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처에, 당신, 당신, 당신들 뿐


(연구집단 CAIROS)



 태초에 말이 있었다.

 나는 항상 이 문장이 궁금했지만, 왜냐는 물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어떤 말이었을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내게 일어났던 ‘어떤 일들’, 그리고 그 ‘일’들에 대한 내 ‘감정들’까지 나는 말할 수 없었으니까.
 “말하지 마. 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십 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온 금기는, 내게 사랑하는 것보다도 먼저, 나를 사랑해주는 모두에게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를 가르쳤다. 단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숱한 사례로 교육받아왔다. 나의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곳은 오로지 나 자신, 그리고 아무도 없는 어둠 속ㅡ장롱 안 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장롱 안에 있었다. 장롱 안에서 말을 던지면, 목소리는 뿌연 안개와 같은 메아리로 내게 돌아왔다. 나는 그 목소리가 좋았다. 그래서 자주 나에게 묻고, 나에게 대답하는 식으로 어둠에 대화를 걸었다.
 장롱 안은 어두웠지만, 문틈의 빛줄기가 칼날같이 날카롭게 반을 가르는 곳이기도 했다. 장롱 안에서 나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는데, 가끔 누군가에게 발칵 문이 열릴 때면, 하릴없이 튀어나와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하지만 혹시나 백마 탄 왕자님이 마음 넓게 귀를 쫑긋 세워줄지도 모르니까. 빛줄기가 문 앞에 선 누군가에게 가려져 완전한 어둠이 될 때, 나는 공포와 설렘으로 마음이 뛰곤 했다.

 죽음과 삶이 있다.
 언제나 단절된 것이었을까. 나는 이것도 궁금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어둠 속이었으므로, 나는 생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는 죽음이 내게 가까웠고, 나는 장롱 속에 들어가듯 죽음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죽음을 동반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알지 못했지만, 확실히 삶은 죽음보다 훨씬 먼발치에서 그 자신을 방조하고 있었다.

 삶은 언제나 나를 짓눌렀지만, 죽음은 늘 따뜻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죽음에 귀 기울였다. 그러면 죽음은 슬그머니 다가와 내게 말을 들려주었는데, 그건 반쯤은 우렁찬, 검은 강의 물소리였다.

 
1.

 여자의 강이었다. 《The Hours》(스티븐 달드리, 2003)의 강이라거나, 《시》(이창동, 2010)의 강이라고만 부를 수는 없는. 두 여자가 내처 몸을 맡긴 것만큼 중요했던 건, 그들의 편지였다. 각각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고 있었고, 그와 함께 세상과, 그녀들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는 《The Hours》에서 낭송되었던 것과는 다른, 버지니아 울프의 실제 유서 중 한 단락이다.

“(전략)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 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했고, 당신[각주:1]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애를 느껴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녀가 죽음을 선택한 건, 정신병 때문이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죽어갈 생명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강물에 발을 내디뎠을 때, 그녀와 함께 했던 건 단 한 장의 편지-그리고 편지를 읽는 하나의 목소리, 그러니까 내게 다가온 ‘말’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의 저작 『자기만의 방』에서,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을 상상했었다. 셰익스피어만큼의 열정과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녀의 ‘불우한 성별’은 그녀를 예술가로 만들어줄 수 없었고, 끝내 그녀는 이름 없는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의 상상은 단지 비극으로 그치지는 않았다. 오히려는 희망찼는데, 그건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에게 언젠가 이름을 불러줄, 그리고 이름을 넘어 그녀 자신만의 방, 누구에게도 점유되지 않는 그녀만의 온전한 몸을 돌려줄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만약 한 세기가 더 지난 후, 우리 모두에게 일 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신만의 방이 주어지고, 우리가 자유를 습관으로서 가지고, 또한 생각하는 그대로 글로 써내는 용기를 지닌다면, 현실 속 서로의 관계에서 인간을 파악하고, 사실을 사실로서 바라보고, 우리를 이끌어줄 팔은 없으니 결국 홀로 걸어가야 하며, 현실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인식한다면,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이었던 죽은 시인은 그녀의 버림받았던 육신을 다시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 믿습니다.[각주:2]

 여기에 하나의 진실이 있다. 버지니아는 글로써 저항하다가 절필과 동시에 몸을 던졌고, 그것은 분명 삶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삶들을 사랑하는 의미였다. 그녀에게 ‘몸’은 매초마다 펌프질하는 심장이 아니었다. 오히려는 언제든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물로) 걸어가는 것은 오로지 ‘홀로’였음에도, 걸어갈 ‘육신’은 다른 이들의 자가 인식을 통하여, 그러한 인식들이 뒷받침되는 세상을 통하여 다시금 획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생명을 위한 자살’이라는 건 결코 모순이 아니었다. 온몸을 던진 그녀의 투쟁을 통해, 그녀는 재차 반전과 평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혼들에 대한 인식의 울림, 거듭된 각성에의 요청이었다. 오로지, 생(生)들을 위한.
 이러한 맥락에서, 《시》의 <아네스의 노래>는 물에 뛰어든 소녀의 육신을 되살려냈던 진정 시/노래였다. 누구의 귀에도 와 닿지 않았던 소녀의 말은 무던히 허공을 떠돌다가 이윽고 미자(윤정희 역)와의 시/노래로 드러난다. 그제야 그녀는 그녀의 사랑했던 것들과 작별 인사를 건넬 목소리를, 그리고 몸을 얻게 되는 것이다.
 미자는《시》에서 항상 두 차원의 공간을 떠돌아다닌다. 남성성이 지배하는 일방적 권력의 현실과, 그녀와 사물이 편견 없이 공존하는 시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양 쪽 모두 언어의 장이었고, 실제로 그것은 분명히 드러나지 않도록 혼재되어 있었지만, 양쪽의 경계가《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던 건 미자의 망각 덕택이었다. 그녀는 현실을 끊임없이 망각했고, 그 망각의 순간동안 대신 그녀는, 그녀가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 집중했다. 꽃, 새소리, 나무, 살구…미자는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살피며 글들을 메모했고, 그것은 바로 그녀가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그리는 방법이었다. 동백꽃을 단순한 조화가 아니라 짙은 고통으로 보고, 살구를 땅으로 뛰어들은 하나의 몸으로서 대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소녀가 뛰어들었던 강을 만났을 때 그녀의 메모지를 채운 건 어떤 글귀가 아니라, 단지 물방울이었다. 침묵이 아닌 깊은 애도, 말로서 꺼내질 수 없는 하나의 슬픔을 그녀는 마주쳤던 것이다.
 <아네스의 노래>는 그녀와 소녀의 고통으로 탄생한 노래다. 생전에는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두 여성이, 서로의 고통이 겹쳐지는 순간, 현실과 시 양자의 관계를 뒤바꾸어 놓는 몸의 말을 발화하는 것이다. 시는 작중에서 언제나 무시당하기 일쑤였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 그 어떤 논리로도 접근 불가능한 것, 즉 정복할 수 없는 잉여의 것으로 남는다. 시를 쓰기 위해서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강사의 말은 “어렵다”에 내포된 논리와 해석의 위계들을 단숨에 무력화시킨다. 바로 이 안에서 ‘말’이 떠오른다. 어떤 이해관계에도 포섭되지 않으면서, 순수하게 관계를 마주할 수 있을 때, 우리들의 몸 저 쪽 끝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고통의 소리.
 성서의 누가복음 7장에는 한 청년이 등장한다. 과부의 아들로 지칭되는 이 청년은 죽어 관에 실려 나가는 중이었다. 예수가 관에 손을 대고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했을 때, 청년은 일어나 앉아 ‘말’을 했다고 한다. 죽음에서 막 깨어난 그가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각주:3] 
 과부의 아들로서 어떤 삶을 살아냈을 지, 그 이른 나이에 어떤 이유로 죽었을 지, 아무도 몰랐지만, 예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 고통들을 감싸 안고, 그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렀을 때, 그는 이윽고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다. 몸의 일어남과 동시에 터져 나왔던 그 말들은, 어떤 말이었을지 감히 추측할 수도 없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은 바로 고통 자체, 몸 자체인 말이었다는 사실이다.

2.

 그리고 말은 흐른다. 편지가 끝난 후에도 강은 여전히 흐른다.
 여기에서 물음은 남는다. 이 물소리는 왜 미자에게만 들렸을까. 소녀의 어머니조차 다가서지 않았던 곳에, 소녀와는 일면식도 없었던 미자가 그 자리로 다가갔을까. 혹은, 왜 버지니아 울프가 죽었어야 했을까. 전쟁터와는 다소 먼 시골에서 살았던 그녀가, 그녀 자신과는 상관이 없었던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왜 그녀를 던져야 했을까. 혹은…그 청년으로 하여금 말하게 한 것이 왜 예수였던 것일까. 잉여의 물음에 잉여의 언어로 대답한 것은, 이 ‘강’에 대해 오래 생각했던 유하였다.

사라지는 것만이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서둘러 노을의 하늘을 갈아치우는 잠자리의 눈동자
흔들릴 때마다 나뭇잎 속에 깃드는 푸른 신성같은 것,

세상은 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지만,
끝내 그 어디에도 다다를 순 없었다
가는 곳까지만 길이었을 뿐,
덧없는 물살에 덧없는 마음의 지느러미만
하릴없이 놓아 주다가

다만 물고기는 간데없고 남아 있는
비늘의 번득임만 안타까이 건져 올리듯
기어코 그리운 사람 하나 떠올릴 때,
사라짐보다 더 아픈 정지의 순간이 오고
치자꽃 향기 밟으며
온 강에 멎을 듯 내려앉는 별빛의 나비떼

스쳐가는 바람이 거기 없었다면
송두리때 제 넋을 흔들어 구원받는 갈대를
누가 알기나 했으리[각주:4]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의 목소리가 도저히 사회의 그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시》에서 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숨 막힐 듯 사방을 가로 막은 남성들의 목소리들 사이에서 미자의 말은 어디에도 가 닿을 수 없었다. 실은 버지니아 울프와 미자도, 전쟁터에서 죽어갈 사람들, 그리고 강으로 뛰어든 소녀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조차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도처에 흐르고 있지만 여전히 들리지 않았던 말들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단지 스쳐지나갈 뿐, 어느 순간 있었는지도 모르게 잦아들을 뿐인 바람이 있었기에 갈대가 보였던 것처럼.


3.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다시 읽는다. 여기에서 그녀의 말을 들었다. 나는 내 몸의 상처를 자극적인 서사로 재구성해 던지곤 했는데, 그건 타인을 향한 발화의 두려움에서 발로했던 자기방어였다. 어이없게 웃으면서 술안주 삼아 던지는 이야기들에는 내 감정이 없었고, 따라서 내 말도 없었다. 모든 고통을 배제시키고 사건들만 부각시키는 서사적 말하기는, 여전히 나의 고통을 진짜 ‘고통’으로 수용하기를 보류하고 있었다.
 고통을 말하기. 고통으로서 말하기. 그리고 고통을 위해 말하기.
 장롱에서 말하고 장롱에서 돌아오는 내 자폐적 서사를 깨뜨렸던 건 오로지 그녀의 말이었다. 한 세기를 건너 나와 공감할 수 있었던 그녀의 말은 나로서 내 고통마저 사랑하게 만들었다. 이 상처들로 인해서 말할 수 없었지만, 말할 수 없었기에 그녀의 말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녀의 말은 한 세기를 건너, 그보다도 더 멀리 계속해서 살아 숨 쉬고 있던 것이다. 더 넓은 진폭으로, 보다 많은 생을 만나기 위해. 그렇다면 FTA를 반대하는 말들, 쌍용차의 해고를 규탄하는 말들을 포함하여, 전-지구적으로 외쳐지는 반(反)생명에 대한 우리의 울림들도 결코 공중에서 흩어지는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모든 말들은 강물처럼 도처에 흐르고 있다가, 또 다시 말 못하는 이의 귀에 희망으로 닿으리라.


4.


 태초에 말이 있었다.
 몸이 태어날 말이었다. 머리가 아니라, 고통이, 사무치는 아픔들이.

 그러므로 내가 만났었던 것처럼, 그 어떤 죽음에도 침묵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생보다도 훨씬 가까운 곳에서, 생만큼이나 우렁차게 외쳤던 볼륨이었다. 오로지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기 위하여, 더 큰 삶을 사랑하기 위하여 말이다. 그리고 그 말 안에서 바로 내가, 우리가, 태어났던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편지는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 직전, 그녀 인생의 동반자였던 레너드에게 부친 것이었다. [본문으로]
  2.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본문으로]
  3. 2010년 9월, 충정로 맑은샘교회의 렉시오디비나 성서 나눔에서 공유된 이야기임을 밝힌다. [본문으로]
  4. 유하, 「7월의 강」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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