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투자자’의 야누스적 얼굴

박치현
(CAIROS 대표)

1996년 한국은 OECD에 가입했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2009년 9월 21일 한국 주식시장은 FTSE지수(파이낸셜타임즈스탁익스체인지)에 편입되었다. 내년에는 모건스탠리가 발표하는 MSCI선진국 지수에 편입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OECD에서 FTSE로? 증권거래소 이광수 본부장의 말에 의하면, “OECD 가입이 실물 경제에서의 선진국 진입이라면 FTSE편입은 자본시장(금융시장)에서의 선진국 진입”이라고 한다. 이제 선진국 국민들이 투자하는 펀드종목에 한국기업 주식이 자동적으로 편입된다. 다시 말해 한국이 투자하기에 믿음직한 나라가 된다는 것. 지수편입으로 인해 26조원 정도의 해외자금이 한국 주식시장에 신규 유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에서야 금융시장의 자율화 개방화를 모토로 하는 ‘자본시장통합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금융위기 이후 서구의 대처와는 반대인 거꾸로 가는 조치이다.) 이젠 금융의 시대이다. 이미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금융자본주의’라든가 ‘금융화’라는 수사로 수식되어 왔다. 도대체 금융화로 불리우는, 금융시장의 비대화는 이 시대의 ‘민중’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미 2007년말 펀드 열풍으로 1가구 1펀드 시대가 열렸다. 너도나도 펀드 수익률에 열광했다. 왜 이렇게 되었나? 이미 2005년 노무현 전대통령은 부동산 자금을 주식시장으로 옮기겠다는 의지를 표하면서 몸소 8천만원을 펀드에 투자했다. 언론은 이 일을 대서특필했다. 노무현펀드의 수익률도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정부가 ‘주식시장은 도박’이라는 기존의 비도덕적 이미지를 벗겨준 것이다. 이런 정부의 부채질로 국민들은 더욱 안심하고 주식시장에 발을 들였다. 2년 뒤 1300대였던 코스피지수가 2000을 돌파하였고, 이러한 열기 가운데 지금의 대통령께서는 자신이 대통령되면 코스피지수가 3000 간다면서 기름을 부으신 바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찾아왔고, 주식과 부동산은 폭락했으며, 때맞추어 경제대통령 미네르바의 종말론적 예언이 네티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신자유주의 금융화가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하지만 2009년 3월부터 한국의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 현재(9월말) 코스피지수는 1700대에 이르러, 2007년 수준을 회복했다. “코스피가 500가고 부동산이 반토막난다”는 미네르바의 예언을 믿었던 사람들은 이제 미네르바를 원망한다. 점차 폭락과 붕괴를 예언했던 비관론자들과 진보인사들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까.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데’라며 급속히 상승하는 주식과 부동산을 바라보며 투자 여부를 망설인다. 외국인들은 다시 기록적으로 한국 주식시장에 거액을 투자하며 상승세를 이끌고 있다. 이제 이명박 지지율은 50%에 육박하고 정운찬 서울대 전총장이 절묘하게(?) 총리로 지명되었다. ‘중도실용’이니 ‘친서민’이니 하는 수사들이 내세워지고 있다. 진보․개혁세력은 지지부진하다. 정치세력도 없으며, 대안도 없다. 2008년 광장을 달구었던 촛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제 아련한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다시 회의주의와 무관심의 기류가 지배하고 있으며, 집권세력은 취업 후 상환하는 등록금 대출이나 서민대출 정책 등 그럴듯한 ‘알맹이 없는 전시용 포장지’를 제작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현 정권의 출범에 결정적인 변수는 부동산(뉴타운 개발)이라고 지적한다. 자산시장에서의 기대가 물질화된 것이 현 정권이라는 것이다. 금융화의 가장 큰 의미는, ‘노동소득’에서 ‘자산소득’으로의 이행이다. 사람들의 삶에서 ‘자산소득’의 비중이 점점 비대해지는 것이다. IMF이후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한국사회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노동유연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정상적인 노동으로는 서울에 내 집을 마련하기가 너무 어렵다. 노동유연화는 20대에게서는 <88만원세대>로 물질화된다. 파이는 적은데 경쟁자는 너무 많다. 직장이 불안정하고 노동소득이 부족하므로, 그 빈틈으로 노동소득이 아닌 ‘자산소득’(부동산, 주식 나아가 로또, 도박까지)에의 유인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주장하듯이, 한국도 서구처럼 ‘금융화’가 급속히 진전되었다.

이러한 금융화는 이른바 ‘투자자 주체’를 양산한다. 노동자가 아닌 ‘투자자’. 편드에 투자하는 누구나 미국 주식시장에 신경을 쓰게 된다. 자연스럽게 투자자적 실천, 투자 문화가 확대된다. 재테크와 투자성공담이 사람들의 미래의 꿈을 주조한다. 이러한 ‘투자자-국민들’이 민주화보다는 자산소득을 보장해주는 정권을 출범시킨 것이다. 어쩌면 민주주의는 이제 웬만큼 이루었다고 안심했던 것일까? 작년 경제위기로 현 정권에 실망하는 듯하다가, 자산시장이 회복되고 있는 요즈음 ‘투자자-국민들’은 다시 정권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혹자는 이 투자자-국민들은 이른바 과거-IMF이후 몰락한-중산층들처럼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사람들 아니냐고, 민중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투자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투자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재테크와 성공투자가 ‘삶의 모델’로서는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부동산으로 이미 어느 정도 부를 획득한 중산층들이 아니다. 반대로 뉴타운 등 “나도 부동산·주식으로 뭔가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아직 성공하지 아니한 자들’이다. 이들이 지금의 정권을 뽑아준 게 아닌가. 어쩌면 과거 민중신학에서 말하던 민중이 바로 이런 사람들로 변모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렇지 않다면 민중신학의 민중에는 고작 빈민들만 해당될 것이다.(게다가 빈민들도 게임, 도박, 로또에 미쳐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투자자-민중들이 작년 광장에 나왔던 이들과 완전히 별개의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노동시스템의 불안이 투자자 주체를 낳는다는 위의 주장이 옳다면, 촛불시민과 투자자-민중은 구별되기 어렵다. 다시 말해 민중은 가난하지만 동시에 투자자이다. 아담 햄즈는 금융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은 투자자 주체로 구성하면서,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금융기업의 이해관계와 일치되도록 강력히 포섭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현대차 노조가 파업하면 소액주주들은 노조의 파업을 욕설을 섞어가며 비난한다. 자신이 투자한 주식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도 동일한 처지의 노동자인데 말이다. 한국 기업이 해외공장에서 타국의 노동자들을 형편없는 인건비로 착취하는 것도 찬성하게 된다. 자신의 해외펀드 수익률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도 동일한 처지의 제3세계 노동자였는데 말이다.

70년대 한국교회는 민중에 대해 두 가지 접근법을 개발했다. 도시산업선교회 등 진보진영에서 수행한 방식, 그리고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수행한 ‘기복신앙’ 접근법. 내가 보기에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은 상당히 이상화되어 있는 듯하다. (심지어 민중이 메시야라는 주장도 있었으니까) 그런 민중은 사실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민중신학은 여의도순복음 교회의 민중의 속성을 애써 무시한 것 같다. 민중에겐 야누스적 얼굴이 공존한다고 보는 게 맞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중의 생존 욕구를 탐욕으로 타락시키는 현 금융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직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의 실패 시점에서 기회를 포착하는 게 좋은 방법일 듯하다. 민중의 상승열망은 현재 자산시장을 가리키고 있다. 민중들이 계층 상승열망(생존욕구로부터 비롯된)의 덧없음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다.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진보적인 의식각성을 요구해 봤자, ‘먹고사니즘’의 위력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가 어렵고 삶이 불안정할수록, 먹고사니즘으로 인한 회의주의와 무관심은 더욱 강해지는 듯하다. 물론 민중들의 불안과 고통은 폭발의 시점을 기다리고 있다. 다만 상승열망이 아직은 꺼지지 않았을 뿐.

개인적으로 한국의 부동산시장의 거품이 꺼질 시점이 얼마 안 남았다고 본다. 워낙 오랜 기간 부동산이야말로 확실한 투자처였고 현 정권이 부동산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떠받치기 때문에 부동산 시장이 단시일 내에 붕괴하기는 어렵겠지만, 난 부동산의 질주가 20대~30대의 ‘저소득’ 구조(구매력 약화)에서 지속되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까놓고 말해 부동산 위기는 현 집권세력의 위기나 다름없다. 그래서 이토록 건설에 올인 하는 게 아닌가? 집권세력은 부동산만 잘 하면 “만사가 OK”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부동산이 잘 안되면, 정확히 그 반대이다.

결국 거품은 꺼지기 마련이다. 노동도 대안이 아니고 투자도 대안이 아닐 때, 사람들은 무엇이 대안인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사람들은 ‘사회적 연대’라는 대안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기 시작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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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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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26 22:5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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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자는 부자 값을 해라/내라

    “미국의 부자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계에서 돈을 끌어 모으는데 전념하고 있다. 악행을 저지르고, 정부 특혜와 재정 혜택을 요구하며, 재산을 은닉하고, 세금 감면을 촉구 한다. 미국은 이 같은 부자들의 추한 행위가 절정에 달한 나라다.”
    -미 MIT 존 터번 교수-

    그렇다. 자본주의가 무엇인가? ‘돈(資)’이 만사의 근 ’본(本)’이 되는 주의(主義), 이념이 아닌가. 미국은 자본주의 종주국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돈에 혈안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새로운 미국’ 건설을 기치로 출범한 오바마 정부는 지금 ‘부자 증세/ 빈자 감세’를 기본 정책 방향으로 잡고 있다. 억강 부약 (抑强扶弱), 사회 정의상 백번 옳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 반대 또한 너무나 거세다. ‘부자 학살’ 이니, ‘부자에 핵폭탄’이니 하는 말이 나올 정도다. 토마스 도나휴 (미 상공 회의소 회장) 같은 사람은 힐란한다. “자유 시장을 지향하는 나라에서 승자에게 징벌을 가하는 것이 아니냐?”고.

    오바마의 ‘담대한 희망 (Audacity of Hope)’이 과연 수 백년 동안에 걸쳐 굳어진 미국의 자본주의 철벽을 얼마만큼 꿰뚫을 수 있을런지 큰 관심사인데, 이 힘 벅찬 문제는 다른 기회로 미루고, 여기서는 요즘 미의회 안팎에서 논의되는 “부자는 부자 값을 해라/내라”는 각종 아이디어, 제안, 방안등을 몇 가지 모아 본다.

    # “부자는 감옥 숙박비를 내라”-

    뉴욕 주의회 제임스 테디스코 의원은 지난 7월 “ 유죄가 최종 확정된 순 자산 20만 달라 (약 2억 4천 만 원) 이상의 부자가 복역할 경우, 정부에 수감 비용을 내도록 하자”는 이른바 ‘메이도프 법안’을 제출했다.
    이는 여성 기업인 마사 스튜어트, 호텔 왕 리오나 헴슬리 같은 부자들이 교도소에 잠시 들어갔다가 나온 뒤, 다시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에 대해 징벌적 배상을 물려야 한다는 취지다.
    뉴욕 주는 수감자 1명 당 하루에 $80~$90. 비용이 드는데, 국민 혈세를 그들을 위해 쓸 수 없으니 돈 많은 수감자는 그 자신들이 이를 부담하라는 것이다.

    # ‘캐딜락 건보자’ 세금내라.

    오바마가 국정 최우선 과제로 추진 중인 건강 보험 개혁 법안이 10/13/09 미 상원 재무위를 통과 (14 대 9) 했다. 이 법안에는 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는 ‘퍼블릭 옵션 (공영 보험 제도)’은 포함되지 않았는데, 또 다른 소위 “캐딜락 건강 보험” 이라고 불리우는 고액 건강 보험에 세금 부과안이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그 안의 골자는 이렇다.
    2013년 부터 개인 기준 연 $8,000, 가족 기준 연 $2만 1,000를 초과하는 고액 건강 보험료에 세금을 물리겠다는 것이다. 이로써 앞으로 10년 간 $ 2,000억의 세수가 예상된다고 한다.
    일반 서민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건강 보험료로 1년에 $ 8,000~$ 2만 1,000 를 부담할 수 있는 돈 많은 부자들, 건강/생명을 위한 ‘무한 혜택’을 누리고 있으니 거기에 합당한 대가 (세금)를 치르라는 취지다.

    # “성형 수술 받으면 세금 내라”

    “치료가 아닌 미용을 목적으로 한 성형 수술을 받은 사람은 수술 비용의 10%를 세금으로 내라”
    요즘 연방 상원 재무 위원회에서 논의 중인 안건의 하나다.
    이 안건에 따르면, 코 미용, 지방 제거, 치아 미백, 보톡스 등 세금 공제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비 (非) 치료 목적의 성형 수술에 세금을 물리겠다는 것 이다. (뉴저지 주는 이미2004년 부터 이를 시행하고 있다). (한국은 세원 발굴을 위해 오히려 수술을 받는 사람에게 그 비용을 세금 공제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 백악관 ‘공짜 점심’ 없다-

    지난 7월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제록스의 우르술라 번스, 코카콜라의 무타르 켄트, AT & T의 랜달 스티븐슨, 허니웰 인터내셔날의 데이브 코트 등 대기업 CEO 4명과 점심을 함께 했다. 비공식으로 이뤄진 이 오찬에서 건강 보험과 교육, 그리고 경제 회복 등에 관해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회동의 CEO들에게 이 날 식사는 ‘공짜’가 아니었다. 백악관 직원들이 그들의 신용 카드 번호를 찾아내 각자에게 식사 비용을 청구했던 것 이다.
    이를 두고, “백악관으로 초청해 놓고, 이들이 비용 걱정을 하게 만드는 것은 웃으꽝스러운 일”이라는 지적에 대해 백악관 측은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이는 우리의 윤리 원칙에 부합된다. 앞으로도 필요할 경우 그렇게 할 것이다.”

    # 투자자 잃은 돈 물어 내라-

    다단계 금융 사기 (Ponzi Game) 죄로 징역 150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인 버나드 메이도프--. 그런데 이번엔 그의 부인 루스 메이도프가 투자자들로 부터 4,480 만 달라를 물어내라는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당했다.

    소송 근거는 이러하다.
    “루스 메이도프는 투자자들과 남편의 투자 회사 돈으로 수 십년 동안 호사스런 생활을 했다. 이제 남편의 사업체와 고객들에게 속했던 돈을 물어내야 한다.”
    그들의 주장인 즉, 루스 메이도프는 지난 6년 간 남편의 사업이 수익을 내지 못하는 동안에도 수 천 만 달라를 남편으로부터 받아 흥청망청 써버렸다는 것이다.

    # 뉴 저지주 ‘백만 장자 세금 법’-

    지금 상원에서는 ‘백만 장자세’ (개인 연50만 달라 이상, 부부 합산 100만 달라 이상 계층에 5%의 추가 세금) 신설을 검토하고 있는데, 뉴 저지 주에서는 이를 지난 95년도에 시행한 일이 있다.

    부시 행정부 때 실시된 연방 세금 감면은 결과적으로 중산층에 비해 고소득자들 에게 훨씬 더 큰 혜택- 한 조사에 따르면 상위 1%가 혜택의 1/3을 차지-이 돌아갔다.
    뉴 저지 주정부는 이를 중시, 95년에 ‘백만 장자 세금법 (Millionaire’s Tax Bill)’을 입법화 했다 (94년 1월 부터 소급 적용). 이 법에 따라 연 50만 달라 이상의 고 소득자들에게 50만 달라를 초과하는 소득에 대해 8.97%의 추가 세금 (총 약 팔 억 달라 추산)을 부과, 이렇게 걷힌 돈을 고령자 및 중산층 사람들의 재산세 환불 등을 위한 재원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 부자들 타는 노선부터 인상하라-

    몇 년 전 뉴욕시 지하철 요금 인상 때, 그 찬반/인상율을 에워싸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그 때 민간 단체들이 들고 나온 주장은 이러했다.
    “뉴욕시 지하철은 주로 중산층 이하 사람들이 이용한다. 그런데 왜, 교외에 사는 고 소득자들이 이용하는 다른 노선 (LIRR & NJ Transit)은 요금을 인상하지 않느냐?
    그 쪽을 먼저 인상하라. 그리고 그 인상율도 그 쪽이 더 높아야 한다. 그들은 우리 보다 돈을 더 벌지 않느냐?”.

    # 돈 잘 버는 학과 등록금 더 내라.

    UC 계열 대학들은 공학/경영학과 전공 학생들에게 다른 일반 학과 보다 더 많은 (연간 900 달라) 등록금을 부과하는 안을 오는 11/09 에 심의, 표결할 예정이다. 그 이유인즉 이러하다.
    “…공학/경영학 전공 학생들은 졸업 후 상대적으로 고액 연봉 직종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 해서, 그들은 앞으로 돈을 많이 벌게 될테니 지금 부터 미리 그 대가를 치르라는 것 이다.

    한편, 독일 어떤 민간 단체는 지금 “총 자산 50만 유로 (약 팔 억 5천 만원) 이상의 ‘부자’는 향후 2년 간 연 5%의 세금을 추가로 내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장동만 : 10/15/09 Rev.>
    :kr.blog.yahoo.com/dongman1936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3)
: 죽음의 고고학 考古學

이상철
(시카고 신학교 / 윤리학 박사과정)

지난 요약, 그리고 방향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지난 6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로 기인한 죽음에 대한 단상에서 비롯되었다. 이 글이 쓰여지고 있던 기간에도 우리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죽음, 구약학자 김찬국 교수의 죽음, 그리고 영화배우 장진영의 죽음을 경험했다. 처음에 글을 시작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톱스타 최진실의 자살, 좀 오래된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자살을 이야기하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재벌, 스타, 심지어 대통령까지 자살에 대한 압제와 억압에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 그렇다면 크리스챤으로서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글을 시작한다고 밝힌바 있다.
필자는 자살에 대한 논의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자살 역시 인간이 맞는 죽음의 방식(형태)이기 때문에 그러했다. 이런 이유로 지난 두 차례의 (웹진 9호, 11호) 글을 통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중세의 세계관과 근대철학, 현대 실존주의 철학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간략하게 진술하였고, 오늘 하이데거와 하이데거를 넘어가는 레비나스의 죽음이해에 이르렀다. 레비나스는 죽음에 대한 언급을 한 후에 자살에 대한 의견도 피력하는데 그 부분과 자살이 만연하는 한국사회의 자살현상학에 대한 부분은 다음달 마지막 주제를 위해 남겨둔다.


죽음에 대한 생각들 III: 하이데거

신적 디자인에 의해 움직여 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현실을 향해 내던지면서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실존주의적 인간유형은 하이데거에 와서 그 절정을 맞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는 ‘존재 망각의 역사’였다. 그는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을 향한 일방적 포획으로서의 서구 근대철학은 고전시대(그리스시대)가 지녔던 존재체험을 상실했다고 비판한 후,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녔던 근원적 존재체험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신전을 통해 신이 그 신전 안에 현전한다. 신이 이렇게 현전함 그 자체가 곧 그 구역을 하나의 성스러운 구역으로의 확장이자 경계지움이다.”[각주:1]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신전과 신상, 그리고 신화는 그들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들의 생활은 신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신화는 그들에게 있어 기억의 반복이자 현실의 원칙이었다. ‘신전을 세웠다’함은 근대적 의미로 궁극적 대상을 향한 인식론적 분투라 표현할 수 있겠지만, 고대 인들에게 있어서는 근대인의 그것과는 달랐다. 태초에 신이 먼저 있었고, 그 신이 임재하는 신전을 세움으로 대상과 의식의 합일을 도모했던 근대적 인식론이 아니라, 신전을 건축함으로써 비로소 신이 존재하게 되었고 신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말한 ‘신전을 통해 신이 그 신전 안에 현전한다’는 구절의 의미이다. 신전을 건축함으로 신의 세계가 열린 것(개시 開示)이다. 고대 헬라스인들은 신전을 만들어 신을 그 안에 안치시켰고, 그 공간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의 세계, 하이데거적 의미로 ‘생활세계’를 건설하였다. 이렇듯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녔던 생활세계는 실천적 해석을 전제로 하였고, 하이데거는 특별히 사물의 의미를 실천적으로 드러내는 실존적 주체를 ‘현존재 Dasein’라 불렀다. 


Episode:  개시開示 의 기억, 87년 6월

진리가 실존적 삶의 현장에서 개시되었던 사건은 역사상 무수히 많다. 문제는 그 이름없는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신이 신전 안에 현전한다’는 의미는 기독교식으로 ‘말씀이 육화되었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그런 사건이 있었다. 너무나도 또렷하고 생생하게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궁극적 진리의 현전을 봐버린 개시의 사건 말이다.
87년 6월이 그러했다. 당시 나는 고3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신촌에 있었는데, 학교와 집을 오갈 때 맡았던 매캐한 췌루탄 가스와 버스 밖 풍경들, 예들 들어 푸른 옷의 전경들, 닭장차, 괴물 같았던 페퍼포그가 질서 있게 혹은 난잡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며 우리는 현재의 전황에 내기를 걸곤 했었다. 이한열의 장례식이 열리던 날이었는데 그날 나는 학교에 안갔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신촌 일대에서 어슬렁 거리다가 무슨 일이 생길까봐 그날 임시로 하루 가정학습이라는 명목으로 놀렸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학교를 땡땡이 쳤던 것 같기도 하고, 고3은 학교에 나와 공부하라고 해서 공부하다 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분명한 것은 나는 그날 이한열 장례식에 있었다.
장례식 도중에 문익환 목사님이 등장하셨다. 아버지의 대학시절 스승이셨다는데, 아버지는 문목사님이 엄격하고 학문에 열중하셨던 구약 선생님이었다고 회고하신다. 유년시절 수유리 고모네 집에 놀러갈때마다  아버지는 고모네 옆의 옆집이었던 문목사님 댁에 먼저 들르셨다. 그 집 대문은 항상 열려있었다. 나도 따라 들어가 인사를 드렸는데, 문목사님은 집에 계시던 때보다는 안 계셨을때가 훨씬 더 많았다. 아버지께 ‘목사님 어디 가셨어?’라고 물으면 아버지는 ‘감옥에 갔어’라고 말해주었다. 바로 그 문익환 목사님이 감옥에서 출소하자 마자 이한열 장례식 연사로 나오신 것이다.
단상에 오르시더니 문목사님은 사자후를 토하시며 “장준하 열사여!…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독재정권하에서 죽어간 20여명의 이름을 하나씩 외치면서 그 넋을 하나씩 불러내기 시작하였다. 어렸을때 보았던 만화영화중 ‘이상한 나라의 폴’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폴이 4차원의 세계로 넘어갈 때 화면 전체가 빙글빙글 돌면서 폴이 무슨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이상한 나라로 입성하게 되는데 마치 그와 같았다. 문목사님이 죽어간 열사들의 이름을 하나씩 외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4차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폴처럼 새로운 세계로 빙글 빙글 돌아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에 모였던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로 엮어지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에네르기가 그곳을 휩쓸기 시작하더니, 곳곳에서 사람들이 오열하고, 가슴을 치고,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그러다가 탈진해 쓰러졌다. 내가 무엇을 알았을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바른 것 인지에 대한 이데아가 선재하고 있다가 우연히 87년 6월의 역사적 상황이 그것과 맞아떨어져 내가 그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와 정의와 자유라는 의미가 내 안에 각인되어 있다가 87년 6월에 불현듯 솟아올라 왔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다. 87년 6월 한복판에 내가 우연치 않게 그곳에 서있었고 그 광경을 보고 그 외침과 울음과 노래를 듣고 하는 과정에서 진리가 확 내게 다가온 것이다. 그 사건 이후 나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니 현전이니 개시니 하는 암호와 같은 말들을 만날 때 마다 87년 6월의 사건을 회상하며 그 의미를 반추한다.    
 

하이데거의 죽음 이해

궁극적 진리의 현전에 참여하는 주체, 즉 실존론적인 주체개념 하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조차 현실적삶이라는 것 안으로 끌어들여(선취하여) 사유한다. 인간은 태어나고 죽는 시간의 궤적을 따라 산다. 인간은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러한 세계를 자신의 품 안에 받아들이고 나름의 이해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 지평을 갖는다. 시간의 경과 속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그 벌어진 사건에 맞서는 인간의 응전을 삶이라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던져진 세상과 맞짱 뜨는 적극적인 측면과 자신이 던져진 세상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되어져가는 수동적인 측면을 모두 갖는다. 이런 점이 바로 하이데거의 주저라 할 수 있는 『존재와 시간』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죽음에 대한 불안을 자기 실존의 본질로 깨닫는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통해 인간은 “무”(Nichts) 앞에 서게 되며, 실존적 결단을 하고 깨어있는 본래적인 인간(존재)가 된다. 자신의 죽음을 앞질러 달려가 봄으로써 개시된 근원적 진리를 확인한 현존재가 비로소 전체로서의 진리(인간존재)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인간이해의 근본조건이다. 
종합하면, 하이데거는 존재가 현존재 속에서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는, 근원적 진리로서의 ‘개시開示’를 제시함으로써 대상과 사유의 일치라는 근대적 패러다임에서 성립하는 파생적 진리와는 다른 진리체험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죽음에 대한 그의 이해에도 영향을 끼친다. 인간의 존재가 인간의 현존재속에서 죽음을 선취함으로써 그 존재감을 온전히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인간은 온전한 주체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을 가능한 것처럼,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주체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들 IV: 임마누엘 레비나스, 하이데거를 넘어서

반면, 레비나스에게 있어 죽음은 하이데거와는 달리 주체가 주체로서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전체성과 무한 Totality and Infinite>과 <시간과 타자 Time and Other>에서 하이데거와는 다른 죽음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하이데거의 죽음은 마치 빛의 인식구조 안에 놓여있는 무엇이다: “죽음으로 향한 존재는 하이데거의 본래적 실존에 있어서 최고의 밝음이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최고의 남성다운 힘이다.”[각주:2]  레비나스는 하이데거가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의 양태를 설명하며 ‘최고의 밝음’, 즉 명증성(lucidity, lucid는 ‘빛나는, 밝은’을 의미)이라 표현을 썼다고 지적한 후, 하이데거 역시 서구 형이상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빛의 현상학’안에 있음을 꼬집는다. 
태양(밝음, 이데아, 근원적 진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형이상학의 동심원적 구조는 변방과 주변으로 갈수록 어두워지고 빛의 영향력을 점점 상실한다.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서구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그 대상들은 타자로 설정되었고 빛의 영역이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복과 타도와 착취와 왜곡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것은 ‘여성/이교도/흑인/유대인/장애자/동성애자/이주노동자’ 등등의 이름으로 치환되어 당대의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왔지만 기본적으로 똑같은 논리이다.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계몽주의’의 영어 스펠링이Enlightenment인데, 가운데에 빛을 의미하는 단어 ‘light’가 배치되어 있는 것도 중세를 암흑(타자)이라 상정하고 그것을 비추고 밝히는 의미에서의 ‘빛’이다. 이렇듯 서구 형이상학 곳곳에는 빛에 대한 동경과 집착이 짙게 베어있다. 하이데거가 서구형이상학에 대한 근원적 문제제기를 하지만, 레비나스가 볼 때는 하이데거 역시 서구의 인식론적 방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빛의 폭력’의 수혜자(or 피해자)인 셈이다. <계속>

ⓒ 웹진 <제3시대>

  1. 폰 헤르만,「예술작품의 근원」,『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이기상 옮김,(서울:문예출판사,1997), 583쪽. [본문으로]
  2. 임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서울:문예출판사,1996), 77-7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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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신학교에서 윤리학 박사과정 중인 이상철 선생께서 미국에서 출간된 흥미로운 신학서적 두권을 소개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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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aul S. Chung, Constructing Irregular Theology: Bamboo and Minjung in East Asian Perspective. Leiden/Boston: Brill, 2009.

GTU와 Wartburg seminary를 거쳐 이번 학기부터 Minneapolis에 있는 Luther Seminary로 학교를 옮겨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한신출신 정승훈 교수가 민중신학과 관련한 서적을 영문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중국민중의 ‘죽의 전통’을 한국의 민중신학과 해석학적으로 합류시켜 민중신학의 외연을 확대코자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인 듯싶습니다. 그 밖에도 불교와 도교등 동아시아 전통에서 발원된 해석학적 본류들이 어떻게 현대와 신학적으로 만날 수 있는지도 이 책은 더불어 모색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관련 사이트 주소를 링크시킵니다.

http://www.brill.nl/product_id31367.htm


2. Adam Kotsko, Zizek and Theology . NY: T&T Clark, 2008.

한국에서도 지젝에 대한 열풍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지젝은 미국에서도 광범위한 마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답니다. 지젝으로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설명할 수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올 정도입니다. 물론, 어느정도 과대포장 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젝의 글쓰기는 가히 인문학의 종합선물세트라 불립니다.
저와 함께 시카고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올 5월에 Ph.D 학위를 받은 Adam Kotsko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가 작년에 미국에서 진보적 신학책을 출판하기로 유명한 t&t clark출판사에서 <Zizek and theology>(2008)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Adam Kotsko는 시카고 신학교를 대표하는 학자라 할 수 있는 <Reading Derrida/Thinking Paul>의 저자 Ted Jennings 교수의 제자로서, 작년에 <Zizek and theology> 출판을 계기로 미국 진보신학계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 책은 본격적으로 단행본으로 출판된 지젝 관련 신학책으로는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젝 사유를 정초했다고 평가받는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The Ticklish Subject>, <The Fragile Absolute>에서부터 신학관련 주제를 논술한 <The Puppet and the Dwarf>까지 지젝이 지닌 사유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신학적 물음과 대답, 그리고 비판을 던지고 있습니다. 물론, 지젝을 이해하려면 많은 총알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칸트와 헤겔을 읽어야 하고, 프로이트와 라깡을 정복해야 하며, 맑스의 기운까지 느끼고 있어야 그때 비로소 지젝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사람들이 겁을 줍니다. Adam Kotsko가 쓴 <Zizek and theology>는 저와 같이 지젝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빙빙 지젝주변을 서성이기만 했던 사람들에게 지젝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작년 후반기에 이 책의 안내를 받은 후 지젝의 처녀작인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를 읽었습니다. 라깡에 대한 전이해가 있어야 되는 책이었는데, 지젝 사유 전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되는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래에 Adam Kotsko가 쓴 <Zizek and theology>에 대한 책 소개를 링크합니다. 저같이 지젝 주변을 서성이는 분들은 한번 클릭해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amazon.com/Zizek-Theology-Philosophy-Adam-Kotsko/dp/0567032442/ref=sr_1_1?ie=UTF8&s=books&qid=1244730560&sr=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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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한국교회 건축과 기독교 미술 탐사』

지은이_ 이정구
분야_ 인문/기독교/건축
발행일_ 2009년 9월 9일
크기_ 170×240
쪽수_ 256쪽(96쪽 칼라)
값_ 17,000원
펴낸곳_ 도서출판 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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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일본정신 - 일본서기에서 신영성운동까지』

지은이_ 이찬수
펴낸곳_ 모시는사람들
펴낸날_ 2009년 9월 20일
쪽수_ 208쪽
크기_ 223*152mm
값_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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