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의 폭력을 되받아 치는 발칙한 그녀 

<Elle (폴 버호벤, 2016)> 




이희승*



  영화과 동료가 감독한 저예산 영화를 단 한번, 게릴라 개봉한다는 이메일이 도착했지만, 오후 6시인 상영시간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이메일을 닫습니다. 흔치 않은 일은 아니지요. 결혼생활하고 아이 키우며 대학가 언저리에서 교편잡고 있는 워킹맘들은 강의 시간이 다 끝난 후에야 시작하는 여러 학술 활동 및 친목모임에 참여하기 쉽지 않은 현실을 한탄하면서, 서서히 교수사회의 중심에서 멀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권신장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뉴질랜드에 산다고, 꽤나 진보적인 인문학부에 속해 있다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은 이 자괴감 충만한 에피소드는 기득권을 결코 여성들과 순순히 나눠 가질 수 없다고 버티는 가부장제의 뿌리깊은 독점욕을 공적, 사적 영역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난공불락인 듯 보이는 가부장제의 전방위적인 차별과 폭력에 대한 소심한 복수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이번 호에는 아직 국내에 개봉하지 않은 최신 영화이자 제 마음에 쌓였던 앙금을 잠시나마 해소해 준 폴 버호벤 감독의 신작 <그녀( Elle)>를 소개할까 합니다.


  필립 지앙의 소설을 영화한 <그녀>는, 이제는 거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된 제목만으로도 그 파급력을 가늠할 수 있는 <원초적 본능 (1992)>을 감독한 폴 버호벤 감독의 첫번째 프랑스 영화입니다. 홍상수 감독의 <다른 나라에서(2012)>를 통해 국내 영화에도 출연한 바 있는, 프랑스의 명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주인공인 미셸 역할을 맡아서 명불허전의 연기를 펼치죠. 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세계에는 특유의 긴장감이 존재합니다. 이는 겹겹이 감추어진 진실에 서서히 다가가는 동안 느껴지는 은근한 긴장감이라기보다는 종잇장보다 얇은 문명의 가면 뒤에 누구나 품고 있는 잔인성과 폭력에의 본능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은 말초적 긴장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폴 버호벤의 영화들은 예외없이 남성본위의 사회 구조를 성(性)과 폭력의 합일체로 묘사하고 있고, 고유의 말초적 긴장감은 그 주제의식을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중요한 영화적 장치로 활용됩니다. <원초적 본능>에서도 그랬듯이, <그녀>는 일일이 거론하고 반박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일상화되고 관습화된 가부장적 권위의 폭력은 인간관계의 가장 내밀한 층위인 섹슈얼리티를 도구로 삼는다는 진실을 폭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폭로나 증언에서 한발 더 나아가, 영화라는 매체가 허락하는 대안적 공간에서만큼은 이 부조리한 구조를 철저히 응징하는 핏빛 유토피아를 구현하려고 하죠. 물론, 폭력을 폭력으로 갚는다는 논리나 그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부르조아적 문제인식의 한계에 얼마나 동의하느냐에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가 결정될 것 같습니다.




  <원초적 본능>의 캐서린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미셸은 뚜렷한 자기 주관과 성적 취향으로 무장하고, 먹잇감을 기다리는 맹수와 닮았습니다. 파리의 부유한 주택가에서 고급스러운 취향으로 인생을 즐기며 혼자 사는 이혼녀인 미셸은 한때 문학을 공부했지만, 초고도화된 자본주의의 총아인 비디오게임 업계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게임회사의 공동대표이기도 합니다. 남부러울 것 없이 보이는 그녀이지만 현실은 좀 한심합니다. 절필한 소설가로 이혼한 전부인의 회사에 일거리를 찾아 기웃거리는 찌질한 전남편, 변변한 직장도 없이 표독한 여자친구에게 치이고 부자 엄마에게 손 벌리는 외아들, 잘사는 딸의 도움으로 연명하면서 젊은 남자와 연애 놀이에 푹 빠져 사는 엄마, 희대의 연쇄살인범으로 장기수감 중에도 심심찮게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아빠, 절친이자 회사를 함께 운영하는 안느와 그녀의 남편이자 부끄러운 줄 모르고 끊임없이 만나자며 들이대는 내연남. 마치 복잡한 게임이라도 하는 양, 이 거미줄처럼 얽힌 관계들 사이를 거침없이 유영하던 당찬 미셸은 어느날 느닷없이 침입한 괴한에 의해 강간을 당합니다. 잠시 바닥에 앉아 텅빈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미셸은 말없이 일어나 어지러진 집안을 정리하고 욕조에 몸을 담그죠. 눈깜짝할 사이에 들이 닥친 토네이도처럼 일상을 산산조각낸 사건을 겪었지만 미셸은 개의치 않겠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혼란스러운 순간을 견딥니다. 미셸이 마치 밀린 업무라도 처리하는 것처럼 성병 검사를 받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가 지인들에게 강간당한 사실을 알리는 영화 초반의 비관습적인 장면들에서, 이자벨 위페르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이 가녀린 몸으로 이 강철같은 인물을 완벽히 표현해 냅니다.


    강간범으로부터 줄기차게 협박 메세지가 오고 집안에 그가 다시 침입한 흔적이 선명하지만, 미셸은 이를 경찰에 알리지 않고 – 혹은, 또하나의 제도화된 남성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 주변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둘러 보기 시작하죠. 영화의 중반부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남성들을 관찰하는 미셸의 시선을 통해,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그 안에서 묵인되는 배타적 특권의식이 낳은 기형적 남성상을 가차없이 카메라 앞에 드러냅니다. 탐욕, 위선, 불관용, 이기심, 자기연민, 그리고 무력감과 우울 – 이 모두가 바로 <그녀>가 직시하는 오랜 권력독점으로 인해 안에서부터 썩고 있는 가부장 제도의 자화상이지요. 강간이라는 가장 원초적 형태의 남성 폭력에 노출되었지만 주체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미셸과, 그런 그녀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이는 주변남성들, 우아하고 럭셔리한 파리 상류층의 일상에서조차 발톱을 드러내고 있는 욕망의 호전성, 그리고 내재된 공격본능을 돈벌이에 이용하려는 자본의 천박한 속성 간의 충돌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버호벤 감독 특유의 서슬퍼런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비록 정글같이 위험천만한 현실에 살지만, 그녀가 유일하게 호의적인 태도로 대하는 이가 있으니, 잘생기고 듬직한 이웃집 남자 패트릭입니다. 패트릭은 신앙심 깊은 아름다운 아내와 그림같은 가정을 꾸미고 살아가는 은행간부죠. 불안과 공포를 홀로 견디는 미셸에게 보호본능을 느끼는 듯, 무슨 일이든 나서서 미셸을 돕는 패트릭은 서서히 미셸의 주변을 맴돌며,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그녀의 일상에 스며 듭니다. 관객 또한 이 친절한 앞집 남자의 등장으로 한숨을 돌리게 되지요. 허나, 이미 <원초적 본능>에서 예견된 바대로, 성적 욕망에 있어서 남녀 구분없이 ‘뻔뻔한’ <그녀>는 미셸이 사람좋은 패트릭을 망원경으로 훔쳐 보면서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자위행위를 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나도 관음과 자위를 누릴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미셸의 당당한 선언으로 해석이 가능한 이 작은 반전은, 두 인물 사이에서 로맨틱한 관계 발전을 살짝 기대했던 저를 비롯한 관객들의 습관적 기대감을 머쓱하게 합니다. 올가미처럼 목을 조여 오는 강간범의 협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미셸은 간단한 호신 무기에서부터 권총 사격에 이르기까지 가부장제의 근간이자 남성 우위를 정당화하는 마초적 폭력에 잠시 의탁해 보려고도 하죠. 하지만 이자벨 위페르가 품격있게 연기해낸 미셸은, 얼음 송곳을 침대 밑에 감춘 채 대상화시킨 남자의 육체를 맘껏 탐하는 <원초적 본능>의 캐서린보다는 한 수 위인 듯 합니다. 노련한 미셸은 서로의 손에 피를 묻히는 유아기적 폭력 대신, 가부장적 독점욕 안에서 이미 자랄대로 자라난 자기파괴 본능을 살짝 비트는 전략을 써서, 독버섯처럼 그녀의 인생에 기생하던 찌질한 남자들을 한방에 청소해 버립니다.


    영화는 상상만으로도, 아니면 상상 속에서나마 통쾌한 페미니즘적 복수극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미셸은 부조리한 사회 구조에 젖어 있는 동안 저지른 본인의 위선과 자기기만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자기 스스로에게 그리고 상처입힌 누군가에게 그녀만의 방법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폴 버호벤 감독은 나름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나 이제는 다소 식상한 감이 있는 대안적 여성연대로 영화를 맺으려 하지요. 이 영화가 담지하려고 했던 부조리의 폭로와 비판 그리고 전복에의 시도와 그 결과를 어떻게 평가할지의 문제와 별개로, 여든이 다 된 백발의 할아버지 감독은 사실 속빈 강정에 불구한 펠러스 (phallus)를 마구 휘둘러대는 남근 중심적 문명의 민낯을 솔직히 드러낸 <그녀>를 통해서, 보편화된 성차별의 폭력에 감금된 수많은 “그녀”들에게 잠시나마 해방구를 선물하려는 듯 합니다. 그리고 억압과 불평등으로 유지해온 가부장 질서의 내압으로부터 발생한 무의식적 자책과 불안에 떨며 ‘이러다가 이 세상이 끝내 멸망’하리라고 예견했으나 너무나 멀쩡히 21세기가 도래한지도 한참이건만, 독주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치열한 경쟁과 생산성을 명목삼아 여전히- 아니 그 어느때보다도 더 공고히 –남성 우위를 지속하려는 “그”들에게 섬뜩한 경고장을 날립니다. 진짜 위험한 건 바로 ‘그녀’라고.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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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진짜 여성'에 대하여


- 장강명 소설 [댓글부대] 리뷰

 





(평범한 워킹맘, 페미니스트, 간간이 글쟁이로 변신)


0.


    이 글은 <댓글부대>에 다는 하나의 긴 댓글이다. 내 뒤엔 합포회도 없고, 수십만의 조작된 ‘좋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이 글은 쏟아지는 다른 컨텐츠들에 금방 묻혀버릴 것이다. 그래도 구태여 이 글을 쓰는 건 <댓글부대>의 독자인 나, 불쾌하고 속상한 나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 대부분의 댓글이 그런 목적에서 쓰여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1.


   <댓글부대>의 주요 전선은 정치 성향이 아니라 젠더였다. 여초 커뮤니티를 붕괴시키는 것이 팀-알렙의 목적이어서만은 아니다. <댓글부대>에서 여성은 가장 하찮고 대상화된 존재인 동시에, 가장 중요하며 언제나 중심에 있다. 둘의 증오는 여성이 자의식을 가진 하나의 주체로 등장했다는 데에서 불꽃처럼 타오른다. 그들에게 여성의 주체성은 그 자체로 남성의 기득권 상실이다. 마음대로 가슴을 주무를 수 없고, 내키는대로 섹스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그들의 성욕을 반영하는 것처럼, <댓글부대>에서는 섹스가 매 챕터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룸살롱과 안마방에서 시작해 요정에 이르기까지 작품 내 등장하는 다양한 성매매 장소는 팀-알렙과 합포회의 남성성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남성성은 진보로 표방되는 여성(혹은 여성으로 표방되는 진보)에게 끊임없이 위협 받는데, 그래서 더욱 더, 팀-알렙과 합포회의 남자들은 본인들이 지배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성기로서의' 여성들 속으로 파묻힌다.


    팀-알렙과 합포회의 일원들은 성매매 업소에서만 쾌락과 안정감을 느낀다. 잠시동안 합포회의 일원이 미팅을 주선했던 ‘강연 카페'같은 곳들은, 그들이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될 트렌드이자 위협이다. SNS와 온라인을 지배하지 않으면, 지금의 돈도 권력도 깡그리 무력화될 것이라는 불안도 같은 방식으로 표출된다. 그들이 지배하지 못했고, 아직까지 알지 못하는 공간들은 그 자체로 그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선다. 그래서 합포회는 몇 천만 원의 돈을 투자하면서까지 ‘지능형 댓글 알바'인 팀 알렙-을 고용하는 것이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공간을 붕괴시켜 이윽고 온라인을 지배하기 위해서. 


   이러한 맥락에서 합포회는 팀-알렙에게 진보적 정치 성향을 띤 여성 커뮤니티를 공격하라고 지시한다. 팀-알렙은 합포회에서 준비해 준 커뮤니티 아이디들을 활용하여 커뮤니티 안에서 논쟁의 불씨를 피우고 싸움을 부채질해가며 손쉽게 커뮤니티를 붕괴시킨다. 그들은 여성 커뮤니티에 내부 균열을 일으켜 회원 간 갈등을 촉발시켰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이중성을 폭로하기도 했다. ‘사회의 폭력성’을 누구보다도 경계하는 이들이 조그마한 계기가 주어지자 내부에서 서로를 ‘폭력적’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댓글부대>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은 듯 했다. “온라인에서 제 아무리 여성/진보가 득세하는 것처럼 보인다해도 실제 세력은 남성/보수들의 손아귀에 있으며, 온라인도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깨부술 수 있다”고. 그러나 <댓글부대>라는 작품을 통해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다른 메세지는 이렇다. “아무리 온라인을 누군가 침입해서 깨부수더라도, 여성/진보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는다.” 


   끝내 그들이 여성을 혐오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커뮤니티를 부술 뿐이지, 여성을 부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여초 커뮤니티 하나를 끝장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보의 ‘망조'를 불러낸 건 아니다. 손에 꼽는 국지전이고, 어차피 이들은 그들의 커뮤니티 하나를 잃었을 지언정 스스로의 정체성에 위협을 받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댓글부대>라는 작품 속에서 지속적으로 신변상의 위협을 느끼는 건 팀-알렙과 합포회다. 커뮤니티의 여성들은 기껏해야 고소에 대한 처벌을 두려워할 뿐이다.


2. 


    나는 현실과 허구의 영역이 모호할 정도로 세심하고 사실적으로 쓰여진 이 소설에서 유독 젠더 양상만 극단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여성들 중에서도 그가 채택한 건 극단의 여성상이었다. 한 부류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며 팀-알렙, 합포회 남성들에게 성적 쾌락을 주는 여성들이다. 그리고 다른 한 부류는 여초 사이트에서 정치적 성향을 뚜렷하게 내보이며 팀-알렙, 합포회를 은연 중에 비웃는다.(실제 비웃지 않았더라도, 팀-알렙과 합포회는 여초 커뮤니티의 회원들이 자신들을 비웃고 우습게 여긴다고 생각한다.)


   이 극단화된 여성상은 온라인의, 그것도 남초 커뮤니티의 상상적인 여성상을 그대로 베껴 놓은 듯 했다. 그에 비하면 그나마 작중의 남성들은 다양화된 편에 속한다. 여성이 사회적 약자임을 이해하고 있는 K신문 기자와 업소 여자에 대해 저속한 뒷담화를 나누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녀들과의 로맨스를 기대하는 찻탓캇, 여자는 그저 노리개로만 취급하는 합포회까지 나름의 스펙트럼을 갖추고 있다. 


   <댓글부대>는 온라인에서 과잉묘사된 여성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마치 정말 있는 여자처럼, 어딘가에서 본 사람처럼. 사실 이건 남초의 보수 커뮤니티에서 여성 혐오를 부풀리는 데에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 사실이 아닌 사건을 자신이 직접 본 것처럼 날조하면서 ‘역시 김치녀 클라스’라는 식으로 여성을 매다는 것이다. 


3.


   <댓글부대>의 남성 캐릭터는 입체적이다. 특히 <댓글부대>의 주요 화자인 찻탓캇이 그렇다. 본인들의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한편 어떤 불안감을 직시하고, 성매매 여성을 ‘더럽게’ 보면서도 그녀들에게 어떤 연민과 애정을 가진다. 그러나 <댓글부대>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단편적이다. 이중적이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작중에 여성 ‘캐릭터’는 없다. 이 작품에서 여성은 그저 ‘관찰된 객체’로서만 존재한다. 


   <댓글부대>가 지닌 리스크는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장강명은 <댓글부대>가 진보와 보수, 그리고 온라인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작중에 설정된 여초 커뮤니티의 이미지와 성매매 업소들의 비중 때문에 사실 ‘정치적 성향’의 문제는 크게 보이지 않았다. 구태여 짚는다면 ‘역시 진보는 분열로 망하는군’이라는 뻔하디 뻔한 클리셰 정도. 오히려 읽혔던 건 이런 말이었다. “조작 가능한 건 ‘정치적 여론’이 아니라 ‘성별 간 적대감’이다.”


   나는 많은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여성을 ‘된장녀/간장녀/생강녀’라는 식으로 개인들의 다양한 성질들을 과장하여 구분짓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어째서 우리 사회의 성적 구도는 늘 한결같이 ‘극단적’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혐도, 여혐혐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쉽게 구분하고 판단 짓지 못하는 개인들이 다양하게 있을 뿐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스타벅스를 좋아하면서(된장녀) 에코백을 메고 다니는(생강녀) 사람도 분명 있는 것처럼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죽기 전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는 ‘극단’과 ‘중간적인 것’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 문단만을 여기 옮겨 본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모든 극단에 적용될 것이네. 다시 말하면 매우 신속한 것과 매우 느린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검은 것과 흰 것 등등. 이처럼 모든 것에 있어서 극단은 희귀한 데 비해 그 중간적인 것은 대단히 많은 법이네. 자넨 이와 같은 것에 대하여 관찰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나?”[각주:1]  


   나는 이 질문을 그대로 장강명에게 돌리고 싶다. ‘자넨 중간적인 여성에 대하여 관찰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나?’[각주:2] 정말로?  



ⓒ 웹진 <제3시대>

  1. 플라톤 저, <파이돈> 중 [본문으로]
  2. 이전에도 나는 장강명 작품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아쉬움에 대하여 쓴 적이 있다. <표백>, <삶어녀 죽이기>, <한국이 싫어서> 의 여자 주인공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비현실성과 마녀성이 주제였다. 해당 글 원문은 여기서 확인 가능하다. http://ichungeoram.com/958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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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비' 성폭행 사건을 대하며 : 빠지지 말아야 할 '유혹'들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나의 연구실과 강의실이 있는 학교 내의 건물 이름은 코스비 (Cosby)이다. 정확하게는 ’카밀 올리비아 행스 코스비 빌딩’ (Camille Olivia Hanks Cosby Building)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 인기리에 상영되었던 [코스비 쇼]의 주인공인 빌 코스비의 부인인 카밀 코스비의 이름이 붙여진 빌딩이지만 줄여서 코스비라 불리고 있다. 이 대학은 1988년에 코스비가족으로 부터 약 200억원 ($20 million)을 기부 받았는데, 미국내 흑인 대학교들이 받은 기부금 중 최고의 액수였다. 그 기부금의 일부로 시설이 좋은 코스비 건물이 지어졌고, 기부금의 또 다른 일부는 매년 ‘코스비 교수’ (The William and Camille Olivia Hanks Cosby Endowed Professorship)를 초빙하는데 쓰여져 왔다 (‘코스비 교수’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문학이나 예술 분야에서 명망이 있는 학자를 일년에 한명씩 뽑아 학교로 초빙해 왔다). 작년 겨울에 빌 코스비의 성폭행 (sexual assault)과 관련된 혐의가 또다시 제기되었을 때 이 대학은 ‘코스비 교수’ 프로그램을 폐지했다.[각주:1] 올 여름 마흔 명이 넘는 여성들이 빌 코스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증언을 하면서 그의 혐의가 다시 제기되었을 때는 남은 기부금 전액을 카밀 코스비가 세운 클라라 엘리자베스 잭슨 카터 재단 (The Clara Elizabeth Jackson Carter Foundation)에 되돌려준다는 결정을 내렸다.[각주:2]


    코스비의 여성을 상대로 한 다양한 형태의 성폭행은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코스비의 성폭행에 대한 혐의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즈음이다. 지난 십년 동안 몇 명의 여성들이 그의 성폭행 혐의를 제기하고 자신들의 피해경험을 얘기 했지만, 그때마다 코스비 사건은 묻혀버렸다. 2014년에 코스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성들이 여러 명 나타나면서 코스비 사건은 더 이상 묻혀 버릴 수 없는 일이 되었다.[각주:3] 그동안 코스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피해 여성들의 숫자는 현재 52명 (2015년 8월 25일 기준)이다.[각주:4] 수십명의 여성을 상대로한 성폭행 혐의와 관련해서 빌 코스비는 아직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현재 기소되지 않은 상태이다.


    코스비의 성폭행 혐의를 접한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반응도 엇갈렸다.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코스비를 비난하는 소수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혐의를 일단 믿기 어려워 했다. 1980년대 [코스비 쇼]에서 화목한 흑인 중-상류층 가정의 유쾌하고 자상한 ‘가부장’을 연기하면서 ‘아메리카의 아버지’로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코스비의 이미지가 성폭행을 행사한 가해자로서의 코스비와는 도저히 맞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흑인 커뮤니티에서 코스비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흑인들이 코스비를 옹호하거나 보호하려는 것은 ‘존경받고 사랑받는’ 코스비의 이미지 때문 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의 잔인했던 흑인 ‘폭행’ (lynching)의 역사와도 일련의 관련이 있다. 노예 해방후 남부 지역에서 흑인들을 향한 백인들의 잔인한 폭행과 살인은 흑인 남성들, 여성들, 그리고 아이들에게 까지도 거침없이 자행 되었다. 특히 흑인 남자들은 백인 여성을 ‘강간한 죄’로 폭행 당하고 살해 당했으며, 심지어는 ‘눈으로 하는 강간’ (eye rape)도 수감과, 폭행, 심지어는 살해를 당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흑인 남성들에 대한 미 백인들의 폭행의 대부분은 조작되었거나 거짓 증언의 결과였다. 폭행과 살해를 정당화 하는데 사용되었던 “흑인 남성은 강간범”이라는 이미지가 고정관념이 되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이런 잔인한 역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흑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코스비 역시 그의 피해자들로 알려진 여성들 중 대다수인 백인여성들의 거짓 증언의 희생자라고 여기고 그를 옹호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흑인여성 피해자들과, 피해자들의 증언을 우선 믿고 연대하는 여성들은 도데체 몇 명의 피해자가 나와야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 들일 것인가라고 울분을 토하면서, 코스비가 자신의 행동을 책임 질 것을 촉구해 왔다. 또한,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면서, 코스비를 옹호했던 몇몇 유명인사들도 자신들의 코스비 지지발언을 철회하고 있다.  


    미국의 잔인한 흑인 폭행과 살해의 역사가 코스비 사건을 수면으로 떠오르게 하는데 시간을 지체시킨 면도 있지만, 코스비 사건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성폭행의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질문과 시선이 다른 비슷한 사건들의 경우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된다. 성폭행 피해자가 거짓 증언을 하는 경우는 사실 매우 드문데,[각주:5] 다른 범죄들의 경우와 달리 성폭행일 경우 유독 피해자의 거짓 증언의 가능성이 제기되거나, 가해자보다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일이 빈번하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성폭행의 사례들, 특별히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남성들이 가해자일 경우들도 그 예외가 아니다.  


    믿고 뽑아준 국회의원, 믿고 배운 교수, 믿고 따른 교사, 믿고 헌신한 목사, 믿고 맡긴 의사, 믿고 보는 배우, 믿고 안심한 경찰, 믿고 도와준 시민운동가… 만약 그렇게 굳게 믿었던 공동체의 영향력있는 남성이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내가 속한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근절을 위해 지난 수십년간 활동하고 글을 써온 마리 포춘 (Marie Fortune)과 제임스 폴링 (James Poling)은 피해자 여성이 그녀가 속한 공동체 (교회 공동체도 포함해서)의 영향력 있고 힘있는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을 폭로했을 때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여섯가지 유형의 ‘유혹’에 대해 말한다.[각주:6] 그 “유혹’들은 다음과 같이 나타날 수 있다.  


    1. 믿지 못하는 유혹

    예)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 “그 남자가 그랬다니… 믿을 수가 없어!” “그럴 남자가 아냐!” 


    2. 교회 (공동체)의 이미지를 보호하려는 유혹

   예) “교회를 위해서 일을 더 크게 벌리지 말자.” “모두를 위해서 그냥 조용히 덮고가자.” “우리가 어떻게 이뤄 온 공동체인데... 왠만하면 공동체를 생각해서 이번 한번만 넘어가자.” 


   3. 피해자를 탓하려는 유혹

   예) “그 여자는 왜 그 시간에 그 남자의 사무실에 갔지?” “그 여자가 뭘 바란건 아닌가?” “왜 굳이 따로 만나려고 했지?” “왜 그 여자는 그 시간에 그런 (야한) 옷을 입고 거기에 갔지?”: 


   4. 가해자를 동정하는 유혹

   예) “어쩌다 그렇게 됬을까.” “외로웠나 보다.” “마음이 너무 약해서 만나주다 보니 그렇게 됬다.” “아마 무슨 연유가 있었을 것이다.” “(피해여성의)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갔다.” 


   5. 가해자를 그의 행동의 결과로부터 보호하려는 유혹

   예) “앞날이 창창한데 한번 정도 실수는 봐줘야지.” “경찰서까지 갈 필요없이 그냥 합의를 하지.” “법으로 처리하면 그 사람과 그 가족은 앞으로 어떡하라고.” 


   6. 값싼 은혜의 유혹

   예) “이제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으니 앞으로는 다시 그러지 마라.” “하나님께 회개를 하고 용서를 구하면 죄사함을 받고, 다 해결 될 것이다.”  

   

   이 여섯가지 유혹들 중 그 어떠한 것도 피해자를 ‘위한’ 유혹은 없다. ‘유혹’ (temptation)이란 단어의 여러가지 어원들 (한 예로 희랍어peirasmos) 을 보면 ‘유혹’은 결과를 수반하는데 그 결과는 잘못된 것이거나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즉, 위의 여섯가지 유혹들 중 한가지에라도 빠지게 되면 잘못된 결과를 가져 오게 되는데, 그 결과는 어렵게 자신의 피해를 폭로한 피해자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잘못을 덮어주고 넘어 감으로써 결국엔 그가 또 다른 가해를 행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유혹’에 넘어간 개개인들과 공동체는 성폭행의 악순환을 끊는 것을 방해하고 지체함으로써 넓은 의미에서 공범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유혹들이 되풀이 되면 피해자의 회복은 점점 어려워 지고, 가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들을 만들어 내면서 교회든 어느 공동체에서든 성폭행의 악순환은 계속되는 것이다.

  

    만약 공동체가, 특별히 교회가, 가해자와 공범 집단이 되어서 사건을 은폐하는데 급급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성폭행의 악순환을 끊어 내는 것을 우선 순위로 여긴다면,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유혹들을 떨쳐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여섯 가지의 ‘유혹’을 여섯 형태의 ‘용기’으로 바꾸는 것이 그 첫 단계가 될것이다.  


    한국어사전은 ‘용기’를 날랠 용 (勇)과 기운 기(氣)를 써서, “씩씩하고 굳센 기운. 또는 사물을 겁내지 아니하는 기개”라고 적고 있다. ‘용기’라고 번역되는 영어 단어인 ‘courage’는 심장, 즉, 마음과 연결되는 단어이다. Courage의 어원인 ‘cor’는 라틴어로 심장/마음 (heart)을 뜻한다. 지금은 그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용기(courage)라는 단어는 원래 “온 마음 (heart)을 다하여 내 생각을 말하는 것”[각주:7] 이란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혹’ 대신에 어떤 ‘용기’가 필요한 것일까?  


    피해자의 얘기를 듣고 믿어주는 용기 

    피해자를 탓하지 않는 용기 

    상황을 덮으려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막는 용기 

    공동체나 조직의 이미지 유지보다 피해자의 편에 서는 용기 

    지위와 영향력에 상관없이 가해자가 책임질 것을 요구하는 용기 

    가해자에게 값싼 은혜 (빠른 용서)를 퍼부어 주지 않는 용기.  


    그런데, 공동체를 이루는 개개인들의 이러한 용기는 제도적으로 뒷받침 되어져야 한다. 피해자에게는 정의로운 해결과 회복을 가져다 줄 수 있고, 가해자에게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하는 제도, 그리고, 공동체 역시 적합하고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을 경우에 그 담당자들도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도가 개개의 교회와 교단 및 일반 사회에 정착되어져야 한다.  


     이렇듯이 개개인이 ‘유혹’에 빠지지 않고, 공동체 및 사회의 제도가 제대로 적용되고 정착되는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뿌리 깊은 여성혐오, 성차별, 남성우월주의, 위계질서가 왜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할 문제인지를 묻는 비판적인 교육이다. 개개인들이 유혹에 빠지지 않고 용기있게 행동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와 지속적인 교육이 병행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위의 여섯가지의 유혹들이 더 이상 ‘유혹’이 될 수 없고, 여섯가지의 ‘용기’가 특별한 것이 아닌, 그저 내가,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이 될 때 성폭행의 근절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코스비빌딩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계속해서 물을 것이다. 데이트 폭력을 포함해서 성폭행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 지고 있는 대학 캠퍼스와 사회에서 학교는, 교수들은, 직원들은, 동창들은, 종교기관들은, 사법기관들은, 그리고 사회 구성원 개개인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또 다른 코스비가 나오지 않게 하려면 누구든지 빠질 수 있는 유혹과 누구나 가져야 할 용기들에 대해 계속해서 대화해야 할 것이다. 갈길이 멀지만 바로 지금 여기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ww.huffingtonpost.com/entry/spelman-college-drops-bill-cosby-professorship_55b4417ee4b0224d8832819b [본문으로]
  2. http://time.com/3972281/bill-cosby-spelman-college/ [본문으로]
  3. http://www.slate.com/blogs/browbeat/2014/11/21/bill_cosby_accusers_list_sexual_assault_rape_drugs_feature_in_women_s_stories.html [본문으로]
  4. http://starcasm.net/archives/306591 [본문으로]
  5. http://web.stanford.edu/group/maan/cgi-bin/?page_id=297 [본문으로]
  6. Marie M. Fortune and James Poling, “Calling to Accountability: The Church’s Response to Abusers,” in Violence Against Women and Children: A Christian Theological Sourcebook, ed. Marie M. Fortune and Carol J. Adams (New York, NY: Continuum, 1995). [본문으로]
  7. http://www.pbs.org/parents/experts/archive/2010/11/courage-is-a-heart-word-and-a.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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