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하나님과 같이
- 요한복음 5장의 이야기

송진순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박사과정)

요한복음서는 분명하고 일관된 어조로 예수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빌립보서와 히브리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찬송시도 요한의 고백만큼 과감하지는 못했다. 요한의 전승을 만든 사람들과 요한의 기자는 유대적 배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에도 왜 유대인들이 보기에 신성모독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예수를 이야기했을까? 요한복음서의 청중들은 예수가 하나님과 같다는 그들의 고백을 어떻게 경험하고 이해했을까? 

   요한복음 5장 18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고발한다. 그들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으며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여긴 것에 신성모독죄를 물어 그를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다. 적어도 요한복음을 쓴 기자의 눈에는 예수가 불경스러운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은 확실하다. 물론 이 단락을 두고 L. 마틴은 예수 시대가 아닌 1세기말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반증, 곧 적대적인 주변 세계에서 고발당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정황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예수 시대와 요한의 공동체 시대를 넘나드는 요한의 두 차원의 드라마는 요한복음을 꽤 읽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무대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유대인들이 안식일 준수보다도 예수와 하나님의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그들 스스로 선뜻 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5장은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치유받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 외곽으로 난 길을 걷다 베드자다 연못 돌기둥 근처에 모인 사람들을 보게 된다. 여러 병자 중 특히 한 사람, 한눈에 봐도 그 병세가 오래된 사람을 보고 묻는다. “낫고 싶으냐?” 그는 짧은 물음에 ‘그렇다’는 답변 대신 “물이 동해야 하는데, 나를 넣어줄 사람은 없고…….”부터 시작해 꾹 참았던 말 보따리를 풀 듯 제 사연을 꺼내 보였다. 이에 “일어나 걸으라.”는 예수의 말에 오랜 병고가 무색하게 그는 치유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타이밍이다. 하필 병자가 자리를 들고 일어난 때가 안식일이었다. 승냥이 같은 유대인들이 그런 타이밍을 놓칠 리는 없다.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면 안 된다고 점잖게 훈계를 놓던 유대인들은 치유를 행한 사람이 예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 일로 인해 예수를 박해하였다(요5:16)고 요한복음서 기자는 전한다. 

   예수와 유대인들(바리새파)과의 안식일 논쟁은 요한복음서 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서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안식일 논쟁에 대해 공관복음서는 안식일의 진정한 주인을 천명하며 새로운 정결례에 대한 예수와 예수운동의 삶의 자리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들려준다(막2:23-28; 마 12:5-6; 눅13:10-17; 14:1-6). 그러나 요한의 기자에게 포착된 안식일 논쟁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할 하나의 빌미일 따름이다. 그는 유대인들만큼이나 타이밍을 정확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그는 안식일을 구실로 유대인들의 입을 빌어 요한복음의 핵심, 즉 요한의 그리스도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안식일.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는 예수의 답변에 요한복음서의 기자는 유대인들의 상황을 전한다.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더욱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았기 때문이다.”(요5:18) 

   안식일에도 우주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에 대해 반박할 수는 없었겠지만 이를 근거로 안식일을 수시로 어겼던 예수나 예수의 사람들의 행태야 유대인들에게는 분명 거슬리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정작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예수가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 자신과 하나님이 같다고 하는 바로 그 지점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의 기독교인들이야 ‘하나님 아버지’는 으레 자연스러운 호칭이기에 성서 어디든 발견되리라 생각하겠지만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신 32:6; 시 68:5; 89:26; 사 9:6; 63:16)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자연과 역사를 초월해있기에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계약을 맺었고 역사 가운데 자신을 드러냈다. 그렇기에 유대인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였으며 세계 안의 어떤 존재도 감히 하나님과 같을 수는 없었다. 물론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으로 맺어진 부자관계로 보여주었지만, 질곡의 역사에서 유대인들이 거듭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계약 관계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그런데 유대민족을 흔들었던 위기가 1세기 팔레스타인의 흙먼지 이는 척박한 땅에 다시 찾아 왔다. 이미 지중해 지역을 장악한 로마 제국의 압제가 그들 깊숙이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유대민족 내부에는 정치적 혼란과 종교적 타락 그리고 가난으로 지속적인 반란이 일어났고, 다양한 형태의 유대교적 갱신운동들이 우후죽순 퍼져가는 때였다. 또 다시 민족의 혼란 속에서 유대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선인들이 그러했듯 율법준수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정립이었다. 유대인들에게 행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와 같이 되는 것은 제일계명을 어긴 명백한 오만이며 악이었다.(2마카 9:12) 

    그러나 일반의 유대인들은 더 이상 지도자 유대인들의 언행에서,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자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 멀리 있었고 위태롭고 지난한 삶은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보다는 가난하고 소외된 낮은 이들과 동고동락하면서 함께 먹고 마시고 돌보고 그들을 치유했던 예수. 애끓는 심정으로 그들의 고통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인간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이 그들의 삶 깊이 들어오게 되었다. 요한복음 5장에서 보듯, 그것은 오래된 병자에게 먼저 다가가 몸을 낮추어 그를 살피고 말을 걸었던 예수.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병자의 말에 공감(共感)하고 눈을 맞추며 치유를 했던 예수의 자비(慈悲)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예수 시대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목도한 이들의 생생한 증언과 확고한 믿음으로 예수의 공감과 자비의 경험은 그들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 가운데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역사가 되었다. 

   이제 유대민족의 하나님이 역사와 신앙의 위기 가운데 예수를 믿는 개개인의 삶에서 자신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예수의 눈에서 하나님의 눈을, 예수의 말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투명하게 보고 들었다. 예수와 하나님, 예수와 그들 그리고 예수를 통한 그들과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하나됨의 경험-너의 고락(苦樂)이 내 것이 되고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지는 영적인 통찰을 말하고자 그들은 예수를 감히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그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은 예수였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극명한 차이와 거리를 뚫고 세상으로 들어온 예수라는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불경스러운 발언이야말로 하나님을 경험한 그들에게 진정성있는 울림이었다. 율법, 성전 혹은 회당이라는 스크린을 걷어내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내 안의 모신 자들의 말하는 방식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신성모독의 발언은 요한의 사람들의 대담하고도 발칙한 경험의 순간을 의미했다. 

   예수를 하나님과 같이. 우리에게는 닳고 닳아 진부해진 이 교리 조각은 애초 요한의 사람들의 삶을 바꿔 놓은 떨리는 고백이었다. ‘예수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경위를 두고 많은 학자들이 유대적이냐 혹은 헬라적이냐 하며 그 근원을 따져 물었다. 책상 앞에 앉은 이들의 수많은 가능성의 범주에서 요한의 예수 고백은 매번 다른 채색을 더했지만 원화를 생동감있게 복원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펄떡이는 심장박동과 고통스러운 환희를 경험한 그들의 고백이 유대세계의 박해와 축출의 상황을 넘어 요한의 신학과 신앙의 역사를 새롭게 기록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이 되는 대담한 고백의 전승자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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