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번에 완성된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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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들꽃향린교회 담임목사)

한사람의 죽음을 놓고 여러 가지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놓고도 정부는 “테러리스트다, 떼쓰는 폭도들이다.”고 한다. 그러나 그 가족들은 말도 안되는 모함이라는 것을 너무 잘안다. 고 이상림 씨는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계속 성경 필사를 하던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가족 모두가 그렇다. 다른 희생자들도 장사를 하거나 평범한 생활을 하던 시민들이었다. 벌써 두 달 넘게 가족들이 빈소를 지키면서 버티고 있다. 얼마나 힘이든가? 그런데도 가족들은 이대로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며 누구보다도 강경하다. 그들은 분명 죽음의 거룩한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무너질 수가 없다. 자기 부모들의 참 죽음의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가족들이 장례를 미루며 투쟁하는 것은 고인들의 명예회복이기도 하지만 고인들의  죽음이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이번 희생으로 나머지 재개발지구 세입자들이 다시는 이러한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 고인들의 희생을 모든 세입자들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위한 죽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죽음의 거룩한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지금의 지리한 싸움은 그 분들의 죽음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재개발이 진행되면 땅이나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세입자들이다. 그 지역은 상가라 대개 권리금이 따라 붙는다. 그리고 인테리어에도 적잖게 든 비용은 모두 무시된다. 단지 2천만원 정도의 이사비용만 지급된다. 그리고 가해지는 용역들의 무차별한 인간 모독과 폭력, 이런 것들이 세입자들이 처하게 되는 상황이다. 가족들은 정부가 발표하는 터무니없는 모함을 딛고 자신들의 부모와 남편의 죽음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예수가 단 한 번에 결정적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제거하신 제물이요 동시에 스스로의 몸을 제물로 드리신 대제사장이라고 한다.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의 죽음의 거룩한 의미를 찾았듯이 예수의 제자들, 가까이서 따르던 갈릴리 민중, 여인들은 예수에 대해서 덧 씌워진 죽음의 이유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민중을 선동하는 폭도, 정치적 정복을 꿈꾸는 유대인의 왕, 로마의 정치범, 신성모독자, 성전난동자.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의 죽음의 이유일 수 없다. 그들은 사랑하는 스승의 죽음의 참 이유를 찾아내야 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찾아낸 의미는 “단번에 모든 인류의 죄를 지신 분” 이었다.

예수께서 단번에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셨다는 말을 한국교회는 주술적으로 이해한다. 마치 주문처럼 이 사실을 시인하고, 고백하면 우리의 존재가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단번에 제물이 되신 예수의 신적 마술은 그 주문을 외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치 컴퓨터에 걸려있는 비밀번호처럼 새 일을 불러들이는 주문으로 작용한다. 예수의 십자가를 드리대면 하늘에서 신비한 변화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이런 천박함, 이런 맹랑함은 예수를 한낮 도깨비나 부뚜막 귀신 정도로 추락시킨다.

어떻게 한사람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죄를 도말할 수 있는가? 누가 반문할지 모른다. 왜 목사님은 모든 크리스천들이 자연스럽게 고백하고 믿는 바를 흔들어 놓으려고 하십니까? 바로 그 당연한 믿음 때문에 기독교는 역사하고는 상관없는 종교, 민중의 아픔과 무관한 종교, 한낮 종교로, 주술로, 자기 욕심을 합리화하고 극대화 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교회가 취해있는 그 주술의 요소를 거두어 내야지만 신앙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당시의 민중들은 예수가 가르치신 세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그들의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모두가 존중받는 나라, 걸인, 병자, 장애인, 이방인 차별로 한을 가졌던 모든 사람들이 당당한 주인으로 서는 나라, 다시는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는 나라, 그 꿈에 벅찼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나라를 펼치기 전에 그분은 당국에 의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죄 몫으로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예수가 가르쳐주신 그 나라는 아직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 나라는 자신들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 나라와 자신들의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있다. 그 갭이야 말로 바로 ‘죄’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분의 죽음이 단번에 모든 죄를 도말했다고 외치는 그 고백은 어떤 의미인가? 어떻게 해야 예수의 십자가가 거룩한 죽음이 되겠는가?
 
죽음 자체는 말이 없다. 더구나 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 어떤 메시지를 남길 여유가 없다. 그냥 억울함과 고통을 남기고 사라질 뿐이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천군천사가 하늘 문을 열고 내려와 개입하는 일은 없었다. 그냥 말없이 초라한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단번에 완전한 제물이었다고 하는 고백은 무엇인가?

그가 살아계실 때는 “그가 하려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셨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 앞에 서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죽음으로 그가 꿈꾸었던 세상이 끝장나 버린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들 안에 새롭게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죽음의 세력 앞에 타협하지 아니하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승리이고 단번에 완성된 것이다. 그들은 단번에 모든 악의 세력을 묶고 승리하신 결과를 본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에서 세상의 모든 눈물과 아픔이 단번에 완성된 제물로 드려지는 결정적인 제사를 본다.

그 제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동일한 아픔이 있는 현장에서 예수의 몸을 찢고 그의 피를 드리는 제사는 행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가인의 제사처럼 하나님께서 받으실지 아닐지 그 결과를 모르는 긴장된 제사는 아니다. 이미 단번에 결정적인 제사를 받으셨던 하나님의 판결이 선행된 제사일 뿐이다.

예수의 죽음 자체는 거룩하지 않다. 그냥 평범한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그 죽음의 거룩한 죽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 그 죽음 안에 숨어있는 거룩한 뜻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마치 아들, 딸의 구속을 통해 처음에는 망설이던 어머니들이 최고의 투사가 되는 것처럼 십자가는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주님의 십자가는 단번에 모든 인류가 가진 죄를 도말시키는 거룩한 죽음이 되게 해야 한다. 그분의 십자가는 세상 어디이든지 아픔이 있고 눈물이 있는 곳에 모든 아픔을 단번에 도말 시키는 거룩한 제사로 기능하게 해야 한다. 십자가는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행렬이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이 능동과 수동은 도치된다. 우리가 그의 죽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피로 백성들을 거룩하게 만드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힘입을 뿐이다. 신앙의 능동이 빠지면 한낮 주술이 되지만, 수동이 빠지면 그것은 단지 제 자랑일 뿐, 신앙이 되지 못한다. 히브리서는 단번에 완성된 제사를 말하지만 마지막 장 결론 부분에서 주님께서 완성하신 제사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우리들이 드리는 찬양의 제사로 마감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실상 우리에게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립시다. 곧,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를 드립시다. 선행과 친교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히 1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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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름의 지옥과 천국 :  영화 <똥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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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
(영화 프로듀서, 감독)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가?

최근 독립 다큐멘터리 <워낭소리>가 300만 관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1억원에 못미치는 적은 예산으로 고군분투 제작된 <똥파리>라는 독립영화가 해외 영화제에서 연달아 최고상을 받으며 국내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런 유례 없는 성과는 현재 독립영화를 둘러싼 환경에 비추어 볼 때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여전히 극장을 확보하지 못해 개봉조차 할 수 없는 독립영화들도 많은데, MB정권하의 영화진흥위원회는 2009년 들어 '다양성영화 개봉지원사업' 마저 폐지하였다. 80년대 말 영화운동의 차원에서 처음 만들어진 ‘독립영화’라는 명칭은 이제 ‘다양성 영화’라는 신자유주의적 명칭 하에 비상업, 비주류, 저예산, 예술영화 등과 함께 두루뭉술하게 묶여져 불리고 있다. 독립영화제작지원 예산은 몇 년째 6억원으로 고정된 반면, 정부의 지원정책은 '영화산업'으로만 집중되고 있는 현실이다. 멀티플렉스에서의 무한경쟁이라는 배급구조 속에 독립영화가 놓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물론 독립영화 역시 상업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독립영화는 상업영화와는 달리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국가 이데올로기로부터의 독립, 산업으로부터의 독립 등을 기반으로 하기에 그 기획과 제작, 유통의 과정이 차별적이고 보호되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불편한 영화, 똥파리

독립영화는 관객에게 불편하다. 거친 화면, 지루한 전개는 독립영화 하면 늘상 떠오르는 이미지다. 한마디로 완성도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나처럼 영화를 제작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영화 그 자체보다도 영화를 만들어가는 현장의 총체적 모습까지 함께 읽혀 묘한 감흥을 일으키기도 한다. 상업영화를 볼 때는 제작사, 투자사의 입김이 감독의 초심을 어떻게 변질시켜 나갔는지, 감독이 어디쯤에서 타협했는지 읽힌다면, 저예산 독립영화를 볼 때는 서투른 아마추어리즘 속에서도 빛나는 주제의식을 발견하며 때로는 제작비의 곤궁함 속에서도 꿋꿋하게 완성해낸 감독의 뚝심을 읽을 때 박수를 쳐주고 싶은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영화 <똥파리>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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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영화 제작지원과 CJ-CGV 인디펜던트 프로모션 제작지원을 받아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스탭 전원의 노개런티에도 불구하고 막바지에서는 감독이 전세방을 빼 제작비로 써야 할 만큼 힘든 상황에서 완성되었다. 30여편의 독립 장,단편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이름을 먼저 알린 양익준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쓰고 연출함으로써 장편영화 감독이 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픽션이 가미되었지만 자신의 문제, 자신의 가족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독하다. <똥파리>의 주인공 상훈을 꼭 양익준 감독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웬만한 용기가 없이는 힘든 일이다.

글쓰기든, 영화 만들기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정신분석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분석가는 작가가 될 것이고, 분석주체(환자)는 주인공이 될 것이다. 그 분석가는 제대로 기능을 못할 수도 있다. 작가이자 배우로 이중의 역할을 한 양익준은 어떠했는가?

주인공 상훈은 똥파리다. 더러운 똥을 먹고 사는 똥파리로서 그는 용역업체에서 일한다. 용역업체에서 하는 일이란 사채 빌려쓴 사람 찾아가 온갖 협박과 폭력으로 수금해오는 일, 노점상 철거 용역깡패, 대학에서 농성하는 학생들 구타하여 해산시키는 일 등 다양하다. 자본사회에서 누구나 그렇지만 그에게도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노동과 생산의 댓가로 주어지는 돈이 아닌, 내몰린 자들을 폭행하고 갈취하는 돈이기에 그 돈은 더러운 똥이 된다.

똥파리는 웽웽거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내듯이, 그의 언어의 대부분은 욕이다. 그는 좀체로 웃는 법이 없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으로 남자건 여자건 가리지 않고 욕과 함께 주먹이 나간다. 그에게는 법이 없다. 일정한 궤도 없이 요란스레 비행하는 똥파리다. 그의 욕설과 폭력 앞에서 수많은 약자들이 무릎을 꿇지만 그래봤자 똥파리의 운명이다. 파리 목숨이란 말이 있듯이 파리채 한 방이면 쭉 뻗어버리고 마는 신세. 그 똥파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죽기 위해서 그렇게 온 몸으로 절규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그것이 온통 자신을 옥죄고 있다. 술만 마시면 가정폭력을 일삼던 아버지, 그가 중학생 때 목격한 여동생과 어머니의 죽음. 그들은 가족 내 약자로서 폭력의 희생자이다. 그의 아버지가 살인죄로 15년 감옥살이를 한 기간은 그 소년이 성인이 되는 시간으로서, 영화 속에서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는 피해자, 희생자임에도 이 사회에서 아무런 보살핌 없이 성장하여 어떤 사유도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당한 폭력의 수행자로 자리바꿈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살았으나 죽은 거나 다름없는 존재인 늙고 힘없는 아버지를 ‘생각날 때마다’ 찾아가 짓밟는 게 일상이 되었다.

루이 알튀세는 근대 이전과 이후 공히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로서 ‘가족’을 들고 있다. 가족이란 인간들 사이의 가장 원시적인 위계질서가 성립되는 곳이다. 가족적 질서란 인간만이 만들 수 있는 독특한 질서로 동물적 야만성을 ‘인륜’으로 배우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훈의 가족은 그 위계질서마저 무너져 있다. 그의 상징계는 일찍이 붕괴된 셈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괴로워하는 건 여전히 눈 앞에서 현존하는 아버지의 존재다.

용역업체 사장이기도 한 친구 만식은 “이런 말하면 뭐하지만 어쨌건 하나 남은 피붙이 아니냐? 나 같은 고아새끼는 그런 아버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잘해드려 임마!” 라고 말하며 아버지에게 갖다드리라고 돈을 쥐어주곤 한다. 그럴 때마다 상훈은 냉소하며 아버지에게 찾아가 보란 듯이 짓밟아버린다. 그리고 절규한다. “왜 그랬어! 왜 그랬냐구! 왜 그랬어?” 상훈은 결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똥파리로 살아가는 지금의 상훈에게 그런 아버지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자살하려고 손목을 긋고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병원으로 업고 가며 “죽지 마...지금 죽으면 안 돼..지금 죽으면...난...뭔데? 난 왜 이렇게 산 건데?” 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리고 만식의 말대로 하나 뿐인 피붙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피를 나누어 살리고 나서, 비로소 새로운 삶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똥파리로 살아가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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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에게 지옥이었던 가족이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천국으로서의 가족을 꿈꾸어 왔다. 그 구성원은 상훈과 마찬가지로 가정폭력의 상처를 안고 있는 자들이다. 혼자 예닐곱살 된 아들을 키우며 힘겹게 살고 있는 이복 누나와 어린 조카, 그리고 알 수 없는 동질감 속에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여고생 연희. 상훈은 꼬마 조카에게 찾아가 자기 나름대로의 아빠 역할을 해주곤 한다. 연희와 꼬마 조카와 함께 맘껏 웃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그는 천국 같은 가족을 경험한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이런 환상 속에서 미소 짓는다. 거기엔 누나와 조카, 연희, 그리고 상훈을 따라 용역업체를 접고 식당을 차린 친구 만식이 새로운 가족이 되어 함께 모여 있는 모습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어머니와 제자를 새로운 가족으로 맺어주고 떠나듯이 말이다.

영화 <똥파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해자나 피해자나 할 것 없이 모두 이 사회의 희생자들이다. 인간적인 삶을 담보해주지 못하는 세상,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서로 물고 뜯기는 소외된 자들, 무력한 자들,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끝내 파리 목숨이 되어 죽고 마는 자들...모두 똥파리 같은 존재들이다. 사회가 변하지 않는 한 똥파리는 계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된 상처를 적극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억압적인 장치들에 대항하면서 진정으로 능동적인 주체로서 살아남아야 한다.

후일담이지만, 영화가 만들어진 후 불편했던 양익준 감독의 가족 관계가 좋아졌다고 한다. 자신의 실재와 맞닥뜨리는 고통스런 과정을 통과해낸 듯하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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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ineluna
    2009.03.24 11:5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된 상처를 적극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억압적인 장치들에 대항하면서 진정으로 능동적인 주체로서 살아남아야 한다...

    마지막 문단에서 힘을 얻고 갑니다.결국 자신의 문제는 자신의 몫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겠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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