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의 예술적 <자기만의 방>

김현화
(연구소 회원, 영국 Emerson College에서 설치미술 전공)

20세기 초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내놓은 이후, 많은 여성들은 남성지배문화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넘어서고 탈출하기 위한 거점으로서 다양한 사적문화로 가득 채워진 많은 방들을 만들어내기에 분주했다. 이런 흐름은 지배문화에서 배제된 수많은 주변문화를 가진 이들에게로도 이어졌다. 그리하여 이제는 세상 모든 이에게 목소리를 낼 기회, 아니 적어도 자격이 주어진 듯 보이며, 중심과 주변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 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낯선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상황이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중 많은 부분이 지배 문화가 내는 확성기 소리에 묻혀 사라져 버리지만 적어도 이들은 발설할 장소와 기회를 가졌고 들어줄 마음이 있는 청중들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쯤해서 내가 하려는 말을 꺼내보자. 나는 아동들이 ‘예술의 봉사’를 받으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한 사람으로, 아이들에게 미술, 특히 조각의 기초재료인 진흙으로 무언가 빚어내는 시간 사이사이에서 그들 삶의 중요한 흔적들을 스스로 만들어 가도록 돕고 싶다. 여러 핑계로 현재는 아이들이 아니라 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조각 수업을 소개하고 그 강한 영향력에 대해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지만 성인인 교사들 몸과 마음에 오롯이 살아있는 그들의 유년을 실감나게 만나는 중이기도 하다.

앞서 지배문화에 저항하며 ‘자기’를 찾아나서는 많은 목소리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러나 여기 저항문화의 내용에도 역시 ‘성인’이라는 지배적 입장이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간혹 청소녀/소년 문화를 걱정하는 제스쳐들이 나오고, 각종 아동권리선언문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 내용은 이들의 의식주를 채워주고 일상생활이 제대로 영위되도록 하기 위한, 그리고 아동들을 사회화할 교육을 위한 걱정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분명 성인들의 그것과는 크게 다를 아동들의 ‘자아 조우’(encountering the self), 자기만의 방 혹은 집짓기 같은 것에 대한 사유나 논쟁 등은 필자의 얕은 정보력 때문인지 그 시도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통상 아동들은 시간을 두고 자라나야 할 대상, 그리하여 미래에나 의미를 갖추게 될 존재로 취급되는 통에 성인의 문턱에 들어서기 전에는 이들이 현재 얼마나 섬세하고 드라마틱하게, 얼마나 깊고 심각하게 자아와 대면하며, 말하자면 예술의 서비스를 통해 자기만의 집 한 채를 스스로 지어낼 수 있는지 관심을 갖는 이가 소수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아동들의 권리 문제가 의식주와 돌봄, 미래의 삶과 사회를 위한 교육에만 집중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들의 깊은 내면을 제대로 무시하는 길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예술에 대해 작지만 중요한 예를 하나 들어 이야기해 보자. 이것은 우리에게 사고 팔리는 상품으로 벽에 걸려 구경 당하는 죽은 미술이 아니라 살아있는 삶의 조력자로서의 미술이 가능한지, 아동과 청소년의 삶에 불가피한 예술 체험이 교실 내에서 실현될 수 있는지를 타진해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흙으로 지어 올리는 빈 방 혹은 집

교과 과정으로 진흙 조소(clay modelling)수업을 하는 학교가 있다. 1학년(만 7세)은 2차원 평면 위에서 손가락 한 마디만한 작은 진흙 조각들을 한 점 한 점 붙여가며 원형과 직선 형태를 만들어간다. 점차 이 형태를 발전시켜 집이나 성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때 성의 문이나 집 창문은 진흙을 붙이지 않고 비워두어 비록 평면상이긴 하나 공간의 시작을 알리는 작업을 잊지 않고 하게 된다. 집이 무너지지 않도록 볼륨감 있는 기둥을 단단히 세우고, 만족할 만큼 두터운 벽을 만드는 동시에 아이들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비어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며 채움과 비움 사이를 오가는 행복한 숨을 쉰다. 2학년이 끝날 때까지 이들은 평면위에서 채움과 비움을 반복해 창조한다. 그러다가 아홉 살, 3학년(만9세)이 되면 평면에 있던 공간에서 좌-우, 위-아래, 앞-뒤가 있는 3차원적 공간,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의 공간을 만드는 작업으로 들어가게 된다. 평면 바닥에 누워있던 기둥들은 작은 발바닥을 굳게 땅에 대고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는 일어선 두 기둥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아치형 다리가 놓여진다. 조금만 균형을 잃어도 무너져 내릴 듯한 위기를 몇 고비 넘긴 후 문틀이 준비된다. 벽체는 더욱 단단하게 그러나 너무 두껍지도 얇지도 않게 두 기둥에 붙어있어야 한다. 그리고나서 드디어 돔 같은 지붕이 무겁게 내려앉으면서 가로질러 하늘을 잘라낸다. 드디어 진짜 공간, 내부와 외부가 생겨나는 순간이다. 아이들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다. 이때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는 듯이 아이들은 자신의 온 존재를 동굴 같은 그 집 안으로 들여 놓는다. 자신이 만들어낸 자기만의 공간 속으로 멜랑콜리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누워있던(horizontal) 기둥들을 일으켜 세우는(vertical) 일은 인간 직립의 역사를 상기시키며 ‘(만)아홉 살 인생’의 중요한 획을 긋는다. 실제 이 시기의 아동들은 신체적으로도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인다. 오랫동안 학교 주치의로 지내며 조사를 해온 이들의 보고에 의하면, 아이들은 유독 이 시기에 맥박이 갑작스럽게 증가하여 심장의 중요성이나 그 역할이 어느 시기보다도 올라가게 되며, 이와 함께 혈중 당의 양이 급감하는 현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아동들은 성장과 함께 서서히 혈당이 올라감에도 유독 이 나이가 되면 상승 곡선이 일시적으로 하강하게 된다. 이는 병적 증상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치 않은 자연스런 감소로, 이 시기를 지나면 다시 자연 상승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튼 (이를 원인으로 혹은 그 결과로) 자주 우울감과 허약함, 고독감,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듯한 감정을 감출 수 없게 되며 급기야 죽음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 것이 이 시기 아동들의 성향이다. 물론 다양하게 표출되고 (학교거부, 복통, 짧은 호흡, 어지럼증 호소 등),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재미나게 시선을 빼앗아가는 게임과 TV 프로그램이 아이들의 표현을 막아서기도 하지만, 주의 깊은 귀와 눈을 잠시라도 그들에게 고정한다면 그들이 토해내는 급박한 단어와 몸짓들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아이들은 이러한 신체적 위기와 함께 자신이 누구누구의 딸, 아들이 아니며 오직 ‘자기 자신’임을 처음으로 직감하게 된다. 밥상에 같이 앉아 식사를 하는 그 누구도 자신을 도울 수 없는 그런 길에 자신이 외롭게 들어섰음을 감지한다. 아직까지는 유아기의 흔적이 남아있던 1, 2학년 시기에 보았던 것과는 무섭도록 다르고 낯설게 느껴지는 세상으로부터 몸을 숨기고 싶다. 혼자이고 싶다. 집을 짓고 싶다.

누구도 도움이 되어주지 않을 듯한 상황, 모두에게 버려져 내동댕이쳐진 숨 막히는 상황에서 그러나 다행이도 예술은 아이들을 기억과 자유의 공간,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창조하는 공간으로 이끌며 사랑스런 조력자가 되어준다. 더 이상 ‘인간’이 어떤 도움이 되지 못할 때, 서서히 나타난 예술은 사마리아인처럼 아홉 살 인생들을 일으켜 세워준다. 그러다가 드디어 3학년이 끝날 무렵 문을 열고, 내/외를 가르는 문지방을 넘어 바깥으로 나오게 될 때, 혼자 들어가 침묵으로 세상을 맞으며 버티게 했던 자기만의 방은 당장은 빈 집 혹은 해체된 방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수년 후, 아이와 함께 같이 변하고 자라나 수많은 이웃들이 초대되는 공간으로 다시 살아날 것임이 분명하니 여기서 우리는 예술을 통해 아이들을 만나는 예수를 떠올려 봄직하지 않은가.

현란하게 눈속임하는 듯 펼쳐지는 미술교육에 제동을 걸고, 소리 없이 의미 없는 듯 무심히 다가와, 행하는 자가 예술가인지 예술이 예술가인지 모르는, 예술주체가 전복되는 드라마가 아무 일 아닌 듯 교실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시끄러운 미술 교과서를 뒤로하고 소박한 나무판 하나와 진흙 한 덩이만 남겨놓으라. 그러면 그들이 모두 조각가 될 것이다. 아마도 요셉 보이스는 여전히 이렇게 외치고 있을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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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하느님을 만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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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하나.

_ 강최예진

나는 꿈속에서 하늘나라에 갔다.
거기서 하느님을 만났다.
그런데 하느님은 아기새가 돼 있었다.
하기새 하느님은 하늘나라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기새를 잡았다.
“고마워, 예진아.”
아기새는 말했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아기새가 말을 하다니, 나는 놀랐다.
하느님 아기새가 말했다.
“안녕, 나는 착한 어린이들을 도와주는 새야.”
나는 하느님 아기새에게 말했다.
“그럼 착한 사람들을 경제위기에서 구해주세요.”
갑자기 아기새가 사라지더니, 나는 꿈에서 깼다.


이야기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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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김선우

오늘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새가 되어 있었다.
새가 되어서 하늘을 높이 높이 날아 비행기에 부딪힐 뻔하고 쉬다가 떨어질 뻔도 하였다.
하늘 나라에 도착했다.
그랬더니 내 모습으로 ‘펑’ 하고 돌아와 버렸다.
하느님은 공중에서 쉬고 있었다.
눈속임수도 아니고, 새도 아니었다.
정말 신기하였다.
아기처럼 작지도 않고 어른처럼 크지도 않았다.
나는 하느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늘에 떠있으세요?”
하느님이 말했다.
“너도 떠있잖아.”
맞았다. 나도 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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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셋.


_ 신윤하

점심 먹고 나른한 어느 오후 갑자기 온갖 새소리가 집 뒤에서 들려 왔다. 약간 무서웠지만 평소에 새들에게 관심있던 나는 어떤 새가 있을지 궁금해서 집 뒤로 나가 산 위로 올라갔다.

그 다음 본 광경은 죽어서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빨간색 웨이브 머리에 하늘하늘한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새들에게 모이를 주며 대화를 하고 있던 것이다!!

엄청 놀랐고 119를 반쯤 누르고 있었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여자는 대답했다. “안녕, 꼬마야. 나는 하느님이란다.” 나는 무척이나 놀랐고 저 여자가 미쳤나보다라고 생각했다. “후훗, 믿든지 말든지는 너에게 달렸어. 그리고 내가 누군지 말을 안 했다면 넌 내가 누구였을지 궁금해서 잠도 못 잤을걸?” 정곡을 찌르셨으므로 나는 그분이 하느님이라고 믿어 주기로 했다.

나는 질문을 했다. “여기에 왜 오셨나요?” “나는 온 게 아니야 항상 여기에 존재하지...” “그렇군요 근데 정말 물어보고 싶언 건 따로 있었어요. 저도 새들에게 모이를 주면 안 될까요?” “그러렴. 여기 모이 받아.” 즐거운 하루였고 해는 머리 위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이야기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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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김신우

나는 길을 걷다가 하느님을 만났다.
3살 정도 된 꼬마였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또 다른 질문을 했다.
“내가 당신을 만났다는 증표를 줄 수 있나요?”
“증표가 꼭 필요할까?”
그가 말했다.
아이의 목소리였다.
아니, 할아버지 같은 목소리이기도 했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밝은 목소리였다.
나는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던 질문의 해답을 찾은 것 같다.
하지만 머리 밖으로 꺼낼 수가 없다.


* 이 글들은 한백교회(hanbaik.or.kr) 어린이들이 만든 신문 <한백이네 놀이터>에서 가져왔습니다. 어린이들의 창의성이 반짝반짝 빛나는 듯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느날 하느님을 만난다면 무엇을 함께 해보고 싶고, 어떤 대화를 나누고 싶은가요? 댓글을 달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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