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에 48키로 여자 일기

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7




 김정원*


    내 일상에 가장 깊숙하게 스민 욕망 중 하나가 ‘마른 몸’이다. 이 욕망의 출발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른 몸을 아름답다고 생각한지는 꽤 오래되었다.



    중학교 시절의 나는 아주 바짝 마른 여자아이였다. 키는 날로 크는데, 살은 당최 붙질 않았다. 키에 맞춰 교복을 입고 있었던 지라, 자루를 뒤집어 쓴 허수아비가 따로 없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 키는 170이 다 돼 가는데, 몸무게는 겨우 40키로에 그쳤다. 아빠는 ‘용든약’을 지어왔다. 약발이 좋았는지 겨우내 살이 올랐고, 고등학교에 갈 적엔 48키로까지 몸이 커져 있었다. 그거나 거기까지였다. 키는 172까지 계속 컸지만 몸에 살은 붙지 않았다. 다이어트커녕 한 끼도 놓치지 않고 꼬박 밥을 먹어도 ‘축복받은 유전자’ 덕으로 나는 계속해서 ‘마른 여자’였다. 그로부터 쭉 48키로는 어김이 없이 나와 붙어있는 숫자였다. 대학에 들어가고, 대학원에 들어가도록 몸무게는 변하지 않았다. 이제 48은 나의 정체성이 되었고, 나는 그대로 48키로의 여자로 살아가고자 했다. 종이 인형이란 말을 듣고, 방아깨비 다리 같다는 얘길 들어도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48키로였다. 주위에서 “살 좀 쪄~ 조금만 더 찌면 훨씬 건강해 보일 거야.” 라는 말을 백 번을 듣는다 한들, 나는 48키로의 여자로 살고 싶었다. 평생을 마른 여자로 살아왔기에 마르지 않은 몸을 갖는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더욱 솔직하게는 나는 계속해서 여성들의 욕망의 대상이고 싶었다.

    그런데 서른이 넘자 몸의 판도가 약간 달라지기 시작했다. 별다른 노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아도 온전히 48키로였던 내게 변화가 찾아왔다. ‘축복받은 유전자’를 가진 여자라도, 자연의 파편일 뿐인 몸뚱이가 노화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기초 대사량은 떨어지고 먹는 양은 그대로이다 보니, 1키로가 늘고 다시 1키로가 늘어 몸무게는 50키로가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또 하나의 망언이겠지만, 50키로에 식겁한 뒤로 나의 일상은 변했다.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나는 이미 나 스스로를 퍽 통제하며 살아가지만, 그에 하나를 더한 것이다. 이제는 아주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그러니까 내 정신과 영혼이 통으로 깃든 내 몸뚱이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도를 지켜야 한다. 다이어트 때문에 수선스러워 보이면 곤란하다. 나는 생태주의자이면서 페미니스트이고, 자본주의를 반대함은 물론, 목사라는 직업을 가졌기에 싸질러 놓은 게 많기 때문이다. 복인지 화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자리 저 자리에 불려 다니며 온갖 그럴싸한 말을 많이 한 탓에, 겨우 ‘다이어트나 하는 여자’로 보여져서는 안될 일이었다. 적어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당당한 여자’라는 주변의 기대를 져버릴 수는 없었다. 표준 몸무게를 훨씬 밑도는 몸뚱이를 가졌음에도, 하루 1500칼로리 이하로 식사량을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로 많은 여성들이 불편할까 조바심이 났다. 전달했던 메시지들이 ‘구라’로 취급 당할까 염려됐고, 진정성 없는 여자로 전락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이런 염려들은 다 몹쓸 것들이다. 사태의 핵은 다른 이들의 기대감이나 시선에 있는 것이 아닌, 앎과 삶의 분리가 낳은 죄책감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은폐되어야 할 것(되었으면 하는 것)들의 폭로, 즉 스스로를 ‘짜가’라고 인식되는 그 순간을 마주하는, 바로 그 좌절감을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내 방구석에서 행해지는 다이어트지만, 그러니까 누구도 가타부타 말하지 않는 나만의 은신처에서 일어나는 다이어트지만 불편한 마음은 떨쳐지지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대신, 앎과 삶의 분리가 낳은 죄책감이 나와 함께 있었다.

    코르셋과 뽕브라 따위는 벗어 던져야 한다고 외치면서, 고구마와 닭가슴살을 주워먹고 있는 내 꼬라지가 싫었다. ‘마른 몸’을 향한 욕망은 결국 시장의 논리에서 오는 것을 일찍이 알던 탓이다. 천박한 자본주의적 미의 기준을 표본삼고 있는 것을 인식하기에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웰빙과 몸짱 아줌마는 다른 말이 아니다. 둘은 상품으로서 존재한다. 이와 관련한 구미정의 표현이 비상하다.


주름살과 흰머리, 기미와 검버섯, 터진 배와 늘어진 뱃살은 그 자체가 자연이고, 역사이며, 실존이다. 인간의 삶의 궤적이 가감 없이 기록되고,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정직한 몸은 그 자체가 예술이고, 시이며, 영성이다. 그런데도 ‘젊고 탱탱한 몸’을 우상시하는 시장의 논리 앞에서 정직한 몸은 당장에 추한 몸으로 전락하니, 이 무슨 횡포인가 싶다(구미정, ‘몸의 신학’, 2006).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자’라는 외침은 페미니즘의 기조와 같은 것이며 나아가 그 자체로 생태적이다. 노화에 마냥 달가울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노화야 말로 자연의 섭리를 온 몸으로 감각하는 일이다. 세월의 흔적을 담은 몸을 포용하는 일이야 말로 사람과 사랑을 배우는 일이며, 정직함을 성취하는 길인 것이다.


    하! 알면 뭐하나. ‘지금, 여기의 나’는 그저 마른 몸 따위를 지향하고 자빠져 있는데…… 속을 파 보면 남성은 물론 여성에게도 ‘예쁜 여자’로서 보여지길 원하는 하질의 에코페미니스트인 것을. 누가 아는 것을 힘이라 했나. 앎은 그저 고뇌이고 고통이며, 죄책감이자 우울감이다.         


    책을 보고 글을 쓰는 일이 늘수록, 살도 함께 늘어난다. 영국에 머물며 살은 조금 더 붙었고, 덕분에 조금 당당해질 수 있었다. 키로 수가 조금 늘 때마다 나의 진정성도 늘어간다. 아무도 모르게 살이 찌고, 아무도 모르게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살이 찐 만큼 페미니스트로서의 진정성이 회복되고, 허벅지가 통통해진 만큼 생태주의자에 보다 가까워진다. 단, 죄책감이 덜어지고, 진정성을 얻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울감을 느낀다는 것에 아이러니가 있다. 살이 찌면 못생겨진다는 생각에서는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른 몸’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왜곡된 기준에서 온다. 그렇다면 이제, 왜곡된 미의 기준을 갈아 마시면 될 일이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바꿔 보려 노력해도 이게 쉽지가 않다. 나는 다시 우울감에 젖는다. 이 때, 내 맘 속의 제일 가치는 에코페미니스트가 아닌 것이 탄로 난다. 그게 아니고서 살이 조금 붙었다고 이리 우울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이 순간 위로가 되는 것은 “나의 육체는 나의 전부이다. 나는 육체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니체의 말이다. 물론, 니체의 이러한 주장은 육체를 덧없는 것으로 간주하며 정신을 강조했던 철학자들을 비판한 것이지만, 나의 고뇌와 실존적 물음들이 ‘몸뚱이’를 통한 것이라고 할 때, 그의 말은 충분한 위로가 된다. 나의 우울감은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소유물, 우리의 가장 확실한 존재, 요컨대 우리들의 자아로서의 육체”를 곱씹으며 발생한 것이기에 나는 그나마 철학적이었다. 그냥 그렇다 치자.


    오늘 아침 몸무게를 달아보니 51키로를 조금 넘어간다. 3키로어치의 에코페미니즘과 진정성을 얻었다. 물론 3키로어치의 우울감도 함께 얻어왔다. 그러므로 나는 저녁으로 닭가슴살과 토마토를 먹을 것이고, 당분간 라면은 먹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나를 마주하며 나는 다시 죄책감을 느낄 것이며,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다시 라면을 먹을 것이다. 먹고 빼고, 먹고 빼고, 해방되고 억눌리고, 해방되고 억눌리고, 진짜였다가 가짜였다가, 진짜였다가 가짜였다가. 아주 미친년이 널을 뛴다. 앎과 삶의 분리가 주는 형벌이다. 아는 만큼 살지 못하는 한, 적어도 ‘다이어트 하는 여자’로 사는 한, 나는 제 명에 못 살 것이 분명하다. 이런 나를 누가 구원하겠나. 결국 더한 각성과 반성과 결단 밖에는 없다. 그게 안 된다면 스스로를 좀 놓아주면 되는 일이다. 나약한 나에게 그러한 용기가 작동된다면 말이다. 다만 이 상태가 어느 방향으로든 한동안은 변하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있기에 나는 내가 몹시 안타깝다. 오호 통재라!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원소연
    2016.12.29 09:21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다이어트는 마른여자든 뚱뚱한여자든 여자들의 평생숙제라하잖아요

    저는 최근 7개월간 다이어트를 해서 10킬로는 감량했는데
    일하는 곳에 원장님의 질투도 엄청 났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담니다.

    저는 목사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꺼같아요
    죄책감을가진다는건 주의보는눈인데
    솔직히 여지로 태어나 예쁜몸매가지는게 소망이잖아요 그리고 이것도 자기관리중하나입니다.
    건강한생각을 가지고 스트레스는 받지마세요
    화이팅


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처음. <내 몸을 좀먹는 너의 이름은 '진리'>




 김정원*


 

뜨뜻한 물이 샤워기를 통해 샤-하고 쏟아져 내린다. 긴 머리칼을 후다닥 적시고는, 500원 동전크기만큼의 샴푸를 손바닥에 짠다. 채 일지 않은 거품으로 참으로 대충 머리를 감는다. 헹굼질을 잠시 멈추고는, 샤-하고 쏟아지는 뜨뜻한 물에 가만 서 있다. 이제 좀 노곤 노곤 해진다 싶지만, 여유가 없다. 뻣뻣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채 일지 않은 거품으로 역시나 대충 몸을 닦아낸다. 깊숙한 이곳 저곳을 조금 더 샤-하고 싶지만, 정말 여유가 없다. 여유를 부리지 않았음에도, 어느새 14분의 시간이 지났다. ‘미안해, 북극곰아……’   

공기밥은 200, 바나나는 100, 피자 2쪽은 380, 아메리카노는 0. 스물 예닐곱부터 시작된 철저한 칼로리 계산은 여느 수학자보다 날카롭다. 분명 스물 예닐곱엔 ‘내 안의 여신’을 발견하는 작업 또한 시작되었고, ‘결국엔 아름다움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는 진지한 고백이 있었다.[각주:1] 그런데, 오늘 낮에 먹은 478 칼로리의 머핀이 영 거슬린다.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서서 한참을 서성이며, 있지도 않은 살을 요리보고 저리 보다가, 저녁은 굶기를 작정한다. ‘미안해, 페미니즘아…….’  


         학문을 하는 것은 맘 편히 살지 못함을 말한다. 맘이 편치 못하다는 것은 몸이 편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를 태워가며 썼던 논문이 고스란히 몸의 수고와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나 개인의 ‘존재론적 방법론’이며, 이는 ‘맘이 곧 몸’ 이라는 주장에 대한 간증이 된다. ‘애를 태우다’ 에서의‘ ‘애’가 창자를 뜻하는 ‘腸’에서 기원한 것을 보면, 애초부터 애태운 것은 실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었나 보다.

         생태학과 관련된 논문을 쓴 뒤로, 하루 걸러 맘이 즉, 몸이 편치 못하다. 뜨끈한 물로 길게 샤워 좀 할라치면 먹이를 찾아 얼음 기슭을 어슬렁거리는 북극곰이 떠올라 이내 관두고 만다. 생태학은 나의 일상을 갉아먹으며 내 안에 서식한다. 구멍 난 양말은 그 구멍이 그 양말의 정체성이 돼 버리듯, 생태학으로 갉아 먹인 내 일상은 결국 더욱 또렷해진 생태학이다.

         고기를 먹는 순간, 전기장판을 트는 순간, 에어컨 아래 있는 순간, 테이크아웃을 하는 순간…. 매 순간 순간이 죄책감으로 물들여진다. 나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토끼처럼 먹으려 노력하고, 추위를 참느라 이를 닥닥 거리기도 하며,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기로 평생을 작정한다. 생태학은 이처럼 나의 몸뚱이를 고생시켜가며 나의 일상에 역사한다.

         약간 되바라진 어린 여성 목사에게 페미니즘이란, 저항 담론임과 동시에, 그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한 존재론적 물음 그득한, ‘my story book’과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사회정치적 관계에서 수집 되어진 숱한 정체성을 너머, 그저 ‘나’로서 살아간다는 말은 신경증적 예민함을 장상 끼고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무리에서는 쌈닭 같은 존재로 ‘전향’된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만치는 아니어도, 나름의 ‘충실성’(fidelity)[각주:2]을 간직한 페미니즘적 주체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남는 문제가 있다. 바로 ‘살’.

         ‘먹어도 돼’와 ‘먹으면 안돼’라는 두 사유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페미니즘은 이 사유의 거리를 천 자(千 秭)나 늘려놓는다. ‘먹음’은 페미니즘을 향한 ‘충실성’의 긍정적 작동이다. 반대로, ‘안 먹음’은 ‘내 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에 대한 거부이며, 실패다. 즉, 가짜 페미니즘에로 나가 떨어지는 순간이다. 먹음과 안 먹음의 간극은 ‘먹음’ 으로서만 채울 수 있다. 이 사유의 전개는 코기토와 구조를 같이하나 꽤나 부끄럽다. ‘나는 먹는다’ 고로 ‘나는 살찐다’. 또는, ‘나는 살찐다’ 고로 ‘나는 아름답지 않다.’. 보다 반성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날씬한 여자로 살고 싶다’ 고로 ‘나는 가짜 페미니스트이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먹을 땐- 살이 찔 염려로 인해 위염을 앓고, 안 먹을 땐- 가짜가 된듯한 패배감에 장염을 앓는다. 페미니즘은 나의 위장을 좀먹으며 내 안에 머문다. 위장의 망가짐으로 못 먹기도, 안 먹기도 하는 일의 반복은 ‘날씬한 여자’를 만들어내지만, 이제는 ‘날씬함’ 이란 언사에서 죄책감을 발견하고는 망연해진다.

         부끄럽게도 전통과 사회의 지배 아래 존재하지 않기 위한 의식투쟁은 ‘살’ 앞에 종결된다. 그저 퇴락한 ‘익명의 세상 사람(das Man)’[각주:3]으로 살지 않겠다던 다짐은 하이데거의 기억과 함께 소멸된다. ‘본래적 자기’를 찾고자 애를 쓰던 존재투쟁이 겨우 ‘칼로리’ 앞에 힘을 잃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은 읽고 쓰는 행위로 시작 될 때가 다반사이지만, 책상에서 시작 된 사유 노동은 나의 온 존재를 간섭하고 일상을 감찰한다. 엘리베이터를 맘 편히 못 타니, 하이힐을 신고서 계단을 오른다. 이러한 몸의 불편함으로 생태학을 향한 ‘진정성’이 획득된다. 바꿔 말하면, 생태학적 사유정지로 인해 얻어진 ‘편안함’은 죄책감을 몰고 온다는 것이다. 그 ‘진정성’을 얻기 위해서는 ‘날씬함’보다는 ‘건강함’을 선택해야 하다니, 생각만으로도 위경련이 올 것만 같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선포가 나의 피곤하고도 왜곡된 실존에 ‘틈과 균열’을 가지고 올는지는 여적 모를 일이다.


         다만 ‘오늘의 나’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를 더 ‘안다’라는 것이 몸이 한 번 더 ‘고생’스러울 것의 전조라는 것이다. 앎이 곧, 고생이다. 즉, 사유는 이러한 고생을 작정하는 일인 셈이다. 사유의 시작은 몸의 불편함을 조장하고, 이러한 몸의 불편함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죄책감에서 해방시킨다. 위장이 탈이 나서 꺼억꺼억 하는 순간에도, 나의 존재가 ‘진짜 진짜 존재자(Dasein)’[각주:4]로 거듭나는 ‘과정’ 속에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편한 것을 편한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 동안의 ‘진리 사유’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똑똑한 ‘몸’이 현재의 ‘비진리’ 안에 머물고 있는 ‘나’를 거부하는 데에 있으리라. 즉, ‘나’라는 존재자가 ‘비진리’로 인해 ‘은폐’되거나 혹은 ‘위장’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각주:5] 가벼워진 죄책감과 진리로의 방향전환은 몸부림이 주는 짭짤한 선물이다.


         장자는 말한다. 

         "발을 잊는 것은 신발이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꼭 맞기 때문이고, 마음이 시비를 잊는 것은 마음이 꼭 맞기 때문이다."[각주:6]


         내 발에 생태학이 어찌나 안 맞는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토록 안 맞으니 생태학을 잊지 못하다 못해 노상 시달리기까지 한다. 내 허리에 페미니즘이 어찌나 안 맞는지 또한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얼마나 안 맞으면 식욕을 거세하려 할까.

         장자의 말은 진리가 ‘나’를 자유하게 할 것이라는 말과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나의 사유노동의 계속됨은 필연적으로 ‘발’과 ‘허리’를 인식하게 만들 것이다. 이는, 고통의 몸부림도 쉬 그치지 않을 것을 예고한다. 즉, 존재자와 죄책감과의 대결을 바탕으로 하는 진리투쟁의 계속됨을 의미하며, 위장 장애로 인한 구토와 곽란 또한 그러할 것이라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말이다. 어쩌면 ‘진짜 진짜 존재자(Dasein)’를 꿈꾸는 자에게 자유는 ‘옆 집 개 이름’ 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마르키 드 사드의 소설이 일러 준 것- 인간의 육체적 고통이 가장 높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각주:7] 몸의 고생스러움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존재론적 방법론일 것이다.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의 행위들은 일상을 침탈하고, ‘자유케’ 되기는커녕 고통을 동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씁쓸하고도 불행한 존재론적 사유를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 한 줌’을 얻게 되는 것에서 오는 위안 때문일 것이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참고: 현경, <결국엔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거야 1, 2> [본문으로]
  2. 참고: 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본문으로]
  3. 참고: 마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본문으로]
  4. 참고: 마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본문으로]
  5. 참고: 마틴 하이데거 <예술 작품의 근원에 관하여> [본문으로]
  6. 장자 <달생(達生>, 19 : 13 [본문으로]
  7. 참고: 마르키 드 사드 <소돔 120일>, <규방 철학> 등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785)
특집 (8)
시평 (91)
목회 마당 (58)
신학 정보 (126)
사진에세이 (37)
비평의 눈 (63)
페미&퀴어 (20)
시선의 힘 (128)
소식 (150)
영화 읽기 (28)
신앙과 과학 (13)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3)
새책 소개 (38)
Total : 316,635
Today : 244 Yesterday : 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