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지나가는 길 Single Channel Video, 6′15″, 2004





2004년, 민족의 대 명절인 추석날 밤, 나는 비무장지대로 향했다. 

마침, 날도 좋아 휘영청 떠 오른 달이 보여서 뜨고 지는 달의 길을 동영상으로 담았다. 

한가위 대보름달은 남쪽과 북쪽 할 것 없이 우리 한민족의 달이다. 

한 날 한 시에 똑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 달은 그러나 슬픈 달이기도 하다. 

남과 북은 아직 다른 길에 서 있기 때문이다. 

공간에서 들려오는 베토벤의 월광소나타는 그런 슬픈 애린의 마음이다. 


 


 

박준식 作 (사진작가)


- 작가소개

독일 베를린 조형예술 대학교(U.d.K) 마이스터 졸업, 현재 성신여대에 출강하면서 경기창작센터 입주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많은 개인전과 단체전을 치루었는데, 근래 비무장지대(DMZ)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인상적이다. 2012년 DMZ 대성동 자유마을에서 '경계를 넘어서'라는 작품전을 기획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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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5.10.05 07:2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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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진 70호가 발간되었습니다. DMZ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하는 박준식 작가의 영상에세이 <달이 지나가는 길>은 월광의 선율과 함께 제목 그대로 달이 지나가는 궤적을 따라갑니다. 많은 울림이 있는 작품입니다 (불꺼놓고 와인한잔 하며 즐감 하기에 제격임!).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에서 공부하고 있는 황용연님이 오래간만에 글을 보내왔네요. 민중신학에 대한 최근 그의 시선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상호문화신학(Intercultural Theology)으로 논문을 쓰고 있는 정나진 선생의 원고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난민문제에 대한 성찰을 우리들에게 제공합니다. 언어학과 신학을 공부한 심법섭님의 글을 통해서는 텍스트 읽기의 경계를 뛰어넘는 자유분방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한백교회 내 사진집단 ‘눈숨’ 소속 작가 이수만님의 사진에세이는 우리의 비루하고 남루한 마음을 향해 바치는 레퀴엠적인 성격이 베어 있습니다. 원고 하나하나 찬찬히 읽어주십시오. <편집자>


내 마음은 접경지대(Frontier Distirics)

① Prologue - 지구화시대, 황새들과 함께 살기




정나진



      ‘난민’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특별히 ‘시리아’ 난민들에 관한 뉴스가 연일 언론매체에 등장하고 있다.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죽음 이후 일이다. 아일란의 죽음은 역사적 죽음이 되었다. 그후 유럽연합은 지지부진하던 ‘난민쿼터제(유럽연합 회원국의 인구와 경제력 등에 따라 난민을 강제로 할당하는 제도)’ 시행에 합의했고, 난민 추가 수용 불가 입장이었던 영국의 총리도 “시리아 유엔 캠프에 있는 난민 수천 명을 추가로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개개인들의 관심 또한 높아졌다. 시민들은 난민 루트에 서서 “웰컴”이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환영하기도 하고 축구팀은 “Wir helfen(우리가 돕겠습니다)”이라는 완장을 차고 경기를 뛰기도 했다(독일의 대표적인 우파 잡지 <Bild>의 파퓰리즘적 후원 광고라는 비난이 거세지만). ‘난민’이라는 단어 자체를 낯설어하던 지구 반대편의 한국에서도 ‘국내 난민 신청 승인 빈도와 난민들의 처우’ 등에 관한 분석과 르포 기사가 빈번해졌다. 

터키의 해변에서 발견된 세 살 아기 

난민 아일란 쿠르디(Eilan Kurdi) 를 추모하며 

(그림의 글씨 내용은 터키어로 

“인권이 더 이상 유린되어서는 안된다!”)




            독일 뮌헨의 한 역 앞에서 난민들을 환영하고 있는 독일 시민들                     독일 분데스리가 축구팀이 차고 있는 "Wir helfen" 완장

                              (출처 : 짤쯔부르쿠자이퉁)


      난민의 비극적 희생은 계속 있어왔다. 아일란의 죽음 한 주 전에는 역시 시리아 난민들로 추정되는 71구의 시신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지대의 버려진 냉동차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 시신들 중에는 4명의 아동도 있었다. 브로커들을 통해 무리하게(사실 자국으로부터의 탈출을 선택한 이후 무리하지 않은 루트는 없다) 탈출하다 배가 전복하는 등의 사고로 수십,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달리하는 일들도 빈번히 있어왔다. 북아프리카에서 유럽까지의 가장 짧은 루트인 일부 지중해 구간은 사고가 하도 많이 나서 ‘통곡의 바다’, ‘난민들의 무덤’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이다. 내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유로 동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등지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은 정착국에 와서 난민 지위를 받기까지 수많은 위험과 생존의 위기를 겪기 마련이다. 최근 들어 이러한 난민들에 대한 관심이 점점 식어가고 처우 또한 미비해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세 살배기 난민 아일란의 조용해보이는 듯 하지만 그래서 더 충격적이고 처참했던 죽음은, 난민들을 서로에게 떠밀기에 바빴던 유럽 각국에게, 또 일상의 거리에서 난민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개인들에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엄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난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그동안 지각하지 못했던 일상이라는 그림의 ‘난민’이라는 배경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에 대한 갑작스런 자각의 표출일 것이다.  




  그런데 실은 이주국에서 ‘난민’이 ‘난민’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고 정착을 하기까지는 참으로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국제협약 상의 ‘난민’에 대한 규정[각주:1]부터가 그 판단을 모호하게 한다. 규정에 따르면 난민은 망명자인데,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인 박해로부터의 망명의 이유를 가져야 한다. 자국으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한 난민은 1차적으로는 차별 없이 난민보호소에 가게 되겠지만, 거기서 망명 신청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자국에서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인 이유들 중 하나로 박해를 받았다는 지난한 자기변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들은 이주국의 주관에 따라 난민 지위 획득 적격자/부적격자로 판단된다.(난민 자격 획득의 문은 종종 이주국의 예산과 사회분위기 등의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커지기도 좁아지기도 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독일이 난민의 급속한 유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난민 수용 방안을 다시 정하고 있다는 기사가 새로 뜨고 있다.[각주:2])


                 북아프리카에서 바라본 유럽의 모습

   (‘2006 세계보도사진전’ 사진 부문 1등 작품 ‘빛과 그림자’)


       난민 지위를 인정 받았다 해도 그 사회에서 어울려 살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미 난민을 대하는 사회적 시선은 시작부터 따가울 때가 많다. 수없이 떠도는 이주자들 중에 도대체 어디까지가 ‘난민’인가 하는 물음을 묻는 순간, 눈앞의 난민에 대한 관심과 관용은 멈칫하게 된다. 연민과 관용은 보통은 ‘나보다’ 불쌍하고 처참함 앞에서만 발휘되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 보는 터키 해변가의 아기의 사진과는 달리, 내 삶의 현실 영역에서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이방인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냉정해지기 일쑤이다. 내가 낸 세금이 허비되고, 나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존재는 아닌지, 더 나아가서 그들이 정말로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라 박해를 피해 온 자들인지 그들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심사한다. 난민을 비꼬는 말로 ‘이주쇼핑’이라는 말이 있다. 현대의 난민들은 이동하면서 어디가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보호국이 될지 정보를 얻으며 움직인다. 과거의 보트피플이 일단 바다로 나가서 외국국적의 배를 무작정 기다렸던 때와는 달리, 요즘에는 GPS와 핸드폰으로, 그리고 산업화된 브로커들을 통해 그러한 정보를 확인하고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시선과 문화적 이방인으로서의 여러 제약들은 그들이 사회 안에 쉽게 어우러지지 못하게 하고, 결국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뭉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일종의 게토 현상에 대해 사회는 또다시 그 그룹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가지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남쪽으로 날아가는 황새 두 마리(사진: 김성호(한겨레신문))


    얼마 전 신문에서 충남 예산에서 멸종 위기에 놓인 황새를 다시 번식시키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는 기사[각주:3]를 읽은 적이 있다. 흥미로웠던 것은 황새의 습성과 황새가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의미였다. 텃새이면서 철새이기도 한 황새는 한국전쟁을 치르며 아름드리 나무가 많이 파괴되어 둥지를 틀 곳이 적어지고,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이 늘면서 환경이 파괴되어 그 수가 점점 더 줄어들다가, 1971년을 끝으로 멸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해 황새는 일본에서도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다.(텃새인 황새는 한국과 일본을 한 터전으로 삼으며, 때로는 철새로 조금 멀리 러시아 연해주 지방 등지에서 날아오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황새를 복원하는 일이 곧 전원생태계를 복원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황새는 날개를 펴면 2미터나 되는 먹이 피라미드의 최상위 포자식자[각주:4]로, 생물다양성이 풍부해야만 서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황새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황새를 방사하는 것을 넘어 농약을 쓰지 않는 생태적인 농사를 지어야 하고, 하천이나 습지 같은 자연환경도 친환경적으로 조성해야 한다. 결국 황새가 살고 있다는 것은 그 지역의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지 않고 다른 다양한 종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뜻이며 황새의 야생복귀는 황새 뿐만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건강한 자연 환경 전체를 만드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황새 이야기를 읽으며, 난민을 포함한 이주자들이 곧 황새 같은 존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난 이들이 선택해서 찾아온 곳이라면, 어느 정도는 그만큼의 가치가 이루어진 사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황새가 사는 마을이 풍요로운 생태계의 상징인 것처럼 이주자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사회 또한 풍요와 환대의 표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의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마치 황새가 완전히 정착하기 위해서 단순한 황새 방사를 넘어서서 생태계 복원이 먼저 되어야 되는 것처럼, 더 나은 삶을 위해 온 이주자들이 자국민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제도적 장치와 함께, 이주자들에 대한 자국민들의 시선과 의식도 함께 변해가야 할 것이다.  

      세 살 배기 난민 아기의 죽음에 눈물을 흘릴 관용과 연민의 준비가 된 마음이라면, ‘타인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 적대[각주:5]’일 때 그 반대로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인 환대는 출생과 더불어 사람이 되는 모든 인간 생명에게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각주:6]여야 한다. 난민 ‘조차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 국가적 상황에서,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제도적 난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 일상에서 만나는 개인의 삶에게라도 한 발짝 나아간 질문을 하고 싶다. 왜 ‘난민만’ 받아들여야 하는가? 나(우리)는 타자의 욕망의 실현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고 판단할 자격이 있을 만큼 (하늘 아래) 타자에 대한 존재 우위를 가지고 있는가?  

      독일의 지르마르 가브리엘 부총리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난민들에 대한 대응과 정착에 대한 정책을 이야기하면서 ‘위대한 도전’이라고 표현했다. 그 도전은 정책과 제도를 넘어서는 환대와 통합[각주:7]의 문제를 포함한 것일 것이다. 환대와 통합의 문제는 제도와 정책이라는 거시적인 내용도 포함하겠지만, 그러나 시작은 개인이 마주치는 일상적인 미시의 공간에서부터일 것이다. 2009년 이후 한국 정부에 망명을 신청한 이가 만이천여명이나 된다. (그러나 그들 중 4.2% 만이 난민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한국에는 이미 약 200만 명의 이주민이 살고 있으며 이제는 길에서 외국인을 만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언젠가는 어쩌면 지구화된 세계 속에서 어느 곳의 이주민이 될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우리는 지구화 시대 ‘황새’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 준비가 되어 있는가?  


* 필자소개

  글쓴이는 상호문화신학(Intercultural Theology)을 전공으로 지구화, 공간, 이주 등에 관심하며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고민하고 있다. 사람들과 오순도순 함께 사는 것이 꿈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의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이거나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위험 때문에 국적국 외에 있는 자로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자, 또는 받을 것을 희망하지 않는 자, 및 상거소(常居所)를 가지고 있던 국가 외에 있는 무적 국자로 그 국가에 돌아갈 수 없는 자, 또는 돌아가기를 희망하지 않는 자(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IA(2) 참조) [본문으로]
  2. http://news1.kr/articles/?2447094 [본문으로]
  3. “조홍섭의 물바람 숲: 황해도 연백평야에도 황새 복원을”, 한겨레신문, 2015년 9월 14일자. [본문으로]
  4. Berger의 종의 분류(1997)에 따르면 우산종(umbrella Species)이라 한다. 몸집이 큰 종이 필요로 하는 면적의 서식지를 보전함으로서 그 서식지에 함께 살고 있는 수가 많고 크기가 작은 다른 종들이 자연적으로 함께 서식할 수 있으므로 종 다양성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새로운 개념이다. [본문으로]
  5. Karl Smith, 『정치적인 것의 개념』, 7장 정치이론과 인간론 [본문으로]
  6.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209쪽. [본문으로]
  7. 사실 ‘통합(Integr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조차도 불편하다. 그동안의 대부분의 다문화 정책의 내용이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동화(assimilation)’를 요구해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서로의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뒤섞임’을 뜻하는 우리말 ‘어우러짐’을 지향하고 싶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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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이 '신학'이며 '한국적'인가?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원래 이 글의 제목은 민중신학이 성립되던 초기에 나온 민중신학 비판 글의 제목이었다. 당연히 저런 질문을 던져 놓고 긍정적으로 답을 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저 글의 내용이야 굳이 돌아볼 필요가 없다 치더라도 저 글의 제목에는 뜯어 볼 것이 조금은 있다. 비판 글을 쓰면서 제목을 저렇게 달았다는 것은 ‘신학’과 ‘한국적’이라는 요소가 민중신학의 핵심 요소라고 봐서 그것을 비판하기 위함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민중신학은 좋든 싫든 간에 ‘한국적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니, 저 비판 글을 쓴 사람이 헛다리 짚은 것만은 아니었을 수 있겠고. 

    그렇다면 저 질문에 대해서 적절한 답은 어떤 것일까. 과연 민중신학은 어떤 의미에서 ‘신학’인 것이고, 또 어떤 의미에서 ‘한국적’인 것일까.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나와 있는 답들이 있다. 민중의 고난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그것을 증언했기에 ‘신학’이며, 특히 한국 민중의 고난에 주목하고 그 고난의 흔적을 한국 특유의 개념(대표적인 예로 ‘한’)과 문화 유산 등에서 발견해 냈기에 ‘한국적’이라고. 이러한 답들이 물론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 글에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위의 질문들에 접근해 보려 한다. 


    2. 

    우선 민중신학이 ‘신학’인가라는 질문부터 뜯어 보기로 한다면, 이 질문에 따라올 수 있는 다른 질문이 있을 것이다. 과연 ‘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길래 민중신학은 스스로를 ‘신학’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그냥 놔 두면 사방팔방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다할 수 있게 될 테니 일단 여기서는 ‘구원’이라는 한 가지 지점에 집중하기로 한다. 즉, 구원에 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민중신학은 구원에 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보통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민중메시아론’이라는 용어로 집약된다. 이 용어는 통속적으로는 “(예수와 동일한) 민중이 메시아다” 혹은 “(예수가 아니라) 민중이 메시아다”라고 이해되며, 그 때문에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민중신학이 과연 신학 맞냐는 보수적 비난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이런 비난에 대한 민중신학자들의 대답은 일반적으로는 ‘사건’이란 용어를 도입해 “민중메시아론은 민중사건이 메시아적 사건, 즉 구원사건이라는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민중이 메시아다”라고 말하건, “민중사건이 메시아적 사건”이라고 말하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할 때 과연 ‘메시아’란, 즉, ‘구원’이란 무엇이냐고 말이다.

     민중신학의 태두 서남동 목사는 일찍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 사람이 누구겠냐고 말이다. 그리고 서남동 목사 자신은 그 대답을 ‘강도 만난 사람’이라고 한다. 이와 비슷한 말을 민중신학의 다른 태두인 안병무 박사도 한 바 있다. 자신은 그리스도가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이가 아니라 비명을 지르는 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이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이럴 터이다. 민중신학이 말하는 ‘구원’은 ‘비명을 질러서 듣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따라오게 마련이다. ‘비명을 질러서 듣게 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구원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말을 바꿔 본다면, ‘비명을 질러서 듣게 하는 것’이 구원이라면, 이 때 ‘구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서남동 목사의 말을 빌리면, ‘강도 만난 사람’은 ‘제사장’, ‘레위 사람’, ‘사마리아 사람’을 자신 앞에 불러 세운다. 그리고 그들의 인간됨을 발뺌할 수 없게 드러낸다. 함께 하느냐 외면하느냐. 그래서 각자의 인간성이 실현되느냐 아니면 질식되어 버리느냐.

     이렇게 본다면,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할 때, 구원이란 말은 어떤 ‘성취’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게 된다. 차라리 ‘폭로’와 ‘걸림돌’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와 ‘우리’, 그리고 그 ‘나’와 ‘우리’가 만드는 ‘사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폭로’함으로써, 지금까지 가던 길에 브레이크를 걸게 되는 ‘걸림돌’ 말이다.

     구원을 폭로와 걸림돌로 정의한다면 이러한 구원은 어떤 안정적인 예측과 파악이 가능하다기보다는 갑자기 일어나는 어떤 것이 된다. 그러니 이러한 구원은 앞에서 언급했던 ‘사건’이란 용어를 사용한다면 ‘구원사건’으로 파악될 것인데, ‘사건’으로 파악된다면 그 사건은 사건 참여자들의 속성에 의해 파악되기보다는 그 참여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난 것이 무엇이냐에 의해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민중신학은 그러한 ‘구원사건’을 두고 ‘민중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민중사건’을 ‘신이 현존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민중’이라는 말은 어떠한 ‘집단’으로 이해되고 민중신학 안에도 그러한 이해 경향이 꽤 강하게 있으나, 다른 한 편으로 ‘사건’이란 용어를 도입하게 되면 민중이라는 말을 이러한 사건들에 나타나는 어떤 ‘속성’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최근의 한 민중신학 글에서는 “민중이 누구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민중은 어떻게 출현하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다.

     그렇다면 민중신학이 주목하는/주목해 온 ‘속성으로서의 민중’은 어떤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대체로 합의할 수 있는 대답은 “사회 체제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거부당하기/거부하기”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속성은 복음서에서는 “오클로스”라는 귀속성 상실의 현상으로 나타났고, 1970년에는 경제발전에 일로매진한다던 정부나 민주주의에 일로매진한다던 야당 어느 쪽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해 결국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던 ‘전태일’로 나타났다. 그리고 지금은 “경제력”과 “능력”이라는 정당해 보이는 단어에 의해 ‘배제’라는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무능력자’로 나타나기도 하며, 또는 ‘세월호 사건’이 자신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을 참지 못해 사건의 영향력을 차단하려 하는 정부와 지배자들에 의해 ‘욕심많은 불순분자’로 취급당하는 ‘세월호 유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거부’라는 속성을 문제삼는 것은 곧 ‘거부’라는 현상을 낳은 ‘체제’를 문제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앞에서 지적했듯이 구원이 ‘폭로’와 ‘걸림돌’이 되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리고 ‘체제’를 문제삼는 것은 그 체제에 얽혀 있는 사람들을 문제삼는 것이기도 하다. ‘구원’이라는 것이 특히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죄’와 연관이 있는 것이고, ‘죄’라는 것이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질문이라면, ‘거부’와 ‘체제’와 ‘사람들’을 문제삼는 이 지점은 ‘죄’에 대한 물음이 가능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거부’를 문제삼으면서 ‘죄’의 문제를 묻는다면, ‘거부’함으로써 ‘죄인’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상황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질문은 ‘거부’당한 ‘죄인’과 ‘거부’하는 ‘죄인 아닌 사람’들의 자리를 바꾸어 놓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술이 가능하다. 구원이란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죄가 없음을 알게 되고, 반대로 자신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이러한 구원은 ‘거부당한’ 사람들이 어떤 문제 해결의 능력을 발휘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굳이 ‘능력’을 발휘했다면 차라리 ‘살아남는’ 능력을 발휘한 것일 터이다. 그래서 그들의 ‘살아남음’이 이 세상의 걸림돌이 됨으로써 구원이라는 것이 발생한다는 말일 터이다. 따라서 이렇게 볼 때 ‘민중메시아론’이란, ‘민중’이 예수 ‘대신’ 혹은 예수’와 함께’ 구원의 주체가 된다는 말이라기보다는, 민중이 이 세상의 걸림돌이 되는 방법 말고는 ‘구원’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즉 ‘구원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로 해석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러한 ‘구원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에 뒤따르는 것은 민중신학에 의하면 ‘증언’이다. ‘증언’은 어떠한 일이 일어난 뒤에 나오는 ‘응답’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응답’을 하기로 했다는 것은 이미 그 ‘응답’을 하는 주체의 ‘변화’이기도 하다. 각 사람(그리고 어쩌면 ‘신’까지도)은 이러한 ‘구원사건’과 ‘증언’의 연쇄에 어떤 지점에서는 촉발자로, 어떤 지점에서는 증언자로, 어떤 지점에서는 그 증언을 듣는(그리고 다른 이에게 말하는) 자로 연루될 것이다.


     3.

     민중신학의 ‘신학’성이 이렇게 해명될 수 있다면, 다음으로 ‘한국적’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명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한국적 신학’이라고 할 때, ‘한국적’이란 말의 의미는 어떠한 ‘요소’로 이해되거나, 혹은 신학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표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한국적’이라고 이해되는 어떠한 (주로 문화적인) ‘요소’를 신학에 도입하거나, 혹은 한국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대응의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려 할 때 그것을 ‘한국적 신학’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와 후자가 상호 배타적인 것은 아닐 터이다.

     방금 짚어 본 두 가지 의미에서의 ‘한국적 신학’이란 기준으로 민중신학을 살펴 본다면, 우선 후자의 차원, 즉 한국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대한 대응의 신학적 근거를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민중신학이 ‘한국적 신학’이라는 것은 거의 자명한 수준에 가깝다. 전자의 ‘한국적 요소’에 관련된 차원에서 보더라도, 민중신학이 한국적인 사회 문화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신학에 도입해 온 신학이라는 점에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민중신학은 한국적 요소를 기존의 그리스도교적 요소로 ‘번역’하기보다는 그 자체를 신학의 형성 요소로 삼아 기존의 그리스도교적 요소와 동등한 대당을 이루는 방식(‘두 이야기의 합류’) 혹은 그 둘이 형성하는 또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하는 방식(‘화산맥’)으로 신학을 했다는 점과, ‘한국적 요소’를 찾으려 할 때에도 그 ‘한국적 요소’에서 ‘한국적’이라는 점만 찾아내려 한 것이 아니라 그 요소 안에 담겨 있는 사회적 갈등과 균열의 흔적을 찾아내려 했다는 점은 지적해 둘 가치가 있다.

     ‘한국적’에 대한 이러한 의미의 계보를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적 요소’에 대해서 묻는다면, 지금 현재 ‘한국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예를 들어, 판소리와 소녀시대의 노래 중에서 지금 더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것이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어느 쪽이든 답을 고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한국 사회의 변화와 그 변화의 결과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답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답을 고르든지 간에, ‘한국적’이란 말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한국적인 것’을 찾아내는 것으로 답을 할 수는 없게 되어 있다. 오히려 어떤 것을 ‘한국적인 것’이라고 선언한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어떤 맥락에서 ‘한국적’이며 어떤 효력을 발휘하는가를 해명해내는 것이 ‘한국적인 것’에 대한 답이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앞에서 이야기했던 ‘한국적인 것’의 두 가지 차원, ‘한국적 요소’를 찾는다는 차원과 ‘한국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대한 대응’이라는 차원은 결국 하나로 만나게 된다.

     이 점을 전제한다면, 민중신학이 ‘한국적 신학’인가라는 물음은 이제 이런 물음으로 바뀔 수 있다. 민중신학의 ‘신학성’은 과연 한국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어떤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앞에서 살펴 본 민중신학의 신학성은 ‘성취’와 ‘회복’보다는 ‘폭로’와 ‘걸림돌’에서 구원의 현상을 읽어 내려는 경향에 있었다. 그리고 그 ‘폭로’와 ‘걸림돌’이 겨냥하는 것은 ‘거부’라는 현상을 낳는 체제였고, 그 체제에 연루되어 ‘거부’를 실제로 집행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현재 한국 사회를 파악하는 방식에서, 한국 사회의 갈등에서 어느 편이 옳은 편인지를 식별하고 그 편을 든다는 방식보다는, 그 갈등까지도 ‘거부’를 낳는 한국 사회의 체제의 구성 메커니즘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거부당하는/거부하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탐색하는 방식 쪽이 민중신학의 신학성에 더 친화적이게 된다.

     이제 한국 사회의 문제를 파악하는 가장 흔한 용어 중의 하나가 된 ‘갑을관계’라는 말을 예로 들어 보자. 물론 갑을관계라는 말이 일상적/미시적 관계 안의 권력의 문제를 잘 드러내 주는 말이긴 하며 거시적 권력 관계와의 연관 관계를 드러내는 데에도 상당 부분 효용이 있는 말이긴 하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 ‘갑을관계’라는 말이 애당초 ‘계약관계’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말은 권력 관계의 문제를 바라보는 기본 시각을 “(부당하게 대우받아서는 안 되는) 개인”끼리의 관계로 묶어 두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 “(부당하게 대우받아서는 안 되는) 개인”이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주체성의 변화를 탐색하는 핵심 고리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는 점을 민중신학은 주목해 왔다. 민중신학적 시각에서는, 이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다른 개인과 국가와 거래할 수 있고, 그 거래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안 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민주화의 진전을 말할 수 있으나, 이 민주화가 자본주의의 심화와 동시에 진행됨에 따라 욕망의 거래 구조에 낄 자격이 있는 ‘개인’과 끼기를 거부당하는 사람들이 갈라지는 현상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거부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 ‘불법체류자’, 비정규직을 비롯한 불안정 노동자의 경우(최근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혁’에서 전체 노동자의 경우로 확장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 등 – 이러한 거부를 정당화하는 경향이 상당히 만연해 있기도 하다. 이러한 경향들 속에서 한국 사회의 사람들은 자신이 생존할 수 있는 길로 “(부당하게 대우받아서는 안 되는) 개인”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을 찾기가 힘들다고 점점 더 굳게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한 ‘무능력자’에 대해 성찰한다는 것은 이들을 거부하는 ‘합리적’ 이유 – 경우에 따라서는 그 거부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서 있는 ‘나’조차도 완전히 거부하지는 못하는 – 에 대한 성찰까지를 요구하게 된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이 ‘무능력자’들이 현실적으로 취급받는 방식은, 이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는 – 가령, ‘비정규직’과 ‘양극화’ 등의 언어 자체를 말도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지 않은가 – 오히려 이들을 ‘사회적 문제’로 인지함으로써 “나도 그 문제를 인지하고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라는 개인/체제의 자기정당화의 도구로 활용하는 – 가령, ‘서민’ 혹은 ‘민생문제’라는 단어가 한국 정치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상기해 보자 – 것임을 지적할 수 있다. 최근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는 “노동개혁은 우리 딸과 아들의 일자리입니다”라는 슬로건은 이러한 방식의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점에서 필요한 자세는 ‘무능력자’의 편을 든다기보다는 ‘무능력자’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설령 ‘무능력자’의 편을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능력자의 편은 이렇게 드는 것이다’라는 기존의 입장을 반복한 것인지 아닌지 아니면 앞에서 지적한 ‘구원사건’과 ‘증언’의 연쇄에 들어가 있는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말도 된다. 이렇게 볼 때, 이 ‘무능력자’가 처한 위치가 ‘강도 만난 사람’이 처한 위치와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한다면,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다, 즉 그 사람을 직면한 사람들의 인간성을 드러낸다는 민중신학의 주장은 한국 사회에서 지금까지 써 온 방식대로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러한 효력에 공명이 일어난다면, 그 공명이 일어나는 만큼 민중신학은 ‘한국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민중신학이 ‘신학’이며 ‘한국적’이라는 의미가 이런 것이라면, 이런 신학에서 기대할 수 있는 ‘구원’이란 어쩌면 ‘버티기’에 가까울 것이다. 자신이 ‘강도 만난 사람’ 앞에서 죄인임을/죄인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서 만드는 체제도, 죄인이라고/죄인이 아니라고 바로 받아들여 주는 것이 아닐 테니까 말이다. 아니, 사실 구원이란 것이 근원적으로 ‘약한 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면, 그러한 구원을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말할 수 있는 것은 ‘버티기’를 시작한 이후의 삶이 그 이전의 삶과 결코 같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삶의 크기만큼, 그 삶이 다른 ‘버티는’ 삶과 연결되는 만큼, 다른 이들이 그 삶에 직면하여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구원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구원의 시작이라고, 이 시작점을 거치지 않고는 구원이란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이고, 그렇게 구원을 얻는 ‘한국 사람들’이 존재하므로 ‘한국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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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넘어 삶으로



심범섭



    미국 소설가 헤이븐 키멀(Haven Kimmel 1965 ~ )은 2002년 <일찍 떠남의 위안 (The Solace of Leaving Early)>이라는 작품을 출간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인 랭스턴(Langston)은 서른 살이 다 된 미혼 여성인데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박사 학위 취득 직전에 몹쓸 일을 겪고선 공부를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다. 이제 그가 하는 일은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 다락방에서 시와 소설과 다른 심오한 글을 쓰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마을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어린 두 딸 아이를 둔 젊은 부부가 총기 사고로 죽고 만 것이다. 두 아이는 갑자기 고아가 되었고 이들을 누가 돌보아야할 지 난감한 상태이다. 이때 랭스턴의 어머니가 딸에게 이 두 아이를 적어도 몇 달 동안 돌봐주라고, 시 쓰는 것보다 그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며 강권한다. 랭스턴은 그 일은 자신의 천성에도 안맞고 집필 일정과도 전혀 조화가 안된다고 하며 반발한다. 화가 난 나머지 이제 집을 나가겠다고 소리친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제 울기까지 하는 딸에게 이렇게 말하여 그의 마음을 돌려놓는다.  


하지만 사실 이건 너, 나, 심지어 그 아이들의 문제도 아니야. 이건 인생의 문제야, 랭스턴. 인생이 무턱대고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무게를 견뎌야만 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거야 . . . (But really this isn't about you or me or even those children, it's about life, Langston, the way life just bears down upon us and we are forced to withstand its weight . . .) [각주:1]  


    랭스턴 어머니의 이 말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고아가 된 두 아이를 돌보는 것 같은 큰 일, 당사자의 삶에 크게 간섭하는 일이 그 사람에 관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말에서 쓰이는 부정은 문자 그대로 부정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긍정하는 요소를 강조하고 부각시키는 한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랭스턴 어머니는 삶의 어떤 거역할 수 없는 원리, 개인을 넘어서는 원리를 딸에게 인식시키려는 것이다. 이 원리의 구체적인 내용은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빠져있고 우리가 그를 도울 수 있다면 반드시 도와야 한다’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돕는 반응이 지극히 당연함을 “강요받는다(are forced to)”라는 표현이 전달한다.  

    다른 사람을 돕는 동기가 그의 개인적 특수성이 아니라 삶의 원리라면 이때 돕는 사람의 개인성 또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삶이 본질이 될 때 돕는 ‘나’도 사라지고 도움 받는 ‘너’도 사라진다. 도움은 필요한 곳으로 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물처럼 곧바로 흘러들어갈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양의 옛 철학자 맹자가 제시한,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에 대한 논의를 떠올릴 수 있다.  


사람이 모두 남에게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령 지금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면 깜짝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며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반대로 어린아이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비난을 싫어해서도 아니다.[각주:2]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이 곤란에 처한 것을 보았을 때 반사적으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를 도와주려는 마음이 있다고 맹자는 주장한다. 사람에겐 이런 이타적인 마음의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원리를 랭스턴 어머니의 말을 참조해 삶의 원리라고 이름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맹자가 이런 이타적인 반응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곧 하나의 근본적인 원리로 여기고 있음은 그가 이 가상의 상황에서 아이를 구하는 사람의 동기를 기술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리 이얼리(Lee Yearley)라는 학자가 지적하듯이 맹자는 여기에서 돕는 사람의 동기를 부정적으로 정의한다.[각주:3] 곧 그 사람의 동기가 아닌 것을 나열하지 그 동기를 긍정적으로 집어 말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맹자는 이 동기 자체를 굳이 명시적인 표현을 통해 규정하지 않아도 자신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맹자가 언급하는 세 가지 이유, 곧 새로운 인간 관계 형성, 더 좋은 평판 얻기, 현재 평판 유지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개인과 관련이 있다. 특정한 사람과 인간 관계를 맺고 평판에 신경 쓰는 사람은 자신의 특수성을 의식하며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개인’이다. 도움을 받는 아이도 특정한 사람을 부모로 둔 특수한 개인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아이를 구할 때 이런 이유들이 부정되는 것은 돕는 사람과 도움 받는 사람의 개인성이 부인됨을 뜻한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도 그를 구하는 나도 개인이 아니다. 또한 인간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개인을 부정하는 것, 다시 말해 관계적 인간을 부정하는 것을 우리는 공동체를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인간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맹자의 논의에서 우리는 고유한 자아를 잊은 인간, 공동체적 인성을 넘어서는 인간을 만난다.  

    이런 인간에 대해 더 이야기하는 데 도움을 얻고자 신약성서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논의하고자 한다. 누가복음 10장 25-37절을 읽어보자.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는 예수와 한 율법교사의 대화가 있고 그 안에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알려진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뭔가 앞뒤가 안맞는다는 느낌이 드는 요소가 있다. 예수가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꺼내게 된 이유는 율법교사가 “내 이웃이 누구 ”냐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이웃이란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할 이웃을 말한다. 곧 내가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베푸는 사랑의 수혜자가 되는 이웃이다. 이 의미 구조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A의 이웃이 B일 때 A는 B를 자신처럼 사랑한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마친 다음 예수는 이 율법교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묻고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문답을 요약하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그를 도운 사람이다’가 되는데, 이 명제를 추상적으로 표현한다면 ‘A의 이웃이 B일 때 A는 B에게서 도움을 받았(는)다’가 될 수 있다. 이를 위에서 먼저 제시한 추상 명제와 비교해 보면 A와 B의 역할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첫번째 명제에서는 이웃이 내가 사랑해야할 사람이었다가 두번째 명제에서는 이웃이 나를 사랑한(하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말해 예수가 누구의 이웃을 정의하는 방식은 미세한 차원에서 일관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어긋남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신학적 윤리학자 폴 램지(Paul Ramsey)는 이 어긋남을 통해 “당연히 사랑받아야 하는 사람의 특성을 정의하는 것으로부터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한 사람 자신이 이웃이 되야 한다는 구체적 요구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기독교인의 사랑은 이미 존재하는 이웃이 누구인가 밝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으로서 섬기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램지는 주장한다. 저기 어딘가에 먼저 이웃이 있어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섬길 때 이웃 관계가 형성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웃에 대한 사랑(love for neighbor)”이라는 표현은 이웃이 누구인가 따지게 하므로 더 이상 쓰지 말고 대신 “이웃으로서의 사랑(neighbor-love)” 또는 “이웃적인 사랑(neighborly love)”이라는 표현을 써야한다고 말한다.[각주:4]  

    그런데 내가 사랑해야할 이웃이 이러이러한 조건으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이웃의 조건을 나 자신의 선호에 따라 선택하는 위험이 아닐까 한다. 다시 말해 내가 사랑하기 편한 사람을 ‘내 이웃’이라는 범주의 (주요) 구성원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는 그의 산상 설교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태복음 5:46-47)  


    여기에서 예수는 사랑하기 편한 사람만 사랑하는 쉬운 사랑의 예를 보여준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 간 제사장과 레위인도 이런 사랑에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편의주의적인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램지의 해석처럼 이웃이라는 범주의 선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미리 설정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가 이웃이 되는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의 특수성이 개입하지 않는 사랑, 관계적 인성을 넘어서는 사랑이며, 따라서 공동체 개념을 넘어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를 넘어선다는 것은 이 개념과 분리할 수 없는 역사, 전통, 관습, 이야기(서사) 등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이런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관점, 전제, 해석, 의미, 시간의 흐름 등도 넘어섬을 뜻한다. 비록 사람은 이야기와 의미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지만 이야기와 의미는 때로 우리가 본질적인 원리를 인식하고 그를 실천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공동체는 우리에게 소속감과 의미있는 서사를 제공하는 중요한 원천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사랑이 활달하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가로막는 경직된 범주가 될 수도 있다. 공동체는 익숙함과 편안함의 강한 인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키멀의 소설 한 구절, 맹자의 논의 한 대목, 누가복음의 한 대목을 살펴보면서 개인과 공동체를 넘어서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이 어려움이 키멀의 글과 누가복음 텍스트에 이런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비록 맹자는 사람이면 누구나 위기에 처한 타인을 반사적으로 돕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은 자신을 도움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 랭스턴이며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을 슬쩍 피해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이다. 그리고 겉으로는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그 내면에서도 전혀 사심이 없기는 어려운 것이 인간 마음의 참모습이다. 저명한 천주교인 사회운동가 도로시 데이(Dorothy Day)는 그의 자서전 <긴 외로움(The Long Loneliness)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자신의 노력에 이기적인 동기도 숨어 있었음을 이렇게 토로한다. “나는 . . .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이 세상에 내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이 모든 것에 얼마나 큰 야심과 얼마나 많은 자기 추구가 있었던가!”[각주:5] 

    그러나 완벽할 수 없다고 해서 완벽을 향한 노력, 향상을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어떤 이유로 도저히 100점 만점은 받을 수 없는 시험이라 하더라도 90점을 받는 것이 70점을 받는 것보다 더 나은 법이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대상의 특수성이 강조되는 이러한 범주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동시에 이러한 범주를 해체하고 넘어서서 삶의 원리에 먼저 주목하고 그에 바탕해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삶의 원리란 생명의 원리, 곧 생명을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원리이다. 위의 누가복음 텍스트 앞부분에서 예수가 율법교사에게 이르는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는 말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더하여 우리 곁에 이러한 성숙하고 담대한 사랑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랭스턴 어머니가 딸에게 했듯이 더 근원적인 시각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을 미처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가 율법교사에게 했듯이 이런 사랑의 예화를 들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가서 우리 이와 같이 합시다”라고 말해야 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Haven Kimmel, The Solace of Leaving Early (New York: Doubleday, 2002), 137. [본문으로]
  2. 신영복, 강의 (경기도 파주: 돌베게, 2004), 224-25. [본문으로]
  3. Lee H. Yearley, “Ethics of Bewilderment,” Journal of Religious Ethics 38.3 (2010): 436. [본문으로]
  4. Paul Ramsey, Basic Christian Ethics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0), 93. [본문으로]
  5. Dorothy Day, The Long Loneliness: An Autobiography of the Legendary Catholic Activist (New York: HarperCollins, 1952), 6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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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몽유병과도 같은 속죄의식이었다.

 


 

색바랜 노란가죽로퍼 신발을 범계역 지하철 쓰레기 통에 버렸다. 

신발 볼쪽이 5cm 정도 찢어져 약간의 비라도 내리면 양말이 젖었다. 

짚신을 신은 듯한 편안함에 사진을 찍으로 나갈 때면 꼭 챙겨 신던 신발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마음이 어찌나 서운하고 후회가 되던지, 

밤 10시가 넘어 버렸던 전철역 휴지통을 찾았으나 흔적이 없었다. 


 친숙함은 죽음 너머로 사라졌다. 고통이다. 

 고통도, 새 신발에 적응하며 서서히 잊혀갔다. 


 한달이 지난 즈음, 

 압구정역 지하철 쓰레기통에서 버려진 어린 화분을 보았다. 

 누군가에게 유기된 화분이었다. 

 화분은 버려진 강아지마냥 멍한 표정이었다. 

 지나치지 못하고, 

 집으로 가져와 다른 화분 옆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것은 몽유병과도 같은 속죄의식이었다.  

 


 

 

 이수만 作 (한백교회 교인)

 

 

 

 * [사진에세이]는 한백교회 사진동아리 '눈숨' 회원들의 작품을 연재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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