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비' 성폭행 사건을 대하며 : 빠지지 말아야 할 '유혹'들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나의 연구실과 강의실이 있는 학교 내의 건물 이름은 코스비 (Cosby)이다. 정확하게는 ’카밀 올리비아 행스 코스비 빌딩’ (Camille Olivia Hanks Cosby Building)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 인기리에 상영되었던 [코스비 쇼]의 주인공인 빌 코스비의 부인인 카밀 코스비의 이름이 붙여진 빌딩이지만 줄여서 코스비라 불리고 있다. 이 대학은 1988년에 코스비가족으로 부터 약 200억원 ($20 million)을 기부 받았는데, 미국내 흑인 대학교들이 받은 기부금 중 최고의 액수였다. 그 기부금의 일부로 시설이 좋은 코스비 건물이 지어졌고, 기부금의 또 다른 일부는 매년 ‘코스비 교수’ (The William and Camille Olivia Hanks Cosby Endowed Professorship)를 초빙하는데 쓰여져 왔다 (‘코스비 교수’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문학이나 예술 분야에서 명망이 있는 학자를 일년에 한명씩 뽑아 학교로 초빙해 왔다). 작년 겨울에 빌 코스비의 성폭행 (sexual assault)과 관련된 혐의가 또다시 제기되었을 때 이 대학은 ‘코스비 교수’ 프로그램을 폐지했다.[각주:1] 올 여름 마흔 명이 넘는 여성들이 빌 코스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증언을 하면서 그의 혐의가 다시 제기되었을 때는 남은 기부금 전액을 카밀 코스비가 세운 클라라 엘리자베스 잭슨 카터 재단 (The Clara Elizabeth Jackson Carter Foundation)에 되돌려준다는 결정을 내렸다.[각주:2]


    코스비의 여성을 상대로 한 다양한 형태의 성폭행은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코스비의 성폭행에 대한 혐의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즈음이다. 지난 십년 동안 몇 명의 여성들이 그의 성폭행 혐의를 제기하고 자신들의 피해경험을 얘기 했지만, 그때마다 코스비 사건은 묻혀버렸다. 2014년에 코스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성들이 여러 명 나타나면서 코스비 사건은 더 이상 묻혀 버릴 수 없는 일이 되었다.[각주:3] 그동안 코스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피해 여성들의 숫자는 현재 52명 (2015년 8월 25일 기준)이다.[각주:4] 수십명의 여성을 상대로한 성폭행 혐의와 관련해서 빌 코스비는 아직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현재 기소되지 않은 상태이다.


    코스비의 성폭행 혐의를 접한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반응도 엇갈렸다.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코스비를 비난하는 소수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혐의를 일단 믿기 어려워 했다. 1980년대 [코스비 쇼]에서 화목한 흑인 중-상류층 가정의 유쾌하고 자상한 ‘가부장’을 연기하면서 ‘아메리카의 아버지’로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코스비의 이미지가 성폭행을 행사한 가해자로서의 코스비와는 도저히 맞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흑인 커뮤니티에서 코스비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흑인들이 코스비를 옹호하거나 보호하려는 것은 ‘존경받고 사랑받는’ 코스비의 이미지 때문 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의 잔인했던 흑인 ‘폭행’ (lynching)의 역사와도 일련의 관련이 있다. 노예 해방후 남부 지역에서 흑인들을 향한 백인들의 잔인한 폭행과 살인은 흑인 남성들, 여성들, 그리고 아이들에게 까지도 거침없이 자행 되었다. 특히 흑인 남자들은 백인 여성을 ‘강간한 죄’로 폭행 당하고 살해 당했으며, 심지어는 ‘눈으로 하는 강간’ (eye rape)도 수감과, 폭행, 심지어는 살해를 당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흑인 남성들에 대한 미 백인들의 폭행의 대부분은 조작되었거나 거짓 증언의 결과였다. 폭행과 살해를 정당화 하는데 사용되었던 “흑인 남성은 강간범”이라는 이미지가 고정관념이 되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이런 잔인한 역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흑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코스비 역시 그의 피해자들로 알려진 여성들 중 대다수인 백인여성들의 거짓 증언의 희생자라고 여기고 그를 옹호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흑인여성 피해자들과, 피해자들의 증언을 우선 믿고 연대하는 여성들은 도데체 몇 명의 피해자가 나와야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 들일 것인가라고 울분을 토하면서, 코스비가 자신의 행동을 책임 질 것을 촉구해 왔다. 또한,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면서, 코스비를 옹호했던 몇몇 유명인사들도 자신들의 코스비 지지발언을 철회하고 있다.  


    미국의 잔인한 흑인 폭행과 살해의 역사가 코스비 사건을 수면으로 떠오르게 하는데 시간을 지체시킨 면도 있지만, 코스비 사건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성폭행의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질문과 시선이 다른 비슷한 사건들의 경우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된다. 성폭행 피해자가 거짓 증언을 하는 경우는 사실 매우 드문데,[각주:5] 다른 범죄들의 경우와 달리 성폭행일 경우 유독 피해자의 거짓 증언의 가능성이 제기되거나, 가해자보다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일이 빈번하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성폭행의 사례들, 특별히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남성들이 가해자일 경우들도 그 예외가 아니다.  


    믿고 뽑아준 국회의원, 믿고 배운 교수, 믿고 따른 교사, 믿고 헌신한 목사, 믿고 맡긴 의사, 믿고 보는 배우, 믿고 안심한 경찰, 믿고 도와준 시민운동가… 만약 그렇게 굳게 믿었던 공동체의 영향력있는 남성이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내가 속한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근절을 위해 지난 수십년간 활동하고 글을 써온 마리 포춘 (Marie Fortune)과 제임스 폴링 (James Poling)은 피해자 여성이 그녀가 속한 공동체 (교회 공동체도 포함해서)의 영향력 있고 힘있는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을 폭로했을 때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여섯가지 유형의 ‘유혹’에 대해 말한다.[각주:6] 그 “유혹’들은 다음과 같이 나타날 수 있다.  


    1. 믿지 못하는 유혹

    예)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 “그 남자가 그랬다니… 믿을 수가 없어!” “그럴 남자가 아냐!” 


    2. 교회 (공동체)의 이미지를 보호하려는 유혹

   예) “교회를 위해서 일을 더 크게 벌리지 말자.” “모두를 위해서 그냥 조용히 덮고가자.” “우리가 어떻게 이뤄 온 공동체인데... 왠만하면 공동체를 생각해서 이번 한번만 넘어가자.” 


   3. 피해자를 탓하려는 유혹

   예) “그 여자는 왜 그 시간에 그 남자의 사무실에 갔지?” “그 여자가 뭘 바란건 아닌가?” “왜 굳이 따로 만나려고 했지?” “왜 그 여자는 그 시간에 그런 (야한) 옷을 입고 거기에 갔지?”: 


   4. 가해자를 동정하는 유혹

   예) “어쩌다 그렇게 됬을까.” “외로웠나 보다.” “마음이 너무 약해서 만나주다 보니 그렇게 됬다.” “아마 무슨 연유가 있었을 것이다.” “(피해여성의)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갔다.” 


   5. 가해자를 그의 행동의 결과로부터 보호하려는 유혹

   예) “앞날이 창창한데 한번 정도 실수는 봐줘야지.” “경찰서까지 갈 필요없이 그냥 합의를 하지.” “법으로 처리하면 그 사람과 그 가족은 앞으로 어떡하라고.” 


   6. 값싼 은혜의 유혹

   예) “이제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으니 앞으로는 다시 그러지 마라.” “하나님께 회개를 하고 용서를 구하면 죄사함을 받고, 다 해결 될 것이다.”  

   

   이 여섯가지 유혹들 중 그 어떠한 것도 피해자를 ‘위한’ 유혹은 없다. ‘유혹’ (temptation)이란 단어의 여러가지 어원들 (한 예로 희랍어peirasmos) 을 보면 ‘유혹’은 결과를 수반하는데 그 결과는 잘못된 것이거나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즉, 위의 여섯가지 유혹들 중 한가지에라도 빠지게 되면 잘못된 결과를 가져 오게 되는데, 그 결과는 어렵게 자신의 피해를 폭로한 피해자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잘못을 덮어주고 넘어 감으로써 결국엔 그가 또 다른 가해를 행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유혹’에 넘어간 개개인들과 공동체는 성폭행의 악순환을 끊는 것을 방해하고 지체함으로써 넓은 의미에서 공범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유혹들이 되풀이 되면 피해자의 회복은 점점 어려워 지고, 가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들을 만들어 내면서 교회든 어느 공동체에서든 성폭행의 악순환은 계속되는 것이다.

  

    만약 공동체가, 특별히 교회가, 가해자와 공범 집단이 되어서 사건을 은폐하는데 급급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성폭행의 악순환을 끊어 내는 것을 우선 순위로 여긴다면,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유혹들을 떨쳐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여섯 가지의 ‘유혹’을 여섯 형태의 ‘용기’으로 바꾸는 것이 그 첫 단계가 될것이다.  


    한국어사전은 ‘용기’를 날랠 용 (勇)과 기운 기(氣)를 써서, “씩씩하고 굳센 기운. 또는 사물을 겁내지 아니하는 기개”라고 적고 있다. ‘용기’라고 번역되는 영어 단어인 ‘courage’는 심장, 즉, 마음과 연결되는 단어이다. Courage의 어원인 ‘cor’는 라틴어로 심장/마음 (heart)을 뜻한다. 지금은 그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용기(courage)라는 단어는 원래 “온 마음 (heart)을 다하여 내 생각을 말하는 것”[각주:7] 이란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혹’ 대신에 어떤 ‘용기’가 필요한 것일까?  


    피해자의 얘기를 듣고 믿어주는 용기 

    피해자를 탓하지 않는 용기 

    상황을 덮으려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막는 용기 

    공동체나 조직의 이미지 유지보다 피해자의 편에 서는 용기 

    지위와 영향력에 상관없이 가해자가 책임질 것을 요구하는 용기 

    가해자에게 값싼 은혜 (빠른 용서)를 퍼부어 주지 않는 용기.  


    그런데, 공동체를 이루는 개개인들의 이러한 용기는 제도적으로 뒷받침 되어져야 한다. 피해자에게는 정의로운 해결과 회복을 가져다 줄 수 있고, 가해자에게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하는 제도, 그리고, 공동체 역시 적합하고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을 경우에 그 담당자들도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도가 개개의 교회와 교단 및 일반 사회에 정착되어져야 한다.  


     이렇듯이 개개인이 ‘유혹’에 빠지지 않고, 공동체 및 사회의 제도가 제대로 적용되고 정착되는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뿌리 깊은 여성혐오, 성차별, 남성우월주의, 위계질서가 왜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할 문제인지를 묻는 비판적인 교육이다. 개개인들이 유혹에 빠지지 않고 용기있게 행동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와 지속적인 교육이 병행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위의 여섯가지의 유혹들이 더 이상 ‘유혹’이 될 수 없고, 여섯가지의 ‘용기’가 특별한 것이 아닌, 그저 내가,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이 될 때 성폭행의 근절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코스비빌딩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계속해서 물을 것이다. 데이트 폭력을 포함해서 성폭행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 지고 있는 대학 캠퍼스와 사회에서 학교는, 교수들은, 직원들은, 동창들은, 종교기관들은, 사법기관들은, 그리고 사회 구성원 개개인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또 다른 코스비가 나오지 않게 하려면 누구든지 빠질 수 있는 유혹과 누구나 가져야 할 용기들에 대해 계속해서 대화해야 할 것이다. 갈길이 멀지만 바로 지금 여기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ww.huffingtonpost.com/entry/spelman-college-drops-bill-cosby-professorship_55b4417ee4b0224d8832819b [본문으로]
  2. http://time.com/3972281/bill-cosby-spelman-college/ [본문으로]
  3. http://www.slate.com/blogs/browbeat/2014/11/21/bill_cosby_accusers_list_sexual_assault_rape_drugs_feature_in_women_s_stories.html [본문으로]
  4. http://starcasm.net/archives/306591 [본문으로]
  5. http://web.stanford.edu/group/maan/cgi-bin/?page_id=297 [본문으로]
  6. Marie M. Fortune and James Poling, “Calling to Accountability: The Church’s Response to Abusers,” in Violence Against Women and Children: A Christian Theological Sourcebook, ed. Marie M. Fortune and Carol J. Adams (New York, NY: Continuum, 1995). [본문으로]
  7. http://www.pbs.org/parents/experts/archive/2010/11/courage-is-a-heart-word-and-a.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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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 


(Walter Brueggemann)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지난 2015년 9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을 방문했고 많은 미국인들이 열광했다. 교황의 미국방문 중 언론의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것은 바로 교황의 연방의회와 유엔에서의 연설이다. 교황의 중심 메시지는 보편적 복지였다. 이를 위해서 법을 만드는 의회나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 모두가 힘을 합쳐 공동이익과 결속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보편적 복지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지나친 이분법적 접근, 즉 선과 악 또는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분리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분리주의가 이웃과의 담을 만들고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고 미국의 이민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황은 미국이 “우리가 아닌 그들”이란 말을 사용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경종을 울린다. 교황은 모두를 “우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 안에 진정 보편적 복지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성서학자 월트 브루거만도 자신의 책 『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Journey to the Common Good)에서 교황과 같은 주장을 한다. 미국은 시간이 갈수록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빈부격차를 현재 미국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까지 이야기했다(Pew Research Center). 한국도 빈부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고 비정규직이 전체 근로자의 3분의 1을 넘어서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영구 빈곤층이 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루거만은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와 예언서 예레미야와 이사야를 통해서 본 보편적 복지의 개념을 오늘날 우리 시대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해답으로 내놓고 있다.


   1. 브루거만은 자신의 책 1장에서 출애굽기의 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을 언급하고 있다. 출애굽기의 중심 주제는 단순히 노예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를 향한 기나긴 여정의 출발로 볼 수 있다. 브루거만은 애굽 왕 바로를 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묘사하고 있다. 바로가 지배하는 애굽 제국은 당시 고대근동의 최대의 곡창지대였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바로가 요셉과 부와 자본을 독점하는 방식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기근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요셉에게 와서 돈으로 곡식을 사는 경제행위를 한다. 결국 애굽과 가나안 땅의 모든 돈이 요셉에게로 몰렸고 요셉은 벌어들인 돈을 바로의 궁으로 보낸다(창세기 47:14). 사람들은 양식과 교환할 돈이 다 떨어지자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을 요셉에게로 끌고 온다(창세기 47:17). 양식과 바꿀 집짐승도 다 떨어지자 사람들은 양식을 얻기 위해 자신들의 몸과 밭을 요셉에게 판다(창세기 47:19). 칼 막스의 이론에 의하면 애굽 제국의 “생산수단”(means of production)이 바로에 의해 독점 지배되고 있는 구조다. 결국 밭에서 생산된 것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바치는 애굽 제국의 토지법이 만들어지게 된다(창세기 47:26).[각주:1] 브루거만은 애굽 제국의 노예제도는 소수권력 계층의 교묘한 조작으로 인한 부와 재산의 독점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출애굽기는 단순한 노예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애굽 제국의 독점경제에서 광야의 보편적 복지를 향한 대탈출이라고 주장한다.[각주:2] 출애굽기 5장은 무자비한 노동력 착취를 자행하는 바로와 보편적 복지를 위해 출애굽하기를 원하는 모세와의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브루거만은 애굽 제국의 독점경제의 시작을 바로가 꾼 악몽에서 보고 있다. 바로의 꿈과 대조적으로 모세는 보편적 복지를 향한 희망의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출애굽 한 히브리인들이 보편적 복지의 삶을 처음으로 배운 곳이 바로 광야다.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만나는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애굽 제국의 피라미드식 생산경제 체제와 구별된다. 첫째, 만나는 일용할 양식으로서(출 16:4), 자신에게 필요한 양만큼 만 거두어 양식을 불의하게 축적하는 애굽 제국의 독점 경제체제와 다르다(출 16:16). 둘째, 만나를 거두는 행위는 애굽 제국의 노예제를 통한 착취된 노동이 아니라 자발적 노동이다(출 16:16). 셋째, 만나를 통해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불안과 걱정으로 고통 받는 애굽의 삶과 달리 결핍 속에서도 풍성한 나눔과 감사가 넘치는 아름다운 광야의 삶을 엿볼 수 있다(출 16:18).


    브루거만은 시내산의 십계명 중 안식일 준수계명은 단순히 예배가 아니라 애굽 제국의 시스템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고 더 나아가 끊임없는 소유와 부를 추구하는 물질 만능주의 삶으로부터 해방하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애굽 제국의 경제는 끊임없는 노예의 노동으로 굴러가는 사회로서 히브리 노예는 쉼 없는 노동으로 착취당했던 것이다.[각주:3]


    마가복음 6장의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장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가 실현되는 방식을 예수께서 직접 보여주고 있다. 브루거만은 광야의 만나와 예수의 오병이어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복지는 오늘날 독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보편적 복지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하늘의 메시지라고 주장한다.


    2. 브루거만은 광야 시내산의 핵심인 보편적 복지사회의 메시지가 예언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브루거만은 자신의 책 2장에서 예레미야의 보편적 복지를 향한 예언자적 외침을 언급하고 있다. 브루거만은 예레미야가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종교적, 도덕적, 경제적 악행을 고발하고 있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예레미야는 다윗왕조의 악행의 최고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솔로몬의 통치를 강하게 비판한다(예레미야 9:23-24). 이어서 브루거만은 솔로몬 왕조의 번영과 부귀를 미국의 부귀영화에 비교한다. 예레미야는 솔로몬의 종교적, 도덕적, 경제적 악행을 하나님의 사랑, 정의, 공의로 맞서고 있다. 브루거만은 이 세 가지 요소는 보편적 복지사회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하늘의 메시지라고 주장한다.[각주:4]  


   3. 브루거만은 자신의 책 3장에서 이사야의 메시지를 통해 보편적 복지를 주장한다. 이사야서의 중심 메시지 중 하나는(특히 제 3 이사야- 이사야 56-66) 바로 포로 귀환 공동체의 재건을 위한 새로운 질서 확립이다. 브루거만은 새로운 공동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보편적 복지라는 것이다. 특별히 이사야 65장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언급하며 브루거만은 이사야의 비전은 다름 아닌 보편적 복지의 비전이라고 역설한다.  [각주:5]


    이 책은 브루거만이 2008년 10월 레젠트 컬러지에서 강의 한 내용을 토대로 2009년 1월에 출판사와 출판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바로 그때 미국은 경제위기를 맞이하였다. 브루거만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큰 문제가 바로 보편적 복지의 상실이라고 단정한다. 그는 구약성서의 출애굽기, 예레미야, 이사야가 꿈꾸었던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 오늘날 우리들이 독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보편적 복지라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만들어 나가야한다고 경고한다. 보편적 복지가 실현된 사회를 하나님 나라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나누고 섬기는 삶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나가는 하나의 거룩한 노력임에 틀림없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월트 브루거만, 『보편적 복지를 향한 여정』(Journey to the Common Goo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0). [본문으로]
  2. 브루거만, 6쪽. [본문으로]
  3. 브루거만, 26쪽. [본문으로]
  4. 브루거만, 68쪽. [본문으로]
  5. 브루거만, 114-115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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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룩거리네 루저들의 주제가

 



유경종

(본 연구소 회원)



    한동안 '루저'란 말이 유행했었다. 비슷한 뜻을 품은 단어의 선배격인 '잉여'니 '낙오자'니 따위들에 비해 한결 가벼우면서도, 시니컬하고 자조적인 뉘앙스를 모자라지 않게 담은 단어. 누군가를 손가락질하고픈 이들은 물론, 스스로를 향한 자학이 필요한 젊은 친구들에게도 자주 이용되었던 것 같다. 루저란 말이 유행하던 시절, 문득 돌아보니 루저는 바로 나였다. 이런 덴장... 짧은 가방끈, 보잘것 없는 경제력, 미혼 등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긴 해도 크게 개의치 않고 나름 명랑하고 뻔뻔하게 세상을 살자고 다짐했었다. 읽고 싶은 책 읽고, 걷고 싶으면 훌쩍 나서고, 듣고 싶은 강의(예를 들면 탈향강좌 같은 명강의!)도 부지런히 들으러 다니면서 재밌게 지내면 그만이지 뭐, 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급격히 명랑함과 뻔뻔함이 위축되는 걸 느낀다. 급기야 최근에는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나는 루저야, 나는 루저야 하는 자각과 묵상을 시도 때도 없이 하게 되는 심각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이거야말로 덴장...

    그런 거지같은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즘엔 이런 저런 항우울제를 스스로에게 억지로라도 처방한다. 한밤중에 달리기도 하고, 주말에 밤을 새워 명랑 드라마를 몰아보기도 하고, 몇 몇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통찰과 깊이를 담지하고 있는 설교문이나 신학칼럼을 천천히 읽기도 한다. 비록 억지 처방일지라도 건강함과 밝음과 진지함의 세계들은 마음의 무거운 그늘을 잠시나마 밀어내준다.

    하지만 노래를 들을때는 좀 다르다. 우울함을 극한까지 몰아붙인 노래, 슬픔과 무기력을 나지막히 읊조리는 노래, 그리고 루저의 찌질함을 정면으로 그린 노래들을 일부러 찾아듣게 된다. 신기하게도 이것도 적잖은 치유가 된다. 노래만큼은 그냥 자기의 정서 상태와 가장 결이 비슷한 걸 듣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참 고맙고 다채롭다. 별걸 다 노래로 만드는 이상한 인간들이 어느 구석엔가는 있어주니 말이다.


달빛요정이 찾아온 밤


    그의 노래를 처음 들은 건 수년전 편의점 카운터를 지키던 시절이었다. 적적하고 지루한 밤들을 FM 라디오를 벗 삼아 지새우곤 했는데, 어느 날엔가 심야방송의 디제이가 갑작스런 사망 소식으로 화제가 된 한 무명 가수의 짧았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죽 들려주었다. 그가 남긴 찌질하면서도 중독성있는 노래들과 함께. 그 이름도 명랑한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본명 이진원)이라나? 심야시간이 원래 노래의 맛깔이 풍성해지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그날은 유독 노래 속으로 빠져들었다. 토해내듯 부르는 달빛요정의 음성과 가사가 내 귀청을 통과해서 마치 독한 술처럼 세포와 혈관에 녹아드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스끼다시 내 인생, 고기반찬, 도토리, 나의 노래, 슬픔은 나의 힘.... 오랫동안 나름 개성 넘치는 창의력으로 줄기차게 루저의 정서를 노래한 명곡들을 만들고 불러제꼈지만, 요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외모 탓인지 대중적 인기는 한번도 그의 몫이 아니었던 가객.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타를 놓지 못하고 노랫가사와 자신의 일상이 정확히 싱크되는 일상을 살다가 반지하방에서 홀로 망연히 숨을 거둔 불행한 인간 달빛요정. 그가 나를 찾아와 준 그 밤 이후로 달빛요정의 노래는 내 정서의 밑바닥에 좀처럼 뽑히지 않는 녹슨 못처럼 자리를 잡아버렸다.

    그 날이 아마 밤공기 쌀쌀한 늦가을쯤이었던 것 같아서 달빛요정의 프로필을 검색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2010년 11월 6일 사망이다. 벌써 5년 전이구나. 죽은 양반에겐 5년이든 500년이든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의미는 어차피 살아있는 인간들이 멋대로 갖다 붙이는 것. 나도 나름대로 명분을 만들어서 며칠 전에 나홀로 ‘달빛요정 서거 5주기 추도 세리머니’를 가졌다. 심야방송을 듣던 ‘그 날’과 지금의 나 사이의 5년이라는 시간을 복기해본다는 그럴듯한 이유를 달아서 말이다. 세리머니라야 달빛요정의 노래들 중 듣고 싶은 곡목들을 초이스해서 스피커 볼륨을 높여 잠들때까지 반복해서 들은 것에 불과했지만...

    달빛요정의 노래 중 딱 한곡을 고르라면 아무래도 <절룩거리네>다. 이 노래야말로 세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루저들의 찌질한 정체성을 가장 잘 담아낸 노래다. <절룩거리네>의 가사 몇 군데를 들여다보려 한다. ‘달빛요정 서거 5주기 추도 세리머니’의 연계 프로그램이라 여겨주시라. 우선 가사 전문을 보자.


<절룩거리네>      

작사.작곡.노래 :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 보석처럼 빛나던 아름다웠던 그대 

이제 난 그때보다 더 무능하고 비열한 사람이 되었다네 절룩거리네 

하나도 안 힘들어 그저 가슴 아플 뿐인 걸 아주 가끔씩 절룩거리네 

깨달은 지 오래야 이게 내 팔자라는 걸 아주 가끔씩 절룩거리네 


허구헌 날 사랑타령 나이 값도 못하는 게 골방 속에 쳐 박혀 뚱땅땅빠바빠빠 

나도 내가 그 누구보다 더 무능하고 비열한 놈이란 걸 잘 알아 절룩거리네 

하나도 안 힘들어 그저 가슴 아플 뿐인 걸 아주 가끔씩 절룩거리네 

지루한 옛사랑도 구역질 나는 세상도 나의 노래도 나의 영혼도 나의 모든게 다 절룩거리네 


내 발모가지 분지르고 월드컵코리아 

내 손모가지 잘라내고 박찬호 이십승 

세상도 나를 원치 않아 세상이 왜 날 원하겠어 미친 게 아니라면 

절룩거리네 절룩거리네 절룩거리네...


   첫째 줄은 상투적인 도입이니 넘어가자. 둘째 줄에 눈이 간다. 자기 자신이 예전보다 더 무능한 사람이 되었다는 달빛요정의 고백은 한번 루저는 영원한 루저, 나아가 세월이 흐를수록 더 심각한 루저가 되어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젊었을 때는 알바나 비정규직을 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루저의 인생관에 걸맞는 최소한의 일자리를 얻는 게 점점 버거워진다. 딱히 젊었을 때 보다 더 많은 욕심을 부려서가 아니다.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싸구려 일자리들로의 진입이 나이가 걸림돌이 되어 점점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노랫가사처럼 루저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무능해진다.


비열함의 두 측면


   무능함은 그렇다 치고, 비열하다는건 또 뭔가? 비열함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타인에게 보여주는 비열함. 루저들은 흔히 타인으로부터 ‘비열한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일을 많이 저지른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루저들의 인간성이 위너들에 비해 태생부터 더 비열하거나 치사할리는 없다. 다만 그들은 비열하지 않고는 생존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더 많이 노출될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성공한 이들은 문제가 생기면 우아하게, 또는 폼나게 해결할 수 있다. 굳이 비열해 질 까닭이 없다는 말이다. 어느 사회에서건 마이너리티에 속하는 계급은 항상 주류로부터 ‘비열한 인간들’이라는 비난을 받곤 한다. 그러나 비열함의 원죄가 루저의 인간성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한 인간이 지닌 비열함의 밑바닥을 기어이 들춰내는 인정머리없는 세상에 있는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는 스스에게 보여주는 비열함이다. 사실 이 두 번째가 루저 정서의 핵심이다. 객관적으로 자기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이런 저런 핑계를 끝없이 만들어내는 내적인 비열함 말이다. 타인에게 보여줘야 하는 비열함이 상황에 따라 반응하는 조건적인 것이라면, 스스로를 향한 비열함은 매우 상시적이며 왜곡의 구조가 한 층 복잡하고 견고하다. 달빛요정의 노래에서 말하는 비열함도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를 향한 루저의 비열함은 마음의 안전장치일수도 있다. 자괴감과 자기분열이라는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나잇값과 뚱땅땅빠바빠빠


   특정한 나이에는 그 나이에 걸맞는 삶의 위치를 획득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을 상징하는 단어가 바로 ‘나잇값’이다. 루저는 당연히 나잇값을 못한다. 그럼 대신 뭘 하냐구? 뭐긴 뭐겠는가, 뚱땅땅빠바빠빠 놀이를 하는 것이지. 뚱땅땅빠바빠빠야말로 루저들의 존재 이유다. 달빛요정은 자신이 몰입하고 있는 세계를 노래를 상징하는 의성어로 집약했지만, 꼭 노래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의 모든 루저들에겐 나름대로의 뚱땅땅빠바빠빠가 있으리라. 그게 문학이니 음악이니 하는 폼나는 장르가 아니라도, 자기를 위로하고 세상의 가치를 대체하는 뭔가를 한가지씩은 품고 있다는 얘기다. 남들이 보면 아무 가치도 없지만 본인 스스로는 그 안에 있을 때 가장 재미나고 즐겁고 기분좋은 세계. 누군가에겐 그게 방랑일수도 있고, 현실성과는 거리가 먼 공부일수도 있고, 가장 흔하게는 음주나 도박일수도 있다. 그걸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그러므로 이 가사는 현실속에서 나잇값도 못 하는 게 맨날 술이나 쳐먹고, 나잇값도 못 하는 게 주둥이는 살아서, 나잇값도 못 하는 게 싸돌아다니기는... 따위로 다양하게 변주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저는 흔들림없이 뚱땅거리거나, 책장을 넘기거나, 트레킹을 하거나, 또는 밤마다 술잔을 기울이며 누군가에게 지루한 이야기를 해 댄다. 누가 뭐라든 그 순간이 가장 즐거우니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비열함과 뚱땅땅은 루저의 내면을 지키는 두 개의 안전장치다. 위너들이 볼 때 도대체 루저들은 양심도 없지,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게 사는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스스로에게 비열해지고 남들이 가진 걸 부러워하지 않을 나만의 세계, 뚱땅땅이 있어서 루저도 나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안전장치가 가끔 균열을 일으킬 때다. 꼭꼭 숨어있고만 싶었던 비열함의 거적데기가 확 까발겨지는 순간, 영원한 친구가 되어줄 것 같았던 뚱땅땅의 쓸모없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언젠가는 엄습할 수밖에 없다. 이 노래의 매력은 바로 그 비열함과 뚱땅땅의 세계가 균열을 일으키는 지점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절룩거린다네. 아주 가끔씩...


    비열함이 틈새를 보일 때 그 틈새를 비집고 자괴감이라는 괴물이 엄습한다. 뚱땅땅이 하찮아질 때 바닥이 없는 듯한 허망함에 사로잡힌다. 그걸 달빛요정은 절룩거린다고 표현했다. 나도 가끔씩은 절룩거린다고, 똑바로 걷지 못하고 스탭이 엉킨다고...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은... 하지만 그 가끔씩이 점점 잦아지다보면 균열의 통해 들어온 쓰라린 자각의 통증이 존재 전체를 삼켜버린다. 그래서 루저계의 천하무적 달빛요정도 어쩔 수 없이 실토한다. 나의 노래도, 나의 영혼도, 나의 모든 것이 절룩거린다고... 마침내 노래는 절창으로 치닫는다.


    내 발모가지 분지르고 월드컵코리아 

    내 손모가지 잘라내고 박찬호 이십승


    언제 들어도 이 노래의 가장 절절한 부분이다. 루저들의 도피처 중 하나가 바로 스포츠다. 자신을 대변해 누군가가 영웅 노릇을 해 주니 이보다 통쾌하랴. 몰입할 수 있고, 당당히 누군가를 욕할 수 있고, 죽여버려! 발라버려! 응원을 빙자해서 억눌렀던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다. 월드컵 코리아를 외치는 순간에는, 박찬호 이십승에 환호할 때만큼은 루저나 위너의 구분 따윈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목도해야한다. 누군가는 월드컵을 치르고 황금발이 되어 유럽으로 업혀가고, 누구는 20승을 달성하고 황금팔이 되어 팀을 옮기는 장면을. 저런 고부가가치의 육신과 비교하면 내 발모가지와 손모가지는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분질러버려도 상관없을 것처럼 하찮아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 가사는 사건의 순서상 앞뒤가 뒤바뀐 문장이다. 발모가지를 분질러야 월드컵 코리아가 이뤄진다는게 아니라, 월드컵 코리아를 외치다 보니 발모가지를 분질러버리고 싶을 만큼 자괴감이 들더라는 말이다. 박찬호 20승에 열광하다가 자신을 돌아보니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고 싶을 만큼 기분이 더럽더라는 얘기다.


영원한 루저들의 주제가


    거기까지다. 그렇게 지지리 궁상을 떨고서 그저 절룩거리네... 절룩거리네... 하면서, 흔한 반성이나 각오 따위도 없이 노래는 끝난다. 대책없음의 끝장이다. 그런데도 마음을 두드린다. 모르긴 몰라도 이 노래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어딘가에서 불리워지며 수많은 루저들의 쪼그라든 마음을 다독여 줄 것이다. 너 자신이 졸라 한심하고 외롭니? 너만 그런 거 아니니까 엄살 떨지 마. 너보다 더 질척거리며 찌질하게 살다가 갈 때도 완전 거지같이 간 인간도 있잖아. 너 정도면 살만한거야... 유치하지만 이런 게 진짜로 위로가 된다니까. 아, 인간이 참 간사하다. 당신은 루저인가? <절룩거리네>를 들으라. 우리들의 주제가가 여기에 있다. 당신은 루저가 아닌가? 그래도 한 번 들어보라. 저렴한 가격에 남의 인생 밑바닥의 진면목을 쫄깃하게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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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족 1 - 루저 정서를 담아서 대중적으로 가장 큰 인기를 받았던 노래로는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가 있다. 제목에서부터 싸구려가 들어가는 이 노래 역시 루저들의 적나라한 일상을 재치 넘치는 가사와 유니크한 곡 전개로 표현해 수많은 이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 노래가 맘에 들지 않았다. 솔직히 장기하의 모든 게 너무 전략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촌스러운 용어인 ‘진정성’이라는 말을 굳이 끄집어내어 시비를 걸고 싶을 만큼 장기하의 루저 코스프레는 좀 재수 없었다. 최근에도 그때의 내 생각이 옳았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요즘 아이유를 사귄다잖나. 뭘 해도 밉상이다. (※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호오의 표현이니 장기하를 애호하시는 분들은 분노와 시비를 거두어주시라.)

    * 사족 2 - 루저에 대해 길게 수다를 떨었지만, 사실 요즘엔 루저라는 말을 쓰는 친구들이 별로 없다. 이 사회의 루저들이 그만큼 줄어서일까? 그럴 리 있겠는가. 현실은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누구를 특정하여 루저라 부르기가 민망할만큼 모든 젊은이들의 루저화가 명백히 진행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너 나 할것 없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긴장에 쩔어 있으니 루저란 용어가 발붙일 자리가 사라질 수밖에. 그래서 개인적 차원의 패배를 의미하는 루저를 용도폐기하고, 이 땅의 젊은이들 모두의 절망을 뭉뚱그려 담아낸 ‘헬조선’이라는 신조어를 유행어로 등재시킨 게 아닐까? 그렇다면 아마도 어디에선가는 집단적 침몰의 절망을 토해내는 헬조선 세대의 주제가가 만들어지고 있으려나? 생각하니 또 우울해지네...


* 필자소개

    몇 달 전부터 고양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으며 신도제일교회에서 청년들과 생각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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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신학(社會神學) 탐구 1]



사회에 관한 신학적 탐구를 시작하며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사회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의 출현


    일찍이 고전 사회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에밀 뒤르케임(Émile Durkheim, 1858~1917)은 사회(社會, society)가 곧 신(神, God)이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사회는 종교를 통해 개인들에게 존경심을 부여하고 그들에게 경배의 대상으로 군림하는 힘이다. 따라서 그동안 종교가 말해온 신은 단지 사회의 현실적 표현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각주:1] 요컨대, 종교는 사회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상징체계로서, 궁극적으로는 사회야말로 종교 속에서 경배의 대상이 되는 종교의 본질적 실체, 즉 신 그 자체라는 것이다. 사회를 신으로 재규정하고 있는 이런 주장에 대해 신학은 과연 어떤 답변을 내놓을 수 있을까? 그전에, 뒤르케임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되었을까? 뒤르케임이 사회를 총체성의 실재로 진술하고 있는 대목을 직접 읽어보면 보다 명확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개념의 총체적 체계에 의해 표현되는 세계는 사회가 스스로에게 그것을 재현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오직 사회만이 우리에게 가장 일반적인 관념들을 제공해줄 수 있으며, 그 관념들에 따라서 세계는 이해되어야만 한다. 모든 개별적 주체들을 그 안에 포괄하는 오직 하나의 주체만이 그러한 대상을 포용할 수 있다. 우주는 사유된 한에서만 존재하고, 또한 우주는 사회에 의해서만 그것의 총체성(totality)이 사유될 수 있기 때문에, 우주는 사회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즉, 우주는 사회의 내적 삶의 한 요소가 된다. 따라서 사회는 다른 어떤 것도 그것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없는 총체적 유(genus) 그 자체이다. 총체성이라는 개념도 사회라는 개념의 추상적 형식일 뿐이다. 사회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전체이며, 다른 모든 부류들을 그 안에 담고 있는 최상의 부류인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인간과 동일하게 위치를 부여받고 분류되어지는 기초적인 분류법들이 근거하고 있는 궁극적인 원칙이다.[각주:2] 


    마치 체계이론가인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이 훗날 사회를 가리켜 “다른 사회적 체계들 모두를 자기 안에 포함하는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각주:3]라고 규정했던 것을 예고하고 있는 듯한 위의 인용 단락에서 우리는 ‘사회’라는 단어를 ‘신’으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모든 개인 주체들을 포괄하는 주체로서, 그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총체적인 유(類)가 무엇이냐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묻는다면 당연히 그런 존재는 ‘하느님’이라고 답하지 않겠는가? 위치와 분류에 있어서 최상의 범주에 속하면서 동시에 자신 외에는 그 어떠한 외부적 발생 요인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완벽한 자기 충족적 체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왔던 하느님 그분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뒤르케임은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적 신의 관념이 누려왔던 지위, 즉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전체이자 다른 모든 부류들을 그 아래 포섭하고 있는 최상의 부류로서의 존재론적·인식론적 지위는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 이제 사회에게로 마땅히 돌려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총체성의 성격과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존재는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사회라는 것이다. 신을 변형된 사회로서 기술하는 것은 신성의 전통적 특질, 즉 신적인 총체성을 사회에게 귀속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각주:4] 그렇기에 뒤르케임적인 의미의 사회가 담지하고 있는 ‘신성한 것’(the sacred)은 하나의 사회적 사실(social fact)이나 ‘사회적인 것’(the social)에 관한 하나의 현시(顯示, manifestation)를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사회의 신성함은 사회적 사실 및 사회적인 것의 현상을 넘어 사회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상징적·도덕적 질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기술된다.[각주:5] 인용한 단락의 말미에 덧붙인 주석에서 뒤르케임은 이렇게까지 말한다. “결국 총체성(totality), 사회(society), 그리고 신성(divinity)의 개념은 사실상 동일한 관념의 단지 다른 측면들일 뿐이다.”[각주:6] 여기서 우리는 뒤르케임이 독일 관념론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거대서사를 이해하는 궁극적 범주로 표현되어온 총체성의 개념을 매개로 하여 신과 사회를 인식론적으로나 존재적으로 완벽하게 동일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각주:7]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뒤르케임은 사회라 불리는 대상이 “우리의 주관적 의지나 인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차원의 발현적 속성”, 즉 ‘외재성’을 갖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개별 행위를 제약하는 규범적 차원”, 즉 ‘강제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각주:8] 물론 그는 사회가 인간의 행위와 전적으로 무관하게 존재할 수는 없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들의 차원에서 볼 때 사회는 그들의 외부에서, 규범적 제약을 가할 정도의 강제성과 도덕적 권위의 정당성을 지니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고유한’(sui generis) 실재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뒤르케임은 사회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데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뒤르케임의 사회학이 “사회적인 것의 상상계의 중요한 요소들이 ʻ신학적ʼ 기원을 갖는다는 사실을 가장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것은 “근대적 사회신학의 정점”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뒤르케임의 저작들에서 ‘사회적인 것’은 곧 ‘신적인 것’으로서 “개인의식을 초월하여 창발하는 집합 의식, 집합 열광, 연대, 도덕 등의 ʻ사회적인 것ʼ은 그 자체로 섭리에 의해 조절되는 사회학의 보이지 않는 신”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9]


   이렇듯 과거 신이 누렸던 총체성의 지위가 이제 사회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신성한 실재는 사회라 불리는 바로 그것이라고 하는 뒤르케임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사회는 사회학의 탐구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사회가 곧 오늘날 가장 생생하게 현존하는 신성의 구현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학이 하느님의 존재를 연구하던 그 방식 그대로 사회를 연구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당연히 사회학이 사회를 말하는 방식을 신학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을 수도 없다. 가능하다면 사회학과 전통적인 신학 모두를 넘어, 전혀 새로운 신학의 방법과 논리를 통해 신으로서의 사회, 또는 사회로서의 신이라는 이 문제적 대상을 탐구해야 할 것인데, ‘사회신학’(socio-theology or theology of society)[각주:10]이란 비교적 생소한 타이틀을 내건 이 연재는 바로 그러한 사유의 모험을 시작해보려는 기획이다.


    하지만 사회가 도대체 무엇이고, 사회가 가지고 있는 신성이나 신적 본질은 또 무엇인지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방향으로 섣불리 나아갈 생각은 없다. 사회와 신을 개념적으로 세세하게 비교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너무나 방대한 과제일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고전적인 신존재 논증과 유사한 형이상학적 사변의 길로 빠져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신학과 사회학의 대화를 모색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굳이 형이상학적 사변의 길로 가지 않더라도, 신학이 사회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우리 앞에 이미 펼쳐져 있다. 다시 말해, 신학이 뒤르케임의 길을 좇아서, 곧바로 신의 자리에 사회를 대신 갖다 놓지 않더라도, 사회라는 것이 신학적 탐구의 대상임을 확인시켜주는 다른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어떤 길인가? 바로 ‘고통’이라는 이름의 길이다. ‘고통’의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거기에서 신의 존재를 사유하고자 할 때, 신학은 사회라는 대상과 필연적으로 재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적 고통 : 고통의 사회적 (재)생산 이론


    고통의 문제는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정초하고 끊임없이 활성화해온 핵심적인 모티프였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으로 육화된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럽게’ 죽었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시작된 종교이다. 죄와 사망의 굴레 속에서 고통당하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그 모든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 인간의 고통과 신적인 진리 사이의 연관성을 강화했고, 나아가 인간 육체의 생리학적이고 종교적인 잠재력에 대한 관심을 증진시켜왔다. 고통에 관한 성서의 대표적 텍스트인 『욥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이미 2세기부터 그리스도교는 고통 속에 있는 육체로서 인간의 자아를 이해하는 관점을 발전시켜 왔는데, 가령 어떻게 신자들이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대대적인 박해 속에서도 고통을 견뎌내고, 그 고통을 신앙 공동체 안에서 치유할 뿐만 아니라, 고통을 통해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차원의 구원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를 변증하고자 했던 것이다.[각주:11] 그런 의미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실존적인 물음”은 철학자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가 최초로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제시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유대-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던 원초적 수준의 ‘신정론적 질문’으로 이해될 수 있다.[각주:12]


    문제는 고통과 진리의 강한 결속을 통해 획득되던 고통에 관한 실존적 의미를 그리스도교적 경험과 실천이 더 이상 안정적으로 지켜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고통과 진리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릴 만큼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신앙적 의미의 세계 안으로 손쉽게 통합시킬 수조차 없는 그런 재난, 비참, 불행, 폭력 등을 일상적·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하느님의 존재의 정당성은 물론이고 그에 관한 진술 자체의 유효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각주:13] 인간사에서 개별적으로 반복되어온 불행과 비참이 구조적·집단적 수준으로 가해지는 재난과 고통으로 발전했을 때 전통적인 신정론의 논리, 즉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이 계획하신 구원사의 거대한 목적 속에서 이루어진 그의 섭리의 결과물이라는 주장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을 계속 지키고자 한다면, 고통에 대한 책임을 결국 하느님에게 귀속시켜야만 하는데, 이럴 경우 주권자로서의 하느님 신앙은 유지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하느님을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으로 찬양하기는 어려워진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사회적 재난이나 집단적 불행을 당사자들이 저지른(물론 그것이 무엇인지는 하느님만이 알 수 있는) 어떤 숨겨진 범죄에 대한 신적인 심판 내지는 모종의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한 훈련의 일환이라는 주장이 끈질기게 제기되고 있지만, 그런 주장들은 반박의 가치조차 없는 비도덕적이고 비합리적인 종교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삶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대다수의 결정적인 고통들은 사회적인 폭력, 즉 국가와 시장으로 대표되는 정치적·경제적·제도적 권력이 인간에게 미치는 강한 구속과 압력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이러한 권력들이 대응하는 방식에서 또 다른 2차적 고통이 야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인간의 고통은 특별히 불운한 개인들에게 벌어진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빚어지는 ‘사회적’ 고통 및 구조적 폭력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고통이 체험되고 표현되는 방식을 구축하고 조절하는 모든 맥락에 구조적 조건과 문화적 관행이 결부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고통이 명백히 사회적 (재)생산의 산물로 이해되는 현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고통’(social suffering) 이론이다. 그동안 고통당하는 인간의 현실을 통해 삶의 실존적 의미와 신적 진리의 문제를 사유해온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와 같은 고통의 사회적 (재)생산의 문제와 마주함으로써 ‘사회’라는 대상에 관한 사회신학적 탐구를 더 이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신학이 그러한 상황에서도 아무 설득력 없는 전통적인 신정론의 답변을 되풀이하고 있을 때, 사회학과 사회철학, 인류학과 심리학 등의 분과에서는 고통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동시에 비가시화되며, 그러한 고통이 행위자들의 자기 정체성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나아가 사회적 고통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설명하고 사회의 변혁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갖는 실천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심도있게 논의해 왔다. 특히 주목할 지점은 고통에 관한 사회과학적 접근이 신정론적 문제의식을 재발굴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회과학자들이 전통적인 의미의 신학적 신정론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은 아닌데,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전통적인 신정론과 구별하여 ‘세속적 신정론’(secular theodicy) 또는 ‘사회정론’(sociodicy)이라 명명하며, 이를 사회비판을 위한 윤리적·정치적 모티프로 활용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전통적 신정론이 전능하고 자비로운 신에 대한 신앙과 현실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악의 문제를 최대한 논리적으로 조화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면, 세속적·사회학적 신정론은 사회적 삶에 관한 규범적 기대와 현실 사회에서의 구조적 부정의나 소외, 착취, 불평등, 빈곤, 배제, 차별, 무시 등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고통을 종합하려는 목표를 드러내왔다. 그러나 사회적 고통의 원인과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에 따라서 사회정론의 문제의식을 활용하는 양상도 차이를 보이기 마련인데, 이는 전통적인 신정론의 붕괴 이후 현대신학에서 신정론이 여러 다양한 형태로 수정 제시되는 것과도 흥미로운 평행을 이룬다.[각주:14] 


    하여 다음 호의 연재에서는 사회신학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서 사회적 고통의 문제와 사회정론의 문제의식을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서구 학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적 고통 이론의 전반적인 지형과 사회정론적 문제의식의 다양한 활용들을 2000년대 이후 민중신학의 사회적 고통 연구와 비교하면서 서로 간의 이론적 접점 및 쟁점이 무엇인지를 짚어보게 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Émil Durkheim, Suicide: A Study in Sociology, translated by John A. Spaulding and George Simpson,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2, p.277. [본문으로]
  2. Émil Durkheim, The Elementary Forms of the Religious Life, translated by Karen E. Fields, New York: The Free Press, 1995, pp.442~443. [본문으로]
  3. 니클라스 루만, 『사회의 사회』, 장춘익 옮김, 새물결, 2014, 101~102쪽. [본문으로]
  4. David Frisby And Derek Sayer, Society(Key ideas), New York: Tavistock Publications, 1986, p.35. [본문으로]
  5. Chris Shilling and Philip A. Mellor, The Sociological Ambition: Elementary Forms of Social and Moral Life, London: SAGE Publications, 2001, p.41. [본문으로]
  6. Durkheim, op.cit., p.443. n.18. [본문으로]
  7. 이 세 가지의 개념적 범주가 뒤르케임의 철학에서 서로 어떻게 연관성을 맺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Donald A. Nielsen, Three Faces of God: Society, Religion, and the Categories of Totality in the Philosophy of Émile Durkheim, New York: SUNY Press, 1998을 참조. [본문으로]
  8. 김명희, 「마르크스와 뒤르케임의 사회과학방법론 연구」, 성공회대 박사학위 논문, 2014, 241~242쪽 참조. [본문으로]
  9. 김홍중, 「사회로 변신한 신과 행위자의 가면을 쓴 메시아의 전투」, 『한국사회학』 제47집 제5호(2013년), 21쪽. 물론 필자는 뒤르케임의 ‘사회신학’과 아렌트의 메시아주의적인 ‘행위신학’을 사회 대 인간, 또는 구조 대 행위의 이분법적 틀 안에서 대립시키는 저자의 논제에 동의하진 않는다. 뒤르케임의 사회신학에서 ‘사회’ 개념이 인간 및 인간의 행위 없이도 계속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초월적 ‘신’으로 그려지고 있다고 보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뒤르케임의 사회는 인간 행위주체에 의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결과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사회-신’론은 관계론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르케임에게 사회가 인간 행위주체를 제약하고 조건짓는 신적인 위상을 갖고 있다는 지적에는 확실히 동의한다. 마르크스주의 및 비판적 실재론 전통에서 확립된 관계론적 사회 이해에 관해서는 추후에 사회 구조의 문제를 다룰 때 본격적으로 소개될 것이다. [본문으로]
  10. 사회 및 사회성에 관한 신학적 탐구의 사례로는 다음의 연구들을 참조할 수 있다. Andrew Wernick, “From Comte to Baudrillard Socio-Theology After the End of the Social,” Theory, Culture & Society, Vol.17(6), 2000, pp.55~75; John Milbank, Theology and Social Theory, Oxford: Blackwell, 2006; Rebekka A. Klein, Sociality as the Human Condition: Anthropology in Economic,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Perspective, translated by Martina Sitling, Boston: Brill, 2011. [본문으로]
  11. 고통의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수용의 역사적 맥락과 현대적 함의에 관해서는 Chris Shilling and Philip A. Mellor, “Saved from pain or saved through pain? Modernity, instrumentalization and the religious use of pain as a body technique,” European Journal of Social Theory, Vol.13(4), 2000, pp.527~530 참조. [본문으로]
  12. 조순, 「신정론에 관한 소고」, 『신학연구』 제47집(2005), 211쪽. [본문으로]
  13. Slavoj Žižek and Boris Gunjevic, God in Pain: Inversions of Apocalypse, New York: Seven Stories Press, 2012, pp.155~156 참조. [본문으로]
  14. 오늘날 가장 급진화된 형태의 신정론과 사회정론을 비교하는 작업은 이후에 신학에서의 ‘신의 죽음’ 논의와 사회학에서의 ‘사회의 종언’ 논의를 함께 살펴볼 때 보다 자세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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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교회란 무엇인가?[각주:1]

- 한백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며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한신대 외래교수)

 

    우선, 주일 오후 바쁜 시간 가운데 한백교회 담임목사 취임예배에 참여해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별히 설교를 해주신 박종화 목사님, 권면을 해주신 채수일 총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박종화 목사님은 저희 부부의 결혼식 주례자로써 결혼 이후 지금까지 저희 부부에게는 멘토 같은 분이십니다. 채수일 총장님은 제가 신학의 길에 들어섰을때부터 지금까지, 저에게 많은 용기와 격려를 보내주시면서, 신학이 얼마나 멋있는 학문인지를 맛보게 해주셨던 스승이십니다. 두 분이 이 자리에 함께 참여해 주셔서 너무나 기쁘고 감사합니다.  

    취임예배의 순서를 맡아주신 서울노회 박승렬 노회장님을 비롯한 서울노회 여러 선배 목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1995년 서울노회 목사후보생으로 시작하여, 2003년에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오늘 저는 서울노회 서은시찰에 소속된 한백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합니다. 한마디로 저는 서울노회가 키운 목회자이고, 서울노회는 목회자의 道가 무엇인지를 저에게 가르쳐준 노회입니다. 여러 가지로 미숙한 저를 너그러운 인내심으로 감싸안고 지켜봐준 준 서울노회와 서울노회를 지켜온 모든 선배 목사님들께 고개숙여 존경의 마음을 표합니다. 

    14년 동안 한백교회를 담임하고 오늘 은퇴하시는 양미강 목사님, 양미강 목사님 이전에 오랜 기간 한백교회를 지켜온 김진호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들의 젊은 날을 한백교회를 위해 바친 두 분을 이어 제가 오늘 한백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합니다. 두 분의 한백을 향한 헌신과 노력에, 그리고 그런 두 분의 이름에 제가 누가 되지는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됩니다.  

    3주전, 10월 18일에 한백교회는 창립28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양미강 목사님이 한백의 28년을 회고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한백이 오늘날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한백 나름대로의 신앙적 색깔을 가지고 자기비판적인 반성에 기초한 열린 신앙적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기저는 끊임없이 전통적인 교리에 대항하여 신학과 신앙을 연결해낼 수 있는 민중신학적 성서읽기가 그 바탕이었고, 이와 연결된 참여적 신앙이야말로 한백신앙의 핵심일 것이다.”   

    28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서로 다른 신앙의 색깔들, 사연들을 가진 사람들이 한백을 처음 만들고자 했을 때, 그리고 몇 차례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백이 진화를 할 때, 모두가 뭐라고 뚜렷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심전심으로 꿈꾸고 공유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꿈 말입니다. 어떤 오만도 편견도 억압도 없는 세상에 대한 바람, 아마도 그것은 한백이 28년전에 꿈꿨던, 그리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한백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한백이 처음 탄생하던 87년 그해는, 혁명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던 그 해였고, 한편으로는 혁명의 헛헛함을 맛보기도 했던 그 날이었습니다. 거대하고 우람한 진리들이 광장을 메우던 그 시기에, 작지만 묻혀진 진실들을 발견하고, 누군가가 누구를 베는 목소리를 경계하면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는 생각, 폭풍과도 같았던 시절속에서 망각되어 왔던 것들을 늦었지만 이제부터는 제대로 환대하자는 성찰, 다른 어떤 조직, 기구, 이념이 아니라, 신학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그렇게 해야된다는 막연함이 우리를 이곳으로 내몰았고, 한백은 그렇게 불안하고 불안정한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문득, 이 대목에서 김영승 선생님이 창립기념주일에 나눔의 기도를 드리면서 한백 초기에 함께 나누었던 기도문을 회상하던 대목이 떠오릅니다:“거친 세월 헛된 역사 무너뜨리며 닫힌 가슴들 다 열리고 쓰러진 이들 다 일어나 대동춤으로 어우러질 그 날을 기다립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 큰 강으로 흐를 그 날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작은 소리가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우리 겨레의 큰 함성으로 하나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작은 몸짓이 사람의 세상을 만드는 작지만 굳센 손들의 하나된 염원이기를 기원합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의 길을 따르는 늘 새로운 시작이 되도록 이제 우리 모두의 마음을 나눕시다.”위의 기도문에서도 드러나듯이, 어떤 오만도 편견도 억압도 없는 세상에 대한 바람! 아마도 그것은 한백이 28년전에 꿈꿨던, 그리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한백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을 때, 한국교회는 이미 고도성장의 궤도로 진입하여 무서운 속도로 배가를 하던 무렵이었습니다. 우리 앞에는 이미 무수한 교회의 샘플과 전통과 권위들이 존재했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분명 눈부시고 박수를 받을만한 성령의 역사였지만, 그 이면에는 말 못할 아쉬움 또한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물불을 안 가리는 교회성장주의 일 수 있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무차별적이고 공격적인 선교의 패턴 일 수 있으며, 가부장적인 권위의식에 입각한 교회운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존 교회들의 관습과 법칙에 기대려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대상으로 의식적으로 우리의 도드라진 것을 자랑질 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단지 전혀 새로운 방식과 율동으로 우리의 교회를, 그리고 우리만의 신학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백은 지속적으로 물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28년 동안 다양한 방식과 실험으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계속 묻고 대답했드랬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무척이나 민망하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질문이지만, 지난 몇 년을 지나면서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어버린 세상속에서, 청년들이 교회에 환멸을 느껴며 교회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 세태속에서, 이 질문은 오래된 새로운 질문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급변하는 세상, 급락하는 교회의 위상속에서 ‘우리가 추구했던 교회의 가치, 한백의 가치가 부각된 것은 아닐까?’라는 자평도 해보게 됩니다. 현존하는 교회질서와 세상의 법칙에 불화하는 힘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가치 말입니다.  

    물론 현실의 교회와 교회의 역사는 제도와 시스템을 흠모했고, 그 길을 따라 걸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제도 밖의 제도라 해야 교회의 교회다움이 선포되는 것 아닐까요? 민중신학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고, 마지막 날에 성만찬이라는 제도와 틀을 거부하고 제자들의 신발을 벗겨 발을 씻기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행동은 그것을 반증하는 행위라 우리는 믿습니다.  

    한백은 겁 없이 이런 믿음에 의지하여 우리의 교회를 실험해왔습니다. 평신도 위주의 교회 운영방식, 하늘 뜻을 나누는 방식, 목회자와 장로의 임기제, 평등과 소통을 지향하는 예배를 위한 공간의 재구성, 예배의 곳곳을 매우는 한백의 노래와 고백,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 시대에 맞게 복음을 재해석하는 신학적 작업 등이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가 모든 성전시스템, 교리시스템, 예전시스템을 해체하면서 신앙(학)의 의미와 가치가 누군가의 손에 독점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그 진리를 우리들에게 돌려주었던 것처럼, 한백은 주께서 주신 그것을 잘 누리고 향유하려고 무던히도 고민하면서 몸부리쳤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한백性은 그런 가시적인 것보다는, 이런 보이는 것을 언제든지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자유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한백의 신앙을 굳이 예수가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의 질문을 받고 성령을 설명하면서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 그것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라고 한 선문답과도 같은 아포리즘과 연결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백은 겉으로 보기에는 나이스하고 쿨한 것 같지만, 한꺼풀 벗기면 솜털같이 섬세해서, 타인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도드라지는 한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백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이지만, 불어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대지의 촉촉함와 대기의 훈훈함을 다 느끼는 바람입니다. 한백의 지난 28년은 남들처럼 급하게 어딘가를 향해 마구 불어갔던 바람이 아니라, 마지막 날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예수처럼, 내게 소중한 사람들과 이 땅에서 고난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우리를 감싸는 허세와 권위와 위엄에 눈치보지 않고 마음과 정성을 모아갔던 바람이었고, 그런 공동체였기에 지금까지 한백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멋있고, 분명한 자신의 신앙과 목소리가 있는 한백교회에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비어있고, 흠이 많은 제가 담임목사로 취임합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함께 하기에 별 어려움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설레고 떨리는 마음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몇 주 동안 이.취임식 준비 때문에 교회가 무척 분주했습니다. 취임식 순서 중에 취임하는 목사에게 꽃다발과 예물을 증정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그 선물을 뭘 할지 교회와 목사가 서로 눈치보고 고민하고 그런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주 심플하게 그리 비싸지 않은 구두를 한 켤레 사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백교우들에게 지금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부끄럽지만 이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구두의 굽이 닳도록, 여러분들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 가겠습니다. 한백 식구들에게 기쁜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제가 제일 기뻐할 것이고, 우리들 중 누구에게 슬픈 일이 생기면 아마도 제가 제일 슬퍼하는 그 사람일 것입니다. 버스 타고 가다가, 지하철 타고 가다가 여러분들이 사는 집이나 일하고 있는 직장 근처를 지날 때, 갑자기 생각나서 전화 걸어 제가 “밥 먹자!”고 말해도 놀라지 마십시오. 그렇게 저는 여러분들이 사준 구두를 신고 여러분들을 만나러 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만나면서 제가 꿈구는 교회는 이런 교회입니다.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의 한 걸음을 더 소중히 여기는 교회”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사회는 성의 차지, 세대 차이, 지역차이, 계급차이, 노선 차이 등 무수한 차이들이 자아내는 권력의 역학속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엮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하나로 엮었던 방식, 강력한 대타자의 목소리는 이제 그 기능적인 면에 있어서 한계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새로운 얼개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복수적이고 산만한 관계 속에서 얽혀지는 새로운 통합방식, 일사분란한 계획과 통제가 아니라, 각자가 지닌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새로운 통합방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의 한 걸음을 더 소중히 여기는 교회!”는 이런 시대의 요청에 대응하는 구호 아닌 구호입니다. 복수적 개인들의 특수성을 지지하는 한백, 다양한 개인들의 우발적인 횡적 연대와 접속을 통해 늘 활발한 발언와 율동을 상상하는 교회, 그러는 가운데 진정한 쉼과 기쁨을 공유하는 공동체 한백이 되기를 저는 기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그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의 담임목사가 되는 저는, 그러한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매일 기도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함께 기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꿈과 희망을 갖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여러분 바라보면서 여러분과 함께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주께서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 웹진 <제3시대>



  1. 지난 11월 8일에 있었던 한백교회 담임목사 취임예배에서 행한 취임사를 일부 수정하여 올립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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