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 선 사랑,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Amour, 2012)




이희승*



  영화 보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다음부터 종종 어떤 영화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물어보는 사람들의 시선 너머로 제 영화 취향을 통해 저라는 사람, 즉 제 소양과 인성, 그리고 세계관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을 봅니다. 새로 만난 연인들 사이에 ‘무슨 영화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이 빠지지 않는 것 또한 서로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상대방의 문화적 취향을 통해 알아보려는 의도가 다분하지요. 하물며 영화를 보는 취향으로도 그 사람의 됨됨이를 측량하는데, 영화를 만드는 취향이야말로 영화 만드는 이의 혼을 송두리째 보여주는 거울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애정과 존경, 그리고 경외심을 가지고 신작을 가급적 챙겨 보는 감독들 중 하나가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하엘 하네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감독”이라는 별칭이 있는 하네케 감독은, 처음 본 지가 거의 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제목을 떠올리면 등줄기가 오싹해 오는 ‘퍼니게임’(Funny Game, 1997)으로 기억되는, 잔혹할만치 냉철하게 사회와 인간의 본성을 카메라 앞에서 낱낱이 노출시켜 온 영화작가입니다. 그래서인지 2012년 유수의 국제영화제를 떠들썩하게 만든 하네케 감독의 신작 제목이 ‘아무르’ (Amour, 사랑)라는 소식을 접하고는 살짝 제 귀를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칠순을 넘겨도 사람이 쉽게 변하는 법은 없건만, 갑자기 왠 ‘사랑’ 영화를 만드셨을까?


  물론, 사랑만큼 예술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난해한 주제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일을 업으로 하는 정신분석가들 또한 이 ‘사랑’을 놓고 각자의 이론이 분분합니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아’에서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는 가장 흔한 예로써 사랑에 빠진 상태를 설명합니다. 사랑 앞에서는 서슬이 퍼런 자존심과 자의식도 무장해제를 당하고 만다는 낭만적인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마취를 당한 듯이 자아가 무방비 상태에 노출되는 심각한 위험을 두고 한 말이기도 하겠지요.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사랑이란 자기가 갖고 있지도 않은 무언가를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주는 것’이라고 기술합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자기 자신의 존재의 핵인 근원적인 결핍을 발견하고 그 공백을 서투르게 공유하는 관계가 사랑인 셈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완벽한 불완전함’을 상징하는 메타포라는 라캉의 정의를 읽을 때마다, 내 것도 아닌 것을 손에 쥐고는 ‘자, 이게 바로 네가 원하는 거야’라며 원하지도 않는 선물을 상대에게 들이미는 천진난만한 연인들이 가면으로 얼굴을 감추는 것도 모자라서 두 눈을 가리는 안대까지 쓰고서 사랑을 찾겠다고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세익스피어 풍의 코메디가 떠오릅니다. 연인 사이의 사랑 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메타포로 맺어진 모든 관계에서 우리는 라캉이 암시한 막막한 무지와 몰이해, 안타까운 오해와 그로 인한 불행한 폭력, 이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절박함과 그 절박함이 빚어낸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환상 혹은 허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조르주와 안느는 누구나 그렇듯, 다소 달뜨고 어설픈 연인으로 만나, 이제는 서로의 불완전함을 평화롭게 협주하는 지경에 이른 노부부입니다. 파리 한복판에 있는 고풍스런 아파트에서 우아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이 음악가 부부에게 죽음은 무자비하게 현관문 자물쇠를 비틀고 침입한 도둑처럼, 어느날 불쑥 모습을 드러냅니다. 매무새가 단정하고 고상한 취향과 애교있는 위트를 갖춘 아내 안느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뇌경색으로 노부부가 공유하던 고즈넉한 세계는 빠르게 관 속처럼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으로 조르주가 넋이 나간 아내를 발견하고 ‘왜 그래?’라고 물으며 황급히 안느의 촛점 잃은 시선속에서 평생을 함께한 명민한 아내를 되찾으려 애쓰는 장면에서 하네케 감독은 마치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어둠의 세밀한 깊이를 표현합니다. 빛의 화가라는 렘브란트의 그림들이 그 애칭이 무색하게 하나같이 어둠을 담은 것처럼, ‘사랑’이라는 촌스러우리만치 정직한 제목을 단 이 영화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사랑에 관한 센티멘탈리즘 따위는 깨끗하게 걷어내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애초부터 놓여 있던 플라톤의 동굴처럼 어두운 ‘공백’을 카메라 앞에 꺼내 놓습니다. 뺨이 붉고 머리채가 빛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찬란한 사랑의 대단원에서 안타까운 젊은 죽음이 비극의 화룡정점을 찍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이라면, 칠순을 넘긴 완벽주의자 하네케 감독이 제시하는 사랑의 해부도인 이 영화는 무표정한 안느의 텅빈 동공을 통해 사랑은 애초부터 누구나 생의 가운데 숙명처럼 품고 살아가는 불가지 혹은 죽음의 부분집합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굼뜨고 노쇠한 몸을 이끌고 조르주는 산 채로 죽음을 맞이하는 아내를 묵묵히 돌보기 시작합니다. 손 끝에서 섬세한 음악을 빚어 내던 피아니스트 안느가 가장 기본적인 신체 활동도 하지 못하고, ‘엄마’와 ‘아파’이외에는 자신을 표현할 언어조차 모두 잃어 버리게 되자, 조르주는 사랑하는 아내 안느의 이미지가 죽음으로 잔인하게 치환되는 과정을 손놓고 지켜 보는 고통을 마주합니다. 이제 말을 잃은 안느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이 삶인지 죽음인지, 조르주는 가늠할 수가 없게 됩니다. 아내의 남은 생을 사려깊게 마감해 주고 싶지만, 이제 안느의 죽음이 더이상 선택이 아닌 것처럼 자신의 죽음 역시 정해진 운명임을 깨닫기 시작하지요. 그 어떤 절망보다도 조르주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이 불가지한 죽음에 관한 해석이 온전히 자신의 책임으로 남겨 졌다는 사실입니다. 영화는 죽음에 갇힌 안느의 절망과 두 죽음을 혼자 처리해야 하는 조르주의 막막함을 공간의 제한과 관계의 단절로 표현합니다. 즉, 부부가 음악회에 참석하는 첫 장면을 제외하고는 빛과 소리 그리고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부부의 적막한 아파트에서 하네케 감독은 단 한발짝도 내딛지 않습니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이 둘다 유사 죽음에서 깨어나지만, 입구가 영원히 봉인된 무덤에 갇혀 늙어 죽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 주고야 말겠다는 괴상한 결의를 품은 듯이 말이죠. 역시 사람은 잘 변하지 않나 봅니다. 하네케 감독의 ‘사랑’의 비둘기는 ‘퍼니게임’의 달걀과 골프채처럼 트라우마를 남기고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다가갑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투명하게 존재하던 공백이 죽음이라는 실체가 되어 다가왔음을 깨닫는 그 순간, 조르주는 죽어가는 안느가 아니라 안느의 죽음을 끌어 안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 안에는 자신의 죽음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 들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떠난 후, 중년의 딸 에바가 텅빈 아파트를 돌아 보다가 아버지 조르주의 의자, 그 고뇌의 자리에 털썩 주저 앉습니다. 삶과 죽음의 연쇄고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요. 영화를 보고 온 밤, 음악회에서 돌아와 얼핏 죽음을 예감한 안느가 그랬듯이, 쉬 잠이 들지 못하고 침대에 앉아 잠든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습니다. 죽음을 전제로 유한한 생을 함께 하기로 한 나의 동지가 안쓰러워 이불을 살며시 덮어 주었더니 5초도 되지 않아 무심히 젖혀 버리더군요. 십오년을 함께 살고도 이순간 그가 이불을 덮고 싶은지, 젖히고 싶은지 알 수가 없는 게 사랑의 명확한 한계라고 지적하는 하네케의 냉정한 ‘아무르’는 만인에게 공평한 죽음 앞에서 함께 허둥거릴 누군가를 찾는 일이, 그리고 그 누군가가 될지도 모르는 타인을 측은히 여기는 것이 한없이 중하다는 사실 또한 역설하고 있는 듯 합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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