페미니스트 아내와 사는 까닭에 나는 [검은 집]을 읽으며 무척이나 마음이 불편했다. 이 작품이 남자인간들의 관음증적인 포르노적 상상력에 기반하지 않나? 라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소설에서 ‘검은 집’을 향해 환상을 투사하는 존재는 오로지 남자인간들뿐이고, 여자는 남자 인간이 꿈꾸는 환상에 대한 접근이 금지된 에어리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환상을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 남자와 여자 사이에 미묘하고 설명하기 힘든 차이가 존재하며, [검은 집]이라는 책 제목 안에 이미 남자들의 환상공식이 응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봤다. 우리 남자들에게 있어 환상이란 잉여쾌락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마을 사내들에게 검은 집과 마돈나는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과 현실에서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 흘러 넘치는 공간이고, 그 잉여의 꿈과 욕망을 투사하고 실현시켜주는 일종의 스크린이다. 영화관이 밝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영화의 해상도가 낮아져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이 흐릿해져 잘 보이지 않아 신경질이 난다. 그래서 영화관 안은 어두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환상을 또렷하게 보기 위해서는 말이다. [검은 집]이라는 책 제목 안에 이미 이렇듯 음습한 남자들의 환상 메커니즘이 깔려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여자인간의 환상작동방식은? 남자인간들과 다르지 않을까? 그럼, 책 제목은 [하얀 집]이 되어야 하나? (이 우매한 남자인간의 질문에 대한 여성 필자의 현명한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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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V)
: ‘실재(the Real)’에 관하여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세계철학사’(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철학연구소 著)와 ‘수학의 정석’(홍성대 著)

대학 신입생때 이런 저런 철학사책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우리때는 흔히 빨간책이라 불리던 요한네스 힐쉬베르거가 쓴 <서양철학사>를 많이 읽었다. 철없던 시절 묵직했던 그 책을 허리춤에 무슨 훈장마냥 끼고 다니며 허세를 떨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하나를 더 꼽자면, ‘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철학연구소’에서 간행한 10권짜리 <세계철학사>였다. 중원(출)에서 출판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둘 다 훌륭했으나, 필자는 후자를 더 좋아했다. 대부분의 철학사책들이 관념론적인 입장과 서양철학사 위주로 기술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소련에서 나온 철학사책은 맑스와 레닌의 후예들답게 유물론적 전통에서 기존의 철학사를 비판했을 뿐 아니라, 책 전체에서 동양철학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신학교 처음 입학했을 때 신.구약 개론시간에 역사비평학을 배우면서 성서에 대한 기존의 생각에 균열이 생기며 충격과 동시에 묘한 흥분을 느꼈던처럼, 소련에서 나온 <세계철학사>는 그런 의미로 내게 다가왔었다. (문득, 요즘 한국의 대학생들은 어떤 철학사책을 읽는지 궁금해지네…)
예나 지금이나 철학사책을 처음 넘기면 으레 고대그리스 자연철학에 대한 순서가 먼저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은 어떻게 운동하는가?’ 등등의 주제가 먼저 소개되고, 그에 대한 답변을 시도했던 그 무렵 등장했다는 수많았던 철인들의 발언을 접하며, 나는 철학에 대한 흥미를 채 느끼기도 전에, 그들이 토해내는 친절하지 않은 개념의 홍수에 치여 질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서는 잠시 책을 덮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처음부터 책을 펼쳐들고는, 또 다시 휘청거리다 덮고, 다시 펴곤 하던 행위를 반복했었다. 마치, 새학기가 시작되면 수학 정석책 처음부분인 집합편과 방정식부분을 반복하다 보면 그 부분만 손때가 묻어 빛이 바랬던 것처럼, 내가 읽었던 철학사 책의 고대 그리스편과 칸트와 헤겔편이 그랬다.


너무나 오래된 질문, 실재!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현대철학의 논의 역시 어쩌면 고대 그리스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지하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이나 모두 그들 사상의 근거를 고대 그리스로부터 끌고 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런 고대그리스 자연철학을 요약하는 상징적인 문구가 있다. ‘일자(一者)와 다자(多者)논쟁’이 그것이다. 일자측을 대표해서는 파르메니데스가 나오고, 다자측의 대표선수로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등장한다. 변화와 운동을 강조했던 헤라클레이토스와는 달리, 파르메니데스는 확고부동한 일자의 존재를 신봉했으며, ‘세상에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something) 있는가?’라는 문구는 파르메니데스 이후 서양 관념론을 대변하는 아포리아가 된다. 그 something 을 둘러싼 해석의 역사가 서양철학의 시작이었고, 그 something을 서구철학에서는 실재라 부르기로 공식적으로 합의하였는데, 아마도 그 공인 시기는 플라톤 이후가 아닐까 싶다. 화이트헤드가 ‘서구철학의 역사는 플라톤의 각주’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지젝의 실재에 대한 언급에 앞서 전체 철학사의 지형속에서 실재론의 기원, 전개과정 등을 언급함이 마땅한데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솔직히 말해 그만한 깜양도 안되고. 비록 전체 실재론의 역사를 다루지는 못하지만, 이 글에서 적어도 본격적으로 지젝의 실재를 언급하기에 앞서 칸트의 실재에 대한 논의는 잠시 짚고 넘어가려 한다.
간단히 비교하자면, 칸트의 실재(물자체)는 현상과 절연되어 있는 반면, 지젝이 말하는 실재는 현상 곳곳에서 출몰하는 그 무엇이다. 라깡식으로 말하면 상징계의 그물을 찢고서 섬뜩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무엇인 것이다. 실재를 타자로 번역하면 그 의미는 더 확 다가온다. 칸트의 타자는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저편에 있는,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그대이고, 지젝이 말하는 타자는 내 안에 있는 타자, 즉 ‘그대가 곁에 있어도 여전히 그대가 그립다’는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씹어먹고 갈아먹어도 여전히 우리를 허기지게 하는 그 무엇이다.
지젝의 실재를 언급하기에 앞서 칸트의 실재를 언급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칸트와 지젝 모두 실재를 언급하였다는 점, 그리고 양자의 실재에 대한 상이한 발언은 후에 전개되는 주체에 대한 논의, 그리고 본인들의 신학과 윤리학에 대한 서술에 있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칸트의 실재

전체 철학사의 흐름속에서 통상적으로 칸트가 성취한 업적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아닐까 싶다. 빛으로 이어졌던 무한(신)과 유한(인간)사이 통일성을 깨뜨렸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현실(경험)의 영역과 우리가 알 수 없는 경험 밖의 영역을 갈라 그 경험 밖의 영역을 칸트는 물자체라 칭하였다.
물자체에 대해 좀 더 부연하자면 이런 것이라 할 수 있다. 50m 밖으로는 수영할 수 없는 인간이 있다고 가정하자. 고작 50m 수영하고 돌아온 한 인간이, 50m를 수영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수평선 너머 수십 km를 수영해야 닿을 수 있는 어느 지점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그 담화는 맞는 것일까? 칸트는 기존의 서구 형이상학이 저지른 오류를 이런 식으로 비판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상상속의 그대(실재)를 둘러싼 짝사랑이 결국 서양정신의 역사였다면?” 칸트는 정직하게 그 물음에 대해 ‘Yes”라 시인하였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실재)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과 도착이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이므로, 이제 그만, 그 변태적 행위를 중단하자! 이제 그만, 현실의 사태에 대한 규명에 있어 신의 은총과 신의 자비가 아닌, 불완전하고 미흡하지만, ‘나의 경험과 판단과 인식에 입각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직한 것 아니냐?’며 칸트는 그 동안의 서구정신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인간은 칸트에 의해 줄 끊어진 연이 되었고, 하늘에 떠있던 연과 땅에서 연을 날리던 소년.소녀와의 일체감은 종료되었다. 하늘에 떠 있던 연이 물자체였는지, 땅에서 연을 날리던 그 소녀,소년이 물자체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이제 둘은 다시는 만날 수 없고, 만나서는 안 되는 운명이 되었다. 신화상에서 존재하던 에덴 이후의 삶과 바벨 이후의 삶이 칸트에 의해 일상에서 섬뜩하게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참고로 여기까지가 필자가 좋아하는 칸트씨입니다)


칸트의 반전

하지만 서구정신에 대해 이처럼 가열찬 칼부림을 감행하던 칸트는 ‘저 하늘에 별이 빛나듯 내 마음에는 도덕률이 빛난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본인 주장에 대한 첨삭을 시도한다. 칸트는 현실의 사태를 진단함에 있어 계시의 음성이 아닌, 인식의 틀, 즉 범주(예:양, 질, 관계, 양상)의 보편성을 끌어들인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부연하자면, 우리가 흔히 초월적이라고 할 때, 플라톤이 말하는 급격한 이원론에 바탕한, 현실을 초월한 어떤 영역을 지칭하는 경우에만 ‘초월적!’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플라톤류의 초월은 급격한 초월인 경우이고, 약한 의미의 초월도 가능하겠다.
예를 들어, 북한의 카드섹션을 상상해보라. 얼마 전 CNN뉴스에서 북한 관련 뉴스를 보는데, 평양 능라도 경기장에서 수 만명의 북한 인민들이 모여 카드섹션을 하는 모습이 흘러나왔다. 주제는 주로 사상적인 것으로 사회주의 우월성, 내지 반미, 반일, 김일성.김정일 우상화, 김정은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현실을 초월한 모습이 느껴졌던 것은 왜일까?
능라도 경기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북한인민들의 모습도 카메라에 잡혔는데, 그것은 분명 조금 전 카드섹션에서 보여준 보편적 주체의 모습과는 대비되는, 일사 분란했던 대열이 와해되고 산종되면서 흩어지는 개별적 주체라는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수많은 군중이 완벽한 카드섹션을 연출하려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인원과 도구에 대한 계산, 인물들의 위치설정과 구성원 전체의 정확한 타이밍 포착 등이 필요하다. 어떤 강력한 보편성이 그 카드섹션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보편성을 어기는 개별적 존재가 등장할 때 카드섹션은 망가지게 된다. 보편적 게임의 원칙과 그 보편성에 입각해 수 만명의 인민에 의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연출되는 카드섹션! 우리는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기운에 대해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또한 다른 의미의 초월적 영역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칸트가 비록 그간의 서구형이상학 특유의 초월적 이성에 대해 용도폐기를 선언했다고는 하지만, 현실의 사건과 증상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일정한 망(범주)을 설치했다 함은, 개별주체에게 인식일반에 대한 보편적 틀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카드섹션을 지배하는 보편적 룰과 같은 초월적 기재에 대한 인정을 뜻하는 것은 아닐런지! 바로 이 지점이 칸트의 이율배반이 감지되는 대목이다.
결국, 우리의 감각적 인식너머의 것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던 칸트는 그 경험적 인식의 엄격함을 마련하는 단계에서 범주의 영역, 즉 라깡적 의미의 상징계를 설정하였고, 비록 물자체로서의 실재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할 지라도, 약한 의미의 초월적 룰에 대한 재소환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여전히 칸트는 서구 초월철학의 강력한 자기장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결과, 칸트는 ‘초월’씨의 앞문을 멋있게 박차고 나왔지만, 나중에 소리도 없이 그 집의 뒷문으로 슬그머니 다시 기어들어가는 궁색한 모양새의 칸트가 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칸트의 윤리학은 본인이 훼손한 실재에 대한 보충과 첨삭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호기 어렸던 칸트 초기 실재론에 대한 궁색한 미장센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면 칸트에 대한 몰지각하고도 예의 없는 발언일까?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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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3.07.29 23:3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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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 링크시킨 지젝과 촘스키의 설전을 지켜보며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듭니다. 사실 촘스키의 지젝을 향한 공격과 그리고 지젝의 대응은 그닥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전에 하버마스와 리오타르의 그것처럼 모던과 포스트모던 논쟁,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근대)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 (중세) 실재론과 유명론, (고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라이토스로 이어지는 서구 정신사의 지리한 논쟁을 다시 재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둘의 논쟁이 진부한 소재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젝이어서, 촘스키여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네요. 지젝과 촘스키에 기대어 우리의 과거를 다시 한번 반추해 보겠다는 의미, 지젝과 촘스키에 역시 기대어 미래를 예단해 보겠다는 의지... 이런 기운들이 섞이면서 게임이 완료된 신자유주의에 대한 소환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이런 논쟁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여러곳에서 있다보면 어느덧 (혁명을 향한) 비등점으로 향하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도 앙자의 논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깔려 있는 듯 합니다. 양적 축적에 따른 질적 승화라는 변증법적 논리학의 기본 공식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고, 이러한 논쟁들을 통해 이완되어 버린 우리네 머리와 가슴에 다시 현실에 대한 변혁을 담은 이야기들이 계속 재생산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백만, 백만 스물 하나, 백만 스물 둘, ....그렇게 거듭 이어지다보면 어느순간 '빅뱅'이 우리에게 몰려들어 올것입니다. 요한복음 한 처음에 등장하는 구절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백만스물세번째만에 우리에게 일어난 '양적축적에 따른 질적전환의 찰나를 목격한 사람들의 입에서 동시에 터진 감동과 전율, 감격과 감사의 방언!'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저는 더 맹렬히 지젝과 촘스키가 싸웠으면 합니다.
  2. 이상철
    2013.07.31 01:2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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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촘스키의 지젝비판, 그리고 이에 대한 지젝의 대응이 화제네요. 둘 다 현재 진행중인 필자의 학위 논문에 등장하시는 분들인데, 이렇게 싸우시면 논란해요~ ㅋㅋ
    아래에 관련 기사 링크시킵니다.

    http://www.openculture.com/2013/06/noam_chomsky_slams_zizek_and_lacan_empty_posturing.html

    http://www.openculture.com/2013/07/slavoj-zizek-responds-to-noam-chomsky.html

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II)
: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

‘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 못지 않게 오랜 시간 동안 많이 물어왔던 질문이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주변을 떠도는 많은 명제들이 기본적으로 ‘인간은 …이다’라는 선언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 삶의 의미와 목적, 희망과 행위가 선택되고 결정된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동.서양 공히 신적인 ‘로고스’ 내지 하늘의 이치인 ‘道’에 의해 구성되어지고 운행되어지는 그 인간을 참 인간으로 오랫동안 간주해 왔었다. 사물의 형성과 운행의 법칙이 확고부동한 질서로 실재하고 있는 우주에서 인간은 그 법칙의 한 일원이었을 뿐이다. 어떤 비밀도, 어떠한 사연도 모두 속속들이 하늘의 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나야 했고, 인간의 내포와 인간의 외연은 그 빛 아래에서 수미일관하게 하나로 엮어졌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신적인 로고스(내지 天理) 아래 놓여있다는 점에서, 주체적 의지와 신념을 바탕으로 결단하고 행위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인 기표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그 중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의 인간론이다. 구약성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얻었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편 8편)”라고 노래하면서, ‘인간이란 전적으로 절대자 하나님의 섭리 안에 놓여 있는 존재’로 자신을 규정하였다. 포스트 맑시스트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게오르그 루카치는 이러한 인간이 살던 시대를 다음과 같은 낭만적인 문장으로 표현한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루카치, <소설의 이론> 서문 中)
그러나, 수 천 년 동안 인간의 갈 바를 밝혀주던 그 빛은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며 점점 광채를 상실하더니, 19세기에 이르러 어둠에 휩싸이고 만다. 빛이 사라진 것이다. 빛이 사라졌다 함은 그 빛 아래에서 살았던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찰스 다윈과 칼 맑스가 그 진앙의 진원였다고 후대 역사가들은 평한다. 맑스는 1845년에 발표한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성이다”라고 말하였고, 같은 논문에서 “세계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변혁의 대상”이라 주장하면서,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신의 그늘에서 벗어난, 물적 토대에 기반한 인간을 선언하였다. 다윈의 ‘진화론’은 오늘날의 인간이란 오랜 세월 시간을 버티면서 축적한 경험과 기억과 본능과 생존방식의 총체라는 것 이외에 인간에게 더 이상의 큰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프로이트는 본인이 창안한 ‘정신분석학’을 통해 인간이란 의식이라는 명료한 정신의 활동이 아닌, 알 수 없는 무의식에 의해 떠받쳐져 있는 불안한 실존임을 서늘하게 증명해 보였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했던 세 사람었지만, 그들을 통해 신적인 원리에서 벗어난 인간, 오랫동안 익숙하고 낯익은 고향을 등지고 길을 떠나는 인간, 그래서 이제는 고향집 아버지가 사라진, 더 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modern 인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지난 <웹진 49호>에 이은 ‘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두 번째 글의 제목을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로 정하였다. 그렇다고 인간의 본질에 관한 여러 이론들을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는다. 내 깜냥에 그럴 능력도 없고…… 앞으로 연재를 계속하면서 기독교와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인간에 대한 논의를 간헐적으로 끌어들이겠지만, 이번 <웹진 50호>의 주된 내용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발달(?)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웹진에 이어<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나오는 지젝의 라깡 해석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사실 지젝 이론의 화두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가면서 개인이 사회적 주체로 전환되는 과정에 관심을 두었던 라깡의 초기이론보다는, 라깡의 후기 이론, 즉 현실(the reality)은 그 자체로 완벽한 무엇이 아니라,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는 그 무엇인데, 그 구멍들이 환상에 의해 봉합되어 구성된 현실이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므로 현실보다는 현실을 지탱케하는 그 무엇, 곧 실재(the Real)에 대한 규명이 지젝을 이해하는 첫 단추이고, 그 단추를 풀어가면서 지젝 특유의 (실재의) 정치학, 윤리학, 신학, 문화비평이 전개된다. 졸고에서 논의되는 내용은 라깡의 초기이론, 즉 주체구성의 상징화 과정에 대한 지젝식 해설이고, 실재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다음 웹진부터 전개될 것이다. 자~~이제부터 가 볼까요? 아 유 뤠디?
     
징후(Symptom): 억압된 것의 귀환

지난 <49호 웹진>에서 ‘빗금 그어진 주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정신분석학의 제 1원리를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고 정의했었고, 그 억압이 숨겨져 있는 지점을 우리가 흔히 ‘무의식’이라 부른다고 했었다. 그러나 무의식은 실증할 수 있는, 덩어리가 있고 물리적 실체가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징후(Symptom)’로서 나타난다.[각주:1] 이 징후에 대한 실례로 우리는 지난 웹진에서 어렸을때 성폭행을 당했던 소녀가 성인이 되어 우연히 어느 문방구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몸이 떨려오고 심장이 격하게 뛰는 예를 들면서 설명한바 있다.
다시 한번 징후에 대해 생각해보자. 징후란 무엇이고 언제 나타나는가? 징후는 뭔가 억압되었던 것이 튀어나온 것이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의 재선에 혁혁한 공을 세운 빌 클린턴이 대통령 재임시절 본인의 집무실에서 백안관 인턴으로 일하고 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 정사를 벌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미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클린턴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고, 대통령 탄핵에 대한 여론까지 조성되면서 미국 정계 전체가 큰 소용돌이로 휘말렸던 사건이었다. 그 무렵 ‘클린턴이 왜 그랬을까?’를 둘러싸고 온갖 이야기들이 나돌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클린턴의 어린 시절 성장배경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클린턴의 생부는 그가 태어나기 석 달 전 교통사고로 사망하였고, 그의 나이 4살 때 클린턴은 알코올중독자 로저 클린턴을 계부로 맞이하였다. 그는 자주 취해 폭력을 일삼는 자였고, 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면서 클린턴은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로저 클린턴 사망 후 클린턴의 생모는 세 명의 남자와 세 번 더 결혼하였다. 얼굴도 못 본 생부와 계부 4명, 총 다섯 명의 아버지가 클린턴에게 있었던 것이다. 성장기 내내 클린턴은 자기집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불행한 일이 없는 것처럼 최면을 걸었다.
이 때문에 클린턴은 어렸을 때부터 모순되는 것을 잘 조화시키고 상황에 따라 잘 적응하는 법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불굴의 의지, 승부욕,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강한 욕구 등이 이때 자리잡았고, 그것이 여성에게는 성적욕구로, 정치적으로는 승리에 대한 욕망으로 표출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던 심리학자들의 인터뷰가 당시 난무했었다. 요약하면, 어린시절 억압되었던 그 무엇인가가 드디어 징후가 되어 귀환하여 대통령이 된 클린턴으로 하여금 르윈스키와 백악관 정사를 벌이게 했다는 결론인데…..
어렸을 때 아무런 억압 없이 성장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클린턴과 같은 강렬한 징후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하나씩 그런 징후들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라깡의 사유와 만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왜 생기는가?’라는 물음에 무의식은 어떤 억압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즉 이런 억압이 눌려 저장되어 있는 장소가 무의식인 셈이다. 하지만, 라깡은 프로이트보다 한 발짝 더 나간다. 라깡은 개별적 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반드시 겪게 되는 억압의 경험을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언어의 세계로 진입하는 경험이다.

라깡의 주체론
 
‘언어의 세계로 진입한다’함은 아기가 제도와 문화와 사회속으로 진입함을 의미한다. 시간적으로 환산하면 옹알이를 시작한다는 생후 6개월에서부터 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18개월 사이다. 그 기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 이전 엄마와 아기의 관계는 연속적이고 합체된 이자관계였다. 아기에게는 나는 나이고, 저것은 엄마라는 주객 이분이 없다. 주관과 객관 사이의 거리가 확보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18개월이 지나면서 엄마와 아기사이의 연속성은 서서히 깨어지고 불연속면이 펼쳐지는데, 그 파열을 제공하는 자가 바로 아빠다. 그곳은 엄마의 젖가슴이 곧 나였던 달콤한 상상계와 대비되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법이 지배하는 차가운 상징계를 대변한다.
라깡은 이와 같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설명하기 위해  ‘the ideal ego(이상적 자아)’와 ‘the ego-ideal(자아이상)’라는 개념을 끌어온다. 각각은 상상적 동일시, 그리고 상징적 동일시와 쌍을 이루는 말이다. 지젝은 상상적 동일시를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을 표상하는 이미지와 동일시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상징적 동일시는 “우리가 관찰 당하는 장소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장소를 동일시 함으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사랑할 가치가 있고 좋아할 만하게 보이는 것”이라 표현한다.[각주:2]
예를 들어, 엄마의 젖가슴 만으로도 충분히 엄마와 합일이 가능했던 아이에게, 어느 날 엄마가 “너는 의사가 되어야 해! 그래야만 나와 합일을 계속 유지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고 치자. 엄마는 더 이상 나를 더 이상 당신의 젖가슴을 만지는 나로 만족하지 않는다. 뭔가 다른 것을 보여달라고 성화다. ‘나는 가수다!’ ‘나는 의사다!’ ‘나는 박사다!’……이렇듯 엄마는 자신의 젖가슴만을 탐닉하면서 상상계속에만 머물러 있는 내가 아닌, 가수, 의사, 박사, 판검사 등등의 이름으로 기표화된 나를 요구한다. 그 결과 아이는 더 이상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게 되고, 엄마가 제시하는 이름표(기표)를 따는, 즉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라깡은 desire와 jouissance를 구분한다. Desire은 상징계속 주체가 갖는 욕망이다. 이것은 타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욕망이다.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의사가 되고 CEO되는 것과 같이 어떤 기표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다. 남이 좋아라 하는 시선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국의 결혼풍속도를 보면 상징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간의 사랑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남들이 이 결혼을 어떻게 볼까?’ 가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신랑은 뭐하는 사람이고, 신부의 집안 배경은? 혼수도 얼마나 했는지? 예식장은 어디? 신혼여행은? 이 모든 사항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조정되고 꾸며진다. 반면, jouissance는 상상징계 진입할 때 제거당한(남겨진) 대상을 향한(대한) 욕망이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실재에 대한 부분을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이런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통과의례를 경험한 주체는 (내가 보기에) 슬픔과 외로움과 안타까움을 마음속 깊숙히 근원적으로 간직한, 자기소외와 분열과 억압을 동반한 주체다. 왜냐하면, 상징계속 주체(사회적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원래 아기(상상계속 주체)가 지녔던 것이 모두 상징계속 주체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시카고에 살고, 신학으로 박사공부하고 있고, 결혼했고, 목사인 이상철이다. 하지만, 그 이상철으로 완전히 온전히 환원되지 않은 또 다른 이상철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남겨진 부분, 즉 잔여다. 이런 이유로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를 spaltung(파열)이라 표현한다. 이것은 아기가 엄마의 자궁을 뚫고 나올 때 엄마의 배가 찢어지는 것과 비유할만 하다. 그 고통을 수반해야 아기는 더 이상 자궁속에만 머무르고 있는 잠재적 주체가 아닌, 세상에서 카운트 되어 살아가는 주체로 설 수 있다. 

결국, 주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라깡의 답변은 근대철학이 제시하는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계몽이성에 의해 인도받은 근대적 주체는 이성의 빛으로 중세적 어두움을 정복하고 무지와 미지의 지점을 하나씩 무너뜨리면서 세계를 통합하고 종합하면서 전체를 총체적으로 구성해나갈 줄 아는 그런 주체였다. 하지만, 라깡의 주체는 근대적 주체와는 반대로 uncanny하고 weird한 존재이다. 독일말로는 Ungeheuer! 카프카의 <변신>에 보면 한 친구가 아침에 자고 일어났더니 엄청 큰 괴기스러운 벌레로 변신이 된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카프가가 쓴 단어가 Ungeheuer이다.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무엇인가를 표시할 때 쓰는 단어다. 예전에 리들리 스콧, 제임스 카메론 감독 같은 대가들이 연출하고 시고니 위버가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에어리언>시리즈가 있었는데, 그 영화에서 괴물들의 숙주가 인간의 몸에서 자라는 씬이 나오는데, <변신>에서와 마찬가지로 uncanny하고 Ungeheuer하다는 표현을 쓰기에 딱 걸맞는 장면이었다. 영화 <에어리언>의 그 장면은 라깡의 주체에 대한 이미지를 설명하는 데 가장 탁월한 그림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내 안에는 내가 모르는 어떤 파열과 분열과 섬뜩함의 도사리고 있는 공간이 있다. 그것은 우리 속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다가 징후가 되어 간간이 우리의 통제와 제약을 넘어 분출한다. 라깡은 징후가 되어 귀환하는, uncanny한 에어리언 같은 ‘내가 인간임!’을 선언하였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이룩한 주체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통찰이다. 너무 우울한가?      

<다음 웹진에 계속>

  1.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ew York: Verso, 1989), 56. [본문으로]
  2. Ibid., 10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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