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 이후의 선교 3]



말이 말 같지 않은 시대의 말에 관하여




홍정호

(신반포감리교회 목사)




맹세의 쇠퇴, 거짓말의 전성시대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알바생을 대상으로 거짓말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알바생들이 1위로 꼽은 사장님의 거짓말은 “일 잘하면 월급 올려줄게.”(28.1%), 알바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은 “하나도 안 힘들어요, 괜찮아요.”(32.0%)인 것으로 드러났다.[각주:1] 남녀를 대상으로 한 ‘연인 사이 거짓말’도 있다. 국내 한 결혼정보업체가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남자는 “이제 집에 간다.”(44.3%), 여자는 “화 안 났다”(39.2%)는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각주:2]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다.


    기꺼이 속아줄 수 있는 거짓말과는 달리 분노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거짓말도 있다. 타인의 삶을 위기와 파멸로 몰아넣는 거짓말이다. 선거철 공약(公約)은 결국 ‘공약’(空約)에 불과하다는 반복 학습의 결과 정치권의 말은 오늘날 한국인이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집단의 말로 인식되고 있다.[각주:3] 또한 비리를 일삼는 이른바 ‘지도층’의 말을 감싸고도는 듯 보이는 형사사법기관들의 행태는 법원과 검찰, 경찰의 말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낙제점 수준으로 끌어내렸다.[각주:4] 여기에 종교지도자연 하는 이들의 말은 구태여 보태지 않겠다. 믿을 말이 없다. 바야흐로 거짓말의 전성시대다.  


    아감벤(G. Agamben)은 그의 책『언어의 성사(聖事)』에서 우리시대를 ‘맹세의 쇠퇴기’로 명명한다. 말과 사물(사태)과 행위를 하나로 묶어주던 맹세가 쇠퇴한 이 시대를 아감벤은 “인간성이 어떤 탈구 앞에 처해 있”[각주:5]는 위기의 시대로 진단한다. 맹세가 사라지는 한편에는 벌거벗은 삶으로 축소되는 ‘살아있는 존재자’(the living being)의 들리지 않는 말이, 다른 한편에는 책임을 벗어던진 ‘말하는 존재자’(the speaking being)의 공허한 말이 메아리친다. 자기 말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는, 오직 말하기 위해 존재하는 ‘말하는 존재자’의 시대를 떠도는 말은 ‘그냥 하는 말’, ‘하나마나 한 말’, ‘해야 돼서 하는 말’, 즉 빈말이다.


    신앙(신학)의 문제는 빈말이 지배하는 맹세의 쇠퇴기가 ‘독신의 시대’(the age of blasphemy)라는 데에 있다. 아감벤은 “시원적 형태의 독신은 하느님께 가해진 모욕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부당하게 입에 담는 것”[각주:6], 즉 신의 이름을 허투루 부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늘에 대고 쌍욕을 해대는 사람보다 입에 발린 말로 찬양하는 사람이 ‘시원적 형태의 독신’에 더 가깝다는 지적이다. 생각해 보니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오늘날 교회 안의 얼마나 많은 말들이 맥락으로부터, 혹은 말의 사태로부터 분리된 채 허투루 불리고 있는가? 말과 사태와 행위를 하나로 묶어주는 충실한 맹세의 말,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는 말이라야 언어는 성사(聖事)가 된다. 그러니 ‘나는 차라리 입을 다물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또 이렇게 손가락을 놀리고 있으니, 딱하다고 해야 하나 용감하다고 해야 하나. “의미화의 연관으로부터 풀려난 신의 이름은 공허하고 의미 없는 말, 곧 독신이 되며, 바로 이렇게 의미로부터 떨어져 나와 부적절하고 사악한 용도로 쓰일 수 있게 되는 것”[각주:7]이라는 아감벤의 일침은 전문가로서의 목사 혹은 직업으로서의 신학자의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말함과 피함 사이


    빈말, 특히 남을 해할 목적으로 한 거짓말의 병폐를 보여주는 성서의 대표적인 예는 ‘나봇의 포도원’(「열왕기상」 21:1-19) 이야기 일 것이다. 농민 대중의 몰락을 억제하고 그들의 지위 복원에 정치적 관심을 기울였던 요시야 개혁세력의 관점을 반영하는 문서인 「열왕기상」에 실린 이 이야기는 법을 통한 대중의 주체화(김진호)를 시도하는 데 있어서 ‘언어’의 문제, 특히 ‘말’을 매개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해석적 개입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그동안 스스로를 ‘말’의 주체로 여겨 온 왕과 귀족과 사제세력의 모순과 기만성을 폭로함으로써 대중을 말의 주체이자 통치의 주체로 세우는 것이 그들 개혁세력의 목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패망한 북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한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가 요시야 개혁세력의 문헌에 등장하는 이유이다.


    나봇의 토지에 대한 강탈은 ‘거짓 증언’을 매개로 교묘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아합이 나봇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그의 아내 이세벨이 문제해결사로 나서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다. 거기에는 이런 ‘지령’이 담겨 있었다.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게 하시오. 그리고 건달 두 사람을 그와 마주 앉게 하고, 나봇이 하나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고 증언하게 한 뒤에,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시오.” ―「열왕기상」 21:9-10


    이세벨의 계략은 성공했고, 나봇은 ‘하나님과 임금님을 저주’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 바깥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죽었다. 아합은 포도원을 거저 얻었다. 무고한 아합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 일로 ‘이세벨’(Jezebel)이라는 이름은 오늘날까지 서양문화에서 ‘악녀’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세벨의 악행에 대한 고발은 타종교인, 여성,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성서적’ 근거로 종종 활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페니키아 출신의 이방 여성인 이세벨에 대한 악마화(demonization)가 이 이야기의 주제는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봇의 이야기는 말의 주체로 여겨져 온 이들의 기만성을 폭로함으로써 농민대중을 ‘말’과 ‘법’(통치)의 새로운 주체로 호명해 내기 위한 요시야 개혁세력의 정치적 기획의 연속선상에서 놓인 정치적 우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질문이 생긴다. 이세벨은 ‘그녀의 정의’를 실행한 게 아닌가? 절대 주권자인 왕의 아내이자 종교‧문화적으로 다른 배경에서 성장한 이세벨의 입장에서는 왕의 아내로서의 ‘마땅한’ 권한행사를 포기하면서까지 실익(實益)을 양보해야 할 어떤 명분을 찾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세벨의 정의는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세벨이 ‘그녀의 정의’를 실행한 것이라면 나봇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그녀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실행했고, 나봇은 목숨과 재산을 잃었다.


법의 말과 '아마도'의 정의


    빈말, 혹은 거짓말에 둘러싸인 진실을 헤쳐 정의에 이르는 길이 험난한 까닭은 그 ‘말’이 ‘거짓’임을 판단할 수 있는 명확하고 절대적인 기준, 혹은 그런 기준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 한 『삶으로서의 은유』(Metaphor We Live By)에서 레이코프(G. Lakoff)와 존슨(M. Johnson)은 언어학과 철학에서 주류로 여겨져 온 ‘객관주의’(objectivism)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은유’(metaphor)를 새로운 사고와 행위의 중요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그릇된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위험한 것”[각주:8]이었다는 그들의 반성은 참과 거짓의 경계가 분명한 이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현실의 단면에 대한 어떤 숙고를 요청한다.


    법의 통한 대중의 주체화를 모색한 요시야 개혁세력의 ‘꿈’과는 달리 현실에서 법(의 말)과 정의(의 말)의 관계는 어느 한 편의 손을 온전히 들어줄 수 있을 만큼 그리 단순명쾌하지는 않은 것 같다. 법과 정의의 관계는 모호하다. 적어도 그것이 펼쳐진 삶의 관계성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보기 전에는 그러하다. 법과 정의의 관계를 숙고한 데리다(J. Derrida)는 “법은 정의가 아니”[각주:9]라고 말한다. “계산의 요소”로 구성되는 법과 달리, 정의는 언제나 “계산 불가능한 것”[각주:10]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의에 관해서는 항상 아마도라고 말해야”[각주:11] 한단다. ‘아마도’의 가능성을 벗어난 정의, 법치의 이상과 동일시되는 정의는 결국 통치자의 독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금 통치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대중을 법의 주체로 호명해내고자 했던 요시야 개혁운동의 실패는 법, 혹은 법의 말을 통한 대중 주체화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성찰의 과제를 우리에게 남긴다.


   빈말, 혹은 거짓말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아마도’의 정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드러난 사실은 드러나지 않은 더 많은 진실에 둘러싸여 있다. 면(面) 위에 찍힌 점 하나가 공허(空虛)에 둘러싸여 있듯 겉으로 드러난 한 점의 사실은 드러나지 않은, 혹은 드러낼 수 없는 막막한 진실의 표면에 아른거리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시대의 ‘나봇’, 즉 억울한 죽음을 향해 내몰린 이들에 대한 편파적 옹호는 신학의 마땅한 지향점이다. 여기에는 논란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말의 화신인 저 ‘이세벨’의 말을 향해서도 ‘아마도’의 정의를 철회해서는 안 된다. 이미 형성된 ‘올바름’의 잣대로 참과 거짓의 여부를 판단한 채 무책임한 도덕적 비난을 쏟아 부을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비난과 옹호 사이로 난 작은 틈을 헤집고 들어가 거기에서 ‘올바름’의 내용을 구성하는 지난한 길에 나서야 한다. 정의는 법치의 철폐도, 그것의 실현과도 동일시 될 수 없는 ‘아마도’의 가능성에 머문다. 그래서 정의는 오직 목숨을 건 ‘맹세’가 아니고서는 말해질 수 없는 무엇으로 남을 뿐이다. 맹세의 쇠퇴기에 정의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토록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김기석은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제9계명의 의미를 ‘참된 말을 하라’는 적극적 의미로 재해석한다.[각주:12]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에 이르는 참말을 하는 것이다. 참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의 말’로 환원되지 않는 말, ‘아마도’의 가능성을 철회하지 않는 말, 그래서 이웃을 살리는 희망의 말이다. ‘법의 말’을 통해 대중을 변혁의 주체로 호명해 내고자 했던 요시야 개혁운동의 이상은 우리 시대에 완수되어야 한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들, 할 말을 잃어버린 이들이 저마다의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되어 제 할 말을 하는 세상을 꿈꿔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입장과 처지가 다른 이들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는 신중함과 어리석게 옹호하지 않는 지혜가 모두 필요하다. ‘법의 말’을 넘어 참말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보호를 위해 세워둔 확실성의 옹벽을 철거하고, 타자의 말(증언)이 놓인 맥락 속으로 용기 있게 걸어 들어가야 한다. ‘법의 말’을 넘어서 참말이 도달해야 할 곳은 나와 타자의 삶이 놓인 바로 그곳, 우리가 함께 서 있는 자리이다.


* 필자소개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강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객원연구원


** 이 글은 『지금 여기로 걸어 나온 십계』(가제)에 실린 원고의 일부를 수정한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경향신문, 「사장님 거짓말 2위 “가족 같은 분위기” 1위는?」, 2015. 4. 1. [본문으로]
  2. 한국일보, 「미혼남녀 10명 중 9명, 연인에게 거짓말 경험」, 2015. 12. 9. [본문으로]
  3. 한국일보, 「특임장관실 국민 여론조사 65%가 “사회 지도층 불신한다”」, 2011. 5. 5. [본문으로]
  4. 법률신문, 「법원·검찰에 대한 국민 신뢰도 경찰보다 낮다」, 2016. 3. 7. [본문으로]
  5. 조르조 아감벤, 『언어의 성사: 맹세의 고고학』, 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2, 145쪽. [본문으로]
  6. 앞의 책, 89쪽. [본문으로]
  7. 앞의 책, 93쪽. [본문으로]
  8. G. 레이코프 ‧ M. 존슨, 『삶으로서의 은유』(수정판), 노양진 ‧ 나익주 옮김, 박이정, 2006, 270쪽. [본문으로]
  9. 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37쪽. [본문으로]
  10. 앞의 책, 37쪽. [본문으로]
  11. 앞의 책, 59쪽. [본문으로]
  12. 김기석, 『광야에서 길을 묻다』, 꽃자리, 2015, 25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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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의 종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사회적 타살로서의 자살에 관한 신학적 문제제기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의 뜻은 무엇일까? 카인은 아벨을 죽였고(「창세기」 4,8),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죽일 뻔 했다(「창세기」 22,10).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고 노래한다(「사무엘기상」 18,7). 성서 속의 이 무수한 살인들은 정당한 살인인가? 십계명의 살인 금령은 어떤 살인을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물론 가장 일반적인 경우인 누군가를 고의로 죽게 하는 행위가 그 첫째일 것이다(「민수기」 35,21). 한데 더 나아가서, 오래전 부족동맹 시절의 이스라엘 때부터 유래했던 ‘피의 복수’를 통한 살해(vendetta, 「민수기」 35,25)도 부당한 살인에 해당한다. 또한 ‘명예살인’ 전통(「창세기」 38,24)도 금지되어야 할 살인이었다.

요시아 왕(재위 641~609 BCE.)이 법을 반포할 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대중에게 알아듣기 쉽도록 만들어 포고한 십계명[각주:1]에서 ‘살인 금지령’이 담고 있는 구체적 내용은 필경 이런 함의, 고의 살인, 피의 복수 살인, 명예살인 등의 금지를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데 살인죄를 엄단하고자 할 때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과실치사 범죄자는 죽임을 면해줄 필요가 있다. 그것은 피의 복수로부터 구출해주는 것이다.(「신명기」 4,41). 또한 가해자가 명료하지 않은 살해의 경우, 그 사건을 둘러싸고 가문 간에 벌어질 수 있는 피의 복수를 막는 것도 필요했다. 하여 공식으로 그 사건은 누구도 책임이 없음을 공시함으로써 복수의 악순환을 예방하고자 했다.(「신명기」 21,1~9). 반면 존속살해자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극형에 처했다.(「신명기」 21,18~21).

여기서 보았듯이 ‘살인하지 말라’는 법령은, 간단한 듯하지만, 실은 그 내막에는 여러 가지 고려할 것이 있었다. 요시아 정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위에서 본 것처럼, 십계명의 간단한 문구와는 달리, 법을 구체적으로 적용할 때엔 여러 변수들을 함께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훨씬 더 복잡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오늘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이 계명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계명과 더불어 신중하게 고려해야 것들은 어떤 것일까?

당연히 누군가를 죽게 하는 일은 불행한 일이며,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임에 이의가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물론 고의로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는 결코 관용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존엄사’의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또 ‘낙태’의 문제도 생각을 복잡하게 한다. 나아가 사람들과 인격적, 감성적 친밀성을 교류하는 반려(伴侶) 존재의 생명권의 문제도 제기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반려동물과 반려식물, 그리고 최근에는 인조인간을 의미하는 안드로이드(Andriod)의 생명권[각주:2] 등이 고려의 대상이다. 여기에 하나 더, ‘자살’도 오늘의 상황에서 주목해야 할 문제다.

이 글에서는 바로 이 ‘자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자살을 ‘공격성이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해 가해진, 일종의 전도된 살해’라고 말했다.(「슬픔과 우울증」 in 『무의식에 대하여』) 또한 교회는 훨씬 이전부터 ‘자살’을 ‘자기 살해’의 관점에서 보면서, ‘살인하지 말라’라는 금령을 어긴 행동으로 간주했다. 이런 자살 반대 교리 탓에 가톨릭이나 개신교 성직자들이 자살자들의 장례미사 혹은 장례예배를 거부하는 경우도 적지 아니 있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가 자살에 대해 적대적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분명한 것은 성서의 ‘살인 금령’에는 자살 문제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서에 묘사된 대표적인 자살의 예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적에게 죽임당할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사무엘기상」 31,4). 삼손은 블레셋 신전을 무너뜨려 무수한 블레셋인들과 함께 그 돌무더기에 깔려 죽었다(「사사기」 16, 29~30). 또한 예수운동은 처음부터 무수한 순교자들과 더불어 발전했는데, 순교자 신앙은 권력에 의한 타살을 자발적 죽음으로 해석하는, 일종의 ‘자살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자살들이 살인 금령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이스카리옷 유다의 자살(「마태복음」 27,5) 같이 성서가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자살도 있지만, 그때에도 자살은 그이가 지은 죄의 당연한 귀결이지 자살 자체를 살인으로 간주하여 비난하지는 않았다. 요컨대 성서에서 자살은 살인 금령과는 무관했다.

자살을 살인으로 해석하여 자살 자체를 ‘잘못된 행위’로 비판했던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지도자는 5세기 교부(敎父)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였다. 그는 자살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음을 강변했던 것이다. 

한데 그가 자살을 비난한 맥락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정치적이었다. 그는 아프리카 출신이지만 로마 황제와 로마 교회를 위해 일한 사람이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도나투스파 교회들이 로마 교회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 지역의 반로마 기조와 결합되어 열렬한 대중운동으로 번져나갔다. 요컨대 이른바 도나투스 논쟁의 내막에는 로마에 의해 혹독한 착취를 당하고 있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북아프리카 지역 대중의 반로마 감정이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때 열광적 도나투스파 사제들은 순교를 불사한 반로마 항쟁을 부추겼고, 무수한 대중이 이에 호응하고 있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 사제들이 주장한 순교를 자살이라고 격하했고, 자살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권리가 아니므로 신의 구원을 결코 받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로마 제국과 교회는 도나투스 운동과 그 대중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리고 그들의 신학을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아우구스투수의 자살 반대론은 도나투스주의에 대한 이론적 공격의 의미를 넘어서 신학적 일반론으로 격상되었다. 하여 이제 자살 문제는 자기 살인으로 해석되었고, 자살자는 교회의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교리는 잘못 자리잡은 교리다. 이 교리는 정치적 야바위에 다름 아니고, 그 대가로 자살의 사회적 현실은 망각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여 교회는 자살을 단행한 사람들의 고통, 자살할 만큼 극한의 고통에 시달리는 대중의 고통을 대면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각주:3]

하여 이제 신학은 자살에 대해 다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망각해 버린 그 현실을 탐구하고, 그 속에 담긴 대중의 고통을 대면하는 일이 필요하다. 과거 유다국의 요시아 정부가 십계명의 살인 금령을 이야기할 때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자살의 문제를, 그리고 교회가 망각하고 폄훼했던 자살의 문제를 보다 현실감 있고, 깊이 있는 통찰을 담은 신학으로 발전시켜 내야 한다.  

더욱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자살률이 단연 1위다. 요컨대 자살은 한국사회의 살인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에 속한다. 그러니 자살을 신학화하는 일은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과제인 것이다.

먼저 경제활동인구인 15~64세의 경우 자살자의 비율이 우리나라는 OECD 평균의 2배, 65세 이상은 4배나 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이를 좀 과장하면 자살은 개개인의 자기 살해 현상을 넘어서, 사회적인 집합적 충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좀 큰 맥락에서 사회의 추이를 살펴보자. 1980년대는 민주화의 열망이 전 사회를 휘몰아쳤다. ‘1987년’은 민주화가 더 이상 꿈이 아니라 실현되어 가는 가능성,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의 질서가 중요하게 작동하였음을 의미하는 상징적 시간이다. 하지만 그 10년 후인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사회는 처절한 생존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난폭하게 휘말려 들었다. 그것은 더 이상 ‘모두의 평등’, ‘모두의 행복’이라는 집단적 가치가 유효할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때 우리사회를 뒤흔든 것이 이른바 ‘부자 되기 열풍’이었다.

이제 전 국민은 ‘부자 되기 경제학’, ‘부자 되기 심리학’에 몰두했다. 사람들은 노동과 휴식 시간 가리지 않고 갖가지 재테크에 열을 올렸고, 모든 여력을 있는 대로 다 가동하여 스펙 쌓기에 전념했다. 남들이야 어찌되든 자기 자신만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열망이 사람들의 생각을 장악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서바이벌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MB 정권의 탄생은 그러한 부자 되기 열풍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제 도덕도 가치도 필요 없고, 단지 부자가 될 수 있는 길만을 보려 했다.

하지만 그 5년 사이 이러한 열풍은 절망으로 전도되었다. 그 미친 서바이벌 게임을 거친 뒤 사람들은 공포감에 휩싸여 버린 것이다. 현재를 살아갈 힘도, 노후를 기대할 희망도 몰락했다. 비정규직으로 추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 일터에서 퇴출되는 것에 대한 공포, 가족해체의 공포, 질병의 공포, 빈곤의 공포 등등, 온갖 공포들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제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생존에 대한 ‘공포’다. 사회는 공포에 민감해졌다. 그러자 사회적 공포감에 기생하는 시스템이 발전한다. 매스미디어는 각종 안보 파산의 공포를 유포시켰고, 보험사는 건강과 재산의 파산 공포감을 유포시켰고, 심리상담가들은 정신의 파산 공포감을 유포시켰으며, 종교는 세계 파멸의 공포감을 유포시켰다.

공포는 존재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다. 자살 증후군은 바로 이런 ‘서바이벌의 종언’과 함께 사람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하여 자살은 곧 ‘사회적 타살’의 결과이며, 우리가 만들고 있는 이 저주의 사회는 ‘생명 파괴의 세계’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 웹진 <제3시대>

 

 

  1. 요시아 왕이 법을 반포할 때, 열 개 계율의 묶음인 ‘십계명’을 처음 반포하였다. 법은 문서 형식의 통치 체계를 수반하는 것인데, 대중은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대중에 대한 법의 통치를 실효성 있게 실현하기 위해 간명한 형태의 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본문으로]
  2. SF 영화의 고전인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는 안드로이드의 생명권 문제를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3. 교회의 자살 금지 교리는 자살한 자에 대한 야만적인 시신 훼손의 관행을 야기시켰다. 이에 대하여는 게르트 미슐러(Gerd Mischler)가 쓴 『자살의 문화사』를 보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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