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기 민주정부'가 성공한다면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2004년 국회의원 총선거 때 딴지일보와 한겨레의 합작으로 김어준이 정당별로 비례대표 후보 1인씩을 골라 인터뷰를 진행했던 적이 있다. 당시 민주노동당의 인터뷰 주자는 단병호 전노협 초대 위원장. 그 인터뷰 에서 김어준이 물었던 질문 중 하나는 발모제를 바를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고, 단 위원장의 대답은 발모제를 바른다면 자신은 아마도 더 이상 단병호가 아니게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 인터뷰를 마감하면서 김어준이 남긴 코멘트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는 '전봉준'이다. '동학'은 그의 '계급'이고, '백성'은 그의 '노동자'며, '구세제민'은 그의 '노동해방'이다. 그를 깨운 건 인간에 대한 연민. 무인정권의 탄압과 자본의 착취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분연히 일어서 그 세력을 전국으로 규합하고 관에 맞선 '적두장군 단봉준'. 누군들 거저 사는 사람 있겠냐만 제 살을 깎아 남의 몫까지 대납하는 그 정도 삶 앞에선 주댕이 살짝 닥쳐 주는 게 예다.”

   이렇게 써 놓고, 그는 코멘트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고 있다. 

   “지난 17년간 한 번도 풀린 적 없는 노동계 야전사령관의 강철 화이바, 빨간 머리띠가 풀리는 날, 축배 대신 발모제를 도포해 주리라. 내 몫의 부채는 그렇게 변제하련다. 꾸벅.”

   이 인터뷰가 나간 후, 감동먹었다는 댓글이 대부분인 가운데, 이런 댓글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존경한다니까 권영길(필자주-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3.9%를 얻었고 이 당시는 창당 당시부터 민주노동당 대표로 재임 중이었음)이 다시 보이는군요.”


   2. 

   엄기호의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두고 이렇게 논평한 구절이 나온다.

   “왜 우리는 노무현을 미워할 수 없었던가. 그는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 분열적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었다. 분열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전교조 교사가 자기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키고, 공교육이 싫어서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 학부모가 방학이면 아이를 불러 선행학습과 과외를 시킨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와 카페를 차리고 공동체 운동을 하는 후배는 주식 투자로 생계를 이어간다. 양심적으로 살아가며 많은 시민단체를 후원하는 친구는 들어가 살 만 하면서 투자 가치가 있는 아파트를 보러 다닌다. 살기 위해서는 삶이 분열되어야 한다. 이 분열의 빈틈에 적당한 합리화와 죄의식이 뒤죽박죽 엉킨 채 우리는 살아간다.

   노무현은 권력의 정점에서 이러한 분열적인 삶을 보여 주었다.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던 날 노무현은 멍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지금 국민들이 저를 보고 계십니까?"하고 읆조렸다고 한다. 그는 집권 기간 내내 그의 영혼과 그의 통치가 분열되어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집권 내내 항상 자신의 영혼은 통치자의 자리가 아니라 '당신들이 있는 곳에 있다'는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이것이 집권 중에는 그를 변명으로 일관하는 비겁한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막상 그가 가고 나자 우리는 분열적일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우리 모두의 초라하고 팍팍한 삶을 그를 통해서 만났다.”

   앞의 두 텍스트가 보여주는 견해에 동의하지도 않을 수도 있다. 이 텍스트들이 대상이 되는 두 사람과 각각에 얽힌 일들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이 텍스트들의 밑에 깔린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도 등등.

   그렇지만 어떤 판단을 내리든지 간에, 이 텍스트들에서 이러한 느낌은 충분히 추출해 낼 수 있을 듯 하다. 단병호는 ‘존경’의 대상은 되어도 ‘동일시’의 대상은 될 수 없지만, 노무현은 ‘동일시’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실제로 그 현상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그리고 그 이유는 현재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을 자임하는 이들의 삶과 관련이 크다고 말이다. 여기에, 설령 ‘존경’은 하더라도, 아니 어쩌면 ‘존경’을 하기에, ‘발모제’같은 ‘세련’을 덧붙이고자 한다는 것까지도 짚을 만 하겠다.



   3. 

   대선 기간 막바지에 문재인 후보의 인권변호사 활동에 대한 여러 가지 ‘미담’들이 지지자들 사이에서 돌았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이런 트윗이 나왔다.

   “경고한다. 정의당&노동당은 문재인 대통령님 앞에서 노동자의 인권을 논하지 말라. 니네들 입으로 싸울 때 우리 문재인 대통령님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온몸으로 싸워오신 분이시다.” 물론 이건 ‘극단적’인 케이스이다. 그러나, ‘극단적’이긴 해도, 분명한 것이 이 케이스가 ‘극소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니, 설령 ‘극소수’였다고 하더라도, ‘극단’이 이렇게 나온다면, ‘주류’도 저런 식으로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속칭 ‘깜’도 안 되는 것들이 까불지 마라 이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문재인’과 같은 (유능한) ‘인권변호사’, 즉 지원자의 자리가, 당사자를 대변하려 하는(그렇지만 힘이 약한) ‘정의당/노동당’보다도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더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공유할 것이라 보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닐 성 싶다. 물론 저런 언설과 이런 생각에서 노동자들의 자리는 ‘노동 문제’라는, ‘객체’의 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고.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비단 41%에 달하는 그의 대선 때 지지자들만은 아닌 듯한 요즘인데, 그렇다면 그 때 ‘성공’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아마도 문재인 정부의 입장에서는, 위와 같은 ‘지원자’의 자리에서, 노동자들과 ‘국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권익을 향상시키고 제도를 개선하고 싶을 것이다. 그 권익 향상과 제도 개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 상황이나 외교 관계의 호전 등도 물론이고. 그런 결과를 통해서 지지를 유지하고 재집권을 이루어낼 때 그것을 ‘성공’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을까. 조금 덧붙인다면, 이런 일들은 아마도 ‘그의 친구’가 15년 전에 집권했을 때도 하고 싶었을 터일 테고.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성공’은 ‘그의 친구’의 완벽한 복권일 것이란 기대도 있을 것이다. 그의 추모식에서 그를 ‘앞서서 간 임’으로 모시며 ‘산 자여 따르라’고 노래 불러도 정당할 그런 완벽한 복권. 그렇다면, 그런 ‘성공’이 이루어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게 되는 것일까.


4. 

   한국 사회 비정규노동 영역의 대표적 이슈 중 하나인 KTX 해고승무원 문제에 대해서 의외로 이런 반응들이 꽤 있다. 정규직 자리를 공정한 경쟁으로 따내려는 것이 아니라, 일단 비정규직으로 들어간 후 정규직으로 만들어 달라고 우기는 ‘샛길’을 뚫어서 차지하려는 욕심이라는 것.

   문재인 대통령의 첫 번째 행보로 주목받았던 것이 인천공항 비정규직 정규직화였다. 그리고 일부 대기업들이 이에 호응해서 정규직화 방침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정규직화’는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 보면, ‘무기계약직’이나 ‘자회사의 정규직’인 경우가 대다수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향은 아마도 문재인 정부 재임 내내 이어질 것 같고.

   ‘무기계약직’이나 ‘자회사의 정규직’도, 적어도 고용불안이라는 중요한 문제 한 가지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성과와 진전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질문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정규직’과 ‘무기계약직’과 ‘자회사의 정규직’을 구분하는 기준은 대체 어떤 것일까. 문재인 정부의 정규직화가 본격화되면 어쩌면 이 ‘구분 기준’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일도 본격화될 터인데, 그렇다면 이것은 차별 철폐가 아니라 차별의 합리화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여기에서 바로 앞에 언급했던 KTX 해고승무원 관련 상황이 겹쳐 보이는 것이다. 사정은 딱하더라도, ‘공정한 경쟁에 따른 결과’라는, ‘합리적 차별’의 선을 넘어서면 안 된다는.

   사실 KTX 해고승무원 케이스에 드러난 저런 시선은 저 사건이 처음 벌어진 2000년대 중반 이후 이미 한국사회에 일반화된 시선이기도 하다. 당장 얼마 전의 ‘교육공무직법’ 관련 사태가 딱 이런 경우이기도 했다. 능력이 있어서 공무원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에 대한 불공정이라는 시선이 꽤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선을 보여 준 사람들의 상당수가 아마 대통령 선거 때 문재인에게 투표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와 그의 지지자들. 특히나 그 정부에 강한 동일시를 보이는 그 지지자들이 꿈꾸는 것은, ‘공정한 경쟁’과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공정한 대접’을 받는 사회가 아닌가 하는 것.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는, 바로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 혹은 갖추기를 선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레토릭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 혹은 갖추기를 선망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이기도 하겠고 말이다.


5.

   필자가 생각하기에, ‘사회적 연대’라는 차원에서는 오히려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이 노무현 정부 시절보다는 더 나았던 것 같다. 같은 한진중공업 크레인에 올라갔는데, 노무현 정부 시절의 김주익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무관심 속에 죽어서 내려오고, 이명박 정부 시절의 김진숙은 ‘희망버스’와 함께 살아서 내려왔음을 생각한다면. 문재인 정부가 만들려는 것이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합리적인 차별’이고, 그것에 ‘능력’을 갖거나 선망하는 ‘보통 사람들’이 동의한다면, ‘사회적 연대’에서는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보다는 같은 ‘민주정부’라는 노무현 정부 시절과 가깝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은 기우일 뿐일까. 대통령 선거 당시, 그 때는 후보였던 지금 대통령 본인의 문제발언도 있었고, 지금 당장 육군참모총장에 의해 군인들이 색출되어 처벌을 받으면서도, 일부 문재인 지지자들의 비난이 오히려 벌어지는 성소수자 관련 이슈의 상황은, 아마도 그것이 ‘기우’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실마리일 듯 하다.

   확실한 것은,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 하에서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잘못할 때’의 ‘비판’이 아니라는 것일 터이다. 적어도 그 때 ‘비판’에 깔린 뉘앙스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비판’한다는 것이라면 말이다. 오히려 필요한 마인드는, 문재인 정부가 ‘성공’할 때, 그 ‘성공’에 대한 대책을 세운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합리적인 차별’과 ‘능력에 따른 정당한 대접’이라는, ‘보통 사람들’의 바램이 실현되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성공’이라면, 그 바램을 제대로 비판해 내지 못하면 사회적 연대를 요청하는 것 자체가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보통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도 할 터이니까.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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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개혁하는” (Semper Reformanda): 2017년 세계개혁교회연합 총회를 앞두고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매 해가 의미있고, 매 해마다 엄청난 사건들이 일어난다. 매 해에 벌어지는 일들에게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한다. 의미부여, 의미 만들기, 의미해석하기, 이 작업은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일이자 또한 신학자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2017년에 대한 신학적 단상을 하고자 한다.

    정치적으로 2017년은 의미있는 해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해이자, 박근혜를 탄핵시킨 해이자,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해이다.

    종교적으로 2017년 역시 의미있는 해이다. 2017년은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이에 맞추어 세계개혁교회연합 (World Communion of Reformed Churches, 전 세계개혁교회연맹, WCRC) 총회가 6월말 독일에서 열린다.

    이번 총회주제는 “Living God, Renew and Transform Us!” 이다. 주제가 명백하게 보여주듯이, 이번 총회는 개혁을 넘어 우리의 신앙과 삶, 우리가 섬기는 교회와 살고 있는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져 있다.

    본 연합 (WCRC)는 8천만명이 소속된 기독교인들을 대변하는 개혁교회 최대 에큐메니칼 조직이다. 이 조직을 하나로 묶는 신학적 끈은 첫째, “언제나 개혁하는” 개혁교회 신앙의 끈, 둘째, 코이노니아 정신을 모태로 분리가 아니라 연합을 향한 소망의 끈, 그리고, 정의추구가 기독교인의 사명이라는 고백의 끈이다. 이 세가지 끈은 다양한 신앙고백 (1982년 Belhar, 아파타이드 반대) 과 신학 선언 (2004년 Accra, 경제부정의과 제국 반대) 등을 통해 교회를 묶어왔고 엮어왔다.

    2017년 총회 준비 자료 (Prayerful Preparation)를 보면 “언제나 필요한 개혁”(Semper Reformanda) 개혁교회 모토를 신학적으로 조명한다.[각주:1]

    자료집 서문에서 WCRC 총무인 크리스 퍼거슨은 21세기 연합이 품고 가야할 전지구적 사회적 문제로 경제부정의, 즉,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의해 빈부격차와 자본의 횡포가 날로 심각해지는 현실, 또 생태위기, 환경문제, 기상이변과 재해, 오염등으로 약자, 약한 나라, 인간이 아닌 생태계 생명들이 파괴되어가는 현실, 그리고 이주의 문제를 들었다. (다음 기고에 경제부정의, 생태문제, 그리고 이주의 문제를 연이어 다룰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세가지 이슈가 WCRC 를 엮고있는 세가지 끈, 신앙, 연합, 그리고 정의와 어떻게 긴밀하게 연관되는지 설명한다.

    WCRC 연합 의장인 제리 필레는 종교적으로, 성서문자근본주의에 입각한 차별의 문제를 들면서, 개혁교회 신학인 Sola Scriptura의미는 성서가 기득권자, 힘이 있는 자들에 의해 선별적 해석이 되는 것으로 부터 보호할 책임이 개혁교회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에게 있다고 지적한다. 더불어 Sola Gratia로 연결되는 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신학교리에 대한 해석을 한다. 

    성서문자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다양한 차별과(성차별, 남성성직자주의, 성소수자, 인종차별) 다양한 폭력 (성폭력, 전쟁폭력, 환경파괴)을 극복하는 신학적 응답과 실천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는 은총의 실천이 신앙의 잣대가 되어야함을 주장한다. 세상의 이데올로기, 선입견, 편견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실천하는 일만이 궁극적임을 선언하고 있다. 예수의 은혜를 실천하는 것이 우리 삶, 그리고 세상을 변혁시키는 궁극적 힘이다. 아니, 예수님이 보여주신 은혜를 따르는 일이 선입견, 편견, 차별와 억압을 가능케하는 그 폭력을 끊어내는 저항과 변화의 힘이라는 것이다.

    포스트콜로니얼 페니미스트 신약학자이자 이번 연합 총회 신학교육과정 Global Institute of Theology 책임담당자이자 학장인 무사 두베는 자료집을 통해 로마서 12장 말씀을 해석하면서 사도바울의 철저한 로마제국에 대한 저항이 본 말씀에 담겨져 있다고 주장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12:1) 는 말씀은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가 변화되었기에, 부패한 제국이 우리를 억압하지만, 그 더러운 손길이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는 자유의 선언이라고 해석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2) 다음 구절 역시, 제국에 굴복하지 말고, 아니, 제국과 타협하지 말고 (confirm),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변화(transform)되라는 것이라고 본문에 대한 의미부여를 한다.

    본 자료집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또 한가지 문제는 바로 성차별의 문제이다. WCRC 소속 교회의 연합을 막고 있는 장벽으로 여성안수문제를 지적한다. 이를 위해 나도 자료집 저자로 발탁이 되어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하여, 본 총회를 통해 아직까지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주지 않는 WCRC 소속교단으로 하여금, 앞으로 7년 안에, 즉, 다음 총회까지 안수문제를신앙의 고백으로 실천할 것을 의결하는 안건이 올라와 있다. 동시에 성차별과 가부장제에 입각한 남성성직자주의의 문제는 성소수자에 대한 안수의 문제와도 직결된다는 걸 지적한다. 그러므로, 21세기 “언제나 개혁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WCRC는 성소수자, 성정체성, 그리고 성 다양성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그리고 목회적 성찰과 실천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본 총회가 독일 라이프찌히에서 열린다는 그 장소의 역사적 신학적 의미를 해석한다. 독일 신학자 울프 크뢰트케 (Krötke)는 자료집에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그 해, 동독국가 종말의 시작을 알렸던 그 해부터 벌어진 월요일 비폭력시위 (Monday Demonstrations), 평화를 향한 기도회 (prayer for peace)가 라이프찌히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주목한다. 라이프찌히는 냉전시기엔 동독에 속한 도시였다. 기독교인들에게 동독에 속해서 종교의 자유를 행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회주의체제안에 속한 교회가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타협과 절충, 심지어 굴복이었다. 그러나 신앙의 탄압과 교회에 대한 정부의 제제가 강해질수록 동독기독교인들의 저항과 인내의 힘은 줄지 않고 늘었다. 1980년대가 되면서 평화, 비폭력,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퍼져갔다. 그 와중 1989년 10월 9일 동독 국가 40주년 기념식에서 벌어진 시위는 120만명을 전대미문의 참여로 이어졌다. 같은해 벌어진 중국 천안문 사태를 주시하면서, 사회주의, 전제주의체제가 불러오는 폭력, 인권과 종교의 탄압에 대해 라이프찌히에 속한 교회들은 침묵하지도 타협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언제나 개혁하는” 개혁교회 정체성을 확연하게 보여주었다. 결국 정확히 1달 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500주년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의미는 과거에 대한 향수도 아니요, 기독교 문화 중심주의로 돌아가고자하는 절박함도 아니다. “언제나 개혁하는” 그 신앙, 파격적 (radical)이고 신앙적 (faithful)인 그 개혁교회 정체성을 되새기면서 현재 8천만 개혁교회가 교회가 당면한 다양한 문제들과 교회가 소속한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예언자적으로 목회적으로 다루자는 의미이다. 


    2017년 세계개혁교회연합 총회가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신학적으로 역사적인 획을 긋는 총회가 되길 기도한다.


    살아계신 하나님, 저희를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켜주소서! 

    “Living God, Renew and Transform Us!”


ⓒ 웹진 <제3시대>



  1. Prayerful Preparation: Exploring the 2017 General Council Them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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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우파'와 대형교회, 열네번째[각주:1]


결론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이 연재를 마감하기까지 두 번의 글이 남았다. 이제까지 내가 말하려 한 것은 웰빙우파의 문화공간으로 대형교회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웰빙’이라는 문화적 현상과 ‘우파’라는 사회정치적 범주가 엮이면서 하나의 문화적 주체로 형성되어 가는 데 있어 중요한 장(場)으로 대형교회를 주목해보겠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웰빙우파의 문화공간으로서의 대형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총정리해보겠다. 그리고 다음 글에서는, 이 연재 첫 부분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하나의 상상적 논점을 제기할 것이다. 최근 대형교회를 주요 장소로 하여 형성된 문화적 주체로서의 웰빙우파가 정치적 주체로서 재구성되고 있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것일지에 대한 것이다.  


'1990년대', 웰빙우파 형성의 시간적 범주


   ‘1990년대’라는 시간은 이 연재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시기에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사회의 경제성장률이 급강하했는데, 개신교도 성장률이 급락했고 심지어 1995년 이후에는 절대수가 감소하기까지 했다. 한편 이 시기는 또 다른 중요한 변화의 시기이기도 했다.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시기이며, 또 소비사회로의 변화도 이 때를 기점으로 하여 본격화된다.


    


   이런 민주화와 소비사회화가 본격화된 시대인 1990년대를 주로 30대의 나이로 겪었던 세대가, 두 번의 베이비부머 세대(제1차: 1955~1963년생/ 제2차: 1968~1974년생) 중 첫 번째 세대다. 이들은 한국 근대사에서 보릿고개를 겪지 않은 첫 세대이고, 최소한 초등과 중등 과정까지 근대적 학교교육의 수혜를 받은 세대다. 또 빠른 경제성장의 대가로 완전취업의 행운을 누렸다. 특히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이들의 경우는 중상위층으로 안착하기에 가장 용이했던 세대다. 이 세대의 많은 이들이 이 시기에 결혼과 함께 강남과 강동, 분당 등으로 이주하였거나 독립하여 살게 되었는데, 2천 년대에 이 지역의 지대가 급상승함에 따라 자산이 크게 늘은 것이다. 즉 직업의 안정성보다 훨씬 중요하게 지대의 상승 요인이 중상위계층으로의 안착에 유효했다.

   한편 이들, 1990년대에 강남・강동・분당 지역의 30대 고학력의 중상위계층 사람들은 그 무렵 민주화와 소비사회화라는 거대한 사회문화적 제도화의 현장 한 가운데에서 그 실행주체로서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이들이었다. 이들이 2천 년대에 40대가 되었고 2010년대에는 50대가 되었다. 나는 이 세대를 기점으로 해서 ‘웰빙’우파라는 문화적 주체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추정한다.(물론 이 세대에는 여전히 극우주의적 이념주의자들도 많았고,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자도 많았다.) ‘웰빙’은 성장지상주의 시대를 통과하고 나서 소비사회로의 변화, 그리고 신자유주의로의 이행기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장지상주의적 주체와는 다른, 중상위계층적 고품격 문화를 가리키는데, 이 세대 이후 웰빙문화는 빠르게 확산되었고 다양하게 발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웰빙’의 다양한 발전을 단순화하여 ‘우파’와 ‘좌파’로 분류하였는데, 그중 ‘웰빙+우파’의 문화가 발전한 주요 장소로서 대형교회를 제시하였다.  


'(캐릭터)대형교회', 웰빙우파 형성의 장소적 범주


   1990년대에, 내가 분류한,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가 대거 등장했다. 이 연재를 시작하는 글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대형교회를 두 범주로 나누었는데, 첫 번째 범주는 한국사회가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에 대형교회로 부상한 교회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두 번째 범주는 한국사회와 교회의 성장이 정체 및 퇴조하던 시대에 빠른 성장을 이룩하여 대형화된 교회를 말한다. 즉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는 개신교에 새 신자의 유입이 현저히 줄어든 혹은 감소한 시기에 대형교회로의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것은 이들 교회들이, 새신자보다도, 교회를 떠도는 수평이동 신자들의 새로운 정박지로 선택된 결과다. 한데 유념할 것은 수평이동 신자들은 1990년대 이전에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수평이동 신자들은 대개 목사나 은사자를 따라다니는, 일종의 수동화된 팬덤(fandom)에 다름 아니었다. 반면 ‘그 이후’, 즉 1990~2010년대의 수평이동 신자들은 30~50대 연령의 교회 직분(집사, 권사, 장로 등)을 맡은 이가 많았다. 이것은 교회에 대해 꽤 많이 알고 가장 활동적인 교인들 중에 교회를 떠도는 신자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이렇게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들은 1990년대 말 이후 강남・강동・분당 등에서 집중적으로 등장했다. 이 지역들은 대단지 아파트들이 속속 세워짐으로써 단위 면적에 비해 유입 인구가 특히 많은 신시가지 혹은 신도시인데, 지대가 다른 곳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게 상승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하여 이주자들의 자산이 빠르게 증가하여 중상위계층화한 이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공간이다. 또한 위치상 이 지역들이 서로 인접해 있음으로 해서 중상위계층의 수가 다른 곳들에 비해 훨씬 많이 밀집된 곳이다. 바로 이런 지역에서 떠돌던 수평이동 신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크게 성공한 교회들, 내가 말한,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들 다수가 이런 교회들이다. 

   이렇게 정박할 곳을 찾은 떠돌이 신자들은 ‘그 교회’에서 현재까지 적어도 20~30년, 혹은 그 이상을 주1회 이상의 공식모임을 같이 했다. 그밖에 교회를 매개로 하는 수많은 비공식 모임을 통해 삶이 엮이었다.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서로 장기간 동안 이런 공식・비공식 관계를 통해 경험과 기억이 얽히면서 서로간의 친밀성이 깊어진다. 또한 자녀의 ‘절친’의 부모로 얽히고, 부모의 장례로 얽힌다. 해서 삶의 위기에 높일 때 교인들은 도움을 나누는 사이가 되고, 사업을 하거나 취업을 할 때에 혹은 자녀를 유학 보낼 때에도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된다. 나아가 자녀들의 혼인 관계로도 얽힌다. 요컨대 대형교회는 빠른 도시화로 인해 가족과 이웃의 친밀성이 치명적으로 해체되고 있는 시기에 다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친밀성의 공간이며 인맥공장이다.

    특히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계층적 다양성이 사라지고, 특정 계층이 집약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계층적 문화가 형성되기에 용이했다. 학력도 비교적 높고 계층적으로도 안정된 이들이 많았기에 문화적 교류를 나눌 만큼의 여력이 충분했던 덕이다. 하여 바로 이곳에서, 사회의 다른 어느 영역보다도, 웰빙우파 문화가 잘 터잡을 수 있었다.


'주권교인', 웰빙우파 형성의 주체


   대형교회들은, 두 범주 모두 예외 없이, 담임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중요하다. 카리스마적 리더십이란 교회에서 작용하는 거의 모든 가용자원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을 특정인이 장악하고 있는 현상과 관련된다. 한데 두 번째 범주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첫 번째 범주와는 다르다. 첫째 범주의 대형교회에선 교인들이 수동적이고 충성도가 높아 담임목사의 일방주의적 전횡이 가능했다. 반면 둘째 범주에선 교인들이 과거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은 탓에 담임목사가 자신의 자원동원능력을 통해 콧대 높아진 교인들을 얼마나 만족시킬 수 있었는지가 중요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떠돌이 신자들은 교회를 알 만큼 아는 이들이었고, 민주화를 경험하면서 주권의식이 꽤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소비사회를 경험하면서 종교도 상품처럼 선택할 수 있는 자의식이 발전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정보능력도 뛰어나 교회들이 내걸은 상품가치를 판별할 능력도 겸비한 이들이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1990년대에 부상한 ‘주권시민’에 상응하는, ‘주권교인’이라고 불렀다.

   하여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는 ‘주권교인’의 취향에 맞는 방식으로 교회를 개혁했던 ‘개혁군주’형 지도자였다. 즉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들은 주권교인들의 교회에 대한 불만을 교회 개혁에 반영하고 그이들의 취향에 맞는 요소를 발명해냄으로써 수많은 떠돌이 주권교인들을 정박하게 하는 데 성공한 교회다.

    나는 이러한 ‘개혁적 발명’을 통해 각 교회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특성화한 것을 ‘교회의 캐릭터화’라고 불렀다. 이때 캐릭터화를 특징짓는 요소를 여러 연구자들은 ‘개인주의’라고 불렀는데, 나는 ‘웰빙’이 더 적합하다고 보았다.

    가령 1990년대 이후 가열된 자녀교육 열풍은 명문대 지상주의를 낳았고, 이런 현상은 중상위계층에서 더 치열했다. 한데 몇몇 대형교회들은 2천 년대 즈음부터 명문대 지상주의를 넘어서 기독교 지도자를 통해 사회를 계도한다는 이상 아래 명문대에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겸비한 전인적 소양을 갖춘 엘리트 양성을 추구하는 대안학교들을 만들어냈다.

    또 ‘부자 되세요’가 일상어가 될 만큼 신자유주의 시대 성공지상주의적 태도가 전 사회를 휘몰아칠 무렵 자신이 누리고 있는 풍요를 축복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신이 부여한 도덕적 책임의 맥락에서 보고자 하는 ‘청부론’이 일부 대형교회를 통해 확산되었다. 이것 또한 풍요를 천민화하기보다는 귀족적 덕성으로 재해석하는 웰빙신앙의 주요 항목에 속한다. 이렇게 대형교회의 캐릭터화의 기조는 웰빙신앙화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웰빙신앙적 캐릭터화가 얼마나 잘 수행되느냐를 시금석으로 하여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를 규정할 수 있다.


웰빙우파적 문화의 헤게모니화를 우려한다


    1990년대는 권위주의를 넘어서 한국근대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의 시대였다. 하지만 그 시간은 너무 갑자기 다가왔고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내기엔 너무 짧았다. 10년도 못 가서 신자유주의의 괴물적 파괴력에 휘둘리는 시대가 도래했고, 2천 년대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반동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여 1990년대에는 도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하위문화적 소리들이 등장했을 뿐 지배적인 대안적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시기에 거의 지배적 문화로 부상한 것이 없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웰빙우파’적 문화로 보았다. 오늘 우리 시대에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멋지고 규범적으로 훌륭하다고 인정받는 것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로 ‘웰빙’이 적합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웰빙을 가장 잘 구체화한 것은 우파적 요소다. 그런데 이런 웰빙우파의 문화가 형성되고 자리잡는 데 가장 중요한 공간이 바로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다. 그런데 이런 대형교회를 매개로 하는 웰빙우파적 문화의 헤게모니화는 다른 계층에 대한 타자화를 정교하게 제도화할 우려가 있다. 마지막 글은 바로 이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 1199호(2016 11 01)에 실린 '웰빙우파와 대형교회' 14번째 글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_id=20161004164036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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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끈을 절단하는 아무도 아닌 이[각주:1]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이 책(『신정-정치』)이 출간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5월 9일 19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이른바 정권의 교체, 민주정부 3기가 시작되었다. 광장을 달구며 ‘탄핵’이라는 점으로 수렴되었던 목소리 중 많은 이들은 승리의 환호를 질렀고, ‘수호되어야 할’ 정부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저마다의 의견이 있겠지만, 대다수의 목소리 즉, 이제 세워진 저 권력이 무너지지 않도록 ‘수호’하기만 하면 그 촛불’들’이 말했던 새로운 세상이 열릴까? 이에 대해 ‘신정-정치’는 그간 우리 사회는 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기까지 걸어온 지난한 과정을 이야기하고,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이고 철저하게 은폐함으로 감춰졌던 어두운 역사의 경로를 폭로하여 광장에서 냈던 그 목소리’들’이 ‘새 정부’라는 알리바이 속으로 어느 하나 휩쓸리지 않고, 온전히 인양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미 자명하게 알고 있듯이, 역시 시작과 끝은 세계를 풀기도 하고 매기도 하는 그 성스러운 끈(7), 곧 성스러운 화폐와 자본의 힘이다. ‘성스러운(거룩한)’과 ‘화폐/자본’을 연결하는 이 언어는 단순히 물질의 세계를 신화화하여 표현하는 게 아니다. 즉, 다시 말해 신정-정치란 돈을 물신화하는 은유가 아니라 등가적이며, 그 운동을 통해 세계의 실재를 구축해 나간다. 그것들은 무한하게 순환하며 서로를 떠받침으로써 우리의 실제적이고 물리적 삶을, 사회적 관계들의 끈끈함을 스펙터클-사회로, 다른 말로 ‘사이비 신성체’로(24) 전환시켜 나간다. 이를 골자로 한 제단 위에 각 종류의, 각 사연이 담긴 피들이 제물로 섬겨진다. 4. 16의 피, MERS의 피, 이창근의 피, 바로 지금의 언어로는 갇혀 있는 한상균과 동성애자 A대위의 피 등 유혈이 낭자한 (사이비) 사회. 거기가 바로 우리의 삶이 바들바들 떨며 놓여진 풍찬노숙/각자도생의 현장이다. 거기서도 모두가 한 입으로 외워야 할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며, 예언자다.(8)”


.

   신정-정치의 사제들은 사목의 권력을 이용해 먹이며, 살리고, 심지어는 머리털까지 센다고도 할 수 있는 바(누가복음 12:7), 진정 그리 살고 있다고 ‘착각’함으로써 바틀비의 변호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심지어 매일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고통 앞에서 마음의 운동을 자기 안락을 위한 자위의 도구로, 자기가 속한 법의 권역을 보존하기 위한 장치로 환수하는 고통의 질료화/추상화(350)’하기를, 조남호가 그랬던 것처럼 김주익을 모른다 하며 ‘눈물을 훔치면서’ 김진숙을 불법자로 매도하기를(257), 그리고 바로 지금 최순실이 법정에서 진실을 묻던 의원을 딸아이의 영혼살인자로 매도하며 울부짖는 스펙터클을 매순간 집전한다. 그 ‘사이비성’과 실제 지금/여기의 삶을 묶는 전능성은 어디서 오는가? 최초의 가치이자 성부인 축적의 법과 그것을 운동시키면서 매개하여 잉여가치로 화하는 성자인 국법의 이위일체, “신-G’”(13)이다.


   이에 사람들은 저 ‘성스러운 끈’, 세계를 단단히 매고 있는 저 매개/매듭에 다양한 방식으로 봉헌하고 있는데, 어떤 이는 성스러운 끈의 매듭을 더 매는 방식으로, 그 반대 편의 이는 그 끈의 성분을 조사하고 끈을 푸는 지식을 체계화하여 이른바 ‘지식팔이, 책팔이’를 하는 방식으로, 또는 그 둘의 결합의 모양으로 이 세계에 매개의 매개를 더하고 있다. 그 끈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는커녕! 한 번 엉킨 작은 실타래나 목걸이를 풀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안다. 풀려고 할수록 더 엉키고, 자신이 더 엉김을 가하고 있는 자신, 변수에 기하급수적 변수를 얹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의 그 분노를 말이다. 그러므로 그런 모세의 사목권력적 후생체에 봉교하는 인간(92) 떼들에 맞서 정치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 모든) 매개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 수단 그 자체를 그대로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가 목적인 목적의 영역도 아니고 이러저러한 목적에 종속된 수단의 영역도 아닌 인간 사유와 행위의 장으로서의 목적 없는 순수 매개성의 영역”(226)이다.


    그 정치를 누가 수행하는가? 누가 그 매개/매듭들의 경첩을 절단할 수 있는가? 비존재들을 분리/양산하고 그들을 재합성함(291)으로써 축적의 축적을 거듭하고 급기야는 모든 매개를 절멸시켜 ‘순수한 축적’ 곧 금융자본주의G-G’(96)의 체제 속에서 빚(Schuld)을 볼모삼아 피를 빨아먹고 사는 체제를 끝장낼 수 있는가? 바로 폭력의 당사자들 즉, 고통의 최전선에서 고통을 사변적으로 환원시키려는 자들에 분통과 원통으로 소리치는 자들, 그리고 그들을 위시하여 깨어 있기로 결단한 ‘모두가 된’ 이들이다. 예를 들어 ‘아무도 아니’었던 수많은 5. 18 엄마들이 ‘모든 이’로 화하여 4. 16 엄마들에게 보내는 저 절절한 인사말이 선취하였고 그것이 광화문과 곳곳의 불로 옮겨 붙어 최순실-박근혜-이재용(104)으로 이어지는 비밀의 카르텔을 끝장냈듯이.

<5. 18 엄마가 4. 16 엄마에게>[각주:2]


   고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어야 한다.”[각주:3] 라는 저 맑스의 말을 바로 오늘 하늘로부터 내려온 성령의 불로, 세계의 무능/유능(406)을 도려내고 태워버리는 불로, 사목적 게발트로 위장하여 “서로가 서로를 비밀스런 끈으로 거듭re엮고 매회 짜이게 하는ligio, 그럼으로써 축적이라는 비밀스런 제 1목적의 위기를 관리하고 종교적religious 원상복구를 수행하는 공동 ‘비선’의 게발트”(118)를 대항하는 익명들 곧 ‘아무도 아니’(296)로 존재하는 고유한 존재자들로 맞아들이자. 최종목적론적이고 메시아주의적인 선언문을 쇠말뚝처럼 박아댐으로서 세계의 ‘잔여’(351)가 그 맹아로 품고 있는 ‘파송된 그리스도-아이들’(153), ‘바틀비-그리스도(348)’등을 절멸시키려는 의지를 꺾고, 계속해서 그 입지점을 ‘다른 곳에’ 세움으로 ‘사랑의 시도’(291)를 이어 나가는 그 말로 읽도록 하자. 그 ‘다른 곳’이란 김영민이 정의 내린 ‘세속’이 가리키는 바, “스치고 섞이면서 만날 수 없고, 겹치고 묶이면서 만날 수 없고, 손을 잡고 혼인하면서 만날 수 없고, 악수를 하고 계약을 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어긋남의 표상. 내 속에 있으면서도, 아니, 내 속에 있기 때문에 결코 만날 수 없는 너와의 아득한 거리에 대한 표상”[각주:4]이며, “개인의 호의 앞에 무력한 관계의 구조 곧 그 애틋하고 알뜰했을 호의가 속절없이 부닥치는 벽” [각주:5]인 곳임에도 불구하고.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윤인로의 책 『신정-정치』(갈무리)에 관한 서평입니다. [본문으로]
  2. 오월어머니집과 5·18 민주유공자 유족회 등 5·18 단체 회원들이 지난 11일 진도 팽목항을 찾아 희생자를 추모하고 조속한 세월호 선체 인양을 정부에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 팽목항에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라는 제목으로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라는 내용의 펼침막을 내걸었다. 사진=5·18 기념재단. 연합뉴스 원문보기: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6508.html#csidx1afe6d7bc52ceb493856a24879f17e8 [본문으로]
  3. K. Marx,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옮김, 이론과 실천, 2011. 25쪽 [본문으로]
  4. 김영민, 『동무론』, 한겨레출판사, 2008, 164쪽. [본문으로]
  5. 앞의 책, 16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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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각주:1] 





이상헌

(녹색전환연구소장·한신대 교수/ 한백교회 교인)



풀뿌리에서부터 의견을 모아서 미세먼지 대책을 수립해 가게 되면 화석연료 카르텔을 해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19대 대선에서는 유력 후보들 대부분이 미세먼지 대책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미세먼지 문제는 대단히 구조적이고 복잡하며 어려운 문제이다. 그 이유는 첫째, 미세먼지 문제는 우리가 지금까지 추구했던 화석연료 중심의 경제발전 방식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둘째, 강고한 이해관계 카르텔이 화석연료 중심의 경제발전 체제를 재생산하고 있는데, 이들의 영향력이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셋째, 미세먼지에 대해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나라 미세먼지의 주요 발생 원인을 살펴보면 2013년 기준으로 제조업 연소(미세먼지 66.6%, 초미세먼지 54.2%), 비도로 이동 오염원(미세먼지 12.5%, 초미세먼지 18.2%), 도로 이동 오염원(미세먼지 10.0%, 초미세먼지 14.5%), 에너지산업 연소(미세먼지 3.7%, 초미세먼지 4.7%) 등이다. 한편, 디젤 배기가스는 미세먼지 농도에 기여하는 정도는 적긴 하지만, 인체 건강에 대한 위해성은 매우 크다. 그래서 국제암연구소에서는 디젤 배기가스를 1군 발암물질로 지정하였다.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해서는 화석연료 의존적인 우리나라 산업 및 에너지 소비구조와 생산방식, 토건중심적 개발 행태, 에너지 다소비적 생활양식 등을 전면적으로 재편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작업이 필요하다. 관료들과 경제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저항이 있을 것이고,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도 필요한 일이라서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며, 단시일 내에 실질적인 결과를 얻기도 어려울 것이다.


  둘째, 화석연료 중심의 카르텔은 지대추구적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기반을 다져가는 매우 강고한 집단이어서 해체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예를 들어보자. 서해안의 석탄화력발전소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로 인해 수도권 인구 2000만여명 중 연간 1144명이 조기 사망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도 앞으로 20기의 석탄화력발전소가 2030년까지 더 지어지게 계획되어 있다. 전기가 모자라는 것도 아니다. 이미 2013년 이후 전력소비량 증가는 경제성장률 아래로 떨어졌다. 전력설비 예비율은 30%를 넘었으며, 신생 LNG발전소들의 가동률이 저조해서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더군다나 기후변화에 대비하여 온실가스를 줄이는 데 온 힘을 다해도 모자라는 판국에, 온실가스 배출의 주원인인 석탄화력발전소를 왜 이렇게 많이 늘리는 것일까? 정부 스스로가 공언한 감축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게 되자 급조해서 만들어낸 방안이 해외의 배출권을 사오겠다는 것이었다. 그 돈은 누가 내는가?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생기는 이득은 사업자가 가져가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온실가스 감축 비용은 세금으로 부담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 또 있다. 국민연금은 신규 석탄화력발전 건설 관련 회사채 약 2조원어치를 인수했고, 민자 석탄화력발전에 프로젝트 금융 대출을 제공했다. 국민의 건강을 해치는 미세먼지를 발생시키고 온실가스를 다량으로 배출함으로써 세금을 축내는 석탄화력발전소에 왜 국민연금이 투자를 하는가? 누가 이런 투자를 결정한 것일까? 이것은 공공성을 도외시한 화석연료 카르텔의 지대추구적 행위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셋째, 우리는 아직 미세먼지 특히 초미세먼지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다. 제조업 공장 굴뚝이나 자동차 배기가스와 같은 1차 발생원에서 나오는 것을 1차 생성먼지라고 하며, 질소산화물 등이 수증기·오존·암모니아 등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미세먼지가 발생하는 것을 2차 생성먼지라고 한다. 수도권의 경우는 2차 생성먼지가 전체 초미세먼지 발생량의 3분의 2나 된다. 그런데 이 2차 생성먼지가 발생하는 과정이 너무나 다양해서 제대로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초미세먼지와 오존은 2015년부터 시행된 2차 수도권 대기환경관리 기본계획에서야 비로소 관리대상물질이 되었다. 축적된 관리 경험이 너무 적다. 기본적인 데이터를 생산하는 미세먼지 측정소의 위치도 문제다. 서울녹색당 정책위원회가 정보 공개를 청구한 자료에 따르면 25개 도시 대기측정소 중 17개 측정소가 10m를 초과하는 위치에 있으며, 마포는 23m로 너무 높은 곳에, 성동과 송파는 각각 0.5m, 0.8m로 너무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 우리가 실제로 숨쉬는 공기의 질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역간 차별도 있다. 2016년 8월 기준 한국의 총 262개소의 미세먼지 측정소 중 1000㎢당 서울은 41.3개소, 부산은 24.7개소, 인천은 14.3개소가 있는 반면, 강원도는 0.4개소, 경상북도는 0.7개소, 충청남도는 0.9개소로 나타난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미세먼지를 마셔도 끄떡없는 체질인가? 뿐만 아니라 중국 등 외국발 미세먼지의 영향에 대해서도 아직 신빙성 있는 데이터가 부족한 상황이다. 결국 미세먼지 대책을 위한 기본적인 데이터의 신뢰성조차도 매우 낮은 셈이다.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2차 생성먼지 발생과정 


    문재인 대통령은 선거 기간에 신규 화력발전소 건설 중단, 낡은 발전소 가동 중단, 한·중·일 환경협약 체결 및 공조 강화, WHO 권고수준까지 기준 강화, 초미세먼지 기준 신설, 학교에 미세먼지 알리미 제도 도입, 재생에너지 산업 육성 등을 미세먼지 대책으로 내어놓았다. 대체로 방향은 잘 잡았다고 본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구조적인 문제들이 장애물로 작용할 것이다. 첫 번째 장애물은 우리나라 산업구조 개편과 에너지 믹스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것으로 뛰어넘어야 할 것이다. 매우 광범위하면서도 장기적인 사회적 논의를 거쳐야 할 것으로 본다. 두 번째 장애물이 가장 골치 아프다. 화석연료 카르텔들이 엄청나게 저항할 것이다. 하지만 화석연료 카르텔들이 공익이 아니라 오로지 사익을 위해 시민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시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이들의 지대추구적 행태를 중단시켜야만 한다. 서울시는 5월 말쯤 광화문 광장에서 3000여명이 모여서 대기질 개선대책을 모색하는 대규모 원탁회의를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시민들의 집단지성을 활용하여 ‘서울형 대기질 정책’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새 정부에서는 이러한 시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세 번째는 과학적이면서 외교적인 역량이 최대한 필요한 일이다. 미세먼지와 관련한 기초연구에 투자를 해야 하고,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해서 지역간 환경 협력이 다른 분야의 협력을 유도할 수 있는 마중물의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정부에서는 우리 모두 마음 편히 숨쉬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 2017. 5. 15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20170515181823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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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이브 패러디: 문제적 성서, 여성의 눈으로 다시읽기[각주:1]




정나진* 




패러디에 대하여


      패러디. 문학, 음악 등의 작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만들어 놓은 어떤 특징적인 부분을 모방해서 자신의 작품에 집어넣는 기법[각주:2], 이론가에 의하면 이전의 예술작품에 대해 상이성을 염두에 두고 재편집하고 재구성하고 전도시키고 초맥락화하는 통합된 구조적 모방[각주:3]이다. 좀 거칠게 적자면 원작의 모방이지만, 그러나 해체와 재구성, 비틀기, 전복 등을 통해서 재해석과 풍자, 교훈을 가져오려는 목적이다. 대부분은 희극적 요소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예술의 주요기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패러디’는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서 고전적인 주제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근대의 합리성에 질문과 비판을 가하고 있다.


'나쁜 패러디'


      옆의 그림은 지난 탄핵심판 정국 때 국회회관에 걸렸던 그림 <더러운 잠>의 원작이 되는 마네의 <올랭피아>라는 그림이다. 이 작품 또한 16세기 초 티치아노의 대표작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그림을 패러디한 것인데, 마네는 그림의 주인공을 원작의 요염하고 부끄러운 듯 관객을 바라보는 자세와 달리, 관객을 당당하게 응시하는 구도로 그렸다. 뿐만 아니라 작품의 제목을 어느 여신의 이름이 아닌 ‘올랭피아’라는 그 당시 흔한 매춘부의 이름을 빌려와, 여신/성녀숭배라는 위선을 덧입고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여성을 대상화하던 당시의 사람들을 비꼬았다. 

Édouard Manet, Olympia(1863)


      <더러운 잠>은 사실 마네의 이 작품 뿐만 아니라,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원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조르조네(Giorgione)의 <잠자는 비너스>도 함께 참고하고 합성하였는데, 박근혜의 잠자는 얼굴이라든지, 비스듬히 누워있는 나체라든지 하는 부분이다. 작가라고 하는 이는 원작의 함의나 의의에 대한 어떠한 고민이나 성찰도 없이 ‘패러디’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여러 작품들의 도상을 오직 자신의 의도를 위해 편할 대로 도용하였는데, 이러한 경우는 ‘패러디’라는 예술기법의 전형적인 나쁜 예, 올바르지 못한 예라고 보여진다. 더구나 <더러운 잠>이 큰 논란이 된 것은, 일종의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공공미술적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동시대적인 성찰없는 ‘편할 대로’의 태도와 시선이 그 속에 여과없이 들어가면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동시에 혐오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도 소위 ‘진보진영’이라고 하는 그룹도 이런 태도에서 전혀 다를 바가 없음을 고스란히 재현했기 때문이다. 고민과 성찰이 없는 패러디의 ‘나쁜 예’는 풍자와 재해석을 통한 문제제기와 비판은커녕, 또다시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대상화시킬 뿐이다. 고상한 척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결국 성적 쾌락을 위해 여성누드화를 사고 팔았던 남성들을 향한 올랭피아의 무뚝뚝하고 당당한 시선과 목소리는 또다시 희석되고 삭제되었다.  


패러디-낯설게 보기


René Magritte, La trahison des images(1928-1929)


      패러디 기법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 중 하나는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왼쪽)이라는 작품이다. 마그리트는 흔한 파이프를 그려놓고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는다. 실상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를 재현한 그림이 맞다. 그러나 작품을 보는 관객은 저 모양의 그림을 관습적으로 파이프라 부르므로, 곧 파이프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라는 캘리그래피 문구 사이의 모순에 당착하고, 관습을 벗어나 곧 작품에 대하여 다시 보기, 낯설게 보기를 시작할 것이다.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작가인 마그리트는 이런 식으로 파이프의 패러디를 통해 통속적인 이미지의 재현으로서의 회화에 반발하고, 규범화된 근대의 합리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성서는 어떻게 패러디 되어 왔는가?


      패러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기법 중 하나이긴 하지만, 사실 패러디는 항상 있어왔고, 인기있는 대중작품들은 회자되는 동시에 역사 속에서 좋게든 나쁘게든 끊임없이 패러디되어왔다. 패러디를 단순한 모방이나 흉내가 아니라 비틀기와 해체, 재구성을 통한 재해석이라고 할 때, ‘성서’라는 텍스트 또한 각 시대에 따라, 공동체에 따라, 개인에 따라 끊임없이 패러디되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삶의 자리 속에서 경험되고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구전되고, 그것이 편집되어 문자화된 성서 텍스트는 그 행간의 빈틈들과 모호성들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져왔다. 그리고 그 (재)해석에는 텍스트의 삶의 자리뿐만 아니라 해석자의 삶의 자리 또한 뒤섞여있기 일쑤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서가 남성에 의해 쓰여지고, 또한 성서의 패러디-(재)해석- 또한 주로 남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독자가 여성이라 하더라도) 줄곧 남성의 눈으로만 읽혀져왔다는 것이다. 텍스트가 누구에 의해 쓰여지고 해석되어지는가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성서가 모두(의 구원)를 위한 책이라면, ‘남성’이 아닌 이의 눈으로도 주체적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인데, 성서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숨겨지고 지워지거나 왜곡되어지기 일쑤였다. 성서에 여성이 등장하지만 중요한 구원역사의 순간 여성은 사라지거나 미래의 중요한 아들들의 대를 잇기 위한 도구와 희생자로 전락해버리곤 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알아차리고 마지막까지 함께 한 것은 결국 여성들이었으나, 이름조차 기록되어있지 못하기도 하고, 예수의 공생애를 함께 보낸 주요인물은 결국 열두명의 남성사도들만으로 기억된다. 사도바울의 선교에 큰 기여를 하고 일약을 담당한 여성들이 꽤 있으나 성서에서 그들을 찾아보기는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해야 하는 식이다.  

      성서가 남자들만을 위한 구원의 책이 아니라면 성서에서 지워지고 잊혀진, 왜곡되고 오해된 이들의 존재와 목소리 또한 읽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의 성서해석이 성차별적인 시선에서 이루어져왔다면, 그 성차별적인 시선 또한 찾아내고, 제거해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브'의 나쁜 패러디 역사


      특히 구약으로 불리우는 제 1성서의 여성 대표주자로 가장 많이 패러디되는 이는 단연 ‘이브’일 것이다. 그리고 작금의 교회 안의 여성혐오의 근원에는 이브가 출연하는 창세기의 나쁜 패러디가 자리한다. 그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부터 나왔으므로(창세기 2장)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야기나, 이브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본인도 먹고 아담까지 먹여 낙원에서 쫓겨나고 원죄를 입었으며 인류의 고통이 시작되었으므로(창세기 3장), 여자는 만가지 악의 근원이라는 이야기 등이다. 바울로 서신의 여성에 대한 언급들도 결국 그 기원은 같은 창세기의 본문으로부터 시작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4장의 “여자여 잠잠하라. ...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라는 말도 창세기 3장 16절(“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창세기, 특히 야웨기자의 것으로 불리우는 2, 3장 본문의 시대적 배경 자체가 다윗왕조 시대의 가부장적 문화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후 각 시대마다 있어왔던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관점들 속에서 이브 신화의 나쁜 패러디가 재생산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형성기 때는 교회에 비교적 여성 리더들도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교회의 제도화와 국가공인 이후로부터 여성들은 배제되거나, 창세기 2장, 이브의 역할의 명명처럼 ‘돕는 자’로서의 존재의 한계가 명백했다. 교부들은 여성이란 하나님의 창조물인데 남성들에게는 선물이지만 세상의 저주라고 보았고 이러한 교부들의 여성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교회 내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결정했다. 존경받기 그지없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출산이라는 이유를 배제하면 여자가 남자의 돕는 자로 만들어질 아무런 이유도 상상할 수 없다”고 하면서 여성은 약한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고등한 이성에 따라 살기보다는 열등한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 같다고 여성을 인식하며 창세기 주석을 저술했다. 이러한 교회의 여성에 대한 이해는 14세기부터 근대 초까지 이어진 20-50만명이 희생된 마녀사냥에서 여지없이 이용되었다. 교회의 의도를 위한 ‘편할 대로’의 나쁜 패러디는 너무나도 쉽게 여성들을 마녀들로 만들어버렸다.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여자는 마녀다. 열심히 다니는 사람도 마녀일지 모른다.”[각주:4]


창세기 2장 다시 읽기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나쁜 패러디의 전형적인 예는 원작의 의도와 함의를 충분히 살피지 않은 채, 작가의 편의를 위해서 원작을 1차원적으로 흉내, 모방하고 갖다쓰는 것이다. 원작을 비꼬거나 해체, 재구성하려는 목적이라면 더더욱 그렇거니와, 원작의 의도를 다시 살리고 싶은 경우에도 원작의 의미를 깊이있게 성찰해보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가부장적이고 여성혐오적인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보편적 종교로 받아들였던 서구문명 전체와 근대화 과정에서 그 서구문명을 그대로 세례받은 한국의 문화에 이브의 나쁜 패러디는 그대로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이브의 나쁜 패러디가 성서텍스트의 원형에서도 진리화되어있는지는 다시 한번 읽어볼 일이다. 성서의 목소리는 일괄적이지 않다. 우리는 텍스트 속에서 누구의 진리가 주장되고, 누구의 진리가 억눌려졌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각주:5]


여자, 남자를 돕는 자?


      먼저 여성의 존재를 남성의 소극적이고 부속적인 역할로 정당화시킨 창세기 2장의 아담과 이브의 창조 장면을 다시 재구성해보려고 한다. 첫째로 야훼는 땅의 먼지(히브리어로 ‘아다마’, 성서에는 알고보면 이와 같은 유쾌한 말장난 식의 단어들이 많다)로부터 사람(아담)을 지으셨다. 아다마에서 나왔으니 아담이다. 나는 여기에서 첫사람인 ‘아담’을 남자로 전제하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아담을 남자(man)가 아닌 사람(human being)으로 바꿔 읽어보았다.


“한처음에 야훼는 땅의 먼지(아다마)로 사람(아담)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첫사람을 창조하셨다(7). 그리고 그를 에덴동산에 두시고 에덴동산을 섬기며 지키도록 하셨다(15). 어느날 야훼가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내가 그를 위해서 그의 앞에(그에게 맞는, 그의 파트너로) 돕는 사람(에쩨르)을 만들겠다.’(18) ... 사람이 모든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사람을 위해 적합한 돕는 자는 발견되지 않았다(20). 그래서 야훼는 사람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가 잠들었다. 야훼는 사람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빈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21)..... 아담이 말하였다.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23)”


      이렇게 성서를 다시 읽으면 아담과 이브의 창조 이야기는 남성/여성 이분법적인 창조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그를 돕는 자’의 창조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성별분업을 정당화시킨 ‘돕는 자(에쩨르)’에 대한 재해석이다. 통속적으로 생각할 때, ‘돕는 자’라면 주체의 옆에서 부가적인 역할을 하는 정도의 존재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언어든지, 그 언어권에서든 언어가 함유하는 문화 속의 의미와 용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돕는 자'(helper)의 히브리어 '에쩨르(עֵזֶר)'는 (우리가 그동안 이 본문에서 생각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벗어나 놀랍게도) 여성명사가 아닌 남성명사이다. 더 놀라운 것은, '에쩨르'는 구약 전체에서 21회 사용되는데 그 중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창세기 본문의 2회를 제외한, 나머지 19회는 모두 '구원자로서의 하느님'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라는 것이다(창 2:18,20, 출 18:4; 신 33:7,26,29; 시 20:2; 33:20; 70:5; 89:19; 115:9-11; 121:1,2; 124:8; 146:5; 사 30:5; 겔 12:14; 호 13:9; 단 11:34).[각주:6] 이렇게 본다면 아담의 돕는 자 ‘에쩨르’는 '야훼의 도움'을 표상하는 신적 대행자로서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에쩨르(עֵזֶר), 온전한 인간을 위하여" : 21세기 이브 패러디


      앞선 창세기 본문을 여성중심적으로 다시 읽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텍스트가 쓰여졌던 시대의 가부장적 문화의 한계를 인식하며 회의적인 이들도 있다. 어떠한 텍스트도 순수하게 친여성신학적이거나 친가부장적인 본문이라 단정지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텍스트들이 새로운 의미가 발굴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각주:7]

      사람은 누구도 단독자로 온전할 수 없다. 사람은 결코 단독자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사람은 ‘돕는 자(에쩨르)’와의 결합을 통해서 상호 협력적이고 상호 구원적인 사회적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다. 아담과 이브 창조에 대한 이러한 재해석은 그동안 가부장제와 성별분업의 규범을 정당화시켜준 성서해석에 일갈을 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여/남 이분법적인 정체성의 젠더정치를 넘어서 모든 차이(성별, 인종, 장애/비장애 등)에도 불구하고, 또는 오히려 그 차이를 자원으로 새로운 시대의 해방과 구원의 텍스트로 읽혀질 수 있지 않을까?


마치며 : 멀미, 패러디로 시작해보기


      지난 2월, 속해있는 교회공동체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문제적 성서, 여성의 눈으로 다시읽기”라는 주제로 4주 동안 강좌를 이끈 적이 있다. 그동안 성서가 (독자가 혹시 여성이더라도) ‘남성’의 눈으로만 읽혀져 왔으므로, 이번에는 거꾸로 (혹시 남성이더라도) ‘여성’의 눈으로의 성서읽기를 해보자는 의도였다. 네 번의 짧은 강좌였으므로, 실제로 성서를 함께 다시 읽기보다는 재해석을 위한 선작업으로, 그동안의 남성중심적인 시각을 해체해보고, 성서와 기독교의 역사를 객관화해보고, 동시대의 페미니즘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선의 거리차를 확인하는 정도의 워밍업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세 번째 시간인가에 강의를 마칠 무렵, 수강자 중의 한 분이 고뇌를 토로했다.

      “아 진짜 힘드네요. 이게 그냥 이론이 아니고, 삶하고 결부되어 있고, 신앙하고 결부되어 있으니 고민이 들어요.”

      마치 파이프를 보고 있는 나에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하는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 패러디 앞에서 느껴지는 당황스러움처럼, 성서를 그동안 소외되었던 여성의 눈으로 다시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멀미를 동반한다. 그것은 그만큼 지금까지 나의 인식방법으로서의 (남성중심적) 제도와 규범, 언어의 틀이 땅처럼 견고했기 때문이고, 이제는 그 규범과 언어, 때로는 신앙까지도 불변하는 진리의 땅과 공간이 아니며 다른 문화들과 더불어 시대의 생산물일 뿐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서해석이 유희나 이론, 머리로만 하는 평등이나 정의의 윤리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 존대에 대한 ‘신앙’의 문제라고 보았을 때, ‘여성’의 눈으로 성서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여태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의 태도의 기반을 흔드는 문제로 다가온다. 바라는 바,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것은 어떤 면에서 그동안에 내가 가져왔던, 그리고 사회가 나에게 강요했던 정체성에서의 이탈과 남성중심주의의 가부장제와 성별분업, 남녀이분법이라는, 우리를 가둬두는 성차별적 정체성 정치의 성서해석으로부터의 해방이 될 것이다.

      ‘성서 다시 읽기’ 강좌를 이끌면서, 느꼈던 한계 중 한 가지는, 참여자들이 주체적으로 스스로 성서를 해석해보는 일을 기술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어려워하더라는 점이다. 그래서 부러 ‘성서 다시읽기’를 ‘패러디’에 빗대어보았다. 교회의 교육은 신자로 하여금 성서텍스트를 주체적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성서의 권위, 사실은 결구 성서해석의 권위에 짓눌려있게 해왔고 성서에 대해 질문하지 못하고 교회의 해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주로 희극적 요소로 이미지화되는 패러디는 그래서 신자들에게 좀더 성서를 가볍게 다시 읽을 수 있도록 할수 있지 않을까? 행간을 상상하기, 삭제된 목소리 들어보기, 숨은그림찾기. 뒤틀고 해체하여 재구성해보기.


* 필자소개

  글쓴이는 상호문화신학(Intercultural Theology)을 전공으로 지구화, 공간, 이주 등에 관심하며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고민하고 있다. 사람들과 오순도순 함께 사는 것이 꿈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17년 5,6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본문으로]
  2. https://ko.wikipedia.org/wiki/%ED%8C%A8%EB%9F%AC%EB%94%94 [본문으로]
  3. Linda Hutcheon, 김상구, 윤여복 역, 『패러디이론』, 서울: 문예출판사, 1992, 23. [본문으로]
  4. Heinrich Kramer, Jacob Sprenger,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 1487. 마녀를 찾는 지침으로 인증되었던 책. [본문으로]
  5. Dana Fewell, “Reading the Bible Ideologically: Feminist Cristicism”(1993), 270-280. [본문으로]
  6. http://biblehub.com/hebrew/ezer_5828.htm [본문으로]
  7. Dana Fewell, 앞의 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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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갇힌 도시

 

  목적지 없이 걷기 위해서 도시를 걸어보았다. 백범로에서 이태원로까지 -- 공덕동에서 삼각지를 지나 한남동에 이르는 길을 걸어보니 벽이 많아서 시야도 답답하고 다니기도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1) 공덕역 주변에서 만난 벽은 고층 빌딩이다. 건물은 유리로 뒤덮여 있고 간판(문패)이 줄줄이 걸려 있다. 간판을 보고 용무가 없으면 무심히 지나칠 뿐이다. 고층 건물은 거리를 차가운 복도로 만든다. 2) 서울은 항상 공사 중이다. 효창공원앞역 주변도 공사장을 둘러친 회색 철제 장벽이 몇 년째 서있다. 출입은 말할 것도 없고 시야를 가리는 엄격함은 거리를 삭막하게 만든다. 하필이면 모양도 팔레스타인 장벽을 축소 해놓은 생김새다. 3) 삼각지 역에서 녹사평역까지는 양쪽으로 미군 부대 담장이 길게 늘어서 있다. 고개를 들어도 땅을 걷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종류만 다른 보도블록이 지루하게 이어질 뿐이다. 그나마 담장 너머로 남산이 보이는 것이 다행이다. 4) 한남동에 접어들면 도로와 주택 사이에 방음벽이 나타난다. 방음벽 밑은 언제나 그늘지고 축축하다. 걷는 사람도 덩달아 음산하고 눅눅한 기분이다. 방음벽은 가까이 하지 말아야할 찻길과 주택을 가까스로 갈라놓는 방파제다. 5) 마지막으로, 인도 위에 올라와 있는 자동차는 제일 치명적이다. 마치 수륙양용 자동차처럼 차도에서도 달리고 인도에도 당당하게 올라온다. 인도 위에 주인은 사람인데 사람이 주차된 자동차를 피해 차도로 뛰어 들어야 하는 형편이다.

1) 빌딩


2) 공사장

3) 미군부대


4) 방음벽


5) 인도 위 자동차


이상 열거한 빌딩, 공사장, 미군부대, 방음벽, 자동차 등은 서울에서 흔한 장애물이다. 그것들이 일부 불가피하거나, 당장 극복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서울은 벽에 갇힌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최근 “서울로7017”이 개통되어서 걷는 도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만큼, 걷기의 관점으로 도시가 꾸준히 관리되어 나가길 바란다.

 

 


 


백정기 作 (미디어작가)


- 작가소개

홍대 회화과를 중퇴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을 졸업했다. 2008년 개인전 를 시작으로 5회의 개인전을 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2년 홍은예술창작센터, 2013년 경기창작센터 입주작가로 레지던시 활동을 한바 있다. 음악적 청각화를 주제로 “Walking alone on a clear night: Musical sonification based on cityscape”외 1편을 등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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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와 공포의 경계에서 차별을 말하다[각주:1]


 

권오윤[각주:2]



       공포물은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프로이트적 개념을 충실히 구현한 장르입니다. 일상에서 비정상으로 취급받는 것들이 고약한 형태로 나타나 주인공을 위협하지요.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문명 세계에서 추방됐던 유령이나 괴물이 출현하고, 인간에 대한 공격성과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체화한 살인마가 등장합니다. 영화에서 공포를 유발하는 것이 무엇인지 검토해 보면, 우리가 그동안 사회적으로 배제하고 억눌러 온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 <겟 아웃>은 이러한 공포 영화 특유의 설정을 공유합니다. 흑인 사진작가 크리스 워싱턴(다니엘 칼루야)은 매력적인 백인 여자친구 로즈(앨리슨 윌리엄스)와 사귀고 있습니다. 주말을 맞아 로즈의 가족을 방문하기로 한 크리스에게,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경찰인 로드(릴 렐 하워리)는 백인인 그들이 널 반길 리가 있겠냐면서 농담조로 조심하라고 합니다.

       다행히 로즈의 부모는 괜찮은 사람들이었고 적어도 겉으로는 크리스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크리스는 좀처럼 불안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가사 일을 돕고는 있지만 괴이하게 행동하는 흑인 하인들과, 예의 바른 태도 속에 차별 의식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로즈의 가족들 때문이지요. 더 껄끄러운 것은 바로 그 주말이 일 년에 한 번씩 있는 가족 행사 때문에 백인 손님들을 초대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공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상식과 합리, 정치적 올바름의 가면 아래에 있는 백인들의 뿌리 깊은 인종 차별 의식입니다. 이것은 극이 진행됨에 따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끝에, 후반부에서 뒤틀리고 일그러진 방식으로 형상화됩니다.

       처음에는 풍자적인 블랙 코미디인 것만 같습니다. 아무리 쿨한 척하는 백인이라도 별수 없구나 싶어 쓴웃음을 머금게 되지요. 그러나 뭔가에 홀린 것처럼 행동하는 흑인 하인들과, 로즈네 가족 행사에 참여한 유일한 흑인 손님 앤드류의 모습을 보면 이게 그냥 비웃고 넘길 상황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유발된 궁금증과 왠지 모를 껄끄러움은 로즈 가족의 정체가 드러나는 후반부까지 극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줍니다.

       로즈 가족의 계획과 그들이 여는 행사의 정체는 '흑인들의 육체적 능력만큼은 인정하지만 그들의 지적 능력은 별 볼 일 없다'라는 뿌리 깊은 편견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밝혀지는 순간, 이제까지 나왔던 모든 장면은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배려와 친절이라고 생각했던 행동들이 사실은 모두 끔찍한 계획과 연결돼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니까요.

       영국 출신의 주연 배우 다니엘 칼루야는 크리스가 겪는 다양한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함으로써 코미디와 공포의 경계에 서 있는 이 영화의 전략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합니다. 모국에서는 주로 TV에서 활동했으나 최근 들어 할리우드 영화에도 진출했습니다. 내년 개봉 예정인 마블의 <블랙 팬서>에도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합니다.

      각본과 감독을 맡은 조던 필은 이 작품이 감독 데뷔작이지만, 오랫동안 TV에서 활약해 온 코미디언입니다. SNL과 자주 비교되는 MadTV 출신으로, 동료 키건 마이클 키와 공동 기획하고 함께 출연한 스케치 코미디 프로그램 <키 앤 필>(Key & Peele)로 2016년에 에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보여 준 인종 차별에 대한 풍자적인 묘사를, 공포물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이 이 영화 <겟 아웃>의 매력을 더했습니다.

       미국 흑인의 시점에서 백인의 인종 차별 의식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이 영화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온전히 즐기기에는 어려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미국 대중문화에서 인종 차별을 풍자할 때 사용되는 코드에 익숙하지 않으면, 폭소를 터뜨리기는커녕 약간 냉소적인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지나가기 쉽지요. 그러나 이것을 우리에게도 익숙한 성차별 문제로 바꿔 보면,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꼬집으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차별 관련 이슈가 부각되면 많은 남자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니 싸잡아 이야기하지 좀 말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그러나 성별이나 인종, 혹은 사회 경제적 위치에 있어서 차별당할 일이 없는 사람들은, 소수자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려는 노력을 따로 하지 않으면 무엇이 차별이고 차별이 아닌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무심코 한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상대에게 큰 상처를 주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게 별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지요.

       차별은 일부 극단주의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될 때, 혹시 그것이 자기와 같은 처지인 사람들에게만 상식인 것은 아닌지 반드시 돌이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런 실질적인 노력 없이 자신의 양심과 결백함을 증명하려 하거나, 정치적 올바름에 집착하여 개념적으로만 평등을 주장하면 차별 문제는 결코 해소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겟 아웃>이란 영화가 풍자적인 코미디와 공포물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전하려고 한 메시지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5월 22일자 기사 <웃다가 공포에 떨게 되는 영화, 어떤 메시지 담았나>(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27300)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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