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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 II (1)
: Episode 1. 영화‘박쥐’에 기인한 아폴론적, 혹은 디오니소스적 상상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시작하며

지난 웹진 8호 (2009년 6월)에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이라는 짧막한 글을 기고한 바 있다. 이번호 웹진부터(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연재하는 글의 큰 제목도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라고 이름 짓는다. 졸고가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라는 술어가 생략된 비어있는 제목으로 연재되는 이유는(매회마다 소제목을 달리 첨부하겠지만) 분명하다. 내가 겪고 있는 근대와 탈근대라고 불리우는 것들 사이에서의 방황,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길찾기 혹은 탈주에 대한 모색이 여전히 내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 진행중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라는 완결되지 않은 글의 제목은 완결되지 않은 내 사상의 괄호를 고백하는 의미이기도 하고, 이 글이 마무리 될 무렵 그 방황이 잠잠해졌으면 하는 바램이 담겨져있는 이중적인 의미인 셈이다.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 II’라고 붙인 이유는 웹진 8호에 실렸던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와 차별을 두기 위함임을 밝힌다.

나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몇 해전 <올드 보이>로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칸느 영화제가 좋아하는 (혹은 칸느 영화제가 좋아하는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 박찬욱이 이번에는 뱀파이어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 사실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 상에서 뱀파이어는 단골 메뉴였다. 마치 구미호가 한국 작가들에게 끊임없이 진화하는 Character를 제시하는 것처럼, 뱀파이어라는 치명적 매력 역시 서구인들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뱀파이어 관련 영화만 생각해도 탐 크루즈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가 떠오르고, 몇 해전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안녕, 프란체스카’도 뱀파이어를 소재로 했던 독특한 작품이었다. 주의해서 살펴보면 시대별로 뱀파이어에 관한 대표적인 영화가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그렇다면, 왜, 뱀파이어인가? <터미네이터>나 <에일리언>류의 최첨단 테크놀러지로 무장된 괴물도 있고, <링>, <식스센스> 류의 인간의 심령을 소재로 한, 즉 ‘내 안에 있는 타자성’을 소재로 삼는 영화가 요즘 공포영화의 대세인데, 왜 박찬욱은 또다시 뱀파이어로부터 소재를 끌어 온 것일까?
나는 아직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를 보지 못했다. 칸느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는 보도, 송강호의 성기가 노출되었다는 기사, 사제가 뱀파이어라는 설정과 그 사제가 친구의 아내와 눈이 맞아 그 친구를 죽였다라는 내용 등등......이상은 내가 <씨네 21>을 뒤적이며 얻은 영화 ‘박쥐’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이다. 영화 내용에서 내게 흥미를 끌었던 대목은 사제가 뱀파이어가 되었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대칭적 위치를 점하는 사제와 흡혈귀의 영역이 한 인물안에서 중첩되고, 멀어지면서 극의 긴장과 이완이 반복될것이며, 결국에는 그 둘 사이의 진동이 빨라지다가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는 영화상의 관습을 예상하는 것 말고, 내게 순간적으로 스쳤던 무엇이 바로 아폴론적 혹은 디오니소스적 상상이었다.
이러한 상상을 하게 된 이유는 다분히 이번 학기 내가 겪고 있는 (학문적) 가위눌림에 힘입은 바 크다. 필자는 현재 탈근대적 사유의 단초를 마련했다고 평가되는 인물인 ‘니체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다. 니체의 거의 전 저작을 ‘전기-중기-후기’로 분류하여 읽고 있는데[각주:1],  니체가 아폴론적인 유럽문명과 그것을 떠바치고 있는 기독교세계 전체를 향해 광인처럼 퍼붓는 독설과 야유는 내게 통쾌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선사하였고, 그 거북한 동거가 나로 하여금 이번 글쓰기의 동기와 여백을 제공하였다.
이 글에서 나는 사제를 아폴론으로, 뱀파이어를 디오니소스로 치환 시킬것이며, 각각의 인물을 서술하면서 니체의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 <비극의 탄생>에서부터 그의 후기 작품인 <Anti-Christ>와 <Ecce Homo>에 나타난 근대(성)와 기독교를 향해 내뿜었던 니체의 독설에 주목할 것이다. 아울러 니체철학의 사상적 세례를 받았다고 평가되는 푸코와 데리다의 글들도 중간 중간에 삽입할 생각이다.  
글의 전개 양상은 아폴론적으로 상징되는 근대적 인간과 디오니소스로 상징되는 탈 근대적 인간상에 대한 소묘, 그리고 근대적/탈근대적 증상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에 대한 나열 혹은 비교에 많은 양을 투자할 것이고, 결국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다원주의와 전체주의 (자본의 질서가 유일한 세계운영의 원리라는 측면에서) 라는 서로 다른 인식의 축이 지배하는 21세기 사회속에서 니체식 딴지걸기에 대한 의미를 반추해 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과정을 통해 ‘어떻게 우리가 우리 밖에 있는(혹은 우리 안에 있는) 타자와 대면할 수 있을까?’ 에 대한 몰입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글의 의미는 족하다.
(한가지 양해를 구하는 것은, 이 글은 영화 ‘박쥐’가 주는 자극으로 쓰여진 것은 분명하지만, 영화 ‘박쥐’와는 사실 아무 상관이 없는 글이라는 점이다. 자칫 Popularism에 영합하여 독자들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비쳤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시기를) 

탄생, 뱀파이어

어렸을 때 40권짜리 계몽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이 집에 있었다. 누가 언제 구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전집에 꽃혀 있었던 대부분의 책을 읽지 않았다. ‘세계문학을 40이라는 전체성 안으로 몰아넣어 이것만 읽으면 세계문학을 섭렵할 수 있다는 구호에 분연히 저항하노라!’고 외치지는 않았지만, 어린 나에게 있어 서가에 정갈하게 꽃혀 있던 ‘세계문학’이라는 객관성과 보편성, 그 중에서도 특별히 엄선된 40이라는 대표성이 선사하는 숭고함은 그 시절 내게 책읽기에 대한 무거움과 비장함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책읽기에 대한 무거움과 비장함은 얼마 안 있어 죄책감으로 변했다. 객관성과 보편성, 그리고 숭고함을 무시했다는 사실, 아니 객관성과 보편성, 그리고 숭고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한동안 괴롭혔다. 그 고뇌 끝에 내가 세계문학전집에서 몇 권 무겁게 꺼내어 읽었던 책들이 있었는데 (그래도 다섯 손가락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중 한 권이 드라큘라이고 또 다른 한 권이 그리스신화이다.
<드라큘라>는 브람 스토커(Bram Stocker)라는 영국 작가가 1897년 발표한 괴기소설이다. 소설속 드라큘라 백작의 모티브가 된것은 루마니아의 블라드공이라고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3세기 유럽인구의 1/3의 생명을 안아간 페스트의 공포, 십자군 전쟁 패배이후 실추된 교황권과 이를 계기로 새로운 판세를 형성하려는 영주권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 종교재판, 마녀사냥 등등......중세 암흑기를 설명하는 여러 사건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드라큘라와 관련시켜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대목은 투르크족의 유럽침략이라 할 수 있다.
이슬람권에 의한 발칸반도의 대부분과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기독교 문명권에 있었던 그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공포와 전율 그 자체였다. 블라드공은 그 무렵에 등장해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이슬람세력에 맞서는 기독교 문명권의 수호신 같은 역할을 하였다. 블라드공은 포로들에 대해 굉장한 잔혹성을 보였다 한다. 산채로 불태워 죽이거나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꼬챙이로 찔러서 죽였다고 하여 투르크 병사들 사이에서 그를 ‘창에 꿰어 죽이는 자’라는 호칭까지 얻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잔혹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 후 400년 후에 잠자고 있던 블라드공은 뱀파이어가 되어서 드라큘라라는 소설속의 인물로 재탄생하게 된다.

뱀파이어에 대한 해석, 그리고 상상

소설이 쓰여 질 무렵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일컬어지던 빅토리아 왕조시대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이름에 걸맞게 영국은 18-19 세기에 엄청난 파워로 세계질서의 가장 강력한 축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면서 화려한 명성을 날리던 대영제국은 새로운 국제질서의 역학 관계속에서 서서히 과거의 영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는데, <드라큘라>가 출판되었던 시기가 바로 그 무렵이다. 
소설은 한 축에 중세의 암흑, 공포, 거세의 대상, 모더니티의 적대자인 드라큘라를 '타자(Other)'로 배치시킨다. 그리고 나머지 한 축은 빅토리아 시대 최첨단 지성과 테크놀로지로 무장된, 반 헬싱 박사를 필두로 하는 강호의 고수들이 드라큘라와 맞서기 위해 포진되어 있는 형국이다. 소설속에 드러난 이러한 대립구도는 19세기 빅토리아 왕조시대 영국인들이 지녔던 당대의식을 전달코자 했던 setting이 아니었을까?
수많은 식민지의 확보와 착취, 그리고 보존과 유지를 위해 주체인 나를 먼저 설정하고, 그 주체안으로 포섭해야 하는 대상(피식민지국 혹은 영국과 함께 식민지 쟁탈을 다투는 다른 경쟁국들)을 상정한 후, 주체가 대상을 인식해 가는 과정이 바로 이성의 능력이고 계몽이며, 진보라는 근대성의 신화가 이 소설안에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드라큘라>는 단순한 괴기 공포 소설로 읽혀질 수 없다. 전근대와 근대, 이성과 광기, 문명과 야만, 그리고 아롤론과 디오니소스간의 대립으로 읽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이 문제는 근대와 탈근대논의까지 뻗어간다.

ⓒ 웹진 <제3시대>

  1. 미국내에서 Nietzsche에 대한 번역과 소개는 전적으로 Walter Kaufmann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Nietzsche 철학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첫 시기는 The Birth of Tragedy 비극의 탄생으로 대표되는 시기이고, 두 번째 시기는 Human All Too Human, The Gay Science 등의 작품에서 나타난 ‘긍정의 정신’으로 특징지어지는 기간이다. 마지막 시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적 저작들이 몰려있는데, Beyond Good and Evil 선과 악을 넘어서,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도덕의 계보학, Twilight of the Idols 우상의 황혼, The Anti-Christ,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 등의 책들을 통해 니체 특유의 서구 정신사에 대한 전적 부정과 기독교윤리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폭로가 이어진다. 니체의 가장 유명한 저작이라 할 수 있는 Thus Spoke Zarathustra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마지막 시기와 중간시기를 잇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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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문’으로 나아오시오.[각주:1]
―요한복음 10:7~13, 5:1~14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요한복음 10장의 현장 찾기

10:11나는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12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의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를 흩어 버립니다. 13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8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입니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10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입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습니다. 7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양의 문’입니다. 9내가 그 문이니,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입니다.

불트만은 그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요한복음 10장 1~5절은 6절로 마무리되는 비유(παροιμα)로서, 그 핵심은 목자와 강도 사이의 상반성이라고 말합니다. 즉 목자가 문으로 당당하게 양우리에 들어오는 데 반해 도둑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목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목자인 예수를 따르는 양들이란 다름 아닌 요한공동체 자신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 말하는 비유는 정확히 1~5절을 가리키고, 여기서 강조점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다’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청중들은 비유를 듣지만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의 몰이해는 예수로 하여금 7절부터 위의 이 단순한 비유를 확대하게 합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설명은 처음 이야기에 비해 조금 복잡합니다. 11절에서 18절에서는 분명 앞서 소개된 선한 목자의 모티브가 반복되면서 아버지와 아들, 선한 목자와 양 사이의 여러 관계가 표현되며 이 관계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예수의 희생이 제시됩니다. 한데 자세히 보니 7~10절이 뭔가 이상합니다. 7절․9절과 8절․10절이 아무리 봐도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8절과 10절은 앞서 1~5절의 목자 모티브의 연장선상에 있는 얘기로 보이지만, 7절과 9절은 갑자기 예수를 목자가 아닌 양의 문이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7절과 9절을 빼버리면 1절부터 19절까지의 문맥이 한결 자연스러워집니다. 예수 본인이 선한 목자인데, 당신보다 먼저 온 사람, 즉 합법적으로 문을 통해 양우리에 들어가지 않는 자들은 다 도둑이고 강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고요.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지만, 예수 당신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7절과 9절에서 분명 예수는 본인을 ‘양의 문’이라 주장하고, 자신이 그 문이니, 누구든지 자신을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목자와 문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일단 7절과 9절을 1~6절, 8, 10~18절보다 뒤에 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7절과 9절만 빼면, 10장 1~18절의 긴 비유적 담화는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선한 목자와 그가 이끄는 양떼에 관한 이야기가 됩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이 결국 8절과 10절, 그리고 11~13절에 담겨 있는데, 좀 더 자연스럽게 의미를 전달하고자 순서를 약간 바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의 맨 앞 성서본문표는 그렇게 제 나름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예수는 양떼를 이끌고 문을 통해 양우리로 들어가는 선한 목자인 동시에 한편으로, 그 목자와 양떼들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것. 목자인 동시에 문이라…! 대체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물론 언뜻 보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양떼들(=신자들)의 선한 목자(=구주)로서, 우리를 푸른 초장(=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분. 그리고 한편으로 구원의 문 그 자체이신 분. 즉 구원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이신 분. 이 두 메타포는 교회 강단에서 정통적인 기독론과 구원론 교리를 뒷받침하는 성서적 근거로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10장 1-18절까지의 본문을 조금 다른 컨텍스트에서 해석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고리타분한 교리적 언설이 아닌 당대 이스라엘의 종교문화적 맥락에서, 혹은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제기된 비판담론으로 읽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접근을 취하게 된 까닭은 일차적으로 본문이 지니고 있는 논쟁적 어투 때문입니다. 이 본문이 논쟁적이라 함은 예수가 자신을 목자 내지는 양의 문으로 정체화하는 것만큼이나, 다른 누군가를 도둑이나 강도로 혹은 삯꾼으로 강하게 비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예수 자신이 구원의 인도자나 구원의 통로라는 기독론 혹은 구원론적 교리를 설파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동시대적 어떤 현실을 문제 삼는 비판적/논쟁적 담화를 제기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합니다.

여기서 예수의 담화가 지닌 현실성의 문제를 살피기 위해서, 저는 문학비평에서 종종 사용되는 소설의 현실성 테제를 끌어들여 보고자 합니다. “소설이란 특정한 ‘세계’에서 특정한 ‘문제’를 설정하고 특정한 ‘해결’을 도모하는 서사전략이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이와 유사하게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논쟁적 담화 역시 예수 당대와 요한공동체의 후대적 정황이 경험의 유사성 차원에서 합류하는 특정한 ‘세계의 시공간’을 무대로 하여(세계의 현실성), 그 세계 안의 인간들이 믿고 있었던 구원의 신화를 문제 삼고(문제의 현실성), 그 구원의 신화가 완강하게 구조화하고 있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좌표 및 경계를 흔들면서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했다(해결의 현실성)라고 보자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요한복음 10장의 본문이 어떤 특정한 ‘세계’에서, 그 어떤 특정한 ‘문제’를 선택하여, 그 문제를 또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 제출된 담화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이 담화가 다루고 있는 세계의 현실로 가장 잘 어울리는 본문은 바로 이 곳입니다.

5:1그 뒤에 유대 사람의 명절이 되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2예루살렘에 있는 ‘양문'(the sheep gate//προβατικῃ) 곁에, 히브리어로 베데스다(베드자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행각이 다섯 있었다. 3이 행각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 5거기에는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6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습니까?” 7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8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당신의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시오.” 9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10그래서 유대인들은 병이 나은 사람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소.” 11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나를 낫게 해주신 분이 나더러, ‘당신의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시오’ 하셨소.” 12유대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요?” 13그런데 병 나은 사람은, 자기를 고쳐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많이 붐비었고, 예수께서는 그 곳을 빠져나가셨기 때문이다. 14그 뒤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서 말씀하셨다. “보시오! 당신이 말끔히 나았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당신에게 생기지 않도록 하시오.”

‘양문’의 세계: 예루살렘 북쪽 성문

제가 요한복음 5장을 요한복음 10장 담화가 배태(胚胎)된 현장으로 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이 본문에서 ‘양의 문’ 곧 ‘양문’이 처음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10장 7절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일러 ‘양의 문’이라고 하셨는데, 그 ‘양의 문’이 그저 단순히 양들이 드나드는 양우리의 문을 가리키는 것이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엔 너무 심심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외려 7~18절에서 반복적으로 쓰인 ‘도둑’(8, 10절), ‘강도’(8절), ‘목자’(11절), ‘삯꾼’, ‘이리’(12절), ‘다른 양들’, ‘한 목자’, ‘한 무리 양떼’(16절) 등의 단어들이 상징적 알레고리로서 예수운동에 대한 기억으로 소급되는 요한공동체의 정황을 역사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단어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근거하여, ‘양의 문’ 역시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으리라 추정됩니다. 

10장 7절에 쓰인 ‘양의 문’이라고 하는 단어는 원어로는 ‘η θυρα των προβατων’ 인데요, 이 단어는 느헤미야서 3장 1절,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동료 제사장들과 함께 나서서, ‘양문(羊門//πυλην την προβατικην)’을 만들어 하나님께 바치고, 문짝을 제자리에 달았으며, ‘함메아 망대'와 ‘하나넬 망대'까지 성벽을 쌓아서 봉헌하였다”라고 하는 본문과, 12장 39절의 “‘에브라임 문' 위를 지나, ‘옛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서, ‘양문(羊門//πυλην την προβατικη)’에까지 이르러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에서 멈추었다”라고 하는 본문에서 쓰인 그 ‘양의 문’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킵니다.

적어도 유대인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양문’이란 표현을 듣자마자 즉각 떠올리는 것이 목장의 양우리에 달린 출입문이 아니라, 고유명사로서 예루살렘 성전 북쪽에 위치한, 즉 예루살렘성 안으로 들어오는 진입로 역할을 하던 세 가지 동물 이름을 한 문들, 즉 어문(느3:3, 느12:39, 습1:10), 말문(렘31:40) 이외에 또다른 문이었던 ‘양문’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이 B.C.E 586년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파괴되었다가, 이후 근 150년 만인 B.C.E 444년 제3차 귀환한 느헤미야의 주도로 52일 걸려 재건됩니다. 그런데 그 성벽 재건시 가장 먼저 건축된 것이 바로 양문이었습니다(느3:1). 느헤미야서를 잘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이스라엘의 각 지파별로 나누어 성문들을 수축하고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게 또 이 양문입니다. 양문에서 시작해서 양문에서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국가의 수도의 성벽이란 정치․군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재건된 성벽은 다윗 시대의 예루살렘 성벽 보다 확장된 것으로서 특히 12문을 만들어 이스라엘 12지파의 재단결을 상징한 점이 특징적입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그 형제들, 제사장들이 함께 이 양문을 달았다고 하는 사실은, 이제 왕도 예언자도 부재하는 시대가 도래함과 더불어 이미 부정해 질대로 부정해진 유대사회의 회복을 위해 제사장들이 헤게모니를 쥐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종말론적으로 택한 자들의 도성(계 21:10)을 상징하기도 하는 바, 이 성벽은 종교적으로 정결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즉 포로로 끌려갔다 귀환한 자들과 그렇지 않고 본토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의 경계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 경계선의 역할을 하는 성벽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있어 먼저 지어졌고 또 성전으로 출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이 양문이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이 양문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본문이 딱 한 군데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5장 2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히브리어로 베데스다(베드자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행각이 다섯 있었다.” 특이하게도 이 본문에서는 ‘양의 문’이 느헤미야서나 요한복음 10장에서와 달리 προβατικῃ(원형은 προβατικο)라고 하는 고유명사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단어는 πρό βά των(양)의 파생어로서 10장 7절의 θύρα των πρό βά των(양의 문)이나 느헤미야서의 πυλην την προβατικην(양의 문)을 한 단어로 축약한 형태입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양문은 다른 문들과 달리 자물쇠가 없었다고 합니다. 24시간 열려있었던 것입니다. 양이나 소와 같은 희생제의용 가축들이 들어가는 문으로서,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는 성문 가운데는 평민이나 병자와 가난한 자들은 들어갈 수 없고, 다만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 같은 특권층들만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이 문으로 성 안에 들어가려면 성전세금을 내고 들어가야만 했기 때문에, 결국 출입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여 가난하고 병든 이들은 자연스럽게 가축이 드나들던 양문으로 드나들게 된 것입니다.

어차피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이방인의 뜰이라 불리었던 성전 광장에서 희생제물용 가축의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돈이 있는 자들은 굳이 고향에서부터 희생제물을 준비하여 예루살렘까지 상경할 필요가 없었고, 또한 양문으로 그 가축들과 함께 들어올 일이 없었던 것이지요. 예수 당시에 장사꾼들이 그 양문으로 가축들을 들여왔고, 성전 제의에 참여할 순례객들은 성전의 다른 문을 통해 들어와서 그것을 나중에 구입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의용 가축판매를 독점하고 있던 이들이 대제사장 가문이었고, 특히 예수 시대에는 대제사장 안나스 가문이 이를 관장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제물 거래, 환전, 기부금, 십일조, 토지 수입, 성전세 수입 등에서 유입되는 자금으로 오늘날의 은행 역할을 했습니다. 말 그대로 돈을 내고 구원(속죄)을 구입하는 종교시장이었던 셈입니다. 물론 이 종교시장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성전세라든가 가축을 살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만 했기에, 이곳에서 거래되는 구원은 결코 무상(無償) 구원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처형을 결정지은 사건이 소위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던” 사건이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한 것입니다(막11:15).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셨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막13:2).

‘양문’의 문제: 성전과 베데스다를 만드는 경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바로 이 성전체제로부터 배제되어 성전 밖에서, 그것도 가축들이 드나들던 양문으로 가셔서, 그 앞에 형성된 또 다른 구원체제, 곧 가난한 자들의 구원체제와 마주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것은 베데스다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미신적인 구원체제였습니다. 그나마 이 미신적인 구원체제는 성전에서 거래되던 구원처럼 돈이 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는 보도처럼, 구원의 시행 횟수가 너무 적고 또한 예측불가능할 정도로 불안정한 것이 문제였지요. 오죽했으면 그곳에는 38년째 오매불망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성전 안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날마다 (유료) 공적 희생제사가 바쳐졌고, 특히 이 본문에서처럼 유월절 같은 명절 축제기간 동안에는 매일 수소 2마리와 숫양 1마리와 새끼양 7마리가 번제물로 바쳐졌으며, 숫염소 1마리가 속제제물로 드려지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당시 이 양문 바로 옆에는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었는데, 히브리어의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라는 뜻이었고, 이 못을 가리켜 양의 못이라고도 불렀답니다. 이 연못은 본래 기원전 2세기 시몬이 대제사장으로 있던 때에 세워진 길이 100~110m, 너비 62~80m, 그리고 깊이 7~8m의 두 개의 쌍둥이 연못으로서 성전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점차 유대인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올 때에 희생양으로 가지고 온 양을 씻는 목적으로 활용되면서, 양의 못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먼 길을 오는 동안 더럽혀진 양과 자기의 몸을 깨끗하게 씻고, 제사장에게 흠이 없음을 검사받은 연후에야 성전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거룩한 풍경도 예수님 시대로 넘어오면 거의 사라졌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성전 안에 성전세를 내고 들어가면 이미 장사꾼들이 잘 기른 제의용 가축들을 팔고 있었으니까요.

희생양을 씻기던 기능이 없어진 대신에 이곳에서 씻으면 치료의 효과가 있다는 믿음이 퍼지면서,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이 늘 집합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 물의 성분 중에 뭔가가 있긴 했나 봅니다. 몇 번의 치유 사례가 회자되더니 급기야 그곳을 둘러싼 신화적 전설이 조금씩 만들어졌던 것이겠지요. 천사가 내려오는 곳이라는 식의 말이죠. 성전에서 작동하고 있는 정상적인 구원의 시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자들, 가난하여 병든 자들, 혹은 병들어 가난한 자들은 그 구원체제 밖에서 자신들만의 하위리그를 만들어 그곳에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38년 된 이 병자는 하위리그에서도 가장 경쟁력이 없었던 사람일 것입니다. 배제된 자들 가운데서 또 배제된 것이지요.

결국 이렇게 양문을 경계로 하여 베데스다와 성전이 나뉘어져 있고, 그 각각의 장소에서 서로 다른 구원의 신화가 작동합니다. 양문 이쪽 편 성전에서는 돈을 주고 산 희생제물로 정결함과 죄사함을 획득하는 가진 자들의 구원이 거래되고 있고, 양문의 저쪽 편 베데스다에서는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어 주길 바라는, 더 정확히 말하면 물이 움직인 후에 자신들을 그곳까지 옮겨줄 자비로운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들의 구원신화가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이 둘은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평화롭게 잘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죄책감과 죄사함이 일반화된 등가 원리에 따라 실물로 교환거래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삶 전체가 걸려 있는 고통과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기적/자비가 역시 등가 원리로 교환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 성전에서 생산되는 구원이 구매자와 판매자(대제사장), 브로커(장사꾼) 모두를 만족시키며 연일 판매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면, 베데스다에서 생산되기로 한 구원은 실제 거래가 성사되는 일이 거의 없어 재고만 누적되고 있었습니다. 본문에서처럼 그곳의 다섯 행각엔 수많은 병자들이 대기하며, 물이 움직인 뒤에 못에 들어가는 최초의 1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눈치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마저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기에, 그나마 그것이 그들을 버티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사실 돈이 없고 병이 들어 성전에 들어올 수 없는 이들이 그들만의 구원의 체제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을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도 내심 반겼을지 모릅니다. 그들이 성전 체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처지에 적응하여 그에 맞는 적절한 구원의 체제를 이루어 양문 안으로 침범해 들어오지 않고 자기들끼리 잘 살아가는 것이 성전 안 사람들에게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혹여나 베데스다 사람들의 그 순진무구한 믿음대로 정말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 일이 일어나면, 그때 한번 가서 아무나 한 사람만 물 안에 넣어주면 자신들의 자비로움이 입증되는 것이니 그보다 좋은 일은 없는 것이죠. 사실 이 점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 베데스다의 세계는 자신들의 자비로움을 보증해줄 수 있는 수혜와 봉사의 체제였으니까요.

‘양문’의 해결: ‘양문’을 지나, 무한한 교류의 공간으로

바로 그렇게 양문을 경계로 하여 나뉘어 있던 두 구원체제의 현장을 예수님은 일부러 찾아가셔서, 38년 동안 구원을 갈망해온 한 병자를 오래 동안 유심히 관찰하시다가 그에게 비로소 말을 건넨 것입니다. 예수님과 대화 후에 그는 분명히 치유되었습니다. 어떻게 치유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치유된 후에, ‘성전에서’ 예수와 다시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치유되자마자 성전에 들어갔던 것 같고, 거기서 유대인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그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일을 갖고 시비를 걸자, 예수가 자신에게 한 말을 전한 것입니다. 그가 성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통과한 문은 당연히 지난 38년 동안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그 양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도 이제 병자가 아니기에 성전에 들어가는 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꿈에도 그리던 성전을 보러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전 안에 있던 유대인들은 그가 치유를 받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안식일을 어겼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었지요. 어쩌면 그들은 양문을 경계로 하여 공고하게 나누어져 있던 두 세계가 교란된 사실에 분노했던 것일지 모릅니다. 안식일 규정은 핑계일 뿐 그들은 양문을 통과하여 성전 밖의 세계에서 성전 안의 세계로 넘어온 그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안식일의 규정을 노골적으로 거부할 뿐 아니라, 그 거부의 근거를 자신과 아버지의 동등함에서 찾았습니다. 자기와 함께 일하시는 아버지께서 이 두 세계의 분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요한복음 10장의 담화를 이 상황으로 가져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양문으로서, 양문 밖에 있던 38년 된 병자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어주셨습니다. 물론 그가 가야할 새로운 세계는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또 다른 범죄의 혐의였으니까요. 결국 그가 가야할 세계는 성전이 아닌 다른 세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를 다시 만났을 때 했던 말씀, “보시오! 당신이 말끔히 나았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당신에게 생기지 않도록 하시오”는 그로 하여금 다시금 죄를 짓고 그 죄를 사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새로운 세계는 베데스다도 성전도 아닌, 전혀 다른 제3의 세계입니다.

한편, 성전 안에 있던 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양문이라는 말씀은 그들도 양문을 통과해서 즉 희생제물을 직접 준비하고 베데스다에서 스스로를 정결하게 한 후에 성전으로 다시 들어가라는 말씀이자, 양문 밖으로 나와서 자신들이 외면하고 있는 그 세계를 대면하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베데스다의 고통과 눈물을 제물삼아 유지되고 있는 성전의 체제로부터 나와서 자기들이 의도적으로 망각하고 있는 그 참담한 구원현장을 보라는 것이지요.

결국 양문은 두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사이의 공간인 것입니다. 이 사이의 공간에서는 더 이상 양문의 안도 밖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양문을 경계로 하여 이쪽과 저쪽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각각의 교환체계가 모두 무너지는 그런 장소인 것입니다. 조금 어렵게 말하자면 성전의 제의종교/국가종교/시민종교/시장종교와 베데스다의 주술적 민간종교, 이 양자의 영역을 분할하던 경계선 역할을 했던 양문이 이제 두 세계 각각에 대한 외부성으로 도입되어 그 경계를 허무는 교류의 공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베데스다와 성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예수운동이 당대 사회에서 수행한 것은 바로 이 양문의 운동이었습니다. 두 세계 각각에 외부성 혹은 근본적 반성의 기제로 작용하여 닫혀 있던 각 세계의 벽을 허물고 경계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말 그대로 무한한 광장의 공간을 (탈)구축해나간 새로운 종교적․사회적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 양문으로 자신들의 양떼와 함께 걸어간 선한 목자이셨습니다. 오늘 그 선한 목자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따라 양문으로 나아오라고 명령하십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지난 2009년 8월에 한숨결교회에서 설교한 글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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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에게

유병주
(노원통합지원센터 소장)

날씨가 많이 춥구나. 정말 겨울인가보다.

너는 지금 캐나다 어느 도시에 있겠구나. 그곳은 독일보다 더 춥다는데--. 어딘가에서 읽었는데, ‘캐나다는 우리나라 퇴직자가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나라 중 하나이지만 날씨가 너무 추운 것이 단점’이라고. 그 추운 곳을 너는 처음으로 엄마를 떠나 찾아갔구나.     

네 엄마는 1988년 내가 독일에서 공부를 시작하기 전, 어학과정에서 만난 가장 친한 대만친구였단다. 그때 나는 어학시험을 빨리 붙어 전공공부를 시작하고 싶어 동향인을 피해 친구를 찾던 중 같은 생각을 가진 네 엄마를 알게 되었단다. 성격이 명랑한 엄마는 일본에서 온 요시에를 내게 소개시켜주었고 우리 셋은 단짝처럼 다녔단다. 서로 서툰 독일어로 소통하면서 너무 재미있어하던 세 사람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우습지 않니?  우리 중 유일한 독일인이었던 네 아빠는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궂은 일을 도와주었단다. 네 아빠의 전공이 중국학이었고 대만과 일본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얼마나 편하게 해주었는지 모른단다. 그리고 네가 태어났는데 동서양의 아름다움만 지닌 네가 우리는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단다. 커 갈수록 점점 예뻐지고 독일어와 중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던 너는 요시에와 나의 딸이기도 했단다. 그러던 중 요시에가 먼저 일본으로 떠났고, 2000년 공부를 마친 나도 독일을 떠나면서 엄마 혼자만 남게 되었단다. 그 때 너는 9살이었을 거야.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났구나. 나는 다시 이곳에 뿌리를 내리느라 고군분투하는 사이 지쳐갔고, 오래 잊고 있었던 마음 속의 추억으로 남아 있던 엄마를 찾아갔단다. 우리가 함께 다니던 대학의 맨자에서 7년 만에 나를 다시 만난 엄마는 울더구나. 처음에는 항암 치료로 머리가 빠지고 수척해진 나의 모습이 안쓰러워 우는 것으로만 생각했단다.

“그럼, 리자 많이 컸지. 16살이야. 이제는 엄마를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는지 아니? 지가 제일 잘났는지 알아.” 네 안부를 묻는 내게 답할 때도 사춘기 딸을 가진 엄마의 진부한 푸념이려니만 생각했지.  

네가 6살 때라고 하더구나. 유치원에서 선생님은 중국 혼혈아인 네게 중국어를 해보라고 시켰고 또랑또랑 중국어로 대답하던 네게 기대하지 못했던 반응이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이라고 엄마는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네 엄마의 눈을 보았단다. 박장대소하는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너는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이후 중국어로 말하는 것은 물론 엄마를 부정하기 시작한 너를 엄마는 마음으로 울면서 대변하더구나. 곧 어학연수를 떠나면서도 중국인이 없는 곳을 제일 조건으로 고른 네가 나를 위해 엄마와 만두를 만들어 주었고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나의 딸 리자, 네 고통이 지금 네게 왜 이리 크게 전달되는지 모르겠구나. 못된 것들! 리자, 너 아니? 엄마친구 잉와의 아들도 너와 똑 같은 경험을 했다는 것을? 아니 정반대로, 그 아이는 선생님의 격려와 칭찬으로 두 문화를 자랑스럽게 모두 소유하고 있단다. 차라리 네가 네 동생 요나단처럼 아시아의 모습을 더 많이 지녔더라면 네 갈등이 조금 적지 않았을까하는 어리석은 생각이 두는 구나. 너는 검은 머리의 매력적인 독일 소녀인데 말이다. 중국과 독일, 두 문화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 네가 누릴 수 있는 행운의 기회를 져버리지 말라고 충고하는 내 말을 흘려듣는 네 모습이 내 눈에 아프게 박혀오는구나.

그래, 리자! 네가 그렇게 바라던 대로 네 곁에는 엄마와 같은 검은 머리의 동양인이 없기를 바란다. 그래서 네 마음이 편하다면 말이다. 그래도 네 마음 한 켠이 많이 추울 때 항상 너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를 생각하기를 바란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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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기행

 
신창하
(이우고 1학년)  

아침 일곱 시, 열일곱 살의 소년이 납작하고 더러운 이불 위에 죽은 듯 누워 있었다. 피곤에 전 소년이 잠자리에 든 후 한 번도 뒤척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불은 처음 몸을 덮었을 적 모습 그대로였고, 소년의 머리맡에는 어젯밤 벗어놓은 옷이 허물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누구라도 가까이 다가가 소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더라면 분명 마음이 무거워졌을 것이다. 여드름이 좀 나 있긴 하지만 아직 앳된 그 얼굴은 참으로 안되어 보였다. 소년의 입은 한 일자로 굳게 닫혀 있었고, 미간은 악몽을 꾸는 듯 수시로 경련했다. 소년은 자면서도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냉기가 도는 소년의 방은 싸구려 여인숙이나 창고마냥 황량했다. 이 방은 이 집의 유일한 방이었고, 그가 이 방을 혼자 차지한 탓에 유일한 가족인 그의 할머니는 거실에 있는 그 집의 유일한 소파에서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잠자리가 불편하기는 방안이나 거실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방은 그나마 외풍이 덜했다.

자, 주위를 둘러보자. 소년의 방 한켠에는 2단 옷 행거가 있다. 2단 옷 행거는 옷이 너무 많아서 옷장에는 도무지 다 넣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나 제대로 된 옷장을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물건으로, 간편한 설치에 이사할 때 갖고 다니기도 편한 획기적인 발명품이다. 이 물건을 이용하는 고객층 중 소년은 후자에 속했기 때문에, 행거에는 코트 하나, 셔츠 두 개, 청바지 하나, 그리고 교복이 걸려있을 뿐이었다. 또 방에는 박스 두 개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손톱깎이, 전화번호부, 빨래집게, 수도세 요금 고지서, 소년의 교과서 등이 들어있었다. 마지막으로 옷 행거와 박스 사이에는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다. 소년의 할머니가 매일 6시간씩 절대로 거르지 않고 시청하는,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그럼 이제 소년 방 탐사가 끝났다. 어항이나 컴퓨터, 핸드폰 충전기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거실이나 부엌으로 나가보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기껏해야 그릇 몇 개, 숟가락, ‘우리 주 예수는 사랑이시니’ 라고 쓰여 있는 액자 따위를 추가할 수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컴퓨터가 없는가. 그것은 소년의 할머니가 컴퓨터를 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컴퓨터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고, 소년이 아무리 소리를 높여 컴퓨터가 필요하다고 역설해도

“아무리 들어봐도 그것은 게임기랑 하등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어. 비싼 돈 처들여서 그런 것 사려고 하지 말고 공부를 허야지.”

라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소년으로써는 미칠 노릇이었다.

어째서 핸드폰이 없는가. 그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어차피 전화를 할 사람이라고는 할머니밖에 없는데 할머니는 전화를 받지 못한다. 귀가 반쯤 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는 반 아이들 사이에서 거의 고립된 처지였다.

 

아, 드디어 소년이 눈을 떴다. 불쌍하게도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방금 정말로 악몽에서 깨어난 참이기 때문이다. 그는 할머니가 죽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는 할머니가 담요를 덮고 누워 있었는데, 얼굴빛이 푸르스름한 것이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그는 두려움에 떨며 더 가까이 다가갔고, 할머니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벌어진 입 사이로 얼마 남지 않은 이가 보였다. 그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할머니....’ 하고 부르며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 순간 할머니의 몸은 풀썩하고 먼지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소년은 슬픔보다는 경악을 느꼈고, 머릿속에서는 ‘할머니가 죽은 거야! 이제 세상엔 나 혼자만 남았어.’ 란 외침이 메아리를 쳐댔다. 눈앞이 막막했다.

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거실로 갔다. 할머니가 무사한지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할머니는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그는 부엌으로 가 보았다. 그곳에도 할머니는 없었다. 넓지도 않은 집을 두리번거리던 소년은 할머니가 화장실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머쓱해진 소년은

“할머니! 나 아침 안 먹고 학교 간다! 반찬도 없고 맛도 없고 졸라 싫어 할머니 밥.”

하고 냅다 소리친 후 얼른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소년은 학교에 가면서 계속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너무나도 불안하고 답답했다. ‘정말 할머니가 죽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분명 막장이 될 것이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지금껏 해 본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잘 하는 일도 없었고, 성적은 밑바닥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비행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커서 노숙자가 되어도 다행일 것이었다. 정신없이 고민을 해 보았지만 로또 이외에는 이렇다 할 방안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래,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이제는 나도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가야지. 공부를 시작해야 해.’ 학교에 도착할 때쯤 소년은 굳게 다짐했다. 마음이 좀 놓이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수업이 시작되니 소년은 다시 암담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간만에 고개를 쳐들고 수업을 들으려고 애썼지만 선생이 하는 말도, 칠판에 휘갈기는 글도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두 알아듣고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놈들도 있었고, 손을 들고 질문을 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살다 살다보니까 이금동이 수업시간에 깨 있는 걸 보는구먼, 이젠 자는 것도 지쳤나보이?”

선생이 이죽거렸다. 소년은 기분이 팍 상했다.

‘젠장, 점심시간까지만 자야지. 5교시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듣지 뭐.’

그는 다시 머리를 책상에 파묻었다.

점심시간이 끝나니 사회시간이었다. 가방에서 종이를 주섬주섬 꺼내는 아이들을 멍하니 쳐다보던 소년은 가까스로 수행평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지금 멍때리는 새끼들은 뭐야. 대가리가 있는 새끼들이야? 이거 20% 짜리라고 했지? 했지? 안했냐? 안했어? 안했다고 한 새끼 나와.”

“.....”

“이제 너네는 피똥싸게 공부해서 시험 100점을 맞아도 기껏해야 80점 인생이 되는 거야. 애새끼들이 수행평가가 얼마나 중요한 줄 모르고. 응? 아주 그냥 정신들을 놓으셨지?”

소년은 선생의 말에 다시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참다못한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뭐야?”

“아 선생님 저 숙제를 놓고 왔는데. 내일 낼게요.”

선생은 어,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이 되었다.

“하기는 했냐? 그래, 내일 교무실로 갖고 와. 조회 전까지만 받는다.”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소년은 수업이 시작되자 눈을 부릅뜨고 칠판을 노려보았다. 오늘은 할 일이 많았다. 사회 수행평가가 뭔지 알아보는 걸 포함해서.

 

학교가 끝나고 그는 20분 거리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뭐가 어찌 됐든 알바를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유니폼으로 갈아입자마자 그는 카운터를 맡고 있던 여자애를 밀쳐내고 컴퓨터를 차지했다. 그는 일단 빌어먹을 사회숙제의 뜻부터 알아보아야 했다.

‘미국의 경제 대공황에 대해 조사하고 이때 정부의 뉴딜정책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생각을 논술하여라.’

미국의 경제 대공황? 뉴딜 정책?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돼는 일이었다. 어떻게 고등학생에 불과한 아이들에게 이런 어려운 용어를 사용해서 숙제를 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찾아보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정 안되면 백과사전에서 컨트롤 씨 컨트롤 브이를 해버리지 뭐.

그런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가 인터넷을 접속하려고 하자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창이 떴던 것이다. 그는 입을 쩍 벌리고 알바 여자애를 쳐다보았다.

“야, 이거 뭐임? 비밀번호 입력하래. 뭐, 뭐야 이게?”

“그거 점장이 걸어놨음. 손님들이 알바새끼들이 컴퓨터로 영화 다운받아보느라 계산을 안 해준다고 항의를 해가지고.”

젠장. 왜 하필이면 이런 때에. 그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어쨌건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저녁 여덟 시에 편의점에서 나온 소년은 근처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가 어렸을 때 학교가 끝나면 가끔 가던 곳이었다. 만화잡지만 실컷 보고 나왔지. 그는 생각했다.

도서관은 정말 크고 시설이 좋았다. 무인 대출 반납기, 자동 도서 검색기 등의 기계가 한쪽 벽에 있었고, 저녁인데도 학생들은 책상에 빼곡히 들어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어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적합한 책을 찾아내었다. 하지만 무인 대출 반납기 앞에 선 그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회원증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책을 구석에 숨겨놓고 사무실에 갔다.

“회원증 만들어주세요.”

“지금 너무 늦어서 안 되는데.”

“아, 형 제발요. 저 꼭 읽어야 할 책이 있어요. 그거 못 읽으면 저 죽어요. 그냥 해주시면 안 돼요?”

“신분증 줘 봐.”

그는 좋아라 하며 학생증을 내밀었다.

“도서관 홈페이지에 회원가입은 했지?”

“......??”

“회원가입을 먼저 해야 회원증을 만들어줄 수 있어. 이게 다 컴퓨터로 하는 거여서. 집에 가서 회원가입 하고 다시 와라.”

“..........”

그는 솟구치는 분노를 제어할 수 없어 대답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마지막으로 pc방에 갈 수 밖에 없었다. 한 시간에 2000원을 내야 한다는 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고, 머리에 까치집을 얹고 10시간씩 게임을 하는 폐인들을 보기도 싫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pc방에 최대한 빨리 가서 숙제를 끝내는 게 급선무였다.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 분 후 소년은 그날의 마지막 좌절을 겪게 된다. 힘없이 거리를 걷던 그는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

“야, 어디 가냐. 이 시간에?”

“pc방.”

“미친 새끼.”

“숙제 하러 가는 거야.”

“너 거기 못 들어가.”

“왜?”

“이제 기말고사라고 선생들이 pc방, 당구장, 이런 데 지키고 있는 거 몰라? 걸리면 너 내일 학교에서 쳐 맞어. 나 아까도 영무 걔가 pc방에서 죽을 상 돼서 나오는 거 봤다.”

“아, 씨발.”

“나 간다.”

“야, 야, 잠깐만. 나 너희 집에서 숙제 좀 하면 안 돼? 집에 컴퓨터가 고장 나서.”

“야아, 열 시 넘었어.”

“.....그래.”

“안녕.”

“안녕....”

 

‘오, 신이시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당신은 정녕 내가 바른 인간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까.’ 소년은 모든 의욕을 잃었다. 집까지 걸어갈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세상의 냉정함을 곱씹었다. 컴퓨터가 없는 애들은 숙제를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도서관에서 책은 어떻게 빌리라는 말인가. 젠장. 다 필요 없었다. 그는 그냥 되는 대로 살기로 다시 마음먹었다. 더러운 세상, 노숙자가 되면 어떠리.

‘아, 그리고 할머니더러 방에 들어와서 자라고 해야지. 요즘엔 날씨가 너무 추워.’ 버스 안에서 소년이 피곤을 못 이기고 머리를 떨구기 전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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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와의 낯선 여행 1 - 요한복음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지은이_ 김진호
펴낸곳_ 도서출판 동연
펴낸날_ 2009년 12월 15일
쪽수_ 244쪽(본문 2도)
크기_ A5(148*210)
분야_ 인문/종교
값_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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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민중신학 11

『촛불과 광장, 정치와 종교』

지은이_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엮음
펴낸곳_ 도서출판 동연
펴낸날_ 2009년 12월 16일
쪽수_ 240쪽
크기_ 신국판(153×224)
장르_ 인문, 정치, 종교
값_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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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지은이 :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쪽수 : 276쪽
값 : 14,000원
출판사 : 산책자
출간일 : 2009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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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는 본 연구소 정용택 연구원과 김진호 연구실장의 글이 수록돼 있습니다. 한겨레 신문에 소개된 기사를 링크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광장의 눈물, 왜 용산을 비켜 흘렀나"(한겨레, 2009.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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