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대한 담론: 정의의 문제이자 실천신학의 주제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최근 독일에 한 달 정도 머문 적이 있다.

    유럽 연합 국가내에서 최고의 지도력을 발휘하는 국가로서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해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운 점도 있었고 불편한 점도 있었다. 동시에, 환경문제 극복을 위한 재생에너지 개발, 재활용 부분면에서 독일 정부와 독일에 사는 사람들이 해내는 멋진 실천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부러웠던 점을 이 지면을 통해 나누고 싶다. 그건 바로 모든 도로에 설치된 자전거전용 도로이다. 

    한달 간의 체류동안 네개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보았다.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나찌에 저항해서 개신교 교회 지도자들이 신학선언을 작성하고 발표한 바르멘이라는 도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95개조항이 작성되고 발표된 비텐베르그, 이 두 도시는 작은 도시에 속한다. 통일독일의 수도이자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베를린과 동독 시절, 비폭력 평화기도회를 통해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도출했던 기독교교회들이 속한 라이프찌히는 큰 도시에 속한다.

    이 네 개의 도시 어느 곳을 가봐도 모든 도로에 자전거만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안전하게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자전거만 건너는 신호등까지 마련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많고, 자전거를 들고 전기차인 trams를 타고, 기차를 탄다. 기차역엔 자전거 승객을 위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고, 기차안엔 자전거를 둘 수 있는 기차객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이 모든 제반시설은 자전거를 이용하도록 적극 독려하고 있다. 이 제반시설을 설치하고 그 설치를 위해 투여된 과학 기술과 재정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 과감한 투자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그런 삶의 방식을 만들고자 하는 생각있는 독일 사람들의 성숙한 의식과 의지에 감동을 받았다.

    전기차와, 기차, 자전거가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이기에 가솔린과 디젤로 인해 생성된 매연을 품어대는 차들이 일반 도시 거리에 별로 없다. 그런 차들은 아마도 고속도로나 아우토반을 가야 만나게 될 것이다. 고속도로에 즐비한 그런 차들이 일반 거리엔 많지 않기에 그 차들이 품어대는 엔진과 머플러 소음이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이른바 교통체증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 체증으로 인해 짜증내는 운전자들의 빵빵거리는 경적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어서 참 좋았다. 그렇게 깨끗한 공기와 자동차의 소음으로부터 해방된 거리에서 독일 사람들의 일상적 하루의 생활들을 보고 감상하는 그 시간이 참 소중했고 아름다웠다.

    자전거 전용도로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독일에서 내가 본 자전거 전용 도로는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사는 카나다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스케일의 도로였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최소 자동차도로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자동차 1차선인 곳에도 자전거 전용도로는 마련되어 있었다. 전 세계 도시를 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장담하건대 대다수 도시에 제대로 된 자전거전용도로는 없다고 본다. 만약 있다하더라도 차가 다니는 도로차선에 비하면 아주 작게 할당된 일종의 깍두기, 구색만 갖추어둔 도로일 것이다. 약 1차선, 2차선 도로일 경우, 자전거전용도로를 기대하긴 어렵다. 꽤나 잘 만들어진 4차선 도로라 하더라도 한차선 정도만 할애된 자전거도로가 대부분이다. 4차선 이상되는 도로의 경우는 차들이 너무 빨리 달리고, 그렇게 속도를 내대는 차옆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마치 불나방이 불꽃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위험하다. 자전거를 앞질러 가는 차들이 뿜어대는 매연을 마시면서 자전거를 타는 일 역시 불쾌하고 건강에 해롭다. 그렇기 때문에 차를 안 쓰고, 자전거를 타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쉽게 할 수 없다. 그 의지를 현실화하려면 그 의지를 뒷받침해주는 특, 즉 공간적 제반시설과 제도적 의지가 필요하다.

    여기서 난 인간의 삶이, 아니 인간적인 삶, 특히 약자와 평범한 자들의 삶을 보호하고 윤택하게 만드는 길과, 인간이 만들어낸 공적 제반시설이 주는 중요성간 불가분관계를 보고자 한다.

    퀴어페미니스트이자 문화이론가인 쥬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는 정치적 행위, 즉, 시위, 공적 저항의 모임들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모인 자들의 의지, 전술, 전략, 즉, 시위의 목적과 내용만이 아니라 그 모임을 가능하게 만드는 공간, 즉, 제반시설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이 중요성을 적나게하게 드러내고자 제반시설의 약화, 제반시설의 부재에 대한 예를 드는데, 요약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모여 시위를 하는 이유를 제반시설의 부재로 치자. 아니 대부분 우리가 시위를 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제반시설이 부재하거나, 있더라도 계속 악화되고, 그 상태를 고치고자 하는 정부, 책임자들의 방기가 계속되어가는 점을 지적하고, 그의 개선을 요구하기 때문에 시위를 하는 거다. 즉, 노숙자, 피난민들을 위한 일시적 대기소, 또는 빈곤층들이 사는 게토화된 주변부 도시들, 이들의 기본적인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제반시설들의 망가짐과 부재가 이런 예들에 속한다. 실제로 이는 책에 등장하는 예만이 아니라 실제 세계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매일의 현실이다. 깨끗한 식수용 청결용 물의 부재, 그런 물의 정화하는 상수도 제반시설의 약화, 또한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지 않거나, 마련된 화장실 정수관이 막혀서 실제로 쓸 수 없는 상태, 또 비와 눈,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숙소의 부재와, 숙소의 열악한 상황이다.[각주:1]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정치적 시위를 하는 데 있어 그 시위를 가능하게 하는 거리는 단순히 시위의 장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그 거리 자체의 실재가 제반시설이라는 그 공간의 담론이 주는 공공선 (public goods)이라고 버틀러는 주장한다. 다시말해, 제반시설의 개선과 확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할 때, 그 시위를 가능케하는 그 공간을 지켜내는 일 자체가 정치적 행위이자 시위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버틀러는 여기서 공적 발언과 공적 시위를 만들어 내는 물적 토대, 물적 조건의 중요성을 각인하는 것이 바로 공적 발언과 공적 시위를 하는 근본적 이유와 직결된다는 그 불가분의 관계를 주장한다. 쉽게 말해, 시위를 할 수 있는 거리가 없다면, 아니 그 거리, 또는 광장이 시위를 하기 어려운 열악한 상태라면, 그 거리와 광장을 보호하고 지켜내는 일이 시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와 직결되는 것이고, 동시에, 구체적인 시위와 저항의 목적과도 연관된다는 것이다. [각주:2]

    물적 토대에 관심을 두는 이론은 막시즘, 그리고 페미니즘을 포함해서 포스트콜로리얼 탈식민주의에서 중요시하는 인식론이다. 즉, 선형적 시간 (linear time)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 위계적 식민주의를 가능케한 인식론이었다면, 이를 반박하면서 대안적 인식론으로서 공간적 다수성 (spatial plurality)이 제안된다. 즉, 과거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다른 그룹들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 가해자와 피해자, 이주민과 정착민)이 공존하며 살아가기위해 창조되어야 할 그 다름의 공간, (plural differences), 공간적 다수성이 확보되는 담론으로 강조된다.[각주:3] 

   이런 공간의 중요성을 논하는 담론은 동시에 신학적 화두이자 실천신학에서 특별히 관심하는 주제이다. 실천신학은 매일의 삶에 관심한다. 그 매일의 삶이 그냥 다람쥐 쳇바퀴돌아가듯이 관성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매일의 삶이 풍부해지도록 의미있도록 만들어 내는 일에 관심한다. 그래서 예배, 의식,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아이들의 교육이 중요하다. 그래서 몸에 관심하기, 용서하기, 고통 겪기, 치유하기, 놀기, 먹기, 사랑하기, 소비하기, 축복하기, 그리고 심지어 잘 죽기, 이 모든 삶의 삼라만상, 생로병사가 신학적 주제이다. 더 나아가, 그 매일의 삶 중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의 삶, 소수자와 약자들의 매일의 삶이 풍성해지는 데 관심한다.[각주:4]그래서 예배, 의식,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아이들의 교육이 중요하다. 그래서 몸에 관심하기, 용서하기, 고통 겪기, 치유하기, 놀기, 먹기, 사랑하기, 소비하기, 축복하기, 그리고 심지어 잘 죽기, 이 모든 삶의 삼라만상, 생로병사가 신학적 주제이다.[각주:5] 더 나아가, 그 매일의 삶 중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의 삶, 소수자와 약자들의 매일의 삶이 풍성해지는 데 관심한다. 자전거 전용도로 제반시설에 대한 담론은 그런 점에서 실천신학의 주제이자 약자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정의의 문제이다.

    세계 어느 곳을 가서, 그 곳이 좋다고 평가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그 한 기준은 바로 그 곳이 얼마나 공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가로 가늠된다. 즉, 가진 자, 특권층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평범한 곳, 더 나아가, 약자와 소수자가 안전하고 즐겁게 갈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는지를 보면, 그 곳이 살기 좋은 곳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즉, 공간이 말한다 (space speaks). 특히, 이런 공적 공간이 사유화, 신자유주의, 그리고 증폭된 경제적 불균등, 독재에 버금가는 전제주의체제의 증가로 피해, 아니 존재의 위기를 겪고 있는 오늘날, 공간에 대한 담론이 신학의 주제로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 점에서 자전거 전용도로에 대한 논의가 한국에서 이루어지길 바란다.

    한국처럼 석유 한 방울 안나는 나라에서, 남북이 분단되어 그 나마 작은 땅덩이가 절반으로 잘린 채 북적거리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황사와 매연 등으로 최악의 공기를 자랑하는 한국 대도시에서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일은 참 어리석다. 그런데도 한국만큼 자동차를 선호하는 나라도 없다. 왜 그럴까? 자동차 산업의 강국이어서?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의 역할관계로 인해 (우리가 만들었으니 소비해줘야지)? 부의 상징? 허례허식의 폐해? 불편함을 싫어해서? 한국에서 자동차를 가져본 적이 없는 내게, 복잡한 대도시에서 운전을 해 본 적이 없는 대개, 자동차를 소유하고 매일 교통대란을 겪는 대도시안에서 운전을 하고 다니는 분들의 대답을 듣고 싶다. 

    한국에 갈 때마다 느끼는 생각이지만 대도시에 설치된 공공지하철 제반시설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자동차를 몰게 하기 위해 여전히 산을 뚫고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개선하는데 드는 비용이 자동차를 쓰지 않도록 독려하는 제반시설의 투자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고 대중교통수단의 질을 높이는 논의를 공간에 대한 담론의 한 시도로, 정의의 문제로 실천신학적 주제토론으로 삼으면 어떨까? 


ⓒ 웹진 <제3시대>



  1. Judith Butler, Notes toward a Performance Theology of Assembl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본문으로]
  2. Judith Butler, “Rethinking Vulnerability and Resistance,” in Vulnerability in Resistance, edited by Judith Butler, Zeynep Gambetti, and Letical Sabsay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6), 13. [본문으로]
  3. Bill Ashcroft, Gareth Griffiths, and Helen Tiffin, The Empire Writes Back: Theory and Practice in Post-colonial Literature (London: Routledge, 1989), 36—37. [본문으로]
  4. Dorothy C. Bass, ed. Practicing Our Faith: A Way of Life for a Searching People (San Francisco: Jossey-Bass, 1997), X. [본문으로]
  5. 위에서 언급한 Bass, Practicing Our Faith는 몸 존중, 환대, 안식일, 증거, 분별, 공동체 만들기, 용서, 치유, 잘 죽기, 그리고 삶을 노래하기를 실천신학의 주제로 다룬다. 반면, 다음 책에선 고통, 치유, 놀기, 먹기, 사랑하기, 소비, 축복을 신앙을 형성시키고 삶의 도를 알려주는 실천신학의 주제로 다룬다. Bonnie J. Miller-McLemore, The Wiley-Blackwell Companion to Practical Theology (Chichester: Wiley-Blackwell, 2012), 23—8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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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취지

_지난 30년 동안 많은 성서신학자들과 조직신학자들이 탈식민주의 이론과의 대화를 시도 해왔다. 그러나 실천신학 영역에서는 이런 노력이 많지 않았다. 다행히 최근 10년동안 예배학자들과 기독교 교육학자들을 중심으로 실천신학과 탈식민주의 담론을 이론화하고 실천적으로 고찰하는 노력이 보인다. 본 작업은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예배 중 성찬의 문제를 세가지 측면에서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다루고자 한다. 첫째, 성찬을 문서화된 예식으로 강조될 때 벌어지는 문제에 대해 진단한다. 소위 “문서주의의 헤게모니”를 다루면서 탈식민주의에서 관심하는 “행위로서의 지식”과 대조적으로 성찰한다. 둘째, 성찬을 둘러싼 지도력의 문제를 다룬다. 소위 성직자의 특권인 집례 권한 문제를 비판적으로 살피면서 공적 의식으로 성찬, 공동체적 참여로서의 성찬의 역할을 조명한다. 셋째, 성찬에 쓰이는 빵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자본주의적으로 획일화되어 상품화되어가는 영성체, 성찬 요소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서구화 획일화의 문제와 탈서구화와 토착화의 문제를 집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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