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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1.16 [목회마당] 다시, 교회란 무엇인가? (이상철)


다시, 교회란 무엇인가?[각주:1]

- 한백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며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한신대 외래교수)

 

    우선, 주일 오후 바쁜 시간 가운데 한백교회 담임목사 취임예배에 참여해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별히 설교를 해주신 박종화 목사님, 권면을 해주신 채수일 총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박종화 목사님은 저희 부부의 결혼식 주례자로써 결혼 이후 지금까지 저희 부부에게는 멘토 같은 분이십니다. 채수일 총장님은 제가 신학의 길에 들어섰을때부터 지금까지, 저에게 많은 용기와 격려를 보내주시면서, 신학이 얼마나 멋있는 학문인지를 맛보게 해주셨던 스승이십니다. 두 분이 이 자리에 함께 참여해 주셔서 너무나 기쁘고 감사합니다.  

    취임예배의 순서를 맡아주신 서울노회 박승렬 노회장님을 비롯한 서울노회 여러 선배 목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1995년 서울노회 목사후보생으로 시작하여, 2003년에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오늘 저는 서울노회 서은시찰에 소속된 한백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합니다. 한마디로 저는 서울노회가 키운 목회자이고, 서울노회는 목회자의 道가 무엇인지를 저에게 가르쳐준 노회입니다. 여러 가지로 미숙한 저를 너그러운 인내심으로 감싸안고 지켜봐준 준 서울노회와 서울노회를 지켜온 모든 선배 목사님들께 고개숙여 존경의 마음을 표합니다. 

    14년 동안 한백교회를 담임하고 오늘 은퇴하시는 양미강 목사님, 양미강 목사님 이전에 오랜 기간 한백교회를 지켜온 김진호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들의 젊은 날을 한백교회를 위해 바친 두 분을 이어 제가 오늘 한백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합니다. 두 분의 한백을 향한 헌신과 노력에, 그리고 그런 두 분의 이름에 제가 누가 되지는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됩니다.  

    3주전, 10월 18일에 한백교회는 창립28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양미강 목사님이 한백의 28년을 회고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한백이 오늘날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한백 나름대로의 신앙적 색깔을 가지고 자기비판적인 반성에 기초한 열린 신앙적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기저는 끊임없이 전통적인 교리에 대항하여 신학과 신앙을 연결해낼 수 있는 민중신학적 성서읽기가 그 바탕이었고, 이와 연결된 참여적 신앙이야말로 한백신앙의 핵심일 것이다.”   

    28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서로 다른 신앙의 색깔들, 사연들을 가진 사람들이 한백을 처음 만들고자 했을 때, 그리고 몇 차례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백이 진화를 할 때, 모두가 뭐라고 뚜렷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심전심으로 꿈꾸고 공유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꿈 말입니다. 어떤 오만도 편견도 억압도 없는 세상에 대한 바람, 아마도 그것은 한백이 28년전에 꿈꿨던, 그리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한백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한백이 처음 탄생하던 87년 그해는, 혁명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던 그 해였고, 한편으로는 혁명의 헛헛함을 맛보기도 했던 그 날이었습니다. 거대하고 우람한 진리들이 광장을 메우던 그 시기에, 작지만 묻혀진 진실들을 발견하고, 누군가가 누구를 베는 목소리를 경계하면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는 생각, 폭풍과도 같았던 시절속에서 망각되어 왔던 것들을 늦었지만 이제부터는 제대로 환대하자는 성찰, 다른 어떤 조직, 기구, 이념이 아니라, 신학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그렇게 해야된다는 막연함이 우리를 이곳으로 내몰았고, 한백은 그렇게 불안하고 불안정한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문득, 이 대목에서 김영승 선생님이 창립기념주일에 나눔의 기도를 드리면서 한백 초기에 함께 나누었던 기도문을 회상하던 대목이 떠오릅니다:“거친 세월 헛된 역사 무너뜨리며 닫힌 가슴들 다 열리고 쓰러진 이들 다 일어나 대동춤으로 어우러질 그 날을 기다립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 큰 강으로 흐를 그 날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작은 소리가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우리 겨레의 큰 함성으로 하나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작은 몸짓이 사람의 세상을 만드는 작지만 굳센 손들의 하나된 염원이기를 기원합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의 길을 따르는 늘 새로운 시작이 되도록 이제 우리 모두의 마음을 나눕시다.”위의 기도문에서도 드러나듯이, 어떤 오만도 편견도 억압도 없는 세상에 대한 바람! 아마도 그것은 한백이 28년전에 꿈꿨던, 그리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한백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을 때, 한국교회는 이미 고도성장의 궤도로 진입하여 무서운 속도로 배가를 하던 무렵이었습니다. 우리 앞에는 이미 무수한 교회의 샘플과 전통과 권위들이 존재했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분명 눈부시고 박수를 받을만한 성령의 역사였지만, 그 이면에는 말 못할 아쉬움 또한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물불을 안 가리는 교회성장주의 일 수 있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무차별적이고 공격적인 선교의 패턴 일 수 있으며, 가부장적인 권위의식에 입각한 교회운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존 교회들의 관습과 법칙에 기대려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대상으로 의식적으로 우리의 도드라진 것을 자랑질 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단지 전혀 새로운 방식과 율동으로 우리의 교회를, 그리고 우리만의 신학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백은 지속적으로 물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28년 동안 다양한 방식과 실험으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계속 묻고 대답했드랬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무척이나 민망하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질문이지만, 지난 몇 년을 지나면서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어버린 세상속에서, 청년들이 교회에 환멸을 느껴며 교회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 세태속에서, 이 질문은 오래된 새로운 질문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급변하는 세상, 급락하는 교회의 위상속에서 ‘우리가 추구했던 교회의 가치, 한백의 가치가 부각된 것은 아닐까?’라는 자평도 해보게 됩니다. 현존하는 교회질서와 세상의 법칙에 불화하는 힘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가치 말입니다.  

    물론 현실의 교회와 교회의 역사는 제도와 시스템을 흠모했고, 그 길을 따라 걸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제도 밖의 제도라 해야 교회의 교회다움이 선포되는 것 아닐까요? 민중신학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고, 마지막 날에 성만찬이라는 제도와 틀을 거부하고 제자들의 신발을 벗겨 발을 씻기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행동은 그것을 반증하는 행위라 우리는 믿습니다.  

    한백은 겁 없이 이런 믿음에 의지하여 우리의 교회를 실험해왔습니다. 평신도 위주의 교회 운영방식, 하늘 뜻을 나누는 방식, 목회자와 장로의 임기제, 평등과 소통을 지향하는 예배를 위한 공간의 재구성, 예배의 곳곳을 매우는 한백의 노래와 고백,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 시대에 맞게 복음을 재해석하는 신학적 작업 등이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가 모든 성전시스템, 교리시스템, 예전시스템을 해체하면서 신앙(학)의 의미와 가치가 누군가의 손에 독점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그 진리를 우리들에게 돌려주었던 것처럼, 한백은 주께서 주신 그것을 잘 누리고 향유하려고 무던히도 고민하면서 몸부리쳤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한백性은 그런 가시적인 것보다는, 이런 보이는 것을 언제든지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자유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한백의 신앙을 굳이 예수가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의 질문을 받고 성령을 설명하면서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 그것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라고 한 선문답과도 같은 아포리즘과 연결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백은 겉으로 보기에는 나이스하고 쿨한 것 같지만, 한꺼풀 벗기면 솜털같이 섬세해서, 타인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도드라지는 한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백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이지만, 불어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대지의 촉촉함와 대기의 훈훈함을 다 느끼는 바람입니다. 한백의 지난 28년은 남들처럼 급하게 어딘가를 향해 마구 불어갔던 바람이 아니라, 마지막 날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예수처럼, 내게 소중한 사람들과 이 땅에서 고난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우리를 감싸는 허세와 권위와 위엄에 눈치보지 않고 마음과 정성을 모아갔던 바람이었고, 그런 공동체였기에 지금까지 한백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멋있고, 분명한 자신의 신앙과 목소리가 있는 한백교회에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비어있고, 흠이 많은 제가 담임목사로 취임합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함께 하기에 별 어려움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설레고 떨리는 마음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몇 주 동안 이.취임식 준비 때문에 교회가 무척 분주했습니다. 취임식 순서 중에 취임하는 목사에게 꽃다발과 예물을 증정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그 선물을 뭘 할지 교회와 목사가 서로 눈치보고 고민하고 그런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주 심플하게 그리 비싸지 않은 구두를 한 켤레 사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백교우들에게 지금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부끄럽지만 이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구두의 굽이 닳도록, 여러분들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 가겠습니다. 한백 식구들에게 기쁜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제가 제일 기뻐할 것이고, 우리들 중 누구에게 슬픈 일이 생기면 아마도 제가 제일 슬퍼하는 그 사람일 것입니다. 버스 타고 가다가, 지하철 타고 가다가 여러분들이 사는 집이나 일하고 있는 직장 근처를 지날 때, 갑자기 생각나서 전화 걸어 제가 “밥 먹자!”고 말해도 놀라지 마십시오. 그렇게 저는 여러분들이 사준 구두를 신고 여러분들을 만나러 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만나면서 제가 꿈구는 교회는 이런 교회입니다.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의 한 걸음을 더 소중히 여기는 교회”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사회는 성의 차지, 세대 차이, 지역차이, 계급차이, 노선 차이 등 무수한 차이들이 자아내는 권력의 역학속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엮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하나로 엮었던 방식, 강력한 대타자의 목소리는 이제 그 기능적인 면에 있어서 한계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새로운 얼개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복수적이고 산만한 관계 속에서 얽혀지는 새로운 통합방식, 일사분란한 계획과 통제가 아니라, 각자가 지닌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새로운 통합방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의 한 걸음을 더 소중히 여기는 교회!”는 이런 시대의 요청에 대응하는 구호 아닌 구호입니다. 복수적 개인들의 특수성을 지지하는 한백, 다양한 개인들의 우발적인 횡적 연대와 접속을 통해 늘 활발한 발언와 율동을 상상하는 교회, 그러는 가운데 진정한 쉼과 기쁨을 공유하는 공동체 한백이 되기를 저는 기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그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의 담임목사가 되는 저는, 그러한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매일 기도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함께 기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꿈과 희망을 갖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여러분 바라보면서 여러분과 함께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주께서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 웹진 <제3시대>



  1. 지난 11월 8일에 있었던 한백교회 담임목사 취임예배에서 행한 취임사를 일부 수정하여 올립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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