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허구일지도 몰라, 여성혐오[각주:1]



신윤주*



# 나의 이야기


    지난 세월을 돌이켜 헤아리는 일은 시간의 유속을 왜곡하는 셈법이라지만 그래도 그렇지, 8년차 부부라니! 맘이 그렇지 않다 해도 신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시기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버렸다. 낯선 열정이 친숙한 다정함으로 변모하는 동안 동갑내기인 우리 부부는 양가 부모님 네 분의 환갑 기념행사와 동생의 결혼, 그리고 몇 번의 이사를 함께 치렀다. 그리고 서른여덟이 되었다. 서른여덟짜리 여성의 몸은 어떤 것일까. 나는 아이를 가지는 일을 두고 숙고할 때마다 내 몸의 나이를 센다. 그렇게 ‘나 자신’인줄 알았던 몸이 사실은 ‘대상’이었음을 자각한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되어 있지만 사실은 통제의 범위를 훌쩍 넘어서는 대상으로서의 육체가 불모를 선언하기라도 할까봐 내심 불안해한다.

    나는 아직 초산을 하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간의 피임은 성공적이었다. 처음부터 아이 없는 삶을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망설임은 유보 혹은 지연으로 귀결되곤 했다. 주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 한두 해가 지났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아이 소식을 묻기 시작했다. 양가 부모님 역시 순리처럼 아이를 기다렸다. 엄마는 애를 태우기까지 했다. 혹여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않아 쌔한 대접을 받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신 것이다. “시부모님이 뭐라고 안 하셔?” 어느 날 엄마는 무심한 척 질문을 던졌다. 나는 ‘물론 기다리기야 하시지만 재촉하진 않으신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남편이 부모님을 나름 성공적으로 설득해내고 있기도 했다. “지금 저희 벌이로는 아이 못 키워요. 다른 여건도 어렵고요. 저희 아이는 저희가 키울 거예요.”

    결혼 후 첫 해를 채운 후에 나와 남편은 순차적으로 대학원에 입학했다. 결혼할 당시에 진학을 계획했던 건 아니었지만 출산의 시기 때문에 조금 서둘렀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무 것도 못한다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고 우리에겐 더 해야만 하는 공부가 있었으니까. 마치 사명처럼 우리를 추동한 욕망을 따라 남편과 나는 출산도, 커리어를 쌓는 일도 다음으로 미뤘다.

    물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일과 공부와 육아를 병행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한정된 자원의 배분에 관한 문제였다. 육아는 누군가가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아이의 부모가 포기하지 않으면 조부모가, 그마저도 어려우면 아이 자신이 포기할 지분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여성으로서의 당위와 기대가 만들어낸 내적 갈등이 한동안 이어졌다. 빨리 아이를 갖지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자기 몸의 한 자리에 난 방을 작고 여린 생명에게 내어주고, 열 달 즈음 몸 안에서 자라게 하고, 때가 찼을 때 광활한 우주의 어느 공간에 내어놓는 일. 그리고 그가 스스로 자기 몸과 세계를 다룰 수 있을 때까지 여전히 지키고 돌보는 일. 자녀를 만난다는 것은 분명 대단히 특별한 경험이자 엄청난 변화일 것이다. 하지만 한편, 원하지 않는 아이만큼 여성을 괴롭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아이와 상황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지 끝내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남편은 아이를 바라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아버지가 되는 일의 숭고를, 부모님에게 갚아야 할 생명의 빚이 있음을 생각했지만 경제적인 부분에 관한 현실적 우려를 떨칠 수도 없었다. 아이가 생긴다는 건 진로와 사랑 양쪽을 모두 건 모험을 감행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남편의 관심 분야는 모종의 성취와 돈벌이 사이의 연관성이 뚜렷하지 않았다. 또, 아이가 태어나면 어떤 방향으로든 부부의 관계 양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들 하는데 우리는 꽤 만족스럽게 잘 지내고 있기도 했다. 남편에게도 아이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이 포기해야 할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한 입장을 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몇 해 전 어느 모임에 참석했을 때였다. 정년이 보장된 직장의 간부급 남성 한 분이 걱정이라는 듯 점잖게 말했다. “요즘 젊은 여자들은 이기적이어서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하는 게 큰 문제에요.” 자녀를 위한 희생을 감당하지 않으려한다는 거였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기는 했다. 하지만 출산 기피 현상을 그런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입체적인 사안을 너무 납작하게 만들어놓는 일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그때 ‘아이를 낳는 일도 자녀를 갖고자 하는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을까? 적어도 이기심과 이타심의 이분법 외에 다른 준거들이 존재할 수 있음을 반문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도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식물처럼 앉아 있었을 것이다.


#자궁은 누구의 것인가


    모성은 당위가 아니지만 어머니가 되는 일에서 발견 되는 숭고가 있다. 한 생명을 온전히 책임지는 실천은 삶의 깊이를 더하고 외연을 넓히는 결과를 낳곤 한다. 그러나 아이를 원하는 이유가 이타성을 훈련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사명 때문이든, 부부의 모습을 닮은 아이를 보고 싶기 때문이든, 부모님이 기다리시기 때문이든, 엄마가 되는 경험이 주는 긍정적인 기억 때문이든, 첫째 아이를 위한 것이든 출발점은 희생이 아닌 ‘욕망’이다.

    새 생명의 삶은 소중하다. 아니,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그렇다면 생명을 잉태한 이의 생명도 소중하다. 그리고 두 생명이 맺는 관계의 양상도 소중하다. 축복 속에 시작한 결혼이라도 순탄치만은 않듯, 축복 속에 시작한 삶이라도 쉽지 않은 것이 인생이다. 수많은 필요와 장애를 해결할 의지와 기지를 발휘해야 할 때 누군가에게 욕망되지 않는 삶은 쉽게 좌초된다. 욕망하지 못하는 양육자는 죄책감을 쉬 떨치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사회적·도덕적 당위의 잣대를 가져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임신과 모성을 선택할 혹은 포기할 권리와 책임은 일차적인 책임의 주체인 성인 여성에게 있어야 한다.

   임신 중단은 여성이 자신의 삶에 일어난 낯선 사건을 다루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완성이라기보다 새로운 관계의 시작에 불과하며, 그 관계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양육자의 돌봄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임신과 출산, 양육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은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 갓 엄마-되기를 시작한 한 여성은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고 새로운 몸의 신호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라가는 생명과 더불어 호흡한다. 하나의 흔적이 미미한 박동이 되고, 그 박동이 인간 신체의 형상으로 광활한 세계에 떨어지고, 최초의 폐호흡을 시작하면 비로소 진짜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 덩어리의 숨 쉬는 육체가 사회 속에 자리를 만들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하나의 인간 개체가 되기까지 복수의 양육자와 공동체와 사회와 국가는 돌봄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적 지원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수의 양육자가 아이의 생존을 책임질 길을 상상할 수 없다면 출산하지 않는 선택을 과연 이기적인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임신 중단으로 인해 가장 큰 상처를 입는 사람은 여성 자신인 경우가 많다.

   지난 해 보건복지부에서는 여성의 자궁을 관리하기 위한 정책들을 내놓았다. 그중 하나로 ‘낙태죄’의 유령을 불러낸 조치로서 여성·사회 운동가들에게 비판을 받은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일부 개정령안’과, 성경험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여성에게 귀속하는 접근인 자궁경부암 예방접종사업이 있다.

    우선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대한 처벌 강화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일부 개정령안’이 문제가 된 것은 근본적으로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임신중절수술 조항을 포함시켰다는 데에 있다. 불법임신중절수술에 관한 처벌 조항이었지만 산부인과의사회는 11월 2일부터 모든 병원에서 임신 중절 수술을 거부하겠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한국 사회에서 임신중절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법이기 때문이다. 합법인 경우는 모자보건법에서 허용하는 유전성·전염성 질환 등의 보건 의학적 사유나 성폭력에 의한 임신 등의 경우에 제한된다. 또 합법적 사유에 해당되더라도 임신 24주 이내에, 그리고 부득이한 사유가 있지 않는 한 ‘(남성)배우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임신 중단은 형법 제27장 ‘낙태의 죄’라는 조항에 따라 불법이며, ‘낙태’를 한 여성도, 시술한 의료인도 형사 처벌의 대상이다. 

    임신의 ‘과정’에 남성이 개입되고 임신 이후의 모든 기간에 사회적 장치들이 개입되는 만큼, 임신 중단의 결정을 여성 개인의 죄로 처리하는 것은 부당하다. 임신 중단에 대하여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여성에게 인구 재생산의 사회적 의무를 부과할 때뿐이다. 여성의 삶을 고려하지 않고 여성의 몸을 단순한 인구정책수단으로 바라보는 것은 여성혐오적 접근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최초의 쾌락과 최초의 수정에 대한 기여도를 감안한다면 준비되지 않은 임신에 대한 도의적 책임과 과오를 모두 여성에게 묻는 것 역시 성평등지수가 낮은 사회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여성혐오적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각종 여성·사회단체의 청원 덕에 임신중절수술에 대한 처벌을 12개월 자격 정지로 강화하려던 개정안의 조항은 현행과 동일한 수준인 1개월 자격 정지로 유지되었고, 복지부는 현행 의료법령에 명시된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대한 대체 용어를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책임을 여성 자신에게만 귀속하는 시각은 지난 해 6월에 발표된 사업인 ‘건강여성 첫걸음 클리닉’에서도 발견된다. 건강여성 첫걸음 클리닉은 2003~2004년에 태어난 12~13살 여학생이 자궁경부암 예방접종을 하도록 권장하는 사업이다. 보건복지부는 2015년도에 국회로부터 예산을 배정받아 매해 230억원을 이 사업에 배정하여 무료 접종을 시행할 예정이다. 그러나 주사제의 안정성에 대한 우려가 대두되어 접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11월에 질병관리본부에서는 ‘자궁경부암 예방접종 ‘동행’ 캠페인’이라는 것을 내놓기도 했다. 무료 접종 대상을 12, 13세의 여학생으로 제한한 이유로 제시된 것은 HPV 감염이 성 접촉을 통해 전파되므로 성 경험 전 예방을 통해 최적의 효과를 내도록 한다는 것, 9∼15세 연령에서 접종 시 그 이상 연령에서 접종한 경우보다 면역반응이 더 높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는 성별을 특정한 근거로 충분하지 않다.

    사실 이 백신은 정확히 말해 자궁경부암 예방 주사가 아닌 HPV 백신이다. 마치 인플루엔자(flu) 바이러스에 대한 예방주사를 플루 백신이라고 하는 대신 독감 예방 주사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사실상 HPV 예방 주사는 자궁경부암만을 예방하는 주사가 아니다. 이 주사는 항문암에 80%, 자궁경부암에 70%, 여성생식기 계열 암에 60~40%, 그리고 몇몇 구강암에 대한 예방 효과를 기대한다. 또한 성 접촉을 통해 감염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예방주사를 반드시 ‘여성 청소년’만 맞아야할 이유는 없다. 이미 한국은 캐나다, 호주, 홍콩, 영국, 미국 등과 더불어 남성에게도 이 예방접종을 할 수 있는 승인을 받은 상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방접종 대상이 여성으로 제한되기 때문일까. HPV 예방주사 중 하나인 ‘서바릭스’의 홍보물은 학생들 간 대화의 내용으로 인해 여성혐오 논란을 촉발하기도 했다. 


     여학생 A: 우와- 오늘 자궁경부암 백신인가 때문에 병원 간다구? 

     여학생 B: 아 몰라~!! 지금 우리 나이가 공짜로 놔주는 때라서 엄마가 절호의 찬스래. 


     남학생 C: 너 그거 얌전히 맞는 게 좋을 거야. 신문에서 사춘기 때 맞는 게 좋다고 했어! 

     여학생 B: 이 자식, 네가 뭘 알아? 남자가. 

     남학생 C: 사... 상관있어! 여자가 나중에 내 아를 낳을 수도 있으니까!


# 여성혐오의 정의는 고정되어 있는가


    여성혐오Misogyny에 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지난 한 해였다. 온라인 서점 내 페미니즘 분야의 도서 판매량이 전전해 같은 기간에 비해 급증했다는 내용이 기사화되었고, ‘여성혐오’는 2016년 누리미디어(dbpia) 에서 선정한 사회과학분야 최다 검색 키워드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깊은 공감과 학습 의욕을 불러일으킨 여혐 논의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대단한 반감의 대상으로 자리하는 일에 그쳤다. 그런데 저마다에게 정의된 ‘여성혐오’는 같은 것일까?

    한국말에서는 Misogyny가 여성혐오라는 번역어로 굳어졌지만, 이 개념어 자체에 대한 정의나 이해는 학자들이나 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다소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해석의 여지나 ’혐오‘라는 어휘에 대한 정서적 반응의 문제 때문인지 여성혐오 개념의 적용에 관한 논란은 피할 수 없는 일인 듯하다. 그러던 중 일본의 사회학자인 우에노 치즈코의 저서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의 일본어 제목이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 ‘여성혐오’에 해당하는 단어가 원어인 ‘Misogyny'의 음가를 그대로 차용한 ‘미소지니(ミソジニー)’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용어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는 뜻일 것이다.

    2012년 10월, 호주의 국회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통해 여성혐오 개념에 관한 비교적 최근의 논의 중 하나를 확인할 수 있다. 맥쿼리 사전Macquarie Dictionary은 이 일로 여성혐오의 사전적 정의를 개정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호주의 대학에서, 또한 법률가들이 참조하는 사전으로서의 권위가 인정되는 맥쿼리의 개정은 결과적으로 여성혐오에 관한 가장 최신 버전의 정의로서 회자되기도 했다.

    사건에 달린 표제는 여성혐오 연설Misogyny Speech이다. 사건은 2012년도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피터 슬리퍼Peter Slipper가 여러 스캔들에 휘말려 사임을 하는 과정에서 촉발된다. 슬리퍼는 2012년 4월 이후로 여러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보좌관에게 노골적인 성희롱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를 고소한 보좌관은 제임스 애쉬비James Ashby로 서른세 살의 동성애자였다. 당시 총리였던 줄리아 길라드Julia Gillard는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섣불리 판단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했는데, 야당의 영수인 토니 애보트Tony Abbott는 (슬리퍼와 같은 성차별주의자를 국회의장직에 남겨 두는 것은) 정부의 수치를 또 하루 더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애보트가 길라드 총리에게 자극적인 발설을 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길라드는 슬리퍼가 의장직에서 물러난 다음 날인 10월 10일, 작심이라도 한 듯 15분에 걸친 연설을 통해 애보트를 비판한다. 이 연설을 찍은 동영상을 업로드하며 ABC 뉴스는 다음의 제목을 붙인다. “길라드가 애보트에게 여성혐오자라는 딱지를 붙이다.”

    이 연설에서 길라드는 애보트의 발언을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왜 애보트가 성차별주의sexism나 여성혐오에 관한 문제제기를 할 자격이 없는지, 그리고 어째서 애보트 자신이야 말로 성차별주의자이자 여성혐오자인지에 관해 논증한다. 호주 최초의 여성 총리인 길라드가 취임한 후 애보트는 인터뷰 도중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기도 했다. “만약에 남성이 여성보다 일반적으로 더 많은 권력을 쥔다는 게 사실이라면요, 그게 나쁜 가요?”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때때로 의사당 내부의 웅성대는 소리가 거세지고, 의장이 저지하다 못해 고개를 가로젓기도 하지만 길라드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취임 이후로 애보트로부터 들은 모욕적인 언사들, 애보트가 여성의 역할에 대해 구시대적 선입견을 가지고 한 발언들, 한때 가까운 동료였던 슬리퍼와 그의 스캔들에 접근하는 애보트의 이중 잣대, 그리고 의결 과정에 대한 절차적 존중을 성차별 담론으로 퇴색시킨 것에 대한 분노를 꿋꿋이 발화한다.

    이 연설로 길라드 총리는 여성혐오라는 용어 사용의 부적절성과 및 야당 총수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호주 내 언론인들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SNS상에서 그리고 페미니스트들로부터는 주목을 받는다. 나아가 연설 장면을 담은 동영상의 조회 수는 수백만에 이르게 된다. 이에 맥쿼리 사전은 표제어 ‘여성혐오’에 관한 정의에 새로운 흐름을 반영하여, 기존의 정의였던 “여성에 대한 미움/반감”이라는 의미에 “여성에 대한 확고한 편견들”이라는 의미를 더한다. 여성혐오에 관한 기존의 정의로 담아낼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을 수용하고 사전적 정의를 확장한 것이다. 이 용어의 정의에 관한 한 맥쿼리 사전은 옥스퍼드 사전보다 비교 우위에서 논의되었다.

    같은 달 17일, 가디언 지에서는 “성차별주의와 여성혐오: 무엇이 다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다뤘다. 여섯 명의 페미니스트는 각자의 견해를 내놓았는데 그 중 나오미 울프는 “반유대주의가 유대인을 싫어하는 것이듯 성차별주의란 여성을 싫어하는 것”으로서 줄리아 길라드의 용례는 매우 정확했다고 말한다. 울프는 길라드의 연설 내용 중 토니 애보트가 ‘낙태’를 두고 책임을 회피하는 쉬운 길로 묘사한 것, 선거 운동 중 야당 지지자들에게 마녀를 쫓아내자는 구호를 인용한 것이 있었던 것에서 근거를 찾는다. 한편 줄리 빈델은 성차별주의자가 늘 여성혐오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예컨대 여성은 천성적으로 모성이 있다거나, 기본적으로 운전을 못 한다거나 하는 주장을 한다면 그는 성차별주의자이지만, 이에 덧붙여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거나,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에게 봉사하는 존재로 제한한다면 그는 여성혐오자라는 것이다. “여성혐오자들은 반드시 성차별주의자이지만, 성차별주의자들이 항상 여성혐오자인 것은 아니다.” 라일라 굽타는 “성차별주의란 여성혐오를 꽃피우는 우물인데, 물이 하도 탁해서 우리는 가끔 그게 얼마나 실하게 자라고 있는지 볼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성차별주의는 남자들이 당신을 새치기해서 줄에 설 수 있도록 끼워주고 붐비는 버스에 먼저 탈 수 있도록 도와주고는 싫든 좋든, 아 가엾지만, 그들의 손이 “우연히” 당신의 가슴을 감싸며 여성혐오의 광기로 당신을 짓밟는 일이라는 것이다.


#여성혐오라는 허구


    여성혐오의 정의는 언어 표상의 운명을 따라 통시성과 공시성을 지닌다. 개념이 속한 시대와 지역의 특성이 의미를 구성하는 사건들에 차이를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옥스퍼드 사전에서 정의하는 여성혐오의 의미(“여성에 대한 증오, 미움, 편견”) 및 용례들이 19세기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렇다면 2017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성혐오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2012년 호주에서의 여성혐오 논쟁을 촉발한 사건이 길라드 총리의 연설이었다면 한국의 경우는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이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혐오를 둘러싼 페미니즘 이슈는 급격히 일상의 언어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여성혐오 논의에 의해 계몽된 주체는 ‘여혐’하는 남성보다 ‘여혐’하던 여성이었다. 상품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물질성을 얻은 도서가 다수 출간되었을 뿐 아니라, SNS상의 페이지 혹은 그룹과 페미위키 등을 통한 아카이빙 작업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호주의 사례와는 달리 권위 있는 사전에서 새로운 정의를 내놓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의미가 고정된 기표의 부재는 다성성polyphony을 띠는 운동력의 원천인지도 모른다.

    각자가 이해하는 여성혐오가 동일한 의미를 담아내지 않는 것은 불편한 일일 수 있으나 어쩌면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명사의 의미에 대한 하나의 약속 위에서 소통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특정한 맥락 속에서 그 어휘가 소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여성혐오적 상황에 대한 각자의 고백은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만드는 첫 번째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다성적 실천이야말로 무엇보다 여성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정신분석학자 자끄 라깡이 보편적 명사로서의 여성은 ‘없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오히려 서로 다른 개별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긍정이었다. 일반화된 여성 이미지는 어쩌면 불가해한 여성 혹은 부재하는 집합 명사를 견디는 대안적 허구다. 그렇다면 여성혐오도 허구일지 모른다. 고유한 삶의 역사를 지닌 개별적 인간들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반화한 여성에 관한 담론으로서의 허구 말이다.

    나와 남편은 전형적인 역할의 틀에 맞추기보다 둘 사이에서 실현되기에 적합한 관계의 양상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했다. 좀 더 까다로운 필요를 갖고 있거나 이미 유능한 일을 중심으로 역할을 분담하다보니 일반적인 성역할이 분배되는 방식과는 조금 차이가 생겼다. 남편은 언제부턴가 요리 파트를 맡고 있다. 남편이 요리를 잘하게 된 후로는 사람들에게 요리를 해주면서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가는 요령을 익힌 것 같다. 장을 보는 단계에서부터 식재료는 남편이 고른다. 나는 공산품 담당이다. 상품 패키지에 적혀 있는 원재료를 읽거나 가격을 비교한다. 대신에 나는 처음부터 남자가 돈을 벌어오는 방식으로 가정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득이 많진 않았지만 결혼 시기 중 대부분의 기간에 가계 소득 기여도는 내 쪽이 더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건강 상태나 감정을 살펴서 챙기거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고민이 생겼을 때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듣는 나의 태도는 좀더 여성적인 역할일 것이다. 관습적인 성역할을 기준으로 볼 때 현실적인 수행의 부분은 일관되지 않았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 죄책감에 시달린 것은 나였다. 여성적 수행으로 고정된 일들에 대한 죄책이 가부장제의 질서 하에서 형성된 여성혐오적 기준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이제는 나의 역할과 신체를 도구화하는 일을 좀더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최근에 개정하여 출간된 어느 책의 제목처럼 페미니즘은 사실상 ‘모두를 위한’ 것이다. 페미니즘의 시선을 통해 질문하는 일보다 페미니즘의 시선에 대하여 질문하는 일이 더 익숙한 것은 무엇이 이데올로기인지를 반증한다. 이상적으로 제시된 여성 일반의 특성도, 삼가야할 것으로 제시된 특성도 모두 하나의 통념이다. 통념은 안전하지만 우리를 우물 안의 세상에 가두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 변화는 불편하게 겪어낼 수밖에 없지만 어떤 변화들은 우리가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계기로 기능한다.

    우리는 어떻게 환경으로서의 여성혐오를 넘어설 수 있을까. 우선은 여성 각자가 성차를 둘러싼 고정관념에 복무하려 애쓰는 대신 자기 자신을 발화하고 욕망을 찾아가는 일을 통해 균열의 지점들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성혐오적 틀의 편리함 대신, 남성들과 여성들이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개별적 여성에 대하여 질문하며 그들 각자와 고유한 관계성을 구성해가기 위해 얼마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통념은 강하다. 하지만 불멸하는 것 또한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 필자소개  

메모광. 학부에서 국제어문학을, 석사과정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향후 프로이트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가톨릭평론> 2017년 5·6월호에 송고한 원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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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안의 페미니즘 : 예민함과 자기검열



조은채*

 


       매주 집회에 나가면서 어떤 혐오 발언들은 나를 상처 입히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혼자만 어떤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내 불편함은 구체적인 행동이 되기 전에 망설임으로 종결되곤 했다. 이제 더 이상은 예민하다거나 유난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집회 때 쏟아졌던 “미스박”, “강남 아줌마”, “아몰랑” 등 수많은 혐오 언어들을 보고도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에게 집회에 참여하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상에서 피하려고 노력해왔던 수많은 혐오와 정면에서 부딪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 거리에 나섰다.

        쏟아지고 있는 여성혐오 발언에 제동을 거는 것은 대통령 혹은 비선실세를 옹호하는 일이 아니다. 혐오 발언을 멈추자는 것은 그들에 대한 비판의 정도를 낮춰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여성혐오 발언을 반복하는 것은, 여성성 비하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그 효과가 대단하다는 것은 사회에 여성혐오가 얼마나 만연하였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들은 모두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는 말로 조롱당하고, 분열을 굳이 조장하는 불온한 움직임이라고 낙인 찍힌다. 이 낙인은 혐오 발언에 대한 자정의 목소리를 망설이게 한다. 더 거대하고 시급한 문제가 있는데 작은 소란을 크게 키우고 있는 걸까? 계속 입을 닫고 있었으니 이번까지만, 혹은 이번에도 참아야 하는 걸까? 자기검열에서 기인한 질문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자기검열만 거듭하다 포기해버린 경험은 이번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은 어디에나 있었다. 강남역 사건이 여성혐오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양성 갈등을 부추기는 행위로 치부되었다. 성희롱이 난무하던 단톡방을 고발한 피해자들은 동기들에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으냐고 도리어 비난을 당했다. 문화예술계 성폭력에 대한 수많은 공개 폭로는 업계를 들쑤신 골칫거리가 되었다.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은 ‘예민한 여자’들 때문에 조장된 분열과 갈등으로 변모한다. 유난스러운 일부 여자들은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바로 그런 여자들 때문에 중립적인 남성인 나조차 ‘너희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라는 훈계가 뒤따른다. 예민하거나 이기적인 여자, 혹은 혐오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검열의 끈을 더 조이거나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더라도 여성혐오를 멈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여러 번 순화된 언어를 써야만 했다. 최대한 남성 전체를 일반화하지 않는 것처럼 세심하게, 덜 과격하게 느껴지도록 중립적이고 온건한 어휘를 사용하면서. 상대가 예민하고 피해의식에 가득 찬 ‘그’ 페미니스트처럼 느껴지면, 남성들, 혹은 더는 페미니즘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시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례를 들 때도 조심해야만 했다. 그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지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최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해 보이는 예시를 골랐다. 자기검열의 기준은 내가 발화하는 어휘의 정치적 올바름이나 정확성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눈에서 얼마나 덜 거슬리는지, 그리고 들어보고자 하는 의사를 불러일으키는지였다. 일명 ‘받아들일 기분이 나는’ 페미니즘을 찾고 있었던 셈이다. 

        자기검열의 결과물이긴 했지만, 결국 지극히 남성의 눈을 기준으로 검열된 언어로 할 수 있는 말에는 한계가 있었다. 박탈당했던 여성의 권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셈이니 당연한 수순이다.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그런 태도를 유지했던 것은 언젠가는 그들이 내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민함’이라는 낙인을 더더욱 피하고 싶었다. 그 낙인이 찍히고 나면, 내가 말하는 모든 부당함이 그저 일부 여성 고유의 예민함의 발현인 것처럼 결론지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은 피해의식에 가득 차서 분열이나 갈등을 부추기는 일부 여성의 문제로 규정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 낙인은 결국 내 말들에서 아주 오랫동안 그 설득력을 앗아가 버릴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만큼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과 왜 이렇게 예민하냐는 말은 나를 통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더는 그런 말들에 자신을 스스로 검열하지 않으려고 한다. 페미니즘이 향하는 곳은, 굳이 따지자면 분열이 아니라 균열이다. 유구하게 이어져 왔던 가부장적 질서에 균열을 만들고, 그 틈을 통해서 지워져 왔던 존재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제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이나 내 예민함을 비난하는 말들에 속지 않는다. 내가 내는 목소리가 분열이 아니라 균열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균열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낙인이 있든 없든, 자기들에게 불편한 목소리는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낙인 찍히는 것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저 타자였던 여성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성가실 예민함으로 불편한 목소리를 이어 나가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갈 생각을 가지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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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든어택2> 서비스 종료에 부치는 글



(평범한 워킹맘, 페미니스트, 간간이 글쟁이로 변신)


1.


    먼 옛날의 이야기부터 꺼낸다. 어린 시절 나는 게임 마니아였다. 누군가 게임이란 뭐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지금의 나를 만든, 어두운 십대 시절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준 유일한 친구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중학교 때 심한 왕따를 겪었다. 하루하루가 우울하고 고통스러웠던 내게 게임은 단지 가상의 것이 아니라, 내 존재를 긍정해주는 유일무이한 세계이자, 나의 접속을 받아주는 단 하나의 네트워크였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모든 게임이 좋았다. 후에는 온라인에 빠졌지만 초창기에는 오프라인 게임에 매료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소년 만화 잡지 <챔프>를 사면 게임 시디를 무료로 증정했는데, 나와 친오빠는 그 시디들을 소중하게 모으곤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열심히 플레이했던 건 <메타녀2> 였다. <메타녀2>는 메타토폴리지 대학 부속 여자 고등학교가 배경인 여고생들의 전투 RPG 게임이다. 주된 스토리 라인은 고등학교 내 동아리 전쟁이다. 동아리 간의 균형을 깨고 생물부가 반란을 일으키고, 생물부의 사주로 천문부 역시 네오 천문부와 오리지널 천문부로 쪼개진다. 주인공들은 오리지널 천문부의 일원들로 학생회 등과 힘을 합쳐 메타여고의 정의를 다시 세우려고 한다.  


   <메타녀2>의 캐릭터들은 모두 여자이다. 등장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일본 특유의 짧은 교복 치마를 입고 있지만 모두 제각기의 설정에 맞게 갑옷이나 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바이오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생물부 일원은 대개 실험 가운을 입고 있고, 수영부는 수영복(비키니가 아니라 학생들의 원피스 수영복) 차림 위에 길다란 가디건을 걸쳤다. 비행부는 전형적인 파일럿 차림이다. 그외 마술부, 학생회, 천문부 모두 각자 부서의 특성에 맞게 제복을 차려입고 있다.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 등장인물들의 코스튬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는다.


    게임에는 ‘메타여고'라는 제목을 상기시키지 않으면 헷갈릴 정도로 중성적인 캐릭터가 다수 등장한다. 짧은 숏컷에 강력한 공격력, 화끈한 성격을 갖춘 사토 노리코(노유리)는 대사마저 걸걸한 말투로 번역되었다. 듬직한 궁수로 등장하는 야마다 타쿠미(하유미)는 긴 생머리를 갖고 있지만, 특유의 근엄한 표정과 정제된 말투로 그녀가 여고생 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꼬마 유치원생 같은 캐릭터도 있지만 군인 그 자체 같은 캐릭터도 있다. 게임은 캐릭터 한 명 한 명의 매력을 깊게 살려 그에 맞는 스킬과 대사, 에피소드들을 균형 있게 할당한다. 


   그러나 <메타녀2>의 인기는 사실 대단하지 않았다. 그때 정말 유행했던 건 <프린세스 메이커2>였다. 사람들 모두 너나할 것 없이 딸을 교육시키고, 아르바이트에 보내고, 무사수행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나도 <프린세스 메이커2>를 재미있게 했었는데 몇 번 C급 엔딩을 보고나선 그만 지쳐버리곤 했다. 그때가 되어 찾는 건 치트 프로그램이었다. 돈 액수를 늘리거나 매력, 기품 지수를 조정하여 왕자를 만나고 결국 ‘프린세스' 엔딩을 맞이하고 난 이후로는 딸의 미래에 별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치트 프로그램을 만지다가 우연히 딸이 완전히 속옷 바람으로 벗겨지는 치트가 발동되었다. 깜짝 놀랐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딸을 벗겨 놓은 채, 혹은 노출도가 굉장히 심한 레어 코스튬을 입혀 놓은 채로 플레이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패턴과 단일한 스토리 라인을 ‘보완’하는 의미로 게임은 코스튬을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건 <프린세스 메이커2>가 전체 이용가였던 반면 <메타녀2>가 19세 이상 이용가였다는 사실이다. <메타녀2>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전쟁하는 내용이긴 하지만, 혼세하디 혼세한 난을 진압하고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데서 더 없이 ‘교훈적'인데다가, 캐릭터들이 겪는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이 첨예하게 표현되어 시나리오가 굉장히 문학적인데도 불구하고 슬립 수준의 코스튬이 난무한 <프린세스 메이커2>보다 더 유해하다는 판정을 받았던 것이다. 십 년도 더 된 이야기다. 


2. 


   초등학교 고학년에 올라갈 즈음 스타크래프트가 출시되고, 뒤이어 내 인생 게임인 <바람의 나라>가 나왔다. <바람의 나라>가 단일 서버였을 때부터 열성 유저였던 나는 <바람의 나라>를 시작으로 <어둠의 전설>, <라그나로크>, <퀴즈퀴즈> 등 온라인 게임 세계에 푹 빠져들기 시작했다. 대개 2D의 귀여운 캐릭터들이 아장아장 걷는 그래픽이었다. 노출도가 심할래야 심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긴 했지만 그때도 레어템은 대개 여캐의 코스튬인 경우가 많았다. 레어가 아닐 지라도 게임 내 코스튬 비중은 여캐의 것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고렙 템이거나 레어템일 수록 전투에 불편할 기다란 드레스나 원피스 종류가 많았다. 지금 <서든어택2>에서 문제되었던 것처럼 속옷 수준의 코스튬은 아닐지라도 직업적 특수성을 살린 남캐의 장비에 비해 여캐의 것은 언제나 게임 밖, 게이머가 살고 있는 세계의 시선 속에서 만들어졌다.


    사실 게임을 신나게 플레이하고 있던 그때는 그 내용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다만 내가 즐겨 플레이했던 <메타녀2>와 무언가 다르다는 위화감 정도만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메타녀2>의 캐릭터는 확실히 <서든어택2>와 달랐다. 특정한 맥락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메타녀2>의 캐릭터들은 구태여 여성스럽지 않아도 저마다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건 <메타녀2>가 유달리 여자 캐릭터들의 매력을 다중적으로 잘 살려냈다기보다는, 게임 자체의 퀄리티가 탄탄할 때 풍부한 컨텍스트 속에서 캐릭터가 저마다의 매력을 갖추게 되는 편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웹툰 <게임회사 여직원들>에 보면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한국 게임 업계에는 이런 말이 있죠. 재밌는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은 돈이 없고, 돈이 있는 사람은 돈 버는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재밌는 게임을 만드는 건 판타지다.”[각주:1] ‘돈 버는 게임’은 어떤 걸까. 모르긴 몰라도 <서든어택2>는 ‘돈 버는 방식’을 전적으로 잘못 이해한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서든어택2>에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들은 ‘서든어택’의 세계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짧디 짧은 바지, 출렁거리는 가슴, 한없이 음란스러운 여캐 시체들은 오히려 포르노의 세계에 가까운 것이다. 게임의 세계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있는 이 캐릭터들은 오로지 선정성만으로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초창기 플레이하던 유저들도 대부분 ‘총을 쏘아 맞추는’ 희열이 아니라 ‘야릇한 시체를 구경하는’ 재미로 게임을 한다는 이야기가 돌 지경이었다. 


   <서든어택2>의 실패는 말초 신경의 패배다. <서든어택2> 개발팀은 게이머를 이끄는 것이 자극과 선정성이라고 여겼던 모양이지만, 그건 게임 업계가 여태 제도적으로 부당하게 제한되어 온 그 시각들과 바로 정확히 일치한다. 결국 <서든어택2> 개발팀은 게임을 폄하하고 무시하는 입장을 <서든어택2> 안에 완전히 내재화한 것이다. 반면 충실히 FPS의 세계를 구현하고, 그 세계관 속에서 저마다의 매력을 갖춘 캐릭터들을 적절하게 배치한 <오버워치>는 대 성공을 거뒀다. 게이머들은 여기에 정확하게 응답하고 있었다. 


3. 


   ‘프린세스 메이커’의 시대는 끝났다. 더 이상 누구도 - 디즈니조차도 ‘공주’를 만들기 위해 매달리지 않는다. 거기에다가 <서든어택2>에서 본 바와 같이, 여성혐오는 (정당하지 않지만) 효과적이지도 않다. 여성의 코스튬으로 승부하고 여자 캐릭터를 언제나 반쯤 포르노의 세계 속에 위치시켰던 모든 게임들은 기획을 다시 짜야 할 것이다. 게임이 게이머를 위해 있을 지언정 캐릭터는 게이머를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 캐릭터는 게임의 세계관 속에 그대로 녹아 들어 있어야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된다. 


   <서든어택2>는 이 사실을 완전히 잊었거나, 무시하고 있었다. 게임의 세계관과 무관하게 창조된 캐릭터들은 방황하다가 끝내 그들의 탄생지를 ‘강남역 10번 출구’로 택하고야 말았다.[각주:2] 지금 우리 사회의 전 이슈가 몰려 있는 곳, 그리고 그 장소 자체로 ‘여성혐오’를 뜻하게 된 ‘강남역’ 말이다. 이윽고 <서든어택2>는 ‘여성혐오 게임’으로 회자되게 되었다. 이 모든 일들이 단순히 우연으로 엮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본업이 개발자인 나는 얼마 전 모 게임 회사에서 이직 면접을 본 적이 있었다. 임원 면접에서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말이 있냐길래, “게임으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라고 물었더니 한 면접관이 이렇게 답했다. “게임으로 사람들이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하고 싶다.”라고. 아마 그건 그 사람 개인만의 답변이 아니라, (비록 형식적인 것일 지언정) 게임 업계에 종사하는 수 많은 사람들의 꿈일 것이다.


   이제 다시 그 말을 게임업계에 되돌려주고 싶다. 포르노와 여성혐오, 여성 멸시와 차별은 이미 현실 세계에서 염증이 나도록 널려 있다. <서든어택2>은 단지 이러한 여성 혐오의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았을 뿐이어서, 게이머는 게임을 통해 ‘다른 세계’를 엿볼 수조차 없었다. 게임이 스스로 웜홀의 기능을 포기한다면, 게이머가 굳이 그 세계에 접속할 필요가 있을까. 다시 게임이 ‘다른 세계'를 회복할 수 있기를, 그리고 2016년 7월 29일[각주:3]을 기점으로 ‘돈 되는 게임'의 패러다임이 전환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웹진 <제3시대>

  1. 다음 <만화속 세상> 연재 작 <게임회사 여직원들> 85화 중 [본문으로]
  2. <서든어택2>의 홍보 티저 영상 배경이다 [본문으로]
  3. <서든어택2> 개발사인 넥슨 지티가 <서든어택2> 서비스 종료를 고시한 날짜다. (서비스 종료 예정일은 2016년 9월 29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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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준석
    2016.08.08 09:1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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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궁금했는데 쓰시는 필명은 무슨 뜻인가요?
    • 2016.08.11 06:1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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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사실 별 뜻은 없습니다.ㅎ 필명을 굳이 쓰는 이류는 본명에 컴플렉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 본명에 "경"이 들어가 있어서 보통 "갱" 으로 많이 불렸어요.^^ (경민 >> 갱민 식으로요 ㅎㅎ )
  2. 2016.08.11 10:1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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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당신의 장점이 뭔지 아시나요/
    남자들은 물이 많은 여성을 좋아합니다
    당신이 전형적인 수,,여성입니다
    다만, 지금 그것을 발견못한것 같은데
    한번 도전해볼래요


사회 : 유승태(연구소 상임연구원), 정용택(연구소 상임연구원)

패널 : 갱(만화평론가, 연구소 회원)

홍혜은(나무)

송란희(한국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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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여성혐오를 다루지 않고서는 


500주년 종교개혁을 논하지 말라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작은 것들의 신] (The God of Small Things)의 저자로 잘 알려진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는 “전통”과 “시장 중심의 신자유주의”로 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는 인도의 여성들이 어떻게 많은 투쟁을 이끌게 되었는지에 관한 인터뷰에서, 인도는 “여러 세기를 동시에 살고 있는 나라이다”라고 말한다.[각주:1] 인도란 나라에는 여성을 상대로 여러 형태의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반면에, 동시에 이런 폭력에 저항하는 강하고, 독립적이고, 급진적이며, 독창적인 생각을 하는 여성들도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 한국이란 나라도 지금 여러 세기를 동시에 살고 있다.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과거’에나 행해졌을 법한 여성들에 대한 차별, 혐오, 비하, 희롱, 폭력, 살해를 도심지에서, 동네 골목길에서, 섬에서, 산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병원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집안에서 서슴없이 행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물론, 이에 저항하는 여성들도 적지않다. 


    서른명의 학생들과 포르투갈에서 2주 단기 수업을 하는 동안 서울 강남역 근처의 공용화장실에서 일어난 여성살해 사건을 전해 들었다. 그 때 마침 포르투갈의 한 여성운동단체를 방문하여 포르투갈 여성들이 직면한 여러가지 이슈들에 관해서 듣고, 포르투갈에서도 ‘여성살해’ (femicide)가 얼마나 큰 사회적 문제인지, 또 여성들이 이에 어떻게 저항하는 지에 관해서 막 접한 터였다. 공용화장실에서 일어난 여성살해 사건이 너무나 끔직한 뉴스이긴 했지만, 사실 여성들에게 행해지는 폭력, 살인, 성폭행, 성희롱, 성차별이 사회 전반에 너무나 만연해 있었기에 그 뉴스가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다르게’ 와 닿았던 것은 이번에 발생한 여성살해를 그저 ‘또 하나’의 ‘일상적’인 사건으로 지나쳐 버릴 수 없었던 여성들이 이 사건을 ‘여성혐오’ (misogyny) 사건으로 규정하고, 여성혐오의 심각성을 지적하면서 피해자를 공공장소에서 추모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그 뿌리가 깊고 넓은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없애야 할 사회악으로 보고 여성들이 그것에 저항했다는 것과, 그런 저항의 움직임을 받아 들일 수 없어하는 남성들이 그들을 비판하면서 공공연하게 여성혐오를 또 다시 드러냈다는 것이다. 한국도 인도처럼 여러 세기를 동시에 살고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잘 지적했듯이 여성혐오란 용어가 한국에서 생소하다고 해서 여성혐오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여성혐오를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일상화’ 되어져 있고, 개개인의 사고방식과 행동 및 사회구조에 ‘자연스럽게’ 내재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여성혐오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여성혐오에 대한 해결책 또한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감시 카메라를 늘리고, 치안을 강화하고, 가해자에 대한 형량을 높이거나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 시키면, 몇 몇의 ‘이상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연관 없는 ‘사건들’이 사라지게 되면서 모두가 ‘안전’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실로 대책없고 공허한 방안을 내놓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신학자 메리 헌트 (Mary Hunt)가 말하듯이, 폭력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각개의 개별적인 에피소드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상황” (context)이다.[각주:2] 여성혐오, 성차별, 여성을 상대로 행해지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은 그저 어쩌다 일어나는 개별적인 사건들이 아니라 기독교회와 신학이 외면해 온 여성들의 ‘치명적인 일상’인 것이다. 이렇듯 여성혐오를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인식한다해도 해결할 노력이나 의지가 없어 보이는 곳 중의 하나는 교회이다. 교회내의 ‘여성혐오’는 그 사례들을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물론, 교회내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여성혐오에 저항하는 목소리와 운동은 지속되어져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소수의 저항으로 종종 무시 되어지거나, 저항의 주체들은 오히려 여성우월주의자들로, 또는 ‘남성혐오자’들로 매도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교회도 여러 세기를 동시에 살고 있다. 


    내년에 종교개혁 500 주년 (1517-2017)을 맞이해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마틴 루터의 고향인 독일을 비롯하여 종교개혁과 관련이 있는 유럽국가들로 ‘순례’를 계획하고 있고, 개신교회들도 한국교회의 미래와 교회개혁을 논의하는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무엇을 준비하고 논의를 할 것인가? 주로 논의 되는 주제들은 “한국 교회에 만연한 물질 만능주의와 성장주의, 배타주의”[각주:3]라고 한다. 모두 중요하고 절실한 주제들이다. 그런데, 많은 교회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물질 만능주의, 성장주의, 그리고 배타주의의 원동력이 되어온 구조적 성차별과 여성혐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여러 형태의 혐오들에 관한 논의는 누가, 어디서 할 것인가? 


    성차별과 여성혐오, 그리고 다른 형태의 차별과 혐오들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서는 “한국 교회에 만연한 물질 만능주의와 성장주의, 배타주의”를 제대로 논의 할 수 없다. 그러니 진정한 교회 개혁은 있을 수 없고,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여성혐오를 없앤다는 명목하에 다른 혐오를 정당화하는 과오를 저지르는 일 없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 성소수자혐오, 장애인혐오, 이주노동자혐오, 이슬람혐오를 ‘개혁’의 대상으로 삼는 ‘저항인’ (Protestant) 들이 되지 않는다면 500년을 또 기다려도 ‘개혁’은 없을 것이다. 교회는 그저 계속해서 여러 세기를 동시에 살게 될 뿐이다.  


    한국교회의 미래와 교회개혁을 진정으로 논의할 의지가 있다면, 500년 전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종교개혁가들의 사상과 행동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던 여성혐오와, 지금까지 지속되는 여성혐오적이고 차별적인 신학, 성서해석, 의례, 예배 형식, 언어, 교회 조직, 활동들을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다.  


    500 여년 전, 당시의 부패했던 교회에 ‘저항’의 목소리를 내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이었지만, 여성신학자들이 지적해 왔듯이 그 시대 그 공간에서 살았던 여성들의 삶과 그 이후 세대의 여성들에게 부정적으로 미친 종교개혁의 영향은 비판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조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가부장적 성서해석으로 가정과, 교회, 사회에서 여성들의 종속적인 위치를 확실하게 못박았고, 야곱의 딸 디나의 납치와 강간은 그녀가 자초한 일이라면서 피해자를 비난하는 성서해석을 내놓았으며, 성과 관련해서 남녀에게 적용된 이중잣대를 정당화 시켰던 마틴 루터나 존 칼빈의 남성중심적 성서해석과 신학이 아직도 어떻게 교회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묻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각주:4] 동시에 여성혐오를 사회에서 견고히 하는 데 한국의 개신교회가 어떻게 앞장서 왔는지를 반성하면서, 같은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실천을 통해서 보여주는 방법 밖엔 없다.  

   

   교회의 진정한 개혁을 논의하고 변화를 가져오려면, 교회와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 성소수자혐오, 장애인혐오, 이주노동자혐오, 이슬람혐오에 저항하라. 그런 저항으로 말미암아 변하기를 거부하는 기존 교회와 사회로 부터 설사 ‘이단자’로 불린다 할지라도 말이다. 마치 500여년전 ‘이단자’로 불렸던 종교개혁가들처럼. 그러나, ‘이단자’로 불릴 각오와 결심이 없다면 500주년 종교개혁의 이름으로 교회의 미래와 개혁을 논하지 말라. 변화없는 교회의 ‘미래’란 과거와 과거가 되어 버렸을 지금의 현재가 여전히 뒤엉켜서 존재하는, 그래서 “여러 세기가 공존”하는 맞이 하고 싶지 않은 ‘미래’일 뿐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ww.outlookindia.com/magazine/story/i-dont-believe-there-are-only-two-genders-i-see-gender-as-a-spectrum-and-im/295061 (accessed 09/10/15). [본문으로]
  2. Carol J. Adams and Marie M. Fortune, “Preface,” in Violence against Women and Children: A Christian Theological Sourcebook, ed., Carol J. Adams and Marie M. Fortune (New York: The Continuum Publishing Company, 1995), 12. [본문으로]
  3.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0/22/0200000000AKR20151022143000005.HTML (accessed 11/30/2015); http://www.koreatimes.com/article/879912 (accessed 10/18/2014). [본문으로]
  4. Denise Lardner Carmody, Women and World Religions (Prentice Hall, 198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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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날 


강남역 호프집에선 한 여자가 죽었다


-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 리뷰

 






(평범한 워킹맘, 페미니스트, 간간이 글쟁이로 변신)


0.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으로 떠들썩하던 어느 날, 문득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거, <채식주의자> 읽어 봤냐?” “네, 당연히 읽어봤지요.” 아버지는 내 감상을 조곤조곤 물어보다가, 내가 나름 긍정적이었다고 하자 ‘큼'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난 별로더라. 어떻게 그런 소설이 상을 탔는 지 모르겠다.”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왜 별로였냐고 묻는 내게 아버지는 이렇게 답했다. “감동이 없고, 인간적인 정도 없고.. 그런게 뭐 상을 탔나 싶다.” 


   노벨문학상에 버금간다는 ‘맨부커상’에 대해 접하곤, 아버지는 <노인과 바다>나 <무기여 잘 있거라> 같은 소설을 기대했던 것 같았다. 단단한 근육 위로 바짝 선 핏줄 같은, 노장의 짙은 풍미가 지배하는 세상 말이다.  


   아버지는 어쩐지 추천해드린 <7년의 밤>도 퍽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저 스릴러 영화 같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생신 선물을 고민하다가, 고민 끝에 시인 백석의 시집 <사슴> 초판본을 골라 들었다. <사슴>을 들고 계산을 기다리면서 나는 어떤 고집 센 취향에 대한 상념에 빠져 들었다.


1.


    얼마 전 SNS에서 대학 시절 교수님의 포스팅을 접했다.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이라는 이분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마지막 글귀가 마음에 아득하게 남았다. “실제로 중앙 문단의 한국문학사도 ‘순수/대중’으로 전개되어 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순수/대중’의 대립은 ‘순수’ 비평가의 틀이어다. 또 이 틀은 구별짓기에 기초하며 꽤 ‘혐오적’이다. 여성, 소수자, 노동자 및 대중에 대해.”[각주:1] 


   한강의 소설은 한국 문단에서 분명 ‘순수 문학’에 속할테지만 이청준, 김훈, 그리고 수많은 세계의 ‘명작 전집’을 읽어 온 아버지의 시각에서는 ‘장르 문학’에 가까웠다. 아무것도 아닌 작은 계기들이 일상의 시간을 파열내 버리고, 이윽고 소설의 세상은 현실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작가의 의견이나 목적같은 건 강하게 휘몰아치기 보다는, 바스라지는 듯한 생의 감각과 섬세하게 엮인 감각의 틀 속에 사라질 듯 말 듯 고요히 잠자고 있다. <수레바퀴 밑에서>나 <데미안>처럼 명실상부하게 얘기해주지 않고, <노인과 바다>처럼 직접 대화를 건네지도 않는다. 보여주는 건 실타락처럼 풀어헤쳐지는 어떤 기묘한 감각과 감성들 뿐. 분명 그건 아버지의 서재에 꽂힌 책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세계명작 전집>에 여성의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고전이나 명작이라고 하는 전집들 사이에서 여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을 찾기는 극히 힘들었다. 아버지의 서재엔 <죄와 벌>, <무기여 잘 있거라>, <좁은 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방인>, <데미안>, <1984>, <위대한 개츠비> 등이 있었다.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고전 명작 시리즈의 팔할 정도가 꽂혀 있었고, 아버지가 구매하지 않은 나머지 이할의 목록을 찾아보니 그나마 <인형의 집> 한 권은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소설가 한강의 작품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했을 상황은 눈에 보이고도 남았다. 그것은 결코 순전한 개인의 취향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우리가 여태 접해 온 세계 명작, 그리고 고전 시리즈 가운데 여성의 세계는 거의 없었다. 여성 작가도, 여성성의 세계도, 그리고 여성이라는 질문 조차도.


2. 


    소설가 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날, 강남역 근처에 위치한 호프집의 공용 화장실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한 시간이나 화장실을 서성였던 가해자는 이십대의 여자를 발견했고, 그녀는 억울하게 살해 당했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공간에는 ‘나는 너다’ 혹은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라는 포스트잇이 붙었다. ‘여성혐오 범죄’라는 말이 끓어 올랐고, 너무나 쉽게 반대편의 전선이 생겨났다.


   이 전선에서 한 발짝 떨어진 일각에서는 ‘여성혐오 범죄’라는 목소리를 두고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 고 했다. 정신분석학과 수사학은 이 사건을 조현증 환자의 개별 문제로 보았고, 사회학과 여성학은 한 사람의 가해자보다 그를 둘러싼 이 사회 속의 여성 혐오 문화를 지적했다. 서로의 결에 따라 분석하고 도출해낸 결과였으나 합리와 객관은 전자가, 비약과 감성은 후자가 각각 차지했다. 남녀 뿐 아니라 학문 역시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학문과 전문가도 그랬는데 비전문가인, 순전히 ‘여성’일 뿐인 그녀들의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인해 여성들의 공포 수위는 끔찍하게 치솟았는데, 일부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되려 ‘남성 혐오를 조장하지 말라’며 반발했다. 이 모든 일은 고인의 삼일장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일어났다. 


   한편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영혜는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채식을 시작한다. 왜 갑자기 채식을 시작하느냐는 남편의 말에 그녀는 “꿈을 꿨어"라고 나직이 답한다. 그녀의 꿈은 붉은 피와 날것의 고깃덩어리로 점철되어 있었다. 꿈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고기를 끊고, 브래지어를 풀어버린다. 영혜의 남편은 ‘고기 냄새가 난다'며 섹스를 거부하는 영혜를 강제로 벗겨 삽입하고, 아버지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영혜의 입에 강제로 탕수육을 쑤셔 넣는다. 단지 그녀는 채식을 할 뿐이었다. 


   영혜를 둘러싼 남성성의 세계는 영혜를 혐오했다. 티셔츠 위로 도드라진 그녀의 유두와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그녀의 식성, 그리고 지극히 비합리적인 그녀의 이야기까지- 다른 이들과는 사뭇 다른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사람들은 참을 수 없어 했다. 그래서 그녀의 입을 틀어 막고, 멸시하고, 폭행하고, 강간했던 것이다.


3.


   한강의 소설에 대해 ‘K문학의 쾌거'라고 묘사하는 사람들은 ‘여성혐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같은 날 일어난 대조적인 이 두 사건을 보면서 회의감에 빠졌다. 한 여자의 성공은 사회가 너무나 손쉽게 취득해 가는 데에 반해, 다른 한 여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 책무에 대해 모두가 침묵한다. 아니, 침묵을 넘어서 그 책무에 대해 열렬히 반대한다. 그것을 ‘남성 혐오'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일부러 오독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여성혐오'라는 그녀들의 목소리를 멸시하고 혐오하고 조롱한다. 심지어는 성적인 표현을 끌고 들어와 모욕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서도 언제나 ‘너무 과잉되었다.’라는 평가는 늘 ‘여성 혐오’를 주장하는 그녀들의 몫이다. 채식을 고집했을 뿐인 영혜를 향해 모두가 힐난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남자들 모두가 실은 집에서 설거지도 하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도 하고, 주말에는 아기를 잘 돌보는 사람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군대도 다녀온데다가 이렇게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내게 ‘잠재적 가해자'라니, 분노할 수밖에 없을 일이겠지만 ‘여성혐오'라는 말은 오직 당신만을 탓하는 게 아니다. 고전 문학 시리즈에 여성의 작품이 없는 것, 역사 책에 여자란 선덕여왕과 유관순밖에 없는 것, 대기업 임원급에 여자는 거의 찾아보기도 힘든 사실들. 이 모든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더워서 상의를 탈의하고 있었다던 영혜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안돼?” 그녀는 그녀의 몸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 했고, 그에 대해 인정과 존중을 받기 원한 것 뿐이었다. 바라건대 영혜와 함께 질문해주시라. ‘그러면 안되는 걸까? 왜 안됐었을까’라고. 대답이 아닌, 질문조차도 우리에겐 희망이다.


   꽃보다도 아름다울 나이, 그녀의 명복을 빈다. 부디 편히 쉬시기를.


ⓒ 웹진 <제3시대>

  1. 천정환 교수 페이스북에서 발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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