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돌아갈 “처음”은 어디인가?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1. 다시 시작하는 꿈


    내가 속한 성공회의 교회 달력의 구성은 매우 예스럽다. 12월 25일 성탄절, 1월 1일 예수가 예수할례 받고 이름을 얻은 날, 1월 6일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이 드러난 공현절이다. 세상 달력으로도 1월이 되면 누구나 한번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꿈을 꾸게 되지만, 교회의 전례 달력도 세상이 예수와 만났던 처음 순간의 기억 속으로 우리를 되돌려 놓고 싶어 한다. 하늘과 땅이, 하느님과 인간이 다시 첫만남을 회복했던 순간, 말 그대로 비긴 어게인(begin again) 했던 순간을 계속 보여주면서, 우리를 그 첫사랑의 기억 속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로부터 취업을 결심하는 청년들까지 이 때는 모두가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겠다는 비긴 어게인의 결심을 해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영복 선생의 서화 "처음처럼"을 새삼 떠 올리며 새해 인사를 전하고 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추운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하지만 다시 처음 순간에 선다는 것, 비긴 어게인 한다는 것, 그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처음을 기억조차 하기 힘든, 너무 먼 곳에 와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처음을 잊어버린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시 그 처음으로 되돌아 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 매년 성탄절이 오고 새해가 되면 습관처럼 다시 시작할 각오를 하지만, 비긴 어게인하기 위해 되돌아갈 출발점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이미 처음을 버리고 멀리 떠나온 사람들이 만들어낸 욕심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다짐을 매년 새롭게 하면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돌아갈 첫 순간은 어디인가?


2. "처음"은 어디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우연한 순간에 신비롭고도 뜨거운 만남을 경험하는 그 첫 남은 어떤 것일까? 처음으로 하늘을 향해 서툰 날갯짓을 시작하는 어린 새의 하늘과의 첫 만남,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른 새싹의 첫 만남은 또 어떤 것일까? 하늘과 땅이 처음 만나는 그 창조의 순간, 그리고 다시 만나는 그리스도 탄생의 거룩한 순간은 어떤 처음인가? 갈릴리 나자렛 사람 예수가, 요한의 세례를 받고, 하느님을 처음 만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그 순간은 어떤 순간일까? 우리는 어떻게 그 뜨거운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물신이 지배하는 세계, 편견과 적대가 지배하는 이 세계를 살면서 오래전에 잃어버린 첫 순간의 기억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유대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태초 곧 창조의 순간은, 하느님이 자신의 피조물들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 건너뛸 수 없는 거리와 간격을 만든 순간이라 하였다. 레비나스와 함께 알랭 바디우 역시 사랑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나와는 다른 특질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차이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경험하는 것이라 하였고, 그래서 사랑은 환원 불가능한 타자의 경험 혹은 타자성의 경험이라 하였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처음부터 사랑의 바탕에 있는 것은 차이에 기초한 탈중심적인 세계와 삶을 구축하는 경험이라고 보았다 (조재룡 역, 『사랑예찬』, 길, 2010). 어쩌면 우리가 시작했던 그 처음도 이런 것이 아닐까?


사랑의 첫 만남은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너나 너가 예상할 수 있는 나의 발견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이미 만들어 온 세계에 대한 확신을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고, 내가 앞으로 만들어 갈 세계의 가장 탁월한 조력자를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다. 사랑의 첫 만남은 내게는 없는 당신의 것을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고, 나의 모자란 반쪽을 정확히 알게 되는 그런 순간도 아니다. 그래서 너와 내가 서로 모자란 반쪽을 채워 완전한 하나가 되어 살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다. 또한 사랑의 첫 만남은, 나와 너 밖에서, 나와 너를 완전히 잊어 버린 채 몰입할 수 있는 어떤 신념이나 신앙을 발견하는 일도 아니다. 둘의 영원한 차이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세계와 삶의 경험 그것이 바로 태초 혹은 처음의 진실이다.


마틴 부버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창조는 하느님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피조물들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순간이 아니다. 하느님이 피조 세계와 거리두기를 한 순간이고, 스스로 피조 세계와 피조물들인 우리를 모른다고 한 순간이다. 서로 모르는 상태로 만나기를 의도적으로 하신 사건이 바로 처음 순간이고, 창조의 순간이다.


처음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새에게 하늘은 이미 알고 있거나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무한 가능성의 신비 속에 있다. 그래서 처음은 서로 다름과 서로의 모름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신비와 창조력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서로 다르고 모르는 것이 만들어 내는 전혀 새로운 발견들 앞에서 전율하는 경험이다.


3. '차이'와 '모름'의 회복을 향하여


첫 사랑의 순간이 까마득한 태고의 전설이 되어 버린 사람들, 이미 서로를 다 알아 버린 사람들, 그래서 더 이상 모를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처럼 삶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관계들을 그 근본에서 의심하고 전복하는 일이다. 첫 사랑의 기억을 잊어 버린 우리는, 아니 첫 사랑의 뜨거움을 견디기 힘들게 된 우리는,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상대방을 바라본다. 수 많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쌓아 올린 나의 눈으로 남편이나 아내를 그리고 친구와 이웃을 재단하고 정의한다. 그러다가 자식을 낳거나, 직업을 갖거나, 어떤 신념이나 종교를 신봉하게 되면, 사랑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 일을 위한 동업자적 관계를 만들어 산다. 그리고는 그 동업자적 관계를 잘 만들어 가는 것이 곧 사랑이라 착각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처음을 잊어 버린 우리는 나와 당신이 둘이라는 사실, 나와 너가 서로 모른다는 사실, 나와 너가 어떤 인연으로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차이를 유지한다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한다. 하지만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은 나와 너가 둘이라는 사실, 서로를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 들 사이의 결코 동일화할 수 없는 차이를 회복하는 일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가장 모르는 사람으로 재 발견하는 일 그것이 비긴 어게인의 출발점이다.


시몬 베유는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하느님은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나는 내 사랑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 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분명히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에 관해서 어떤 말을 할 때, 내가 그 말을 하면서 그리고 있는 하느님에 관한 어떤 것도 하느님과 닮지 안았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이 없다고 확신합니다.”(Waiting for God , New York: Harper & Row, 1973, p. 32.)


시몬 베유의 하느님은 있는 하느님이면서 없는 하느님이요, 아는 하느님이면서도 모르는 하느님이다. 나의 편견과 선입견에 결코 갇힐 수 없는 분이며, 그렇다고 나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 주는 제삼의 원리나 존재를 허락하는 분도 아니다. 공통분모를 만들고, 동업자적 계약관계를 만드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분이다. 아마도 이런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곧 언제나 처음처럼 살아가는 신앙의 삶일 것이다.


진정으로 다시 시작하려면, 시몬 베유가 하느님을 향해서 고백했던 그 표현을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위해서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에 서로 안다고 할 수 있지만, 내가 아는 그대에 관한 어떤 설명이나 정의도 그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대를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처음으로 되 돌아갈 수 있고, 영화 제목처럼 비긴 어게인 할 수 있고, 둘의 모름과 차이가 만들어내는 놀라운 세계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4. 다시 시작하는 평화의 길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 보려는 이 꿈이 우리들의 가까운 인간 관계를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는 분단의 땅 한 반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치적 꿈이 되기를 또한 바란다. 사랑과 정치가 다르다 해도, 둘 다 새로운 관계와 가능성을 위한 모험이며, 사람들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적 관계와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보는 경험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본다.


분단체계는 엄밀히 말하면 이념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류 보편의 어떤 가치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서로의 편견관 증오심에 기초한 정체성의 정치다. 서로를 배척하는 것을 통해서만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질서다. 오직 흡수와 통일만 있을 뿐, 서로의 차이는 물론이요, 서로의 모름도 인정하지 않는 체계다. 분단체계 극복을 위한 근본과제는 바로 이 폭력적인 정체성의 정치와 그것이 만들어낸 관계들을 극복하는 일이다. 이미 처음의 기억은 거의 없다. 유전자처럼 우리의 체내에 뿌리 내린 분단체계는 편견과 독선만을 허락할 뿐, 차이와 모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으로부터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하고 다시 시작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독선과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 서로의 차이와 모름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제재를 통해서만 대화가 가능한 상태에서, 서로의 차이와 모름에 기초한 정말로 창조적인 남북 대화를 향해 먼 길을 가야한다. 참으로 위태로운 줄다리기 끝에 대화의 숨구멍이 열렸다. 이 대화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세계와 삶을 시작하는 새 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웹진 <제3시대>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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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기독교와 우파 정치의 결합[각주:1]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결합의 다양한 모습들


    먼저 이 글은 책에 포함된 다른 글들과는 성격을 달리한다는 점을 밝혀 둔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보수 기독교 혹은 개신교우파로 명명되는 집단의 다양한 실천들 중 하나에 초점을 맞춘 분석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우파정치와 공모하고 있는지 밝히는 연구들이다. 하지만 이 글은 그와 같은 구체적인 연구들에 대한 일종의 메타비평적 평가다. 이 책에 실린 연구 논문들의 성과를 요약하고 평가하면서 향후 보다 발전적인 연구를 위한 과제들을 제시하려는 것이 글의 목적이다. 


    한국 개신교가 보수적 한국사회 형성에 기여하고 공모해 온 내용들을 다룬다는 큰 틀에 모두 포함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연구 주제 혹은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세 가지 범주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첫째 범주는 이 책의 기획 의도를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1980년대 이후 보수적 기독교와 우파정치가 결합하는 형태에 초점을 맞춘 연구들이다. 개신교의 동성애 반대운동에 초점을 맞추면서 개신교 우파 혹은 개신교 뉴라이트의 정치적 등장을 분석하고 있는 김나미와 조민아, 그리고 개신교의 교육프로그램이 내세우는 아버지 표상을 분석함으로써 개신교가 우파 정치의 의제들과 결합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숙진의 글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한국형 대형 교회 안에서 실천되고 있는 교육, 선교, 사목 프로그램들을 분석하여 뉴라이트 정치경제 담론과 웰빙담론의 결합을 분석하고 있는 김진호의 글, 보수적 개신교 안에 일종의 개혁운동으로 전개되어 왔고, 비록 소수이긴 해도 보수 개신교 내에서 지적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복음주의지식 담론’을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는 김현준의 글, 그리고 한국 개신교의 해외선교 동원담론인 ‘한국형 선교담론’을 분석대상으로 하고 있는 박설희의 글 역시 한국 개신교의 목회적, 교육적, 선교적, 신학적 실천들 안에서 보수 우파의 정치적 의제들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범주는 박정희 시대의 복지정책 혹은 복지체제와 그 안에서 이루어진 기독교의 복지 실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유승태와 정용택의 글이 포함된다. 유승태는 박정희시대에 정부의 부랑아 정책의 실패와 그 결과로 외원단체들이 부랑아들을 위한 사회복지 책임을 감당하게 되는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부랑아를 고아로 재명명하고, 이들을 위해 복지를 제공하던 기독교 외원단체들에 의해서, 부랑아를 위한 사회복지가 한국 보수주의의 형성에 기여해온 측면을 밝히고 있다. 정용택의 글은 사회복지적 측면에서 박정희 시대의 발전주의 복지체제론과 한국교회의 성장주의가 어떻게 공모해 왔는가를 보여줌으로서 한국사회의 보수주의 형성에 교회가 기여해온 측면, 그리고 한국교회가 보수적이고 우파적인 정체성을 형성해 온 측면을 설명해 보려고 한다.


    셋째 범주는 김흥수와 이진구의 글을 포함 할 수 있다. 우선 김흥수의 글은 한국기독교에 의해서 이단으로 취급받은 대표적인 종교운동인 통일교, 전도관, 용문산 기도원 운동을 분석하여 한국 개신교가 이들을 어떻게 타자화하고 이단시하였는지 보여준다. 한국 개신교와 우파정치가 구체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하게 종교적인 문제로 보이는 이단 논쟁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한국 개신교의 근본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글이다. 이진구는 종교차별, 템플스테이, 땅밟기와 같은 사건들을 둘러싼 보수 개신교와 불교계 그리고 정부 사이의 갈등과 논쟁이 종교차별, 종교자유, 정교분리라는 헌법적 개념을 둘러싼 해석투쟁의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글 역시 개신교가 우파정치와 결합에 구체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의 기획의도와 관련해서 중요한 함의를 갖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성시화 운동이나 땅밟기 사건 등을 둘러싼 불교계의 반응은 오히려 보수 개신교와 보수정치의 결합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보수개신교가 우파정치와 결합하여 정치화하는 한 양상이 법적 개념들을 둘러싼 해석투쟁 혹은 담론투쟁의 형식으로 전개된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다.


    이렇게 전체를 요약해 놓고 보면, 1980년대 이후 보수 개신교의 정치적 세력화에 보다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책의 기획 의도는 한국 개신교와 우파 정치의 결합 혹은 공모 관계를 밝히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미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연구 대상이나 연구 방법 면에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미 명시적으로 정치화된 실천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김진호와 이숙진이 교회 교육프로그램을 대상으로 삼고, 정용택과 유승태가 교회의 사회복지적 실천들을 대상으로 삼듯이, 교회의 대사회 활동이나 교계 활동은 물론이요, 교회의 다양한 목회적, 교육적, 선교적 실천 활동들이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연구의 방법 면에서도 훨씬 더 다양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적으로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과거의 신학적 해석들이 보여주고 있던 한계를 많이 벗어나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 개신교의 보수성이나 배타성에 대한 연구는 근본주의 신학 전통과 식민주의적 선교역사라는 두 측면에서만 해석해 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보수성과 배타성에 대한 이미 정형화된 보편적 특성을 설명할 수는 있었다 해도, 한국의 특정한 시기 특정한 상황에서 다양한 행위 주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교회의 보수성과 배타성이 발현되는 구체적인 현상을 설명해 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에 포함된 연구들이 동원하고 있는 사회학적, 인류학적, 문화비평적 연구 방법들은 한국사회의 변화 과정 안에서 다양한 행위주체들과 교회의 상호작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진전을 이루어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방법론적으로 훨씬 더 다양화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미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보여주듯이,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형태로 기독교적 실천이 우파 정치와 결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모습으로 정치화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교리적, 심리적,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측면들을 함께 고려해야 보다 충실한 설명이 가능할 것이고, 그래서 다양한 방법론이 서로 교차하면서 시도되고 적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결합의 사회적, 교회적 조건들


    우선 1980년대 말 이후 한국의 보수 개신교가 우파 정치와 결합하면서, ‘개신교우파’ 혹은 ‘기독교 뉴라이트’의 형태로 등장할 수 있게 한 사회적 혹은 교회적 조건들은 무엇일까?


    사회적 조건이라는 측면에서는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민주화 그리고 90년대의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 경제 지구화 과정으로의 편입이라는 변화의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김진호에 의하면 이 시기의 문제는 민주화가 다양한 행위 주체들 사이에 민주적 의사조정과 합의가 가능한 정치적 질서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내지 못하고, 그 부분적 성취마저도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천박한 상업적 자유와 결탁해 버린데 있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국민은 시민이 되었지만, 그 “시민은 시장화 되어버렸다”고 본다. 말하자면, 87민주화 이후에 진보진영은 민주적인 정치질서를 안정시키고 민주사회의 시민들을 위한 건강한 주체화 양식을 제공하는데 실패했고, 그 실패가 만들어낸 불안정한 상황이 보수우파들이 통합과 발전이라는 의제를 들고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고, 동시에 권위주의 시대를 향한 향수가 표출될 수 있게 했다는 뜻이 된다. 이 상황은 보수 우파 정치를 위해서는 과거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회복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형식 혹은 주체화양식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개신교의 동성애 반대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김나미와 조민아는 90년대 동성애 인권운동과 이반운동의 등장을 중요한 사회조건의 변화로 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젠더위계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상황에 대해서 이숙진은 가부장적 젠더 질서를 살아 온 아들들이 민주화와 경제위기 과정을 통해서 아버지를 살해한 이후에 직면한 거세불안의 공포에 시달리면서 다시 아버지를 소환하는 상황이라는 심리적 해석을 내 놓고 있다. 민주화와 경제위기는 권위주의 시대의 젠더위계질서를 흔들었고, 그래서 새로운 젠더질서를 향한 가능성을 열기도 했지만, 동시에 형식을 변화시켜서라도 가부장적 젠더위계질서를 유지하려는 힘을 결집시키는 계기도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 과거의 독재적 권위주의적 질서를 극복하고 민주적 질서를 더욱 진전시켜야 하는 진보세력을 위해서도, 또 과거의 헤게모니를 회복하고 유지시키려는 보수 우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도 새로운 주체화 전략이 필요했던 것이고, 이 새로운 주체화 전략은 당연히 새로운 타자화의 대상과 전략들을 필요로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진보와 보수 양측의 다양한 주체화 (혹은 타자화) 전략이 어느 쪽도 확실한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서로 각축하던 상황이 바로 기독교를 포함한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보수 우파의 정치적 재등장 혹은 재 정치화과정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결합의 담론 전략: 주체화와 타자화 형식의 진화


    그렇다면 80년대 말 90년대 이후 교회는 어떤 변화와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인가? 소위 말하는 개신교 우파의 강화된 정치적 실천은 물론이요 김현준이 관심하는 복음주의 지적 담론이나, 박설희가 관심하는 한국형선교담론의 등장을 가능하게 해준 교회내의 조건은 무엇인가? 김현준은 90년대 한국 개신교 상황을 성장의 정점에 달한 자신감과 동시에 성장의 정체로 인한 위기감이 교차하는 시기로 보고 있다. 조민아 역시 90년대는 한국교회가 성장 정체와 사회적 신뢰와 영향력의 약화라는 위기를 겪는 시기 이지만, 동시에 이 위기 앞에서 자기혁신을 수행하기 보다는 배타적 근본주의 신학을 강화하고 보수적 정치와 결함함으로써 돌파하려는 세력이 결집했던 시기라고 본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김진호, 이숙진, 김현주, 박설희는 한국개신교 내의 속사정을 보다 복잡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90년대를 단순히 개신교 반동의 시기로 보기 보다는, 과거의 권위주의 시대를 주도해 온 근본주의 신학, 교회성장모델, 선교와 사목의 표현방식 등이 문제가 있음을 개신교 자신도 깨달아가는 과정이었고, 다시 과거의 헤게모니를 회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형식의 주체화 전략과 타자화 전략, 새로운 형식의 교회론과 신학을 만들기 위해서 보수 개신교가 능동적으로 노력했던 시기라고 보고 있다. 김현준의 ‘복음주의 지적 담론’이나, 박설희가 말하는 ‘한국형선교’라는 해외 선교 동원 담론 역시 그러한 개신교의 자구 노력의 산물이다. 뿐만 아니라, 김진호가 말하는 웰빙 우파의 생산기지로서 ‘후발 대형교회’나 이숙진이 말하는 한국 개신교의 교회적 국가적 위기 타개를 위한 새로운 아버지 표상 만들기 역시 그러한 노력의 일부다. 더 나아가 동성애 반대운동이 ‘종북게이’와 같은 개념을 만들어 혐오와 공포의 타자화 정치로 나가게 되는 것도, 과거 헤게모니를 회복하기 위한 개신교 자구 노력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단순히 무지나 시대착오로 보기 보다는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위한 용의주도한 노력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때문에 90년대 이후 한국 교회는 단순히 복고적으로 반동적 정치만을 강화한 시기가 아니라, 훨씬 더 세련되게 시민적 소비자적 감수성에 맞게 주체화 전략과 타자화 전략을 구사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처럼 과거의 헤게모니를 회복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는 노력 가운데 개신교 우파 혹은 기독교 뉴라이트라 불려지는 보수정치와 개신교의 결합체들이 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 시대 특정한 정치형식 혹은 종교적 실천 형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회적 조건을 이와 같이 매우 동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에 속한 글들이 공유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장점이요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집단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각축 속에서 정치적 종교적 실천들과 그 실천과 관련된 담론들을 분석한다는 것은 종교학적 연구는 물론이요 신학적 연구를 위해서도 매우 의미 있는 방법론적 진전이라고 본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김진호, 이숙진, 김현주, 박설희는 한국개신교 내의 속사정을 보다 복잡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90년대를 단순히 개신교 반동의 시기로 보기 보다는, 과거의 권위주의 시대를 주도해 온 근본주의 신학, 교회성장모델, 선교와 사목의 표현방식 등이 문제가 있음을 개신교 자신도 깨달아가는 과정이었고, 다시 과거의 헤게모니를 회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형식의 주체화 전략과 타자화 전략, 새로운 형식의 교회론과 신학을 만들기 위해서 보수 개신교가 능동적으로 노력했던 시기라고 보고 있다. 김현준의 ‘복음주의 지적 담론’이나, 박설희가 말하는 ‘한국형선교’라는 해외 선교 동원 담론 역시 그러한 개신교의 자구 노력의 산물이다. 뿐만 아니라, 김진호가 말하는 웰빙 우파의 생산기지로서 ‘후발 대형교회’나 이숙진이 말하는 한국 개신교의 교회적 국가적 위기 타개를 위한 새로운 아버지 표상 만들기 역시 그러한 노력의 일부다. 더 나아가 동성애 반대운동이 ‘종북게이’와 같은 개념을 만들어 혐오와 공포의 타자화 정치로 나가게 되는 것도, 과거 헤게모니를 회복하기 위한 개신교 자구 노력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단순히 무지나 시대착오로 보기 보다는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위한 용의주도한 노력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개신교 우파의 신학, 선교, 사목, 혹은 교육 담론들 안에서, 종교적이고 신학적이 의제들과 우파 정치적 의제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가? 민주화와 소비사회로의 변화 과정에서 보수 우파, 그 중에서도 특히 개신교 우파가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재생산하기 위해서 어떻게 국가와 교회와 시민 혹은 신자를 재정체화하거나 재주체화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를 위해 타자 만들기는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이 책에 포함된 연구들의 공통관심사다.


    필자들은 권위주의 시대 보수 개신교와 군사정권의 관계는 발전과 개발과 성장을 위한 일종의 권위주의 동맹 관계라는 전제하에서 출발한다. 보수 개신교는 발전을 위한 총동원체제의 유지를 위해서 필요했던 문화적 장치였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 동맹관계의 기본적인 특징은 김나미의 설명을 따르면 ‘과잉남성적 개발주의’다. 권위주의 시대 개신교 교회의 빠른 성장 역시 과잉남성적 개발주의가 생산하고 유지하는 젠더위계질서 위에서 이루어진 성장이다. 민주화와 소비사회의 진전, 그리고 동성애 인권운동과 이반운동 등장은 이 권위주의적 동맹체들에게 위기로 다가왔고, 특히 보수 개신교는 보다 강력한 혐오와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진화된 타자화 전략을 통해서 그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다. 이 진화한 타자화 전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어가 조민아에 의하면 ‘종북게이’라는 용어로 탄생이다.


    ‘종북게이’라는 신조어 안에는 반공주의와 호모포비아가 결합되어 되어있고, 종북과 동성애로부터 순수한 사랑과 가정과 군대와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우파의 애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혐오와 배제의 새로운 구성을 통해서 배타적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타자화 전략과 주체화 전략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투적이고 근본주의적이 방식의 정체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전략적이고 그래서 보다 문화적이고 미학적인 접근들도 있다.


    이숙진이 말하는 개신교의 아버지 교육프로그램이 만들어 내는 아버지 표상은, 민주화와 개인화된 시대의 감각에 맞는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 상이다. 하지만 이 표상은 가부장적 가족 판타지를 강화하고, 권위주의 시대 젠더질서를 표현만 바꾸어 유지하고 있다. 아버지 교육은 차별적인 성별분업과 젠더위계질서를 기능적인 차이로 위장하고 은폐할 뿐만 아니라, 가족, 국가, 교회의 모든 문제를 아버지 품성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가부장적 권위 질서를 유지시킬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적 구조적 차원의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한다. 김현준이 말하는 복음주의 지적 담론 역시 보수 개신교의 사회적 역할과 설득력을 강화하기 위해 변화된 시대에 맞는 보다 지적이고 문화적인 표현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하지만 근본주의적 문화코드를 포장만 달리해서 유지할 뿐만 아니라, 근본주의적 타자화 논리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박설희의 한국형선교라는 해외선교동원담론 역시, 민주화와 함께 신뢰와 사회적 역할을 잃고 있는 교회와 신자들의 재주체화 전략의 일부이며, 교회 밖의 문화와 사상의 공격으로부터 교회의 권위적인 질서를 방어하기 위한 노력이며, 세계적 사명감을 강조함으로써 현재 교회의 문제를 은폐하면서 오히려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다. 국내에서 무슨 문제가 있든, 세계시장에서 먹히는 것이 답이라는 생각으로, 또 지금까지의 성장의 성과를 세계와 나누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기업의 세계화담론과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총동원 담론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것이 한국형 선교담론이다. 그래서 다분히 우파 민족주의적으로 해석된 한국적 성취의 경험이 글로벌 스탠다드화 결합하고, 서구 선교사 전통과 신학, 친미와 반공주의, 그리고 한국교회의 경쟁적이고 개별 교회중심적인 성장주의가 절묘하게 결합하여 ‘한국형 선교’에서 한국형의 본질을 형성하고, 선교를 위한 해외동포를 포함하는 민족 총동원 담론이 된다.


    소망교회, 온누리교회, 사랑의 교회로 대표되는 후발대형교회의 목회와 교육 프로그램들을 분석하고 있는 김진호는 이들 교회들을 우파의 새로운 주체화 양식을 위해서 뉴라이트 담론과 웰빙 담론의 결합이 진행되는 실험 공간 혹은 인큐베이터처럼 보고 있다. 한편에는 신자유의 시대에 맞게 해석된 보수주의, 그래서 계급 편향성이 강하고, 약자와 실패자의 배제를 두려워하지 않는 보수주의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상품화와 시장화와 속도화에 지친 사람들의 웰빙의 욕구가 있다. 그리고 이 둘이 결합하여 향후 우파 정치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웰빙우파라는 주체를 생산한다. 그리고 이 주체 생산의 전진 기지 역할을 바로 후발대형교회가 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성과와 과제


    다시 한 번 전체 연구의 의도와 목적을 정리하면, 먼저 보수 개신교와 보수 우파정치가 어떻게 결합해왔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국 보수우파 형성에 개신교가 어떤 기여를 해 왔는지 밝히려는 큰 목표 하에 있다고 생각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80년대 후반의 민주화와 9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 이후라는 특정한 상황에서, 보수개신교와 우파정치가 결합하는 양상을 교회들의 명시적 정치적 실천뿐만 아니라, 종교적 담론적 혹은 교육적 실천들을 분석하여 파악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먼저 방법론 측면에서 전체 연구가 보여주는 특별한 기여에 대해서 평가해 본다. 첫째는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지역적이고 가장 특수한 현장 그 자체의 살아있는 움직임에 시선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김나미와 조민아는 미국 개신교우파들과 한국의 개신교우파들 사이에 많은 교류와 공감이 있음을 밝혀준다. 하지만 김나미는 보수 개신교의 보편적 혹은 지구적 현상으로만 문제를 바라보아서는 특별한 시기와 특별한 조건 하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결합 혹은 정치화 양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김나미의 주장은 지금까지 개신교의 근본주의적 경향이나, 반공주의적 경향, 혹은 문화적 종교적 배타성이나 공격성들을 평가해왔던 연구들에 대한 방법론적 비판과 관련된다. 이미 말했듯이 개신교의 근본주의적 배타성에 대한 비판은 주로 두 가지 비평적 틀에 의존해 왔다. 하나는 보편적 개신교 근본주의에 대한 신학적 혹은 심리적 비판의 틀이고, 다른 하나는 피식민지 교회가 서구와 선교 종주국과 맺고 있는 심리적, 문화적, 정치적 식민주의적 관계다. 이러한 보편적 접근이 개신교 우파 혹은 기독교 우파의 보편적 특성 혹은 과거 식민지에서 보수 기독교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보지만, 구체적인 문제를 탈맥락화하여 맥락과 무관한 진단과 해결책을 제시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런 점에서 구체적 현장에 집중하여 그 현장으로 부터 문제를 해석하려는 태도는 방법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둘째로 구체적인 상황에 초점을 맞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다양한 행위 주체들이 각기 자신들의 헤게모니 구축을 위해서 각축하면서, 개념이나 담론 혹은 다양한 정치적 실천을 둘러싸고 경쟁하고 갈등하는 상황을 보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점이 중요한 이유는, 더 이상 문제의 원인을 심리적인 요소나 신학적인 요소로 환원시킬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개신교 우파들의 때로는 극우적이기까지 한 정치적 실천을 무지나 불안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교리적 원리를 향한 신앙적 헌신과 열정의 탓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위기에 직면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서로 각축하는 현장에서 재정체화 혹은 재주체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형식의 정치적 표현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각주:2]

    셋째로 신학의 언어적 담론적 성격에 대해서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연구들은 헤게모니를 위한 담론 전쟁, 담론을 둘러싼 권력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으로부터 다양한 정치적 실천과 종교적 신앙적 개념들과 전통들이 해석되고, 또한 새로운 정치-종교적 실천으로 구축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개신교 우파의 신학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 현장은 바로 신학이 재해석되고 재전유될 뿐만 아니라 유통되어 어떤 효과를 산출해야 하는 그 현장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신학이 아무리 계시적 성격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 계시는 우리 삶의 다른 측면과 관계 맺어야 한다. 때문에 그 계시를 언어적으로 성찰하고 재현하는 과정과 함께 신학은 비로소 시작된다.[각주:3] 그래서 신학은 필연적으로 언어적이고 담론적일 수밖에 없고, 하느님에 관한 어떤 이야기도 언어적 재현의 문제 밖에 있지 않고, 필연적으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신학은 자신의 존재 이유는 물론이고 그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영향력마저도 언어적이고 담론적인 각축의 현장에 참여하여 담론의 변혁 혹은 문화의 변혁을 위한 효과로서 입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부족함에 대한 아쉬움 보다는 새로운 과제를 발견하는 기쁨을 나누고 싶다. 개신교 우파, 혹은 기독교 뉴라이트의 담론들과 실천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 그들의 주체화 전략 혹은 타자화 전략의 해명을 일차적 관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대상과 관심의 경계가 명료한 만큼이나, 배제되고 가려진 영역도 훨씬 선명해 보인다.


    정치화한 개신교 우파들의 정치적 행동들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재주체화된 웰빙우파나, 새시대의 부드러운 아버지상, 그리고 지성적인 복음주의자의 모습, 그리고 국가와 교회를 위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선교사의 모습들 안에 깊이 도사린 우파 헤게모니 정치와의 공모관계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호크하이머의 말대로, 비평은 단순히 ‘설명적’이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현재의 사회적 실재를 설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그 사회를 변화시킬 행위자들을 재정체화할 수 길을 찾는 노력이어야 한다.[각주:4] 그래서 담론 분석이나 비평은 단순히 유통가능하고 경쟁 가능한 담론을 만들어 내기 위한 전초전 같은 것이 아니고, 변화와 변혁을 위한 구체적인 행위자들을 위해서 용기와 격려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배 질서의 틀을 설명하되 헤게모니의 유지와 재생산을 위한 전략을 분석한다는 것에만 만족해서는 안 되고, 그 질서가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고통과 억압의 조건으로 다가 온다는 사실을 보다 깊이 분석해 내야 할 것이다. 지배질서란 곧 사회적 약자들 앞에 펼쳐져 있는 생존투쟁의 환경 그 자체이며, 그들의 삶을 위해서 허용된 선택의 틀이면서 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각주:5] 그래서 우파 헤게모니 담론과 사회적 약자들이 결합하는 양상도 단순히 동원의 개념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감수한 선택일 수 있다. 그러므로 민중적 삶의 조건의 일부로서 개신교 우파의 담론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해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민중의 삶의 실상이 제대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삶 안에서 새로운 인간 정체 혹은 주체를 향한 희망을 찾고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김진호의 표현대로 웰빙우파의 등장과 그로테스크한 민중의 등장이 함께 가고 있는 것이라면, 이제 다음 차례는 웰빙 우파의 주체화 전략을 넘어 변화된 조건들 속에서 이 시대의 민중들은 자신의 삶의 선택을 위해서 어떤 고통과 아픔을 감내하고 있는지 읽어야 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티스토리 블로그 '올빼미의 밥상'(http://owal.tistory.com/460)에 실려 있는 글입니다. [본문으로]
  2. 우파 종교운동 혹은 정치적 기독교우파 운동이 나타나는 원인을 설명하는 방식이 계속 변화해 온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다음 논문을 참고하라. Michael Lienesch, “Right-Wing Religion: Christian Conservatism as a Political Movement”, Political Science Quarterly, Vol.97, No. 3(Autumn, 1982), pp.403-425. [본문으로]
  3. 신학의 언어적 성격에 관해서는 영국 신학자 Graham Ward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둔다. 특별히 다음 책을 참고하라. Graham Ward, Theology and Contemporary Critical Theory (London: Macmillan Press, 2000). [본문으로]
  4. Bohman, J. (1996). “Critical theory and democracy”. In D. Rasmussen (Ed.), The handbook of critical theory (Oxford: Blackwell, 1996), p.190. [본문으로]
  5. 감정사회학자 Eva Illouz의 선택의 생태계와 구조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다음을 참고하라, 에바 일루즈 지음, 김상희 역, 《사랑은 왜 아픈가:사랑의 사회》 (돌베게, 1979), 43-50을 보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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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그 분파주의적 과거가 되살아나다.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500년전 유럽의 종교개혁 역사가 한국 교회의 현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애써 무시하고 싶어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과거의 아픈 역사를 지금 되짚어 보는 것이 한국 교회를 위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회의적 시각도 많이 있었다. 종교개혁의 역사에 대해 애써 무관심하려는 회의적 태도는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종교개혁이 한국교회의 신학과 선교에 끼쳐 온 그 분파주의적 영향을 생각하면 그 기억을 다시 상기하는 것 조차 불경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개혁 유산의 영향을 깊이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어떻게 그 사건을 다시 기억해야 할지 판단한 겨를도 없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은 한국교회의 중요한 현안이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깊이 우려했던 대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교회 개혁 노력은 "이단심판"이라는 시대착오적 주제와 깊이 얽혀 들어가고 있다. 예장합동총회 이단대책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사람은 이단대책을 확실히 정착시키는 것이 개혁신학의 전통을 바로 세우는 것이며 나아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의미 있게 맞이하는 길이라 하고 있으며, 보수 기독교 신문들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은 교회개혁이고 교회개혁은 곧 이단대처를 통해서라는 인식을 계속 전파하고 있다.


    이단문제가 한국교계의 중요한 현안이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이단 구별 지침 같은 것을 만드는데 열중했었고, 최근에는 동성애와 이슬람을 반드시 배제해야 할 대상에 포함시켰다. 예장 합동 총회가 금년 9월 총회 통과를 위해 내 놓은 헌법 개정안을 보면 이러한 분파적 배제의 원칙은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여성의 목사 안수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기 위해서 기존 헌법의 “연령은 만 30세 이상자로 한다”라는 규정을 “연령은 만 30세 이상자인 남자로 한다”로 변경하고 있으며, 목사의 직무 조항에 “본 교단 교리에 위반된 동성애자의 세례와 주례와 또 다른 직무를 거절할 수 있고 목사의 권위로 교회에서 추방할 수 있다(이단에 속한 자도 이에 준한다)”라는 규정을 삽입했다. 이 개정안을 내 놓은 헌법 개정위원회는 동성애의 확산과 여권신장 등의 사회적 변화에 맞서 자기 교단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개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고, “양성평등”을 “성평등”으로 수정한 국가인권위의 헌법개정안이 통과될 경우를 대비해서 동성애 반대로 인한 고소고발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예장합동총회 이단 대책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다른 일곱 개 교단이 합세하여 성소수자들과 함께해온 기독교 장로회 섬돌 향린교회의 임보라 목사를 이단 조사하겠다는 선전포고를 하는 사태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은 이단심판 논쟁으로 점철되고 있다.


    중세의 마녀사냥이라는 것도 다르지 않았겠지만, 이단 대처를 외치는 이들의 주장 속에는 곳곳에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깊이 배여 있다. 아니 이미 내부로부터 변화하고 있고 바닥으로부터 흔들리고 있는 교회 공동체를 과거로 되돌리겠다는 무모함이 가득하다. 변화를 새로운 도전이나 계기로 받아들이고, 그 계기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로 재 탄생하려는 노력이 아니다. 기존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고, 그 기득권 상실의 위험을 느끼는 사람들을 결집시키려는 노력이며 공격이다. 자신 교단도 아닌 기독교 장로회 소속 임보라 목사를 향해 이단심문을 해 보겠다는 것이 바로 그런 전략이 아닐까? 무엇보다 먼저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내부를 결속 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내부의 문제를 외부를 향한 공격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 교계를 이 프레임 속으로 몰아 넣기 위한 전략이다. 기독교 장로회를 포함한 이단논쟁의 프레임 밖에 있는 교회들을 그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계획이다. 그렇게 하면 그 프레임 밖에 있는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신들 편으로 더욱 분명하게 뭉칠 것이라는 계산이다. 


    어쩌면 종교개혁이 이단논쟁과 만나는 이 모습은 결코 낯선 예상 밖의 일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지나치게 이상화된 종교개혁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각 교파 교회들은 종교개혁에 자신들의 정체성의 뿌리를 두고 있고, 자신들의 신학적 교리적 진정성과 정통성의 뿌리를 개혁가들에게서 찾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구 국가들의 민족적 정체성의 뿌리들도 대개는 이 종교개혁과 맞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각 교파교회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이상적인 것으로 표현하려는 의지만큼 종교개혁의 역사는 이상적으로 그려졌고,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국가적 기원과 정체성을 이상적으로 그리려 하는 만큼 종교개혁의 역사 또한 그렇게 그려져 왔다.


    하지만 종교개혁 시대 참혹한 분열과 갈등 그리고 폭력과 전쟁의 역사를 생각하면, 종교개혁은 그렇게 이상적으로만 그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에른스트 르낭은 “망각이 민족 창출의 근본 요소다”라고 했는데, 이 표현은 종교개혁을 통해 갈라져 나온 교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르낭의 말은 종파주의적 대결과 분열의 과거를 망각함으로써 일체감을 갖는 민족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대결과 분열과 폭력과 전쟁의 과거를 해소하거나 극복하거나 화해하는 것이 아니고 “망각”이라 했을까? 물론 르낭은 다양한 종족, 언어, 문화 그리고 이해관계들이 모여 민족을 이루는 경우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 다양한 집단 사이에 과거에 있었던 대결과 적대의 기억을 망각함으로써 민족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역사를 생각해 보면 서로 대결하던 분파들이 공동의 적을 만나서 함께 뭉침으로써 과거의 갈등을 망각하고 하나의 민족 혹은 국민을 이루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종파주의적 대결이 때로는 폭력적 과정을 포함한 긴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결론 날 때, 그것은 적을 악마화하고 배제해 온 편견이 일반화되어 의심 없이 공동체 안에 받아들여짐으로써, 갈등의 해소와 화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체제가 되는 경우다. 그래서 과거의 갈등과 대결 자체를 자신들의 우월의식을 위한 기초로 삼을 뿐 더 이상 화해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로 삼지 않는 경우다. 아마도 이것이 종교개혁 역사가 교파교회를 성립하는 과정에서 작동했던 망각의 실상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교파 교회들이 종교개혁의 유산으로부터 물려 받은 정체성 안에는 이 망각의 영역이 숨어있다. 곧 타자를 향한 체계화된 편견의 영역이 있고, 해결되고 화해되고 해소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분파주의 정신이 그 안에 숨어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결과들은 분파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거나 그 중도적 혹은 대화적 해결의 길을 찾아서 이루어진 화해의 결과들이라 할 수 없다. 종교개혁 과정은 해결이나 화해가 가능한 중도적 과정이나 중간지대를 많이 허용하지 않는 과정이었고, 오히려 어느 한쪽을 무조건적으로 택함으로써 이루어진 과정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생성된 공동체의 일치는 그 자체가 이미 배제의 체계요, 편견의 체계요, 분파주의적 일치다. 참된 화해와 일치의 과정과 가능성은 제거되거나 망각된 체계로 보인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 공동체의 경계나 일치가 위협 받을 때는, 해결되지 못한 분파주의적 대결과 폭력적 배제의 태도가 발동한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과 이단논쟁이 서로 얽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은 이처럼 망각 상태에서 은둔해 있던 종교개혁의 분파주의적 과거가 되살아 나고 있는 모습일지 모른다.


    갈등과 대결에 대한 참다운 기억, 곧 화해의 책임을 품은 갈등과 대결의 기억을 잊어버린 그 망각은 튼튼하고 높은 울타리 안에서 편안하게 편견을 유지하고 지킬 수 있는 체계를 허락한다. 하지만 그 곳은 긴장과 갈등의 현장으로부터의 도피처요, 참다운 평화와 화해를 향한 길을 포기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믿음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선교적 순례나 모험의 공동체가 아니라 스스로 울타리 안에 갇힌 공동체다. 적과 아군을 식별하는 경계선은 뚜렷해 보여도 경계를 넘어 타인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공동체다. 이것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이단 논쟁에 몰두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처럼 보인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진정한 신학적 성찰과 반성은 이 망각의 영역을 파헤쳐 실상을 드러내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갈등과 대결의 분파주의적 승자로서의 자부심이나 명확한 피아 식별의 기준에 대한 확신을 자랑하기 보다는, 갈등과 대결의 현장에서 참다운 화해의 일꾼으로 사는 삶을 찾아야 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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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다운 나라,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정치를 위해서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만나는 사람마다 요즘 뉴스 보는 재미가 있다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비서진들과 커피를 들고 산책하거나 청와대 직원들과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유쾌한 김정숙 여사가 사람들을 만나는 모습,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전혀 새롭지 않은 평범한 것들인데 가슴이 뛰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특히 세월호 참사로 숨진 단원고 기간제 교사 김초원 선생과 이지원 선생의 순직을 인정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발표 되었을 때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두 분의 순직을 인정함으로써 스승에 대한 국가적 예우를 다하려 한다"는 말에, 지난 10년 아니 지난 반세기 이상 짓밟히고 억눌려 온 사람의 마음 그 당연한 상식과 도리가 마침내 되살아 나고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처럼 감격하는 사람들의 마음, 기대와 희망에 부푼 심정들이 다시 절망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는 길에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또 생각만큼 빠르지 않아 답답함을 견뎌야 할지라도, 바른 길로 꾸준히 걸어 갈 수 있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아직은 허니문 기간이라, 기득권의 저항이 수면아래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조급하고 노골적입니다. 대통령 파면이 결정되고 이틀도 지나지 않아 사면 이야기를 꺼내 들었던 보수 언론의 뻔뻔함은 이번에도 단 일주일도 참지 못하고 본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재수사, 국정농단 사건과 정윤회 사건에 대한 재수사까지는 그래도 말을 아끼지만, 역사교과서 폐지나 싸드 배치에 대한 재검토 정도에 오면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옵니다.


    적폐 청산은 좌파 운동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배타적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것이고, 우파를 괴멸시키기 위한 전략이라 할 것입니다. 류근일 같은 사람은 적폐청산은 곧 운동권 본색을 너무 조급하게 드러내는 모습이라고 평합니다. 그리고 국정농단 사태를 방조해온 검찰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이임사를하면서 자신은 어떤 경우에도 진실이 가려지거나 정의가 외면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왔다고 강변합니다. 오히려 새 정권을 향해서 나만 정의롭다는 생각은 위험하다고 충고까지 하면서, 수사의 미덕은 절제라고 가르칩니다. 적폐청산은 새 정권과 그 정권의 배후에 있는 운동권의 전략이며, 반미친중적이고 종북적인 본색을 드러났다고 대 놓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국민은 속았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광화문 촛불 민심은, 종북적 운동권의 선동에 놀아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촛불의 광기가 아니라, 합리적인 정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적폐청산이 아니라 통합을, 통합을 위해서 박근혜도 사면하고 기득권도 인정하라 할 것입니다. 새 정부가 출범한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이 기득권의 저항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냉철하게 주시하면서, 길을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새 정부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 합니다. "이게 나라냐?"라고 외치며, 한 해 겨울을 거리에서 촛불로 지샌 민심이 뽑고 세운 대통령과 정부로서, 당연히 그런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새 정부와 대통령은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국정을 농단했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 아닙니다. 지난 9년간 아니 그 보다 훨씬 오랜 동안, 시민을 모욕하고 협박해 온 권력, 시민들과 유권자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자신들이 결정하고 밀어붙이고 억압하고 강요해 온 권력에 대한 절망과 분노의 표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민중의 개 돼지라고 말하는 세상, 사람과 생명이 물건이 되고 숫자가 되는 세상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 외침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은, 오직 권력만을 지킬 뿐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 대한 절망의 표현입니다.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정치와 경제가 만들어 내는 세계 속에서, 여기 인간이 있음을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요 외침인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도 우리가 보았던 것은 사람과 생명이 무시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예측 불허의 충동적인 인물 트럼프에게서도, 정상적인 상식으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김정은에게서도, 그리고 그 둘이 벌이고 있는 위험한 게임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우리를 볼모로 잡고 희생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주권을 가진 국민과 국가가 당연히 행사해야 할 권리와 수용절차를 무시한 채, 고고도비사일방어체계 싸드를 배치하는 동맹국 미국은 물론이요, 동맹국의 요구라 해서 국민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배치를 서두르는 대한민국 정부, 그들에게 과연 이 한반도를 살아가는 사람과 생명에 대한 관심은 있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싸드 배치와 관련해서 보복조치를 감행하고 있는 중국, 또 그 기회를 군사적 무장의 기회로 삼고 있는 일본에 둘러 싸인 채, 이 나라의 국민들은 '정말로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해 줄 나라가 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새 정부는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새 정부가 추구하는 촛불을 계승하는 시민주권의 광화문 시대는, 시민들이 스스로 참여하여 스스로를 지켜 낼 수 있는 확신에 찬 나라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새 정부와 대통령이 국정철학과 방향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도 염려가 되어서 몇 가지 생각을 더 말해 봅니다. 먼저 신영복 선생의 도로와 길에 대한 가르침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도는 도로의 논리가 아니라 길의 마음입니다. 도로는 속도와 효율성이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이며, 길은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동행하는 인간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매일 직선을 달리고 있지만, 동물들은 맹수에게 쫓길 때가 아니면, 결코 직선으로 달리는 법이 없습니다." 도로와 길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해서 어느 한쪽은 반드시 필요하고 다른 한쪽은 전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길의 마음을 잃어버린 도로를 경계함이요, 사람을 버리고 가는 효율과 속도의 논리 곧 자본의 논리가 가진 위험을 경고함이며, 사람의 관계가 야수적 관계로 변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고발입니다. 그리고 다시 사람과 생명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되살려 내야 한다는 참으로 따뜻한 가르침이며, 사람 사이에 서로 주고받고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영성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 대통령과 정부의 마음 또한 그와 같으면 좋겠습니다.


    성서에도 길에 대한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 14장에 나오는 제자 도마와 예수님 사이에 있는 길에 대한 논쟁도 신영복 선생의 길과 도로에 대한 가르침과 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새 정부가 출범하는 이 때에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은 요한 복음 14장 27절의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평화를 말하는 두 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권력 유지를 위해서 사람과 생명을 희생시키는 평화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참 평화의 길일 것입니다. 핵은 핵으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포의 균형을 유지하려 하고, 상호간에 미움과 증오의 팽팽한 대결을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죽일 각오를 하는 자만이 애국자라고 외치는 평화의 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람과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습니다. 사람과 생명을 희생해서 지키려는 권력의 평화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평화의 길에 굳건히 서기를 바랍니다. 열강들의 이익이 각축하는 이 한반도에서 이와 같은 참 평화의 길을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 속에는, 분명히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평화를 향한 간절한 소망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뿌리를 두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살리는 정치, 사람다운 삶을 향한 소망을 열어주는 정치,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평화통일의 길이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를 온전히 정권이나 권력에게 맡겨 놓고 기다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난 50년간을 생각해 보면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언제나 권력은 민중을 배신해 왔습니다. 결국 촛불의 소망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참여와 감시와 견제는 여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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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이후를 묻다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2014년 4월 16일 그 날부터 사람들은 집에 있거나 길거리에서 풍찬노숙을 하거나 모두가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이건 아니야! 이건 나라가 아니야! 잠꼬대하듯 중얼거리며 이 나라 사람들은 길고 긴 겨울 추위를 견뎌야 했다. 작년 4월 13일 매우 분명한 신호를 보았다.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노라는 결연함의 신호였다. 지난 10월 말부터 3월까지 넉 달도 넘게 촛불은 차가운 도시에 온기를 불어넣고, 식은 가슴에 뜨거운 생명의 율동을 되살려냈다.


    신영복 선생은 주역(周易)에 있는 ‘석과불식’(不食)을 풀이하면서, 겨울 찬바람을 견뎌낸 씨과실(碩果)은 역경과 고난의 상징이지만, 그것을 먹지 않고 땅에 심어 나무로 숲으로 키워내는 일이 석과불식의 정신이라 했다. 바로 이 희망을 위해 나무는 모든 잎을 떨구어 자신의 뿌리를 두텁게 덥고, 오직 뿌리만은 살려 내겠다는 일념으로 벌거벗은 나목으로 겨울 추위에 맞선다고 했다.


    촛불 시민혁명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탄핵은 헌법 1조가 살아 있음을, 국민이 권력의 원천임을 확인해준 사건이었고, 법 앞에서의 평등을, 사람이 법을 만들고 국가를 만든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케 해준 사건이었다. 그 점에서 광장의 촛불은 가장 평화롭고 명예로운 혁명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 혁명은 탄핵의 성취만으로는 결코 다 설명될 수 없는, 오래 묵은 깊고도 간절한 희망의 계시였다. 지난 넉 달 반의 과정을 생각하면, 자신을 보호하고 가릴 수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위해서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것들을 과감히 떨어내고, 오직 뿌리만을 지키기 위해서 북풍 한설 앞에 맨 몸으로 선 겨울 나무의 모습이 촛불 가운데 있었다. 인간과 생명의 존엄과 가치라는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관계의 바탕을 다시 분명히 해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를 품은 촛불이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세월호 참사가 있기 이전부터 참사는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고, 최순실과 박근혜에 의한 국가 권력의 사유화와 독점이 있기 이전부터 공권력의 사유화와 독점은 우리 눈 앞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던 일이 아닌가? 저성장, 고용둔화, 노령화, 대기업 위주의 독식체제가 유지되면 청년층의 중산층 진입 경로가 차단되고, 양극화가 고착화 되고 저변도 넓어지게 되어, 그 결과 각종 범죄와 자살, 사회불신의 고조, 잃을 게 없는 청장년층의 묻지마 범죄 급증 등 사회병리 현상의 확산과 악화를 피할 수 없으리라는 예측과 경고는 하루 이틀 들어온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무절제한 사유화와 독점의 논리가 우리 삶의 깊숙한 곳까지 점령해 들어와 있었고, 그 깊이에서 삶을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순실과 박근혜는 이처럼 권력과 부의 사유화와 독점을 정당화하는 의식의 체계, 문화상징들의 체계, 그리고 개념들의 체계가 만들어낸 것 아닌가?


    촛불은 결코 최순실의 구속과 박근혜의 탄핵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발표하던 날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정작 일어서 뛰거나 소리지르지도 못하고,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있던 세월호 유가족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았다. 그 순간의 감정을 소리 없는 눈물로 표현하고 있는 그들을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걸어온 결코 짧지 않은 과정이 보였고, 앞으로도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걸어야 할 긴 여정이 보이는 듯 했다. 아직은 가야 할 먼 길이 있기에 쉽게 긴장을 놓을 수 없음을 그분들은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탄핵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향한 출발점일 뿐이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 같았다.


    보수 언론은 지금 조급하다. 최순실과 박근혜로 꼬리짜르기 하기 위해서, 촛불을 울타리로 둘러치려고 할 것이다. 촛불은 탄핵을 위한 것이었고, 탄핵은 미르.K스포츠 두 재단 문제와 관련된 것일 뿐이라고 이미 말하고 있다. 그 보수언론과 박근혜 정부가 했던 대부분의 일은 지극히 정당하고, 사드 배치, 위안부 합의, 국정교과서 모두 정당했던 것이고, 오직 미르.K스포츠만 문제라는 사실을 헌법재판소가 명백히 판단해 놓았다고 강변할 것이다. 이렇게 촛불, 미르.K스포츠 재단 운영 문제, 최순실구속 박근혜 탄핵으로 문제 해결, 이라는 폐쇄된 연결고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조급하게 서두르는 이유는, 결국 그들이 즐겨 사용해 왔던 안보프레임을 재가동 시킬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는 것이다. 그와 함께 통합이 적폐청산을 압도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보수 언론에서 통합의 이야기는 박근혜의 사면이야기로 이미 옮겨가고 있다. 정말로 통합이 사면 논의로 옮겨 간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말한 탄핵 당한 전직 대통령의 생각과 만나는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네 달 반이라는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문제의 깊이를 파악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조급하게 울타리를 쳤다 해도, 그 안에 갇히는 촛불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때를 분별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순간의 의미를 하느님의 뜻 가운데서 읽어내려는 사람들이다.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마태16: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 신앙인들에게 시대를 읽는 일,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 지금이 어떤 때인지 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때를 묻는 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지금 여기를 지배하는 가치와 질서에 대해서 파악하는 일이 될 것이다. 둘째는 그러한 질서와 가치가 지배하는 이곳에서, 그것들에 대항해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실천을 하도록 부름 받았는지 파악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소명의 문제다. 촛불혁명은 시대의 실상과 우리의 소명을 한꺼번에 드러내 준 사건이었을지 모르겠다. 촛불이 드러낸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향한 부름에 기뻐 응답하는 삶이 되고, 신학적 실천이 되기를 바란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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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진실에 대한 신념을 회복하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뒤늦은 새해 인사를 전합니다. 지난 한해 동안 웹진 제삼시대를 편집을 맡아 수고해 주신 이상철 목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항상 제삼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해 주시는 모든 분들과, 이 웹진의 애독자들께도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향해, 새로운 사회와 교회를 위한 신학을 찾아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희망 가득한 새해가 되기를 빕니다.  


    새해 첫날 새벽 비행기를 타고 인도 체나이에 와서 대학관계자들 회의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낯선 곳에서 하루 종일 회의실에 앉아 빽빽한 일정을 부지런히 따라가다 보면 시간 감각도 무뎌지고 이때쯤이면 누구나 갖는 여유와 성찰의 시간을 상상하는 것도 어색할 지경이 됩니다. 그러다 문득 방으로 배달된 아침신문을 접어들 때 비로소 시간을 기억해 냅니다.


    체나이에서 발행되는 1월 2일자 데칸크로니컬(Deccan Chronicle)이라는 남인도 지역신문의 우리 식으로 말해서 오피니언란에 실린 아닐 다커(Anil Dharker)라는 언론인의 글입니다. 2016년을 채웠던 테러, 난민, 브렉시트, 그리고 미국 대선이 보여주었던 묵시가득한 세계와 민주주의의 불안을 그는 “트럼프”(trump)라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이미 동사가 되어 버린 단어로 표현합니다. “거짓과 편견이 합리성과 진실을 뒤덮어 승리를 외쳤고(trumped), . . . 선거운동 과정에서 편견을 부추기고 거짓을 퍼뜨리는 일에 전력을 다한 트럼프(Trump)가 미국의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현실, 이것이 바로 2016년 세계의 모습이었다 합니다. 테러와 난민 문제는 서구 사회를 분열시켰고, 문제 해결을 위해 설득하고 조정해야할 국가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고, 거짓과 유언비어로 조장된 공포가 결국은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말입니다.


    터키 해안에서 발견된 세 살배기 어린아이 이안 크루드의 죽음을 바라보며, 함께 아파하고 함께 부끄러워하던 그 마음이 세계인들의 한결같은 마음인 줄 알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비참해지고 낮아질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의 마음을 다들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수치와 분노로부터 인간과 생명의 존엄회복을 향한 사람들의 외침과 참여가 당연히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고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마음이 숨어 있었고 다른 세계가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살던 곳에 살 수 있었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보트에 오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생존의 문제가 아니었다면 국경을 넘어설 각오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난민들의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이라 여겼는데,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감과 두려움이 자라나고 있었고, 오히려 그 상황을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자리 잡았던 것입니다. 난민들을 나의 소유와 나의 특권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여기에 영국 돈이 유럽으로가서 난민들을 위해서 낭비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통했고, 미국인들에게도 이민자들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고립주의적으로 또 내향적으로 자기 자신들만을 바라보는 이기적인 시각을 더욱 거세게 불러일으켜, 온갖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언어와 행동으로 채워진 선거운동이 가능한 상황이 되고, 끝내는 거짓과 편견이 많은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을 압도해 버리는 상황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연말 객담의 자리에서 지금은 “민란의 시대”라고 하시던 어떤 교수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세계 도처에서 민주주의와 정치가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대중이 광장으로 나와,, 예측 불가능하게 자신들을 표현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으로 생각했습니다. 어처구니 없게도 “샤이 박근혜”라는 말도 생각나고, 안심하지 말라 박근혜보다 더한 대통령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경고하시는 어떤 분도 함께 생각납니다. 분명 우리는 광장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에 도취하면 그 광장은 그야말로 대중의 밀실이되고 대중의 도피처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은 어디를 향해갈지 모르는 민란의 한 복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숨어있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마음들이 다시 한번 고개를 들고 무서운 배신을 감행할 여지 마저 충분한 상황입니다. 바로 이곳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교차하는 이 곳에서, 인간과 생명에 대한 새로운 확신과 그것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를 향한 비전을 엮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회의 도중에 영국에서 온 한 신학자로부터 종교개혁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해석을 들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 그 중에서도 영국 종교개혁은 교회론적 변화가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새로운 사회를 향한 비젼이 교회론적 변화의 결과물의 만들어 냈다고 해석했습니다. 교회의 개혁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통해서 온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정말 새로운 이야기 처럼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인간이 비천해지고 낮아진 상황을 거듭해서 탄식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확신과 긍정을 요구합니다. 지극히 시장화되고 상업화된 세계, 그래서 인간마저 상품과 소비재로 삼는 세계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신학적으로 다시 다듬어 내는 일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신학적인간학 자체를 다시 선언하고 일상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서 애써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실 보다는 설득력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세계, 아니 진실이나 진리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세계, 그래서 최대한 사람들의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욕심을 이끌어 내서라도 설득하고 이길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세계, 이런 세계 속에서 진실과 가치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신학적으로 깊이 숙고하고 다듬어 내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곧 광장의 희망을 우리 일상의 변혁으로 그리고 신학과 교회의 변혁으로 이끌어 가는 우리의 광장신학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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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의 근본원인은 아직도 얼굴을 감추고 있다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뉴스가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막장드라마와 리얼리즘의 간격이 일순간 무너진다. 한 두 번만 보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고, 또 마지막 결론까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대개는 그 짐작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예측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다음 회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막장 드라마다. 뉴스를 보는 것인지 막장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인지, 이미 막장 드라마 같은 뉴스에 충분히 중독되어 버린듯하다.  


    그리고 깊은 의심이 생긴다. 막장드라마 같은 뉴스가 사실로 드러날 때 마다, 오히려 그렇게까지 된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막장드라마를 이해하는 상식이면 충분히 예측 가능했던 것인데, 우리는 왜 몰랐던 것인가? 왜 묻지도 의심하지도 않았을까? 막장드라마가 리얼리즘이 되는 이 상황이 못내 의심스럽다. 최대한 앵글을 좁혀 최순실이라는 막장드라마적으로 과장된 캐릭터에 초점을 맞춘다거나, 아니면 최태민을 연결고리로 해서 박근혜와 최순실이 맺고 있는 관계구도에 모든 원인이 있는 것처럼 만든다거나, 그와 같은 초점의 집중과 시계의 한정을 위해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이번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까마득히 몰랐던 것처럼 화들짝 놀란 표정과 목소리와 행동을 나타낼 수 있도록 상황을 구성하고 있는 그 모습이 정말 의심스럽다. 


    어쩌면 “집단 유체이탈 국가”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박근혜-최순실 커넥션이 국정농단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아니 그들의 국정 농단에 충분히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당연히 있을 것인데, 아무도 말이 없다. 박근혜와 최순실을 비호하기 위해서 온몸을 던졌던 정치인들, 박근혜 개인에게 권위의 휘광을 둘러 보수와 애국민족정신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온 언론인들, 감시와 사정의 책임을 버리고 박근혜 권력과 재벌의 시녀가 되어 온 판.검사들, 자존심도 책임감도 없는 관료들, 이들 모두가 마치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다. 문제가 되었던 두 재단에 돈을 기부한 기업관계자가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매우 억울하다는 듯이, 자신들은 어둔 밤 길가다가 강도를 당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복음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여기며 노골적으로 이념과 색깔 놀이의 적극적인 주체가 되어 온 기독교 교계가 이제 와서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은 가짜 목사라고 하면서 일종의 선 긋기를 하고, 자신의 흑역사를 감추는데 급급하고 있다. 사실은 이들, 정치인, 언론인, 법조인, 관료, 종교인, 재벌들은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의 엄청난 혜택을 입은 자들이 아닌가? 아마도 최순실 자신보다 더 많은 경제적 이득을 취한 개인이나 기업이나 집단도 분명히 있을 것인데, 전혀 몰랐다는 표정이다. 


    이 의심스러운 상황전개는 이미 예정된 어떤 결말을 향해서 작동중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사관이 원하는 완벽한 범죄 서사를 다 구성해 주고, 또 범인에 대한 분명한 논리적.서사적 근거를 다 제공해 주고, 유유히 경찰서를 빠져 나와 사라지는 진짜 범인. 대표적인 반전영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1995년작 “유주얼 서스펙트”의 이야기다. 우리들에게 그럴듯한 원인과 결과의 서사를 제공하고, 그래서 처벌하거나 응징해야 할 범인을 정해 주고는, 진짜 원인은 슬그머니 얼굴을 감춰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아니 진짜 원인을 교묘히 가리는 정도가 아니라, 박근혜-최순실 커넥션을 가능하게 한 그 프레임 안으로 우리를 돌려 놓으려고 할 것이다. 만약 우리들의 분노가 아직도 박근혜-최순실의 관계구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향한 깊은 탐색이 진행되지 못하고, 문제를 벗어나기 위한 형식적 절차에 매달린다면, 새로운 비젼 혹은 새로운 대안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결국 분노가 창조적 저항이 되지 못하고,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향한 희망을 만들지 못한다면 시민사회와 대중은 다시 현실과 타협하게 될 것이다.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지금 여기서 현실이 되고 있고, 미래가 될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도 마찬가지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에 그 사태의 뿌리가 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우리가 청산하지 못하면 또 다시 미래가 되어 나타날 것이다. 87년 이후 어느 정도 형식적 민주주의를 진전시켰다는 성취감을 얻었을지는 몰라도, 사람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비젼을 만들어 내는 일에서는 턱없이 부족했고, 오히려 기성의 보수적 가치와 타협하고 말았다. 그것이 결국 박정희 신화에 기초한 보수정권 재창출의 명분을 제공했고, 박근혜-최순실 커넥션은 그 박정희 신화 혹은 신드롬 안에서 풍부하게 양분을 섭취하며 자라난 괴물이다. 


    박정희 신드롬은 주린 배를 채워주었고 앞으로도 배불리 먹여줄 것이라는 신화다. 배불리 먹여주기 위해서 한 일이기에 유신체제도 정당했다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신화다. 말하자면 배를 채우고 채워주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신화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권력자에게 기본적인 인권마저도 포기하거나 양도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신화다. 하지만 예수는 정반대였다. 예수는 배불리 먹여주었다고 해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겠다는 무리를 냉정히 뿌리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가셨다. 가난하고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한 순간 특정한 사람들만 배불리 먹여주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어떻게 먹느냐에 딸린 문제, 곧 새로운 가치와 질서의 문제다. 예수는 먹여주는 것을 담보로 자신에게 권력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과는 다른 미래, 곧 먹고 사는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가도록 요구하셨다. 


    아마도 눈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박정희 신드롬의 흉측한 속내는 박근혜 정권이 충분히 보여주었고 지금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박근혜 정권과 함께 박정희 신드롬도 명운을 다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언제 또 어떤 옷을 입고 다시 등장할지 모를 일이다. 아니 지금도 겉옷만 바꾸고 다시 등장하기 위해서, 박정희 대통령이라면 박근혜 같이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박정희 신드롬을 지키기 위해서 박근혜를 버리는 수순에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그와 같은 방어 프레임에 걸려 다시 청산하지 못한 과거를 만들지 않으려면, 박근혜-최순실 사태의 근본뿌리를 직시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자세와 지혜가 정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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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결단식 앞에서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4.16 세월호 유가족 협의회가 지금 광화문에서 “사생결단식”을 하고 있다. 사생결단(死生決斷)이라는 말과 단식(斷食)이라는 말이 합쳐 사생결단식이라 했으니, 살든지 죽든지 끝까지 가서 결말을 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단식하겠다는 뜻이다. 왜 세월호 유가족들은 "사생결단식"이라는 엄청난 표현을 써가며 단식해야 할까? 효과적인 단식이 되려면, 희생자들을 포함한 많은 보통 사람들의 공감의 바탕 위에서, 그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권력자들이나 억압자들을 향해서 호소하고 저항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단식의 과정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진실을 향한 공통의 인식이 얻어지고, 끝내 화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출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하는 것이 단식이다. 하지만 "사생결단식"이라는 타이틀을 만나면서 드는 생각은 희망보다는 염려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가슴 속에 자신들이 공감을 얻고 있다는 확신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실을 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끝내 소통하고 화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마저 멀어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사생결단식이라는 이 무거운 이름을 내걸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유경근 4.16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단식을 시작하면서 페이스북에 올린, <사생결단식을 시작하며>라는 글을 몇 번이고 읽었다. 사생결단식을 감행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배후가 하나 둘 그려진다. 온갖 방법으로 진실을 감추려고 하고, 진실을 찾으려는 모든 노력을 집요하게 방해하는 이 시대의 권력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진실보다는 권력이 중요하고 백성을 진실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것을 원할 뿐이라는 민중 개돼지론도 버젓이 활개치고 있다. 더 나아가 진실로부터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힘과 권력으로부터 진실이 나온다고 강변하면서, 먼저 권력을 잡고 난 이후에 진실을 문제 삼겠다는, 그래서 먼저 권력을 달라고 외치는 소위 국민이 뽑은 대표들도 있다. 그리고 먹고 살기에도 바쁜데 진실이 뭐 그리 중요하냐며 말없이 힐난하는 눈빛들이 그 성명서의 배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사람들의 관심과 공감의 확산을 애써 가로막고 서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찌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뿐이겠는가? 노동현장 곳곳에서, 내가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우리 서로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서 이야기 해보자는 외침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공감과 메아리는 그 어느 때 보다 적다.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가 들어주지 않고 공감하지 않는 문제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정치와 언론의 관심은 점점 멀어지고, 바라보고 듣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마치 인정 받지 못하는 증언이나 순교처럼,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나 대가처럼, 메아리도 없이 바람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도록 철저히 차단되어 있다. 


    자신의 인간됨을 주장하면서 그리고 사람 대 사람의 진정한 만남과 대화를 요청하면서, 지금 거리에 서 있는 저 사람들이 이 무관심과 무공감의 시간을 얼마나 오래 견뎌야 하는 것일까? 참으로 호된 시련이다. 그들이 우리를 향해 묻고 있다. 정말로 이 세상이 인간이 살만한 세상이라 할 수 있는가? 아니 이런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당신들이 정말로 인간일 수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관심과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무기력 앞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속으로 까맣게 타 들어간 이들의 분노가 지금 절망으로 기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생결단의 단식에 몸을 던지는 저들이 세계와 공동체와 인간 삶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진실을 향한 염원에 연대하는 길뿐이다. 하지만 이 공감과 연대의 길은 우리 자신이 지금 맺고 사는 모든 관계들의 변혁을 통해서 가는 길이다. 지금 우리는 모래 알처럼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그렇게 고립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기 위해서 수 많은 연결 다리를 놓고 있다. 하지만 그래 보아도 잠시 스치듯 만날 뿐, 결코 서로를 향해 인격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매우 간접적이고 사물화된 접촉이 있을 뿐이다. 그처럼 간접화되고 사물화된 관계를 넘어, 직접적이고도 긴밀한 인격적인 만남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지 않고서는, 서로 간에 진정한 공감과 연대를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변명 같이 들리겠지만, 공감과 연대를 가로막는 엄청난 힘들 앞에서 우리는 지금 허우적거리고 있다. 나찌즘, 피시즘, 종교와 같은 신념의 체계들은 그 신념이 만들어 내는 불타는 증오심으로 수 백만을 살해했지만, 자본주의는 그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지금도 살해하고 있다고 보는 유발 하라리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부와 권력으로 일컬어지는 사물을 향한 탐욕은 우리를 눈 멀게 하고 귀 멀게 하고 우리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고 왜곡한다. 만물을 생명과 인격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사물로 바라보게 하고, 공약 가능한 수나 양으로 바라 보게 만든다. 그래서 김포 공항 청소 노동자들은 온갖 수모와 착취를 견디다 못해 그저 "인간대접을 받고 싶다"라고 하였다. 임금 얼마에 모든 것을 포기한 노동기계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아 달라고 하였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며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을 뿐이다. 


    사물에 대한 욕망이, 우리들로부터 관심하는 능력과 공감하는 능력을 빼앗아 버린 그 결과를 나향욱 기획관은 숨김없이 증언하였다. 그는 구의역에서 컵라면도 못 먹고 죽은 아이가 어떻게 자기 자식처럼 생각될 수 있냐고 반문하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라 하였다. 그에게 관심과 공감은 위선이다. 그에게는 사람과 사람이, 인격과 인격이 모든 장벽을 뚫고 서로 간절하고도 긴밀하게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인간과 인간이 만나서, 생명과 생명이 만나서, 새로운 삶의 공동체, 곧 우리가 이야기하는 코이노니아나 코뮤니온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본주의 질서 하에서 우리들의 마비된 관심능력과 공감능력의 실상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생명들과 함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공감능력을 마비시키는 또 하나의 질서가 오랜 동안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인간의 유한함, 불완전함, 혹은 다 알지 못함이 가져다 주는 불안과 두려움은 그 자체로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고, 언제나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것도 아니다. 그와 같은 두려움과 불안은 오히려 보다 높은 의미와 지혜를 추구할 가능성, 서로간에 보다 긴밀한 만남과 협력을 이루어낼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코이노니아, 코뮤니온, 페리코레시스 등과 같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관계나 공동체에 대한 이상들은 바로 그와 같은 유한함의 두려움과 불안이 만들어내는 건강하고도 창조적인 생산물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억압적인 권력이 조장하는 두려움과 공포는 그 백성들을 끊임없이 노예로 만든다. 그리고 그 노예들 사이에 인격적 공감과 연대가 자라 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한다. 전제정치 이데올로기나 분단체제의 이대올로기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지배를 벗어나면 곧 죽음이 있을 뿐이라는 협박이 만들어내는 공포와 두려움이 지배하는 체제다. 분단의 적대관계는 우리들의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 시킬 뿐만 아니라, 때로는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도 포기하도록 만들어 왔다. 사드 배치가 전쟁을 막는 수단인지 전쟁위험을 높이는 수단인지,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애국이다. 더 나아가 그것이 한반도를 살아가는 인간과 생명들을 위해서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무도 설명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가 애써 모르는 척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반도는 사람이 사는 땅이 아니라, 국제적 헤게모니 쟁탈전을 위해서 언제든지 전쟁터로 만들 수 있는 땅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물신주의와, 분단체제의 적대주의가 서로 돕는 가운데서, 우리는 사람을 사람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볼 수 있는 힘을 점점 잃어 왔던 것이리라. 이데올로기적 강제와 무절제한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폐적 각자도생의 길을 있는 힘을 다해 찾아야 했고, 그러는 사이에 사회적 책임, 공감, 죄책감등을 때때로 표현하기는 했어도, 그것들이 본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고 자신을 은밀하게 세뇌하였다. 그래서 도덕적 윤리적 책임의식에 구애되지 않고, 모든 사람과 사물과 사태를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을 발전시켜왔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 과대망상으로 치달아, 어떤 공감능력도 없이 세상을 자기 멋대로 심판하는 사이코패스적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이미 공감 능력을 잃어버린 세상이고 삶이라면, 사생결단식이라는 말이 오히려 위태롭고 불안하게 들리는 것이 당연하다. 


    현재의 상황을 참으로 위태롭다고 느끼는 내가 어쩌면 과도한 상상에 사로잡힌 것인지도 모르겠다. 민중들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그것으로부터 오는 분노는 자기 파괴적 폭발의 가능성과 자신과 세상의 삶을 변혁하는 새로운 힘으로 솟아 오를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배웠다. 사실 민중은 자기파괴적인 폭발의 가능성을 억제하여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 지금도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들을 사람으로 대접해 달라고 외치는 그분들과, 사생결단의 단식을 하고 있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은 이미 그와 같이 자신의 고통을 뜬 눈으로 직시하면서, 지금의 고난을 새 희망의 밑거름으로 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나찌의 억압하에서 아무도 들어주지도 공감해 주지도 않는 유대인들의 고통과 분노를 바라보면서, 마르틴 부버는 억압의 반대는 자유가 아니라 코뮤니온이라고 하였다. 억압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각자도생의 삶으로 도피하는 길이 아니라, 끝내 사람과 사람 생명과 생명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이루어 내는 길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미 민중은 그 길을 가고 있다. 각자 도생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향하여 우리를 부르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진정으로 공감하고 연대하며, 진실을 향해 가는 길을 향해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제 응답해야 할 우리다. 이미 길들여진 무관심과 무공감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적극적으로 함께 공감하고 연대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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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람'을 이야기해야 한다.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아직도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대세다.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기에 사고는 빨리 처리하고 정상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이 시대의 당위다. 진도 앞바다 동거차도의 산 언덕에서 맹골수도의 선체인양작업을 내려다 보며 부릅뜬 눈을 잠시도 닫지 못하는 유가족들. 바다 속에 잠긴 진실의 온전한 인양을 바라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는 딱딱하게 굳을 대로 굳어버린 시대의 가슴을 아직 열지 못하고 있다.  


    장사하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기업과 시장에 보다 많은 자율과 자유를 주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일정한 생명의 파괴, 인격의 훼손은 모든 과정에서 언제나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가 보편적 동의하고 있는 인식이다. 그래서 국가와 정부도, 법과 학문도, 자신들이 사람과 생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과 기업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음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 이처럼 본말이 전도된 세상에서 마지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죽어가는 가족들을 지켜 보아야 했던 옥시사태의 유가족들, 부모와 배우자와 자식을 잃고 거리에 나선 그들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생명과 인간의 훼손과 죽음을 방조하는 이 사회를 향하여 그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사람을 자원으로 상품으로 표현하는 것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기는 시대다. 사람의 사람에 대한 생각이 그만큼 무섭게 변했다. 인격이나 생명이기 이전에 물건이나 상품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훨씬 지배적이다. 상품들이 시장에서 경쟁하듯, 사람들도 그렇게 경쟁한다. 상품에게 인격이나 생명과 같은 의미를 담지 않듯이, 경쟁하는 사람들도 인격이나 생명과 같은 의미들은 의도적으로 잊어야 한다. 상품이되고 물건이 된 사람들 사이의 경쟁, 여기가 바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인 빈부격차가 들어서는 곳이고, 조현병이라는 분열과, 묻지마 폭력과 오도된 혐오가 등장하는 자리다. 지난 5월 17일 서초동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이유도 모른 채 무참하게 살해당한 그 젊은 여성은 사람 사이의 관계가 혐오와 증오가 되고 강간이되고 폭력이되고 살인이 되어 버린 우리 시대의 희생자다. 경쟁관계가 폭력적 관계로 변화하고 있는 시대라면, 지금 우리는 우연히 살아 있을 뿐인 것이다. 


    지난 5월 28일 구의역, 위험한 줄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혼자서 일을 하다가, 달려오는 전차와 스크린 도어 사이에 끼어 숨진 19살 청년 김군. 49개의 지하철 역의 모든 스크린 도어를 단 여섯 명이 그것도 신고가 들어오면 1시간 내에 달려가야 한다는 계약이었다. 그래서 2인1조 작업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물리적으로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었다. 이는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비용으로 계산할 때만 가능한 계약이고 약속이다. 그 청년이 들고 다니던 갈색 가방과, 그 안에 필요한 작업도구들 사이에 보여지던 컵라면과 나무젓가락과 스텐수저는 우리들의 삶의 실상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공기업 민영화의 참혹한 실상이 거기에 있었고, 이미 가질 것 다 가진 퇴직공무원들의 전관예우를 위해, 상위 포식자들의 밥상을 위해 그 젊은 몸과 마음에 착취와 상처를 안기는 세상이 보였고, 끝내 열 아홉 젊음을 죽음으로 내 몰고 있는 폭력이 되어 버린 우리들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시편의 한 구절이 아리게 다가온다.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나를 보고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비웃으니,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이 나의 음식이 되었구나.”(시 42:3) 우리 시대가 던지는 조롱은 이보다 더하다.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는 정도가 아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인격이라는 것이 어디 있느냐며 비웃고 있지 않는가? 모든 것을 팔고 소비하는 시대에, 상품과 소비자만 있을 뿐 사람은 없다고 빈정대고 있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상품처럼 생각하고, 상품처럼 행동하고, 상품처럼 관계 맺도록 교육하고 있는 사회다. 가장 인간적인 것마저 시장에서 구매할 수 있고 시장에서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회다. 시장에서 소비자로서의 삶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떤 윤리적 한계나 도덕적 절제의 요구에 의해서도 구속 받지 말아야 하며, 인격이나 생명의 신비 같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고 가르친다. 인간 죽음의 허무가 지배하는 시대다. 소유와 소비를 통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는 물질 신의 지배 하에 살아가고 있다. 무한 소유와 무한 소비라는 궁극의 목표를 향해, 상품선택과 경쟁의 무한 자유를 수단으로 허락하고, 그 무절제하고 무자비한 자유가 만들어내는 폭력이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더욱더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세계다. 


    이처럼 시장과 소유와 소비가 인간과 생명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 인간과 생명을 폭력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이곳에서 다시 인간을 말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구입가능하고 대체 가능한 상품으로서 인간에 대항해서 인간의 참모습을, 상품선택의 자유에 대항해서 인간 자유의 참 모습을, 상품적 가치판단과 경쟁관계에 대항해서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비젼을 새롭게 다듬어 내야 한다. 신학과 철학의 오랜 전통은 인간의 불완전함과 부족함과 유한함이 인간의 자기파괴나 자학 그리고 경쟁적이고 폭력적인 인간관계의 이유가 아니라, 서로간에 보다 깊이 나누며 참여할 수 있는 참된 인간 관계의 이유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오랜 신념 위에 다시 서서 인간과 생명의 그 대체불가능한 신비를 다시 숙고해야 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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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대안을 향해 투표하고 싶었다.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나만 그랬을까? 투표일이 다가오면서 점점 무기력증이 더해졌다. 기적을 바라면서도, 기적을 바라는 내가 너무 싫었다. 사실은 투표장에 가서까지도 망설였다. 언제까지 어처구니 없는 이 나라 정치의 프레임에 갇혀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이 말도 안 되는 선거 프레임에 나를 가둘 것인가? 그리고는 희망이나 기대 같은 것은 일단 주머니 속에 접어두기로 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셈을 해 가면서 표를 찍었다. 이게 마지막이다. 다시는 내 표를 낭비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면서 잊어버리고 싶었다.  

    개표 방송은 보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또 다시 속을 끓이며 참담함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맞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보고야 말았고, 새벽이 다 되도록 그 결과를 되새겨야 했다. 제 1당의 순서가 바뀌는 순간, 방송국 기자들이나 패널들도, 믿기지 않는 듯,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쯤은 환성을 터뜨리거나, 가슴을 쓸어 내리며, 오래 묵은 분노와 스트레스를 날려 버려도 좋았을 것인데. 마음이 그렇지가 않았다. 아니,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했지만, 감동이 물밀듯 밀려오고 그러지 않았다. 

    분명히 주어진 선거 프레임을 마음껏 즐기며 타고 놀았던 많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선거의 결과가 승리와 패배에 대한 분명한 판정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번 선거의 결과를 결정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의 표심을 대변한다고 보지도 않는다. 나는 이번 선거를 결정한 사람들, 이번 선거를 통해 진실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간절한 마음들과 진심들을 나눌 수 있는 정치적 장을 허락 받지 못한 사람들. 분노와 절망을 공개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정치적 통로를 허락 받지 못한 사람들. 선거결과를 바라보면서 아니 선거 기간 내내, 내가 떠 올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유권자들로부터 세월호 진실에 대한 물음을 박탈하는 정치, 유권자들로부터 역사에 대한 판단과 반성의 능력을 빼앗는 정치, 유권자들의 도덕적 의식과 지적 판단 능력을 빼앗는 정치, 테러방지를 위해, 기본적인 권리와 존엄마저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정치, 그것이 지금의 정치다. 모든 것을 먹고 사는 문제로 환원시키면서, 정작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고 하는 정치다.

    정말로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가?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주권은 통치자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통제하고 배제하는 만큼 얻어지는 것 아닌가? 그리고 지금의 여당과 야당, 그리고 모든 정치적 계파들은 바로 이 불량한 권력을 나누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로 표심을 알 수 있을까? 주권을 회복하려는 국민의 요구를 정말로 알 수 있을까? 자신들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는 공동체의 권력을 세우기 위해,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하는 국민의 마음을, 대통령 존영 운운하는 자들이 알기나 할까? 이들이 선거 결과를 놓고 견강부회하고 공과를 평가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 유권자로서 나는 너무나 참담하다.  

   한 표 한 표에 담긴, 국민들의 분노와 절망과 냉소들을 읽어낼 수 있는 혜안은 정말 없는 것인가?국민을 섬기는 정치, 유권자를 섬기는 정치는 정말 불가능한가? 이번에 선택된 사람들에게 유권자들이 던지는 질문 혹은 간절한 소망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현재 정치의 틀을 바꾸어내고, 다시 국민에게 주권을 돌려주어, 국민의 양심과 진실과 정의를 향한 요구에 봉사하는 정치를 해 달라는 주문을 정말로 귀 기울여 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유권자들이 더 이상 분노와 미움으로 표를 던지지 않게 했으면 좋겠다.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그리고 희망과 대안을 향해 유권자들이 참여하는 선거와 정치를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헛된 기대였음을 확인하게 될지 모르지만 다시 희망을 걸어 본다. 이미 분노와 미움으로 던져진 수많은 냉소의 표심들을 희망과 대안을 향한 소망으로 바꾸어 내는 일 역시 이 번에 선택된 사람들에게 맡겨진 일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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