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민중신학 - 세계 신학자들, 안병무를 말하다

엮은이 : 김진호, 김영석 공편

펴낸날 : 2013년 10월 24일
페이지 : 416쪽
정  가 : 18,000원
펴낸곳 :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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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안병무를 말하다, 안병무가 말하다, 안병무를 통해 말하다

이 책은 안병무의 민중신학을 외국 (영어권) 독자들에게 알리고, 외국의 저명 신학자들로 하여금 안병무의 글을 읽게 하여 상호 대화를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김진호, 김영석이 기획하고 편저자 역할을 해 미국에서 먼저 출판되었다. 김진호는 안병무의 민중신학에 관한 모든 자료를 제공하고 본서에 수록될 안병무의 원고를 선별하는 작업에 책임을 맡았다. 또한 안병무의 ‘사랑받는 제자’로서, 그는 안병무 신학의 기원과 발전, 시기 구분에 따른 전환의 과정을 명료하게 설명해주는 안병무의 삶과 유산에 관해 시론적 논문(「안병무 해석학 시론」)을 집필했다. 김영석은 본서에 참여할 국제적인 학자들 및 기고자들을 확인하고 조직하면서, 출판사와 교신하는 일을 포함해, 국제 저자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작품을 감수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제1부는 ‘안병무의 민중신학에 대한 소개’이고, 제2부는 ‘선별된 안병무의 글들’이며, 제3부는 ‘안병무의 민중신학에 대한 비판적 응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서의 공동 편집자인 김진호는 제1부에서 안병무의 민중신학을 소개한다(「안병무 해석학 시론: ‘내면성의 발견’과 ‘민중적 타자성’ 개념을 중심으로」). 그는 이 논문에서 안병무의 민중신학의 탄생부터 완성에 이르는, 즉 민족적 민중의 개념에서 지구적 차원의 고난 받는 민중 개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타자성(otherness)의 발견을 통한 실존적 투쟁에서 성찰적 투쟁으로의 전환에 이르게 되는 그 모든 발전의 궤적을 쫒고 있다.

제2부에는 안병무의 글 가운데 선별해(「예수 사건의 전승 모체」, 「예수와 민중-마가복음을 중심으로」, 「민중신학-마가복음을 중심으로」, 「민족, 민중, 교회」) 수록했다. 이 글들은 모두 다른 목적을 가지고 각기 다른 시기에 작성되었다. 첫 번째 글인 「예수사건의 전승모체」에서 안병무는 이른바 “예수사건 전승의 전달자들”이라고 하는 독창적인 이론을 개척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오클로스 또는 민중에 의해 예수 사건의 진정한 이야기가 전달되었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글인 「예수와 민중-마가복음을 중심으로」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특히 마가복음에서 오클로스를 위한 예수의 사역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안병무에게 민중은 오클로스였고, 오클로스는 민중이었다. 세 번째 글로 선정된 「민중신학-마가복음을 중심으로」는 민중(오클로스)의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마가복음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네 번째 글인 「민족, 민중, 교회」는 민중이라는 개념, 즉 한국의 역사 속에서 소외되어왔던 고난의 담지자들을 다루면서, 민중을 국민이라는 정치적 개념에 가까운 민족과 구별하고 있다. 이 글들을 통하여 우리는 안병무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 그리고 어떠한 이유로 그런 글들을 쓰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신학자들, 안병무를 말하다

제3부에는 본서의 기고자들이 집필한 글 여덟 편이 수록되었다. 이 책은 오늘의 세계 속에서 안병무의 민중신학에 비판적으로 관여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편저자는 본서의 필자들을 위한 일련의 질문 지침을 마련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누가 오늘날의 오클로스(민중)인가?” “민중이 겪고 있는 다양한 측면의 고통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민중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공동체 내지는 사회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제1장 「민중, 흑인 대중, 전 지구적 명령: 누가복음 구원론의 해석학적 순환에 대한 흑인여성신학적 읽기」에서 미치 스미스(Mitzi Smith)는 한국 민중들의 경험 및 민중신학을 미국 흑인들의 경험 및 흑인신학과 비교하면서, 정의로운 공동체와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고 권리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안병무가 오클로스의 관점에서 마가복음을 해석한 것처럼, 스미스는 흑인 여성의 경험을 통해 누가복음을 독해하는 것이다. 스미스의 독특한 해석은 “구원론적 해석의 순환”(soteriological hermeneutical circle)이라는 말로 특징지어지는데, 이는 그녀가 “개인의 구원은 민중이나 사회와 떨어져 생각할 수 없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우리는 정의와 회복, 완전함을 위한 투쟁에서 민중과 연대하며 하느님과 일치하는 태도를 취하기를 요구받고 있다. 나는 민중이다. 민중은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제2장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땅 위에 사는 사람들”: 제국적 상황 속의 평범한 사람들」에서 그렉 캐리(Greg Carey)는 신약성서의 유일한 묵시문학인 요한계시록이 어떤 방식으로 “예수에 대한 증언과 로마의 제국 종교에 대한 충성 사이의 갈등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탐구한다. 안병무의 연구에서 민중이 예수 사건의 참여 주체이자 조건 없이 예수의 사랑과 지지를 받는 대상이었던 것에 반해, 캐리의 연구는 군중들(요한계시록의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로마제국 치하에서 압박당하고 있었으며, 국가권력의 후원 아래 생존하고 성장해야 했기 때문에, 그 짐승의 행위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캐리는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제국주의와 식민지배로 얼룩진 상황 속에서 민중은 균질한 집단으로 범주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이 드러내주듯이 억압적인 상황이 평범한 사람들을 서로 대적하게끔 분열시킨다.”

제3장 「양가성, 모방, 그리고 마가복음의 오클로스 : 안병무의 민중신학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비평」에서 데이비드 아더 산체스(David Arthur Sanchez)는 포스트식민주의 비평의 관점에서 안병무의 민중신학을 독해한다. 한편에서 산체스는 날카로운 분석과 마가복음의 오클로스에 대한 재상황화(recontextualization)의 측면에서 동시대의 해방신학에 대한 안병무의 독창적인 기여를 높이 평가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포스트식민주의 비평에서 종종 사용되는 개념인 모방과 양가성의 렌즈를 통해 안병무의 오클로스 해석을 보완한다. 안병무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오클로스들(갈릴리의 오클로스와 예루살렘의 오클로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에게 등을 돌린 예루살렘의 군중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데 비해, 산체스는 갈릴리와 예루살렘의 오클로스가 서로 다른 두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적절하게 추론하고 있다. 즉, 갈릴리의 군중들이 예루살렘의 군중들로 전환된 것이며, 그래서 지금은 제국의 중심적인 도시, 즉 권력과 사람과 정치가 섞이면서 재조정되는 예루살렘에서 마치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산체스는 어떠한 신학적 담론도 군중의 변덕스러운 본성을 좀처럼 부인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신학의 과업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어떤 한 종류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및 정치와의 부단한 협상과 관련된 ‘정치적’ 인간성의 그 양가적 본질, 바로 그것과 계속해서 대결하는 것임을 강하게 환기시키고 있다.

제4장 「정의로운 평화의 자유 : 현재의 에큐메니컬 담론을 위한, 민중신학 다시 보기」에서 페르난도 엔스(Fernando Enns)는 독일 교회의 맥락에서 안병무의 오클로스?민중신학이 여전히 유용하다는 점을 다룬다. 평화와 정의를 위한 교회일치운동의 전 세계적인 협력 활동에 깊이 관여해온 엔스는 마가복음 안에서 오클로스의 착상에 관한 안병무의 놀라운 통찰을 받아들이고, 오클로스라고 하는 동일한 개념을 독일의 상황과 그 외의 다른 곳에까지 적용한다. 그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평화와 정의를 여전히 필요로 하는 오클로스를 위하여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노력해줄 것을 간청한다. 엔스 역시 민중의 목소리를 강조한다.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자, 자유와 정의를 위한 운동의 적극적인 참가자들이다. 그는 또한 예수가 설교했던 복음의 관점에서, 그저 단순히 소외된 이들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을 위하여 민중으로서 죽은 예수처럼 교회가 소외된 이들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민중의 투쟁에서 교회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한 가지 조건은 그 교회들이 가장 무능한 이들과 같이 소외된, 그럼에도 여전히 인민들의 투쟁을 포용하면서 에큐메니컬의 공간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민중 교회들이라는 사실인 것 같다.”

제5장 「민중신학과 세계 평화 만들기 : 갈릴리에서 한국의 기지촌까지」에서 배근주(Keun-joo Christine Pae)는 한국과 여러 다른 나라들에 존재하는 미군기지 주변의 기지촌 여성들(소위 ‘양공주들’)을 위하여 민중신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탐구한다. 배근주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기지촌 여성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군사화된 미 제국주의”의 문제를 지적한다. 배근주에 따르면, “기지촌은 이러한 분노가 가장 첨예하게 가시화된 곳으로, 미군과 지역민 간의 갈등이 폭력으로 불거지기도 한다. 동시에 기지촌은 한국과 미국 사이에 임의로 설정된 경계 지대이기도 하다. 이곳은 제3의 공간 혹은 혼종 공간으로, 미군의 제국주의와 한국의 민족주의 양자에 의해 억압적인 구조가 유지되는 곳이다.” 배근주는 이렇게 폭력에 노출된, 가장 소외된 여성들을 대변하고, 나아가 군사주의가 아닌 이 모든 억압적 권력들에 맞서는 비폭력 저항을 통해 지구적 차원의 평화를 추구한다.

제6장 「“만일 우리가 지옥에 떨어진다면 예수님이 구해주시겠지”: 민중신학과 이반 운동」에서 조민아(Minah Cho)는 한국의 성적 소수자들, 이른바 LGBQT(Lesbian, Gay, Bisexual, Queer, Transgender/Transsexual) 공동체에 관한 쟁점을 다루면서, 반(反)동성애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 도전하는 성적 소수자들의 운동으로 이해되는 이반 운동과 민중신학이 소외된 이들을 위한 자유와 정의의 투쟁에서 어떻게 협력할 수 있을지를 탐구한다. 조민아는 “이반들에 관한 유언비어에 의해 창조된 담론의 공간”을 검토하면서, 어떻게 “잘못된 유언비어들이 근본주의자들의 수사에 감추어진 균열과 간극을 드러내며, 그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다른 방법으로 대항?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는지”를 제시한다. “다양한 견해들과 경험들이 융합되고 동화되는 가운데 진리가 해체 및 재구성되고 있는 그러한 과정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끄는 유언비어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조민아는 한국의 지배적인 동성애혐오의 유언비어를 폭로한다.

제7장 「오클로스와 ‘비참의 현상학’-오늘의 오클로스를 묻다」에서 김진호는 안병무의 민중신학에 나타난 오클로스―한국과 그 밖의 다른 곳에 사는 무력한 사람들의 무리―와 관련되어 있는 고통의 개념을 주목한다. 오클로스에 관한 김진호의 독해는 안병무의 오클로스론보다 훨씬 파악하기 어려운 것인데, 김진호가 주장하고 있듯이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복잡한 고통의 요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그가 고통보다는 ‘비참’(wretchedness)이란 표현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이 부분이 김진호가 서남동의 한(恨)의 신학에서 중대한 가치를 발견한 지점인데, 그것은 바로 고통 또는 한이라고 하는 것이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강조한다. 서남동에 따르면, 한은 “하늘에 호소하는 억울함의 소리, 무명(無名)의, 무고(無告)의 소리”를 의미하는 한국적 용어이다. 따라서 김진호는 한의 개념이 오클로스 또는 민중의 투쟁 속에서 명백해질 수 있기 때문에, 오클로스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한에 기초한 서남동의 민중신학과 더불어 가장 잘 이해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제8장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이다”: 민중신학적 관점의 주체성 탐구」에서 황용연은 한국에서의 민중신학의 역사를 다루고, 나아가 민중이 변혁의 행위주체로서 할 수 있는 것과 민중신학자들이 계속 발전 중인 복잡한 사회―1960~1970년대와 비교했을 때 외관상 매우 다른 환경으로 보이는―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민중 개념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고 있긴 하지만, 황용연은 민중이 변혁의 ‘행위주체’(agent)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민중이 무력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강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설적인 진술이지만, 시사점은 자유와 정의의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그들의 경험으로 인해 민중이 억압적인 권력에 굴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고통 때문에, 민중은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즉, 그들의 한 맺힌 고통이 민중을 위한 변혁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진호가 그의 글에서 고통의 현상학에 관해 유사하게 진술한 것처럼, 황용연 역시 민중신학자의 과제는 민중을 규정하거나 지도하는 것이라기보다 그들의 투쟁과 고통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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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3.10.24 20:2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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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한 작업이었을텐데 노고에 박수를 보냅니다. 미국 신학교육의 장에서 민중신학에 대해 언급할때 다루는 text 가 CCA에서 30년도 훨씬 전에 출판된 minjung theology가 유일했었는데, 이번에 출판된 책 덕분에 약간 큰소리 칠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쁩니다. 미국에서 3rd world Perspective를 갖고 신학하는 친구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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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여! 다시 한번
―『이야기의 철학』 노에 게이치 지음, 김영주 옮김(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9)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1. 다시 보는 안병무의 ‘이야기구원론’



일찍이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예수사건의 전승모체」(1984. 10)에서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전승주체와는 달리 (현존하는 마르코복음의 원자료가 되는) 예수사건전승의 모체(母體)가 오클로스(οχλος) 곧 민중이며, 이들이 사용한 전달의 방식은 변증이나 논증의 언어가 아닌, 이야기 곧 유언비어의 형태였다는 놀라운 가설을 제기한 바 있다.

물론 이러한 안병무의 논의의 출발점에는 마르코복음이라고 하는 텍스트가 글이 된 것은 어느 작가(혹은 공동체)의 창작물이거나 독자적인 기록물이 아니라, 이미 민중들 가운데서 오랜 기간 구전(口傳)되던 민중의 이야기가 채록된, 이른바 ‘구술문학(oral literature)적 텍스트’라고 보는 견해가 확고하게 존재한다. 그런데 1960년대 초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에게 영향을 받은 미디어 생태주의자 월터 옹(Walter J. Ong)이 성서텍스트의 구술성에 대해 주목할 만한 논지를 편 이후, 서구 신약학계에서는 베르너 켈버(Werner Kelber), 조안나 듀이(Joanna Dewey), 데이빗 로즈(David Rhoads), 피터 보싸(Pieter Botha), 크리스토퍼 브라이언(Christopher Bryan) 등이 1980-90년대에 마르코복음의 구술성과 기술성에 관한 중요한 연구들을 제출하였다.[각주:1]

마르코복음이 독자(reading audience)가 아니라 청중(listening audience)을 위해 쓰인 텍스트, 즉 글을 읽을 줄 아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앞(예를 들어 시장 바닥이나 저녁 모임, 혹은 회당 모임 자리)에서 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낭독하기 위하여 만든 구술문학의 일종으로서, 현장에서 연행을 통해 드러나는 시학적 요소들을 강하게 담지하고 있는 텍스트라는 주장은 현재 신약학계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클로스를 통해 마르코에게 전승된 예수전승의 형식적 특징이 이야기체 더 정확히 말해 유언비어였다는 안병무의 통찰이 갖는 중요한 함의는 예수 사후에 민중들에게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 사건의 실질적인 중심에는 하느님/예수의 초월적인 역사하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의 오클로스들이 그들 당대의 고난 속에서 과거 예수와 함께 경험했던 사건과 그의 말씀들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데서 찾아진다. 이를 ‘이야기구원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통한 구원사건의 추체험(追體驗)은 민중이 예수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때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안병무가 제시한 마르코복음의 이야기구원론은 ‘예수사건은 후대에 어떻게 역사화되었는가’ 나아가 ‘성서는 어떻게 쓰여졌는가’라는 신학적·역사학적 질문에 대한 훌륭한 답변이 된다. 안병무는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사건에 관한 역사적 보고들을 절대불변의 객관적인 것이 아니며, 오클로스를 위시한 원시그리스도교운동의 지지자들이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라는 무수한 시선의 복합체, 즉 ‘이야기의 집성’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구원사건의 이야기론에는 이미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기초로 성립된 종래의 서구 근대 역사비평학의 인식론적 한계를 뛰어넘는 이른바 ‘이야기로서의 역사’, 혹은 ‘역사로서의 이야기론’이 내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안병무는 현존하는 마르코복음의 텍스트 안에서 예수 말의 주된 청중이자, 기적의 목격자 또는 수혜자이며, 나아가 하느님나라 선포의 수혜자로 그려지는 그 무명의 사람들 곧 오클로스들이 최초 예수사건의 담지자이자 마르코복음의 저자에게 예수사건을 전승한 전달자이며, 마르코적인 해석자였다는 주장을 통해 복음서에 관한 새로운 역사학을 썼다. 마르코복음서의 예수 전승이 유언비어의 형식을 띠고 있었으리라는 그의 통찰이 갖는 문제의식의 핵심은 전승의 내용과 성격이 전승집단의 정치적 조건 및 실존적 상황을 강하게 반영하여 재구성된 기억일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1980년 광주’의 기억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는지를 보면서 안병무는 유언비어라는 예수 이야기의 전승을 착안했던 것인데, 이와 유사하게 예수 수난사 전승 속에는 예수 사후에 예수의 민중들이 경험했던 당대의 실존적인 상황이 반영되어 예수의 수난에 대한 공감적 기억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평화적인 갈릴래아 시대에도 예수는 활동의 초창기부터 적대자들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서술된 것(마르코 3, 6)은 저들의 실존적 상황을 노출한 것이며, 바로 그런 상황의 유사성이 저들에게 큰 공감을 일으켰고 위로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수난이야기는 유언비어로 활성화될 수 있었다.

이렇게 예수의 민중들이 예수를 공감적으로 기억했다는 것은, 그 기억의 내용 안에 ‘기억되는 예수’만 있는 게 아니라, ‘기억하는 이들의 현재 삶’이 들어 있다는 것으로서, 기억은 기억하는 이와 기억되는 이의 소통의 결과가 되는 셈이다. 기억하는 이들이 오클로스이고 이들의 공감 아래서 유언비어 형식으로 마르코복음의 저자에게로 예수 이야기가 전달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 사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계층적·민족적 좌절의 구조와 그것을 탈출하려는 계층적·민족주의적 욕망과 꿈이 예수를 이해하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각주:2]


2. 안병무와 더불어 노에 게이치를!



이상에서 검토한 대로 「예수사건의 전승모체」를 통해 드러난 안병무의 ‘이야기구원론’ 및 ‘이야기역사론’을 관통하는 핵심에 ‘이야기’의 개념이 존재한다. 주지하다시피 ‘이야기’라고 하는 개념은 안병무 뿐만이 아니라 서남동이나 김용복 같은 다른 민중신학자들에게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이다.[각주:3]

민중신학의 이야기 개념을 다듬어 나가는 데 참조할만한 유용한 책이 최근에 번역 출간되었다. 일본의 저명한 과학철학자 노에 게이치가 쓴 『이야기의 철학』이 그것인데, 이 책은 과학철학을 중심으로 언어철학, 현상학, 해석학, 역사철학 등의 광범위한 분야를 넘나들면서 이른바 ‘이야기로서의 역사’ 혹은 ‘역사로서의 이야기론’를 펼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인간을 ‘이야기하는 동물’ 또는 ‘이야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인간의 ‘이야기하기’ 행위가 멈추지 않는 한, 역사에는 ‘완결’도 ‘종언’도 있을 수 없다라고 하는 수정된 역사철학의 명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발표한 「역사는 끝났는가」(『내셔널 인터레스트』, 1989)라는 논문을 출발점으로 하여, ‘역사의 종언’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 벌어졌었다. 이 논문에서 후쿠야마는 ‘대문자의 역사History’는 종언됐다고 선언한다. 지금까지는 기원과 텔로스를 갖는 역사관이 지배해왔다. 그리스도교적 사상에 근거해 천지창조에서 구원의 완성까지를 그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나라’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시작과 끝을 갖는 유럽적 역사철학이 주도해왔던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렇게 ‘대문자의 역사’의 허구성이 밝혀진 지금, 역사는 무엇인지,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답변을 역사기술에서 ‘이야기의 복권’을 촉구하는 데서 찾고 있다. 대문자의 ‘역사’가 종언을 고한 이후 ‘기원과 텔로스의 부재’라는 황량 장소에 서 있는 지금 이 시점이야말로 ‘이야기하기’라고 하는 언어행위를 통해 역사를 내재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역사와 이야기는 결코 대립하는 관계에 있지 않다. 역사적인 기억 없이는, 즉 이야기되거나 쓰여진 기억 없이는 실재적 역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3). ‘이야기하다’ 또는 ‘쓰다’라는 인간적 행위에 의해 비로소 실재적 역사가 성립한다. 그 ‘이야기하다’라는 행위를 ‘이야기행위’라고 부른다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이야기행위를 통해 인간적 시간 속으로 포함되어 역사적 사건으로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eve)의 “‘역사’는 인간의 기억에 근거해서 이야기되는 내용 속에서만 존재한다”라고 하는 『헤겔 독해 입문』(Introduction to the Reading of Hegel)의 한 문장을 실마리로 삼아 논의를 펼쳐나간다.

저자가 제기하는 이야기의 역사론 혹은 역사로서의 이야기론이 안병무의 예수역사학에 던져주는 해석의 빛을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과거의 사건이나 사실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기’를 통해 해석학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역사의 반(反)실재론). 역사과정의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의 시점으로부터는, 기억을 통해 ‘세계를 지금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이외의 방법이 없다. 해석학적 재구성 이전의 조작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과거 즉 초월적인 ‘과거자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망상이다. 기독교신학에서 이러한 초월적인 과거자체의 자리에 놓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양식사비평이 발견해낸 케리그마일 것이다. 케리그마는 공관복음의 모든 예수 기억을 케리그마의 시각에서 처리해버림으로써 예수사건의 역사성을 탈각시켜버렸다. 태초에 케리그마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태초에 예수사건이 있었다고 하는 안병무의 유명한 테제를 떠올려보라.

둘째, 역사적 사건(Geschichte)과 역사서술(Historie)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전자는 후자의 문맥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역사의 현상주의). 역사는 사건임과 동시에 역사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인데, 결국 역사적인 이야기는 실제의 역사적 행위나 사건과 동시에 나타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경험적 공감에 의해 예수에 대한 기억이 재구성될 수 있었다고 하는 안병무의 마르코복음 형성론에 이미 이러한 역사의 현상주의가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 역사서술은 기억의 ‘공동화’와 ‘구조화’를 실현하는 언어적 제작(Poiesis)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결국 ‘인간은 과거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로 바꿀 수 있을 텐데, 마르코복음 연구를 통해 안병무 역시 역사란 결국 ‘기억하는 것’(상기)에 다름 아님을 갈파했다고 볼 수 있다. 노에 게이치의 주장대로, 과거는 ‘상기(想起)’라는 경험양식을 떠나서 독립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상기는 단순히 과거를 한 번 더 지각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경험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경험들과 결합되고 구조화, 공동화되어 기억된다. 기억되고 상기되는 것은, 정확하게 재현된 과거가 아니라 해석학적 변형과 해석학적 재구성이 이루어진 과거인 것이다.

넷째,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축적된다.” 다시 말해 과거는 기억되어 현재 경험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습관이 되어 현재의 행동을 제약하고 가능하게 해준다. 그렇기에 역사는 언제나 미완결이며, 어떠한 역사서술도 개정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역사의 전체론).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역사의 수행론(Pragmatics)). 역사적 사건과 역사서술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통일성이 우리의 언어행위로 뒷받침되고 있다면, 역사인식에 있어 우리가 ‘이야기’의 외부에 위치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외부로 나아간다는 것은 곧 시간의 영역 밖에 위치하는 것으로, 그것은 신과 같은 ‘초월적인 시선’에 위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결국 이것은 민(民)의 이야기에 의해 쓰여진 역사는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대로 노에 게이치의 『이야기의 철학』은 민중신학의 이야기론이 이룩한 인식론적 성과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유용한 책이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비교적 평이하게 쓰여진 책이니 만큼 민중신학 저작들과 함께 놓고 읽어 나가면 독자들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적지 않으리라 기대한다. ⓒ 웹진 <제3시대>


  1. Werner Kelber, <EM>Oral and Written Gospel: The Hermeneutics of Speaking and Writing in the Synoptic Tradition, Mark, Paul, and Q</EM>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Joanna Dewey, “Oral methods of structuring narrative in Mark”, <EM>Interpretation</EM> 43(1989) 32-44와 “The Gospel of Mark as Oral-Aural Event: Implications for Interpretation", in E. McKnight and E. S. Malbon (ed), <EM>New Literary Criticism and the New Testament</EM>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4), 145-163; David Rhoads, “Performing the gospel of Mark”, in Björn Krondorfer (ed), <EM>Body and Bible: interpreting and experiencing biblical narratives</EM> (Philadelphia : Trinity Press, 1992); P. J. J. Botha, “Mark's Story as Oral Traditional Literature: Rethinking the Transmission of Some Traditions about Jesus”, <EM>Hervormde Teologiese Studies</EM> 47(1991) 304-331; Christopher Bryan, <EM>Preface to Mark: Notes on the Gospel in Its Literary and Cultural Settings</E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참조. [본문으로]
  2. 김진호, 「이름을 불러주기까지 그들은 ‘꽃’이 아니었다―안병무의 ‘오클로스론’ 다시 읽기」, 김진호 외.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 (서울: 삼인, 2006) 96-97 참조. [본문으로]
  3. 서남동의 경우는 『민중신학의 탐구』에 수록된 「두 이야기의 합류」, 「민담에 관한 脫神學的 고찰」, 「민담의 신학-反神學」에서 ‘이야기’를 독자적인 민중신학의 주제로 다루고 있고, 김용복은 『한국민중의 사회전기: 민족의 현실과 기독교운동』에 수록된 ‘민중의 사회전기’를 주제로 한 몇 편의 글들에서 사회사적 의미로 확대된 이야기 개념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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