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이름의 지옥과 천국 :  영화 <똥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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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
(영화 프로듀서, 감독)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가?

최근 독립 다큐멘터리 <워낭소리>가 300만 관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1억원에 못미치는 적은 예산으로 고군분투 제작된 <똥파리>라는 독립영화가 해외 영화제에서 연달아 최고상을 받으며 국내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런 유례 없는 성과는 현재 독립영화를 둘러싼 환경에 비추어 볼 때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여전히 극장을 확보하지 못해 개봉조차 할 수 없는 독립영화들도 많은데, MB정권하의 영화진흥위원회는 2009년 들어 '다양성영화 개봉지원사업' 마저 폐지하였다. 80년대 말 영화운동의 차원에서 처음 만들어진 ‘독립영화’라는 명칭은 이제 ‘다양성 영화’라는 신자유주의적 명칭 하에 비상업, 비주류, 저예산, 예술영화 등과 함께 두루뭉술하게 묶여져 불리고 있다. 독립영화제작지원 예산은 몇 년째 6억원으로 고정된 반면, 정부의 지원정책은 '영화산업'으로만 집중되고 있는 현실이다. 멀티플렉스에서의 무한경쟁이라는 배급구조 속에 독립영화가 놓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물론 독립영화 역시 상업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독립영화는 상업영화와는 달리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국가 이데올로기로부터의 독립, 산업으로부터의 독립 등을 기반으로 하기에 그 기획과 제작, 유통의 과정이 차별적이고 보호되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불편한 영화, 똥파리

독립영화는 관객에게 불편하다. 거친 화면, 지루한 전개는 독립영화 하면 늘상 떠오르는 이미지다. 한마디로 완성도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나처럼 영화를 제작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영화 그 자체보다도 영화를 만들어가는 현장의 총체적 모습까지 함께 읽혀 묘한 감흥을 일으키기도 한다. 상업영화를 볼 때는 제작사, 투자사의 입김이 감독의 초심을 어떻게 변질시켜 나갔는지, 감독이 어디쯤에서 타협했는지 읽힌다면, 저예산 독립영화를 볼 때는 서투른 아마추어리즘 속에서도 빛나는 주제의식을 발견하며 때로는 제작비의 곤궁함 속에서도 꿋꿋하게 완성해낸 감독의 뚝심을 읽을 때 박수를 쳐주고 싶은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영화 <똥파리>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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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영화 제작지원과 CJ-CGV 인디펜던트 프로모션 제작지원을 받아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스탭 전원의 노개런티에도 불구하고 막바지에서는 감독이 전세방을 빼 제작비로 써야 할 만큼 힘든 상황에서 완성되었다. 30여편의 독립 장,단편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이름을 먼저 알린 양익준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쓰고 연출함으로써 장편영화 감독이 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픽션이 가미되었지만 자신의 문제, 자신의 가족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독하다. <똥파리>의 주인공 상훈을 꼭 양익준 감독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웬만한 용기가 없이는 힘든 일이다.

글쓰기든, 영화 만들기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정신분석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분석가는 작가가 될 것이고, 분석주체(환자)는 주인공이 될 것이다. 그 분석가는 제대로 기능을 못할 수도 있다. 작가이자 배우로 이중의 역할을 한 양익준은 어떠했는가?

주인공 상훈은 똥파리다. 더러운 똥을 먹고 사는 똥파리로서 그는 용역업체에서 일한다. 용역업체에서 하는 일이란 사채 빌려쓴 사람 찾아가 온갖 협박과 폭력으로 수금해오는 일, 노점상 철거 용역깡패, 대학에서 농성하는 학생들 구타하여 해산시키는 일 등 다양하다. 자본사회에서 누구나 그렇지만 그에게도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노동과 생산의 댓가로 주어지는 돈이 아닌, 내몰린 자들을 폭행하고 갈취하는 돈이기에 그 돈은 더러운 똥이 된다.

똥파리는 웽웽거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내듯이, 그의 언어의 대부분은 욕이다. 그는 좀체로 웃는 법이 없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으로 남자건 여자건 가리지 않고 욕과 함께 주먹이 나간다. 그에게는 법이 없다. 일정한 궤도 없이 요란스레 비행하는 똥파리다. 그의 욕설과 폭력 앞에서 수많은 약자들이 무릎을 꿇지만 그래봤자 똥파리의 운명이다. 파리 목숨이란 말이 있듯이 파리채 한 방이면 쭉 뻗어버리고 마는 신세. 그 똥파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죽기 위해서 그렇게 온 몸으로 절규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그것이 온통 자신을 옥죄고 있다. 술만 마시면 가정폭력을 일삼던 아버지, 그가 중학생 때 목격한 여동생과 어머니의 죽음. 그들은 가족 내 약자로서 폭력의 희생자이다. 그의 아버지가 살인죄로 15년 감옥살이를 한 기간은 그 소년이 성인이 되는 시간으로서, 영화 속에서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는 피해자, 희생자임에도 이 사회에서 아무런 보살핌 없이 성장하여 어떤 사유도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당한 폭력의 수행자로 자리바꿈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살았으나 죽은 거나 다름없는 존재인 늙고 힘없는 아버지를 ‘생각날 때마다’ 찾아가 짓밟는 게 일상이 되었다.

루이 알튀세는 근대 이전과 이후 공히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로서 ‘가족’을 들고 있다. 가족이란 인간들 사이의 가장 원시적인 위계질서가 성립되는 곳이다. 가족적 질서란 인간만이 만들 수 있는 독특한 질서로 동물적 야만성을 ‘인륜’으로 배우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훈의 가족은 그 위계질서마저 무너져 있다. 그의 상징계는 일찍이 붕괴된 셈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괴로워하는 건 여전히 눈 앞에서 현존하는 아버지의 존재다.

용역업체 사장이기도 한 친구 만식은 “이런 말하면 뭐하지만 어쨌건 하나 남은 피붙이 아니냐? 나 같은 고아새끼는 그런 아버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잘해드려 임마!” 라고 말하며 아버지에게 갖다드리라고 돈을 쥐어주곤 한다. 그럴 때마다 상훈은 냉소하며 아버지에게 찾아가 보란 듯이 짓밟아버린다. 그리고 절규한다. “왜 그랬어! 왜 그랬냐구! 왜 그랬어?” 상훈은 결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똥파리로 살아가는 지금의 상훈에게 그런 아버지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자살하려고 손목을 긋고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병원으로 업고 가며 “죽지 마...지금 죽으면 안 돼..지금 죽으면...난...뭔데? 난 왜 이렇게 산 건데?” 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리고 만식의 말대로 하나 뿐인 피붙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피를 나누어 살리고 나서, 비로소 새로운 삶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똥파리로 살아가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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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에게 지옥이었던 가족이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천국으로서의 가족을 꿈꾸어 왔다. 그 구성원은 상훈과 마찬가지로 가정폭력의 상처를 안고 있는 자들이다. 혼자 예닐곱살 된 아들을 키우며 힘겹게 살고 있는 이복 누나와 어린 조카, 그리고 알 수 없는 동질감 속에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여고생 연희. 상훈은 꼬마 조카에게 찾아가 자기 나름대로의 아빠 역할을 해주곤 한다. 연희와 꼬마 조카와 함께 맘껏 웃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그는 천국 같은 가족을 경험한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이런 환상 속에서 미소 짓는다. 거기엔 누나와 조카, 연희, 그리고 상훈을 따라 용역업체를 접고 식당을 차린 친구 만식이 새로운 가족이 되어 함께 모여 있는 모습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어머니와 제자를 새로운 가족으로 맺어주고 떠나듯이 말이다.

영화 <똥파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해자나 피해자나 할 것 없이 모두 이 사회의 희생자들이다. 인간적인 삶을 담보해주지 못하는 세상,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서로 물고 뜯기는 소외된 자들, 무력한 자들,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끝내 파리 목숨이 되어 죽고 마는 자들...모두 똥파리 같은 존재들이다. 사회가 변하지 않는 한 똥파리는 계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된 상처를 적극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억압적인 장치들에 대항하면서 진정으로 능동적인 주체로서 살아남아야 한다.

후일담이지만, 영화가 만들어진 후 불편했던 양익준 감독의 가족 관계가 좋아졌다고 한다. 자신의 실재와 맞닥뜨리는 고통스런 과정을 통과해낸 듯하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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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ineluna
    2009.03.24 11:5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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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된 상처를 적극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억압적인 장치들에 대항하면서 진정으로 능동적인 주체로서 살아남아야 한다...

    마지막 문단에서 힘을 얻고 갑니다.결국 자신의 문제는 자신의 몫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겠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리가 들은 '워낭 소리', 우리가 외면한 '워낭 소리'
-영화 <워낭 소리>의 흥행에 붙여 띄우는 몇 가지 단상

정용택
(본 연구소 회원)


참을 수 없는 눈물의 가벼움

2009년1월 15일에 개봉한 이충렬 감독의 저예산 독립영화 <워낭 소리>가 독립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관객 수 60만을 돌파했다. <워낭 소리>의 예기치 못한 흥행을 두고, 어느 진보적 인터넷신문에서는 한국 사회의 두 가지 희망을 발견했다고 한다. 첫째는 우리나라에서도 <원스>나 <워낭 소리>같은 작품성 있는 저예산 독립 영화라면 언제든지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 둘째는 우리가 그간 잊고 지낸 목가적인 전원의 삶, 즉 오염되지 않은 고향산천과 문명의 이기를 거스르며 사시는 아버지와 사람보다 더 의리 있는 소를 기억하며 눈물 흘릴 줄 '아는' 따뜻한 심성이 한국인들에게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것, 바로 그런 사실들을 영화가 확인시켜 주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시사IN, 2009년 02월 10일).

특별히 두 번째의 이유가 몹시 흥미롭다. 이 영화 한 편의 갑작스러운 흥행 현상을 통해, 한국 대중들에게서 모종의 새로운 인권적 감수성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권에 대한 전통적인 문법에 따르자면 인권은 소위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이성적 인식의 문제였는데, 이 영화는 주인공 할아버지를 통해 소와 같은 동물을 인간 자신과 같은 도덕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는 새로운 인권적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주장으로 읽힌다. 로티가 말한 바, 인권이란 소위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이성적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를 자신과 같은 도덕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감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인권, 이성, 감성, 현대사상과 인권, 사람생각, 2000).


40년이 넘게 자기 곁에 남아 있는 단 한 사람, 그리고 자기가 곁에 남아 있어주어야 할 단 한 마리와 함께 걸어온 80년 촌로의 인생 위로 눈부신 황혼이 덮쳐오는 라스트신,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음은 자명하다. 사람들의 눈물을 보면서, 그 눈물이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아마도 그것은 동물로 상징되는 타자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환대,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종(種)의 한계마저 뛰어넘은 존재 대 존재의 우정 혹은 교감 같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 혹은 향수가 아닐까. 우리는 그것을 위에서 인용한 로티적인 의미의 '인권적 감수성'에 대한 대중들의 열정의 징후로 해석해보려 한다.

<워낭 소리>와 같은 좋은 영화가 여전히 제작되고 있는 것, 그리고 그런 영화가 흥행하게 된 것, 그래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감동을 받은 것, 그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다 만족스럽다. 그런데, 아니 그래서 갑자기 슬퍼진다. 한국 사회의 대중들이 이런 영화를 좋아할 만큼 아직 감성이 살아있다, 라는 인터넷신문의 분석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 갑자기 슬픔이 밀려온다. 더욱이 평소 TV 모니터로 얼굴만 봐도 토할 것 같았던 대통령께서도 나처럼 이 영화에 적잖이 감동을 받았다, 라고 전해주는 기사를 읽을 때 그 슬픔은 배가된다.

소의 목에 걸린 방울 소리를 통해 소의 아픔을 듣는 노인의 감성에 깊이 매료되거나, 두 존재 간의 아름다운 우정에 감동하는 이들이 60만 명이 넘었고, 더구나 그 60만 가운데 대통령을 포함한 이 사회의 권력자들이 상당수라고 하는데, 어째서 용산의 희생자들을 향해 대통령과 권력자들은, 나아가 시민사회는 한 줌의 동정 섞인 눈물조차 보이지 않는가? 나는 그들이 이 영화를 보며 흘린 눈물이 나의 눈물과 같다는 단순한 사실로 인해 지금 절망한다. 우리가 정말 같은 종(種)의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란 말인가? <워낭 소리>의 소를 향해 드러내는 도덕의 감성이 어째서 용산의 희생자들을 향해서는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로티의 말을 인용하자면,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인종청소를 자행한 세르비아인들의 만행은 그들이 보스니아인을 동물처럼 즉 도덕의식을 작동시키지 않아도 무방한 곧 '인간 범주' 밖의 존재로 여겼던 집단적인 편견, 그러한 왜곡된 감성(sentimentality)의 산물이지, 저들을 제거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합리적 판단에 따른 인권 유보의 상황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용산 철거민들의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데 집단적으로 공모한 국가권력과 시장질서와 시민사회가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우리'라는 자기 귀속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의식의 범위 밖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용산 철거민들은 한국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국가적 질서와 시장적 질서, 그리고 시민사회적 질서 그 모두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된, 말하자면 삼중으로 배제된 비국민/비시민/비인간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먼저 국가적 질서로부터 배제되었기 때문에 '생떼나 쓰는' 사람들이 되다 못해 결국 망루에까지 올랐고, 공안(公安)적 논리에 따라 대(對) 테러 진압작전에 의해 주검이 되었다가, 죽어서도 검찰 발표대로 폭력과 방화를 일삼은 범죄자가 된다. 동시에 시장적 질서로부터도 배제되었기 때문에, 40층 이상의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설 예정이었던 용산4구역, 이전에 비해 땅값이 10배 이상 오른 덕분에 돈이 없는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부자들에게 그대로 내주는 신세가 되고 만다. 게다가 작게는 용산 구민, 크게는 서울 시민 다수가 동의하고 있는 서울시 재개발 프로젝트에 사적인 동기로 이의를 제기하여 프로젝트 진행에 차질을 초래했고, 나아가 주변 이웃들에게 불편을 주고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는 폭력 시위도 서슴지 않았으니, 인권이니 생존권이니 하는 차원의 알량한 인정(人情) 따위를 시민사회로부터 기대하는 것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보자. 87년 6월 두 명의 대학생이 고문과 최루탄에 의해 차례로 사망했을 때, 그리고 그러한 죽음에 대해 국가권력이 책임을 회피하려 들었을 때, 시민사회는 민주주의적 인권의 이름으로 궐기하였다. 마찬가지로 2002년 6월 두 소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미군 장갑차 운전병이 무죄 판결을 받았을 때, 시민사회는 민족주의적 인권의 이름으로 궐기하였다. 지난 2008년 촛불항쟁 때는 급기야 참여민주주의와 국민주권에 기초한 아주 구체적인 인권 즉 건강권, 생명권, 행복추구권 등의 이름으로 거대하게 궐기하였다. 그렇게 한국시민사회는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르지 않았던가? 인권에 대한 존중을 정치적 권리의 쟁취로 연결시키면서, 한국의 시민운동은 성장하고 발전해 왔는데, 왜 가장 인권이 존중되어야 할 상황 앞에서 시민사회는 침묵하고 있을까?

영화의 '워낭 소리', 현실의 '워낭 소리'

억지스럽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워낭 소리>의 소를 향해 작동하던 인권적 감수성이 용산의 희생자들을 향해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면, 대중들에게 용산의 이웃들은 인간 밖의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소와 희생자들의 위치가 뒤바뀌어, 소는 대중들에게 동물이 아닌 인권적 존중과 친밀한 소통의 대상이 되고, 희생자들은 인간이 아닌 동물이 되어 전혀 인권의 보호나 존중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이해하는 바, 영화 관람의 윤리라고 하는 것은 영화를 통해 체득한 감각을 일상의 윤리적 행위로 반복하는 것이다. 이 반복은 단지 영화적 현실, 디제시스적 공간(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장소) 내로 한정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영화들을 통해서 계속 반복되어야 하고, 극장 밖 우리의 현실 속에서 반복되어야 하며, 결국 우리 모두를 통해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 영화의 흥행을 통해 그 존재가 확인된 한국 대중들의 인권적 감수성의 진정성도 입증될 수 있다. 만일 <워낭 소리> 관람에서 보여준 인권적 감수성의 뜨거운 눈물이 현실에서 반복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대중들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며 흘리는 눈물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차마 조우하지 못하였던 소와 인간의 평등한 우정이라고 하는 전원적인 삶 속의 느낌이나 사건을 때늦게 후회하며 그리워하지만, 그럼에도 관객들은 자신이 어떠한 경우에도 지금 여기 도시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소와 인간이 교감할 수 있는 그런 실재적인 공간은 언제나 영화 관람의 자리에서만 보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실재적인 것으로서 이러한 인권적 감수성에 대한 향수와 열망의 조건은 언제나 그 실재적인 것이 현실에서는 부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심문관은 예수의 역사적 실재와 신성을 독실하게 믿고 있지만, 그의 신앙은 예수가 지상에 절대 강림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의존하고 있었다. 만약 예수가 세상에 다시 내려온다면 대심문관은 현실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 다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것이다. 실재적인 것의 귀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관객은 영화관에서 실재적인 것에 마음껏 탐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넘어 소와 같은 타자에게까지 개방된 인권적 감수성의 발휘가 작금의 한국사회 현실에서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혹은 그런 것이 무의미하다고 믿기 때문에, 대중들은 다만 영화 <워낭 소리> 안에서 그 감수성의 풍경을 거리 둔 채 자유로이 만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소를 향해 인간이 자기의 도덕과 감수성을 뛰어넘은 신뢰와 환대를 보내고, 소와 인간이 종(種)의 차이를 넘어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아름답고 이상적인 공간이 현실로 귀환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은 영화를 관람하면서 편안하고 느긋하게 타자에 대한 인권적 감수성의 귀환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다. 그 반가움의 최종점에 물론 뜨거운 박수와 눈물이 있다. 영화에 보내는 박수와 눈물은 영화에서 본 실재적인 것을 다시 영화 안으로 돌려보내고, 우리는 다시 그러한 실재적인 것을 그리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움을 참을 수 없을 때 물론 영화관으로 다시 가고.

영화를 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이 영화는 40년을 함께 살아온 늙은 농부와 소의 관계를 통해 땅과 노동, 나이 듦과 죽음 그리고 특히 인간과 동물의 우정과 교감의 실재성을 시종일관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감독에 따르면, '워낭'이란 마소의 귀에서 턱 밑으로 늘여 단 방울, 또는 마소의 턱 아래에 늘어뜨린 쇠고리를 뜻하는 말이다. 영화에서 워낭 소리는 소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주인 할아버지를 소통시키거나 교감하게 하는 '매개음'이며 그들이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상징'이자 '메타포'로 일종의 '맥박'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워낭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소와 노인을 교감시키는 기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결국 이것은 그들의 관계가 다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고통 공감의 구조, 혹은 사회적 연대의 구조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들려오고 있는 현실의 워낭 소리를 외면하며, 그 워낭 소리에 응답하는 인권적 감수성의 이상적 풍경을 지금 여기에서의 현실이 아닌 영화 속 판타지의 공간에서 관람하며, '실재'가 아닌 '실재의 효과'를 체험하는 데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실재 효과'를 즐기며, 오늘 어쩌면 나에게도 닥칠지 모르는 국가/시장/사회로부터의 고립이나 배제에 대한 불안을 종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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