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우리의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 주간)

 


   “세월호 얘기, 혹시 지겨우십니까? 지겹다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직도 ‘왜?’라는 질문은 넘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배가 왜 침몰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9월 24일)이 벌써 162일째인데도 말이지요. 지겨워도 직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세월호 사고 당일로 돌아가봅니다…” _손석희, JTBC 뉴스 2014년 9월 24일 오프닝 멘트 중


안티고네를 소환하며


    오늘은 위의 손석희 멘트가 있었던 날로부터도 2년 반 가까이 흐른 날이고, 이제 2주후면 우리는 세월호 3주기를 맞는다. 문득 지난 3년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믿기지 않았던 세월호 침몰과 더 믿기지 않았던 구조과정들, 구원파를 끌어들여 사건 초기에 문제의 핵심을 호도했던 일, 세월호 유가족들의 애끓는 절규와 대통령의 눈물. 유민 아빠 김영호 씨의 목숨을 건 단식, 인상 깊었던 교황의 방한,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되었다는 뉴스, 서울서 팽목항까지 세월호 인양을 위한 도보 행진, 팽목항에서 서울까지 유가족들의 삼보일배, 무의미했던 세월호 청문회, 대통령의 사라진 세월호 7시간, 대통령 탄핵 가결과 인용, 그리고 지난주에 있었던 세월호 인양 소식까지, 이상은 지난 3년간 세월호와 관련하여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굵직한 제목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3년이 지나도록 이 배가 왜 침몰했는지조차 모른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나지지 않았을 때 어느 문인(文人)은“어떤 경우에도 진실은 먼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며 정당한 슬픔은 합당한 이유 없이 눈물을 그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각주:2]글을 쓰겠노라고 밝혔다. 그이의 다짐을 접하고 윤리학자로서 떠올랐던 단어가 진실과 애도다. 윤리는 진실의 윤리학이어야 하고, 윤리는 또한 애도의 윤리학이어야 맞다.

   졸고는 안티고네의 애도를 향한 정신분석학적 접근, 그리고 정신분석학의 윤리에 대한 글이고, 그 윤리가 어떻게 현실의 불합리한 질서를 전복시키는 기제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상상이다. 안티고네의 폴리네이케스를 향한 애도는 진실을 향한 투쟁이었고, 그녀의 행보는 시스템의 안녕과 평화를 추구했던 전통적인 윤리학의 지형에 대혼란을 초래하였다. 나는 안티고네의 파국을 지향하는 윤리가 어쩌면 뒤틀리고 왜곡되고 변태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21세기 시민들이 지녀야할 윤리적 모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에 대한 판단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넘긴다.


애도의 원형


   맑스주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게오르그 루카치는《소설의 이론》에서 고대 그리스를‘서사시 시대-비극의 시대-철학의 시대’로 구분하였다.‘서사시 시대’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대표적인 작품이고, ‘비극의 시대’ 하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이야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루카치는 고대 그리스가 ‘서사시 시대’에는 인간의 이성과 감성이 하나로 섞여 있었던 시대였고, ‘비극의 시대’는 이성과 감성의 분화가 일어났던 시절, 그리고 소크라테스로 상징되는 ‘철학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감성과 욕망의 영역이 배제되면서 이성우월주의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밝힌다.

    애도에 대한 고전적인 판본은 고대 그리스 ‘서사시 시대’의 걸작 〈일리아스〉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헥토르에 대한 애도의 장면과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이야기〉에 등장하는 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애도이다. 〈일리아스〉는 기원전 12-13세기에 쓰여진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 브레드피트가 나왔던 영화 〈트로이〉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일리아스〉의 마지막 대목에서는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이고 헥토르의 시신을 유린하는 장면이 나온다. 헥토르의 아버지가 밤에 아킬레우스를 찾아와 아들의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내어주면서 눈물을 흘린다. 다음 날 헥토르의 시신이 트로이로 옮겨져서 그동안 치르지 못했던 애도의 의식을 벌이는 것을 끝으로 〈일리아스〉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일리아스〉 속 헥토르에 대한 애도보다 더 복잡하고 진화된 애도 이야기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 등장한다. 사건의 대강은 이렇다. 국가(테베市)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 들판에 버려져 들짐승의 먹이가 되어버린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르려는 안티고네와 반역자(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응징의 차원에서 애도를 허락지 않는 테베왕 크레온 사이 갈등이 이 비극의 줄거리다.

    폴리네이케스는 테베國의 입장에서 볼 때 역적이다. 국가에 반기를 든 자들에 대한 역사의 형벌은 어느 민족이건 대체로 일치했다. 공동체 성원들 앞에서 공개적이고 잔인한 사형이 집행되고, 그 주검을 마을 어귀에 대롱대롱 매달아 공포의 타산지석으로 삼게 하거나, 혹은 그냥 시체를 들판에 내동댕이쳐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함으로써 반역자와 공동체 간의 거친 수직적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렇듯, 공동체에 심각한 타격을 끼친 인물에 대한 응징과 처벌은 공동체의 이익을 보호하고 공동체 성원들의 결속과 단합을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한 당연한 처사다. 이 지점에서부터 안티고네의 문제의식은 시작된다.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


   사건은 안티고네가 크레온으로 상징되는 현실의 원칙, 상징계의 질서를 거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현행법을 어기면서까지 안티고네는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되찾아 장례를 치르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공동체의 운영원리인 쾌락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현실의 원칙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죽으면 누구나 장례를 치르고, 고이 안장되어야 한다는 생명의 원칙, 진실의 원칙에 무게를 두었고, 그것을 현실의 삶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내 기억에는 안티고네만큼 ‘쾌락의 원칙’에 충실하지 않았던 인물이 있다.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오현우다. 1970년대 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지하조직 활동을 한 오현우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수배자가 되어 도피생활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준 시골학교 미술교사 한윤희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한적한 시골 외딴 마을에서 3개월 남짓 둘만의 따뜻하고 오붓한 시간을 갖지만, 오현우는 다시 동지들을 규합하여 투쟁의 길로 나서기로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선다.


<오래된 정원> 중에서


    서울 가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 비 내리는 시골길에서 한윤희가 오현우에게 이렇게 따져 묻는다. “왜 가니?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몸도 줬는데… 왜 가는 거야? 그곳에 뭐가 있길래… 이 바보야!” 오현우는 한윤희의 이 질문에 아무런 말을 못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다 안다. 그가 죽으러 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왜, 오현우는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몸까지 제공되는 쾌락의 공간과 시간을 거부하고, 그 쾌락에 만족하지 못하고 왜, 죽음을 향해 나가는 것일까? 왜, 안티고네는 공동체가 제공하는 쾌락의 원칙에 머무르지 못하고 죽은 오빠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지내야겠다고, 아직 나의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며 절규하는 것일까?

    이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풀어내면 이렇다. 안티고네는 공동체의 타자인 폴리네이케스를 향한 금지된 욕망을, 오현우 역시 민주주의와 정의를 향한 금지된 욕망을 현실 질서(법)의 위협과 협박과 조롱과 공포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켰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했던 ‘쾌락의 원칙’을 넘어가는 행위다.

       인간의 사회화 과정은 언어의 학습과 병행한다. 어린아이는 언어를 습득하면서 이드(Id)가 지배하던 원초적 자아(상상계적 자아)에서‘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 속으로 편입된다. 사회라는 상징계 안으로 진입한 아이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법과 질서와 전통 안에서 자라면서, 사회가 설정한 기표를 따라가는 것이 생의 목표이고 기쁨이 되는 인간으로 길들여지게 된다.‘쾌락의 원칙’이란, 사회적 기표를 하나씩 따면서 생기는 삶의 기쁨과 보람과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쾌락 원칙은 사회적 인정을 추구하는 동시에, 사회적 불안과 소외를 피하려는 속성이다. 그것은 법이 허용한 범위 내에서는 쾌락을 추구하지만, 불쾌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금지된 대상을 피하려는 성질이다. 이런 까닭에 쾌락의 원칙은 사회적 금기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보수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에서, 인간에게는 쾌락의 원칙을 넘어가는 측면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살고자하는 충동인 에로스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삶의 터전인 공동체의 원리를 거부하고, 자기를 끊어내는 죽음충동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실재(the Real)란 무엇인가?


    안티고네와 오현우의 행위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들의 행위를 가능하게 했던 인간의 욕동에 대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자크 라캉은 인간의 욕동을 ‘욕망desire’과 ‘주이상스jouissance’로 구분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욕망이란,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 이데올로기적 학습, 혹은 법률 안에서 형성되고 허용되는 욕망으로, 그것은 사회적 가치, 내지 타자의 시선을 따라가는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라는 상징계(현실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좀 더 많은 연봉을 추구하고, 육체마저 상품화하는 소비자본주의 문화 속에서 좀 더 날씬하고 예쁜 외모를 욕망한다. 그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기표(상징)를 내가 추구하는 것이다. 연봉 1억, S라인의 몸매, 고급 외제차, 명품 가방 등이 대표적 기표라 할 수 있다. 그 기표들의 연쇄를 따라 우리는 상징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표들은 사회라는 대타자가 만들어놓은 기준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하니까, 남들이 원하니까 내가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인정받으니까. 그러면 내가 편하고 즐거우니까. 그래서 계속 그 기표를 따려고 쫓아다닌다. 결국 상징계속 욕망이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티고네나 오현우는, 이런 식의 상징계 속 쾌락 원칙의 지배하에 있는 욕망과는 다른 욕망을 주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쥬이상스’다[각주:3]. 욕망이 상징계 속 기표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쥬이상스는 상징계로 진입하기 이전 상상계 시절 작동하였던 욕망이다. 이것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지 못한 채 떠돌다가, 현실의 세계로 귀환하는 것이 ‘실재(the Real)’다.

    전통 형이상학에서 ‘실재’란 현실을 초월해 있는 존재, 혹은 운동의 원칙이었다. 플라톤의‘이데아’가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라캉은 이런 전통적인 실재와는 다른 실재를 언급하는데, 이를‘Das Ding(=the Thing)’이라 불렀다. 지젝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 ‘the Real’이라 명하면서 ‘실재의 윤리’로 나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잠시 여기서 실재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어 부연하면, 전기 라깡을 읽다보면 <상상계-상징계-실재계>가 뚜렷하게 경계 지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후기 라깡으로 갈수록 그들 사이 경계는 사라진다. 실재가 어느 특정한 공간과 층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실재계(界)라는 말은 적절치 못하다. 실재는 현실의 오작동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 발생한 박근혜의 국정농단,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다원성이 강한 미국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일이 실재의 귀환을 설명하는 적절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시민혁명을 통해 높은 민주적 시민의식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 박근혜가 최순실 같은 작자에게 국정을 농단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다니!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이민자들의 천국 미국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배제와 적대의 메카니즘을 들고 등장한 쓰레기 같은 트럼프가 어떻게 미국 대통령이 될 수가 있나! 지젝이“실재란 상징적 네트워크 자체 내부의 틈”이라고 말했는데, 너무나도 적절한 지적 아닌가 싶다. 박근혜라는 실재, 트럼프라는 실재는 대한민국이라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틈과 균열을 상징한다. 영화 〈에일리언〉에서 괴물의 숙주가 사람의 몸에서 기생하는 것처럼, 실재(the Real)는 세상의 틈과 균열로 존재하면서, 평온했던 상징계에 혼란과 불안을 선사한다.


안티고네와 실재의 윤리


    라캉은 실재를 겨냥하는 쥬이상스가 지닌 전복적인 힘에 주목했다. 쥬이상스는 상징적(세상적) 원칙과 질서로 제한하지 못하는 근원적 욕망이었다. 라깡은 안티고네 이야기를 그것의 적절한 예로 끌어들인다. 왕권을 놓고 숙부 크레온과 경쟁을 하던 폴리네이케스는 패하여 죽임을 당하였고, 크레온은 폴리네이케스의 주검을 참혹하게 유린한 후 성 밖으로 내친다. 그것은 반역자를 향한 합법적인 법집행이었다. 아울러 백성들에게는 폴리네이케스의 주검을 거두어 장례를 치를 경우 가차 없이 처벌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그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오빠의 장례를 치렀고, 그 이유로 지하동굴에 갇히고 결국 자살하고 만다.

    안티고네의 행위는 앞서 언급했듯이 쾌락의 원칙을 넘어가는 행위였다. 쾌락의 원칙대로라면 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애도는 실행되어서는 안되었다. 법을 어길 경우 짊어져야 할 형벌과 공포와 불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티고네는 쾌락 너머의 원칙을 따라간다. 그것은 보편적인 하늘의 법도에 충실한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장례를 치를 권리가 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은 자를 향한 애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인륜 말이다. 안티고네는 그냥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장례를 치르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정치적 이념이나, 윤리적 덕목에 입각해 행동했던 것이 아니다. 아주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인륜성에 기반한 행위였다. 이런 보편적 욕망에 충실했기에 안티고네는 체제가 만들어놓은 법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안티고네의 행위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현실의 법과 대립각을 형성하는 것이었기에 감옥에 갇혔고, 그곳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안티고네는 찬란하고 슬픈 비극의 주인공으로 남겨지게 된다. 이것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가 그리스 비극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등극하게 된 연유다.

   하지만 안티고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안티고네의 행위는 크레온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체제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안티고네의 자살은 그녀의 약혼자이자 크레온의 아들인 하이몬의 자살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크레온의 아내 에우디케의 죽음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크레온도 모든 것을 상실하는 파국을 맞게 된다. 안티고네의 법 밖의 것을 지향하는 윤리가 크레온으로 상징되는 법의 윤리를 무너뜨린 것이다.

    본래 윤리란 사회의 법규, 전통, 규범 같은 것들을 유지하고 존중하는 태도와 마음의 자세, 그리고 그것을 위한 행위 일반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실재의 윤리는 사회, 혹은 국가에서 말하는 윤리적인 것, 규범적인 것을 뚫고 나간다. 국가가 제공하고 체제가 허락하는 규범을 따르면 편하고 안락한데, 이 쾌락원칙을 거부하면서 안티고네는 쾌락원칙 너머에 있는 것을 소망하며 나갔다. 그랬더니 옛 질서가 무너지는 결과가 발생했다.

    지젝과 더불어 슬로베니아학파의 얼굴로 떠오른 알렌카 주판치치는 기존 윤리와 다른 실재의 윤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실재와의 조우에 의해 우리에게 강제된 물음-나는 나를 탈구된 상채로 던져놓은 그 무엇에 조응해서 행위할 것인가, 나는 이제까지 내 실존의 토대였던 것을 재정식화할 각오를 할 것인가?-속에서 윤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바디우는 이 물음-혹은 오히려, 이 태조-을 ‘사건에의 충실성’ 혹은 ‘진리(진실)의 윤리’라 부른다.[각주:4]


    실재의 윤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윤리가 대타자인 공동체가 정한 법규와 규범을 아무 생각없이 따르고 복종하는 도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재와의 조우를 통해 진실을 겨냥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시스템의 이면을 들춰내면서, 대타자의 목소리를 의심하고 자신의 쥬이상스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정신분석석학의 윤리라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의 윤리는 진실의 윤리다. 진리와 진실은 같지만 다르다. 뉘앙스 상으로 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둘 다 어떤 사물과 사건에 깃든 함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같다. 드러나는 것은 사물의 이치이거나, 사람의 진심이거나, 사건의 진상이거나, 혹은 종교적 깨달음이이다. 문제는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의 차이인데, 진리는 우리가 그동안 볼 수 없었고 몰랐던 것이 드러나는 것이고, 진실은 우리에게 익숙했고 늘 봐왔던 사물(건)속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진실의 윤리는 실재가 귀환하는 사건이다. 실재는 예측가능한 상징계의 질서 어딘가에 균열이 생겨, 예상치 않게 그곳을 통해 무엇인가가 융기하는데, 그것이 현실의 모순을 들추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법의 모순일 수도 있고, 이데올로기의 광기일 수도 있고, 맹목적인 도착된 믿음일 수도 있다. 실재의 귀환은 이런 상징계의 껍질을 깨면서,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억압하는 대타자의 목소리와 나의 진정한 욕망(쥬이상스) 사이의 괴리와 간극을 포기하지 않도록 한다. 그렇다면 실재의 윤리를 세월호에 대한 애도의 문법으로 전환하면 어떻게 될까?


다시, 애도를 묻다


    안티고네 이야기와 세월호 사건의 예에서 보듯이, 권력은 그들이 보기에 애매하고 재수 없이 발생한 죽음을 둘러싼 진상규명과 애도 과정에 대해 난색을 표시하며, 빨리 그 애도의 기간이 흐지부지되기를 소망한다. 안티고네와 세월호 유가족들은 ‘당신들이 우리의 애도를 가로막는 처사는 옳지 않고, 너무 쪼잔한 것 아니냐?’며, 끝까지 체제가 강제하는 애도의 방식과 대결한(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애도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극명하게 다른 것일까?

   애도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 그렇다면, ‘애도를 성공적으로 마쳤다’함은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 극복되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성공한 애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한 애도가 되는 것 아닌가? 본래 애도란 망자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고, 망자의 상실로 인한 아픔을 계속 지속시키는 행위여야 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애도란 애도의 사전적 의미, 즉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행위를 현재진행의 사건으로 계속 유지시키는 행위다. 그러므로 성공한 애도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인터뷰에서 빨리 슬픔에서 벗어나는 것을 꿈꾸는 것만큼이나, 이 슬픔이 완전히 극복되고 잊히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애도가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만든다.

   안티고네의 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애도는 크레온으로 상징되는 현실세계의 법칙을 뚫고 나온 실재(the Real)의 귀환이었다. 이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할 때 배제되었던 ‘그것(das Ding, the Thing)’이 현실의 질서 밑에 숨어 있다가 융기한 사건이었고, 그럼으로써 현실의 법집행에 차질을 초래한 사고였다. 세월호 사건 역시 대한민국이라는 상징계를 뚫고 융기한 실재(the Real)라 할 수 있다. 한국형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국가정의의 이름으로, 경제성장 혹은 경제안정이라는 이름으로 배제되었던 한국 사회의‘그것(das Ding, the Thing)’이 현실의 수면 밑에서 응축되어 있다가 터진 사건이 바로 세월호 참사다.

   안티고네는 그 실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오빠 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애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크레온이 장례를 막았던 이유는, 애도의식이 망자에 대한 기억을 공동체 내에 유포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의 공유는 필연적으로 어느 임계점에 이르러서는 빅뱅을 일으킬 것이다. 그래서 크레온은 안티고네의 애도행위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권력이 세월호에 대한 애도를 서둘러 마무리하려는 이유도 이와 같다. 세월호 참사는 무능하고 탐욕으로 가득 찬 대한민국의 실재가 드러난 사건이었고, 현 정부는 그 모든 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세월호에 대한 애도는 필연적으로 진실을 향한 행위를 경유할 수밖에 없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일어날 사건의 파장을 너무나 잘 알기에, 정부로서는 이 애도를 허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애도가 구천을 떠도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미완으로 남겨진 채 배회하는 세월호를 향한 우리의 애도가,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있다. 우리의 애도가 미완으로 남겨진 채 이어지고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우리들의 마음에 생채기가 생겨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윤리적 답변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리에서 망자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들을 기억하는 행위를 계속 이어가야 할 것이고, 거기서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 간의 대화와 관계 맺음이 계속 유지되도록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도래하는(to-come) 변혁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전망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될 때, 세월호 애도의 불가능성은 오히려 변혁을 향한 가능성의 지점이자 거점으로 우리 앞에서 살아 있게 된다.

   세월호에 대한 진정한 애도는‘세월호 문제는 종결되었다!’고 선언하는 세상의 음성에 파열음을 내는 것이다. 그것이 세월호 문제를 이대로 덥고 지나가려는 세력들에게는 부담과 불편으로 작동할 것이고, 그것은 세월호라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우리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계기로 작동할 것이다. 그렇게 거짓된 현실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진실을 감추는 자들을 향해서는 쫄지말고 정당한 목소리를 내면서 우리의 애도를 유포하다 보면, 우리 앞에 불가능했던 현실의 파국이 가능성의 형태로 우뚝 솟아올라와 있을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애도는 완성된다. 아니, 그때가 비로소 우리 애도의 출발점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4. 10일 에큐메니안에 동일한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5065 [본문으로]
  2. 신형철 외, 『눈먼 자들의 국가』, (서울: 문학동네, 2014), 231 [본문으로]
  3. Jacques Lacan, “The Paradox of Jouissance” in Seminar VII,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1959-1960, trans. Dennis Porter(W.W. Norton & Company, Inc. 1992), pp.167-240. [본문으로]
  4. 알렌카 주판치치 지음, 이성민 옮김,『실재의 윤리』, (서울: 도서출판 b, 2004), 35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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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Mourning), 그 ‘불가능한 가능성’에 관한 에세이

이상철
(한신대 외래교수)

 

Prologue: The day after April 16

그날 이후 40일이 지났다. 아직 16명이 영혼이 바다에 잠겨있고, 대통령은 이 참사에 대해 눈물을 흘렸으며, 내각의 수반과 청와대 사람들이 경질되었다는 뉴스, 해경과 구원파가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한 희생양으로 제단에 바쳐질 듯 하고, 그 둘을 제거하고, 몇몇 관리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번 사건 퉁치자!’는 것이 미스 박과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환관들의 바램인 듯 하다. 
그날 이후 몇 번의 집회가 있었고, 그날 이후 신학생들은 광화문 세종대왕상 위에서, 혹은 청계광장에서 구호를 외치고 삭발을 하고 단식에 돌입했다. 왜,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걸까? 탄압하고 투쟁하고 삭발하고 잡혀가고…투쟁하고 단식하고… 정말이지 이 놈의 사회는 어찌 이리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일까? 지난 10년 유학기간 동안 나는 이런 류의 소란으로부터 자유로왔는데, 그래서 홀가분했는데, 이제 10년이나 지났으니 세상이 변했겠거니 했는데,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안 변했을까? 

May 21, 데리다 수업이 열리던 날

<해석학과 윤리> 세미나가 열리는 지난 수요일 저녁, 내 수업에 참여하는 3명의 대학원생들이 청계광장에서 삭발을 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 전날 학생들은 내일 제출해야 될 리포트를 미리 보내며, “교수님, 에세이 보냅니다. 내일 수업에는 참여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떨리네요. 기도해 주세요” 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 세미나는 슐라이에르마허부터 시작하여 레비나스까지 열 한명의 굵직한 인물들의 해석학적 특징을 다룬다. 그리고 그날 5월 21일 수요일에 우리 앞에 나타난 인물은 데리다였다. 나는 원우들과 데리다가 말하는 애도의 방식을 놓고 대화를 하고 싶었다. ‘어떻게 우리는 세월호에 대한 애도를 해야할까? 그것이 가능이라도 한 것일까?’라는 물음에서부터, 데리다가 말하는 ‘불가능한 가능성’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까지 생각해보고, 그런 연후에 세월호 사건에 대한 애도의 가능성은 무엇이고, 애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현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애도의 방법이 무엇일까?를 놓고 나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11명의 수강생 중 3명이 청계광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 논의는 하지 못했고, 농성이 끝나고 모두 모인  종강 날쯤 세미나에 대한 결론격으로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려고 한다.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 (1): 안티고네의 애도 방식

애도에 대한 고전적인 판본은 고대 그리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이야기이다. 사건의 대강은 이렇다. 국가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 들판에 버려져 들짐승의 먹이가 되어버린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루려는 안티고네와 반역자(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응징의 차원에서 애도를 허락치 않는 테베왕 크레온 사이 갈등이 이 비극의 줄거리다.
국가에 반역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역사의 형벌은 어느 민족이건 대체로 일치한다. 공동체 성원들 앞에서 공개적이고 잔인한 사형이 집행되고 그 주검을 마을 어귀에 대롱대롱 매달아 공포의 타산지석으로 삼게 하거나, 혹은 그냥 시체를 들판에 내동댕이쳐 독수리의 먹이가 되게 함으로써 그 반역자와 공동체간의 거친 수직적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 그것이다.
공동체에 심각한 타격을 끼친 인물에 대한 응징과 처벌은 공동체의 이익을 보호하고 공동체 성원들의 결속과 단합을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한 당연한 처사다.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대의를 위해 한 인간의 존엄도 무시되는 이 마당에 하물며 반란의 수괴를 어떻게 넉넉하게 봐줄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안티고네가 이러한 합리적인 상징계의 질서를 거부하였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안티고네는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되찾아 장례를 치루겠다는 의지를 꺽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공동체의 운영원리인 실용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현실의 원칙, 쾌락의 원칙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누구나 죽으면 장례를 치루고 고이 안장되어야 한다는 존재일반이 마땅히 누려야 할 근원적 원칙, 상상계적 원칙에 무게를 둔다.
이를 좀 더 정신분석학적으로 풀어내면, 안티고네는 공동체의 타자인 폴리네이케스를 향한 금지된 욕망을 현실 질서(법)의 위협과 협박과 조롱과 공포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켰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했던 쾌락의 원칙을 넘어가는 행위다. 왜 안티고네는 그 법을 어겼을까?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 (II):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몸도 줬는데…왜 가니?”

내 기억에는 안티고네보다 더 ‘쾌락의 원칙’에 충실하지 않았던 인물이 있다.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오현우다. 나는 이 작품을 소설보다 영화를 통해 먼저 접했다. 본래 소설을 영화 한 경우 원작에 훨씬 못 미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임상수 감독의 영화 <오래된 정원>은 예외적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영화에서는 오현우의 역할을 지진희가 맡았고, 여주인공 한윤희 역을 염정아가 맡았었다. 
1970년대 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지하조직 활동을 한 오현우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수배자가 되어 도피생활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준 시골학교 미술교사 한윤희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한적한 시골 외딴 마을에서 3개월 남짓 둘만의 따뜻하고 오붓한 시간을 갖지만, 오현우는 다시 동지들을 규합하여 투쟁의 길로 나서기로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선다.
서울가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 비내리는 시골길에서 한윤희가 오현우에게 이렇게 따져 묻는다: “왜 가니?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몸도 줬는데…왜 가는 거야? 그곳에 뭐가 있길래…이 병신아!” 오현우는 한윤희의 이 질문에 아무런 말을 못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다 안다. 그가 죽으러 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왜, 오현우는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몸까지 제공되는 쾌락의 공간과 시간을 거부하고, 그 쾌락에 만족하지 못하고 왜, 죽음을 향해 나가는 것일까? 왜, 안티고네는 공동체가 제공하는 쾌락의 원칙에 머무르지 못하고 죽은 오빠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지내야겠다고, 아직 나의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며 절규하는 것일까?
위의 경우에서와 같이 상징계속 쾌락원칙에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을 쥬이상스라 부른다. 욕망이 상징계속 타자로부터 기인한다면, 쥬이상스는 상징계의 밖 대타자가 제공하는 욕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쥬이상스로 인해 안티고네는, 그리고 소설 <오래된 정원>속 주인공 오현우는 상징계속 쾌락의 원칙을 거부하고 박차고 일어나 대타자를 향해 나가지만… 대타자 역시 비어있다.

“대타자는 없다”, 그리고 “불가능성의 가능성”

라깡은 이를 “대타자는 없다”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대타자는 없다”라는 말은 초월성이 없다는 말로 치환 가능할 것이다. 지난 60호 웹진에서 필자는 라깡의 “대타자는 없다”에 주목한 지젝의 정치적 기획 - 어떤 초월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 초월성을 망가뜨리는 틈을 부여 잡으려고 하는 - 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와 관련된 기사는 지난 웹진 60호 필자의 졸고 “세월호 침몰사건을 바라보는 지젝의 시선과 산자의 독백”을 참조하기 바람) 
라깡의 “대타자는 없다”라는 말을 안티고네에 적용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안티고네는 존재의 심층에 자리한 텅 비어 있는 공간으로부터 들려오는 사이렌의 음성에 정직하게 반응하였고, 그 음성을 차마 배반할 수 없어 그곳을 향해 묵묵이 걸어나간다. 물론, 그 음성은 텅 비어 있는 공간에서 공명되었던 소리었겠지만서도, 안티고네에게 있어 그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실재였다. 
그렇다면, 안티고네가 취한 애도의 자세를 데리다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것은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우리의 애도를 이어가는 데 있어 어떠한 성찰을 제공하는가?  
라깡이 말한 “대타자가 없다”라는 말과 데리다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는 말 사이에는 모종의 연관과 상동성이 있다. 전기 데리다의 대표적 언어가 ‘차연’이었다면, 후기 데리다를 상징하는 대표적 개념어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데리다 전기는 주로 기존 형이상학 틀에 익숙한 언어, 텍스트, 의미 안에 숨어 있는 부분을 들추어 냄으로써 기존의 상식과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탈구축을 감행한다. 반면, 1993년 <맑스의 유령들>이후 출간된 데리다의 후기 저작들은 단순한 텍스트 해체에 만족하지 않고, 윤리, 종교, 정치적 이슈들과 과감히 맞서면서 실천철학적 대응을 도모한다.  
후기 저작에서 데리다는 많은 무조건적인(unconditional) 것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무조건적인 환대, 무조건적인 용서, 무조건적인 선물, 그리고 무조건적인 애도 등. 하지만, 이 무조건적이라는 강박은 오히려 역으로 그것들에 대한 불가능성을 증폭시켜 나가다가 급기야는 데리다 작품에서 중요한 역설적 아포리아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불가능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흉흉한 소문과 유령 같은 음산함이 죽어버린 현실에 활력을 불어넣어, ‘혹여 그 불가능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기대 섞인 전망을 내놓는 것이 데리다 후기의 기획이고, 그것은 결국 정의에 대한 해체주의적 결말을 예견케한다.

애도, 그 ‘불가능한 가능성’을 향하여

애도(哀悼)를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이렇다: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 그러므로 애도가 성공했다 함은 그 슬픔이 극복되었음을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성공한 애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한 애도가 되는 것 아닌가? 본래 애도란 망자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고, 망자의 상실로 인한 아픔을 계속 지속시키는 행위이어야 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애도란 애도의 사전적 의미, 즉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행위를 현재진행의 사건으로 계속 작동케하는 행위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인터뷰에서 빨리 슬픔에서 벗어나는 것을 꿈꾸는 것만큼이나, 이 슬픔이 완전히 극복되고 잊혀지게 되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애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다시 묻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불가능한 가능성’이 노리는 바는 우리의 타자를 향한 무조건적인 환대와 우리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우리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인 선물과 그리고 우리의 멈출 수 없는 무조건적인 애도라는 개념들을 살아있게 하여, 그것들로 인해 현실이 미래로 열릴 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세월호에 대한 애도는 미완으로 남겨져야 한다. 미완으로 남겨진 채 이어지면서 망자들을 계속 호출해 내야 하며, 그 공간에서 죽은자들과 살아남은 우리들간의 대화와 관계 맺음이 계속 유지되도록 판을 형성하는 가운데 ‘도래하는(to-come)’ 가능성을 우리는 전망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 애도의 불가능성은 오히려 변혁을 향한 가능성의 지점이자 거점으로 우리 앞에서 살아있게 된다.
이렇듯 세월호에 대한 애도는 우리사회의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을 강화할 수단과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이 비극적이고 극적인 서사가 제공하는 비탄의 되새김을 통해 복수적이고 대안적인 의미의 계열들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애도를 통해 다양한 유령들의 목소리가 현실의 복도에서 돌아다니게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과거처럼 단 하나의 목소리 큰 유령이 그 공간을 지배케 해서도 안 되고, 과거처럼 촌티나는 분파적인 헤게모니 다툼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3류 신파극이 되어버려 우리의 애도는 끝나버리고 만다. 그 쾌락의 원칙을 넘어가야 한다.
우리의 애도는 실재를 향해야겠지만, 그 실재는 어떤 특징도 지니고 있지도 않은 실재이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실재이다. 즉, 우리의 애도는 무엇 무엇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이 애도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는 공백에 대한 사랑이다. 그 공백은 앞서 말한 것처럼 환상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애도란 그 결여를 긍정할 줄 아는 태도다. 이러한 의식들을 통해 현실을 서서히 조금씩 잠식해 들어가는 것, 그렇게 현실에 조금씩 균열을 가하고 얼룩을 칠하고 조롱을 하면서 우리의 애도를 유포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 앞에 현실의 파국이 (불가능한) 가능성의 형태로 우뚝 솟아올라와 있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애도는 완성된다.

에필로그:  청계광장에서…

문제는 우리의 애도를 완성시킬 파국을 예감케하는 행위가 무엇인가? 라는 점인데…이 문제에 대한 뾰족한 돌파구가 없었던 내게 지금 청계광장에서 벌어지는 퍼포먼스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삭발과 단식이라는 오래된 내러티브가 있는가 하면, 그 무겁고 장엄한 투쟁의 공간을 경쾌하게 날려버리는 족보도 없는 날날이 같은 댄스와 딴따라 같은 노래와 잡다한 수다들이 꼬이고 공존하면서, 그 숨막히는 메타내러티브가 지배하던 공간이 하찮은 놀이의 공간으로 변모되는 것을 본다. 그것들을 접하면서 어느새 내 안에 자리잡은 신파와 노파심과 촌스러움을 꾸짖는다. 아마도 ‘젊은 그대’는 훨씬 더 과거 그들의 선배들 보다 이 애도를 즐기면서 오랫동안 파국의 도래까지를 잘 견딜 수도 있겠다라는 예상을 한다. 
이렇듯 세월호 참사가 불러온 애도 정국은 2014년 5월 대한민국을 슬픔과 뜨거움이 공존하는 도가니로 우리를 몰아넣고 있다. 80년 광주와, 87년 6월 항쟁, 97년 IMF와 더불어 2014년 세월호는 한국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역사적 탄식과 요청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척 떨리고 흥분되고 소름돋는 시간을 우리는 지금 지나고 있는 셈이다. 문득, 삭발에 앞서 눈에 눈물이 파르르 고이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일 나는 다시 그들을 만나러 간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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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과부와 정치적 시민, 그리고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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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룻이 시어머니에게 대답하였다.
“어머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
―「룻기」 3장 5절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장례식은, 적어도 우리 시대에는, 더는 없을 거야”라고 했다. 그는 이 시대의 마지막 영웅이었고, 죽음으로 사회적 통합을 가져올 마지막 사람이라는 얘기다. 이제는 그 누구도 시민사회 전체의 애도의 대상이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불과 3개월여 만에 우리는 또 한 번의 대대적인 사회적 애도의 의례를 치루게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고가 전해지기 직전까지도 그의 존재는 한국 민주주의의 좌절과 수치스러움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 즈음 내가 요청받은 원고의 주제는 ‘한국사회와 돈’이었다. 노 전 대통령을 포함하여 참여정부 핵심층의 부패에 관한 검찰의 브리핑을 염두에 둔 기획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

지난 주 토요일 아침, 마침 내가 몸담고 있는 연구소가 이사하게 되던 날,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뉴스를 들으면서 나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전임 대통령의 자살. 어느 일간지는 이것을 ‘시스템 살인’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자신 이외에 누구도 그의 목숨을 강제로 회수한 이는 없지만, ‘정치적 타살’이라고 할 만큼 마지막 숨구멍까지 압박하며 죄어오는 권력의 조임을 당해야 했다. 또한 일사불란한 명령 계통이 있었던 것이 아님에도 기득권 집단이 제각기 권력을 십분 활용하여 한 치의 가릴 것도 없이 발가벗겨 짓밟아 버렸던 것이다.

서거 후 그는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대통령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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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그림판 (2006.6.6)


한데 삶에서 죽음으로의 극적인 경계 이동만큼이나 수치스러움에서 자랑스러움으로의 생각의 이동은 너무나 극적이었다. 그의 죽음은 모든 것은 반전시켰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대적인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공중파 방송 3사가 장례식과 노제를 생중계하고,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특집 다큐를 제작 방영했으며, 화장장에서 49제 때까지 유골을 안장하기로 한 사찰 장면까지 생중계되었다.

티비의 오락프로는 애도기간 동안 방영이 중지되었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은 초기 화면에 흑백 톤의 애도 디자인을 넣었다. 전국 수백 곳에 시민들에 의해 분향소가 가설되었으며, 무려 오백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참배를 했다. 대학교 강의실마다 선생들은 견해를 묻는 질문에 답을 해야 했고, 전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타살의 책임을 물어 현 대통령의 탄핵 서명이 인터넷 공간에서 전개되어 백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하여 어떤 이는 한국에도 자랑스러운 대통령이 생기게 되었다고 말한다.

국민의 다수가 그의 서거에 애통함을 표했고, 나 역시, 비록 몇 가지 주요 사안에 있어서 결코 동의할 수 없어 정치적으로 그의 반대자에 가까웠음에도, 애통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가장 깊은 아픔을 겪고 있는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권양숙 님[각주:1]일 것이다. 시신을 확인하면서 실신했다는 보도가 있었고, 장례식 때에 휠체어에 몸을 맡긴 채 나타났다. 필경 그녀가 겪고 있는 자기 존재 파괴의 상태는 비교불가의 절대고통 바로 그것이었겠다.

정치적 타살을 체험한 다른 사례들에 관한 자료를 참조하면, 배우자를 잃은 아내들은 종종 상황에 부적절한 말을 내뱉는 언어 붕괴 현상을 겪게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주던 기억의 교란을 일으키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타살자의 아내들은 그러한 자기 파괴적 비탄 상황에 지속적으로 놓일 수만은 없다. 그녀는 죽은/임당한 남편의 입이 되고 목소리가 되고 몸이 되어야 한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무너져버린 ‘사적인 아내’가 아닌, 그 불의한 죽음을 당한 남편을 대신해서 증언하는 ‘공적인 아내’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녀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며, 그렇게 하도록 요구한다. 

죽은 자, 아니 죽임당한 자는 말하지 못한다. 그 시신의 고요함은 자기 증언의 부재를 의미한다. 바로 이 증언 부재의 침묵에 소리를 부여해주는 이가 바로 배우자 여성인 것이다. 그녀의 눈물, 그녀의 신음, 그녀의 비틀거림이 바로 그러한 증언의 형식이다. 하여 이러한 배우자 여성이 몸으로 하는 증언 행위, 그것은 죽임당한 자의 의례에서 핵심을 이룬다.[각주:2]

이렇게 배우자 여성은 비탄 상황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것에서 증언자가 되어 죽은/임당한 남편의 소리를 대언하는 자로 역할 전이를 일으키게 된다. 아니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는 사회적, 문화적 요청에 직면하게 된다. 곧 정치적 타살자의 아내들은 ‘과부’에서 ‘정치적 과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 권양숙 님은 남편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한다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정치적 살해자와 장례를 공유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이 컸던 탓이겠다. 그러나 곧 그녀는 받아들인다. 그것은 그녀의 ‘정치적 과부되기’가 국민장의 의전 형식에 의거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전 형식의 핵심은 ‘영부인되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서거한 이가 대통령임이 그녀를 통해 만천하에 대언되는 것이다.

「룻기」 3장 5절에서, 시어미인 나오미가 기획한 몰락한 가문의 회복을 위한 프로젝트에 며느리 룻은 “일러주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듯이, 죽은 남편의 침묵을 대언하는 씨족의 관습에 의거한 과부의 행동, 그것은 단적으로 정치적 과부되기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주체와 욕망을 지배적인 문화적 코드에 맞추고 그러한 의미망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정치화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일러주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라는 말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처럼 권양숙 님 역시 국민장을 수용함과 동시에 국민장의 의전 양식에 맞춘 영부인되기를, 일러준 대로 다 수행한 셈이 되는 것이다.

한편 시민 대다수도 이러한 의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국가의례로 진행된 장례 가운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처럼 대대적인 시민의 참여를 동반한 것은 유례가 없을 정도다. 그야말로 국민장이 된 것이다.

하여 시민도 국민장의 의전 양식에 걸맞는 ‘정치적 시민되기’에 참여하였다. 노제가 거행되던 시청 광장과 그 주변지역에 즐비하게 붙어 있는 현 정권에 대한 극단의 증오감을 담은 벽보들에도 불구하고, 결코 국가의례의 일부로 환치될 수 없는 담론의 주역들, 국민장의 시민되기에 동참한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일부인 그들은, 그날 밤 국민장의 시민되기에 동의한 이들답게 ‘얌전한 항의자’였다.

나는 여기서 혼란을 느낀다. 모 신문이 시스템 살해라고 규정했고, 많은 이들이 정부에 의한 타살로 해석하고 있음에도, 왜 그 많은 이들 가운데 다수는 국민장이라는 것에 대해 순순히 동의하고 있는 것일까, 왜 스스로 국민장에 걸맞는 정치적 시민되기를 순순히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전임 대통령의 서거이니 만큼 결과적으로 장례가 국민장으로 치러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에 저항하는 격렬한 비판과 논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왜 그토록 ‘조용한 합의’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죽은 이의 침묵을 대언하는 일이 단순한 합의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들었던 것이다.

또 하나,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 있어 나를 당혹하게 했던 것은, 한 후배의 고백에서 비롯된다. 그는 얼마 전까지 한・미 FTA를 추진하던 참여정부를 격렬히 비판하던 지식인이었다. 근데 며칠 전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반대를 후회하면서 ‘대통령님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울먹였다. 나는 적지 않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이런 방식으로 애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는다. 위에서 말한 그 ‘조용한 합의’는,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 하나의 징후다. 국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될 법한 주장을 펴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는 듯이 국민장을 받아들이는 이율배반과 상응한다는 얘기다.

그에게 묻지는 않았지만, 필경 그는 한・미 FTA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철회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참여정부의 한・미 FTA는 잘못 추진된 발전기획임이 여전히 타당하다. 하지만 그는 전임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 자기 신념을 철회하고 있다. 그 이유는 ‘대통령님을 지키기 위해서’다.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생각을 철회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가 우리 정치사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실행력을 지니면서 통용되고 있다. 그것은 ‘가신’이라는 용어다. 하여 국민장에 즈음한 그의 ‘정치적 시민되기’는 보다 정확히 말하면 ‘가신적 정체성’으로 스스로를 재규정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다시 본래의 생각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렇다. 그럼에도 그가 일시적으로나마 가신적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은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 때문일 것이다. 압도적인 슬픔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모순을 감내하게 했을 것이다. 그 순간의 비통함 탓에 생각의 균형이 무너지고, 세상을 ‘노무현 대 반(反) 노무현’이라는 단순 이분도식으로 생각한 결과일 것이라는 얘기다.

한데 과연 그럴까? 다시 원상복귀되는 것일까? 그가 한・미 FTA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으로 다시 돌아서게 된다는 것이 원상복귀일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필경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가 모순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별로 심각하게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한 사람의 정치적 죽음으로 인한 애도의 정치가 세상을 뒤흔들어 놓을 때, 애도의 행렬은 세상에 그 죽임당한 이의 목소리를 다시금 울려 퍼지게 한다. 애도하는 이는 그러한 소리의 중개자가 됨으로써 정치적 시민이 된다. 한데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애도의 정치는 종종 정치적 시민되기를 퇴행적으로 만들곤 한다는 것이다. 시도때도 없이 광장에서 통합만을 부르짖는 자기 서사는 이러한 퇴행성의 단적인 사례다. 해서 진보적인 한 일간지 사설은 ‘한・미 FTA나 이라크 파병은 노무현/참여정부의 한계가 아니라 ‘국가의 한계’였다'고 말한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이 그를 무조건 지지하는 ‘가신되기’이며, 가신적 정체성으로 통합되지 않는 모든 비판적 논의를, ‘국가의 한계’와 정부의 한계를 혼돈한 비현실적 몽상가의 의견으로 폄하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애도의 방식에 좀처럼 공감할 수 없었고, 헌화하는 것을 주저해야 했다.

장례식이 끝난 뒤 시청 광장을 돌아다니면서 그 한 구석에 설치된 작은 분향소를 보았다. 거기에는 근래에 죽임당한 정치적 피살자들의 명단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도 이렇게 많은 이들이 죽었구나 하는 새삼스런 각성에 도달했다. 한 사람의 죽음에서 죽임당한 많은 이들을 기억해내는 것,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에 광장에서 목격한 가장 빛나는 애도를 나는 여기서 봤다. ⓒ 웹진 <제3시대>

  1. 그녀를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칭호는 물론 ‘영부인’이다. 하지만 그녀를 영부인으로 부르는 것은 그녀가 다양하게 주체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단지 하나의 요소로만 환원시키는 것이기에 여기서는 중립적이고 모호한 함의를 지닌 ‘님’이라는 칭호로 부르겠다. [본문으로]
  2. 정치적 타살의 대상이 여성이고 그의 증언자가 남성 배우자 혹은 가족인 경우도 물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남성 배우자/가족의 경우는 정치적 과부와는 다른 방식의 정치적 임무에 대한 요청에 직면한다. 그런데 여성보다 남성의 경우는 그 역할이 훨씬 미미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수가 그러한 역할을 담당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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