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화, 정경화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1. 영원한 제국을 향한 꿈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들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열거할 필요도 없고 세밀하게 분석해서 보여줄 필요도 없다. 사람들로하여금 진보좌파와 종북주의자들이 역사교과서와 역사 교육을 적화시켜 놓았다고 믿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아이들이 이미 배우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보지 않고도 그렇게 믿고 있던 사람들은 모든 비판세력을 향한 더 깊은 분노와 증오로 똘똘 뭉치게 만들고, 더하여, 자식 걱정하는 여린 부모들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교과서 국정화 그것은 현재의 권력이 자신의 과거를 복권시키고 싶은 작은 욕심 정도가 아닐 것이다. 이 나라를 위해서 하나의 통일된 역사를 써야 한다는 사명감이 솟구치는 듯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를 토대 삼아 영원한 왕국을 가져보고 싶은 욕망도 주체 못하는 것 같다. 

    영원한 제국을 향한 욕망은 정치권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사교과서 국정화를 앞장서 지지하는 무리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서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을 숨기지 않는다. 한기총이나 "한국기독교역사교과서 공동대책위원회"라는 단체의 문서들을 살펴보아도 종교와 기독교 관련분야를 제외하고, 소위 말하는 이념적 편향과 관련된 내용들에 대해서는 앵무새처럼 정부 여당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한기총 대표회장 이영훈 목사가 한국사교과서 국정화를 지지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진보주의, 자유주의 물결을 막고 한국교회의 복음, 보수신앙을 지켜나가야 하는 목적이 있으며, 한국사회와 가치를 무너뜨리는 이단, 동성애 등에 단호히 대처해 나가야 한다. 또한 기독교를 폄하하고 좌편향된 교과서로 우리의 자녀들을 가르치게 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이 목사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지지하는 이유는 매우 뚜렷해 보인다. 그 이유는 한국기독교 안에서 이미 신앙의 차원이 되어버린 두 개의 뿌리깊은 증오심 혹은 적대감의 당연한 발로라고 숨김없이 말하고 있다. 이단과 종교를 향한 적대와 증오에 이제는 동성애자를 향한 혐오가 더해져 있고, 적대와 증오의 또 다른 축인 반공주의는 이제 모든 진보주의 모든 자유주의 그리고 자신을 향한 모든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보수신앙과 그것에 기초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다시 한번 그 증오심과 적대감으로 무장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2. 어쩐지 익숙하다


    어쩐지 낯설기 보다는 익숙하다. 박근혜 정부와 여당 그리고 한기총이 한편이 되어 교과서 국정화를 획책하는 모습을 생각하다 보니, 국정화라는 것이 성서와 신학에서 결코 낯선 상황이 아닌듯하다. 역사가 하나의 해석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모든 역사의 기록은 하나의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기독교 역사 안에서 매우 익숙한 경험이다. 성서와 교리의 절대적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같은 태도와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국가교회가 되는 과정, 신조와 교리를 만들어가던 과정, 그리고 성서의 정경화 과정에 작동했던 정신과 교과서 국정화 주장의 정신은 아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이 결코 종교적인 과정만은 아니었으며, 영원한 제국을 향한 이데올로기가 언제나 함께 해 왔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3. 정경화


    존 버퀴스트(John Berquist)는 탈식민적 관점에서 페르시아 시대 히브리성서의 초기 정경화과정을 해명하면서, 이 정경화의 목표는 페르시아 지배의 안정적 유지를 위한 제국주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발전과 확산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Jon L. Berquist, “Postcolonialism and Imperial Motives for Canonization,” Semeia 75, 1996, 15 – 35.)  

    제국은 끊임없는 물리적 정복과 억압으로만은 유지될 수 없다. 피식민지인들이 스스로 그 제국을 지배자로 받아들임으로써만 지속 가능하다. 때문에 식민지의 각 사람을 제국의 신민으로 사회화하고, 식민화된 사람들이 제국에 종속된 사람들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페르시아에 의해서 주도된 히브리 성서의 초기정경화는 바로 그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목표를 가지고 수행되었다는 것이다.  

    존 버퀴스트의 설명 속에서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발췌할 수 있는데, 첫재로 그 텍스트 안에서 직접 많은 분량을 언급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드러나는 한 가지가 유다의 외부 즉 제국의 중심으로부터 오는 메시아니즘이다.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는 법을 주는 자로, 고레스는 하느님의 메시아로서 그려진다.  

    둘째로는 제국의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정경은 이미 존재하는 대중들의 믿음에 기초해서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이다. 정경은 페르시아 역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페르시아 역사로 대치하거나, 이스라엘의 종교를 페르시아의 종교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것을 비종교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 대치한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에 수정을 가하기도 하고 변경하기도 하면서도, 이미 존재하고 있는 종교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해에 보다 명확한 표현을 주는 방향을 취한다.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종교를 재구축하는 것이다.  

    셋째로, 정경을 만드는 사료는 이스라엘의 과거사 중에서 억압과 지배의 역사만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저항과 투쟁의 역사, 해방 경험의 역사도 쓴다. 오히려 그 모든 이야기들이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재배치 될 뿐이다. 그래서 출애굽의 해방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왕을 가질 수 없는 백성이 되고, 제국 에집트는 미워할 수 있지만, 페르시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하느님이 보낸 메시아적 제국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과거 이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섭리적 이유를 제공하는데 정경화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넷째는, 정경의 권위, 또 정경으로서 성서의 의미의 통일성과 일관성, 달리 말하자면 페르시아가원하는 종교적 경전의 이데올로기적 작동은, 텍스트 내부에서 텍스트의 고유한 성격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다. 외부 제국의 힘이 사라지면 정경의 일관성도 통일성도 유지될 수 없다. 정경의 절대적 권위는 오직 텍스트 외부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마지막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지속적인 제국의 지배, 지속적인 자원의 착취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정경화가 이루어지지만, 한번의 정경화 작업으로, 정경이 영원히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기를 바랄 수 없다. 오히려 제국주의라는 외부의 힘이 사라지면 그 정경은 제국이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기능을 하는 텍스트도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정경이 오히려 제국주의의 민낯을 드러내게 하는 텍스트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4. 국정화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기도가 결코 페르시아 제국의 정경화 기도와 같은 수준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페르시아 제국의 식민지에 대한 관계와 그 안에서 정경화가 했던 역할을 생각하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기도하는 정권의 의도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를 포함해서, 3.1운동, 임시정부, 해방정국, 이승만정권, 5.16과 유신 등등 그들이 재평가하고 재배치하기를 원하는 역사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메시아니즘이 있다. 그것을 어떻게 이름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디선가 김진호 목사가 박정희 메시아니즘이라 했는데, 어쩐지 그 보다는 더 복잡해야 할 것 같다. 세계경제질서가 그렇고, 우리를 둘러싼 동북아의 정치질서가 난해하다. 앞으로 더해가게 될 이 지역의 긴장과 갈등 그리고 우익 민족주의의 발호를 예상하면, 그 메시아니즘이 어떤 모습으로 얼굴을 드러낼지 예측불허다.  

    몇 번의 선거를 통해서 두 정권을 거쳐 오면서, 대중들의 의식 속에 일정하게 이 메시아니즘의 작동기제가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 사회 안에 상당부분 이미 제도화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새마을 운동이나 보수단체를 향한 예산지원들을 보면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다시 말해 단순히 역사 교과서 국정화의 문제로만 국한될 수 없다는 뜻이다. 메시아니즘의 이데올로기가 다양한 다른 요소들과 함께 결합되어 이미 깊이 구조화되어 가고 있는 모습이다.

    페르시아의 이데올로기가 출애굽의 이야기를 가장 강력한 해방의 기억으로 간직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페르시아에 종속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서사 안으로 그 해방 이야기를 흡수해 버렸던 것처럼, 교과서 국정화를 외치는 지배 이데올로기도 그와 같은 세련된 전략을 취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생명대 반생명 혹은 민주대 반민주의 구도를 남과 북, 종북과 반공, 그리고 국익대 반국익 등으로 구도 재편하여 그 안에서 민주화와 해방의 이야기들을 배치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려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국정화는 원론 측면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일이다. 텍스트와 조직의 외부에서 그 텍스트와 조직들을 지켜주는 힘이 무너지면, 텍스트와 조직은 순식간에 얼굴을 달리할 수 밖에 없다. 어떤 텍스트에 의미를 한정해서 넣겠다는 생각 자체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생각이다. 뿐만 아니다. 모든 언론, 모든 권력을 다 장악하고도 역사학자 90%를 좌파라고 몰아붙이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제국의 세련된 이데올로기 전략이 그들에게 부재하다는 뜻이고, 그래서 그만큼 억지스럽다는 이야기다.   


5. 학생들의 손에 '삽'을 들게 해야 한다


    지난 9월 19일 저녘 시청 앞 광장에서는 70년만의 귀환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홋카이도 지역으로 강제징용 갔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신 115분의 유골을 모시는 추모예식이 있었다. 이 날은 아베 정권이 집단자위권법안을 최종적으로 통과시킨 날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과 함께 18년 동안 조선인 징용자들의 유골을 발굴해 온 한 일본 스님이 그 날 전한 추모사가 지금도 가슴을 울린다. “오늘 아베 정부는 일본 젊은이들의 손에 총을 들려주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손에 들어야 할 것은 ‘삽’입니다.” 이어지는 말들을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삽’을 들고 곳곳에 흩어지고 버려진 유골들을 되찾는 일은, 곧 할말을 못하고 누워있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과정이며, 그들의 가슴속에 한 맺힌 평화의 메시지를 듣는 과정이라는 뜻으로 들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문제는 우리들에게도 어쩌면 어쩌면 총과 삽 사이에서 선택하는 문제일지 모르겠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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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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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1.26 21:1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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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14세때 거주지에 따라 '학벌·임금·계층' 격차 발생 ... 일반 시·군 지역과 광역시 지역격차 천지차이 ... 일반 시·군 지역의 일부 우매한 부모들 http://president007.blog.me/220391250421


[바울신학가이드12]



바울과 종말론 IV 


- 존 크리스천 베커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존 크리스천 베커>


    몇년 전부터 범죄 형사류의 드라마 영화가 인기이다. 근대의 여명기에 소위 탐정소설 장르로 시작되어 그 형태와 스타일이 계속 변화해 오기는 하였지만 기본적인 틀은 이성적 추론에 의한 사건의 해결이다. 주인공인 탐정이나 형사는 “이건 불가능한 현상이야”와 같은 완전 범죄나 불가능할 정도로 우연의 연속인 사건들을 파헤쳐서 하나의 그럴듯한 추론을 완성해낸다. 그리고 용의자에게 말한다. “네가 어떻게 그 사람을 죽였는지 알아냈어!” 위의 사진이 요한 크리스쳔 베커이다. 마치 셜록홈즈와 같이 유능한 사립 탐정처럼 생기지 않았는가? 필자가 베커의 글을 읽으면서 계속 든 생각이 그것이었다. 이사람은 마치 탐정과 같다. 바울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때로 막히는 길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뚫어내고 가설과 추론을 동원하여 바울서신과 그 신학을 하나의 일목요연한, 기승전결이 살아있는 이야기로 풀어낸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던진다. “그랬었어.. 바울... 네가 원한건 바로 이거였어…” 

    이번 웹진에서 베커의 신학을 어떻게 소개할지 나름 많은 고민을 했다. 이 원고는 베커에 대한 새번째 원고다. 이전 원고에서는 어떻게 하면 그의 사상을 골고루 소개할지를 고민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지면의 한계가 있는 웹진의 원고로는 알맞지 않은 것 같았다. 바울의 이곳 저곳을 자유로이 거닐며 의미심장한 말들을 던지는 베커를 한달음에 정리하는 것은 그의 재기발랄한 글을 외려 지루하기 그지없는 말로 정리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치 탐정이나 형사가 하나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형식으로 글을 적어보려 한다. 이제부터 논하는 사건의 재구성은 바로 베커의 주저인 [사도 바울] 에서 논해지는 바울신학을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한 것이다.


사건의 재구성


    여기 고민하는 한 바리새인이 있다. 그의 이름은 바울. 그는 최근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것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는 함구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그의 삶의 자세가 바뀐 것은 명확하다. 예수를 메시아로 따르는 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똑똑한 율법학자가 하루아침에 이방인들에게 예수 메시아에 대해 전하러 다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히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그가 이곳 저곳의 예수를 따르는 이방모임에 모낸 글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알고 지낸 예루살렘의 교회 지도자들이나 다른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에 대한 모순적 행동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꼭 그런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것 같은 사람. 보통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는 문제인데도 그것을 머리속에서 수십번 수백번을 되짚어서 그 안에 존재하는 모순을 밝혀내어 문제삼는 사람들. 적어도 바울은 그런 사람이었다. 바울을 괴롭히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지도자들은 예수 메시아를 믿고 난 다음에도 기본적인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삶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그것을 반대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근본적으로 예수의 죽음이 율법과 충돌하는 지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대적 가르침에 의하면 예수는 나무에 달린 저주받은 자이자 유대 전승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는 메시야이다. 다른 이방 선교사들도 문제였다. 그들은 아예 율법은 저주 받았으며 버려져야 하는 것이라 떠들고 다녔다. (사도행전 스데반) 그들은 율법을 공격하는 것이 유대의 전승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듯 하다. 예수가 메시야임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메시야와 율법 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해놓지 않으면 결국 수많은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이라 바울은 생각했다. 바울의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사이에 있었던 일을 재구성했다. 과연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명확히 설명하는 것이 오해를 푸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바울이 말한 사건의 재구성이다.

    “예수의 죽음이 율법의 저주라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저주받은 예수가 부활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가장 저주받은 인간을 사랑으로 부활하게 하신겁니다. 예수가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지만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킴으로 예수를 통해 율법을 심판하신 겁니다. 하지만 오해마세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것은 유대인이 미워서도 틀려서도 아닙니다. (행 2.23; 2; 15; 17) 율법을 하나님이 스스로 심판하신 것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거대한 계획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율법의 저주에 의해 죽는 그 순간에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갈 3:13)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율법의 효력이 끝나게 된 것입니다. (롬 10:4) 이해하기 어려우세요? 쉽게 말씀드릴께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갈 2:20) 그리고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베커의 재구성


    베커가 묻는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바울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놀라운 것은 바울이 저런 추론을 너무도 자신있게 마치 자신이 하나님에게 직접 들은 것 처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아는가? 바울 이전에는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를 믿는다는 것에 대한 순진한 변명같아 보이는 말이 많았다.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 준다라거나… 그의 죽음은 바로 유대인이 틀렸다는 것은 반증하는 것이라는 (유대의 메시아와는 다른 메시아이므로…) 그런데 뻔뻔하게도 예수의 죽음은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과 같은 이해하기도 어려운 말을 막해대는 것이다. 그래서 베커는 바울의 주위를 탐문수사하기 시작했다. 바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기록만으로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두가지를 알아내었는데,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다른 보통의 바리새인들이 그러하였듯이 묵시사상에 상당히 심취해 있었다는 것과 보통의 바리새인들에게는 겁없이 전통을 해석하여 나름대로 막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단서를 바탕으로 베커는 바울의 재구성을 거꾸로 탐색한다. 먼저 바울의 율법에 대한 해석은 묵시사상을 해석의 단초로 가지고 왔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베커의 생각이다. 묵시사상에서 율법-토라는 존재론적 위치를 가진다. 율법은 단순히 유대인이 품어야할 삶의 방식이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는 존재적 위치를 가진다. (에녹서) 율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실패했다. 그 인간의 실패를 바꿀수 있는 방법은 바로 율법의 시대가 끝나야 가능하다. 곧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라는 바울의 확신은 묵시사상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율법의 시대가 끝나는 것으로 (율법의 마침) 세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죄 대신이라는 ‘랍비적’ 언어에 만족할 수 없었던 (유대적 시각) 바울은 부활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말해야 했다. 그저 죄를 사면받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은 없다. 바로 새로운 창조가 예수의 부활과 함께 가능하게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십자가는 고난의 신학이 아니다. 마가는 고난을 말하는 신학자이며 요한은 십자가가 영광의 길이지만 바울에게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약함의 시간이다. (고전 1:25; 고후 13:4) 바로 “약할 때 강함 주시는”신학이 바울의 십자가 신학이다. 바울 이외의 헬라-유대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의 죽음을 강조하여 그의 죽음이 속죄의 죽음이며 이를 고난당하는 의로운 자 (이사야)에 대한 전승과 동물희생제에 연결시켜 예수의 죽음을 희생적 속죄로 이해했다. 그러나 바울에게 예수의 죽음은 묵시적 심판과 갱신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죄, 율법, 육, 죽음의 세력들이 심판을 받는다. 그리고 부활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태어난다.

모든 추론의 시작은 범죄의 동기


    바울을 무슨 범죄자처럼 보려는 것이 의도는 아니다. 어떤 범죄가 일어났을때 그 범죄를 해결하는 것은 그 범죄의 동기를 알아내는 것부터이다. 범죄 자체에서 그 동기는 숨어있다. 범죄의 현상은 누군가 죽었거나 어떤 물건이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 범죄의 동기는 숨겨져있다. 범죄의 현상을 통해 그 동기를 밝혀내는 것이 탐정이나 형사가 하는 일이다. 베커와 같은 많은 신학자들이 바울의 서신의 내용이라는 현상을 정리하는 것으로 바울을 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런 시도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바울은 여기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저기에서는 저렇게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그의 진술이 왔다 갔다한다. 때로는 율법을 씹어먹을 것 처럼 맹렬히 비판하다가 때로는 “아.. 율법? 그거 좋은거야…”라고 열심히 변호하기 시작한다. 그 말의 현상 자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바울의 진술이 통일성을 찾아내려 무진 애를 썼지만 많은 학자들이 낭패를 맛보았다. 아니 해결한 듯 보이지만 그 학자 (형사나 탐정)들의 보고서를 읽어보면 이해하기 무지 어려운 경우가 허다하다. 베커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우리는 포도를 먹을때 포도의 달콤한 껍질을 먹고 그 중심의 씨는 뱉어버린다. 마치 우리는 원래는 씨를 보호하고 자라게 하기 위한 과육을 즐기고 그 핵심은 버린다. 우리를 달콤하게 하고 즐기게 하는 바울의 율법과 복음의 관계, 믿음으로 얻는 의는 달콤한 과육이지만 그 안의 단단하여 씹을 수 없는 그 씨처럼 바울의 서신의 핵심은 우리가 쉽게 다가갈 수 없다. 더욱이 근대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그 단단했던 씨는 근대의 생각과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화적 시대의 세계관이란 이름으로,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메시아라는 이름으로 길바닥에 버려졌다. 그것은 묵시라는 세계의 마지막에 대한 꿈이었고 그 꿈의 끝자락의 주인공은 바로 하나님이다. 바울이 처음 예수의 부활로 부터 발견한 것. 그가 처음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인 예수 이후에 꿈꾸었던 최후의 승리. 바로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하리라 믿는 세계관이 그 단단한 씨속에 숨겨져왔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베커의 독특성에 대해 살펴보자.


묵시와 그리스도-사건: 바울의 일관된 형식


    베커는 바울의 일관된 주제를 이신칭의나 신비주의라는 개념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상징적인 구조로 보았는데, 그는 이를 “바울이 일관성은 그리스도-사건으로 표현한 언어와 묵시적 언어가 이루는 상징적인 구조이다. 그리스도-사건의 원초적 경험은 바울의 전통적인 묵시적 언어를 살찌우고, 강화하며 수정했다.”(35) 불트만에 비교하면 재미있는데, 불트만은 케리그마, 즉 말해진 복음의 핵심을 현대인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적-묵시적 세계관에서 본문을 벗겨내는 비신화화의 작업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벗겨내야할 껍질이 베커에게는 지켜야할 바울의 일관성이 된다. 나는 이것은 바울서신에 대한 틀과 꼴의 해석학이라 이름붙이고 싶다. 성서해석학에서 오래도록 장르비평이라 불리운 비평학적 방법이 있었는데, 이는 일반 문학비평에서의 장르비평 (원래는 근대 소설의 태동에 대한 연구에서 비약적으로 발전)에서 유대되었으나, 성서비평에서는 문학비평에서만 조금 언급이 되었을뿐,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좀 더 깊게보면 맑스주의라는 것도 하나의 틀에 대한 비평인데, 맑스가 “존재가 사유를 결정한다.”고 하였을때 인간의 사상, 사유라는 체계가 인간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틀의 변화가 사상의 변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베커의 바울 해석학은 이러한 틀과 꼴 (Form and Content)에 대한 이해를 탁월하게 전유하여 바울을 보는 시각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여기에 관심이 있다면, 이러한 틀과 꼴의 비평학으로 민중신학에 비평적 시도를 보여준 이경재의 논문이 있다.)

    틀 (Form)이라는 것은 겨울에 자주찾는 붕어빵 판매소에 있는 붕어빵틀과 같다. 가게마다 파는 붕어빵의 맛이나 속은 각기 다를 수 있다. 얼마나 굽느냐에 따라 맛도 다르다. 팥이 많이서 맞이 있는 붕어빵이 있는가하면 돈 주고 사먹은 것이 아까울 정도의 맛도 있다. 그러나 그 틀은 거의 비슷하다. 다양한 변화를 낼 수 있지만 그 변화는 하나의 외형에 구속받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붕어라는 모양을 가지고 있다. 왜 붕어모양일까? 두툼한 물고기 모양을 식감을 자극할까? 그저 우연히 그런 모습으로 만들기 시작했을까? 간식 하나의 틀에도 이런 질문이 생기는데, 하나의 문학 장르의 형태에는 수많은 의미들이 숨어있지 않을까? 붕어빵의 유비에 끼워맞춰 설명하자면, 붕어빵 틀은 묵시사상이고 붕어빵에 들어가는 재료들은 그리스도-사건 (십자가와 부활)이며 여러 환경적인 요인 (불의 온도, 가격 경쟁, 날씨등)이 바울과 교회의 상황정도로 생각한 듯하다. 그렇다면 바울의 여러 서신들은 각기 다른 상황에서 같은 사람이 만든 조금씩은 다른 붕어빵들이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환경이 너무도 달랐기에 붕어빵은 상당히 다른 맛을 가지고 있다. 붕이빵의 맛이 다를만큼 바울은 급격한 변화와 각기 다른 교회의 질문들에 답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이런식의 방법으로 바울을 이해하는 것이 왜 필요할까? 서두에서 베커의 방법이 그 이전까지의 바울신학의 각기 다른 두개의 스타일을 종합하는데 이상적인 모델임을 설명하였지만, 무엇보다 바울을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거창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
    일전에 유대의 묵시문학을 설명하면서 종말론과 묵시문학의 차이점을 지적한 적이 있었다. 종말론이란 세상의 끝에 대한 담론이다. 묵시문학은 유대교에서 나타난 하나의 문학장르로서 묵시 (Revelation)이란 말이 의미하듯 신의 계시를 드러내는 이야기체의 문학으로서 그 뼈대를 형성하는 장치는 환상과 천상 여행이다. 다니엘서 7장을 보면 벨사살 왕이 꿈에 환상을 보고 다니엘이 그것을 해석하는 장면이 나온다. 꿈에 나타난 환상은 계시를 드러내는 장치이고 다니엘의 해석은 인간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이러한 묵시문학의 장치를 통한 해석은 세상의 종말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예외도 있다. 묵시사상의 장치들이 등장하지만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들이 있다. 특히 에녹 4서) 그러므로 묵시문학에 종말론을 나타내는 경우는 많지만 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니며, 특히나 유대의 묵시문학은 각기 다른 종말을 말한다. 이러한 전체적 묵시문학이 가지는 사상을 묵시사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묵시사상은 종말론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차이는 명확하게 세계말에 대한 관심을 가진 담론이기 보다는 묵시문학이 가지고 있는 사상적 특징을 모은 것 정도가 된다. 그래서 베커가 묵시사상이 바울 신학의 핵심적 틀이라고 하였을때, 이는 종말론이 바울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사건이 그 종말론의 핵심이 되는 만큼만 그러하다. 이 말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논해보자.
    바울을 묵시문학의 틀이나 종말론적 틀로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학자들은 나름 그들대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바울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하는 사람이지 종말을 외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바울의 중요 서신중 하나인 갈라디아서에는 종말을 의미하는 말이 거의 없다. 데살로니카 전서에서 조금 나오고 (4장) 고린도전서의 부활에 관한 설명에서 조금 (15장) 로마서에서 잠깐(8장)이다. 그들이 보기에는 압도적으로 바울에게는 예수의 믿음으로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바울 신학이 중심이다. 베커는 이에 대해 바울이 묵시적 전통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의인화에 대한 담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논지를 제시한다.
    바울에게는 없고 복음서에는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기록되었으되… 이루려 하심이라…’라는 표현이다. 복음서가 기록되기전 구전전승을 거치면서 예수에 대한 여러 기억들과 이야기들을 구약의 전승에 대치시켜 예수가 바로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들이 생겨났다. 이를 통해 예수가 구약의 예언을 충족시킨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수의 권위를 기록된 성서의 말씀에 의존시킨다. 이 방법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은 당시의 구약성서 전통에 비추어 보면 매우 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희생제사의 개념은 구약이나 유대교에겐 오로지 동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구약에도 인신공양이 등장하지만 (이삭, 입다의 딸) 그것은 죄에 대한 구속과는 상관없는 예이다. 오로지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에 대한 본문으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합리화할 수 없다.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율법의 저주를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성서에 대한 대화를 하다보면 “성서에 그렇게 기록되어있다.”라는 말로 모든 논의의 흐름을 단절해 버리는 경우를 보게된다. 성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토달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를 구약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려 한 복음서의 전통은 유대교와의 첨예한 대립의 시대였기에 이해못하는 바는 아니나, 구약시대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는 끊임없는 해석의 역사이지, 문자에 기대어 스스로의 해석학적 전통을 말살시켜온 역사가 될 수 없다. “문자는 죽이지만 영은 살린다.”라는 바울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바로 여기에서 바울은 구약 전승의 문자에 권위를 부여하기 보다 전승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권위를 부여한다. 그리스도-사건이 바울에 의해 해석학적 혁명을 맞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승자체가 아니라 바울은 자신의 해석에 권위를 부여한다. 소명이 가지는 의미는 길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나서 짠!하고 생겨난 것이 아니고, 단순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러 저러하기 복음을 재구성한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 1,12) 바울의 전승에 대한 해석와 그리스도-사건에 대한 해석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초대 교회 (베드로와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와 다를 수 밖에 없다. 바울의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Apocalypse (묵시, 계시)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인 바울은 유대식의 성서해석에 능할 수 밖에 없었는데, 구전 전승과 해석학적 적용이 모두 경전적 위치를 부여받는다. 바로 해석이 전승자체의 내용에 묶이지 않는다. 바울은 한번도 “성서는 사실이다!” 라든가 “성서는 믿어야 된다.”라고 전승자체에 권위를 주장하지 않는다. 바울은 자유롭게 구약의 내용을 인용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때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의 내용을 고치기까지 한다. (예를 들면 로마서 10장에서 믿음을 강조하여 30장 14절을 인용할때 실천에 대한 말이 있는 14절의 하반절을 생략해 버린다.)
    그러므로 베커는 단언하기를 “바울의 독창성은 그의 교리적 신학이 아니라 해석학이다.”고 한다. 그는 체계적인 조직신학자나 전통의 주창자가 아니라 바로 전통의 해석자임을 강조한다. 복음서가 예수를 유대의 전통을 혁파하고 죽음과 부활을 주인으로 그리는 장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바울은 안디옥교회에서 받은 교회의 전승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안에서 해석한다. 고린도전서 15장 1-11절에 나와 있듯이 바울이 전해 받은 전승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이다. 베커는 바울이 전해받은 복음으로는 그의 독특한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인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나 율법의 완성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복음이 탄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우리의 부활을 말한다는 바울의 선언은 단순히 초대교회의 전승에서 끌어내기에는 부족한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을 통해 그의 복음의 정수를 만들어내었을까? 여기에 답이 바로 바울의 묵시문학적 사상이다.

바울의 묵시사상적 신학


    이전의 웹진에서 유대의 묵시문학에 대한 설명을 했었다. 묵시문학이란 특정한 시대에 유대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하나의 문학들이고 묵시사상이란 그 묵시문학들이 공유했던 하나의 생각의 틀을 말한다. 베커는 필립 빌하우어와 클라우스 코흐가 말한 묵시사상의 기본적 구성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개괄한다.





    베커는 이 두개의 연구를 바탕으로 묵시사상의 큰 세가지 특징을 말하는데, 먼저 역사적 이원론이 등장한다. 역사적 이원론이란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두 힘의 갈등이라고 생각함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과는 다른데, 이원론이란 신의 세계 또한 선신과 악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대교의 역사적 이원론은 하나님만이 유일신이니 세계의 악을 허락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이후에 지리한 신정론의 원인이 된다.) 두번째 특징은 보편적이며 우주적 기대가 있다는 것인데, 이는 어떠한 변화가 전지구적으로 나타남을 뜻한다. 한 개인의 변화나 집단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임하는 변화는 온 지구를 뒤흔든다. 세번째는 종말이 곧 임한다는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생각이 현재의 시한부 종말론처럼 그저 마지막을 목빠지게 기다리는 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없던 시대에 희망을 말하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생각의 틀로써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유대의 묵시문학들은 종말의 시대를 기다리는 신앙의 자세를 강조하고 어떻게 하나님에 반대하는 시대의 사상에 맞설것인지를 말한다. 바로 삶에 정말 필요한 메시지를 담는 틀로써 존재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묵시사상은 묵시문학을 넘어서 당대의 여러 유대교 갱신운동의 사상적 틀이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베커는 라비닉 유대주의(바리새주의)는 묵시사상적틀을 바탕으로 토라(율법- 원래의 뜻은 ‘가르침’)를 새롭게 해석함으로 하나님의 계약의 갱신을 강조하였고, 젤롯당, 시카리당, 쿰란 공동체등이 동시대에 묵시사상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 깨달음을 설파하였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유행처럼 존재했던 묵시사상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점으로 순화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후로 유대의 문헌에서 묵시사상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공통시대 이후 70년 예루살렘 멸망과 132년 바 코흐바의 혁명이후) 하지만 우리는 바울이 살았던 시대는 이 묵시사상이 최고조로 유행했던 70년 예루살렘 멸망이전이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전통과 유행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음을 기억하자.
    바울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그렇다면 구약의 일부분과 신약의 대부분의 저술들의 틀이 되었던 묵시사상이 왜 지금은 다 사라져 버렸는지 먼저 이야기해보자. 베커는 크게 네 가지 현상에 의해 현대 기독교에서 묵시사상이 무시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신정통주의가 묵시사상적 종말론을 기독론으로 내파시켰다고 생각했다. 신정통주의는 '예수는 마지막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라는 질문을 '예수는 우리에게 어떤 분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었다. 둘째로 근대주의적 역사비평학은 결국 성서를 신화적 저술로 봄으로 묵시사상의 정신이 그저 신화적 저술로 평가절하되었다. 셋째로 결정적으로 불트만이 역사적 묵시를 인간학적 이해로 바꾸고 보편적 역사관을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현상으로 해석했다. 네번째로 신약학자 다드(C. H. Dodd)로 대표되는 학자들이 신약성서의 저술들이 임박한 종말론에서 지연된 종말론으로 더 나아가 실현된 종말론 (“지금 너희안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라는 식)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말함으로 신약성서 안에서 종말론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다드의 해석은 바울에 관해서는 옳지 않는데, 바울의 서신들이 불과 5-6년안에 쓰였음에도 바울이 자신의 종말론을 그의 생각대로 변화시켰다고 보기에 적절지 않다. 결국 마지막 날이 오지 않았으므로 그랬었는지, 아니면 역사적 필요에 의해 그랬었는지 근대이후의 신학에서 묵시사상이 사라져왔음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시 바울로 돌아가보자. 위의 몇가지 이유를 들더라도 바울에게 묵시사상이 중심이었다는 생각은 학자들 사이에 큰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가장 큰 이유는 바울 자신이 유대묵시문학이 자주 썼던 표현들을 쓰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묵시적 시간표나 천상의 나라에 대한 설명, 심판에 대한 표현이 명확하지 않고 다가올 시대와 현재의 시대가 대립하고 있지도 않다. 게다가 바울은 자신을 다가올 심판의 날을 기다리며 현재의 고난을 견디는 삶을 사는 것으로 표현하지도 않았다. 이전 웹진 글에도 말했지만 바울이 표현한 현재의 고난은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시대의 고난이 아니다.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열망과 목표에 다다르지 못할 때의 어려움이라고 보아야 한다. 결론을 말하면 바울은 자신의 시대에서도 여전히 팽배한 희망과 소망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바울의 낙관적 모습이 유대 묵시문학의 그것과는 매우 차이가 난다. 베커는 이러한 바울서신의 성격을 묵시문학과는 다른 어떤 것이라 보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이 묵시문학의 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창조적으로 해석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왔다갔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을 맹렬히 비판하다가 로마서에서는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이라는 말로 율법을 대변하는 것을 말함)하는 것은 바울의 중심이 율법과 복음이 아니라 묵시사상의 틀에서 그리스도 사건을 해석하는 바울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새롭게 갱신한 묵시사상은 어떤 것일까?
    바울이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역사를 이해하는 틀인 묵시사상을 새롭게 변화시킨 가장 큰 계기는 바로 예수의 부활이었다. 예수의 부활은 마지막 날 재림의 승리를 약속하는 것이고 바울에게는 예수의 부활과 죽은자의 부활이 겹쳐지는 시대는 없다. 이것이 바울 신학이 묵시문학의 틀을 가지고 있는 이유라고 베커는 보았다. 언뜻보면 당연한 이야기아냐? 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바울서신의 해석사와 서신들을 살펴보면 왜 베커식의 틀과 꼴의 해석학이 필요한지 느낄 수 있다. 일단 먼저 서신들을 살펴보고 다음 바울의 해석사와 근대 신학의 흐름을 살펴보자. 갈라디아서를 보면 묵시적 암시도, 죽은자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도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갈라디아서에서 신자는 율법아래 살 것인가 그리스도안에 살것인가를 현실의 삶에서 양자택일해야한다. 중심은 율법을 벗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안의 삶으로 직결된다. (갈 1:19-21; 3:1, 13- 14; 4:5; 6:14) 이른바 슈바이쳐가 말했던 그리스도에 합일되는 신비적인 삶이 중점적으로 등장한다. 이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완전한 승리를 위해 신자는 다시올 새시대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미 종말은 실현되었다는,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실현된 종말론이 갈라디아서를 감싸고 돈다. 갈라디아서의 실현된 종말론은 고린도전서나 로마서를 두고 보아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베커는 이것이 바로 바울의 신학이 맥락적임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즉,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반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서신의 표면적 성격이나 신학으로 바울을 제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바울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그리스도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로 가보자. 로마서에서 수많은 신학자들이 골몰한 문제는 과연 로마서 9장-11장에 나오는 유대인이 비록 현재는 하나님의 역사속에 부족한 모습이나 결국에는 회복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희망인가? 유대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말장난인가? 아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결국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임박한 종말에 승리를 얻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정의의 서국이며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된 교회는 그것의 완전한 실현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나타난다. (롬 5:8) (150)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비교해보면 율법관, 종말론적 시각이 파이하게 다른데, 바로 이것이 바울의 해석이 어떤 하나의 신학적 서술에 달린 것이 아니라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울 해석의 틀이 되는 묵시사상은 고린도전서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은 확실하나 그것은 현재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님을 분명하게 한다. 여기에서 바울의 대적자는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서 이해하는 그래서 육체의 삶은 지옥이라도 영적으로 구원의 삶을 사록 있다고 생각한 당시의 이원론적 영지주의가 될 것이다. 이러한 영지주의적 실현된 종말론에 대한 반대로 바울은 몸의 온전한 부활과 그리스도의 온전한 승리가 미래의 사건임을 말하고 있다. 결국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서는 각각 다른 종말론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바울은 헬라적 세계관과도 아주 잘 조응하며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삶과 성례전이 이토록 잘 조화되는데, 이러한 헬라적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왜 예수의 죽음에 율법은 완성되고 모든 것이 예수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음에도 아직도 해방의 날은 오지 않았으며 그의 죽음은 단지 승리의 날을 상징하는 것이 지나지 않을 거라는 비약의 가능성을 남기면서 까지 부활의 때는 현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에 바울이 묵시사상이 그의 신학의 핵심적 틀로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위의 모든 질문들이 해결된다. 그러므로 바울의 핵심틀이 바로 그리스도 사건과 묵시사상이라고 베커는 주장한다.

묵시사상의 핵심 - 역사의 주인공은 하나님


    근대 성서신학의 주인공은 예수다. 구약신학과 신약신학등을 통틀어 연구의 목적과 의미는 예수로 시작하여 예수로 끝나왔다. 베커는 적어도 바울에게 역사를 이끌어가고 인간의 구원을 만들어가는 주인공은 예수가 아니다. 하나님이다. 신정통주의 신학이 예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예수를 마치 하나님의 살아있는 현신으로 강조하였다. 그에 대한 결과로 나온것이 실현된 종말론적 사상이다. 마치 나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한순간에 바뀌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듯한 생각은 교회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또는 지나치게 염세적으로 만들었다. 이에 대해 베커는 바울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는 신비주의나 신적합일이 아니라 예수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승리를 믿는 믿음이라 보았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 확실히 질 것 같은 신앙인의 싸움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최후승리를 느낄 뿐이다. 그것은 예수를 통해 나타난 즉흥적인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이고 믿음이란 시시때때로 변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볼 수 있는 힘이다. 베커에겐 바로 묵시적 시각이야말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시각이며 틀이며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 우리의 선배가 바로 바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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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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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수현
    2015.11.04 02:42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글을 쓴 한수현입니다. 각주정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보낸 원고가 각주가 안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본 글은 한국에 장상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되어 있는 [사도바울]이라는 베커의 저서의 페이지를 기본으로 하였음을 밝힙니다.



고대 로마의 Sex & Sexuality – 계급(Class)과 성적 역할



송민원
(시카고 대학 고대근동학과 Ph.D. Candidate)


 

  2. 고대 로마의 Sex & Sexuality – 계급(Class)과 성적 역할

  

      지난 시간 살펴본 고대 그리스의 Sex & Sexuality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사회적 신분(Social Status)”과 “교육”이었습니다. 어린 남성이 사회의 주체인 성인이 되기 위한 과정의 각 단계 속에서 그에 걸맞는 성적 역할이 주어지고, 한 명의 개체에게 있어 그 역할은 나이에 따라 변화합니다. 오로지 그리스 시민사회의 남성에게만 이 역동적이고 주체적인 성적 역할이 주어지고, 그 외 여성이나 외국인에게는 고정되고 수동적인 성역할이 주어집니다. 물론 이러한 규정은 고대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의 차별성을 간과한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천년에 이르는, 거리로 따져도 수천킬로에 다다르는 엄청나게 복잡한 고대 근동 전체의 전반적인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단순화의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음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고대 폼페이의 사창가>


    고대 로마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는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계급(Class)”입니다. 로마에서는 출신계급이 자유시민이냐 아니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즉, 자유시민만이 능동적인 성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뿐, 그 외의 계급은 수동적인 성 역할을 부여받습니다. 사실 고대 로마의 계급은 근대사회의 유산계급, 무산계급 등에서 말하는 계급과는 많은 차이가 있고, 오히려 그리스의 “사회적 신분”에 많은 부분이 겹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계급이란 용어를 쓰는 것은 그리스의 “사회적 신분”이란 용어와의 약간의 뉘앙스 차이를 보다 극명히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리스의 “사회적 신분”과 로마의 “계급”이 성적 역할에 있어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예를 들어 설명해볼까요? 고대 그리스의 성인남성은 자신보다 아래의 신분을 가진 남성 혹은 여성과 성적 관계를 갖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았습니다. 즉, 하층민이나 외국인과의 성적 접촉은 자신의 신분을 낮추는 행위로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반면에, 로마에서는 자유시민(free-born)계급이 아닌 어떠한 대상도 성적인 상대로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특히 노예는 자유시민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주인 마음대로 언제든 성적 대상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각주:1] 물론 다른 사람의 노예의 경우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습니다. 다른 자유시민의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것이니까요.  


    가장 초기의 로마 극작가 중의 한명인 플라우투스(Titus Maccius Plautus, c. 254-184 BC)의 “쿠르쿨리오(Curculio)”라는 작품을 보면 이런 점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포주 카파독스에게는 플라네지움이라는 아리따운 여자노예가 있었는데, 자유시민인 파에드로무스가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집니다. 다른 사람의 노예이기 때문에 합법적인 댓가를 지불해야 해서 파에드로무스는 돈을 빌리려고 합니다. 하인 쿠르쿨리오의 기지로 돈을 빌리게 된 파에드로무스는 포주 카파독스와 노예매매 계약서를 작성하는데, 이 계약서의 조항은 “만약 플라네지움이 자유시민으로 판명이 되면 계약은 취소되고 돈은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연극의 결말은, 결국 플라네지움이 자유시민 출신임을 알게 되어, 파에드로무스는 플라네지움과 주인과 노예 관계가 아닌 남편과 아내로서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는 해피엔딩입니다.[각주:2]


    대표적인 19금 추천미드인 “스파르타쿠스”를 보면, 검투사들의 주인인 바티아투스와 그의 아내 루크레티아가 노예와 검투사들과 자유로이 성행위를 하는 장면들이 (자주!) 나옵니다. 물론 아내의 경우 남편 몰래 검투사와 바람을 피웁니다만. 이런 장면들은 꽤나 역사적인 고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와 비슷하게 로마에서도 사회의 주체는 자유시민 남성입니다. 자유시민 남성의 몸은 침해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때려서도, 육체적인 징벌이 가해져서도 안 됩니다. 만약 자유시민 남성이 강간을 당할 경우 살인에 해당하는 범죄로 여겨져서 가해자에게는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이것은 자유시민 아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동에 대한 성범죄를 금지하는 고대 로마의 법인 lex Scantinia에 따르면, 자유시민 남자아이와 성관계를 가질 경우 사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 상대방이 로마의 자유시민인 경우 실제 사형이 언도되지는 않았던 듯 합니다. 이 lex Scantinia라는 법의 존재 때문에 고대 로마는 그리스와 다르게 동성애를 엄격히 금지했다는 식으로 잘못 이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 법은 동성애 금지법이 아니라, 자유시민 남성 (아동) 보호법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자유시민이 아닌 노예나 외국인과의 동성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금지조항이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리스와 로마는 크게 갈라집니다. 교육 차원에서 (서로 나이 차이가 있는) 동성간의 성적 관계를 장려하던 그리스와는 달리, 로마의 남자아이들은 자신의 몸이 침범당할 수 없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배웠습니다. 또한 노예나 외국인과의 성관계를 바람직하지 않게 보던 그리스의 관습과는 다르게, 로마의 자유시민에게는 노예나 외국인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또한 동성간의 관계를 보자면, 로마 자유시민 남성이 성행위에 있어서 수동적인 입장을 보이는 경우만을 제외한 나머지 경우는 사회적으로 문제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자유시민 여성들은 어떠했을까요?


    자유시민 여성의 경우 노예와 마찬가지로 수동적인 성적 역할만을 부여받았습니다. 하지만 타인의 아내에 대한 강간이나 불륜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여성의 몸을 사회적으로 보호한다기 보다는 남자의 “재산/소유물”을 보호하려는 것이었죠. 미혼 여성의 경우 소유권은 아버지에게 있고, 기혼인 경우 남편에게 있었습니다. 기원 전 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최초의 로마법인 leges duodecim에 따르면, 여성이 불륜을 저지르는 경우 불륜상대자 두 명 모두 사형에 처하는데, 이 때 사형집행은 여자쪽 집안사람들에 의해 행해집니다. 일종의 “명예살인”인 셈이죠. 나중에 이 법은 많이 완화되는데, 기원전 1세기의 아우구스투스가 제정한 법에는 불륜이 발생할 시 경우에 따라 다른 형벌이 주어집니다. 유배나 재산압류, 혹은 이혼. 물론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만약 불륜이 벌어진 장소가 미혼여성의 아버지 집이거나 기혼여성의 남편 집일 경우, 로마 자유시민 남성의 사유재산에 대한 심각한 침해로 여겨져서 사형을 언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여성들 사이에서 동성간이든 이성간이든 자유로운 성관계가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드라마 스파르타쿠스의 루크레티아처럼 남편 몰래나 가능했을 듯 합니다.


    방만한 그리스문화와는 다르게 로마는 훨씬 검소하고 엄격한 이미지가 있긴 합니다. 세네카 같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이 자기절제를 주장하면서 결혼제도 내에서만의 성행위를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갈레누스(Claudius Galenus, 129-216 AD)나 소라누스(Soranus of Ephesus) 같은 의사들은 극단적인 금욕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금욕이 남자를 더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믿음에서요. 하지만 이러한 일부 문헌들로부터 고대 로마의 성풍속을 금욕적이었다고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대중적인 문화를 잘 드러내 보여주는 고고학적 유물들로 살펴보자면 고대 로마는 성을 아주 자연스런 삶의 한 부분으로 여겼음에 분명합니다. 일단 사창가가 상당히 발달했습니다. 국가에 의해 경영되는 공창제도로까지 보기는 어렵지만 여러가지 법률적 규정에다 세금까지 부여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각주:3] 사창가 벽에는 로마의 포르노에 해당하는 아주 노골적으로 성행위를 묘사한 벽화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스핀트리아(spintria)”라 불리는 동전들이 서기 1세기 경을 중심으로 많이 발굴되었는데, 각 동전의 뒷면에는 1부터 16까지의 숫자가 새겨져 있고, 앞면에는 각기 다른 체위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동전이 사창가에서 통용되던 화폐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화폐를 가지고 사창가에서 매음을 하려다 사형당한 경우도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 학설은 좀 문제가 있는 게 이 스핀트리아라는 동전이 사창가에서 발견된 게 아니라 주로 공중목욕탕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여 이 동전들이 아마도 당시 어떤 종류의 게임에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암튼 이 동전들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동전 : 스핀트리아(Spintria)>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리스 신화에서 그리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던 풍요와 남근의 신인 프리아푸스(Priapus)가 로마시대에 굉장히 널리 숭배되었다는 점입니다. 프리아푸스에게 헌액된 성전 중에 현존하는 것은 없지만, 여러군데 있었다는 문헌기록은 남아 있습니다. 소아시아와 이탈리아 본토의 가정집, 특히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거대한 남근을 가진 프리아푸스의 상이 많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풍요의 상징으로서 프리아푸스가 고대 로마의 대중문화/민중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듯 합니다. 고대로마가 멸망하고 기독교화된 한참 이후에도 이 프리아푸스의 거대한 남근은 여전히 대중들에게 사랑 받았습니다. 13세기 북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라너코스트 연대기(Lanercost Chronicle)”에는, 어느 농부가 소들이 떼죽음을 당하자 질병을 막기 위해 프리아푸스 신상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각주:4] 캐나다의 몬트리올에는1980년대에 세워진 Église S. Priape (St. Priapus Church) 라는 교회가 있기도 합니다.



<프리아푸스>


    이렇듯 고대 로마는 그리스와 다른 자신만의 Sex & Sexuality를 발전시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 로마와는 또 다른 성개념이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발견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고대근동지방의 Sex & Sexuality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Bonnefoy, Y. (1992), Roman and European Mythologies, Chicago. 

Clarke, J. R. (1998), Looking at Lovemaking: Constructions of Sexuality in Roman Art, 100 BC – AD 250. Berkeley.. 

Gaca, K. L. (2003), The Making of Fornification: Eros, Ethics and Political Reform in Greek Philosophy and Early Christianity. Berkeley. . 

Kiefer, O. (2000), trans. G. & H. Highet, Sexual Life in Ancient Rome, New York. . 

Skinner, M. B. (2005), Sexuality in Greek and Roman Culture, Malden, MA. . 

Williams, C. A. (1999), Roman Homosexuality: Ideologies of Masculinity in Classical Antiquity. New York. . 



ⓒ 웹진 <제3시대>

  1. 노예들에 대한 처우는 하드리아누스(76-138 AD) 황제의 법률개정 때 좀 나아집니다. 그는 노예제도 자체는 인정했지만, 주인이 함부로 노예들을 죽이거나, 검투사나 창녀로 만들 수 없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한, 주인이 노예를 성적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한 금지는 없었던 듯 합니다. http://spartacus-educational.com/ROMhadrian.htm 참조. [본문으로]
  2. https://en.wikipedia.org/wiki/Curculio_(play) [본문으로]
  3. 사창가에 세금을 부여한 최초의 로마 황제는 그 유명한 칼리굴라(Gaius Jul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12-41 AD)입니다. [본문으로]
  4. Yves Bonnefoy, Roman and European Mythologies (139-142),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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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깊은 산속 일곱난장이 소녀


여름이면 반딧불이 모여들듯 움막에 모여


밤새 도란도란



움막이 사라진 도심에 일곱난장이 할머니


여름내내 골목녁에 저리 앉아


밤새 도란도란



더위려니 했더니,


추석도 지난 시월에 두터운 옷 챙겨입고


밤새 도란도란



 

 

 이수만 作 (한백교회 교인)

 

 

 

 * [사진에세이]는 한백교회 사진동아리 '눈숨' 회원들의 작품을 연재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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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테온에서




오종희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광화문 대극장


     거대 도시인 서울하고도 그 중심인 광화문 일대를 산책자가 되어 걷다 보면 이곳이 일종의 무대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우아한 상점이나 최신의 유행 같은 소비 자본주의 얼리어댑터들의 성지는 강 건너 남쪽으로 천도한지 이미 오래된 이야기 이지만 강 건너의 그런 화려함과 스타일리쉬함 만으로는 격동의 연극적 무대를 채우기 밋밋하다는 점에서는 역시나 세습 군주가 살던 왕궁과 민주제 대통령이 사는 청기와 집과 야단법석 아고라가 공존하는 광화문이 대한민국의 파토스를 상연하는 무대라 하기에 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한 쪽에서는 중국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관광버스가 차도에 늘어서 키 높은 성벽을 만들고 한쪽에서는 궁궐 수문장 교대식이 그 곳이 과연 무대임을 확인 시켜주고 한 쪽에서는 어지러운 글귀와 남루한 천막, 노란리본이 바람에 파르르 떠는 가슴시린 광경이 시간차도 없이 단지 몇 백 미터 안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곳, 아니 동시에 상영되는 곳이 광화문 무대인 것이다. 

    그런데 무대상의 올려 진 광경이 난장판이라면 난장판이고 부조리하다면 부조리하고 퓨전적이라면 퓨전적인데 비해 막상 그 무대라는 모양새가 갖는 건축적인 구조는 권위적 이라는 얄궂은 구멍이 존재한다. 

    광화문 성벽을 중심으로 무대는 T자 모양으로 정리되고 그리곤 누구나 알다시피 장군님 뒤에 대왕님, 대왕님 뒤에 광화문 그 뒤에 경복궁 그 뒤에 청와대가 위치한다. 거꾸로 거스르면 청와대에서 아래로 아래로 굽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무대의 효과는 매우 드라마틱해서 광화문 광장에서 바라보면 청와대와 인왕산 후면으로는 마치 세상의 끝일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연극 무대 위 파사드 장치처럼 더 이상의 배후는 없고 그 곳부터 앞으로 앞으로의 발현만이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광화문 거리는 일종의 대극장인 셈이다.  

    입체 무대나 마당극 류의 열린 무대가 아니라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관객은 한 방향을 바라보며 더 이상의 배후는 없다. 관객은 입 다물고 조명이 꺼지면 한 시간이건 두 시간이건 필름이 돌려지는 방향을 거스를 수 없다. 얌전히 착석하여 감상하는 무대 그것이 광화문 무대이다. 장군님부터 대통령까지의 국가 급 영웅만이 활거 할 수 있는 곳, 일관된 서사로서의 희곡만이 올리도록 디자인 된 곳이 광화문 무대이다. 막간의 쉬는 시간에 분수 터에서 옷 적시며 즐거워할지언정 뭔가를 외치거나 뭔가를 주장하기에 혹은 개미 관객의 존재감을 드러내기에는 위압감으로 인해 쫄게 만드는 곳, 아니면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부적합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군사 독재시절 5.16 광장으로 불리기도 했던 여의도 광장은 열 맞춘 탱크를 앞세운 군대의 퍼레이드나 ‘국풍 81’ 같은 관변 축제가 어울릴만한 대규모 아스팔트 광장이었다면 광화문 광장은 셀카 봉을 들고 나와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여름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간헐적으로 바닥에서 솟아나는 분수를 즐기기에 적합한 곳 그도 아니면 천만의 인구가 바글거리는 도시의 중심에 와 있다는 근거 없는 만족감을 주기에 적합한 소규모 시멘트 광장이다. 

    여의도 광장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얼핏 시대도 변하고 그 광장의 사용 주체도 정부에서 시민으로 옮겨지고 광장을 채우곤 했던 덩어리진 프로파간다는 없어진 듯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프로파간다는 없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동원하지 않아도 기꺼이 광장을 제 발로 채우는 시민이, 관광객이 그 역할을 맡는다. 그들이 자발적인 모습으로 광장을 즐기는 한, 사진을 찍고 밝은 웃음을 흘리는 한, 교양시민의 줄쳐진 질서를 지키는 한 모두는 광화문 광장의 화려한 내용물이 된다. 당연히 동원된 어색함이나 칙칙함에 비 할 수 없다. 그들은 밤하늘 별들처럼 개별적으로 빛나고 반짝거린다. 그리하여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들은 잘나가는 국가의 일관된 서사를 위한 프로파간디스트들이 된다.

     그래서 광화문 광장 한 켠 일관된 서사를 방해하는 저항의 노란 리본이 누구에게는 그 어느 곳보다도 부조리해서 더 가슴 아픈 광경으로 보이게 하고 누구에게는 이제는 그만 봐야 할 지리멸렬한 광경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런 부적합은 광화문에 국한된 일은 당연히 아니다. 대한민국 대도시 어디에도 자본 사회가 제공 하는 서사를 방해하는 존재나 퍼포먼스를 환영하거나 어울릴만한 곳은 없다. 도시란 곳이 그런 곳이 아닐까. 자본과 권력이 눈덩이처럼 뭉쳐져서 덩치 큰 빌딩으로 존재하는 곳, 빌딩과 빌딩 사이 가장 높은 펜트하우스 어디쯤에 자본과 권력이 모셔진 지성소가 차려져있을 것만 같은 곳. 그래서 군부 독재시절의 폭력이나 확성기를 동원한 촌스러운 계몽 없이도 도시가 보여주는 건축적 이미지만으로도 교양시민은 저절로 훈육되어진다. 그래서 십인십색 백인백색 개성 강한 외모의 행인들이 거리를 채운다 해도 그들의 발랄한 에너지는 기존 법규의 그물망에 거하는, 권력에 의해 어떤 형태로든 변환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깔끔한 배터리의 형태가 아닐까. 백만 스물 하나! 백만 스물 둘!





판테온


     광화문 동십자각 옆 한 유명한 사진관 앞을 지나다 보면 쇼윈도우에 걸어 놓은 아주 재미난 사진이 눈에 띈다. 수십 명의 유명인들 머리가 검은 바탕위에 성스럽게 박혀있어 마치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경배라도 올려야 될 것만 같은 사진이다. 요즘 말로 웃픈 사진이다. (자세히 보면 얼굴들 간의 서열도 분명하다.) 

    그들이 사진에 그렇게 걸려있는 이유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그 들은 그 사진관에서 사진을 박은 유명인들 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 사실이 이 사진관의 영광이었기 때문일 테고 확대해서 표현하자면 그들은(연예인을 제외하고) 단순 유명인이 아닌 어떤 식으로든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했던 혹은 하고 있는 갑중의 슈퍼 갑으로서 유리 만신전에 모셔야 할 권력의 현현들이기 때문이다.

    보는 이의 성향에 따라 혹은 이해하기에 따라 수 십 명을 한 신전에 몰아넣은 것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거부감 정도는, 뭉텅이로 그들의 얼굴을 몰아놓곤 뭘 느끼라는 건지 명령하듯, 군림하듯 하는 사진 이미지의 가차 없음이 주는 미식 꺼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로써 광화문 대극장에서 상연되는 또 하나의 국가 급 서사를 목도하는 순간이다.





    때마침 십대 소녀 몇 명이 걸어오다 만신들을 발견한다. 아마도 신들의 용안을 알아보는가 보다. 자기들 끼리 부산하게 움직이며 기웃거린다.





    그러고는 만신전을 배경으로 번갈아 사진을 찍는다.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던 내 카메라를 발견하자 해맑게 웃어주기 까지 한다. 한 번만 더 찍겠다고 내 쪽에서 집게손가락을 펴 보이자 이내 V자 까지 만들어 준다. 그 모습을 보자 미식 거렸던 내 속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괜한 트집이었을까. 괜한 분노였을까. 

    그렇다. 아이들에게는 저 권력의 현현들이 단지 나들이 추억을 배가 시켜줄 사진 배경 이상도 이하도 아닐 런지 모른다. 전직 대통령 얼굴을 알아 본 거고, 연예인을 알아본 거고 , 나머지 얼굴은 누군지 잘 모르는 거고 더욱이 단 한 번도 그들을 신이라 생각해본 적 없는 거고 단지 즐거운 외출을 위한 환경일 뿐인 거고 그러면 되는 거지 보기 좋게 만신들을 이용한 거지...

     하지만 꺄르륵 거리며 어디론가 걸어간 아이들 뒤로 다시 웃픈 사진을 보자 권력이 의도하는 건 정확히 이정도의 반응, 이정도의 소극적 경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지 넘어 외에 더 이상 관심 갖지 말고 더 이상 가까이 가려하지 말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선 밖의 자리를 지킬 것, 기꺼이 알아보고 즐거이 사진 찍을 정도의 소극적 경배를 하되 불온하게 상층부 지향성을 갖지 말 것, 그리하여 영원한 브라만의 팍스 코리아나를 공고히 할 것!


용도변경


     저 해맑은 아이들이, 광화문에서 아니 도심 어디에서건 은밀히 작동하는 통제기술 앞에서 불온을 생각하는 새로운 산책자가 되길 꿈꾸어 본다. 통제자가 기획하는 예상되어진 동일한 반응을 백만 스물 한번 반복하는 에너자이저가 아닌, 생각이 멈춘 도심 공간 곳곳에 맞서 충분히 놀 수 있는 주체로, 이름 정해지지 않은 놀이를 하는 주체로, 생각하는 주체로 걷게 할 수는 없을까. 내가 했던 백만 스물 한번 왕복 운동에 대를 이은 아이들이 백만 스물 두 번째 왕복 운동을 반복하며 계속해서 매끈한 서사가 이어지는 이 공포의 무대에 회심의 태클 걸기란 어떤 것일까. 혹시 무대라는 공간을 용도 변경하는 것이 태클 걸기의 작은 모습이 아닐까. 광화문 광장 노란 리본과 천막이 매끈한 영웅 무대의 일관성에 이의를 제기 하듯이 도시 공간이 의도하는 용도에 불온을 담아내는 것, 통제 기술이 의도한 결과 이외의 것을 그 공간에 발생시키는 것, 그래서 일시적이나마 전혀 생경한, 도시의 헤테로 토피아를 출현하게 만드는 것, 만신전 앞에서 실컷 웃어주거나 가볍게 개 무시 해 주는 것, 도시 공간 자체를 수만 개의 촛불로 채워 질 가능태로 보는 것, 그래서 맘속에 항상 촛불 하나 오롯이 켜두는 것 말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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