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가이드19]



조르지오 아감벤 I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바울서신의 쟁점을 크게 두개로 나누어 본다면 하나는 구원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는 종말에 관한 것이 된다. 즉, 구원론과 종말론이다. 조르지오 아감벤은 바울서신을 메시아니즘을 중심으로 읽는 사람이기에 그에게 있어서 바울의 종말론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바울 이전시대에 있었던 유대 종말론을 메시아니즘을 통해 바울이 어떻게 재해석하느냐가 그 방점이 된다. 유대의 종말론은 신의 심판과 다스림이 현재의 역사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측면에서 바울을 이해하는 것은 이천년전이라면 모르겠으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매우 어려운 도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않는 재림의 그리스도를 포기하고 내세에 대한 소망을 신앙의 목표로 삼는다. 전통적인 바울의 종말론은 이 둘 사이에서 매우 애매한 입장을 취해왔다. 그 대표적인 이해가 바로 ‘이미’와 ‘아직’이란 도식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실히 ‘이미’ 시작되었고 그 완성은 ‘아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살고 있으며 여전히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지만 죽어서 가는 ‘천국’을 소망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에 몇가지 질문을 해보자. 첫째로, 곧 온다던 예수는 틀린 건가? 둘째로, 예수가 곧 온다던 바울은 틀린건가? 세째로 그들이 틀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나? 먼저 첫째와 둘째가 맞다고 한다면 일단 신학적 서술에서 종말론을 빼버려야한다. 바로 종말론이 없어도 제대로 설 수 있는 신학을 구성해야한다. 실제적으로 요즘의 신학은 구원론 중심의 신학이다. 특히나 바울의 신학이 ‘이신칭의’가 강조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일 수 있다. 또는 결국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도덕적인 삶의 추구에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와는 달리, 내세를 바라거나 메시아의 재림을 기리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을 딛고 서서 자신의 삶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학을 말할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 최근의 성서신학은 몇가지 논쟁점을 남겨놓았다. 먼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종말론적 표현들이나 재림에 대한 표현들이 실제로 ‘역사적 예수’의 말인지에 대해서 의심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들은 이러한 심판과 재림의 메세지가 예수의 부활 이후에 성립된 것이라 생각한다. 특별히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에게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신이 분부한 삶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이끈 혁명적 지도자로써 그려진다. 만약에 예수의 부활 이후에 성립된 것이 기독교의 종말론이라면 바울은 그러한 종말론을 구성한 일세대 신학자에 속하게 된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은 만약에 예수가 말한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소위 종말론이라는 것, 즉 그리스도 공동체의 종말론의 1세대 정도되는 종말론 또한 ‘이미’와 ‘아직’이라는 도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아감벤은 이에 대해 명확하게 바울의 메시아니즘의 정수는 메시아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는 가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 자체를 새롭게 이해하느냐에 있다고 말한다. 보통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계기라는 것을 상상하는 사람들은 새롭고도 보편적인 인간을 상상한다. ‘새시대 새일꾼’이라는 표현이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등은 이전의 역사를 끝마치고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 뭔가 새로운 인간을 꿈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감벤에게 중요한 것은, 또는 아감벤이 생각한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시대를 어떻게 끝마칠 수 있느냐이다.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끝마치지도 않고 어떻게 새로운 시대를 열수 있겠는가? 또는 이전의 시대를 맺음을 통해 완성시키는 것이 바로 새로운 시대 그 자체일 수는 없을까? 이를 맑스식으로 말하면 맑스가 꿈꾼것은 ‘새로운 계급’의 시대가 아니라 계급이 없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각주:1] 결국 핵심은 내가 무엇을 보고 어떤 사건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계를 인식하는 조건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바로 ‘구원’이 된다.[각주:2] 바로 메시아닉한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결국 주체가 새롭게 구축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 아니라 주체가 그 현재의 기반을 잃어버리는 방법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확보되는 것, 즉 “오로지 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구원을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각주:3] 아감벤은 바로 이러한 일이 부활을 통해 일어났다고 바울은 생각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하나님 나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되지 않는다.[각주:4] 이 세계의 개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 세계의 개념들을 하나님 나라와 대치시키며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바울은 메시아적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 두개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하나가 법이고 두번째가 시간이다. 지난 웹진에서 필자가 아펠레스와 포로토제네스의 이야기를 다룰 때, 바울이 어떻게 법이 분리시킨 유대인과 비유대인, 로마인과 비로마인의 분리를 어떻게 새로운 분리를 더함으로, 즉 육과 영으로 분리시켜 법자체를 정지시키는지를 논했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러한 바울의 논의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으로 이전것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것을 갈등의 극한으로 몰고감으로써 비판의 정점에서 반대로 완성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오랜 기간동안 바울서신에서 바울의 율법관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바울은 율법을 반대하는가? 그런데 왜 완성시킨다고 말하는가?(롬 10:4) 아감벤에 따르면 오로지 율법을 그 극한의 갈등으로 스스로 몰아넣어서 마지막에 율법을 완전히 무장해재 시키는 것이 바울이 바라보는 메시아닉한 관점에서는 완성이라고 보는 것이다.[각주:5]

    이후에 논하겠지만 이러한 방식은 알랜 바디우와 상극을 이루는 아감벤의 바울 읽기이다. 아감벤은 명확하게 바디우를 비판하는데, 아감벤은 ‘하나의 보편적인 생각이 어떻게 완전한 타자들의 기초위에서 동일성과 평등성을 나타낼수 있는지’ 의아해 한다.[각주:6] 바디우에게는 바울이 어떤 새로운 보편성을 더함으로 새로운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었다면 아감벤에게 바울은 ‘유대인’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로 묶이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법에 의해 생성된 아이덴티티는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포착할 수 없음을 말한다. 결국 법자체를 inoperative(활동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아감벤은 새로운 주체가 아니라 법이 중지되어, 그 어떤 주체적 정의에도 포함되지 않는 ‘남은 자’(Remnant)들이 바울에게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이 남은 자들은 “전체도 아니고 전체의 부분도 아니고, 부분이나 전체의 불가능성”을 나타낸다. 즉 모든 사람이나 민족들이 그 자신을 전체가 아니라 남은자로 놓는 것이다. [각주:7]예를 든다면 모든 사람들이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가 아니고 그 둘이 아닌 남은자가 될때 계급은 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아감벤의 논의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상상력을 제외하고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은 데리다의 논의를 바울로 이끌고 들어와 바울을 새롭게 해석하는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아감벤의 바울읽기는 그의 시간에 대한 개념에도 나타나있다. 아감벤이 말하는 바울의 메시아적 시간은 다음 웹진에서 논해보자.


참고도서

Agamben, Giorgio. The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6.


ⓒ 웹진 <제3시대>



  1.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31. [본문으로]
  2. Ibid., 41. [본문으로]
  3. Ibid., 42. [본문으로]
  4. Ibid., 43. [본문으로]
  5. Ibid., 48. [본문으로]
  6. Ibid., 52. [본문으로]
  7. Ibid., 5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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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8]



조르지오 아감벤 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1942년생, 이탈리아의 철학자, 그의 저서 [The State of Exception] (예외상태)와 [Homo Sacer] (호모 사케르)로 잘알려져있다. 삶정치(Biopolitics)의 개념을 중심으로 철학을 개진한다." 이 짧은 서론이 위키피디아에 나와있는 아감벤의 첫 소개이다. 위의 두 저서가 정치학, 사회학, 철학, 신학에 필수적으로 읽어야할 책으로 떠오르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과거에는 로마제국 현재에는 이탈리아의 신성으로 떠오른 학자의 이야기를 이제부터 하고자 한다. 필자는 신약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어서 그의 철학적 깊이를 쉽게 다룰수는 없지만 그의 바울에 관한 책 [The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남겨진 시간: 로마서 주석)을 중심으로 바울에 대한 그의 생각을 논할 것이다. 물론 점차적으로 그의 철학적 프로젝의 중심을 논하기도 할 것이다. 

   바로 [남겨진 시간]을 펴보자. 본 서는 쉽게 말하면 로마서 1장 1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따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개역개정)에 대한 길다면 긴 주석서이다. 원래 본문은 “Παῦλος δοῦλο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κλητὸς ἀπόστολος ἀφωρισμένος εἰς εὐαγγέλιον θεοῦ”이고 굳이 직역하자면 “바울, 그리스도 예수의 종, 사도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별된” 정도가 되겠다. 먼저 아감벤식으로 용어를 정리하자. 그리스도란 메시아에서 온 말로써 기본적으로 ‘기름부은 자’를 뜻한다. 그렇다면 처음 부분은 “바울, 메시아 예수의 종”이 된다. 아감벤은 본서 처음부터 기독교가 역사를 통해 이 메시아를 그리스도란 말과 분리해내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고 말한다. 이유는 여러가지이겠지만, 결국 로마서는 메시아 예수에 대한 소개이며 그러므로 ‘메시아적 텍스트’이다.[각주:1] 그리고 이 메시아 예수를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메시아의 시간, “time of the now”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시간적 개념으로 소개하는 세번의 표현 [τοῦ νῦν καιροῦ (8:18), τῷ νῦν καιρῷ (3:26), τῷ νῦν καιρῷ (11:5)]에서 아감벤이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하면 어느 광고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같은 ‘지금 이순간’이다.[각주:2] 결국 아감벤이 바울을 통해 메시아 예수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아사상의 핵심은 바로 메시아의 시간, 지금 이 순간이 어떤 의미를 말하는지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감벤의 시도가 필자에게는 매우 흥미로운데 바로 바울의 새관점주의 이후에 나타난 특정한 바울 해석에 대한 반론으로 읽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한 본 웹진의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필자는 소위 ‘바울의 새관점’을 설명하는데 상당 부분을 할애하였다. 그 이유는 새관점주의가 나타나면서 과거의 바울에 대한 설명이 그의 ‘이신칭의,’ 즉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중심으로 한 바울신학이 획기적인 전기를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율법을 벗어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닌 또 다른 바울 신학의 핵심, 즉 왜 바울이 그토록 열심히 에클레시아 (모임: 현재 ‘교회’로 번역되는)를 만들고 서신을 통해 신학적 진술을 했는지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고 하였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여러 바울신학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필자는 크게 바울신학의 ‘이신칭의’를 새롭게 해석한 제임스 던(James Dunn)이나 톰 라잇 (N. T. Wright)을 소개했고 다른 한편으로 바울의 종말론을 중심으로 놓은 알버트 슈바이쳐 (Albert Schweitzer)나 크리스쳔 베커(Christiaan Beker)를 소개하였다. 특히 던과 같은 학자는 바울의 주요 공격 대상은 유대교의 율법이 아니라 유대교의 민족적 우월감이라고 생각했고, 바울이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은 유대교의 아이텐티티 마커 (Identity Markers)라고 하였다. 즉 자신들의 다른 민족들보다 우월하게 만드는 특정한 전통이나 문화 (안식일, 음식법, 할례)가 절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구원의 지평과 동등될 수 없다고 바울이 목놓아 외쳤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바울의 신학의 핵심은 어떤 민족성이나 문화등으로 인류를 갈라놓는 모든 형식에 반대하면서 평등하고 선입견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보편적 공동체의 정초를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은 보편적 구원의 지평만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여러 인종적 갈등과 종교적 충돌을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아감벤의 대답은 단순하다. 바울은 어떠한 새로운 보편적 인간을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감벤은 바울이 말하는 메시아니즘, 즉 메시아적 시간론을 토대로 던의 방식이나 종말론적 방식으로 바울을 보지 않고 이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메시아론을 바울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리 말해두지만 아감벤에 따르면 바울에 대해 오로지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바울 이래로 아마도 딱 두명일텐데, 처음은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이고 그 다음은 바로 자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아감벤이 말하는 메시아적 시간이 도대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메시아적 시간, 남겨진 시간(The time that Remains)


    먼저 가장 쉽게 아감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예는 본서의 50–51페이지에 나오는 아펠레스와 포로토게네스의 일화이다. 둘다 헬라세계의 위대한 화가였는데, 프로토게네스가 아펠레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붓으로 더는 가늘게 그릴 수 없는 선을 그려놓았다. 프로토게네스가 떠난 이후 도착한 아펠레스는 이 선을 보고 자신의 붓을 들어 그 선의 중간을 가르는 더욱 가는 선을 그렸다. 즉, 더 가는 선을 그림으로써 이전의 선이 두개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감벤은 ‘아펠레스의 절단’ (The cut of Apelles)라고 부른다.[각주:3] 이 소개된 예화로 설명하자면 프로토게네스가 먼저 그린 선은 유대교의 율법이나 로마의 법이 만들어내는 구분선을 뜻한다. 갈라디어서 3장 28절에서 바울은 유대교와 그리스인들, 노예와 자유인들이 모두 구분없이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유대교와 그리스인을 분리하는 것이 바로 유대의 율법이고 노예와 자유인을 가르는 것이 로마의 법을 뜻한다.[각주:4] 즉, 당시 바울에게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법(Law)이였던 것이다. 바울의 서신에 반율법적인 시각이 있다면 바로 법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고 아감벤은 생각한다.[각주:5] (48) 결국 법은 나와 너를 나누고,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를 분리한다. 아감벤의 사상을 소개하는 다음편에서 법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 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펠레스의 절단’은 바로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법을 의미한다. 인간이 그릴수 있는 가장 가는 선의 구분 위에 그려 넣음으로 그 이전의 선이 가지는 의미를 무화시켜 버리는 선, 그것은 쉽게 말하면 바울이 스스로를 ‘메시아의 노예’라고 선언함으로 나타나는 효과와 같은 것인데, 아감벤은 바울에게 아펠레스의 선은 ‘육과 영’이라는 구분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은 다시 육체에 속한 유대인과 영에 속한 유대인으로 나누어지고, 이방인 또한 육에 속한 이방인과 영에 속한 이방인으로 나누어진다.[각주:6]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영에 속한 유대인과 영에 속한 이방인들을 합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자 함일까? 그렇지 않다. 여전히 영에 속한 유대인은 율법아래 매여있고, 영에 속한 이방인들도 로마의 법 아래에 매여있다. 바울이 육/영이라는 아펠레스의 절단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의 구절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아감벤은 말한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개역개정 고린도전서 9장 20–21절)  

    바울은 자신이 율법이 아니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이자, 그리스도의 율법 위에, 율법 없이 사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유대인/헬라인이라는 구도는 사라진다. 즉, 율법아래에 그러나 율법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율법과 법이라는 프로토게네스의 선의 가운데 육/영이라는 선을 그음으로써 그 선안에 나타나는 새로운 존재들, 즉, 남겨진 존재들을 말하고자하는 것이 바로 바울의 의도라는 것이다. 바로 존재들,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지만 이방인이 아닌 자들이 나타나는 시간이 바로 메시아의 시간이다. 다음 구절을 음미해보자.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이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 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개역개정 고린도전서 7장 29절–31절)   


    전도서 3장은 “모든 일에 다 때가 있다”고 하면서 태어날 때와 죽을때, 심을 때와 뽑을 때… 울 때와 웃을 때를 분리시킨다. 그러나 바울은 이 분리된 시간을 하나로 합친다. 바로 메시아적 시간이다. 바울은 “웃는 것처럼 울라”라고 하지 않는다.[각주:7] “마치 울지 않는 것처럼 울라”라고 말한다. 바로 이 “as if not”이 아감벤이 말하는 바울의 메시아적 시간에 일어나는 핵심적 사건이다. 바로 세상의 어떤 법도, 어떤 효과도 그 효력을 중지하는 시간(Inoperative time)이다. 그래서 바울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표현하는 그 표현은 바로 노예와 자유인을 분리하는 로마의 법을 중지시키는 효과를 낳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하는 유대의 율법의 효력을 소멸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을 소개할 때 ‘메시아의 노예’라는 표현은 바로 메시아적 소명 안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효과를 말하는 것이며 모든 법적 조건들이 변화를 맞이하는 순간을 표현한다.[각주:8] 그러므로 ‘부름받은’로 해석되는 클레토스 (κλητὸς)는 더 나아가 모든 소명받은 자들의 커뮤니티인 ekklesia (All Kleseis)로 명명되는 것이다.[각주:9] 바로 메시아적 시간에 메시아적 소명을 받은 새로운 공동체를 뜻한다고 아감벤은 설명한다.  

    그러므로 바울 신학의 핵심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 즉 그리스도 공동체를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전의 모든 정체성이 그 효력을 잃어버리는 시간, 메시아적 시간에 나타나는 메시아적 공동체를 말하고 있다. 다음 웹진에서는 이 메시아적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인지 왜 아감벤에게 현시대에서 이 메시아적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그토록 큰 의미를 가지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 웹진 <제3시대>


  1. Giorgio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1. [본문으로]
  2. Ibid., 2. [본문으로]
  3. Ibid., 50. [본문으로]
  4. Ibid., 13. [본문으로]
  5. Ibid., 48. [본문으로]
  6. Ibid., 51. [본문으로]
  7. Ibid., 23. [본문으로]
  8. Ibid., 13. [본문으로]
  9. Ibid., 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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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신학아카데미 탈/향 봄학기 개강


2009년 봄을 맞아 신학아카데미 탈/향을 개강합니다.

수강을 원하시는 분은 02-363-9190으로 연락하시거나, yminjung@chol.com으로 수강자 성함/연락처/송금자 이름를 적어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수강료를 입금하실 통장은 신한은행 110-233-305565 (예금주 : 김진호)입니다.

* 장소가 협소하기 때문에 수강신청을 미리 하지 않고 오시는 경우 수강이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강좌 하나
 바울과 현대 - 현대 철학과 현대 성서학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는 사도 바울 탄생 2000년을 기념해 우리신학연구소와 공동기획으로 바울을 인문사회학과 신학의 관점에서 조명하는 강좌를 마련하였습니다.

• 장   소 : 한백교회 (5호선 서대문역 1번출구, 우체국 신한은행 사이 골목 50m)
• 수강료 : 6강 6만원 (수강신청 ☎ 02-363-9190,
yminjung@chol.com)
              마지막 7강은 열린 토론회로 따로 참가비를 받지 않습니다.
• 일   정 : 2009년 4월 3일 ~ 5월 15일(매주 금요일) 저녁 7:30~9:30


      - 1강   4.3   박진우 (사도 바울과 현대사상 I : 벤야민, 바디우, 아감벤의 바울 독해)
      - 2강   4.10  박진우 (사도 바울과 현대사상 II : 벤야민, 바디우, 아감벤의 바울 독해)
      - 3강   4.17  한보희 (무신론적 기독교와당파적 보편성- 지젝의 바울 독해)
      - 4강   4.24  김학철 (전장: 1세기 그레코-로만 세계 제국의 ‘복음’과 변두리의 갱신운동)
      - 5강   5.1   김학철 (사도: 바울의 삶과 그의 복음 배경, 내용, 구조)
      - 6강   5.8   김학철 (승전보: 바울의 복음과 ‘다른 복음들’)
      - 7강   5.15  왜 바울인가?(인문학과 신학의 만남) - 열린 토론회

• 강사 소개
   - 박진우 : 커뮤니케이션 사회학 / 파리5대학 사회학 박사
                 조르조 아감벤 저 <호모 사케르> 역자.
   - 한보희 : 연세대 비교문학 강사, 당대비평 편집위원.
                 슬라보예 지젝 저,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역자.
   - 김학철 : 신약학 / 연세대 신학 박사.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신약분야 최우수논문상 수상. (주제 : 사도행전의 바울)

• 미리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는 자료
   - 1강 : 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새물결, 2008
   - 2강 : 조르조 아감벤, <남겨진 시간 :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강의>, 코나투스, 2008
   - 3강 : 슬라보예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길, 2007
   - 4강 : 슈테게만,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 동연, 2009
   - 5강 : 게리 윌스,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돋을새김, 2007
   - 6강 : 월터 윙크,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강좌 두울
 포스트 예수운동의 사회사 - 역사로 읽는 성서I

지난해 말 출판기념회로 소개해드린 바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를 토대로, 초기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를 사회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강좌입니다. 역사적 분석을 통해 그리스도교와 성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 교   재 : 에케하르트 슈테게만·볼프강 슈테게만 저,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동연, 2009)
• 장   소 : 한백교회 (5호선 서대문역 1번출구, 우체국 신한은행 사이 골목 50m)
• 수강료 : 8강 8만원 (수강신청 ☎ 02-363-9190,
yminjung@chol.com)
              (이 강좌는 회원강좌이므로 CMS 후원 신규 신청자와 기존 후원자는 무료입니다.)
• 일   정 : 2009년 3월 17일 ~ 5월 19일(매주 화요일) 저녁 7:30~9:30


       첫째 마당      3.17   1세기 지중해 연안의 경제와 사회
       둘째 마당      3.24   팔레스티나에서 유대교의 사회사, 그리고 예수 따름 (1)
         (휴강)        3.31          (휴강)
       셋째 마당      4.7     팔레스티나에서 유대교의 사회사, 그리고 예수 따름 (2)
       넷째 마당      4.14   팔레스티나에서 유대교의 사회사, 그리고 예수 따름 (3)
       다섯째 마당   4.21   로마제국 도시들 안에 있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 사회사 (1)
       여섯째 마당   4.28   로마제국 도시들 안에 있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 사회사 (2)
         (휴강)         5.5          (휴강)
       일곱째 마당   5.12   로마제국 도시들 안에 있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 사회사 (3)
       여덟째 마당   5.19   지중해 세계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여성의 역할과 사회적 상황
 
• 강 사 : 김진호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당대비평』편지주간, 한백교회 담임목사 역임
                       『예수의 독설』,『반신학의 미소』,『예수역사학』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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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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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09.03.31 06:0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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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과 21세기 사상가들과의 대화’는 현재 미국내 진보신학 진영 내부에서도 뜨거

    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는 이슈입니다. 20세기 사상계를 지배했던 일군의 프랑스 철

    학자들 (라깡, 알튀세, 들뢰즈, 레비나스, 데리다 등)이 사라진 지금, 그들의 대를

    잇는 바디유, 아감벤, 네그리, 지젝 등, 21세기 사상가들은 공히 기독교, 특히 바울

    에 주목합니다.

    특별히 미국 사상계 내에서는 Standford 대학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바울에 대한 현

    대사상가들의 해석을 꾸준히 생산해 내며 그 열기와 관심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요

    즘 많이 읽히는 바울과 현대사상과 관련한 서적중에서 대표적 저작이라 할 수 있

    는 바디우의 <St. Paul>, 아감벤의 <Time that remains>, 제닝슨의 <Reading

    Derrida/Thinking Paul>등이 모두 Standford 대학 출판사에서 시리즈물로 나온 작

    품들입니다.

    미국내 신학교 중에서는 제가 재학중인 시카고 신학교가 드물게 현대사상과 신학

    의 대화를 정식 학과목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단일 신학교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니

    체, 데리다, 맑스, 푸코, 레비나스, 지젝 등의 사상가들과 신학과의 대화를 도모하

    는 과목들이 개설됩니다.

    시카고 신학교에서 바디우와 아감벤, 지젝등 바울관련 이슈들을 다루는 과목은

    Marx class입니다. 지난 학기 <Reding Derrida/Thingking Paul>의 저자

    Jennings 교수님의 Marx class에 참여했는데 맑스의 저작들과 레닌의 저작들을

    읽고 나서, Post Marx에 관련된 독해를 David Harvey의 <condition of

    postmodernity>, 로쟈 룩셈베르그 <자본축적론>, 알튀세 <맑스를 위하여>, 데리

    다의 <맑스의 유령>, 그리고 바디우, 아감벤, 지젝 순으로 진행했는데, 그때 읽었

    던 책이 바디우의 <St, Paul> 과 아감벤의 <Time that remains>, 그리고

    <theology and Zizek>이라는 책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바울이 20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유령처럼 부활하여 담론의 중심에 서

    있는가? 작년 맑스세미나의 후반부 주제이기도합니다.

    지금의 상황을 20세기 말 포스트모더니즘의 광풍이 휘몰아친 이후 일체의 진리가

    상대화된 상황이고, 아울러 사회주의 붕괴 이후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

    료된, 오직 자본의 논리만이 보편적 질서로 자리 잡은 상황이라고 가정할 때, 이러

    한 극단적 상대주의와 극단적 보편주의 속에서 인류가 해방이라는 원칙과 그를 위

    한 혁명을 다시 사유할 수 있는가? 에 대한 바람에서 바울에 대한 독해는 다시 시

    작되고 있는 듯합니다. 다시 사건과 주체, 그리고 보편을 이야기 하면서 말입니

    다.


    저도 탈/향 강좌 <바울과 현대>에 참여해 배우고 싶어지는군요.

    나중에 자료 나오면 제게도 한부 보내주십시오.


    Peace


    시카고에서 이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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