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육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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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식
(대한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지도사제)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말을 주변에서 종종 듣는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경우는 과연 어떤가?

필자의 제자 한 사람이 모 고등학교의 선생님으로 있는데 학생 중 하나가 유난히 말을 안 듣고 수업시간에도 딴청을 부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나무라다 지친 선생님이 도대체 네 부모님은 너를 어떻게 키웠는지 모르겠으니 상의를 해보게 전화번호 좀 알려달라고 했단다. 사실 그 정도 되면 덜컥 겁이 나면서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제발 용서해 주세요.....’ 그렇게 꼬리를 내려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사과는커녕 요 맹랑한 녀석이 ‘저도 선생님의 부모님이 선생님을 어떻게 키웠기에 이 모양인지 알아보게 부모님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맞받아치더란다. 아마 주변의 친구들 앞에서 우쭐한 기분에 그랬을 테고 여선생이라서 얕잡아 보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무튼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 선생님은 한 가지 이야기를 또 해 주었다. 체육시간에 시험을 보는데 어느 여학생이 선생님에게 와서 사정이 있으니 순서를 앞당겨 달라고 부탁했다. 형평의 원칙상 그럴 수 없다고 했더니 여학생이 돌아서면서 선생님 들으라는 듯 쌍 시옷이 들어가는 육두문자를 내뱉었고 화가 치민 체육선생님은 출석부로 여학생의 머리를 한 대 쳤는데, 여학생이 즉시 선생님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이게 무슨 일인가? 많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에게 엄청난 모욕을 주었다는 뜻 아닌가?

과연 선생님은 이 같은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제자들에게 교육적인 효과를 줄 수 있을까? 같이 맞받아쳐야 하는가, 교무실로 따로 불러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쪽 뺨까지 내밀어야 할까?


‘자녀를 키우면서 가장 바라는 게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보면 아마 대부분의 한국 부모들은 ‘공부 좀 잘했으면 좋겠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몸 튼튼 운동도, 머리 튼튼 독서도, 교양 튼튼 봉사도, 다 부질 없는 짓이고 오로지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받을 수 있다. 자식이 설혹 맘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더라도 일단 공부부터 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손자 얼굴을 보기위해 방문했어도 마침 손자가 학원에 가는 길이라면 할아버지는 쓸쓸히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 게 요즘 이치다. 아니면 며느리의 세모눈을 견디면서 손자가 돌아오는 새벽 1시까지 기다리고 있던지.......

사실 공부에 대해 이 정도 열의를 갖고 있으면 우리나라가 매년 노벨상을 도맡아놓고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무척 다르다.

‘구약성서의 이해’라는 과목을 강의 했던 적이 있다. 기말시험에서 어떻게 하면 창조적인 답안을 유도할까 싶어 다음과 같은 문제를 냈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에게 신앙의 조상이자 민족의 조상이다. 이 한 문장을 30문장으로 늘여보시오.” 그랬더니 대혼란이 발생했다. 혼란의 발생을 어떻게 알았는가 하면 답안지의 수준이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지루하게 반복한 경우도 있고, 불과 열 문장을 못 채운 경우도 있었다. 아마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갖는 다섯 가지 의미를 나열하시오.”라는 문제를 냈으면  비교적 양질의 답안지들이 제출되었을지 모른다. 사실은 같은 문제인데 말이다.

성적을 학교에 제출한 다음 날 어느 남학생이 손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이 C+를 맞은 이유가 몹시 궁금하니 교수님이 답안지를 찾아 자신의 잘못을 하나하나 짚어준 후 어떻게 하면 앞으로 좋은 점수를 맞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자세히 써서 이메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어, ‘도대체 누가 교수인가? 자네인가 나인가? 그런 일은 절대 할 수 없다네!’라고 답을 했더니 ‘다음 학기에 군대를 가니까 군대 갔다 와서 다시 보자’는 말을 남기고 그 학생은 전화를 끊었다. 그런 통화가 있은 지 2년이 지난 요즘은 슬슬 겁이 나고 있다.


얼마 전부터 정부의 학원 정책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학생에겐 혼란을, 일선교사에겐 낙담을, 학부모에겐 분노를, 학원에겐 희소식으로 다가오는 정책들이다. 하지만 진짜 겁나는 일은 교육현장이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진 상황이다.

학생들의 윤리의식이 통째로 사라지고 있다. 최소한의 예의나 스승에 대한 존경이나 청소년으로서 가져 마땅한 겸양의 덕은 ‘대학부터 보내놓고 이야기하자.’는 입시논리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어차피 교실에서 잠이나 자는 게 공교육이라면 잠이라도 실컷 자게, 아예 공교육을 밤에 하고 사교육을 낮에 하면 어떻겠는가?”라는 제안마저 나오고 있단다. 거꾸로 가는 교육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 청소년 시절에 심하게 망가지면 회복불능이라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대학 이후로 모든 것을 미루어 넘긴 학부모거나, 학부모들을 부추겨 가능한 한 복잡한 교육구조를 부채질 한 사교육 학원이거나, 사교육 현장에 끼어들어 줏대 없이 흔들리는 정부거나, 자신도 할 말 있다며 일선행정에 나선 대통령이거나, 아무튼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언젠가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에서 배워야 한다.’고 미국 교육계에 으름장을 놓은 적이 있다. 그 양반 한국의 교육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르기에 그런 소리를 한 것이다. 2009년 7월 현재 우리 교육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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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08 20:1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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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신부님. 저는 성공회 교회를 다니고 있는 평신도입니다. 신부님께서 쓰신 특히 성공회신문에 연재하시는 성서이야기들을 진지하게 잘 읽고 있는데, 이렇게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웹진에도 글을 올려주시니 반갑습니다.
  2. 김근옥
    2009.07.16 21:5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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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의 미래를 염려하시는 글,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서 학생들의 태도도 잘못되고, 그런 상황을 겪은 선생님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두 분 선생님의 경우 접근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의 잘못을 부모님과 상의하는 것은 좋지만 "네부모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지... " 그런 식의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체벌, 일면 필요하기도 하지만 여학생의 머리를 출석부로 때리는 일 또한 학생에게 심한 모욕감을 줄 수 있는 일이므로 역시 다른 방법으로 학생을 지도하셨어야 되지 않을까 싶네요. 성적 때문에 전화를 걸어 온 학생 역시 그의 요구가 잘못된건지 잘 이해가 안되네요. 태도가 얼마나 불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e-mail comment가 본인의 교수방법이 아니라면 기분이 좀 언찮으셨다더라도 '권위'를 앞세우시는 듯한 표현보다는 그것이 본인의 option이 아니라는걸 말씀하시는게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고... 저도 사십대 중반으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니 아무래도 아이보다 어른들의 입장을 이해하는게 쉽고. 요새 애들 무섭다는 소리도 많이 듣기도 했고 위와 같은 상황에서 감정처리가 쉽지 않다는 걸 알지만 예로 드신 학생들이 잘했다는게 아니라 선생님들께서도 이제는 좀 다른 방식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셔야 되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글 올립니다.

'반(反)역사'로서의 역사학적 성서 비평을 말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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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제3회 여성미술제 ‘판타스틱 아시아―숨겨진 경계, 새로운 관계’(2005.6.16~7.3, 성곡미술관)에 출품된 작품 중에 시마다 요시코(Shimada Yoshiko)의 <비밀스런 욕망들>이라는 설치작품이 있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오른편 구석엔 커튼이 쳐진 테이블이 있고, 왼편엔 꽤 커다란 서랍장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자그마한 상자가 하나 있다.

서랍장 속엔 타이핑된 이야기가 적힌 종이와, 이미지나 작은 물체 등이 들어 있다. 관람자들이 익명으로 적어 놓은 상당히 은밀한 성적 비밀들(딸의 남자친구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고백, 성적 불감증 고백, 레즈비언 고백, 낙태경험 고백, 남편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여인의 고백 ...)이 작가에 의해 타이핑된 종이, 그리고 작가가 글의 내용을 연상하면서 임의로 만든 이미지나 상징물이다. 실은 이것은 일본에서 전시할 때 관람자들이 적은 천여 편의 비밀 중 시마다 요시코 씨가 추려낸 십여 편의 이야기들이다.


[그림] 시마다 요시코의 설치작품. <비밀스런 욕망들>의 일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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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른편의 테이블은 새로운 관람자들이 자기 가족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를 적는 자리다. 다 적은 글은 가운데의 상자 속에 넣으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작가에 의해 추려지고 타이핑되어 다른 장소에서 전시될 때 이미지나 상징물과 함께 서랍장 속에 배치되어 다른 관람자들에 의해 읽힐 것이다.

내게 이 작품이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작가의 설치작품은 결코 자기 완성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거기에는 과거의 관람자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있다. 작가가 주문한 주제였지만, 그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람자의 몫이다.2) 작가는 내용에 개입할 수 없고, 상상조차 못한다. 물론 그 속에는 작가로선 어느 것 하나에도 끼어들 수 없는 관람자들 각자의 체험, 아픈 기억이든 즐거운 기억이든, 다양한 체험이 배어있다. 작가는 그것을 읽으면서 그 속에 서린 배경을 알 수 없고, 다만 추측만 할 뿐이다.

작가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은, 말한 것처럼, 포괄적이나마 주제를 제시하고, 주제에 따른 관람자들의 비밀 이야기를 선별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녀가 상상한 상징물이나 이미지를, 그녀의 설치물 속에 함께 전시한다.

관람자의 이야기를 읽는 이는 그것을 적은 이 자신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경험의 소유자다. 물론 시간적으로도 다음 전시회의 관람자니, 얼마의 시차든, 이후의 사람이다. 게다가 글이 익명으로 쓰였고, 그(녀)의 필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작가가 타이핑해 놓은 종이가 대신하고 있고, 작가가 만든 이미지나 상징물이 있어, 새로운 관람자의 글 읽기는 이러한 다른 질감의 대체물에 영향을 받는다.

요컨대 설치물은 고유한 작가도 작품도 없으며, 고유한 관람자의 이야기도 없다. 또한 관람자가 보고 읽는 설치물은 항상 변화하기 마련이다. 대신 존재하는 것은 설치물 속의 과거 관람자의 이야기와 새 관람자의 독서가 만난다. 물론 그들은 서로를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다. 또 그들은 전혀 다른 체험을 내포한 사람들이다. 한데 그들은 이 설치물을 통해 만나고 상상하며 의미를 떠올린다. 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서로 소통하는 대화가 아니라, 제각기 상상하는 대화다.

작가는 그들을 중개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만들고 배치하지만, 그 관심이나 취향이 관람자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극히 적다. 하여, 여기서 또 한 번 말할 수 있는 것은, 시차를 달리하는 생면부지의 관람자간의 대화는 작가가 끼어듦으로써 가능하며, 그런 점에서 이 설치작품은 두 부류의 관람자와 작가, 이들 삼자가 벌이는 대화를 내포한다. 물론 이 대화는 서로 소통하는 대화가 아니라 제각기 상상하는 대화다. 즉 각자의 의미가 수렴하여 합의에 이르는 대화라기보다는 서로 이야기의 실마리를 얻어 각자 자기의 의미를 떠올리는 대화인 것이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여기서 오늘날의 역사가와 그의 역사 서술의 효과에 관한 상상을 이어갔다. 역사 서술은 시차를 달리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 간의 대화이다. 과거의 사람들과 지금의 독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서로 살아간 시기도 장소도 문화적 맥락도 다르다.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없고, 다만 과거의 사람들에 관해 서술된 역사를 통해서만 후대의 독자들은 저들 과거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

‘과거인’들의 삶과 체험 모두가 역사 서술 속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숱한 정보들이 있지만, 그것이 저들의 삶 전체를 반영한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숱한 정보들은 ‘파편적’이다. 더욱이 그 파편적 정보들은 역사가에 의해 일부가 취사선택되고 재배치되며, 또 역사가의 상상력에 의한 보완적 설명과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역사 서술이 된다.

물론 역사가는 부재하는 사료를 날조할 수 없다. 그것은 과거의 누군가의 이야기며, 삶의 기록이어야 한다. 비록 그(녀)의 변화무쌍한 삶 전체일 수는 없지만, 어느 한 순간의 기억을 담고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는 본래의 고유한 의도에 따라 선택, 배치, 보충설명을 일관되게 하지 못한다. 사료에 영향을 받아 그의 본 취지가 변화하기 마련이다. 또한 전체적인 서술 과정에서 그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들 요소들이 어우러진 전체로서의 텍스트가 만들어지는데, 이 최종결과물은 역사가 자신이 애초에 혹은 과정에서 의도한 것이 아니다. 자신 이 활용한 제재의 질감에 따라 설치물이 미술가의 의도를 벗어나 탄생하듯이, 역사 서술도 작가의 의도의 단순한 반영물이 아니다.

요컨대 역사 서술은 역사가와 과거인 사이의 대화인데, 그 대화는 과거인의 본래적인 무엇이 밝혀지는 것을 지향하는 것도, 역사가 자신의 사상의 단순한 반영인 것도 아니다. 양자의 대화는 양자의 상호얽힘이자 분열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역사 서술은 역사가와 과거인 사이의 ‘의도하지 않은 대화’, 아니 ‘대화들’이다.

한편, 이들 양자, 역사가와 사료간의 의도하지 않은 대화는 문헌으로 출판된다. 출판되지 않는 역사 서술은 ‘실패한 역사’다. 그것은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개봉되어지길 기다리는 비극적 운명의 존재다. 그리고 이렇게 개봉되기 전까지는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요컨대 역사 서술은 텍스트이어야 하며, 독자와의 대화 속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여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역사 서술이라는 텍스트는 과거인과 현대의 독자 사이의 대화다. 그리고 이 대화는 서로 얽혀 있되, 분열적으로 연루된 것이다. 또한 독자는 여기서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텍스트의 의미를 읽어낸다.


역사란 이런 것이다. 적어도 현대의 역사학은 이러한 역사 철학적 성찰에 이르게 됐다. 한데 많은 역사가들이 착각하듯, 성서 연구자들도 성서에서 과거인의 고유한 사실로서의 역사를 알아내려고만 한다. 그리고 그 결과 성서 역사학은 성서 연구자들 자신에 의해 파산선고를 받았다. 이미 백 년 전에 말이다. 결국 그 연구 성과들은 실패한 역사요 비역사인 셈이다.

한편 그러한 실패에 대한 우회로로, 많은 성서 연구자들은 ‘반역사’로서의 성서 읽기를 모색했다. 예컨대 과거인의 시공간적 맥락에서 자유롭게 성서 텍스트를 읽고, 그것을 독서자의 상상력과 대면시켰다. 이때 텍스트는 역사 서술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학적 서술이다. 그러므로 역사 비평 대신에 문학 비평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역사학이 이러한 문학적 비평에 착안함으로써 새로운 비평 방법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역사 서술 자체가 과거인과 현대 독자 사이를 매개하는 대화의 소재라는 인식에 기반을 둔 비평 방법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역사와 반역사를 넘나드는 비평 방법이다. 역사와 반역사를 넘나들며 구성한 역사 서술로서의 텍스트, 그리고 독자와 텍스트 간의 의도하지 않은 대화를 지향하는 역사적 혹은 반역사적 독서를 추구하는 방법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곧 출간될 나의 책 『인물로 보는 성서』(가제)의 머리글로 저술된 것이다.

2) 그렇다면 그(녀)는 더 이상 단순한 관람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시마다 요시코 씨와 함께 이 작품의 공동 창작자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그(녀)를 관람자라고 부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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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종희
    2009.07.18 17:2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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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겐 몇개의 스토리가 겹쳐지는 글이네요
    가령, 은밀한 성적 욕망과 환타지를 기록하되 사회교양의 레이다에
    공개되는 일 없는 익명의 공개와 작가에 의한 편집의 매개, 그리고
    관람자의 연결고리 없는 상상의 독서가 릴레이식으로 이어지는
    시마다 요시코의 페미니즘 작품과
    반역사적 성서비평의 관점을 가진 반신학적 신학자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동조받는 윗글이
    마치 다층적 흐름이있는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보면,
    시마다 요시코의 작품과 김목사님의 글을 서로다른 관점의
    또 다른 합일체처럼 느끼는 '나'역시 흐름의 과정에 있는 거 겠네요~^^
    • 올빼미
      2009.07.20 17:2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이미 많이 알고 계신 것처럼,저는 성서를 읽는 사람의 창의적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요. 성서학이나 역사학은 그러한 창의적 생각을 위한 하나의 힌트이고요. 시마다 선생의 작품은, 제가 보기엔, 독자의 그러한 흥미진진한 읽기가 어떻게 수행되는지를 멋지게 보여주는 설치작품인 듯해요. 그리고 저와 같은 중계자들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멋지게 드러내준 것 같아요. 그이 같이 멋드러진 작품을 쓰는 만들어 내는 것이 저의 바람이지요. 오종희 님은 몇 번의 대화에서 신학에 대한, 그리고 나와 같은 연구자에 대한 잘 준비된 독자의 힘 있는 해석을 드러내 주었지요. 아시는지요. 대화를 통해 제가 더 많은 것은 배우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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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초상
- 김현화 作 (영국 Emerson College에서 설치미술 전공)


그림을 그릴 때 나는 흔히 painter라기 보다는 viewer입장에서 그림이 진행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붓을 쥐고 있으나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충분히 몰입하지 못하고, 외부의  시선으로 내 그림을 해석하며 구도와 색채 따위를 결정해간다. 너무 많은 그림을 보아왔고,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을 구분할 줄 알아 한마디로 그림이 뭔지를 지나치게 알아버린 결과이겠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나를 해방시키는 그림을 그릴 때가 있다.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순간을 정확히 알 수 있을 때가 있다. 이런 때는 도화지도 붓도 시야에서 사라진다. 붓을 들고 춤추는 듯 오가는 내 몸짓만 느낄 뿐이다. 그림이 그려지는 화폭이 도화지 크기의 수배는 넘어선다. 도화지를 벗어나 넓은 공간을 휘저으며 그 공간에 안 보이는 그림을 그려간다. 남는 것은 물론 작은 도화지에 살짝 닿은 붓자국 뿐이다.

물에 적신 도화지에 이 렘브란트 초상을 그릴 때 처음으로 그런 해방감을 맛보았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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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체계, 생명 : 체계이론의 관점에서 본 민중신학의 생명론

연구저자:
전 철

연구발표: 한국민중신학회 7월 정기세미나

발표일시: 2009년 7월 9일 목요일 오후 6시

발표장소: 서울 향린교회

한글요약:

이 연구는 근대적 사유로서의 민중신학의 정신을 개괄적으로 조명한다. 이를 바탕으로 민중신학은 고통과 고난을 담지하고 있는 민중의 문제를 어떻게 주목하는지를 체계이론적 관점에서 성찰한다. 이를 통하여 민중신학의 방법론적 성격과 생명론의 현실적 의미를 오늘의 지평에서 헤아리고자 한다.

논문목차:
  1. 들어가며 : 민중신학의 방법론적 특성
  2. 근대적 사유의 탄생과 민중신학
  3. 민중신학과 생명의 체계이론
  4. 신체적 고통의 전유와 사회체계
  5. 나가며 : 고통의 생태학으로서의 민중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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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진 첫 호가 나왔습니다!

페이퍼진 <제3시대> 첫 번째 호가 나왔습니다.

세련된 페이퍼진을 만들기 위해 동연출판사 사장님과 여러 직원들께서 많은 수고를 해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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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여름 신학아카데미 탈/향 - 회원강좌>

성서ㆍ삶ㆍ신앙

■ 강사_ 김창락

■ 일정_ 2009년 7월 9일 ~ 8월 27일 매주 목요일 저녁 7시30분

장소_ 한백교회 (5호선 서대문역 1번출구, 우체국 신한은행 사이 골목 50m)

수강료_ 8강 8만원 (수강신청 ☎ 02-363-9190,
yminjung@chol.com)
* 이 강좌는 회원강좌이므로 기존 CMS 회원 및 신규 CMS 후원 신청자는 무료로 수강할 수 있습니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는 회원들의 자발적인 힘으로 운영됩니다. 여러분의 후원을 기다립니다.

■ 강의개요_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개독교’라는 모욕적인 이름으로 비난을 넘어 조롱을 당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다수의 기독교회 또는 기독교인들이 가진 자들의 편에 가담하여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충견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태는 ‘그리스도교’라는 그 본래적 신앙 내용에 부합하는 것인가 타락한 것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이 담겨 있는 성서에 비추어서 해답을 모색해 보자.

            첫째 마당 :    ‘성서’란 어떤 책인가?
            둘째 마당 :    ‘역사’란 무엇인가?
            셋째 마당 :    ‘예수 운동’이란 무엇인가?
            넷째 마당 :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
            다섯째 마당 :  ‘역사적 예수’ 문제란 무엇인가?
            여섯째 마당 :  초대교회의 선교 역사에서 획기적 사건은 무엇인가?
            일곱째 마당 :  바울은 어떤 인물인가?
            여덟째 마당 :  그리스도교 복음/신앙의 정수는 무엇인가?

* 필요한 참고자료는 문서파일로 제공함.

■ 강사소개_
본 연구소 소장. 표준새번역 성서 번역위원.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영어영문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독일 Johannes Gutenberg 대학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한신대학교 신학대학 신학과 교수, 미국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객원 교수, 한신대학교 평화연구소장, 한국신약학회장, 한국민중신학회장을 역임하였다. 지은 책으로는 <다마스쿠스 사건 - 무엇이 일어났는가?>, <갈라디아서 주석>, <성서읽기 / 역사 읽기>, <새로운 성서 해석과 해방의 실천>을 비롯해, 바울과 예수에 관한 많은 논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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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여름 신학아카데미 탈/향 - 일반강좌>

죽음과 내세

■ 강사_ 이찬수

■ 개강_ 2009년 7월 7일 ~ 8월 10일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정각

장소_ 한백교회 (5호선 서대문역 1번출구, 우체국 신한은행 사이 골목 50m)

수강료_ 6강 6만원 (수강신청 ☎ 02-363-9190,
yminjung@chol.com)

■ 강의개요_

죽음이란 무엇이며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이른바 ‘존엄사’가 사회적 논의 주제가 되어가면서 죽음 및 내세에 대한 관심도 커져가고 있다. 이번 강의에서는 그동안 진지한 학문적 탐구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왔던 죽음 및 내세의 문제를 다양한 종교 전통의 언어와 세계관을 중심으로, 그리고 역사적 차원을 중시하며 정리해본다.

■ 강의내용_
1. 유대교의 죽음 및 내세관 - 내세에 무관심하다가 다양하게 분화해간 고대 유대인의 내세관을 역사적 차원에서 정리한다
2.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죽음 및 내세관 - 그리스도교적 내세관은 단일한가? 그리스도교 내세관의 다양성을 성서 및 교부들의 내세관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3. 한국인의 죽음 및 내세관, 무교와 유교의 경우 -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어떤 죽음 및 내세관을 지니고 있었는지, 무교 및 유교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4. 한국 그리스도인의 내세관 - 한국 그리스도교인 고유의 죽음관이 있는지 유교 및 무교적 죽음관과 비교하며 고찰한다
5. 불교적 죽음 및 내세관 - 불교적 내세관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고대 인도의 세계관을 중심으로 정리한다
6.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내세관, 조화는 가능한가 - 일회적 세계관과 윤회적 세계관은 어떻게 조화되어야 하는지,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내세관의 조화를 도모한다

■ 교재_
1. 이찬수,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가편집교재)

■ 참고문헌_
1. 존 바우커, <세계 종교로 보는 죽음의 의미>, 박규태 외 옮김, 청년사, 2005.
2. 조흥윤, <한국종교문화론>(동문선, 2002)
3. 가지 노부유키, <침묵의 종교, 유교>(경당, 2002)

■ 강사소개(이찬수)_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두 번의 석사과정을 마친 뒤, 같은 곳 신학분야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9년부터 강남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하다가, 불상 앞에 절했다는 이유로 2006년 재임용을 거부당했다. 그 뒤 감신대, 성공회대, 이화여대, 한신대, 원광대 등에서 강의를 계속해오고 있고, 2008년 8월까지는 1년간 일본 코세이가쿠린 객원교수를 지냈으며, 종교간 대화와 조화의 문화를 진작시키려는 취지로 설립된 종교문화연구원 원장 및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한국죽음학회 연구이사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종교들을 중심으로 한국인의 죽음관 및 내세관의 정립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인간은 신의 암호>, <종교신학의 이해>, <종교로 세계 읽기>,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생각나야 생각하지- 사유, 주체, 관계, 그리고 종교> 등을 썼고,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 <화엄철학>,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다>, <지옥의 역사>, <절대 그 이후> 등의 책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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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지성의 정원> 2009 여름학기 강좌

민중신학, 시대의 반신학적 기억

■ 강사_ 김진호

■ 개강_ 2009년 6월 30일부터 매주 화요일 7시 30분(8강, 104,000원)
(수강문의 02-325-2102 daziwon@waam.net)

■ 강좌취지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전 지구적인 위기의 배후임은 이론의 여지없다. 또한 그리스도교는 근대한국의 형성과정을 왜곡시켜온 주된 장본인의 하나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심각한 비판적 점검의 대상이다.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그러한 비판적 물음은 공히 필요한 것이다. 20세기 후반 이후 그리스도교의 수많은 비판적 신학운동들이 뼈아픈 자기 성찰을 수행하였고, 한국의 민중신학은 그러한 비판을 반신학적 신학운동으로 펼쳐 왔다. 이 강의는 반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의 이러한 자기 성찰 작업을 살펴보려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한국의 교회와 그리스도교, 나아가 전 지구적 그리스도교를 바라보는 민중신학적 시대 기억, 그 반신학적 담론의 형식과 내용을 탐색하고자 한다.

             1강  형성과 구성―민중신학이란 무엇인가
             2강  정전(Canon)에서 전거(reference)로
             3강  교회의 신학에서 사건의 반신학으로
             4강  ‘죽임’을 말하다─오클로스, 한(恨)의 현상학, 고통의 역사화
             5강  ‘살림’을 말하다─예수, 교회, 민중
             6강  바울 vs. 바울─교회의 바울, 교회 밖의 바울
             7강  몸의 정치 vs 영의 정치─성령은 무엇으로 있는가
             8강  신의 프락시스, 변혁의 신학과 반신학

■ 참고문헌

김진호, 『예수역사학』(다산글방); ─, 『반신학의 미소』(삼인); 이정희 외,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삼인); 최형묵 외,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평사리);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한국신학연구소);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한길사)

■ 강사소개
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당대비평』 편집주간, 한백교회 담임목사 역임.

■ 찾아가는 방법


문의
02-325-2102 
http://daziwon.net

▶ 지하철 2호선 합정역 2번 출구 → 홍대입구역 방면 약 150m 전진 → 우리은행에서 좌회전 후 → 건너편 현대슈퍼 우측 골목 SBI(왼쪽)와 카페 Sol(오른쪽)을 지나면 검은색 <다중지성의 정원> 간판이 보입니다.

▶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1번 출구 → 합정역 방면 200m 전진 → 지하보도 통과 → 경남예식장(을 바라보고) 좌측 골목 안 끝에 있는 대성설렁탕에서 좌회전 후 20m 앞 왼쪽에 검은색 <다중지성의 정원> 간판이 보입니다.

▶ 버스 이용시(경남예식장 앞 정류소) : 파랑(간선) 271, 570, 602, 603, 604 초록(지선) 5712, 5714, 6712, 7012, 7016, 7711, 7716, 빨강(광역) 1100, 1200, 921 검정(공항) 602

▶ 마을버스(마포구) 05, 06, 09, 15, 19 (경남예식장과 우리은행 앞 정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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