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스러운 전쟁: 요한 계시록을 통해 본 폭력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지난 6월 한국은 퀴어 퍼레이드에 반대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목소리와 단체 행동으로 시끄러웠다. 얼마 후 미국은 동성결혼이 헌법에 명시된 미국 시민의 기본 권리임을 대법원이 인정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대법원 판결이후, ‘동성결혼 반대’를 헌법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복음주의자들로 인해 약간의 소동이 있긴 했지만, 미국은 대체적으로 조용했다. 미디어들도 이들의 주장에 크게 동요되지 않는 듯 했고, 오히려 동성결혼 합헌 판정에 기뻐하는 성소수자들의 동향을 전했다. 대법원이 합헌 판정을 내리는 기간에 내가 속해 있는 미국 성공회의 전국회의 (General Convention)가 유타주의 솔레이크 시티에서 열리고 있었다. 3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이 회의에서, 주교단과 대의원들은 교회법에 명시된 결혼의 정의를 ‘남성과 여성의 결합’에서 ‘성숙한 두 사람’의 결합으로 바꾸는 것을 결정했고, 미국 성공회 역사상 최초로 흑인 의장 주교를 선출하였다. 지난 몇 년 동안 동성애 문제로 지역 성공회 교회들이 갈라지고, 동성애에 반대하는 신부들과 주교들이 교회를 떠나는 등,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었으니, 앞으로 교회가 계속 시끄러울 것 같다.
          동성애와 관련된 일련의 사회적 사건들을 보면서, 왜 많은 기독교인들이 전쟁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오히려 어떤 전쟁에 대해서는 지지의 목소리를 보내면서, 성소수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중오하고, 동성애에 대해서는 유독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지 궁금해졌다. 물론 성소수자들의 인권이 전쟁의 문제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종류의 억압—전쟁, 가난, 가부장제, 동성애 혐오주의, 외국인 혐오주의 등등—은 그 근본을 들여다 보면, 모두 서로 얽혀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양분을 공급해주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결국 동성애 혐오주의와 군사주의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친밀 관계의 예를 잘 보여주는 성경이 요한 계시록이 아닌가 싶다.
          얼마 전부터 ‘퀴어 성서 주석 (Queer Bible Commentary)’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요한 계시록 주석을 번역을 위해 천천히 집중해서 읽다 보니,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 왔다.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요한 계시록을 연구하는 권위자로 알려진 티나 피핀(Tina Pippin)과 게이 신학자인 마이클 클락 (Michael Clark)이 함께 쓴 요한 계시록에 대한 퀴어적 해석은, 이 저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 나로 하여금 전쟁의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했다.
          요한 계시록은 단순히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책이 아니라, 전쟁에 관한 책이며, 전쟁과 섹슈얼리티 (sexuality)가 함께 하는 책이다. 신약학자들의 대부분은 요한 계시록을 사도 요한이 살았던 폭력과 전쟁, 귀족들의 무분별한 쾌락 추구와 억압으로 점철된 1세기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와 관련지어 읽는다. 제 3세계 신학자들은 제국주의 억압에 대항하는 해방의 메세지로 요한 계시록을 바라 보기도 한다. 제3세계 신학자들의 관점을 존중하면서도, 피핀과 클락은 요한 계시록에서 해방의 메세지, 특히 성소수자들을 위한 해방의 메세지를 찾기는 힘들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 아니라, 전쟁과 파괴의 신이며, 고통에 울부짖는 사람들을 오히려 외면하는 침묵의 심판자이며, 그가 건설하려는 왕국은 하늘과 땅이 철저히 파괴된 후에야 등장해서 오직 선택 받은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공동체이다. 피핀과 클락은, “왜 이런 하느님을 우리가 믿어야 하지? 이런 이미지에서 하느님을 해방시켜야 하지 않나?”라고 질문한다.
         실제로 요한 계시록은 하느님이 코디네이터로써 소리 없이 전쟁을 주관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하느님의 허락을 받은 네 천사가 지구의 네 귀퉁이에서 차례로 나팔을 불면, 전쟁과 기근 전염병 등의 재앙이 선택받지 못한 이들을 죽음과 질병으로 몰아 넣는다. 전쟁, 기근, 전염병은 따로 떨어진 사건들이 아니라 함께 일어나는 현상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농업 공동체와 지구의 파괴로 인해 기근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기근은 때로 전쟁과 무력 충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전쟁과 기근으로 버려진 사람과 가축 시체로 인하여 전염병이 도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이다. 문제는 전쟁을 일으키고 조정하는 자들은 전쟁터에서 보이질 않는데, 전쟁의 원인과는 상관없이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죽음의 천사들도 당연히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며, 이 천사들에게 지구를 치라고 명령하는 신의 모습은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알지만, 왜 일어났는지, 누가 일으켰는지, 그리고 왜 자신들이 피해자가 되어서 죽어야 하는지 알지 못 한채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어느 전쟁이나 희생양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희생양들은 여성들, 소수 인종들, 외국인들 같은 사회적 약자들인 경우가 많다. 피핀과 클락은 제리 파웰 (Jerry Falwell)과 같은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동성애자들을 종말론의 희생양으로 삼는다고 주장한다. 요한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을 종말의 신호로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왔다. 이들은 유럽 연합의 탄생을 적그리스도 왕국의 탄생으로, 심지어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몰아가기도 한다. 1차 걸프 전쟁 때도 20세기말 종말론자들은 아마겟돈의 시작이란 억지 주장을 했고, 21세기 들어선 9/11 테러 사건, 이란의 핵무기 개발, 2차 걸프 전쟁 등이 곧 다가올 아마겟돈의 징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에이즈는 말세의 질병으로. 그리고 에이즈 확산의 책임은 동성애자들, 특히 게이들에게 떠넘겨졌다. 결국 계시록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동성애자들이 말세의 기승전결을 알려주는 황당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계시록에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등장하여 독자들의 시선을 잡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자색옷을 입은 바벨론의 창녀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모든 타락한 것들의 어미로 그려지고, 해와 달을 입은 여인은 광야에서 해산을 하고 용에게 쫓기다가,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피난처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피핀은 다른 책에서 요한 계시록이 여성 혐오주의로 가득 차 있다고 썼다. 그녀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선과 악의 대결로 점철된 요한 계시록에서 여성의 위치 또한 악녀와 선녀로 나눠진다. 바벨론의 창녀는 죽음 또한 참혹해서 그녀의 시체는 갈갈이 찢겨져 영원히 불타게 되고, 만국 백성들은 그 시체 위에서 기쁨에 넘쳐 축제를 벌인다. 반면에 선한 이미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해와 달을 입은 여인은, 실제로는 모호한 메세지를 전달한다. 그녀는 앞으로 위대한 지도자가 될 남자 아이를 출산하기 때문에, 존재의 가치가 있고 신의 보호를 받는다. 아이가 태어난 후, 광야로 사라진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그녀가 예수가 지상에 건설한 천년왕국에 들어 갔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계시록에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1440명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에서 각각 차출된 남자들이니까. 해와 달을 입은 여인 뿐만 아니라, 예수의 천년왕국에, 그 후에 새로이 건설되는 새 예루살렘에 여자들도 있는지 조차 알 방법이 없다.
         바벨론의 창녀, 해와 달을 입은 여인, 하느님의 인치심을 받은 선택받은 남성들. 이들의 이야기들이 이상하리만치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가? 전쟁이 일어나는 곳에는 마치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인냥 바벨론의 창녀처럼 비난받는 여성들이 항상 존재하고, 아들들과 연인들은 전쟁터에 보내고 꿋꿋이 삶을 지탱해 나가는 자랑스러운 여인들이 있는가 하면, 감동의 전쟁 스토리를 보내오는 남성 군인들, 전쟁 영웅들이 있다. 여성학자 신시아 인로 (Cynthia Enloe)에 의하면, 전쟁을 결정하는 국제 정치의 무대와 함께 실제 전시상황이 되면, 사회 곳곳에 잠재해 있던 남성중심주의가 더 강화되는 현상을 보인다고 한다. 전쟁과 같은 급박하고, 때론 위험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국제 정치의 장에서 이성적이며, 강인한 남성만큼 제격인 사람은 없다. 마치 요한 계시록의 하느님처럼 새로운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잔인한 전쟁도 불사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언제 질병의 나팔을 불지 (현대전에서 사용되는 생화학 무기 같은 것), 언제 융단 폭격을 가하고 원자 폭탄을 떨어뜨려 한 방에 전쟁을 끝낼지를 냉철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한데, 남성 지도자만큼 제격인 사람을 찾긴 힘들 것이다. 이 전쟁 지도자에게는 목숨을 걸고 충성을 받칠 선택받은 1440명과 같은 남성군인들이 있어야 하고, 이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국가가 얼마나 정성을 다해 이들을 선택했느가를 끊임없이 각인시켜 주어야 한다.
         이 모든 전쟁 시나리오에서 여성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여성들은 그들이 어떤 남성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적군과 아군으로 나뉘어 진다. 바벨론의 창녀는 역사적으로 소위말하는 적군의 여성들 (enemy women)이 어떻게 다루어 졌는지와 일맥상통한다. 현대전에서 조직적으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여성을 철저히 성적 대상화하면서 가능해 진다. UN의 전시 성폭력에 대한 최근의 보고서 (UN Report on Sexual Violence in Conflict)에 의하면, 성폭력이 전술의 하나로 사용된지 너무 오래 되었다. 적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어 무기력하게 만들고자, 또는 남성 군인들을 하나로 묶고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전술적으로 사용된다. 오랜 동안 여성은, 출산과 양육이란 독특한 특성으로 인하여, 한 민족이나 나라의 땅과 문화와 동일시 되었고, 이러한 여성의 몸을 정복하고 파괴하는 것은 적군을 파괴하는 행위와 같은 선상에 놓이게 되었다. 문제는 보코 하람이나 이슬람 국가 (IS)와 같은 종교 신념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과격한 테러 단체가 전세계적으로 퍼지면서, 이미 전쟁으로 사회 안전망이 파괴되어 버린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의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제주 4.3 학살 사건과 같은 국가의 조직적인 폭력이 일어났을 때, 공산당원이라는 이유로, 공산당원의 가족이란 이유로, 공산당원으로 의심받는 가족의 구성원이란 이유로 많은 제주 여성들이 서북 청년 당원들, 육지 경찰, 군인들에게 강간당하거나, 그들과 강제 결혼을 당했다. 전쟁 중에 ‘우리편’에 속하지 않은 여성들은 (바벨론의 창녀와 같은) 위험한 여성들로, 전사들을 유혹하여 타락시키는 여성들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여성들에게 합당한 벌은 강간하고 죽이는 것.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 그들을 전쟁의 원인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이런 비이성적이고 극단적인 행동이 전쟁이란 상황에서 (종말이란 상황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이제 성폭력은 여성과 소녀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소수자들, 남성들을 가리지 않는다. 이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레즈비언 여성들을 대상으로 ‘치료를 위한 강간 (corrective rape)’ 범죄가 보고 되고 있고, 시리아와 이라크 분쟁지역과 난민촌에서 성소수자들을 대상으로한 성폭력이 증가하고 있다.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사회 부조리와 전쟁의 원인 제공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들의 잘못으로 모든 일이 일어난 것처럼 이들을 성적으로 처벌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 중이라도 살인에 대해 극도의 도덕적 저항감을 느끼는 인간 본연의 심리를 분석한 데이비드 그로스만 (Ltd. David Grossman)은 그의 책 ‘살생에 관하여 (On Killing)’에서 우리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 하면서도,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피하는 분야가 전쟁(살생)과 성(sex)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그의 책이 이 둘의 상관관계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이 두 분야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독자들에게 권유한다. 전쟁과 성은 우리 인간 사회에 만연해 있지만,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며, 체계적이며 합리적인 윤리적 행동을 생각해 보는 것을 어렵게 하는 분야이다. 그렇기에 폭력과 성은 마치 공포영화처럼 인간들을 짜릿하게 흥분시키면서도, 동시에 두렵게 만들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려 하지만, 계속해서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맴돌고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밧모스 섬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환상을 보았던지 간에, 그 환상은 사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되고 기록되었을 것이다. 전쟁과 폭력, 자유 남성 계층의 무분별한 성적 유희, 여성-노예-소년들이 자유 성인 남성에게 성적으로 종속된 로마제국의 시대상과 사도 요한이 가지고 있던 가부장적 유대민족 독립운동사상이 맞물려 탄생한 책이 전쟁과 성폭력으로 얼룩진 요한 계시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시 성폭력이란 관점에서 요한 계시록을 바라보며, 나는 더이상 미래에 다가올 종말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지나온 역사가, 그리고 지금의 현실이 더 공포스럽다고 느껴졌다. 강제로 군위안부로 끌려가 이국 땅에서 일본군에게 성적으로 유린당하다가 죽어간 한국 소녀들, 미국 주둔군을 위한 성적 유희 제공자로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어간 기지촌 여성들, 전국민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린 304명의 단원고 학생들,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죽은 두살배기 팔레스타인 아기, 레즈비언이란 이유로 집단 강간당하고 머리에 총을 맞아 죽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살로네 등등. 이들의 이야기가 종말의 이야기이고, 가부장적 폭력으로 가득 찬 군사주의, 여성혐오주의, 동성애 혐오주의가 지구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묵시록적 증언이다.



<참고 문헌>
    Pippin, Tina and J. Michael Clark. “Revelation/Apocalypse.” In The Queer Bible Commentary. Edited by Deryn Guest, Robert E. Goss, Mona West, Thomas Bohache. London: SCM Press, 2006. Kindle Edition.
    Enloe, Cynthia. Bananas, Beaches, and Bases: Making Feminist Sense of International Politics, 2nd Edition.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4. Grossman, David. On Killing: The Psychological Cost of Learning Killing in War and Society, Revised Edition. Open Road Media, 2014. Kindle Edition.
    United Nations Office of the Special Representative of the Secretary-General for Sexual Violence in Conflict, “Key United Nations Initiatives to Address Conflict-Related Sexual Violence.” http://www.un.org/sexualviolenceinconflict/our-work/key-initiatives/
    오금숙. “4.3을 통해 바라본 여성인권 피해사례.” 제주 4.3 연구소 엮음.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 제주 4.3 제 50주년 기념 제2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학술대회 보고서. 역사비평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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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1]

 바울과 종말론

- 세월호, 바울, 그리고 에른스트 케제만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세월호 그리고 얼어버린 교회

    2014년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어떤 형태의 고민이든 세월호에 대해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정신적 여파가 한국사회를 휘감아 돌아 마치 유령처럼 이곳 저곳에서 출몰하고 있다. 조금 늦은듯 하지만 세월호 사건에 대한 신학적 반성과 공부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세월호 사건은 한국교회와 신학에 대한 21세기 최고의 도전이다. 보수 일색인 한국교회와 신학에 대해 한국사회의 모든 모순이 집약되어 있는 이 비극적인 사건은 외형만 비대하게 커진 한국교회의 복음과 신학의 빈곤을 비웃기라도 하듯 웅장하게 건축된 서초 사랑의 교회보다 더 거대한 모습으로 교회앞에 섰다. 물론 대부분의 교회나 신학은 가벼운 눈물과 인생에 대한 무상함으로 쉽게 이 사건을 덮으려 하겠지만 세월호앞에 신학마저 바로 서지 못한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곧 생명력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여러가지 질문을 던질수 있겠지만 필자는 이 글에서 단 한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는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 단순한 질문에 여러가지 복잡한 함의들이 숨어있겠지만 현대의 보수화된 대부분의 한국의 교회와 신학이 넘어갈 수 없는 한계가 여기에서 드러난다고 본다. 믿는자는 천국에 안믿는자는 지옥에 있다라고 안타깝게 이야기하고 싶을까? 정말 그럴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니 그렇게 말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한국기독교의 미래는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죽은자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살아야할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조금이라도 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것이라고, 죽은자들을 거름삼아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언뜻 보기에는 멋진 정치적 구호정도로 보이지만 ‘과거를 딛고 서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자’던 전두환 정권의 구호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과거를 규정하는 것은 현실이기에 과거를 현실화 하지 않는다면 그 과거는 곧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단순 무식하게 필자가 하나 꼬집고 싶은 것은 이른바 한국의 복음주의와 진보신학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죽은자를 위한 신학’ 또는 ‘희생자를 위한 신학’이란거다. 그러기에 세월호앞에 진보신학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를 반복하거나, 초등학교 도덕책에도 나오는 윤리적 자기 갱신을 다시 외치거나, 재발방지를 위해 현실정치의 복잡한 구도속으로 말려들어간다. 모두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신학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또한 신학이 자신의 특수성없이 다른 담론에 숟가락을 얹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복음주의신학은 자신이 복음이라 생각하는 구호를 다시금 무의미하게 외친다. ‘예수를 믿은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프로파간다를 외치면서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신들이 수천년동안 팔아온 ‘죽음 이후의 보험상품’의 독보성을 목놓아 외친다. 그 댓가는 현실에 대한 부정과 현실속의 복이 모순적으로 짬뽕된 삶과 의무적으로 참석해야하는 예배행위와 헌금이다. 위에서 필자가 이야기한 것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위의 증상의 한 원인으로 ‘죽은자를 위한 신학’의 부재를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현대 한국 기독교과 신학이 얼어붙어 버리는 지점을 말하고 싶다. 당신들은 답이 있는가? 세월호의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미안하지만 필자는 그 해답을 쉽게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에른스트 케제만이라는 사람의 바울 이해를 살펴보며 그 답을 함께 찾아가 볼 것을 권유하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독교의 신학은, 아니 바울신학은 죽은자를 또는 죽을자를 위한 신학이다. 그 신학을 잊어버렸을때의 결과가 현대의 복음주의 신학과 일부 진보주의 신학이다.


    에른스트 케제만, 스승에게 반기를 들다.

    케제만을 말할때 꼭 앞에 붙는 수식이있다. 루돌프 불트만의 제자라는 것이다. 이른바 신약성서신학의 독보적인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불트만의 계보에서 태어난 학자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더 확실하게 그의 스승에게 선을 그은 학자이며 곳곳에서 자신의 스승의 문제점을 따지고 든 학자이다. 뛰어난 신학자보다 더 귀한 것이 뛰어난 스승인데, 불트만은 그점에서 둘 다 이룬 사람이라 보인다. 그의 제자들은 그와는 전혀 다른 신학적 색깔을 드러난 사람들이 많은데 이 점이 더욱 불트만을 뛰어난 신학자로 보이게 하는 것 같다. 다시 케제만으로 돌아와서, 케제만이 살았던 시대에는 유독 위대한 신학자들이 마구 등장하던 시대였다. 불트만을 필두로 하여 칼 바르트, 폴 틸리히등 그야말로 신학도가 아닌 사람들도 필독서로 인정하던 책들을 썼던 학자들이며 신학이 인문학을 다시금 이끄는 것 처럼 보였던 시대였다. 그 시대의 신학자들의 특징중의 하나는 바로 전쟁 이후세대, 또는 비극 이후 세대였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고 겪을 수 있는 가장 아픈 비극인 죽음의 시대, 제 3제국 나치의 시대, 아우슈비츠의 시대를 지나면서 그들은 이전까지의 신학이 대답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왜 그 대답이 없었는지, 그 대답이 혹시 성서에는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 케제만이 있다. 그에게 당시 교회가 잊어버린것은 종말론이며 그 이유는 바울에 대한 심각한 오해였다. 차근 차근 살펴보자. 필자가 신약성서신학을 배울때 나름 멋지게 생각했던 구절이 있다. 바로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표현이었다. 불트만이 했다고 하는 이 표현은[각주:1] 결국 신학의 가장 중요한 물음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나, 이 세계가 아니라 바로 인간이라는 뜻이다. 언뜻 이 표현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근대의 시대를 사는 불트만에게 성서는 신화적 세계의 산물이었다. 신화적 세계에서 말해지는 신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비신화화’되어야만 근대의 독자들에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고 불트만은 생각했다. 정작 신화나 고대의 이야기들의 핵심은 한 부족이나 집단, 또는 인간의 운명의 이야기라 해석된다. 곧 성서는 우주선이 날아 다니는 근대의 세계관에 맞게 인간에 대한 이야기, 즉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어떻게 신앞에 설 수 있는가?'의 주제로 다시금 읽혀야 한다. 이런 불트만의 입장은 절대적 계시로서의 신이 깃든 문서라는 성서의 위상을 재정립하여 고등비평이 성서신학의 필수항목으로 등장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고 실존주의 철학이 신약성서신학 안으로 들어오는 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러나 케제만에게 이런 불트만의 방식은 커다란 모순을 가지고 있었는데, 불트만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인간’이란 개념이 다분히 근대적이란 것이 문제였다. 불트만이 말하는 ‘인간’이란 존재가 옳을 수도 있고 그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가 현실속의 인간을 올바르게 말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케제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바울과 불트만의 ‘인간’이해는 다르다는 것이다. 케제만은 불트만이 말하는 ‘인간’은 지극히 근대적인 개념인 ‘개인’ (Individual)과 같은 개념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개인’이란 변하지 않는 어떤 에센스를 가지고 있는 인간, 이른바 영혼이나 영(Spirit)을 가지고 있는 윤리적 결단을 할 수 있는, 세상과 떨어져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다.[각주:2] 결국 불트만에게 전체 신약성서는 하나의 ‘윤리적 개인’을 찾기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각주:3] 하지만 영혼이나 영이 인간의 변치않는 본질이라면 진정한 인간은 ‘영’이나 ‘영혼’과 같은 존재가 된다. 결국 불트만은 바울을 당시 헬라의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윤리적 결단의 주체로서 인간을 발견한 사람 정도로 본 것이다. 그러나 케제만이 말하는 바울에게 인간이란 바로 몸의 존재이다. 바울에게 인간은 영적 존재로서의 동일성을 가진 존재들이 아니다.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연대하면서 그 차이를 견디어내는 (유대인, 헬라인, 노예, 자유인, 남성, 여성) 공동체적 존재이다. (P 3) 또한 세상과 몸을 통해 연결되어 있으므로 어떤 결단이든 생각이든 세상과 분리되어 이루어 질 수 없는 존재이다.[각주:4] 갑과 을이 있다고 하자. 언뜻 생각하면 갑과 을은 하루 아침에 스스로의 결단으로 갑과 을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갑은 “그래 이제 갑질하지 말아야지 이런건 나쁜 일이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고 을은 “그래 이제 을이 되지 말자.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실천할 수 있을까? 필자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또한 만약에 실천할 수 없어서 ‘그래 이런건 불가능한거야”라고 생각했다면 결국에는 윤리적 사고 자체도 사라진 것이 아닌가? 이렇듯 바울에게 인간은 그의 외부의 여러 조건과 관계에 뿌리박고 있는 존재이다.[각주:5] 또한 바울은 섣불리 인간이 윤리적 존재로 거듭날 거라고 추측하지도 않는다. 적어도 바울에게 하루 하루의 노력으로 자신의 영성을 길러서 좀 더 완전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생각은 인간을 너무 쉽게 보는 것이다. 그랬다면 바울은 로마서 7장에 그리도 길게 선을 행함에 부족한 자신을 질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을리 만무하다. 또한 그의 서신의 거의 절반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강조했을리도 없다. 바울에게 “현재의 구원은 오로지 개인이 가시적 공동체에 소속되어 구체적인 삶을 지킬때에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제자도가 구현되지 않게되면 교회는 종교적 도그마나 이데올로기로 변해 버리기 마련이다.”[각주:6] 바울에게 결단할 수 있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부르심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개인이 있을 뿐이다.[각주:7]


    바울의 인간학 – 세계속의 인간

    이쯤되면 한가지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뭐야? 보통 교회가 말하는 것과 틀린게 없잖아? 인간은 죄인이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것이고 인간의 노력으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자유주의신학은 틀렸다 이런소리 아냐?” 그러나 케제만이 말하는 바울의 인간은 이러한 구원관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 구원관이 가지는 문제점은 여전히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근본적인 문제를 단순화시켜버린다는 것이다. 여전히 여기에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자리잡고 있다. 현실세계가 가지는 모순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오로지 실체없는 믿음, 즉 세계와 연결된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는 구원보다는 영적인 차원으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좁히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달리 보면 불트만이 범했던 인간 개인 구원의 차원만을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인간은 세계속의 모순에 갖힌 존재이다. 스스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죄악으로 관영하여 인간을 죄악된 존재로 만들 수 밖에 없는 현실속에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각주:8] 그러므로 바울이 풀고자 한 숙제는 죄인된 인간을 어떻게 의롭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죄악된 세계를 변화시킬 것인가였다.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세월호를 예로 들어보자. 세월호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만 생각할 수도 있다. 돈을 좀 더 벌기 위해 더 많은 짐을 실은 선박회사와 이를 눈감은 선장과 선원, 그리고 관계당국자들의 윤리적 문제만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또는 배와 승객들을 버리고 자기의 살길만을 찾은 선장과 선원들, 그리고 이상하게도 승객이 아닌 선원들을 먼저 구조한 당시의 해경대원들이나 그 명령을 내린 사람들만을 문제 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월호 사건은 몇몇 사람이 올바른 윤리적 판단을 했다면 없었을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호의 비극은 몇몇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특별하게 일어났던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제 2, 제 3의 세월호는 없을까? 지금도 그러한 문제를 안고 출항하고 있는 선박은 없을까? 어쩌면 세월호의 비극은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설명되는 작금의 시대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사건은 아닌가? 능률과 이윤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무릅쓰는, 좀 더 나은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는 현대 교육이 가지고 있는 어떤 위험성도 상관않는, 인간의 존엄성이 이윤으로 치환되는 이 시대의 자화상을 가장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세월호가 아닌가? 여기서 모순이라는 말을 ‘죄’라는 표현으로 바꾸면 바로 정확하게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죄의 문제에 대한 현실적 접근이 가능해진다. 바로 세계가 죄의 악마적인 순환으로 이루진다는 것이 바울의 이해였기에 이 세계 속에서 어떤 해결책을 찾는 것이 참으로 불가능해 보이기에, 세계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정수를 깨닫지 못하고 여타의 다른 어떤 가치를 우상으로 삼았기에 벌어지는 비극의 현장이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장소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인식을 근대의 교회와 신학은 인식하지 못했을까? 필자의 표현으로 하면 ‘죽은 자를 위한 신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을 자연스러운 인간 존재의 현상으로 해석하고 그 죽음 뒤의 구원(천국가기)을 이 모든 모순을 해결하는 도구로 삼아버렸기에 일어난 현상인 것이다. 이를 케제만의 표현으로 하면 좁디 좁은 개인적 인간이해를 통해 바울의 인간론, 교회론, 묵시론, 칭의론을 우르르 담아버린 결과이다. 케제만은 이를 반대로 뒤집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중에 현대교회가 잃어버린 묵시론, 즉 종말론을 필두로 바울의 신학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각주:9]


    케제만 종말론을 바울신학의 핵심으로 놓다.

    이전장에서 알베트 슈바이처가 종말론을 바울신학의 핵심으로 놓았을때, 슈바이처에게 종말론적 언어는 예수의 원래의 메세지였으며 바울은 지연되어가는 예수의 재림속에서 신학을 넓혀가던 사람이었다. 그런 바울에게 being-in-Christ는 구원이 완성되는 재림 이전에 교회를 붙잡아주는 신학이었고 바울의 신학이 종말론을 통하여 신비주의로 나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슈바이쳐는 생각했다. 그러나 케제만은 이와는 다르게 종말론은 원래 예수의 메세지가 아니라고 본다. 결국 종말론이 바울신학의 핵심이라 본 것은 동일하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두 학자는 다른 결론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슈바이처의 여러 업적중에 역사적 예수연구에 대해 남긴 것은 독보적이다. 슈바이처는 자신의 이전까지의 예수의 연구가 예수의 모습보다는 연구자의 사상이나 시대정신을 더욱 반영한다고 하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비판적 연구서를 썼다. 그를 통하여 복음서를 통해 통일성있는 예수에 대한 위인전을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몇몇 조각들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라고 하였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조각은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기다렸으며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곧 슈바이쳐에게 예수는 종말의 선포자이자 예언자였고 예수의 메세지의 핵심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였다. 그러나 그 후에 나타난 불트만이라는 거대한 학자에 의해 역사적 예수연구는 완전한 종언을 고하게 되는데[각주:10], 불트만은 ‘공관복음 전승사’라는 연구를 통하여 복음서의 기록중에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복음서의 기록은 오로지 초대 공동체를 통하여 ‘선포된 예수’만을 말하고 있고 그들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기록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들이 받은 복음의 정수인 ‘케리그마’를 기록하기위해 당시에 떠돌던 여러 이야기들을 편집하여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물론 복음서에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 기록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고 여러 복음서의 이야기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논증하기까지 한 것이다. 케제만이 불트만의 제자였다는 것을 기억하자. 게다가 현대의 대표적인 역사적 예수 연구자 중의 한사람인 존 도미닉 크로산은 예수를 유대사회의 한 혁명가로 그리고 있으며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세상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신약학계에서 옛부터 지금까지 예수가 말한 두가지 종류의 종말론, 즉 내가 곧 올것이고 그 때 세상의 종말이 온다라는 말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고 하는 ‘이미’ 와 ‘아직’ (already or not yet), 실현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이 과연 예수의 입에서 나왔느냐는 것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의심하고 있고, 그에 대한 논쟁또한 계속되고 있다. 만약에 이러한 종말에 대한 언사가 예수에게 나온것이 아니라면 이들은 부활절 이후의 초대교회의 메세지였다는 말이된다. 케제만이 지적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케제만은 “복음서의 역사는, 예언적 선포와 같이, 부활절 이후 시대에 나타난 묵시론의 열매이며, 이 거룩한 법의 선포는 부활 이후 공동체에서의 선포가 묵시적인 기반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나타낸다[각주:11]” 고 하였다. 여기서 묵시론적 열매는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 ‘ 모든 가치들의 전복’, ‘인자의 오심’과 같은 묵시론의 핵심들이 예수의 말씀속에서 새롭게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이 복음서의 기록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예수를 통하여 바로 예수가 종말론적 인자(사람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고 하나님과 예수에 의해 하나님 나라의 왕관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의’[각주:12]이다. 여기서 혹자는 예수의 재림이나 종말에 대한 비전이 단지 부활절 이후에 일어난 초기 공동체의 생각일 뿐인가?라고 그렇다면 그저 그들의 상상일 뿐인가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의 그 모든 신학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신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초대 공동체의 신학의 핵심이 바로 이러한 묵시적 종말론이었으며, 이 묵시적 종말론은 두개의 큰 줄기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하나는 열광주의를 바탕으로 한 현재적 종말론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적 유대 묵시문학을 바탕으로 한 미래적 종말론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바울의 적은 유대기독교 공동체의 율법적 열심과 헬라적 공동체의 열광주의란 말과 같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통한 복음을 깨닫고 그것을 그의 선교사역을 통해 전하면서 이 두가지 종말론(또는 두 공동체의 신학들)이 가진 한계를 깨닫게 된다. 이를 캐제만은 다름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중요한 문제는 바울에게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 ‘의의 선포’와 ‘의인됨’, 선물과 섬김, 자유와 복종, 성례와 윤리사이를 결합할 수 있었던 통일된 주제를 밝혀내는 것이다.[각주:13]” 현재적 종말론을 강조하면 ‘의의 선포’, 선물, 자유, 성례가 강조되고 미래적 종말론을 강조하면 그 후자가 강조되게 된다. 이를 세월호의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믿음으로 이미 우리가 의인이 되었고, 우리는 죄에서 자유하고, 예배를 통해 은혜를 입는다는 생각은 현재적 종말론에 해당한다. 물론 죽고난 이후의 천국은 덤이다. 이러한 ‘열광주의적’ 신앙형태가 현대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에서 나타난 신학은 세월호에 비극에 대해 일단은 침묵할 수 밖에 없다. 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들과는 일단 관계없는 ‘세상 일’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그 속에 자신과 같은 신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제 천국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것이다. 이와 같이 ‘열광주의적’인 실현된 종말론속에 사는 사람은 세계에 대해 단절될 수 밖에 없고 이는 무관심과 침묵으로 이어진다. 이와는 달리 미래적 종말론은 그 종말의 때가 미래에 있고 현재의 세계는 부정과 불의가 판치는 시대이므로 어떻게 신자로서의 삶을 유지하느냐가 중요하다. 이러한 신앙적 양태는 섬김, 복종, 윤리등을 강조하지만 점차로 세계에 대한 관심을 끊고 (세계는 불의하고 그것을 해결하러 예수님이 언젠가는 오실 것이기 때문에) 자기 공동체 안에서의 섬김, 복종, 윤리로 변질된다. 어떻게 구원의 상태를 유지하느냐가 중요하므로 한편에서는 여러 법적 요소가 강조된다. 여기서 법이란 신앙생활의 형식을 규정하는 모든 것이다.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하며, 헌금은 어떻게, 목사가 되려면 어떻게, 교회는 어떻게등등 여러 형식과 규정이 강조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영적생활, 즉 어떻게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길수 있는 자기 개발이 강조된다. 이러한 신앙과 신학은 세월호에 대해 윤리적 비판을 쏟아놓거나 세상의 죄와 불의에 대한 준엄한 심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그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자신들은 선하며, 선택받았으며, 구별된 공동체라는 자부심이다. 법과 금욕을 통해 더 나은 영적 도덕성을 개발하지만 자신들 안에 들어선 교만과 위선은 보지못하고 철저한 선함만을 강조하는 율법적 몽학선생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바울의 종말론에서 본 구원과 부활

    슈바이처가 구원에 대한 두개의 기둥, 즉 믿음으로 얻는 의와 종말론적 참여(Being-in Christ)를 구분하여 다룬 것을 기억할 것이다. 둘을 분리한 가장 큰 이유는 둘의 관점, 율법주의를 넘어선 의와 윤리적 참여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며 슈바이처는 이 둘을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바울을 종합하려 하였다. (슈바이처장 참고) 그러나 케제만은 바울 신학의 핵심을 이 둘을 변증법적으로 돌파하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케제만이 본 이 둘 사이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바울의 해법은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이것이 케제만의 바울연구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케제만의 말을 빌자면, 첫째로는 “바울의 신학을 ‘기독교 열광주의’와 ‘유대적 묵시주의’로 부터 구별하는 것은 불경건한 자(또는 불의한자)를 의롭게 하는 신학에 담긴 약속을 전례에 없이 과격하게 보편화한 것이다.[각주:14]” 이를 바꾸어 말하면 바울의 ‘이신칭의’는 오로지 종말론적 관점에서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앞에서 그 어떤 기득권도 특정한 유산도 인정하지 않는 급진적인 하나님의 의가 바로 믿지 않는 자, 또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또는 정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를 바울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한 이유는 바로 종말론적 구원의 시작이 개인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시작되었고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힘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구원이 신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바울은 부정하지 않는다.[각주:15]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인 것은 명확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의는 개인에게 따로 따로 개인의 믿음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편적으로 온 세계에 새로운 창조로 시작되었다고 바울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여기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란 말이 왜 필요할까? 아니 그것은 바울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이 질문은 조금만 아껴두자 잠시후에 설명할 것이다. 바울은 어떻게 두개의 서로 다른 종말론을 그의 신학안에서 극복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란 무엇인가를 길게 논의하는 데, 바로 바울의 종말론이 종합되는 부분이다. 즉 부활이란 카드를 꺼냄으로써 현재적 종말론의 허구성을 고발한다. 현재적 종말론의 입장 또는 영열광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래의 부활은 중요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거부될 수 밖에 없다.[각주:16] 언뜻 보면 다른 것 같지만 현시대에서 영적 체험을 통해 한순간의 변화를 말한다거나 영적인 사람이 되었으므로 마치 죄악과는 단절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식의 생각이 현재적 종말론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현시대의 엄연히 존재하는 모순을 무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을 일개 개인의 정신적 영역으로 한정하는데에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적 종말론이 강조되면 될수록, 그리스도안의 새로운 피조물이 겪어야하는 세상의 모순과 죄에 대한 질문은 늘어만 갈 것이라는 것이다. 마치 '왜 세월호와 같은 비극이 이 시대, 또한 신자에게도 일어나는가?'에 대한 질문을 영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해소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영혼은 중요하고 몸은 세계에 속하여 중요하지 않다는 헬레니즘적 사고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헬레니즘적, 또는 신플라톤주의에 교회가 젖어들어가게 되면, 실제로 현실이 그러한데, 예수의 재림이나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등은 그 의미를 점점 잃어가고 구원받은 자와 멸망받을 자의 구분만이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항하는 바울은 부활의 그 어떤 현재적 의미도 부정한다.[각주:17] 필자는 이런 케제만의 논의에 동의하는데, 고린도전서 15장의 내용이 그러하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였으나 그 부활 사건은 현재의 신자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시대를 살아가는 신자에게 하나님의 의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죄의 권력아래 있는 세계의 마지막 희망, 주님의 몸된 교회

    부활을 미래의 사건으로 미루어 놓은 바울은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새로운 복종’을 제시한다. 바울은 십자가에 참여함이 바로 부활에 참여함을 말하지만 부활은 미래의 사건으로 세계의 모든 권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옮겨갔을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 (고전 15:23-24) 이 새로운 관점이 바로 바울의 종말론을 그 이전의 묵시적 종말론과 현재적 종말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만들게 된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 제한되어 있다. 그 시작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그 완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완성은 오로지 이 세계의 죽음이 완전히 사라질때에, 죽음의 권력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정복될 때만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 죽음을 이기는 권세의 시작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세계가 아직 죄악으로 가득차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이 현실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가? 케제만이 말하는 바울에 의하면, 바로 교회안에서, 죽음을 제외한 모든 세상의 권력은 바로 주님의 몸된 교회안에서 그 힘을 잊어버리게 된다. 비록 여전히 그 권력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만 말이다.[각주:18] 그러므로 우리가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몸된 교회는 세상의 한 부분이면서도 유일하게 세계안의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나타내는 통로이자 표시가 된다. 바로 바울이 그토록 많은 서신의 지면을 통해 강조하였던 하나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가장 중요한 바울 신학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몸(Body)라고 표현된 이유는 바로 이 몸을 통하여 세계와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고 이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를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각주:19] 오로지 이 몸은 하나님에 대한 ‘복종’(obedience)을 통하여 세계에 하나님의 통치를 현시한다. 다시 말하면, 복음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인간의 몸이 모여서 그들이 하나의 몸임을 고백하고 세상의 모든 권력과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에 뜻에 대한 복종을 통해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보여줄 수 있을때에, 그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볼 수 있을때에 부활의 소망이 여전히 의미있는 구원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 (헌신, 복종)으로 얻는 의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세월호,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 것인가?

    불트만과는 달리 케제만에게 바울은 매우 정치적인 인물이다. 근대적, 개인주의적 인간의 구원을 말한 불트만과는 달리 케제만은 바울에게 구원이란 개인의 영적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낼때야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몸을 통하여 세상과 소통한다. 몸을 통해 먹고, 마시고, 울고, 웃고, 슬퍼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고 사랑을 한다. 또한 몸은 언제나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 타인에 의해 우리의 몸은 또한 몸으로 기능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세계속에 속한 우리의 몸은 또한 세계의 권력에 노출되어 끊임없이 유혹받으며 조종당한다. 바울은 개인의 몸은 너무나 연약하기에 언제나 공동체로서의 몸을 강조한다. (고전 12:14-26) 서로의 차이를 넘어 연대함으로 '한 몸'이 된 공동체는 세상의 불의와 대적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 그러기에 바울의 구원은 매우 정치적이다. 우리의 공동체의 누군가가 슬픔에 빠져 있을때 그 공동체가 기뻐할 수 있을까? 한 몸의 아픔의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이의 아픔이 될때에야만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설 수있을 것이다. 세월호의 비극이 자신의 비극이 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그저 슬퍼하며 위로하는 것으로 교회는 그 역할을 감당했다 할 수 없다. 몸은 세계의 한 부분이기에 그 비극이 일상이 되는 현장에서 몸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낼 수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나는 세월호의 아이들이 부활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꽃과 같은 나이에 죽어간 그들이 아름다운 육신으로 다시 부활하여 그 몸을 가지고 기쁨과 행복을 다시금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케제만의 바울에 의하면 그들의 부활은 바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내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정의에 복종하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가는 교회에 오로지 달렸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일생을 진정한 교회를 세우는데 바쳤다. 주님의 공동체가 그 빛을 잃는다면 그리스도의 소망도 빛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시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비추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부활을 소망을 안겨다 주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러한 소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현대의 교회에 준엄한 비판을 가하며 신자유주의로 물들어 새로운 희생자를 찾는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시키는 길이 바로 그들의 부활을 이루어내는 일일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부활을 약속하며 종래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승리를 소망하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원래 그 이전에 한스 콘첼만(Hans Conzelmann)이 한 말이다. [본문으로]
  2. Ernst Kasemann, Perspectives on Paul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1), 12–14. [본문으로]
  3. Ibid., 10. [본문으로]
  4. Ibid., 17. [본문으로]
  5. Ibid., 28.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7. Ibid., 31. [본문으로]
  8. Ernst Käsemann, New Testament Questions of Today, trans. W. J. Montague, New edition edition. (Philadelphia: Augsburg Fortress Publishing, 1979), 15. [본문으로]
  9. R. Barry Matlock, Unveiling the Apocalyptic Paul Pauls Int: Paul’s Interpreters and the Rhetoric of Criticism (Sheffield, England: Sheffield, 1996), 190. [본문으로]
  10. 물론 그 이후에 다시금 제2차, 제3차 역사적 예수연구가 미국학계를 중심으로 다시 일어나게 된다. [본문으로]
  11. Käsemann, New Testament Questions of Today, 98. [본문으로]
  12. Ibid., 105. [본문으로]
  13. Ibid., 171-172. [본문으로]
  14. Ibid., 178. [본문으로]
  15. Ibid., 181. [본문으로]
  16. Ibid., 126. [본문으로]
  17. Ibid., 207. [본문으로]
  18. Ibid., 134. [본문으로]
  19. Ibid., 13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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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Sex & Sexuality – 사회적 신분과 성적 역할



송민원
(시카고 대학 고대근동학과 Ph.D. Candidate)


 




  머릿말 - 고대근동의 Sex & Sexuality 연재를 시작하며

  

      “고대근동의 Sex & Sexuality”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단순합니다. 구약과 고대근동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보수신학뿐 아니라 소위 진보신학이라 불리는 진영에서조차 무분별하게 고대근동의 자료들을 전용하는 게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백인의 눈으로 성경을 읽어왔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알려준 해방신학의 기여에 무한한 경의를 표하면서도, “바알 = 맘몬 = 물질숭배 = 제국주의”로 이어지는 해방신학의 도식이, 우가릿어로 된 바알 숭배자들의 글을 읽은 사람의 눈엔 많이 불편해보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은 우리나라의 김제 평야나 남캘리포니아에 비하면 그야말로 척박하기 그지 없습니다. 바알의 “풍요”는 그저 제 때 비가 와 주고, 갓 태어난 아이들이 좀 덜 죽기를 바라는 부모의 간절하지만 소박한 바램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알의 “번영신학”을 20세기나 21세기로 그대로 끌고 올 수는 없습니다. 당시의 “제국”은 이 시대의 제국들의 동의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요즘 많이 논의되는 퀴어비평이나 동성결혼 합법화 논란 등에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 고대근동의 동성 간의 성적 행위를 21세기의 LGBTQI와 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그 고리가 무척 빈약합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와는 시-공간적, 문화적 배경이 많이 다른 성서의 언표들을 지금 시대에 직접 적용할 수 없는 것처럼, 고대근동의 문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부터 헬레니즘과 비잔틴에 이르는 씨줄과, 또한 고대근동과 고대 이스라엘로부터 유대교와 랍비문헌으로 이어지는 날줄 사이에서, 시대별로 얽히고 풀어지는 지점들을 잘 이해해야만 성경을 비롯한 고대 문헌들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의 여러 다양한 삶의 측면들 중 특별히 “Sex & Sexuality”라는 주제를 정한 이유 역시 단순합니다. 자극적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교회와 신학계에서 진보와 보수의 전선이 (Homo-)Sexuality 문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시사적”인 자극성에다,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의 삶과 문화 근간에 흐르는 어쩌면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테마(중 하나)라는 “비시사적/몰시사적”인 형이하학적 자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연재는 동성애, 여성성, 순결(처녀성), 남과 여 등 고대인들의 인간관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계획입니다. 최대한 많은 일차자료들을 소개함으로써 앞으로의 신학논의를 좀 더 정교하고 풍성하게 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1. 고대 그리스의 Sex & Sexuality – 사회적 신분과 성적 역할  



“행복하여라, 나체로 운동을 한 후 집에 가서 아름다운 소년과 하루종일 잠을 자는 사람이여”
(메가라의 테오그니스, 기원전 6세기)



      역사의 어느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결혼” 혹은 그에 준하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공간 안에서의 성인 남녀 간의 성적 결합을 금기시하는 사회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재생산을 통한 그 사회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이를 제외하고, 한 사회의 성개념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용인된 “정상”이라는 범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연 그 사회가 무엇에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찍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럼, 다음의 예에 있는 사람들 간에 성적 결합이 있을 경우, 고대 그리스에서 “비정상적인” 성행위로 간주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1) 25세 미혼남성과 15세 소년
      2) 25세 미혼남성과 25세 미혼남성
      3) 35세 기혼남성과 25세 미혼남성
      4) 17세 소년과 13세 소년
      5) 여성과 여성
      6) 그리스 남성과 외국 여성 


      고대 그리스의 세계가 각 도시국가로 나뉘어져 있는데다 시간적으로도 천 년에 이르는 세월에 걸쳐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단순하게 답을 할 수는 없습니다만, 고대 아테네의 경우, 이 여섯가지의 예들 중 사회적 용인된 “정상적인” 관계는 1번뿐, 나머지는 “비정상적”입니다.
       현대적 개념의 소아성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고대 그리스의 Sex & Sexuality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를 알아야 하는데요, 하나는 그리스 남성의 나이에 따른 사회적 위치(status) 변화, 그리고 각 사회적 위치에 부여된 성적 역할입니다.[각주:1] 고대 그리스의 남자 아이는 대략 12세부터 18세까지 “소년”으로 분류되고, 그 이후 18세부터 30세까지는 “미혼 성인”입니다. 보통 서른에 결혼을 해서 “기혼 남성”으로서 그리스 시민사회의 당당한 한 주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주체”로서의 자유시민은 성적 역할에서도 주체적입니다. 그리고 여성이나 소년은 비주체적인 사회적 신분으로, 성적 역할에서도 수동적입니다. 이것을 Kenneth Dover는 “에라테스(ἐραστής)”와 “에로메노스(ἐρώμενος)”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에라테스는 우리말로 “사랑을 주는 자”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고, 에로메노스는 수동형으로 “사랑을 받는 자” 정도 될 수 있겠습니다(K. J. Dover, 1978). 성 관계에서 에라테스는 “삽입하는 자”, 에로메노스는 “받아들이는 자”로 이해됩니다. 


<에라테스와 에로메노스>

      고대 그리스의 남자아이에게 에로메노스로부터 에라테스로 성장해 가는 과정은 사회의 주체가 되기 위한 교육의 과정입니다. 십대 소년은 에로메노스의 수동적 역할을 충실히 배움으로써, 그 이후 에라테스의 주체적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수동적 에로메노스 단계를 거친 십대 소년은 이십대가 되면 에라테스의 역할을 부여받게 되어, 그 자신의 에로메노스를 갖게 됩니다.[각주:2] 이십대 청년의 이 동성 간의 관계는 그 자신이 30대가 되어 결혼하게 될 때까지 지속됩니다. 즉, 고대 그리스의 소년과 청년시절의 동성 관계는 “진정한 남자”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므로 에로메노스의 단계를 벗어난 에라테스가 계속해서 에로메노스의 역할을 하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수동적인” 성적 역할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키나이도스(κίναιδος)”라고 불리웠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남성적 역할을 포기하고 “여성화”된 사람으로서,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별종” 혹은 “타자”로 이해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주체로서의 자유시민이 될 수 없던 여성은, 성적 역할에서도 결코 에라테스가 될 수 없는 영원한 에로메노스였습니다. 그러므로 여성 간의 관계는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어느 누군가는 에라테스의 역할을 해야했기 때문입니다. [각주:3]

      또한 외국인의 경우, 상대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바람직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에라테스-에로메노스는 그리스의 자유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과정이지, 결코 외국인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외국인을 “바바리안”이라 부르며, 그들을 태어나면서부터 열등한 민족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그들과의 동성 관계뿐 아니라 이성 간의 혼인마저도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리스 자유시민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자신의 신분을 낮추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이렇듯 고대 그리스 세계의 동성 간의 성적 관계는 지금 이 시대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Sex & Sexuality는 바로 다음 이어지는 로마 시대의 그것과도 세밀한 부분에서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고대 로마의 Sex & Sexuality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문헌>
    Davidson, J. (2001) “Dover, Foucault and Greek Homosexuality: Penetration and the Truth of Sex,” in Past and Present 170: 3-51.
    Davidson, J. (2007), The Greeks and Greek Love: A Radical Reappraisal of Homosexuality in Ancient Greece, London.
    Devereux, G. (1967), “Greek Pseudo-Homosexuality and the ‘Greek Miracle’” in Symbolae Osloenses 42: 69-92.
    Dover, K. J. (1978), Greek Homosexuality. London.
    Foucault, M. (1985), The History of Sexuality, vol. 2: The Use of Pleasure, trans. R. Hurley, New York.
    B. Isaac, “Foreigners, Greece and Rome,” in The Encyclopedia of Ancient History, Ec-Ge: 2708-2710.
    Percy, W. A. (1998), Pederasty and Pedagogy in Archaic Greece.


ⓒ 웹진 <제3시대>

  1. 사회적 역할(status)과 sexuality를 연결하는 관점은 G. Devereux(1967)에서 시작해서 K. J. Dover(1978)를 거쳐 M. Foucault(1984)에 이르는 소위 “도버-푸코”모델에서 빌려왔습니다. 여기에 이 관점을 보다 정밀하게 세분화해서 고대 그리스 세계를 정리하려 한 D. M. Halperin까지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이 모델은 고대 그리스의 세계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J. Davidson: 2001, 2007). [본문으로]
  2. 도리안들의 경우 대부분 한 명의 에로메노스를 갖는 반면, 그리스 동부 지역에서는 여러 명의 에로메노스를 갖는 게 보편적이었습니다 (W. A. Percy, 1998: 146-150). [본문으로]
  3. “레즈비언”이란 말을 탄생시킨 레스보스의 사포의 경우나, “삽입”을 전제하지 않은 여성 간의 성행위에 대해서는 이후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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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르바이트




김운영
(한동대학교)




      금요일과 어제인 토요일은 꽤나 정신이 없는 이틀이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4명의 사람들이 금요일 밤 11시부터 토요일 새벽 5시까지 연속 3편의 영화를 밤새도록 관람하는 모 영화관의 기획상영을 같이 관람하기로 예매해두었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약속대로 밤에 만나 여름 더위를 날려버릴 기세의 세 편의 영화를 관람하였습니다. 영화관에 들기 전 문득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보다가 죽으면 어떡하지? 바깥에서 살인 또는 최근 중국 텐진의 화재사고와 같은 사고가 발생해도 속 편하게 영화만 보고 있을 제 모습을 상상하며, 흡사 ‘다른 세계로 입문’하는 듯한 영화관람의 행위가 사람이 잠을 자는 행위와도 유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결국 영화관람을 포함한 나의 모든 행위는, 세상의 다른 무수한 일들과 동시에 실행될 따름이고, 이는 특정한 일과 관련한 나의 선행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를 보든 보지 않든, 또는 사고나 재난을 예방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을 하든 하지 않든, 그 실천과 동시에 발생하는 세계의 또 다른 무수한 사건사고들에 대해서 나는 결국 한낱 잠을 자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저는 조금은 속 편히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거의 6시간 동안의 영화관람 마라톤이 끝난 토요일 이른 아침. 일행들은 모두 얼빠진 몰골로 잠을 청하러 집으로 향했지만, 저는 광화문 광장을 향했습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광화문에서 열리는 ‘광복 70주년 기념행사’ 진행요원 일일 아르바이트에 지원했기 때문입니다. 일급 6만원. 오전만 잘 보내면 썩 짭짤한 편이었습니다. 생각보다 기운은 말짱했고 저는 청계천을 지나 광화문까지 가는 새벽길을 걸어가며 여러 노숙인분들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누워 주무시는 분들, 고개 숙인 채 빈 소주 병을 끼고 있는 모습 등등. 새삼 노숙인분들을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이미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지도 모르는 삶의 한 ‘풍경’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나는 그분들이라는 풍경을 감상에 젖기 위한 촉매제로 활용해왔나, 하는 의혹이 마음 속에서 재차 제기되고 있을 즈음에, 어떤 노숙자 한 분의 행동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분께선 제 앞으로 걸어가면서 공중전화 부스를 하나씩 하나씩 체크하고 계셨습니다. 공중전화 하단에 거스름돈 반환구를 하나하나 검지손가락으로 까딱까딱 건들이며 남겨진 동전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 오락실 기기 주변을 기웃거리며 떨어진 동전이 있나 확인하던 나와 내 친구들처럼 말입니다. 그 쏜살같은 검지손가락의 까딱거림이 다시 나를 한낱 감상에 젖도록 하는 촉매제가 됩니다. 온 몸을 덮은 누더기 같은 복장을 뚫고 나온 그 검지손가락의 거친 살결이 유독 눈에 들어왔던 것이었겠지요. 한편 저는 누더기가 아닌 깔끔한 바지와 티를 입고 정부가 주관하는 국가 행사의 진행요원이 되어 6만원의 생활비를 충당할 권리를 누리며 광화문으로 출근을 합니다. ‘나도 가난한 대학생이잖아. 생활비는 벌어야지.’ 라고 생각하며 말입니다. 조금은 속이 편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광화문에서의 광복절행사 아르바이트가 끝날 무렵입니다. 제 속엔 한 가지 단어가 떠오릅니다. ‘거짓말’…… 저편 광장 끄트머리에 분리된 채 잊혀진 ‘세월호’ 부스, 중앙광장을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장시간의 기다림 속에서 여러 인파가 동원되어 만들어진 인간 태극기, 개그맨 출신 사회자에 의해 무수히 연습되고 반복되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라는 구호. 인간 파도타기. 그리고 하이라이트. 광장 저편으로는 결코 다가온 적 없었던 현직 대통령의 서프라이즈 등장과 그의 인간 파도타기 속으로의 합류. 그 화려한 퍼포먼스에 환호하는 사람들의 함성. 그리고 때맞춰 하늘로 쏘아지는 풍선들. 그 풍선들에 적혀 있는 ‘창조경제’라는 말. 거짓말. 어쩌면 저 대통령의 눈엔, 아니 거기 있던 대부분 사람들의 눈엔, 태극기 인파에 가리워 보이지 않는 광장 끄트머리의 세월호 부스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 한낱 감상을 불러 일으키는 풍경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가끔씩 애처로운 검지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옛 추억을 부활시키는 풍경 말입니다……


      대통령의 영화 같은 퍼포먼스가 펼쳐진 광화문 광장을 목도하며 앞서 가졌던 ‘영화 보다가 죽으면 어떡하지?’라는 의문을 다르게 변주해봅니다. ‘죽음의 자리마저 거짓말 같은 영화로 덮여 버리면 어떡하지……


      바깥 세계와 분리된 채 영화를 보는 것처럼, 우리의 실천의 한낱 ‘잠을 자는 것’과 같은 외피를 벗어내기란 결국 불가능한 일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영화 같은 자리에서 무력함은 너무나 쉽게 찾아옵니다. 그 노숙인의 까딱거리는 손가락처럼 시시때때로 나를 건드리는 무력함. 빈 반환구처럼 앞뒤로 흔들리다 이내 멈추는 그 무력함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무력함을 견뎌 나갈 힘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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