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한 해 동안 연구소를 후원해주신 회원님들을 모시고 회원의 밤 및 송년회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회원님들께서는 꼭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언제 : 2009년 12월 15일(화) 저녁 7시
               어디서 : 만해NGO교육센터(약도 참조)

               문의 : 02-363-9190, yminjung@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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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spam) 사회'
김신식
(《당대비평》간사)

우리는 ‘언어-에너지’의 과다 분비를 통해 많은 상처를 안고 산다. 나는 이러한 상처의 누적이 만연한 오늘날의 사회를 ‘스팸(spam) 사회’로 명명하려 한다. 하루에 2~30개씩 쌓이는 스팸 메일. 우리는 이 메일의 운명을 안다. 예견된 폐기의 운명 말이다. 2~3초의 순간에 폐기의 미래를 빗겨나기 위해 애쓰는 ‘스팸’ 생산자들의 ‘친절’ 전략은 고도화되어 가지만, 그럴수록 가깝게 다가오는 남모를 깊은 고독과 지속되는 실망감. 그것은 곧 시각의 피로감을 유발한다. 우리는 이런 피로감을 일찌감치 예방하기 위해, ‘외면’이라는 전략을 선택한다. 길거리에서 불과 몇 십 센티미터 간격을 두고 내 손에 쥐어지는 전단지들. 그 전단지를 개인의 손에 쥐어주어야 자신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 간의 어색한 접촉. 우리는 이 접촉을 통해 메시지의 무의미함을 체감한다. 그리고 내가 취해야 할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판별하고 학습한다. 메시지는 흩뿌려지고, 구겨지고, 거리에 쏟아진 구토물에 섞여 있다. 메시지는 오늘날 하루살이 아니 ‘일초살이’가 되었다.

이런 ‘일초살이’의 범람 속에서 내가 정작 걱정하는 것은, 구경꾼의 어떤 윤리이다. ‘말과 글’의 스펙타클이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 그 시대 속에서 사람들의 감각이 피로를 호소할 때, 우리는 이 피로감을 혐오로 교환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짧지만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짜증. 이 짜증은 메시지를 전달해야지 살아갈 수 있는 생활인들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결국 곧 구겨지고 거리에 버려질 전단지의 운명처럼, 제목만 보고 휴지통에 들어갈 스팸 메일의 그것처럼, 우리는 메시지의 비극적 운명을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사람에게도 덧씌우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구경꾼의 윤리 속 내면화된 상처에 대한 예방. 이 예방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시도되는 ‘외면과 무관심’이라는 행위. 이를 통해 정작 거리에서 자신의 생존을 외칠 수밖에 없는 이들 또한 곧 폐기의 운명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의미 없는 메시지의 굴레라는 구경꾼들의 인상에 갇힌 채, 의혹의 수술대에 오른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칼을 준비하여, 그들을 해부하려 한다.  ‘난’ 보았다. 그리고 알고 있다. 의료사고로 생긴 부작용으로 사회 생활을 못하는 어느 남자의 외침을, 경찰에 연유 없이 불법 연행되어 졸지에 방화범으로 몰린 한 대학생의 울분을.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저들은 그렇게 쳐다보여질 운명이라는 것을. 결국 우리는 망각의 약을 복용하기 위해 오른손을 내민다. 그러나 우리는 또 안다. 이는 우리네 삶의 ‘깔끔한 입’, 타자를 향한 ‘적당한’ 관심만이 내 삶의 안전망을 해치지 않는다는 ‘영민한 입’을 위한 부정과 부인의 과정임을.

‘스팸 사회’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피로감은 스스로가 ‘영민한 신체’가 되도록 부추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얻고 싶은 메시지를 얻고, 그 수확을 위해 쏟은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메시지를 과다하게 푼다. 소위 ‘뒷담화’라고 말하는 이야기 문화의 만연과 그것이 주는 상처의 과잉은 ‘스팸 사회’의 중요한 한 축이라고 생각한다. 순식간에 소비될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준비하기.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타인의 사생활에 별점을 매기고, 20자 평을 남기기. 여기엔 어떤 친밀성과 내밀성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있다. 말을 해야 하는 상황. 메시지가 없는 자리가 어색하고, 그것을 언어로 채워야 할 상황에서, 내 삶의 안전망을 해치지 않는 차원의 언어 공간을 창출하기. 그것을 위한 가장 손쉬운 전략은 타인의 내밀함을 교류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고로 현대인은 이장욱의 소설 제목처럼 ‘고백의 제왕’이 되어가고 있다. 짧은 시간 소비되고 잊혀질 수 있으리라 예상되는 소재들을 진열하고, 개인은 그 진열된 이야기의 풍요를 느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풍요 속에서 주고 받는 ‘빈 말’의 미래를 체화한다. 정이현의 소설 한 구절이었던가. “언제 한 번 보자”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중요한 '예의 있는' 거짓말이 되었다고. 진언과 허언의 경계가 사라진 언어 에너지의 과다, 혹은 그 둘의 경계를 만들어 의혹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위무하려는 개인들. 우리는 물론 이 개인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이 '허언'을 둘러싼 사람들의 냉소와 체념. 그것을 도모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두렵고 무섭다. 2008년 이후,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보여주는 ‘빈 말’의 정치. ‘허언’의 운명을 타고난 ‘공약’이 “그것은 오해입니다”로 일갈되는 그들만의 소통을 생각해본다. 사람들에게 이 국가와 이 사회에 대한 정치적 메시지가 ‘휴지통’에 쉽게 버려질 운명에 처한 지 오래인 지금. 우리 사회는 메시지라는 존재에 지쳐 있는 듯하다. 그리고 무기력해져 가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 이 ‘스팸 사회’속에서 상처받지 않을 것 같은 ‘빈 말’이 환영받고, 무관심의 상처를 가진 자들의 호소와 분노는 ‘빈 말’ 취급을 당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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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 한숨결교회 열두 번째 예배 메시지

우리에게 여전히 진리가 필요하다면.......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빌라도가 예수에게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오?” (요한복음 18:38)
당신들이 진리를 알지니, 그 진리가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8:32)


1. 진리가 무엇이기에?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38절까지의 본문은 “빌라도의 심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가 빌라도 앞에 서게 되어 그로부터 심문을 당하는 이야기는 네 복음서 전체에 모두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역시나 이 부분에서 다른 복음서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딱 한 가지만 질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러자 예수는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합니다(23:3). 마가복음과 마태복음도 동일한 질문과 답변이 한차례 오고가고, 다음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예수가 고발을 당하는데도 정작 자신을 위한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고, 빌라도는 예수의 이런 침묵을 놀랍게 여기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와 빌라도 사이에 최소한 네 차례의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까진 공관복음서와 동일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8:33). 그런데 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공관복음서와 전혀 다릅니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말은 너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너한테 해 준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냐?” 예수는 빌라도의 질문을 다시 자신의 질문으로 바꾸어서 빌라도에게 던집니다. 이번에는 빌라도가 답변을 합니다. 누가 심문을 하고 누가 심문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빌라도가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 대답은 다시 예수를 향한 질문이 됩니다. “내가 유대인이냐? 유대인도 아닌 내가 니가 유대인의 왕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그리고 또 묻습니다. “니네 나라 사람들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나한테 재판하라고 넘겼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들이 너를 나한테 넘긴 것이냐?”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뭘 했는지는 말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만 말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이 말은 정확히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단순히 세속적인 의미의 왕국에 반대되는 영적인 왕국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간적인 구조에 대비되는 그런 나라입니다. 왕국은 왕국이되, 지금 여기의 시간대, 즉 세상에 속하는 왕국이 아니라 도래하고 있는 종말론적 시간의 구조 안에 있는 그런 나라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빌라도가 제대로 알아들을 리 만무합니다. 그는 재차 묻습니다. “됐고! 그러니까 니가 왕이라는 것 아니냐?” 예수는 대답합니다. “그래. 맞다. 나 왕이다. 내가 왕이 되려고 태어났고, 왕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증거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면 내 말을 알아 듣게 되어 있다.” 그러자 빌라도가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하게 묻습니다. “진리가 뭥미?” 예수와 빌라도의 문답이 시종일관 뭔가 엇박자를 내고 있다가 드디어 빌라도가 예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핵심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답변이 없습니다. 예수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과연 무엇이라 답변했을까요? 혹시 다른 복음서에서처럼 침묵했을까요? 오늘 메시지의 초점은 예수에게 진리란 무엇이었고, 나아가 예수의 그러한 진리 이해가 오늘 이곳의 우리 한숨결교회에 어떠한 성찰의 여지를 제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는 데 있습니다.

2. 정말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했던가요?

요한복음에는 진리, 곧 알레떼이아(αλληθεια)라고 하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합니다. 알레떼이아가 신약성서 전체에서 98회 정도 등장하는데, 요한복음에서만 무려 20회나 등장합니다. 바울 서신을 다 합쳐도 44회 정도 나오고, 공관복음서 세 권을 다 합쳐도 7회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요한복음 저자가 얼마나 이 단어를 선호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요한복음 어디에서도 진리가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세례 요한이나 예수가 이 진리에 대해 증언하러 왔는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고, 예수가 곧 진리이며, 예수 혹은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을 향해 나아가고, 진리로 사람들은 거룩해질 수 있다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물론 이런 얘기 갖고는 진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진리를 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예외적으로 주목한 만한 진술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8장 32절의 “당신들이 진리를 알 것이니, 그 진리가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처음 듣는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유명하여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들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해봅니다. “진리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그것이 곧 진리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쉽지 않습니까?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 그것이 곧 진리이며,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면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데 정말 그렇던가요? 여러분은 진리를 앎으로 인해 과연 지금 자유롭습니까? 요한복음의 문맥에서 진리를 안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을 때,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이 순간에도 여러분은 충분히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진리는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라고 예수는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경험 속에서 진리는 별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 적이 없습니다. 외려 진리는 우리를 더욱 숨 막히게 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그렇겠지만,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진리는 더 이상 가슴 설레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간 진리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폭력과 야만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종교는 진리를 참칭하면서 자유를 억압해온 대표적인 집단이었습니다.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이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종교에 내재하는 진리와 자유 간의 관계의 역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만큼 무서운 자도 없는 법입니다. 진리를 살리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지요.

흔히 철학적인 의미에서 진리라고 하면 적어도 ‘참되고 옳은 것’, 더 나아가 그 무엇을 바로 그렇게 ‘참되고 옳게 하는 것’이라는 최소한의 정의를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참됨과 옳음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나 기준이 여전히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정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답이 있을 수도 없는 그것에 대해 역사는 어떤 특정한 것이 진리라고 강요해왔고, 그렇게 강요된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구속하고 억압해왔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에 진리는 이제 진부한 것이고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굳이 기독교 신앙적 맥락에서 진리라고 할 수 있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어도, 사람들은 진리 일반에 대해 더 이상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진리?!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포스트모던 사상의 물을 조금이라도 먹고 나면 그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사고를 대변하는 아이콘은 단연 20세기 최대의 회의주의적 사상가라 할 미셸 푸코가 아닐까 싶습니다. 폴 벤느(Paul Veyne)라고 하는 역사학자에 따르면, 푸코는 죽기 25일 전 가진 대담에서 그러한 면모를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대담자가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어떤 보편적 진리도 긍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신은 회의주의자 아닌가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푸코는 너무 일반적인 모든 진리, 시간을 초월한 우리의 모든 거대한 진리를 의심했습니다. 푸코가 겨냥하는 그런 의심스러운 진리의 범주에 기독교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때 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각 개인에게 경험된 그런 차원의 실존적인 신앙 대상으로서의 예수가 아닙니다. 차라리 세상의 모든 지식과 원리 위에서 작동하는 초월적인 규범이자 명제가 되어버린 ‘교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렇게 교리로서 정착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개념은 세상이 변하고 상황이 달라지고 믿는 사람의 삶의 자리가 아무리 바뀌어도 그 자체로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들은 그와 같은 형식으로 믿고 계십니까? 제가 아는 한 이 자리에 그런 교리적 진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계신 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교리적 근본주의자를 자처하는 분은 계시지만, 제가 보기엔 결코 근본주의자가 아닙니다. 근본주의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익히 경험해본 바 교리적 근본주의자는 종교적으로나 신앙윤리적으로 어떠한 자유의 여지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까지 허락하지 않는 철저함을 보여줍니다. 그 철저함이 없다면 결코 교리적 근본주의자일 수 없습니다.

다시 본래의 맥락으로 돌아와서 교조적인 의미 혹은 고전철학적 의미에서 진리를 이해했을 때,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예수의 말은 더 이상 진리일 수 없습니다. 예수가 말한 진리를 새로운 개념적 현실에서 해석하지 않는 이상, 예수의 말은 우리에게 아무런 매력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적인 철학의 진리관을 그대로 따라서, 예수가 말한 진리를 받아들일 경우, 진리란 동일성, 보편타당성, 객관성, 만물의 본질, 영원불변성, 안정성, 초월성....... 뭐 그런 것에 다름 아닌 것일 텐데, 그러한 진리는 언제나 자기 이외의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자기충족적이기 때문에, 따라서 다른 존재 내지는 다른 특성이 끼어들 여지를 찾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자유가 허용되고 행사될 공간을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진리와 자유는 결코 양립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가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우리의 상식 속에 자리 잡은 그런 의미의 진리 개념으로는 결코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말을 틀렸다고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갖고 있는 진리에 대한 상식적인 편견부터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진리라고 전제를 해야 합니다.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즉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같음’의 진리란 그저 맹목적인 순종만을 강요하는 교리일 뿐, 주체적인 혹은 주체 각자의 성찰과 고민의 결과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신앙고백에서 교리적 고백이 무의미한 것은 교리는 주체의 개별적 경험과 상황적 특수성을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보편지향적이지 개별지향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진보적인 신학자는 진리와 자유의 관계의 위상을 역전시켜, 이제는 “자유가 너희들을 진리하게 하리라”는 도발적인 명제를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자기절대화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무조건적 진리를 거슬러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개별적인 다름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자유에 상대적으로 더 무게를 실어주자는 것입니다.

3. 다시, 진리가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하다면

자, 그럼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진리를 이제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요? 과거 우리가 알고 있었던 그런 의미의 진리에서는 결코 자유로움을 찾을 수 없었기에, 우리는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진리라는 새로운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새로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모든 것이 다 진리인 것이냐는 것입니다.

사실 진리에 비해서 정의 내리기가 더 어려운 것이 바로 이 자유라는 개념입니다. 단순히 억압이나 강제가 없는 상태라는 소극적 의미에서의 자유에서부터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선택할 수 있는 적극적인 행위로서 자유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자유의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자유라고 하면 개별적인 다름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저마다의 길을 갈 수 있는 조건이나 능력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는 서로 간에 다를 수 있는, 아니 다를 수밖에 없는, 조건과 상황에 주목하는 요소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의미의 자유가 현대 사회에서는 정치적 실천의 차원이나 사상적 신념의 차원 보다는 고용의 자유, 해고의 자유, 투자의 자유, 소비의 자유, 통치의 자유 같은 자본주의적 의미로만 통용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하여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더욱 친숙한 자유는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같은 것 보다는 말그대로 소비생활의 자유, 즉 원하는 만큼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자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자유를 우리에게 허락해줄 수 있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결국 진리 중의 진리는 ‘자본’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에서 자본으로 진리가 바뀌는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리면, 애써 지금껏 우리가 진리의 개념을 자유의 맥락에서 되살리려 노력했던 것도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인 의미에서 진리를 새롭게 발견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열심히 각자 돈 버는 데 더 매진하고, 교회는 그 자본이라고 하는 진리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강화하기 위한 모임으로 활용하면 될 뿐입니다.

우리 한숨결교회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앞서 말한 그런 의미에서 진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믿고 있는 교회는 분명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리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자기 삶의 특정한 맥락과 상황성에 대한 고민 없이 전통적으로 교회가 신조화한 그대로 예수를 고백하겠다는 것이며, 또한 성경을 교리적으로 해석하겠다는 것은 성경에 대한 모든 역사적, 문학적, 이데올로기적 비평과 재해석을 포기하겠다는 것일텐데, 그러한 모든 것들은 결국 생각이나 고민 따위는 없이 그냥 교회에서 말하던 그대로 기독교를 계속 믿겠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제가 단언컨대,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자고 굳이 한숨결교회에까지 나오고 계신 분은 없을 줄로 압니다. 우리가 더 이상 교리적 진리로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할 때, 그 말 속에는 각자가 경험한 하느님의 다른 얼굴과 신앙사건의 다른 결들,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의 역사성과 영토성에 대한 인정, 기독교 내의 다양한 분파와 전통에 대한 인정, 성서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 타종교와 종교 이외의 다양한 문화와 현상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누미노제의 가치, 기독교만이 절대적인 보편 진리이고 구원의 길이라는 사고의 거부 등을 일차적으로 긍정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일단 진리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을 몸으로나 삶으로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유로움을 용납하지 않는 그런 교리적 진리의 차원에서 기독교를 믿고 있는 분은 이 자리에 결코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무조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그런 사람들은 또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획일적인 같음을 강요하는 진리에 반대하여 차이와 다양성의 자유를 옹호한다고 해서, 자본이 약속하는 그런 삶의 자유를 진리로 절대화하는 그런 이들도 아닐 것입니다. 그럴 것이면 굳이 한숨결교회를 만들고 예배를 나눌 이유도 없었겠지요.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자유의 가치를 끝까지 옹호하는 사람들이고, 더 나아가 자유롭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우연히든 아니든) 일치하여 여기까지 모일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또한 다른 이들처럼 역설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절대적 진리의 억압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 자유의 옹호가 자본의 자유와 같은 무질서의 자유와 혼동되어 결국 모든 것이 진리일 수도 있으며,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진리라고 한다면 굳이 진리라고 할 만한 것이 세상에 더 이상 없다고 하는 상대주의 내지는 허무주의에 빠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라고 하는 가치를 완전히 버리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진리를 버린다는 것,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가치, 혹은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어떤 삶의 양식이 갖는 가치를 버리는 것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진리에 대해 다시 한 번만 생각해보자고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한숨결교회를 통해서 교회라고 하는 것 혹은 기독교적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돌아보자는 뜻에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진리를 새로운 사고의 빛에서 재해석해보자는 것, 기독교적 신앙 혹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한숨결교회의 맥락에서 우리 나름대로 새롭게 만들어나가 보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이 진리에 대한 예수의 개념 규정이라고 했을 때,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진리를 주어로 놓았을 때 술어는 “자유롭게 할 것이다”가 됩니다. 여기서 술어의 시제는 현재형이 아니라 미래형입니다. 진리란 현재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진리는 지금 현재의 차원에서는 영원히 알 수 없는 미지(未知)의 것입니다. 오직 미래의 차원을 향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유교의 고전 『중용』에서는 미발(未發)을 천하의 바탕(本)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알려진 것[기지(旣知)], 이미 발한 것[이발(已發)]은 오직 아직 알려져 있지 않고(미지), 아직 발하지 않는 것(미발)을 근본에 두어야 제 위치를 잡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지와 미발로서 진리는 현재에는 아직 없고 오직 미래에만 있을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가능성으로서 혹은 잠재성으로 엄연히 현실 안에 있고, 현재와 현실의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현재와 현실에 ‘나아갈 바’, 즉 지향성을 줍니다. 그래서 저는 진리를 ‘이것이면서 동시에 그 너머’라고 일컫습니다. 풀어 말하면 ‘이것이면서 동시에 그 너머’란 ‘그 너머(미지)에 대한 지향을 근본으로 ‘이것(기지)’을 조율한다는 뜻입니다. 미지는 늘 현실의 바탕에 있고, ‘자유롭게 함’으로서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 너머’에 대한 운동적 지향의 가장 포괄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 한숨결교회가 모종의 지향성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어 왔습니다. 저는 우리의 지향성을 굳이 찾자면 바로 이러한 미지의 차원에서, 다시 말해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서의 진리”라고 하는 현실 너머의 현실에서 찾고 싶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만들어갈 자유로움에 의해 규정되는 그 어떤 것입니다. 진리는 실체가 분명한 물질명사가 아닙니다. 추상명사로서 진리라고 하는 주어의 의미는 오로지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는 술어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그 진리라는 것, 결국 우리가 지금부터 앞으로 만들어 나가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교리로서의 진리, 우리와 상관없이 과거에 누군가에 의해 이미 확정된 그런 것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진리를 우리 마음대로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 진리는 우리를 언제나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어떤 것이 참된 자유인지를 모릅니다. 결국 우리는 미래의 진리를 지향하기 위해 자유로움에 대한 모험을 함께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리로서의 진리를 버리는 것만으로는 아직 자유로움에 도달하기엔 부족함을 많이 느낄 것입니다.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 동시에 더 적극적으로 무엇을 향한 자유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적극적인 자유로움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최소한 우리의 자유가 자본의 자유는 넉넉히 넘어설 수 있는 그런 자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유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누릴 것이며, 그 자유를 누림이 우리에겐 즉각적으로 새로운 진리가 될 것입니다. 저는 한숨결교회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그 과정에서 진리를 새롭게 알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고, 교회라고 하는 그 이상적 공동체를 새롭게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한숨결교회가 자유의 공동체, 진리의 공동체, 아직 단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그런 미래의 교회공동체가 되어 가기를 꿈꿉니다.

우리가 그러한 꿈을 함께 꾸는 그 순간부터 그 미래는 우리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 곧바로 자유인으로 삽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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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해츨링
    2010.01.06 00:4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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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글 보고갑니다.
    저에게 있어서 '완성형'이라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해주는 글이였던것 같습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최종)
: 자살공화국, 대한민국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지난 6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계기로 시작된 졸고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자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필자는 글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살에 대한 물음은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느꼈고, 이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중세의 죽음관, 근대철학, 하이데거를 중심으로 한 실존주의 철학에서 나타난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였다. 지난 호에 하이데거를 넘어가는 레비나스의 죽음이해를 다루었고, 이번 호에 한국 사회의 자살현상(학)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글을 마무리 짓는다. 글을 연재하면서 죽음의 계보학을 거슬러올라가며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내 나름대로 정리도 해보고, 어설프게나마 자살의 원인을 추적하면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당사자들이 느꼈을 절망의 깊이에 대해 가늠해보지만 여전히 그 결론은 지난하여 길을 잃고 있다.

자살공화국, 대한민국
통계에 의하면 작년(2008년)에 12,027명의 한국인이 자살했다고 한다. 하루 평균 33명이 바위에서 떨어지고, 목을 매고, 약을 마신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대통령, 스타, 재벌에서부터 비정규직 노동자, 장가 못간 시골총각, 어린 중고등 학생들까지 우리사회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자살에 노출되어 있다. 이는 인구 10만명 중 24.8명에 해당되는 수치로 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거의 1~2위를 다투는 수치라고 한다. 자살은 한국인의 사망원인 중에서도 암, 뇌혈관질환, 심장질환에 이어 네 번째 순위에 위치한다.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보다 더 많은 숫자라고 하니, 외출하는 식구들에게 ‘차 조심하라’는 말보다 ‘자살 하지마’라는 경구가 더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왜 자살을 할까?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문제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무엇이 우리를 기꺼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될 만큼 모질게 만드는가? 혹자들은 살기 힘들어서 죽는다고 한다. 물론 살기 힘들어서 죽는다. 하지만 세계에서 제일 가난하다는 방글라데시나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자살율이 높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삶에 대한 만족도 부분에서는 우리보다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단순히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자살한다고 둘러대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통계를 분석한 사람들에 의하면 한국의 자살율은 매우 독특한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고 한다. 1995년 통계에 의하면 4,840명이 자살하여 인구 10만 명당 11.8명 꼴이었는데, IMF를 겪은 1998년에 10만 명당 자살율은 19.9명으로 거의 배로 급성장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2005년 인구 10만 명당 26.1명으로 세계 최고로 등극하였고, 작년 2008년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인구 10만 명당 24.8명이라는 세계정상급의 자살율을 자랑하고 있다. 이상의 분석에서 보듯이 IMF로 대변되는 지금의 (금융)자본주의가 한국사회의 자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늘어나는 수명과 반비례하여 줄어드는 정년,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그토록 고무 찬양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인간의 욕망을 저당잡고 팽창하는 암세포 같은 금융 자본. 이렇듯 현재의 자본주의는 아무런 저항과 대응논리 없이 민중들이 짜낸 기름을 동력으로 활활 타오르고, 더 짜낼 기름이 없는 민중들은 어쩔 수 없이 자본이라는 제단 위로 몸을 던져 스스로 자본의 불쏘시개가 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한다. 

‘불가리스~’를 기억하시나요?
십 여년전 “불가리스~”하면서 경쾌하게 시작되던 광고가 떠오른다. 화면은 어느 유럽 촌동네를 비추면서 그 동네에 유독 장수하는 노인들이 많다는 사실, 그리고 장수의 원인을 추적하였더니 그 지방 특유의 발효식품 ‘불가리스’가 장수의 원인이었음이 밝혀졌다는 사실을 전하며, 광고는 다시 경쾌하게 “불가리스~” 를 외치며 끝이난다. 기능성 요구르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불가리스’를 세상에 처음 알린 이 광고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있다.  
광고의 배경이 되었던 지역은 터키와 그리스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불가리아에 속해있는 마을이다. 불가리아 남쪽에는 해발 천 미터 이상 되는 고산지역을 따라 장수촌이 분포하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스몰랸’ 지방의 ‘바니테’라는 마을이다. 이 지역은 인구 1000명당 38명이 100살이 넘는다고 한다 (1990년 이전 통계에 의하면). 장수의 원인을 분석했는데 공기 좋은 고산지대에 살면서 적당한 노동과 운동, 채식 위주로 조금씩 자주 먹는 식습관, 그리고 이 지방 특유의 발효유, 즉 요구르트를 주식과 함께 자주 먹는다고 한다. 이것이 기능성 요구르트 ‘불가리스’의 탄생 배경이다.
그러나 지금 그 지역은 장수촌이 아니다. 요구르트의 효험이 다한 것인가? 1990년대 소련붕괴 이후 사회주의 경제원칙을 근간으로 하던 동구 유럽은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급박하게 자본주의 내지 자본주의 색채가 강한 경제 시스템으로 그 체질을 전환한다. 불가리아는 다른 동구유럽 국가에 비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으로 전환이 늦었지만 자본의 원칙은 어김 없이 그곳을 비껴가지 않았다. Global Capitalism이라 불리는 새로운 자본주의는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어 놓고, 노동, 자본, 재화, 정보의 흐름과 교환을 100% 시장에 맡겨버렸다. ‘무한경쟁’, ‘2등은 기억되지 않습니다’ 등 당시 등장했던 광고 문구들은 난장판이 되어버린 시장, 상도가 무너져 개판이 되어 버린 세상을 향한 찬미 내지는 진혼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인간을 무한 경쟁의 약육강식의 논리로 재편하려 하는가? 기억되는 않는 2등, 3등, 4등…꼴등은 어찌 살란 말인가?
하지만,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은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그 경과에 맞추어 불가리아에 있었던 장수촌도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90년대 이후 진행되었던 동구 유럽의 자본주의화와 발맞추어 노인들의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이제는 예전 불가리아 장수촌지역과 다른 지역의 장수노인의 비율이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왜 불가리아의 장수마을은 사라졌을까? 그래도 예전에는 부족하지만 일정량의 양식이 인민들에게 정기적으로 분배되어 가슴을 졸이지 않아도 살아 갈 수 있었는데, 새로운 경제체제하에서는 날고 뛰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먹을 것이 전보다 많아지고 다국적 유명 브랜드들이 거리를 메우면서 우리에게 많은 기회를 선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잠시라도 정지하는 순간 우리는 금방 도태된다. 이 강압을 자본의 원칙에 노출이 적었던 순박한 불가리아 산골 사람들은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굳이 실패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향수를 들먹이는 것은 아니지만, 위의 예가 한국 사회의 자살현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본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 !
IMF이후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는 진정한 계급사회로 진입하였다. 더 철저하고 완고해진 부와 지식의 대물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속담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실례로, 필자가 유학하고 있는 시카고에 있는 유명한 사립대학인 Northwestern 대학과 Chicago 대학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의 부모들은 거의 대부분은 대학교수, 의사, 변호사, 대기업 임원, 정부 관료의 자식들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교수들의 증언에 의하면 IMF이전에는 그래도 장학금 받고 아르바이트 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이 많이 있었는데, IMF 이후 달러강세, 미국 경제 악화로 인한 미국 대학의 인터내셔널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 축소 정책 이후 이른 바 미국 내 명문대학 (명문 대학들은 대부분 비싼 학비를 자랑한다) 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우선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재력이 있어야 미국유학을 올 수 있다. 당연히 있는 집 자제분들 아니면 꿈도 못꾼다. 이렇게 세습된 부와 지식의 혜택을 받은 젊은이들은 해외유학 이후 유망한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강남 아파트에 살면서 외제차를 굴린다.
반면에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그럭저럭 지방대학 나온 청년들은 취직도 잘 안 될뿐 아니라, 설사 취직이 되었다 하더라도 비정규직으로 88만원 세대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힘겨운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의 교육은 전인교육을 목표로 하고, 시골의 야심 찬 어린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통로가 아니라, 부모의 계급과 재산과 지식을 대물림하는 확고한 계급재생산의 도구로 변질되었다. 심지어는 교회조차 아버지 목사에서 유학 갔다 온 아들목사에게로 대물림되어 유전된다. 한국 사회는 이렇듯 성(聖)과 속(俗), 모든 영역에서 급진적인 양극화 단계로 진입하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버거움
미국 진보신학의 성취라 평가되는Womanist Theology와 Queer Theology는 서구 사회에서 오랫동안 배제와 억압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던 인종(Race)과 성(Sexuality)의 정체성, 그리고 그로 인한 폭력의 (철학적, 신학적, 정치적, 사회학적)구조와 연쇄고리에 대한 폭로를 시도한다. ‘나의 피부색깔과 내가 지닌 성적 정체성은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다분히 태생적이고 존재론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태어나 눈을 뜨자 마자, 평생을 살아갈 이 세상에서 내가 어느 특정한 곳에 위치되어져야 함을 본능적으로 직감했을 때 느꼈던 서늘함과 분노와 좌절을 그대들은 아는지? 흑인으로 그것도 흑인 여성으로 살아왔던 내 삶을, 동성애자 신학자로 목회자로 내가 교계와 신학계에서 받았던 ‘특별한 관심(?)’을 이해하겠느냐?’는 질문들을 접하면서 내가 들었던 생각은, 성격과 강도가 다르긴 하지만, 2009년 현재 한국사회의 고착화된 계층구조 역시 한국이라는 틀 안에서 이미 확고한 존재론적인 함의와 법칙을 띄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상고 나와서 고시 공부해서 나중에는 대통령까지 되었다는데, 이명박도 노가다 뛰고, 노점상 하다가 대통령 되었다며,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껄껄거리며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그 희망은 이미 부와 지식을 대물림한 사람들의 것이다. 옛날에는 소 팔고 논 팔아서 자식 교육 시키면 가난한 필부의 자식들도 판검사, 의사 되고, 배 나온 사장님도 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희망이 없다. 존재론적으로 태생적으로 한국사회의 판이 전보다 더 (운명결정론적으로) 촘촘히 빽빽하게 짜여진 까닭에 초등학교 6학년이면 삶의 윤곽이 대충 판가름난다. 역전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쭉 가는 거다. 그래서 인생은 버겁다.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승부는 이미 정해져있다. 예정된 패배를 경험하고 난 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낙오자라는 낙인, 가난을 혹은 좌절과 실패를 오직 그(녀)의 무능과 책임탓으로 돌려버리는 사회풍토,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잣대가 되어 그 절정을 구가하는 사회가 지금의 한국사회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은 단순히 가난하고 남루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존엄을 스스로 불신하고 혐오하기에 이른다.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하고 앞으로 잘 될 가능성과 희망이 없다손 치더라도 옛날 사람들은 꾸역꾸역 자신들의 삶을 그럭저럭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지금은 그렇지 못하는 거지?  가난한 사람들끼리, 못난 사람들끼리,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끼리 막걸리 한 사발, 소주 한 잔에 취해 육두문자 섞어가며 한바탕 걸하게 놀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오곤 했는데, 그래도 세상은 별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사람들끼리 부딪쳐 사는 맛에 현실의 고통과 모욕을 겨우겨우 버티어 낼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 공동체(성)도 사라졌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희망도 없고, 자신에 대한 존엄성도 없는 개인, 이런 개인들끼리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공동체) 조차 확보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이 2009년 자살율 1위를 자랑하는 한국 사회의 자화상인 셈이다.  

에필로그: 레비나스의 제안, 그리고…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발견했다는 레비나스는 자살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유대민족 특유의 메시아사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죽음이 인간 실존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 근거하고 있는 한, 죽음의 압제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전통에서 메시아의 구원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날이 오면 우리를 짓눌러온 모든 폭압의 구조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그 날이 오면 지금까지 불확실했고 불확정적이었던 사건과 역사의 진리들이 낱낱이 밝혀질 것이다. 진리와 심판의 순간과 더불어 시작되는 새로운 나라에서는 더 이상 죽음이 우리를 삼키지 못한다. 
레비나스는 이 메시아적 도래를 현실에서의 ‘타자의 얼굴’로 치환한다. 우리의 동심원적 의식의 범주안으로 포획되지 않는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것을 ‘책임’이라 부르든, ‘제1철학’이라 부르든, 그것이 바로 메시아적 도래를 체득하고 경험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죽을 수 없고 죽어서도 안 된다. 그러기에 살아남아서 인간을 무한경쟁의 난장판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의 야만성과 싸워야하고, ‘2등은 기억되지 않는다’는 원칙 하에서 정글의 법칙을 습득해가는 우리의 아이들을 구해내야 한다. 그것을 이루어가는 하나 하나의 과정과 사건의 연속이 메시아적 도래이고 죽음의 극복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누구 말처럼 올 한해 대한민국은 1년 내내 상중이었다는 말이 과장만은 아닌 것 같다.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의 죽음은 그 이름이 곧 시대였고, 당대 의식을 규정했던 별들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큰 상실이고 슬픔이었다. 그 밖에 용산참사로 돌아가신 여섯 분의 죽음과 배우 장자연의 죽음은 2009년 한국 사회의 단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죽음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어떻게 죽었는가?’는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반증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노무현의 죽음에서 그가 지녔던 삶의 치열함과 비장함을 보았고, 용산의 죽음에서는 민중들이 지니는 한과 울분을 다시금 깨닫는다. 이렇듯 우리가 그들의 죽음을 삶만큼이나 주목하는 이유는 죽음이 가장 그들의 삶을 가장 정제된 언어와 압축된 밀도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죽음이 우리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형성케한다. 어쩌면 역사는 이 진리를 계속 증언하여 왔는지도 모르겠다. 예수의 죽음이 그랬고, 전태일의 죽음이 그랬으며,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 그렇다. 그렇게 죽음은 부활하여 우리를 깨어있게 하고 지금 우리와 함께 맞물려 살아있다.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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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멜로디, 아리랑

구현경
(군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

지난주 토요일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이중 언어학회’의 열네 번째 국제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학회의 주제는 ‘국제어로서의 한국어, 그 교육의 전망과 도전’이었고 아침10시부터 저녁 5시까지의 일정 중에서 제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주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중앙아시아 3국의 한국어 교육-우즈베키스탄현지 한국어 교육 기관의 교실 분석을 중심으로>이라는 발표였는데요 그간 제가 참석했던 학회 중에서 가장 실질적으로 제게 도움이 된 학회였다는 평을 해봅니다.

이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저는 학교가 있는 전라북도 군산에서 금요일 늦은 저녁에 서울행 버스를 탔습니다. 홀로 서울에 가기 전 같은 과 동기에게 함께 가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손사래를 치며 피한 것입니다. 학회 프로그램을 보고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서 같이 가자고 제안한 것뿐인데 그렇게도 싫어할 줄이야. 아마도 제 또래들은 ‘학회’라는 것에 대한 인상이 ‘별로’좋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는 왜 거길 갔느냐고요.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듯 제가 선택하는 일에도 그러한 것이 작용했던 겁니다. 제 꿈은 ‘세계적인 국어학자’입니다. 지금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제 과동기가 생각하는 재미도 감동도 없는 ‘학회’처럼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씀드리기 조금 쑥스럽고 민망하지만 뭐, 사실 저는 대학교에 진학하기 이전부터 그려왔던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이란 것이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변함없고요. 쉽게 말씀드리자면 제 꿈은 이겁니다.

“국립 국어원 교육진흥 부 연구원(더불어 해외 근무에 적합한 한국어 교원)”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도 ‘국립 국어연구원(국립국어원)까지는 알겠는데 거기서 뭘 하는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대학원석사과정을 마친 뒤 ‘국립국어원’에 입사할 계획입니다. 그래서 2년간 한국에서 근무한 뒤에는 ‘중앙아시아’에 한국어 교사로 파견되어 가는 것이 제 꿈의 최종 목표점입니다. 이렇게 제 목표와 계획에 대해 말하면 대부분 왜 하필, 그 나라에 가느냐고 묻습니다. 물론 그곳에는 제가 잘 아는 사람이 있거나 생활환경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제 발걸음이 그곳을 향합니다. 아직 확신에 찬 발걸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곳을 알게 된 이후 끊임없이 몸과 마음이 향하는 곳을 보면 항상 ‘거기’입니다. 제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그들이 하는 말 역시 제가 이해할 수 있는, 그럼에도 저는 ‘한국인’이고 그들은 ‘고려인’ 혹은 고려인 2,3세들로 불러지는 현실. 왜냐하면 그들이 숨 쉬는 곳 역시 ‘대한민국이’ 아닌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 카자흐스탄’이거든요. 그들이 ‘억지로’ 혹은 어쩌다가 그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는 어린마음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부쩍 꿈이 자주 바뀌던 초등학생 시절을 지나서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국어와 관련된 그 어떠한 일이라도 좋다.’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해가 거듭할수록 더욱 구체적인 틀을 만들어 가게 되었고 처음과 달리 선생님이 되겠다는 생각은 어느덧 국어학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다 우연히 TV프로그램을 통해 보게 된 그들의 삶 속에 녹아있는 ‘자유’를 보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한민족, 한뿌리’라는 친근함을 포장한 울타리 안에 갇히고자 하는 것에 비하면 저들은 확실히 달랐습니다. 똑같은 ‘아리랑’을 불러도 그들과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없어보였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저들은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듯 보였으니까요. 우리는 ‘내’가 아닌 남들과 견주어 결핍감을 느낄 때 어쩐지 ‘나만’ 부족한 것 같은 피해의식에 몸서리를 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브라운관을 통해 전해지는 그들의 모습은 작은 것 하나에도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더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위로받는 모습에서 진짜 하나 되는 그들을 보았습니다. 비바람을 막을 만한 공간도 없이 황량한 뜰에 임시로 천막을 치고 불편한 책걸상에 앉아 공부를 하면서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즐거워 보이고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단기간 봉사활동을 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순간 너무나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그만 얼굴이 발개진 기억이 납니다. 저는 교복도 책가방도 심지어 공부할 학교와 교실에 대해서 고마움보다는 불평과 불만이 더 많았고, 결국 저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을 생각하기보다는 항상 저보다 더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피해의식에 젖어들었던 것입니다. 저들과 비교해 보면 더 많은 것을 가지고도 아직 부족하다고 떼쓰는 어린 저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 장면입니다.

또, 이런 제 마음이 단순한 동정과 연민이 숨어든 허황된 꿈일까 두려워 한동안 고민도 많이 하고 아직도 고민합니다만 그 결과는 끝까지 가 보아야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포기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더 많이 배우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도 보고, 멀리 그곳에서 ‘아리랑’을 함께 부르게 되는 그날까지 말입니다.




* 사족(蛇足)

지난 여름, 우리 연구소 회원인 이지영 님의 따님 구현경 양을 만났습니다.

덕유산을 내려오며 들었던 '중앙아시아로 가겠다'는 꿈 이야기를 맘 속에 담아 두었다가 얼마전 한백교회에서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겨 언른 글을 부탁했드랬습니다.

일본에서 오래 지내셨던 어머니를 보며 '재일 한인'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졌다는 그녀는 한국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고려인'들의 삶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신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길 소망한다는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민중신학자 서남동 선생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등장인물들 중 강도를 만나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사람이 바로 예수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고통의 현장에서 재림한 예수를 발견했던 것이지요. 여기서 '구원'이란 고통받는 이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함으로써 성취됩니다.

낯설고 척박한 땅에 강제 이주돼 모진 고난의 세월을 보냈을 '고려인'과 모호한 정체성을 가진 '경계인'으로 살고 있을 그 후손들을 현대 한국인들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잊혀진 존재 '고려인', 그들의 고통에 관심을 갖고 다가가려는 구현경 양은 그 자신만의 구원체험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녀가 바라듯, 훌륭한 국어학자가 되길 기원합니다. ^^

- 유승태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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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신앙, 성서, 교회를 위한 기독교 신학』

지은이 : 허호익
판형 : 신국판(153*224)
쪽수 : 440쪽
분야 : 인문/종교/기독교
값 : 16,000원
출판사 : 도서출판 동연
출간일 : 2009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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