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다운 나라,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정치를 위해서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만나는 사람마다 요즘 뉴스 보는 재미가 있다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비서진들과 커피를 들고 산책하거나 청와대 직원들과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유쾌한 김정숙 여사가 사람들을 만나는 모습,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전혀 새롭지 않은 평범한 것들인데 가슴이 뛰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특히 세월호 참사로 숨진 단원고 기간제 교사 김초원 선생과 이지원 선생의 순직을 인정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발표 되었을 때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두 분의 순직을 인정함으로써 스승에 대한 국가적 예우를 다하려 한다"는 말에, 지난 10년 아니 지난 반세기 이상 짓밟히고 억눌려 온 사람의 마음 그 당연한 상식과 도리가 마침내 되살아 나고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처럼 감격하는 사람들의 마음, 기대와 희망에 부푼 심정들이 다시 절망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는 길에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또 생각만큼 빠르지 않아 답답함을 견뎌야 할지라도, 바른 길로 꾸준히 걸어 갈 수 있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아직은 허니문 기간이라, 기득권의 저항이 수면아래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조급하고 노골적입니다. 대통령 파면이 결정되고 이틀도 지나지 않아 사면 이야기를 꺼내 들었던 보수 언론의 뻔뻔함은 이번에도 단 일주일도 참지 못하고 본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재수사, 국정농단 사건과 정윤회 사건에 대한 재수사까지는 그래도 말을 아끼지만, 역사교과서 폐지나 싸드 배치에 대한 재검토 정도에 오면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옵니다.


    적폐 청산은 좌파 운동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배타적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것이고, 우파를 괴멸시키기 위한 전략이라 할 것입니다. 류근일 같은 사람은 적폐청산은 곧 운동권 본색을 너무 조급하게 드러내는 모습이라고 평합니다. 그리고 국정농단 사태를 방조해온 검찰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이임사를하면서 자신은 어떤 경우에도 진실이 가려지거나 정의가 외면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왔다고 강변합니다. 오히려 새 정권을 향해서 나만 정의롭다는 생각은 위험하다고 충고까지 하면서, 수사의 미덕은 절제라고 가르칩니다. 적폐청산은 새 정권과 그 정권의 배후에 있는 운동권의 전략이며, 반미친중적이고 종북적인 본색을 드러났다고 대 놓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국민은 속았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광화문 촛불 민심은, 종북적 운동권의 선동에 놀아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촛불의 광기가 아니라, 합리적인 정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적폐청산이 아니라 통합을, 통합을 위해서 박근혜도 사면하고 기득권도 인정하라 할 것입니다. 새 정부가 출범한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이 기득권의 저항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냉철하게 주시하면서, 길을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새 정부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 합니다. "이게 나라냐?"라고 외치며, 한 해 겨울을 거리에서 촛불로 지샌 민심이 뽑고 세운 대통령과 정부로서, 당연히 그런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새 정부와 대통령은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국정을 농단했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 아닙니다. 지난 9년간 아니 그 보다 훨씬 오랜 동안, 시민을 모욕하고 협박해 온 권력, 시민들과 유권자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자신들이 결정하고 밀어붙이고 억압하고 강요해 온 권력에 대한 절망과 분노의 표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민중의 개 돼지라고 말하는 세상, 사람과 생명이 물건이 되고 숫자가 되는 세상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 외침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은, 오직 권력만을 지킬 뿐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 대한 절망의 표현입니다.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정치와 경제가 만들어 내는 세계 속에서, 여기 인간이 있음을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요 외침인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도 우리가 보았던 것은 사람과 생명이 무시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예측 불허의 충동적인 인물 트럼프에게서도, 정상적인 상식으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김정은에게서도, 그리고 그 둘이 벌이고 있는 위험한 게임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우리를 볼모로 잡고 희생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주권을 가진 국민과 국가가 당연히 행사해야 할 권리와 수용절차를 무시한 채, 고고도비사일방어체계 싸드를 배치하는 동맹국 미국은 물론이요, 동맹국의 요구라 해서 국민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배치를 서두르는 대한민국 정부, 그들에게 과연 이 한반도를 살아가는 사람과 생명에 대한 관심은 있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싸드 배치와 관련해서 보복조치를 감행하고 있는 중국, 또 그 기회를 군사적 무장의 기회로 삼고 있는 일본에 둘러 싸인 채, 이 나라의 국민들은 '정말로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해 줄 나라가 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새 정부는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새 정부가 추구하는 촛불을 계승하는 시민주권의 광화문 시대는, 시민들이 스스로 참여하여 스스로를 지켜 낼 수 있는 확신에 찬 나라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새 정부와 대통령이 국정철학과 방향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도 염려가 되어서 몇 가지 생각을 더 말해 봅니다. 먼저 신영복 선생의 도로와 길에 대한 가르침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도는 도로의 논리가 아니라 길의 마음입니다. 도로는 속도와 효율성이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이며, 길은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동행하는 인간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매일 직선을 달리고 있지만, 동물들은 맹수에게 쫓길 때가 아니면, 결코 직선으로 달리는 법이 없습니다." 도로와 길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해서 어느 한쪽은 반드시 필요하고 다른 한쪽은 전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길의 마음을 잃어버린 도로를 경계함이요, 사람을 버리고 가는 효율과 속도의 논리 곧 자본의 논리가 가진 위험을 경고함이며, 사람의 관계가 야수적 관계로 변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고발입니다. 그리고 다시 사람과 생명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되살려 내야 한다는 참으로 따뜻한 가르침이며, 사람 사이에 서로 주고받고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영성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 대통령과 정부의 마음 또한 그와 같으면 좋겠습니다.


    성서에도 길에 대한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 14장에 나오는 제자 도마와 예수님 사이에 있는 길에 대한 논쟁도 신영복 선생의 길과 도로에 대한 가르침과 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새 정부가 출범하는 이 때에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은 요한 복음 14장 27절의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평화를 말하는 두 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권력 유지를 위해서 사람과 생명을 희생시키는 평화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참 평화의 길일 것입니다. 핵은 핵으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포의 균형을 유지하려 하고, 상호간에 미움과 증오의 팽팽한 대결을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죽일 각오를 하는 자만이 애국자라고 외치는 평화의 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람과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습니다. 사람과 생명을 희생해서 지키려는 권력의 평화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평화의 길에 굳건히 서기를 바랍니다. 열강들의 이익이 각축하는 이 한반도에서 이와 같은 참 평화의 길을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 속에는, 분명히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평화를 향한 간절한 소망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뿌리를 두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살리는 정치, 사람다운 삶을 향한 소망을 열어주는 정치,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평화통일의 길이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를 온전히 정권이나 권력에게 맡겨 놓고 기다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난 50년간을 생각해 보면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언제나 권력은 민중을 배신해 왔습니다. 결국 촛불의 소망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참여와 감시와 견제는 여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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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하나의 키워드 : 이단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Ⅰ.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초기 기독교 이단 연구에 대한 비판적 읽기


     이단이란 정통종파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교리나 견해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흔히 붙여지는 종교적 용어로서 대체로 불온하고 미심쩍으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수반한다. 한 예로, 사전에도 "헬라어 원어 하이레시스의 기본 의미는 선택이나 의견으로서 단순히 분파, 파(벌) 등을 일컫는 경우(행22:22)와 교회 내에서의 편당(고전 11:19)을 뜻하는 경우, 그리고 다른 교리를 주장하는 이단(벧후 2:1) 등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나온다. 하지만 사회학자 피터 버거에게 이단적 명령은 근대 사회의 전형적 특성에 속한다. "전근대적 인간에게는 이단은 가능성에 불과했고 대개 거리가 먼 가능성이지만,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전형적으로 이단이 하나의 필요성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근대성은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는데 이 상황에서 취사선택은 하나의 명령인 것이다."[각주:1] 따라서, 앞서 본 사전적 정의와 달리 새로운 상황에 직면한 해석자로서 권위에 대한 도전을 감행한 개척자라는 긍정적 이미지가 이단에게 부여될 수 있다. 물론, 맥그라스라면 단호히 대처할 것이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이단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단이란 용어는 겉으로는 복음의 모양을 하고 있되 궁극적으로 복음의 본질을 전복시키는 신앙 체계를 가리키는 말이다."[각주:2] 사실, 이단적 명령에 따른 하나의 신학적 프로그램으로 버거는 19세기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을 지지하고 있는데, 맥그라스에게 이것은 근대 유럽 초창기 자유지상주의의 열망과 궤적을 같이하는 인간주의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이단이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해방을 안겨준다는 신념은 1세기의 현실보다는 오늘날 서양의 문화 풍토와 훨씬 더 관련이 깊다."[각주:3]고 쓴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말이다.

     확실히 이 같은 맥그라스의 비판은 어떤 면에선 꽤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알다시피, 해석자란 역사를 자기 시대와 관련해 해석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에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의 이단들에 대한 맥그라스의 견해 역시 비판적인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맥그라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단은 경험적 개념이 아니라 평가적 개념이다. 어떤 차원에서 보면 이단은 어떤 공동체의 사상에 대한 판단 내지는 평가가 낳은 결과인 만큼 구성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각주:4] 다시 말해, "이단은 역사적 분석으로 정당성이나 부당성을 증명할 수 없는 평가적 개념"[각주:5]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놓고 "이단에 관한 역사적 연구는 다른 이들이 이미 규정지은 것을 역사가가 묘사해야 하는 일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정통인지에 대한 판단은 역사가가 정당한 역사방법론을 활용하여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각주:6]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단을 정의하고 구성하는 그의 방식은 애초에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적 작업은 아닌 셈이다. 그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특정한 신학적 관점이 미리 전제된 작업이고, 그에 따른 평가인 것이다. "사실은 잘못된 견해가 초창기부터 등장했기 때문에 후대가 이를 바로 잡아야 했다."[각주:7]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 게다가, 초기 기독교는 어떤 종류든 획일성을 강요하는 권위구조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말하면서도 "훗날에 정립된 신학 공식들은 명시적으로 공식화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 사상과 예배 속에 이미 내재해 있던 사상과 주제를 점진적으로 펼쳐 보이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각주:8]는 고어의 말을 자연스럽게 인용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것이 역사적 주장이라기보다는 기독교 교리의 역사를 설명할 때 정통주의자들이 흔히 동원하는 씨앗의 비유와 유사한 주장이란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4세기에 정립될 정통주의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정통주의를 발현할 씨앗은 처음부터 품고 있었다고 보는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당시의 정통은 그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는 중이었다고 말이다. 정통은 기성복처럼 이미 만들어진 상태가 아니라 씨앗처럼 상당 기간에 걸쳐 자라나는 중이었다. 장차 정통의 구조에 편입될 모든 기본 주제들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각주:9]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분자생물학을 전공한 그에게 다윈은 기독교의 역사를 살피는 데에 적격인 인물로 등장한다. "교리의 발전이란 사상은 1859년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됨과 동시에 새로운 지적 에너지를 공급받았다. 생물학 세계에서 진화를 얘기할 수 있다면 사상의 세계에서도 그와 똑같은 과정을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각주:10]

     그러므로, 기독교의 이단에 대한 맥그라스의 평가는 역사이기보다는 특정한 신학적 이해를 전제한 하나의 해석학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발터 바우어라면 이러한 신학적 전제는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고 비판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2세기 말까지 대다수의 장소에 있었던 주류 기독교는 정통파가 아니라 이단들이었다."[각주:11] 앞서 언급된 맥그라스의 씨앗 비유를 참조하면 "정통은 최초의 원래 견해와 다수의 보편적 견해를 모두 함의하고 있으며 이단은 그러한 정통적 믿음을 고의로 저버리는 타락을 뜻한다."[각주:12]는 에오세비오스의 설명을 맥그라스가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해 얼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각주:13]


바우어의 입장은 단순한 주장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다. 각 지역에서 입수한 자료들을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 에우세비오스의 기록과는 달리 최초기와 혹은 승리자측이 지배하기 이전에는 대부분 지역에서 이단적 형태의 기독교, 즉 승리자측이 나중에 공격한 기독교의 제형태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후기의 정통 기독교인들은 승리를 거둔뒤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발생한 내분의 역사에 대한 진실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어만의 이런 주장을 다소 과장된 레토릭으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흥미로운 점은 바우어를 비판하고 있는 맥그라스조차도 바우어의 핵심적인 테제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바우어가 확실히 옳은 점이 한 가지 있다. 초기 기독교가 당시의 대표적인 일부 인물들이 우리에게 심어준 인상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다양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더 이상 논란거리나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각주: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그라스는 바우어의 주장을 수용한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받아친다. 한 예로, 영지주의를 페민적인 평등주의 운동으로 보는 페이절스의 주장에 대해 영지주의 저술은 반여성적 진술로 가득하다는 매크라이트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전혀 근거가 없다고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단이 정통에 대해 자신의 합법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는 바우어의 주장이 붕괴되진 않는다. 애석하게도, 이 지점에서 맥그라스는 논점을 교묘하게 흩뜨리고, 정통은 비록 원형적 혹은 씨앗의 형태지만 애초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 이단들에 대한 맥그라스의 작업을 단적으로 평한다면 발터 바우어를 비롯해 초기 기독교의 이단들을 새롭게 인식하려는 최근의 학문적 작업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각고의 노력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가 당면한 진정한 도전은 정통이야말로 강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정서적으로 매력있고, 심미적 감각을 증진하며, 개인적으로 해방감을 주는 것임을 증명하는 일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고대한다."[각주:15]는 그의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각고의 노력이 “이단은 후기 고전 시대의 다원적이고 경쟁적인 세계 안에서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결함이 있고 무기력하고 진정성이 없는 기독교의 한 부류였다. 반면에 정통은 그 장래를 안전하게 지키는 수단으로 진정성에 대한 추구를 촉진하는 등 이단보다 더 강한 생존력을 갖고 있었다.”[각주:16]는 논리비약인 동시에 일종의 결과론적인 주장으로까지 치닫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안쓰러워 보인다. 어떻게 역사가 맥그라스가 말한 바처럼 씨앗으로 이해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결과론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평가하고 마는 것일까? 그렇다면, “한 개념의 역사란 반드시 그의 점진적인 세련화의, 계속 증가하는 그의 합리성의, 그의 추상화의 변화율의 역사가 아니라 그의 구성과 유효성의 다양한 장의, 그의 사용에 있어서 계기적인 규칙들의, 그의 정교화가 추구되고 성취되는 복수적인 이론적 환경의 역사일 수 있다.”[각주:17]는 푸코의 지적은 애초에 상상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때문에, “마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전통을 재구성하는 것에, 진화론적인 곡선을 따라가는 것에, 목적론을 기획하는 데에, 그리고 끊임없이 생명이라는 은유에 호소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는 바로 그 곳에서, 차이를 생각하는 것에 대한, 간극과 분산을 기술하는 것에 대한, 동일한 것의 확고한 형태를 해체시키는 것에 대한 어떤 거부감을 느낀 듯이”[각주:18]라는 푸코의 지적을 맥그라스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독교에 대한 푸코의 논점이 중세에만 해당된다고 맥그라스가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은 권력이라는 개념을 순전히 정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맥그라스의 푸코에 대한 오독이다. 푸코에게 권력이란 단순히 정치적인 차원에서만 행사되는 그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비교해볼 때 기독교는 믿음체계라는 맥그라스의 주장 자체가 푸코에겐 이미 하나의 권력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4세기 황제의 정치적 수단에 의한 이단 규정이 2세기와 같은 초기에는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지식의 형태라는 점에서 보면 권력이 작동하고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푸코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단일한 기원이라는 신화를 해체하고 복수적인 기원을 상상함으로써 초기 기독교의 이단들을 맥그라스와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 볼 여지를 얻게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것은 발터 바우어의 논의를 숙고함으로써, 다시 말해 때론 수용하고 때론 거부하고 때론 혁신하면서 초기 기독교의 이단들과 관련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그런 작업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예로 맥그라스가 이단으로 낙인찍은 에비온파를 들 수 있다. 하나의 이단적 명령으로서 “타종교와 심각한 대결을 한다면, 적어도 가설적으로 다른 종교 역시 진리라는 명제에 대하여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달리 표현한다면 종교간의 대결에 돌입하려면 자기 자신의 현실관까지도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각주:19]는 버거의 주장을 참조하고서 버메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경청한다면[각주:20] 다소 비극적이지만 그럼에도 초기 기독교의 한 분파로서, 정통이 이단이라고 낙인찍은 에비온파는 유대교와의 대화에도 생산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화 등과 같은 기독교의 부착물 없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랐던 토라를 준수하던 유대인들로 구성된 1세기의 수확인 유대-기독교의 쇠퇴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유대인 진영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이방인 교회의 교인들에게도 인기가 없었다. 그들은 예수에게 가장 가까이 남아 있었음에도 유대인들은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여겼고 기독교인들을 그들을 이단으로 여겼다. 제롬이 어거스틴에게 보낸 글을 보면 그들은 유대인이면서도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기 원했지만 그들은 유대인도 기독교인도 아니었다.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져갔고 생존하던 몇몇 사람들은 다시 유대인 진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와 함께 예수가 전하고 실천했던 종교의 흔적은 마침내 사라져 버리고 비유대인 세계에서 헬라화된 기독교가 승전가를 부르며 승전을 거듭할 수 있게 되었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생소한 교리적, 교회적 특징들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가난한 자를 위해 부를 포기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나 우리의 시대에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람바레네에 있는 병든 자를 위해 초기한 알버트 슈바이처, 그리고 노구를 이끌고 캘커타의 더러운 거리에서 죽어가는 자들을 돌보는 테레사 수녀를 통해 본을 볼 수 있는 동기의 순수성에 대한 강조, 자비의 마음과 같은 예수의 경건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아직도 소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에비온파와 관련한 맥그라스의 이야기 역시 상당히 흥미롭게 들린다. “최근에 유대적인 기독교가 부활함에 따라 예수의 중요성을 유대인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일에 새로운 관심이 생겼다. 그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헬라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이유로 그 이름을 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전통적인 방식들이 그리스의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고 진정한 유대적인 방식으로 다시 진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를 선지자로 보는 것이 그런 예이다. 이로 말미암아 유대의 기독교 진영에서는 에비온주의 그리스도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각주:21]


ⓒ 웹진 <제3시대>



  1. 피터 버거, 『이단의 시대』, 서광선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81, p.36 [본문으로]
  2. 알리스터 맥그라스,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홍병룡 옮김, 포이에마, 2011, p.291 [본문으로]
  3.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20 [본문으로]
  4.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59 [본문으로]
  5.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103 [본문으로]
  6.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103 [본문으로]
  7. 알리스터 맥그라스, 앞의 책, p.48 [본문으로]
  8.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45 [본문으로]
  9.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125 [본문으로]
  10.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112 [본문으로]
  11. 정용택,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 자리, 2012, p.45 [본문으로]
  12. 정용택, 같은 책, p.43 [본문으로]
  13. 바트 어만,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 이제, 2008, p.365 [본문으로]
  14. 알리스터 맥그라스, 앞의 책, p.123 [본문으로]
  15.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343 [본문으로]
  16.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134 [본문으로]
  17. 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이정우 옮김, 민음사, 1998, p.21 [본문으로]
  18. 미셸 푸코, 같은 책, p.33 [본문으로]
  19. 피터 버거, 앞의 책, p.169 [본문으로]
  20. 게자 버미스, 『유대인 예수의 종교』, 노진준 옮김, 은성, 1995, p.262 [본문으로]
  21. 알리스터 맥그라스, 앞의 책, p.17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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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시각과 청각의 미학에서 촉각과 후각의 미학으로




장준식

(GTU Ph.D Candidate)



   요즘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신앙인들)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현대(개신)교회에서 매우 부정한 것으로 작동하고 있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지, 교회 와서 또는 매체를 통해 목사의 설교를 듣는 행위가 아니다.

   매체를 통해 듣는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는 달콤할 수 있다. 원래 매체를 거치면 매체 건너편에 있는 존재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현대인들의 의식은 그렇게 인식하도록 진화되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TV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는 존재를 유명인(celebrity)으로 인식하며 그들의 존재를 부러워한다.

   롤랑 바르트는 미학을 논하며 미학의 요소를 시각과 청각으로 제한한다. 미학에는 촉각이나 후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는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매체를 통해 접하는 연예인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는데, 우리는 그들을 오직 시각과 청각으로만 접한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없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시각과 청각으로 접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아름답게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인격적인 관계는 시각과 청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촉각과 후각으로 하는 것이다. 남녀가 처음 서로에게 끌리는 것은 시각과 청각을 통해서다. 그러나 그들의 인격적인 관계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벗어나, 점점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간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 있는 관계는 애잔할지는 몰라도 현실성이 없다. 타자의 존재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넘어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갈 때 온전히 파악된다. 그래서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벗어나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간 연인의 사이에는 언제나 불협화음과 어려움이 존재한다. 서로의 실체를 맞닥뜨리며 그 존재를 감당하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하기 때문이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서만 머물며 신앙생활을 하려는 자에게서는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기 힘들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만 머물러 있는 신앙인은 길가요, 돌밭이요, 가시덤불에 불과하다. 귀만 커져 마음이 완고할 뿐 아니라, 박해와 핍박을 한 시도 못 견디고, 염려와 유혹과 욕심에 취약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미학의 개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당시 가톨릭의 예배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에 머물렀다. 사람들은 미사(Mass)에 참석해 사제가 들어올리는 빵과 포도주를 보며, 사제가 읊조리는 말씀을 들으며 자신들의 구원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사제의 그러한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미사 행위를 더 많이 보고자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느라 분주했다.

   루터는 중세의 그러한 미사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미사가 아닌, 촉각적이고 후각적인 ‘성도의 교제’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루터는 미사(특별히 성만찬; 개신교에서는 미사를 예배라 한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가 내어 주신 몸을 끌어 안아 그 안에서 성도 간에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라 강조했다. 성도의 교제는 멀리서 바라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접촉하는 것이고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피냄새와 땀 냄새를 맡는 것이다.

   현대(개신)교회의 신앙인들은 매체를 통해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보고 듣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성도의 교제를 가로 막을 뿐만 아니라, 신앙을 ‘설교 듣는 일’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교회의 홈페이지를 통해 제공되는 설교 동영상은 본교회의 교인들을 위한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부득이한 이유로 교회에 출석하지 못해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을 듣지 못한 이들의 영적 조화를 돕기 위한 봉사의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설교자들의 설교는 달콤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영적인 성장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듣는 행위’는 청각의 작용이 아니라, 존재의 작용이다. 신명기 6장의 말씀은 그것을 이렇게 명확하게 표현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 말씀에서 보듯이, ‘듣는 행위’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이지, 귀만 쫑긋 세우는 행위가 아니다.

   사실 설교는 성경을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물론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은 약간의 풀이가 필요하겠으나, 성경 자체가 ‘선포되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것을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부족함이 전혀 없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말씀을 잘못 해석하느니 그냥 읽는 게 훨씬 낫다’고까지 말한다.

   신앙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제, ‘보고 듣는’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신앙생활은 그만 두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을 끌어 안고, 사느라 거칠어진 성도의 손을 마주 잡고 그들의 피냄새와 땀냄새를 맡으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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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15년 전 내가 노무현을 찍기까지 


    5.18 37주기를 한 주일 앞두고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성가대가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이 아니라 제창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되고 나서 나흘이 지났는데 여러 부분에서 개혁적인 청사진을 펼지고 있습니다. 국정교과서문제, 비정규직 문제, 위반부 재협상 문제, 최순실, 세월호 사건 재조사, 청와대 비서진의 진용 등, 국민들로 하여금 많은 기대를 하게끔 합니다. 물론, 앞으로 수구보수 세력에 의해 만만치 않은 저항에 부딫치겠지만 잘 헤쳐나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15년 만에 대통령선거에 참여했습니다. 이명박,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될때는 미국 시카고에 유학중이었습니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시카고에서 듣고 불쾌하고 화가 나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래서 이번 선거를 손 꼽아 기다렸나 봅니다. 15년 만에 대통령 선거를 하러 투표장소로 가는데 15년전의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노무현이 당선되었던 그 선거 말입니다. 저는 당시 민노당 당비를 내던 당원이었습니다. 당시 민노당 대선 후보로 권영길이 나왔습니다. 정몽준과 노무현의 연대가 선거전날인가 깨졌죠. 저 뿐만이 아니라 민노당의 많은 당원들이 흔들렸습니다. 선거 당일 투표소로 가면서도 누구를 찍을지 결정을 못했습니다. 핸드폰으로는 민노당에서 문자메세지가 막 왔죠. 흔들리지 말고 권영길에게 투표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당시 저는 노무현을 찍었습니다. 노무현을 찍으면서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정치적 선택이 최선이 아닌, 최악을 피해야하는 소극적 행위구나, 라는 현실정치에 대한 한계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 최악을 피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일이고, 사력을 다해 온 힘을 다해도 될까 말까 한 일이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서글프기 까지 했습니다. 그 즈음에 신학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선택은 무엇이어야 할 것인가, 라는 물음을 갖고 주변에 있는 동료들이랑 한 동안 실랑이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후 저는 노무현 정부 초기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미국에서 노무현 정권의 어려움, 이명박의 당선, 노무현의 죽음, 박근혜의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지 한 달만에 세월호 사건이 터졌고, 세월호 사건에 대한 어처구니 없는 정부의 대처는 결국 박근혜 정권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박근혜 정권이 침몰한 것 같으나 더 근본적으로 민심을 버린, 자식을 버린 정권에 국민들이, 아니 하늘이 심판한 것이라 믿습니다. 이런 숨가쁜 사건들을 지나고 저는 다시 15년 만에 대선에 참여했습니다. 15년 만에 대선에 참여하면서, 15년 전 직면했던 문제와 다시 대면했습니다. 15년 전 대선에서는 권영길을 찍을까, 노무현을 찍을까, 였는데, 15년이 지난 2017년 대선에서는 심상정을 찍을까, 문재인을 찍을까, 여러분 제가 누구를 찍었을까요?  


도입


    제가 올 들어 주기도문에 대한 연속 하늘 뜻을 나누고 있고, 오늘이 마지막 여섯 번째 ‘악(惡: Evil)’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다만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이 말은 예수 당시 일반 민중들이 메시아에게 기대하는 바이고, 메시아를 향한 염원의 최종 완결판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도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주기도문의 마지막을 ‘우리를 악에서 구해 달라’는 간곡한 기도로 끝을 내지 않았을까 합니다. 좀 오바해서 이 구절을 우리현실에 대입하면, 2017년 대선에 참여했던 대한민국 유권자의 70%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이 이 마음 아니었을까 합니다. 우리나라를 악에서 구해 달라, 적폐를 청산해라, 과연, 문재인은 이것을 실행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우리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다만 악에서 구해 달라’는 예수의 기도는 예수조차도 이루지 못했던 내용이 아닐까 합니다. 악의 문제는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은 무엇이고,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오늘 하늘 뜻 나누기에서 제가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내용입니다.


악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예전에 조지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이란.이라크, 그리고 북한을 향해 ‘악의 축“ (Axis of evil)이라 지목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을 정치적으로 정당화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부시가 악의 축으로 지목한 이란을 생각할때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만든 영화속에 등장하는 이란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그가 만들었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올리브 나무사이로‘ ’체리향기‘에 나오는 순박하고 천사같은 이란 사람들이 악의 축이라니, 저는 부시가 악의 축으로 지목한 이라크를 생각할때마다,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로, 2대에 걸쳐 이어지면서 폭행을 당했던 불쌍한 이라크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부시가 악의 축으로 지목한 북한을 생각할때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괜히 울화가 치밀고, 너희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라고 따지고 싶습니다.

    어쩌면 악은, 누군가를 악이라고 지목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것이 호명되는 순간 탄생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악은 정치적 의도와 음모의 소산인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를 악이라 지목하면서 그것을 공식화 한다는 것은, 우리, 즉 내부를 공고히 하여 하나로 뭉치게 하는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지니는 문제(예: 권력의 정당성, 현실정치에서의 실정, 그 밖의 여러 내부 소란들)들을 일거에 소거할 수 있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악은 대부분 정치 권력에 의해 창조되고, 권력의 관심 속에서 길러졌으며, 다 크고 나면 권력에 의해 제거 당해야 하는, 혹은 권력의 유지를 위해 계속 있어줘야 하는 불행하고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이것이 정치공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악에 대한 범박한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하는 '악'


    그렇다면 신학에서는 말하는 ’악‘은 뭘까요? 존재론적으로 악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입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합니다. 존재론적으로 모르겠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악의 현상은 우리는 매일 목도합니다. 그것이 세월호 사건이나, 용산참사 같은 거대한 악일 수도 있고, 개개인에게서 소소하게 일어나는 일상적이고도 미시적인 악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모든 종교에서 악에 대한 물음은 가장 중요한 화두이고, 마지막으로 남겨진 문제였습니다. 이런 악의 심각성을 알기에 예수는 주기도문 제일 마지막에 악의 문제를 배치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악’은 너무나 큰 주제이기에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그것을 한 눈에 조망하기란 불가능합니다. 한 학기 세미나 제목입니다. 오늘 하늘뜻에서는 주로 예수가 말했던 악에 대한 이야기 위주로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가장 많이 이야기 되는 것이 악이 존재인가? 비존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답을 했던 사람이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는 악을 “선의 결핍”으로 규정을 합니다. 우리가 100% 충만한 존재,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을 듣는 완벽한 존재인데, 시간이 흐르고 상처를 받고 아픔을 겪으면서 100% 충만함이 깨졌다는 거예요. 이것을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을 통해 설명합니다. 플로티누스에 따르면 물질이란 일자(一者)의 유출이 끝나는 곳에 위치합니다. 물질은 악의 유통로입니다. 이 말은 악 역시 선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거스틴에게 있어 악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악은 선의 바깥에서 비존재로 위치하는 것입니다. 어둠은 빛의 결핍이고, 추위는 열의 결핍이고, 미움은 사랑의 결핍입니다. 그렇듯이 악도 선의 결핍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거스틴의 악에 대한 이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얼핏 어거스틴의 악에 대한 생각은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악의 현상을 너무 나이브하게 보는 것 아닌가, 혹은 일종의 어용철학자, 관변학자의 발언인 듯이 보입니다. “세상은 완벽해, 우주는 완벽해, 네가 지금 힘든 것은 현실에 치여서 네가 원래 지녔던 온전함을 상실했기 때문이야. 그 온전함을 빨리 회복하렴. 넌 할 수 있어! 네가 지금 불행한 것은 네가 수양이 부족하고 공부가 부족하고 기도가 부족한거야. 너의 수양과 공부와 기도가 100% 회복되는 날 세상은 변해있을거야. 넌 할 수 있어. 내가 기도할고 응원할께”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나요. 요즘 유행하는 힐링관련 책들의 결론입니다. 한국 사회를 휩쓰는 인문학 힐링 담론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악을 선의 결핍이라 주장했던 어거스틴의 그것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생애를 살펴보면, 어거스틴 만큼 또 악의 문제에 맞서 실존적으로 몸부림쳤던 사람은 없습니다. 젊었을 때는 육체적 쾌락에 탐닉했고, 이교인 마니교에 빠지기도 했으며, 전쟁의 한복판에서 공포속에 떨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열병으로 죽죠. 누구보다도 악의 실존을 철저히 체험했던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제가 윤리를 하는 입장에서 어거스틴을 다시 읽으면서 어거스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다르게 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한적이 있습니다. 윤리는 기본적으로 선택과 결단, 그리고 행위의 문제입니다. 어거스틴의 악에 대한 생각이 나이브할 수 있겠지만, 어거스틴의 발언을 윤리적으로 바라볼때는 나름 유의미한 면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악의 존재론적 의미를 인정하지 않죠. 악을 존재론적으로 인정하는 순간 인간의 무책임이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뭘 해도 안돼. 할 수 없었어, 워낙 악이 강력하니까. 우리의 행위가 소용없어, 세상이 뭐 다 그렇고 그런거지. 그냥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자” 이런 식의 운명론, 혹은 냉소론이 인간이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나가고자 할 때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어거스틴의 악을 ‘선의 결핍’ 이라고 보는 견해는 신정론(theodicy)이 아닌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인정론(anthropodicy)으로 윤리적 행위를 견인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가 말하는 '악'


    그렇다면 예수에게서 악은 무엇이었을까요? 복음서에 보면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예수의 공생애는 크게 두 가지로 예수의 사역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이고, 다른 하나는 기적입니다. 기적은 크게 치유와 축귀로 나누어 집니다. 여러분들 기억나는 예수님의 귀신쫓는 이야기가 뭐가 있습니까? 가장 대표적인 것이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 축귀 이야기”(막 5장)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에 대해 마가복음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는 무덤 사이에서 사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묶어 둘 수 없었다. 여러 번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쇠고랑도 부수었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었다. 그는 밤낮 무덤 사이나 산 속에서 살면서, 소리를 질러 대고,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곤 하였다.” 이 귀신들린 사람에게 예수가 제일 먼저 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네 이름이 무엇이냐?”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엑소시스트들 소재로 한 영화들을 보면, 악령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사람들 뒤에 숨어서 자신을 감춥니다. 악의 생존방식이죠. 자신을 숨기고 다른 사람을 통해 악을 저지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이 밝혀진다는 것, 즉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 자체가 악령의 입장에서는 패배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는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악령은 뜻밖으로 순순히 자신의 이름을 털어놓습니다. “군대입니다. 우리의 수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My name is Legion; for we are many” (5:9)

    레기온은 단수한 군인들의 무리가 아니라, 대략 육천여 명의 보병과 칠백여명의 기마병으로 구성된 로마의 군단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이 대목에서 악에 대한 실마리가 나옵니다. 그것은 악령이 말했던 we are many 라는 말에서 분명해 집니다. 많다는 것이 악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수가 많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목사들 만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인 몇 명이야? 몇 명이다” 라고 말하면, “와 많다. 잘 되었네”, 라고 기뻐합니다. 이건 단순히 목사들의 경우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풍요로움을 갈망하잖아요. 그렇다고 볼 때, 악마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면서, “우리가 많기 때문이다”라고 답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이 말은 풍요와 성공과 다산을 갈망하는 인간들의 마음속에 악이 있다는 말일 수 있고, ‘많음’만을 강조하고 추구하는 전체의 생각이 사탄의 논리 일 수 있고, 나라는 개인 역시 많은(many) 사람 중 하나라고 볼 때, 나 역시 언제든 사탄이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악의 전체성


    서구 역사에서 악에 대한 담론이 크게 변화되었던 두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중세 말입니다. 십자군 원정과 페스트의 출몰을 겪으면서 죽음의 일상화가 전 유럽을 휩쓸던 시기였습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죄악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죄를 고백하는 의식, 즉 고해성사가 본격적으로 교회안에서 시행되기 시작하던 무렵이 바로 그때입니다.

    악에 대한 성찰이 발전했던 다른 한 시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 후반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홀로코스트 이후입니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럽의 지성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나찌가 가능했나, 라는 물음이 대두되었습니다. 한나 아렌트 같은 사람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집단(many) 속 개인이 범할 수 있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주목합니다. 집단 속의 개인은, 전체 속의 개인은 자기가 하는 행위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이루어 내지 못한다는 것이죠. 멀쩡하던 사람들도 예비군 옷만 입혀 놓으면 돌아이가 됩니다. 미셀 푸코가 “전체는 광기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라인홀드 니버라, “도적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전체주의와 악에 대한 비극을 노래합니다. 이들 공히 악의 전체성에 주목합니다.

    악령이 말했던 we are many는 악의 전체성을 언급할 때 각주로 달리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들의 힘과 목소리가 크고 세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사회를 지배했던 힘과 목소리가 무엇이었는지 한번 회고해 보십시오. 그것은 권위주의, 가부장제, 서열주의, 반공주의, 경제제일주의, 패권주의, 이성애중심주의, 성과주의, 분열주의 등입니다. 이런 목소리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할 때, 이러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다수가 될 때 악이 작동되고, 반대파를 향한 혐오의 메카니즘이 등장하면서, 그들을 향한 공격이 정당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다만 악에서 구해주십시오’라는 기도의 숨은 뜻은, 전체주의적인 논리 안에서 그 전체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불이익과 폭력과 배제와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가부장제라는 전체주의적인 논리에서 이 땅의 여성들이 남모르게 고통당하고 있다면 그것이 악입니다. 반공주의라는 전체주의 논리 속에서 누군가를 빨갱이로 지목하면서 아무런 이유없이 사회적으로 매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악입니다. 무한경쟁, 무한질주, 세계경영의 신자유주의의 모토속에서 낙오된 사람들을 우리가 보살피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전체주의를 인정하는 죄인들입니다. 예수는 본인이 했던 주기도문의 마지막에서 이런 악에서 우리를 구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에필로그


    이번 주간에 5.18 이 있습니다. 5.18는 이런 악의 현상학에 저항했던 우리 역사의 소중한 기록입니다. 저는 세월호 사건이 벌어지고 숨가쁘게 전개되었던 근래의 사건들도 악에 저항했던 한국 현대사의 소중한 기억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역사의 노력과 기도의 끝에서 우리는 지난 주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아주 자그마한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어찌 될지 떨리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이 새삼 더 간절하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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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7.05.17 15:36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위의 글은 5월 14일 한백교회 '하늘뜻 나누기' 원고입니다
  2. 주안
    2017.06.25 09:0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이전에 생각치 못했던 내용들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전이 많이 되어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자우녕 작가의 〈서울_기억_반기억〉 전시회를 관람하고


 라운드 테이블에서 대화를 나눈 뒤 



최진영
(Colgate Rochester Crozer Divinity School 교수)

 


    역사서술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하는 것이다. 박물관, 교과서, 기념비 등은 기록된 역사를 보존한다. 기록된 역사 외에 과거를 보존하고 과거와 관계 맺는 다른 방법들로 구전과 기억 등이 있을 것이다. 역사를 쓸 수 있는 도구와 권력을 소유하지 못한 민중들은 주로 구전과 기억을 통해 과거를 그들의 현재의 삶의 일부로 만든다. 그들은 기억에 기초해서 이야기를 구성하기도 하고 이야기를 통해 기억하기도 한다. 때로 기억된 이야기들은 일기나 메모의 형식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공식적인 역사서술은 획일적이고 그 해석도 제한되어 있는 반면, 이야기로 전해온 과거의 전승들과 기억은 다중성을 지니고 있다.

   과거에 대한 지식, 또는 과거와 관계하는 또 한 가지의 영역이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마저도 억제될 때, 그 억압된 과거는 유령처럼 현재의 시간으로 찾아온다. 이러한 현상을 huanting이라고 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경험하거나 제대로 장사되지 않은 존재가 혼령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로마 황제 네로가 자신이 독살한 모친 아그리피나의 혼령의 출현으로 시달린 일을 전한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햄릿》,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Beloved)》, 그리고 우리 설화 《장화홍련》의 망령들에 이르기까지......


   어떤 억눌렸던 과거의 사건들, 당시 현재화되지 못하고 기억에서마저 잊혀진 억압된 그 존재와 사건들은 마치 유령이 돌아오듯 오늘 어떤 자리로 찾아오고 또는 미래의 시간으로 다가가 서성인다. 이야기와 기억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haunting에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유동성 또는 혼종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말로, 공간의 한계가 허물어지고, ‘과거-현재-미래’라는 일차원적 시간의 순서가 흐트러지며, 그리고 존재와 부재와의 경계가 뒤섞이는 현상이다.

   순전히 나의 관점에서, 자우녕 작가의 한강을 중심으로 한 서울에 대한 〈기억, 반기억〉은 바로 이렇게 과거와 현재, 장소와 비장소, 주체와 객채, 존재와 부재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서울에 위치한 한강 자락은 작가의 고향으로 잊혀진 과거의 공간인 동시에, 출퇴근 길에 늘 바라보면서도 접근하기 어려운, 부재와 다름없는 곳이다. 한강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역사적 기념비가 새겨진 곳이고 한국의 밝은 미래를 예시하는 곳이면서, 또 수많은 이들이 던진 몸들, 죽은 고기떼, 버려진 기억들이 부유하는 곳이다.

    작가는 지난 해 추운 겨울, 기억의 장소, 모래밭이 드넓었던 한강변 광나루를 찾는다. 그리고는 하염없이 걷고 또 걸어 양평까지 이르지만 한강은 그의 기억을 돌려주지 않는다. 기억은 오직, 마포대교에서의 할리우드 영화 〈어벤져스 2〉 촬영 중 떠오른 시신 한 구의 이미지, 작가가 한강 뻘 속에서 캐낸 한 가족의 한복과 “소원성취”가 적힌 부적, 차와 인적이 드문 광진교를 휘어감는 바람과 물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통해서만 찾아온다. 그는 한강에서 ‘수행’ 중, 강변에 묻힌 이야기들을 캐어 내고, 강을 스쳐가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고통과 욕망을 목격한다. 한강, 그곳은 억눌렸던 기억들이 회귀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출몰하고 배회하는, 그리하여 예기치 않은 타자와 만나는 공간이었기에, 자우녕 작가의 〈기억-반기억〉은 단순한 노스탤지어의 재현도 아니고 도시공간에 대한 이념적 비평도 아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 존재와 부재,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넘어서는 한강이라는 공간을 전시장 안에 형상화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거기 있는 것들은 물화될 수 없는 형상이고, 기억에 가두어 놓을 수 없는 초시간적 역사이기에 관람자의 몫은 감상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예기치 않은 존재-비존재들과의 조우를 엿보는 것이다.

    오늘 한강은 우리에게 있는 ‘비존재’인 동시에 ‘없는’ 존재이다. 도시의 욕망이 강 저변에 똬리를 트는 순간 무의식들은 쉴 새 없이 강의 남과 북을 횡단한다. 나의 그리고 타인의 기억들은 뒤엉켜, 부유하는 바람과 물소리를 통해서만 들려온다. 이렇게 기억되고 기억에 반하여 흐르는 것이 한강뿐일까. 성수대교는 어떻고, 세월호는 또 어떠한가? 기억은 어느 시점까지 살아있다. 그러나 역사에 쓰이지 않고 박물관 안에 박제화되지 않은 어떤 기억들, 존재들, 사건들은 유령처럼 어느 순간 산 자들에게 돌아온다. 자우녕 작가의 작업은 그들을 초대하는 몸짓으로 느껴진다. 역사 속에 억울하게 매장된 망자들의 출몰을 기다리기 위해 온 겨울 끝이 보이지 않는 강변을 걷는 그 걸음은 이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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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회피로서 책 읽기

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9




 김정원*

   

    존재물음이 그칠 때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나는 왜 사는가?’ 와 같은 다소 궁극적인 물음을 그만두고 싶어 질 때 말이다. 그만두기를 작정한 적이 따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존재물음은 그쳐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거의 다 잃어버리는 때, 그러니까 삶의 의미를 상실한 때, 모두에게 그런 때가 있으리라.

에곤 실레, 죽음과 소녀, 1915


    누구는 신을 찾으라 하고, 누구는 연애를 하라 하고 또 다른 누구는 심리치료를 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믿음도 사랑도 또 자기 자신마저도 잃어버린다는 이야기와 다름 없기에, 그러한 조언들은 힘이 없다. 오히려 친밀하고 내밀했던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은 가장 피하고 싶어지는 일이며, 바로 그 관계야 말로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압박한다. 왜냐하면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아니라, 친밀했던 대상들을 향한 죄책감과 미안함이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의미를 잃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크게 실감한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그녀가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많이 노력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비움은 채움이 사라졌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그녀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삶의 가치를 성취하고자 했다. 정의를 공부하고 공동체를 꿈꾸며, 그에 따른 구체적 실천을 삶에서 실험해보기도 했다. 스스로를 향한 질문도 놓치지 않았다. 사회적 요구와 자신의 요구를 분리시켜 보기도 하고, 자신의 욕망을 조용히 들여다 보는 시간도 성실히 가졌다. 그랬던 그녀는 어느 틈엔가 그 모든 성취와 물음을 그만 두기로 한다. 아니, 그만두기를 의식적으로 바랐던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모든 물음에서 빠져 나와 있었다. 즉, 그 물음들의 ‘바깥에’, 다시 말해 그녀가 걷던 그 길의 ‘바깥에’, 그녀가 머물던 사회적 관계의 ‘바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다만 그녀는 원인을 묻지만 – 부모의 죽음, 미래에 대한 가능성의 상실, 사회적 열등감 등- 그저 희미하다.

    의미를 잃었다 말은 웃음을 잃었다는 말과 다른 말이 아니다. 어느 날, 웃음을 그친 그녀에게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다가와 장미를 건넨다. 그녀는 고맙게 장미를 받아들이지만, 장미의 아름다움이 퍽 당황스럽다. 또 다른 날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여자가 다가와 그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녀는 조용히 그 눈물을 닦아주지만, 그 눈물은 버겁다. 장미의 아름다움과 눈물의 따뜻함을 모르지 않지만 그들에게 마땅한 답례를 하지 못하는 그 사태 전반이 괴롭다. 고마운 그들과 함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같이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것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낙담하여 돌아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자책감으로 살아온다. 그녀는 ‘삶은 여전히 의미가 있고, 우리는 함께 그 길을 갈 수 있다’라고 말하는 그들의 의도를 잘 알지만, 그들을 향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늘 먼저 덮쳐온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고마운 사람들 속에서 따뜻함을 선물로 받는 것이 아프다.

    그녀가 잃어버렸다는 그 의미는 죽음과 함께 엮어져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의미를 잃어버렸기에 자살을 택한다는 것에 그 근거가 있고, 조금 복잡하게 말하면 그녀가 추구했던 정언적 욕구들을 포함한 그녀의 가치, 요구, 욕망 등 그녀의 지향점이 사라져버려 살아갈 의욕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단, 영원히 산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만약 우리가 시간이라는 한계를 지니지 않았다면, 우리는 고민할 이유가 거의 없다. 내일은 무한히 돌아오고, 욕구 특히 정언적 욕구는 실패가 아닌 유예로서 우리 안에 머물 수 있다. 역시 시간이라는 한계가 없다고 할 때, 우리에게 무한히 열려 있는 미래 속에서, 우리는 그 미성취된 욕구를 간혹 선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장차 올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 보았다고 고백하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그런데 만일 의미를 잃어버린 채로 그 무한한 시간을 살아(내)야 한다면 어떠할까? 건조하여 우울하기 짝이 없는 그 삶을 지속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그른 것일까? ‘무의미’의 늪에 빠져 무한을 살아야 하는 것은 축복일 수 없다. 되려 그 생을 마감하는 것이 그 무의미한 삶을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도, 즉 가장 의미 있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의미를 묻는 한, 이제는 죽음이 우리로부터 멀어진다. 욕구하고 욕망하는 것이 있는 한, 우리는 살기를 결단한다. 무기력할 틈이 없다. 의미를 향한 역동성은 우리를 생으로 내달리게 한다.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많을수록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때, 선과 악, 무소유와 소유, 이기심과 이타심, 좌와 우 등의 구별은 중요하지 않다. 각 자의 지향에만 적합하다면 죽을 이유는 없다. 지향하는 대상 혹은 지향하는 세계로의 초월을 꿈꾸며, 아니 이미 그곳으로 초월 돼 있기에 그들은 생으로 나아간다.

    다시 그 의미를 잃어버린 여자에게로 돌아가보자. 그녀가 겪는 ‘바깥’의 경험은 무얼 뜻할까? 바깥을 경험한다는 것은 세계로부터 추방되어 존재하는 경험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추방되었을까? 여기서 세계는 열려 있는 공간, 우리가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세계는 가능성을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만 열려있다. 궁극적 가치, 가령 역사의 의미라던가, 실존의 의미 혹은 선善의 의미를 성취할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것이다. 또한, 세계와 나와의 관계는 내가 얼마나 대상들을 지배하거나 관리하거나 혹은 이해할 수 있는지에 따라 정립된다(박준상). 다시 말해 사물을 지배할 권력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과 관리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혹은 어떠한 이치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계는 닫혀있다. 그러기에 세계의 바깥에 머무는 사람들은 “기댈 곳이 없다는, 사물들에 대해 적극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인상을 갖는다”(블랑쇼). 이는 그들이 겪어 낸 불행과 고통을 바탕으로 한다. 사회로부터의 배제와 추방, 타인의 죽음 등 몸에 누적된 고통은 세계와의 관계를 결렬시킨다. 이는 다시 나와 나 사이의 결렬로 이어지고, 종국엔 자아의 파기를 야기한다(박준상).         

    이처럼 자아의 파기에 이른 바깥의 사람들에게 장자처럼 죽음에 초연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는 마치 아주 비싼 샴페인을 처음 마셔보는 사람의 기분과 같을 것이다. 그는 샴페인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어 달갑진 않지만 비싸고 좋은 것이라는 주변의 말에 엉겁결에 들이켜 본다. 그러나 그 맛이 좋은지 아니 좋은지를 분별할 능력이 그에게는 없다. 다들 비싼 샴페인을 품평하지만, 그는 맛없음과 맛있음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기에 그 가치(의미) 또한 알 길이 없다. 그는 이내 샴페인을 둘러 싼 사람들을 떠나 바깥에서 서성인다. 즉, 眞人이 되면 생사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장자의 주장 보다는, 차라리 인간의 현존 자체를 ‘죽음을 향한 존재’로, 혹은 죽음을 ‘실존의 본래성에 도달하는 기반’으로 보는 것이야말로 의미를 잃고 불안해 하는 자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초연하다는 말처럼 비인간적(반자연적)인 말이 어디 있는가! 되려 ‘세계의 집에 존재하지 않음의 체험’(하이데거)이라는 묘사야 말로 위로이자 복음일 수 있다.

    저 복음은 책 속에서 발견되었다. 오늘의 죽음에 관한 단상들은 대부분 현상학자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이 몹시 난해하고도 지루하기가 이를 데 없는 철학자들의 책에 들어차 있다. 신도, 가족도, 친구도, 정의도, 평화도, 그리고 사랑도…… 이들이 지니고 있는 전반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권할 수 있는 것이 겨우 ‘책 읽기’라는 것에 부끄러움과 무력감을 느끼는 바다. 어쩌면 ‘책 읽기’는 바깥의 경험을 다시 겪게 할지도 모른다.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자책감, 책이 주는 교훈대로 살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절망감, 사회적 요구의 재청으로 인한 불안감, 깨달은 대로 살지 못한 데서 오는 우울감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실패로 인한 박탈감 까지를 몰고 와 우리를 세계의 바깥으로 한 번 더 밀어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잃은 이들에게 책 읽기를 권하는 이유는 그들의 특성에 기인한다. 거의 모든 대상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하는 그네들의 마음을 ‘내가’ 지금, 잘 안다는 것이 근거라면 근거이겠다. 은폐 속으로 첨벙, 하고 뛰어들고 싶은 그 마음 말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순간에는, 특히나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의 심각한 책을 읽는 그 순간에는 은폐 속에 머무를 수 있게 된다. 정확하게는 은폐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책과 나만이 있다. 수동적인 상태의 책과 내가 함께 있음으로써, 나 역시 수동적일 수 있다. 능동적이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이다. 책은 영화와 드라마 보다 한결 수동적인 상태로 나에게 말 걸어오기에 나 역시 역동적이게 관계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책을 이해하는 과정, 즉 몰입의 순간에는 간혹 나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블랑쇼의 말처럼 몰입함으로써 나를 잃어버리는 무아의 시간을 갖게 될 수도 있고, 최소한 나를 괴롭히는 여러 현실을 잠깐 잊을 수도 있다. 책 읽기로의 몰입은 이로써 동요, 불안, 우울, 죽음의 공포를 잠깐 비워낼 시간을 준다. 그런데 이 때, 역설적이게도 그 몰입의 순간에, 결국 다시 찾게 되는 것은 의미이자 궁극적으로는 결렬되었던 ‘나’이다. 의미를 잃어버린 그 여자가 (무)의식적으로 찾게 될 내용은 다시 의미 지평에 관한 책일 것이다. 죽음에 관한 것이거나 존재에 관한 것들… 그러한 것을 미간을 찌푸리며 읽어나감으로써 자신의 의미 상실의 순간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동시에 의미 물음을 다시금 하게 된다는 말이다. 죽음에 관한 내용으로 빨려 들어갈 때, 더 극단적으로는 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철학자들에게 묻는 그 순간에 삶의 의미는 갱신된다. 의미 상실로부터 도피하여 책 속으로 숨어들어갔지만, 결국 거기에서도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이다. 수동적이기만 했던 책은 이제 살아 움직이고 그녀의 부서져 버린 의미들의 파편을 무섭게 끌어온다. 그 파편들의 조합이 삶이 될지 죽음이 될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언급했듯 자살이 의미 없음과 결부되지 않을 뿐더러, 일단은 의미를 다시 묻게 된 데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녀는 운 좋게 사르트르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그녀의 공허함과 결핍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지향하는 한, 결국 우리는 나 아닌 다른 것을 계속해서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무언가를 끊임 없이 의식하는 한, 우리는 온전히 우리 자신일 수 없다. 내가 내 전부를 나만으로 가득 채울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나와 언제나 불일치의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결핍이고 불안이며 때로는 고통이며 피곤함이다. 그녀가 이를 숙명이듯 받아들이게 되면 좀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일종의 내려놓음 아니겠는가. 물론, 남는 문제는 언제나 있다.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 등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시 찾게 된 의미는 이전에 소유했던 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기에, 이번엔 그 고마움마저도 잃게 될 수도 있다. 그녀 안에 새롭게 정립된 의미들이 고마운 사람과 어떻게 엮일지는 진정 모를 일이다. 또한 여전히 그녀는 세계 바깥에서 머물게 될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과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닫혀진 세계가 책 읽기로 격파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의미 물음이 바깥에서 서성이는 그녀를 구원해 오지는 못한다. 아마도 그녀는 바깥에 머물며, 그 바깥과 그 바깥의 의미를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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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무감한 시대에 던지는 화살  

<피에타 (김기덕, 2012)> 




이희승*



  신기하기만 합니다. 촛불을 들고서 다시는 찾지 않을 줄 알았던 빈 광장을 가득 채운 시민들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지난 겨울부터 예감은 했습니다. 많은 이들의 절규, 고통 그리고 죽음을 지불하고 겨우 벗어난 줄 알았던 과거의 망령을 소환해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까지 옭아매려 했던 그 세력들이 줄줄이 포승줄이 묶여 심판대로 향할 때, 다시 뒤로 가지는 않으리라 확신을 했습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지켜본 이번 대선은 승부를 알고도 손에 땀이 나는 경기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침 뉴스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네요.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에 오르기를 바랬던 많은 이들도 서서히 이 흥분과 기대에 전염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손수 양복 저고리를 벗어내려 놓고, 소매를 걷어 올리며 거꾸로 향했던 이정표를 바로 돌리려고 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막연하지만 꽤나 단단한 믿음을 갖게 되는 이유라면 단 한가지. 그가 타인의 고통을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 고통에 민감함으로 번민하는 지도자일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문득, 고통의 교감에 번민하는 외로운 영화감독 김기덕의 <피에타(2012)>가 떠오릅니다.


  뤼미에르 형제의 ‘신기한’ 발명품으로 세상에 첫선 보였던 영화는, 새로운 예술매체로써의 가능성때문에 현대를 함께 열어가던 많은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지요. 활발하고 진보적인 실험과 모험의 대상이었던 영화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불행히도) 개인적 관음의 쾌락을 추구하는 문화산업의 구조 위에 재조립되어 버렸습니다. 현실의 괴로움과 고통을 잠시라도 잊고자 하는 대중의 심리와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춘 헐리우드의 상업적 이해가 만나 탄생한 여러 장르 영화들은 스크린에서 재현되는 인간의 갖가지 감정들을 궁극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두려움이라는 원초적 감정은 호러 영화의 문법을 통해 말초적 쾌락의 도구로 재활용됩니다. 욕망하는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고뇌에서 비롯된 상실감과 좌절은 멜로 영화의 제조 공정을 통과하면서, 삶을 관통하고 변화시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카타르시스보다는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상큼하게 떨쳐버릴 수 있는 소모성 슬픔을 선사하죠. 예술 영화라고 분류되는 영화들조차도 거의 장르화되어버린 엘리트적 주제의식과 시각적 탐미주의을 통해 일부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미학적 쾌락을 제공하는데 심혈을 기울일 때가 많습니다. 해외에서의 평가와는 달리, 국내 비평가나 관객들과 늘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도 이런 도식화된 예술영화로 해석될 만한 소지를 다분히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특히,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 보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여성의 육체를 가학적 유미주의의 재료로 사용하고, 여성의 주체성을 인류의 구원이라는 추상적 주제를 위해 희생한다는 지적을 온전히 피하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논란을 잠시 뒤로 하고, 열띤 찬반 논쟁의 한가운데 서기 일쑤인 그의 영화들을 살펴보면 고통이라는 공통된 지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영화인 <악어 (1996)>에서부터 그가 직간접적으로 제작에 참여하고 탄생시킨 거의 모든 영화들은, 어떤 장르적 장치를 통해서도 관음적 쾌락으로 온전히 전환할 수 없는 ‘불편한’ 고통의 경험을 관객의 마음에 선명하게 남기죠. 단순히 센세이션널리즘이라고 폄하하기에는 긴 세월동안, 그의 작품활동과 평범하지 않은 삶의 여정은 고통이라는 일관된 테마를 고스란히 실재화하는 지난한 과정으로 보입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소외계급의 고통을 매개로, 계급화된 문화 엘리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예술영화의 지평을 넓혀 보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보여 줍니다. 마치 그 무게를 감당하기도 어려운 커다란 붓으로, 아직 제대로 형상화되지도 않았으며 영화예술의 구조적 변화없이는 제대로 형상화될 수도 없을만큼 ‘날것’의 고통을 스크린에 그려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저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볼때마다, 쾌락을 상품화하는 문화산업에서 고통의 공감을 통해 인류와 문명의 변화를 촉구하는 예술로 영화를 복원하려는 그의 의지를 읽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국내외에서 상당한 호평을 끌어낸 영화 <피에타>는 비문명의 수준에 가닿은 자본주의의 야만적인 이윤추구, 누적된 피로와 고통과 절망을 감당하며 서로를 물어 뜯어야 하는 도시빈민들, 그리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자기 희생과 구원에 대한 물음을 거칠게 던져 놓은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색채가 짙은 포스터와는 달리, <피에타>의 주인공인 강도(이정진)는 다 허물어진 청계천 골목을 누비며 악덕 사채업자를 위해 채무자들의 사지를 절단해 불구로 만들고는 그 보험금을 가로채는 하이에나같은 존재입니다. 김기덕 감독의 남자 주인공들이 늘 그렇듯이, 태어나서부터 버려진 채 거칠게 자란 강도는 돈을 벌겠다는 욕망보다는 원초적인 폭력에의 본능에 의해 움직입니다. 성적 쾌감을 위해 남이나 자신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새디즘과 메조키즘이라는 발전된 형태의 욕망의 구조를 찾아 볼 수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잔인성을 표현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죠. 느닷없이 어머니를 자청하며 찾아온 미선(조민수)은, 청계천 개발을 핑계로 수십년간 자리잡고 있던 군소업체들이 내쫓기고 황량하게 변한 도심 한복판의 메탈정글에서 홀로 살아 가고 있는 맹수같은 강도를 ‘관계’라는 문명의 첫 단계로 끌어 들이게 됩니다.


    이 묘령의 여인이 자신을 버린 엄마라는 사실에 치를 떠는 강도의 모습은 야수적인 폭력성을 극복하고 문명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내적 외적 고통을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미선을 강간함으로써 자궁으로의 회귀를 시도하는 강도는, 수치심과 고통에 휩싸여 신음을 토해내는 미선의 얼굴을 내려다 봅니다. 채무자들의 팔다리를 절단하면서 수없이 본 고통의 장면이었건만, 강도는 미선이 느끼는 고통을 고스란이 교감합니다. 김기덕 감독은 미선의 비명과 절규가 귀를 멍멍하게 하는, 고통이 가득찬 클로즈업을 눈에 띄게 거친 핸드헬드 카메라로 잡아내며 ‘고의적인’ 줌인을 사용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강도의 망설임에 주목하게 합니다. 미선이 느끼는 모욕과 수치심과 고통을, 가해자인 강도와 그 가해의 현장에 비밀스런 공모자로 함께한 카메라가 함께 체험하는 듯합니다. 강간이라는 폭력행위의 영화적 재현에 내포된 가학적, 피학적 쾌락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생생한 고통을 스크린 너머로 전달하는 이 충격적인 장면은, 근친 상간이라는 근원적 욕망의 대리만족을 통한 관습적인 쾌락 추구에 젖은 관객을 향해 찬물을 끼얹습니다. 


    자신을 문명의 경계 안에서 성찰한 적이 없었던 강도는 처음으로 타인의 고통을 체험적으로 교감하면서, 그간 채무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했던 자신의 폭력과 그 끔찍한 결과를 하나하나 되짚어 갑니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향한 무한한 애정, 그 사람을 잃는 단장의 고통을 통과하면서 강도는 자신이 부지중에 공모했던 자본주의의 야만적 본성을 자각하게 되죠. 어느날, 한 채무자가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광경을 목격한 강도는 묻습니다. “돈이 뭐죠?” 미선은 대답합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 되어버린 ‘돈’이 가시 돋힌 그물로 모두를 옭아매고 신음하게 만든 청계천 풍경은 이 영화가 제시하고자 하는 한국사회의 단면이자, 현대문명의 척박함에 김기덕 감독이 들이댄, 필터없는 거울인 것 같습니다. 영화 곳곳에 고스란이 드러나는 청계천의 뒷골목들은 다소 도식적인 미장센을 만들어내긴 합니다. 하지만, 최소의 자본(이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는데 김기덕 감독은 미처 2억원이 안되는 버젯을 사용했다고 하네요)이 최선의 선택을 통해서 탄생시킨 이 암울한 미장센은, 우리가 상승욕구에 몸을 맡기고 최고를 외치는 동안 잔인하게 파괴하고 멸종시킨 주변인들이 화석이 아니라 살아서 고통을 느끼는 인간임을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유수의 비평가들은, 이제는 김기덕 감독이 피비린내나는 몸부림과 비명으로 가득한 가학과 피학의 미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허나, 프로이트가 천명했듯이, 고통이란 성적 쾌감을 목표로 주조된 육체의 환상인 새디즘과 메조키즘을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능력입니다. 고통은 원초적 폭력성에 대응하고 대항하는 인간 본연의 초월적 방패막이로써, 문명을 탄생시키고 유지하는 예술성 혹은 종교성의 근간이 된다는 해석이지요. ‘고통에 처한 신체’라는 저서에서 일레인 스캐리는 고통은, 당하는 이에게는 홀로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는 끔찍한 체험이지만, 고통을 진정으로 교감하는 이에게는 고통을 당하는 이의 관점을 체화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세상을 새로이 창조하는 경험이기도 하다라고 기술합니다. 이러한 고통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바로 예술이라고 할 때, 김기덕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처럼, 타인에게 가해진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나의 것으로, 더 나아가 나의 책임으로 끌어 안으려는 예술적 시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그 문이 살짝 열린 듯한 ‘새로운’ 시대가 많은 이들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공감하고 교감하려는 수많은 이들의 안간힘으로 탄생했음을 잊지 않기를, 그리하여 진정으로 거듭나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길에 우리가 서있는 것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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