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혐, 그 중심에 교회가 있다[각주:1]




이상철
(본지 편집인 / 한백교회 담임목사)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 이사야 1:15

 


이사야가 살던 시절


    이사야서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다.” 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히스기야 왕은 유다국의 개혁군주입니다. 그는 북왕국 멸망시기와 겹치는 남왕국의 왕이기도 합니다. 히스기야 앞에 있었던 왕이 아하스입니다. 여기서 잠시 기원전 7-8세기 남왕국을 다스렸던 왕들의 족보를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요시야로 이어지는 왕들 중 히스기야와 요시아왕이 평등주의 계열의 왕이었다면, 아하스와 므낫세는 발전주의를 주장했던 왕이었습니다.[각주:2] 특별히 제1이사야와 맞물리는 시대는 아하스 시대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국은 아하스 왕 때 약소국의 지위에서 벗어나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됩니다. 

    당시 고대 근동은 앗시리아가 득세를 하던 무렵이었습니다. 제국의 반열에 오른 앗시리아에 맞서 북이스라엘과 시리아간의 동맹이 맺어졌고, 유다국에게도 동맹에 참여하라는 압박이 전해져 오지만, 아하스는 거부하고 친 앗시리아 정책을 폅니다. 야훼를 버리고 제국의 질서를 택한 것이죠. 이에 앙심을 품은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이 유다국을 유린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급기야는 이런 위기 상황에서 아하스는 자기 아들을 국난 해소를 위한 번제물로 바치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로 기적처럼 아시리아가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을 초토화 시키는 일이 발생했고, 그 결과 유다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후 유다국은 전례없는 발전을 하게 됩니다. 앗시리아 침공으로 인한 주변국 난민들이 유다국으로 유입되면서 외형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가운데 신흥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이런 정세 속에서 제국의 논리에 의지해 성장을 주장하는 인물들이 득세를 하였고, 그들은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농민들에 대한 착취를 두둔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양극화가 초래되더라도 일단 경제적 파이를 키우면 그것이 돌아가는 과정에서 낙수효과가 발생해 점차 양극화가 극복되리라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그들의 논리는 닮아 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성소의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대지주들이 제공하는 자본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교회와 언론이 자본의 논리에 영향을 받는 오늘의 현실과 너무나도 닮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은 이러한 시대에 대해 아무런 비판을 하지 않았던 교회에 대해, 그리고 그 곳에서 드려지던 예배를 향해 던지는 하나님의 추상과도 같은 비판의 메시지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불의에 공조하던 교회에 대한 이사야의 저주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런 전 이해를 갖고 다시한번 오늘의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이 구절은 비록 수천년 전에 쓰여진 것이지만, 오늘의 교회를 향한 너무나도 정확하고 무서운 경고의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주간에 이사야가 다시 환생해서 한국교회를 본다면 한국교회를 향한 저주의 목록에 하나가 더 추가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 죄목은 여혐입니다.   


한국 교회, 여혐의 인큐베이터


    얼마 전 발생한 강남역 화장실 여성 피살사건은 우리에게 놀라움과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제가 윤리를 전공하고, 윤리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이에 대한 윤리적 질문을 하거나, 윤리적 해법이 담긴 글을 쓰라고 합니다. 모두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번 학기 바쁘기도 하지만, 이 사건들을 분석을 하거나 비평을 하는 일보다 먼저 회개하고 애통하고 탄식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들의 배후에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교회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한국교회는 이 사건들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못합니다.  

    오늘 하늘 뜻 나누기 제목을 ‘여혐, 그 중심에 교회가 있다!’라는 제목으로 뽑았는데 과연 한국 교회의 어디에 그런 면모가 있는 것일까요? 일단 표면적으로 한국교회는 ‘여성혐오’와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여러분, 그동안 만나왔던 교회 오빠들 어떤가요?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제한적이긴 하지만, 여성 억압과 차별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려 했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한국사회의 모든 조직들 중에서 교회만큼 여성들의 자발적 참여가 남성보다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이 있을까요? 그런 점에서 교회와 여성혐오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보도에 의하면 강남역 살인남은 “여자가 무시해서” 범행 장소에서 한 시간이 넘게 기다리다가 화장실에 들어오는 첫 번째 여성을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교회랑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 살인남은 목회를 꿈꾸던 신학생이었고 자퇴 후에는 교회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가 주로 영향을 받은 곳은 교회였다는 뜻이겠지요. 그는 누군가의 친절하고 다정한 교회 오빠였거나, 교회 누나가 보기에는 신뢰가고 듬직한 연하남 교회 동생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유독 여성의 무시를 못 견뎌 여성을 살해하기로 작정했던 것일까요? 그에게서 여성 혐오는 도대체 어떤 경로로 거치면서 형성되었을까요? 물론 섣부르게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교회에서 보고 자란 영향이 꽤 컸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는 드러내놓고 여성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성 차별을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구조화시켜왔습니다. 성경을 근거로, 교리적 잣대로, 제도적으로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도록 하였고, 교회 내에서 여성의 권위와 공헌은 헌신과 순종이라는 미담과 간증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아직도 한국교회의 상당수는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거부하고 있고, 아직도 한국교회의 강단 위로는 여성이 오르지 못합니다. 아직도 한국교회의 당회는 남자들 일색입니다. 여성의 비율이 교회에서 60% 이상을 상회할텐데, 최소한 50%는 안 될지언정 당회의 여성비율이 10%도 안 되는 기이한 인력배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 바로 한국교회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 내에서 남성의 무시는 당연히 참아야 되는 성질이 되지만, 어떤 여성의 무시에는 분노해도 되는 것입니다. 어찌 목사 안수도 받을 수 없는 자들의 무시를, 어찌 장로도 될 수 자들의 무시를, 어찌 교회 강단에도 서지 못하는 자들의 무시를 견딜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어쩌면 평범한 한국 남자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인내심 테스트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인내심은 교회내에서는 작동을 하겠지만, 교회 밖을 벗어나면 무장해제 됩니다.  

    하지만, 교회 내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무지하거나 무관심 합니다. 한국 교회의 간판 옆에는 여전히 전도폭발, 성령체험, 치유와 힐링 등의 문구가 난무합니다. 근래에는 사탄의 음모인 동성애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투사적인 열정과 교회와 사회를 붉게 물들이는 좌파용공 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이 그들에게 장착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언명법들 앞에 늘 숭고하고 치열했던 한국교회였던지라 젠더에 대한 문제, 양성 평등, 페미니즘 따위의 문제들에 한 눈을 팔 수가 없었던 게지요.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여러 진보담론들을 살펴봐도 약자의 카테고리에서 여성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민중신학에서조차 여성에 대한 언급은 미비합니다.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 민족통일이라는 큰 그림들을 그리시느라 이런 쪼잔한 양성평등 같은 미시적 문제들에는 미처 손길이 미치지 못했나 봅니다.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이라 자부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조차도 여성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벽은 높기만 합니다. 기장교단에 속한 목사후보생 신학생들은 각자가 속한 노회에서 참여하여 정기적으로 목회자 후보생 교육을 받고 면접을 치룹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온 여자신학생 상당수는 남성 목사님들 앞에서 질문을 받으면서 모욕감을 느꼈고, 심지어는 강간을 당하는 느낌이 이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증언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여자가 신학을 해서 뭐하려고?”, “한국은 아직까지 여성 목회가 힘들어”, “신학교에서 연애하면서 사모되면 되겠네” 등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적 질문들이 그 자리에서 오고 간다고 하네요.   

    이렇듯 한국 사회 전체는 보수든 진보든 상관없이, 그곳이 세속적인 공간이든 성스러운 공간이든 상관없이 여성문제에 대해서든 공히 같은 마음 아닐까 합니다. 그것의 표현이 누구는 조금 세련된 것처럼 보이고, 그 문제에 대처하는 태도가 누구는 조금 진일보하고 누구는 여전히 티나게 후지지만, 그들의 무의식은 똑같습니다. 여성문제에 관해서는 관심도, 애정도 솔직히 없습니다. 애정과 관심이 없으니 당연히 문제의 심각성도 모릅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이러한 발아조건 속에서 서서히 싹 터오면서 진화해갔고, 드디어는 ‘강남 살인남’ 같은 증상들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앞으로 닥쳐올 더 큰 유사사건들에 대한 징후입니다. 그러니 “국민 여러분, 이제부터 마음 단단히 잡수십시오!” 이렇게 정부는 발표했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권력의 마음과 국가의 진실


    하지만, 경찰이 내린 이 사건에 대한 판단은 저의 생각과는 많이 달라보입니다. 경찰은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가 아닌 단순 정신질환자의 “묻지 마!” 사건으로 결론지었습니다. 경찰은 김씨가 2003∼2007년 "누군가 나를 욕하는 것이 들린다"고 자주 호소하며 피해망상 증세를 보였고, 이 증세는 2년 전부터 '여성들이 자신을 견제하고 괴롭힌다'는 피해망상으로 변화됐다고 말했습니다. 김씨는 서빙 일을 하던 식당에서 이달 5일 위생 상태가 불결하다는 지적을 받고 이틀 뒤 주방 보조로 옮겼는데, 이 일이 여성 음해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 범행을 촉발한 요인이 됐다고 경찰은 분석했습니다.  

    경찰은 범행 당시 김씨의 망상 증세가 심화한 상태였고 표면적인 동기가 없다는 점, 피해자와의 관계에서 직접적인 범죄 촉발 요인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이번 사건이 묻지마 범죄 중 정신질환 유형에 해당된다고 설명합니다. 또 김씨가 화장실에 들어온 여성을 보자마자 바로 공격한 점으로 미루어 범행 목적성에 비해 범행 계획이 체계적이지 않아 전형적인 정신질환 범죄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사회에 확인된 여성혐오 현상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경찰의 발표는 과거의 자아 심리학에서 말하는 환자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에 주체와 대타자(예: 사회, 국가, 교회 ...)가 있습니다. 주체는 분열된 주체입니다. 분열된 주체라 함은 대타자의 법과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섞이지 못하는 주체를 의미합니다. 흔히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정신질환자라 부릅니다. 반면, 대타자인 사회와 국가, 그리고 교회는 완벽한 시스템, 목소리, 그리고 법과 품격을 지닌 대상입니다. 정신질환에 대한 치료는 분열된 주체를 완벽한 대타자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입니다. 대타자의 음성에 순응을 하고, 반응을 하게 될 때, 우리는 그를 ‘정상인’이라 부릅니다.   

    경찰의 인식은 이런 것입니다. 대타자 대한민국은 여성혐오 같은 것은 없는 완벽한 사회이고, 대타자 대한민국은 여성의 인권과 안전이 유지되는 정상적인 사회임을 먼저 전제합니다. 어쩌다 미친놈이 하나 등장해서 재수없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니, 국민 여러분 너무 이 문제를 확대 해석하지 마십시오. 한 개인의 우발적 행동이었고, 더군다나 그는 미친 놈입니다. 그 미친 놈 하나만 제거하면 이 사회는 여전히 안전할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대타자 대한민국은 안전한 공간입니까?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도 대타자 대한민국이 보인 반응은 같았습니다. 한 개인의 일탈적 사건으로 세월호 사건을 몰고 갔습니다. 세월호 발생 초기 모든 언론은 유병언을 쫓는데 혈안이 되었드랬습니다. 분열된 주체의 일탈적 행위로 인해 세월호가 발생했음을 드러내 보이는 액션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안전한데 사이비 광신도 집단으로 인해 이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싹을 제거하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세월호 사건을 마무리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밝혀진 진실은 무엇입니까?  

    사실 우리는 2년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마무리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구조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도....우리는 아직까지 확실히 아는 것이 없습니다. 국정원이 개입했고, 여러 가지 부패의 커넥션이 이 사건 안에는 가득한 듯 한데 우리는 정확하게 그 진상에 대해 모릅니다.  

    결국, 세월호 사건이 처리되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국가란 없음!’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주체도 분열되어 있지만, 완벽한 대타자였던 국가 역시 분열되어 있음을 세월호 사건을 통해 우리는 알아버렸습니다. 하지만, 대타자인 정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기네들은 완벽하고, 문제가 없고, 순결한 존재이고, 너희들 분열된 주체가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분열된 주체를 좌파, 빨갱이, 동성애자, 이슬람 테러리스트로 지목하였고, 강남역 묻지마 사건을 거치면서 정신질환자가 그 목록에 추가될 것입니다. 이런 거대한 공조에 숭고한 대타자들은 함께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와 조중동, 그리고 한국 개신교는 이러한 거대한 공조의 파트너 들입니다.  


제발, 그 예배를 걷어치우라!


    여혐은 한국사회 층층히 쌓여있는 구조적 폐습 어느 한 구석에 완고하게 자리 잡은 집단무의식이 아닐까 합니다. 정신분석학의 기본이 무엇이었나요? 억압된 것은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여혐의 출몰은 그러한 점에서 위태롭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그 무의식이 출현할지 모르기 때문이죠. 이렇듯 여혐은 나도 모르는 내안에 있는 어떤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의 행적을 보면 강남역 사건과 같은 야만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야만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야만의 시스템 한 가운데 우리들의 교회가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그 진실을 봐버린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알아차린 예언자 이사야는 그 사실에 견딜 수 없어서 “당장 너희들이 드리는 그 더러운 예배를 걷어치우라!”고 절규하는 것 아닐런지요. 이렇듯 이 천년도 훨씬 전에 울려퍼졌던 이사야의 외침이 돌고 돌아 21세기 한국땅에서 똑같은 울림으로 공명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을 우리는 지금 숨가쁘게 지나고 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1. 지난 2016년 5월 30일 주일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설교)’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김진호, 『산당들을 폐하라』(동연, 2016), 117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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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날 


강남역 호프집에선 한 여자가 죽었다


-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 리뷰

 






(평범한 워킹맘, 페미니스트, 간간이 글쟁이로 변신)


0.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으로 떠들썩하던 어느 날, 문득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거, <채식주의자> 읽어 봤냐?” “네, 당연히 읽어봤지요.” 아버지는 내 감상을 조곤조곤 물어보다가, 내가 나름 긍정적이었다고 하자 ‘큼'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난 별로더라. 어떻게 그런 소설이 상을 탔는 지 모르겠다.”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왜 별로였냐고 묻는 내게 아버지는 이렇게 답했다. “감동이 없고, 인간적인 정도 없고.. 그런게 뭐 상을 탔나 싶다.” 


   노벨문학상에 버금간다는 ‘맨부커상’에 대해 접하곤, 아버지는 <노인과 바다>나 <무기여 잘 있거라> 같은 소설을 기대했던 것 같았다. 단단한 근육 위로 바짝 선 핏줄 같은, 노장의 짙은 풍미가 지배하는 세상 말이다.  


   아버지는 어쩐지 추천해드린 <7년의 밤>도 퍽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저 스릴러 영화 같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생신 선물을 고민하다가, 고민 끝에 시인 백석의 시집 <사슴> 초판본을 골라 들었다. <사슴>을 들고 계산을 기다리면서 나는 어떤 고집 센 취향에 대한 상념에 빠져 들었다.


1.


    얼마 전 SNS에서 대학 시절 교수님의 포스팅을 접했다.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이라는 이분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마지막 글귀가 마음에 아득하게 남았다. “실제로 중앙 문단의 한국문학사도 ‘순수/대중’으로 전개되어 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순수/대중’의 대립은 ‘순수’ 비평가의 틀이어다. 또 이 틀은 구별짓기에 기초하며 꽤 ‘혐오적’이다. 여성, 소수자, 노동자 및 대중에 대해.”[각주:1] 


   한강의 소설은 한국 문단에서 분명 ‘순수 문학’에 속할테지만 이청준, 김훈, 그리고 수많은 세계의 ‘명작 전집’을 읽어 온 아버지의 시각에서는 ‘장르 문학’에 가까웠다. 아무것도 아닌 작은 계기들이 일상의 시간을 파열내 버리고, 이윽고 소설의 세상은 현실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작가의 의견이나 목적같은 건 강하게 휘몰아치기 보다는, 바스라지는 듯한 생의 감각과 섬세하게 엮인 감각의 틀 속에 사라질 듯 말 듯 고요히 잠자고 있다. <수레바퀴 밑에서>나 <데미안>처럼 명실상부하게 얘기해주지 않고, <노인과 바다>처럼 직접 대화를 건네지도 않는다. 보여주는 건 실타락처럼 풀어헤쳐지는 어떤 기묘한 감각과 감성들 뿐. 분명 그건 아버지의 서재에 꽂힌 책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세계명작 전집>에 여성의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고전이나 명작이라고 하는 전집들 사이에서 여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을 찾기는 극히 힘들었다. 아버지의 서재엔 <죄와 벌>, <무기여 잘 있거라>, <좁은 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방인>, <데미안>, <1984>, <위대한 개츠비> 등이 있었다.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고전 명작 시리즈의 팔할 정도가 꽂혀 있었고, 아버지가 구매하지 않은 나머지 이할의 목록을 찾아보니 그나마 <인형의 집> 한 권은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소설가 한강의 작품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했을 상황은 눈에 보이고도 남았다. 그것은 결코 순전한 개인의 취향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우리가 여태 접해 온 세계 명작, 그리고 고전 시리즈 가운데 여성의 세계는 거의 없었다. 여성 작가도, 여성성의 세계도, 그리고 여성이라는 질문 조차도.


2. 


    소설가 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날, 강남역 근처에 위치한 호프집의 공용 화장실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한 시간이나 화장실을 서성였던 가해자는 이십대의 여자를 발견했고, 그녀는 억울하게 살해 당했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공간에는 ‘나는 너다’ 혹은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라는 포스트잇이 붙었다. ‘여성혐오 범죄’라는 말이 끓어 올랐고, 너무나 쉽게 반대편의 전선이 생겨났다.


   이 전선에서 한 발짝 떨어진 일각에서는 ‘여성혐오 범죄’라는 목소리를 두고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 고 했다. 정신분석학과 수사학은 이 사건을 조현증 환자의 개별 문제로 보았고, 사회학과 여성학은 한 사람의 가해자보다 그를 둘러싼 이 사회 속의 여성 혐오 문화를 지적했다. 서로의 결에 따라 분석하고 도출해낸 결과였으나 합리와 객관은 전자가, 비약과 감성은 후자가 각각 차지했다. 남녀 뿐 아니라 학문 역시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학문과 전문가도 그랬는데 비전문가인, 순전히 ‘여성’일 뿐인 그녀들의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인해 여성들의 공포 수위는 끔찍하게 치솟았는데, 일부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되려 ‘남성 혐오를 조장하지 말라’며 반발했다. 이 모든 일은 고인의 삼일장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일어났다. 


   한편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영혜는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채식을 시작한다. 왜 갑자기 채식을 시작하느냐는 남편의 말에 그녀는 “꿈을 꿨어"라고 나직이 답한다. 그녀의 꿈은 붉은 피와 날것의 고깃덩어리로 점철되어 있었다. 꿈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고기를 끊고, 브래지어를 풀어버린다. 영혜의 남편은 ‘고기 냄새가 난다'며 섹스를 거부하는 영혜를 강제로 벗겨 삽입하고, 아버지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영혜의 입에 강제로 탕수육을 쑤셔 넣는다. 단지 그녀는 채식을 할 뿐이었다. 


   영혜를 둘러싼 남성성의 세계는 영혜를 혐오했다. 티셔츠 위로 도드라진 그녀의 유두와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그녀의 식성, 그리고 지극히 비합리적인 그녀의 이야기까지- 다른 이들과는 사뭇 다른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사람들은 참을 수 없어 했다. 그래서 그녀의 입을 틀어 막고, 멸시하고, 폭행하고, 강간했던 것이다.


3.


   한강의 소설에 대해 ‘K문학의 쾌거'라고 묘사하는 사람들은 ‘여성혐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같은 날 일어난 대조적인 이 두 사건을 보면서 회의감에 빠졌다. 한 여자의 성공은 사회가 너무나 손쉽게 취득해 가는 데에 반해, 다른 한 여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 책무에 대해 모두가 침묵한다. 아니, 침묵을 넘어서 그 책무에 대해 열렬히 반대한다. 그것을 ‘남성 혐오'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일부러 오독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여성혐오'라는 그녀들의 목소리를 멸시하고 혐오하고 조롱한다. 심지어는 성적인 표현을 끌고 들어와 모욕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서도 언제나 ‘너무 과잉되었다.’라는 평가는 늘 ‘여성 혐오’를 주장하는 그녀들의 몫이다. 채식을 고집했을 뿐인 영혜를 향해 모두가 힐난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남자들 모두가 실은 집에서 설거지도 하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도 하고, 주말에는 아기를 잘 돌보는 사람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군대도 다녀온데다가 이렇게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내게 ‘잠재적 가해자'라니, 분노할 수밖에 없을 일이겠지만 ‘여성혐오'라는 말은 오직 당신만을 탓하는 게 아니다. 고전 문학 시리즈에 여성의 작품이 없는 것, 역사 책에 여자란 선덕여왕과 유관순밖에 없는 것, 대기업 임원급에 여자는 거의 찾아보기도 힘든 사실들. 이 모든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더워서 상의를 탈의하고 있었다던 영혜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안돼?” 그녀는 그녀의 몸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 했고, 그에 대해 인정과 존중을 받기 원한 것 뿐이었다. 바라건대 영혜와 함께 질문해주시라. ‘그러면 안되는 걸까? 왜 안됐었을까’라고. 대답이 아닌, 질문조차도 우리에겐 희망이다.


   꽃보다도 아름다울 나이, 그녀의 명복을 빈다. 부디 편히 쉬시기를.


ⓒ 웹진 <제3시대>

  1. 천정환 교수 페이스북에서 발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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