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회개는 진실합니까?
- '회개'라는 언어지옥에 빠진 한 주체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기독교의 회개는 대체 무엇인가?

기독교인에게 ‘회개’의 의미는 남다르다. 회개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이’가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하느님 앞에 내어 맡기는, 동시에 삶의 총체적 변화를 결단하는 행위이다. 이 행위를 통해 그는 과거의 죄를 사함(사면) 받는다. 따라서 회개는 이전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새로운 주체가 되는 경험이다.

그런데,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면, 대한민국의 현재를 살고 있는 나는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회개를 강조하는 한국 교회는 왜 나에게 전혀 회개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고, 일부 교회의 문제를 전체 문제인 것처럼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특정한 형태의 신앙의 제도가 한국 교회에 보편적으로 내면화돼 있고, 그 신앙 제도에서 ‘회개’ 담론이 작동하는 방식이 한국 교회의 부패를 초래하고 있다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진실한’ 회개를 하는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군사주의적 선교를 떠나고, 사회의 불의에 침묵하는 현실을 보며, 기독교의 회개는 대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나는 이 글에서 기독교의 회개 담론이 작동하는 방식을 기독교와 아무 관계없어 보이는 영화 <유레루>(니시카와 미와 감독)를 통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영화의 줄거리를 대략 요약하면 이렇다. 고향을 떠나 도쿄에서 사진가로 성공해 자유분방하게 살던 다케루(오다기리 죠)가 어머니의 기일을 맞아 고향에 돌아온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주유소에 들러 형을 기다리던 다케루는 자신의 옛 친구였던 치에코가 형과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질투를 느낀다. 그리고는 치에코를 유혹한다. 치에코는 형 미노루(카가와 테루유키)가 연정을 품고 있는 이였다. 형은 어릴 적 세 사람이 자주 놀러가던 ‘하스미 계곡’에 다시 같이 가자며 더 머물다 가라고 동생에게 권유한다. 다음날, 못 이기는 척 하스미 계곡에 함께 간 다케루는 자신을 따라 도쿄에 가고 싶다는 치에코로부터 도망쳐 구름다리를 건넌다. 다케루를 좇아 구름다리로 달려온 치에코, 그리고 그녀를 좇아 달려온 미노루. 건너편 강가에서 사진을 찍던 다케루는 형과 실랑이를 벌이던 치에코가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하고 형에게 달려간다. 다케루는 당황한 형에게 치에코가 혼자서 발을 헛디뎌 추락한 것이라고 증언하도록 대응요령(?)을 알려준다.

그러나 형의 무죄방면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다케루는 형과의 면회 이후 형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기로 한다. 법정에서 보이는 형의 태도를 보며, 그는 형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뉘우치고 있는지’ 의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는 형과의 마지막 면회에서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형은, 사실은 동생이 자신(의 결백)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케루가 “나는 형을 믿어”라는 말을 수없이 했지만, 사실 그 이면엔 ‘나는 형이 살인자라는 걸 알아’라는 지식 혹은 믿음이 놓여 있다는 것을 형은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형이 살인죄로 기소된 법정에 증인으로 선 다케루는 차분하면서도 결연한 표정으로 그가 목격한 형의 ‘살인’ 장면을 증언한다. 다케루의 증언으로 다리 위해서 형이 내민 손은 치에코를 구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밀어 떨어뜨리는 것이었음으로 ‘판명’된다.

돌아온 탕자-동생 vs. 무한히 자기를 희생하는 자-형 ?

7년을 복역한 형이 출감하는 날, 다케루는 어릴 적 하스미 계곡에서 가족과 촬영한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된다. 어머니가 촬영한 그 영상에서 그는 자신을 돕기 위해 형이 내민 손과 고소공포증 때문에 구름다리를 건너기를 두려워하는 형을 보고, 형이 의도적으로 치에코를 다리에서 밀어 죽게 했다는 자신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형에게 달려가는 다케루. 길 건너편 버스를 기다리는 형은 소음 사이로 들려오는 동생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동생에게 얼굴을 돌려 미소를 보낸다. 그 미소를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에서 가족을 위해 끊임없이 헌신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형은 마지막 장면에서까지 동생의 ‘위증’마저도 용서하고 받아주는 무한한 자기희생의 상징처럼 묘사된 것만 같다. 마지막 장면의 형의 미소가 형제의 아름다운 화해의 증거로 읽힐 수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인 듯하다. 자애로운 형과 이기적인 동생, 그리고 자신을 살인자로 만든 동생의 ‘실수’까지도 묵묵히 용서하는 형. 그리고 동생의 회개와 관계의 회복. 어찌 보면 너무나 통속적인 서사구조를 영화는 반복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영화만의 장르적 속성을 이용해 서사의 ‘닫힌 구조’를 교묘하게 비틀고 있다. 예를 들면, 다케루가 형의 유죄를 확신하며 회상하는 장면 ― 다케루는 구름다리 위에서 형과 치에코가 나눈 대화를 마치 명확하게 듣고 보았던 것처럼 그려진다. 치에코가 이 시골마을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며, 이 시골만큼이나 미노루를 혐오한다는 듯한 말을 하자 이에 화가 난 미노루가 치에코를 다리에서 밀어버리는 것이 다케루의 회상 내용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영화평론가 김지미의 표현을 빌리면, “카메라는 미노루의 시선보다는 멀리 있으며, 타케루의 시선이 되기에는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회상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모호해진다.[각주:1] (영화에서도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오지만 굳이 설명을 보탠다면, 다케루는 구름다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물소리도 컸기 때문에 형과 치에코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다케루와 형의 마지막 면회 장면에서 카메라의 눈은 형을 향해 있지만 면회실 유리벽을 통해 다케루의 얼굴이 형의 얼굴 바로 옆에 선명하게 비치는 것 또한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담아낸다/본다. 이때 진행되는 형의 진술은 다케루가 믿는 ‘진실’이 형의 입을 빌려 말해진 것일 뿐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래서 이 장면은 형의 ‘유죄’가 다케루의 ‘믿음’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효과를 갖는다. 그런데 동시에 이 장면은, 역설적으로, 형이 ‘무죄’라는 사실 또한 관객의 ‘믿음’일 뿐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형의 ‘유죄’가 다케루의 ‘믿음의 눈’을 통해서 재현된 것에 불과하다면, 다케루의 믿음이 허구이고 미노루가 무죄라는 사실 또한 카메라의 ‘눈’을 통해서 재현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메라의 ‘눈’이 영상에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다케루와 미노루를 관찰하고 있는 ‘눈’은 관객의 ‘눈’과 동일시된다.

해석자를 통해 완성되는 서사구조와 언어지옥

영화의 절정 부분에 등장하는 이 두 장면 때문에 관객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영화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한 부분이 된다. 관객이 해석자로 동참함으로써만 돌아온 탕자로서의 동생 대 자애로운 형의 서사구조가 완성된다. 관객의 해석을 통해서 영화의 서사는 완성된 구조 또는 닫힌 구조가 되는데, 이와 동시에 영화의 안과 밖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바꿔 말하면, 모호해진 회상의 지점(앞에서 든 첫 번째 예)과 다케루의 시선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지점(두 번째 예)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영화의 안과 밖은 뫼비우스의 띠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안과 밖의 경계를 구별하고, 영화의 서사가 허구인지 진실인지를 판단하던 ‘주체로서의 관객’ 대(對) 해석과 판단을 기다리는 ‘대상으로서의 영화’라는 이분법은 허물어진다.

다시 영화 ‘안’의, 또는 우리가 영화 ‘안’이라고 믿는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다케루는 어머니의 시선을 통해 영상에 담긴 형과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보고 자신의 판단이 ‘착오’였음을 깨닫는다.(“흔들리는 다리에서 발을 헛디딘 것은 형이 아니라 나였다” 운운하는 마지막 나레이션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그렇다면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유지되고 있는 형의 이미지―자애롭고 자기희생적인―는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인 것일까. 형은 어머니의 기억, 다케루의 재현(그나마도 오락가락하는),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의 눈을 통해서만 재현될 수 있는, 그 스스로는 자신을 재현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은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때문에 이 영화는 아름다우면서도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자신을 재현할 능력이 없는 타자에 대해 ‘잘못된’ 재현을 한 결과 그 타자는 ‘살인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잘못된’ 재현을 한 주체가 ‘아, 그 판단은 실수였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타자는 마술처럼 다시 ‘자애로운 자기희생적인 형’이 된다.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주체의 변덕이 다시없으리란 보장을 할 수가 없다. 다케루는 자신의 판단의 착오는 인정했을지언정, 그 판단을 하는 주체 자체는 단 한 번도 반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주체의 실수’는 인정하지만 ‘주체 자체가 틀렸을’ 가능성은 전혀 사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주체의 ‘앎/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지 여부를 ‘진실함’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다케루의 회개는 매우 진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케루의 반성과 회개는 그것이 ‘진실한’ 것이었다 해도 결국 주체의 경계 자체는 사유하지 않는, 여전히 타자를 배제함으로써만 성립하는 반성과 회개일 수 있다. 그는 회개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저 회개라는 언어의 지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앞서 이 영화는 관객의 해석을 통해서만 완성된 서사를 갖게 되며, 그 과정에서 영화의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진다고 했던 것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미노루가 ‘타자’ 또는 ‘보여지는 자(재현대상)’에 대한 은유라면, 다케루는 ‘주체’ 또는 ‘보는 사람(관객)’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는데, 감정이입을 통해 자애로운 형 대(對) 돌아온 탕자 동생의 이분법과 서사구조를 완성시켰던 관객은 과연 미노루를 파멸에 이르게 하고 다케루를 언어지옥에 빠지게 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다케루와 미노루의 화해를 상상한 관객은 과연 ‘화해’라는 언어의 지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영화 안의 주인공에 대한 사유를 넘어 관객인 우리의 사유하는 태도 자체에 대해 그 의미를 묻고 있는 것이다.  

회개하나 회개하지 않는 기독교인

기독교인에게 회개와 관계회복의 전형처럼 수용되고 있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위에서 이야기한 <유레루>의 서사구조와 상당히 닮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사 자체가 닮았다기보다는 서사가 수용/소비되는 방식이 닮았다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이러한 서사 수용방식―달리 부른다면, ‘돌아온 탕자’ 담론―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무한히 자애롭게 그려지는 타자로서의 하느님과 그 신 앞에서 어떤 죄도 마술처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는 기독교 주체뿐이다. 이 기독교 주체의 회개는 ‘진실하다’. 그러나 그 진실함은 주체의 경계 안에서 느끼는 자기애의 정도에 비례할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 욕하는 상황에서, 욕하는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진실하게 기도하는 기독교 주체의 이해 못할 행동은 이러한 회개 담론을 통해 정당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기독교 주체에게 회개란 무엇일까, 그를 언어의 지옥에서 건져내는 구원의 빛은 어디에 있을까.  ⓒ 웹진 <제3시대>

  1. 『씨네21』 2006년 8월 30일자 - 김지미, "인간의 기억과 믿음은 진실일까?" <유레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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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차 월례포럼 - 히브리 미학의 모험

1991년부터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에 개최해온 월례포럼이 지난 2일, 117차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동안 주제, 강사의 경력, 관점, 논의방식 등에 틀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신학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왔기에 월례포럼은 제도권 학문의 경계를 넘어 더 깊이 있고 날카로운 통찰을 얻는 기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월례포럼에서는, 히브리 미학을 새롭게 구성하려는 시도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어떻게 건축의 양식으로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1월에 있었던 용산참사에 대한 신학적 비평을 담아내었습니다.

1. 일시 : 2009년 3월 2일 월요일 저녁 7시
2. 장소 : 한백교회 (5호선 서대문역 1번 출구 옆 골목 30미터, 안병무홀 1층)
3. 주제 : 히브리 미학의 모험
4. 강사 : 이정희 (본 연구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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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린 그 헤아림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너희가 남을 헤아리는 대로 하나님도 너희를 헤아리실 것이다"(누가복음 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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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가 새 ‘웹진’을 발간하며 ‘목회’ 카테고리를 만들었다고 했다. 청탁을 받고, 자세한 내용을 듣고자 찾아간 그 날, 한백교회 서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곧바로 책을 빌려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다.

한국전쟁 발발 6일전, 평양을 대표하는 교회지도자 14명이 북한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그 중 12명이 총살되고, 2명이 돌아왔다. 풀려난 두 사람 중 30대 중반의 한 목사는 정신병자가 되었고, 또 한 사람, 신 목사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날의 처형사건을 미궁에 빠뜨린다. 살해된 12명의 목사는 하루아침에 순교자가 되었고, 그들이 맡고 있던 교회들은 폐허더미가 되었으나 연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무너진 중앙교회 종루에는 아직도 종이 매달려있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거칠게 혹은 은은하게 종은 허공을 가르며 파동을 일으킨다. 살육과 분노의 땅에 신의 임재를 갈망하듯. 평양의 그리스도인들은 살아 돌아온 한 목사와 신 목사를 의심하고, 그들을 향해 ‘유다! 유다!’라고 외치며 손가락질한다. 실성한 채, 폐허가 된 중앙교회를 찾아 괴성을 지르곤 하던 한 목사마저 죽자, 이목은 신 목사에 집중된다. 그가 알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그는 어떻게 죽음의 지경을 탈출할 수 있었는가? 정말 그는 12명의 동료목사를 죽음으로 내몬 배신자인가? 평양을 점령한 한국군 정보부대는 이 사건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잔인성을 폭로하고자 소설의 주인공 이 대위를 신 목사에게 보낸다.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침묵하는 신 목사에게 대위가 묻는다.

“목사님! 당신의 신 - 그는 자기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알고 있을까요?”

내게 소설 ‘순교자’(김은국 작)를 추천한 사람은 김 장로였다. 그는 대학생 시절인 70년대, 이 책이 일으킨 센세이션을 설명하며 연일 교회 안에서 책의 내용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고 했다. 그는 왜 내게 이 책을 추천했을까?

김 장로는 1년 전 아내를 잃었다. 암으로 투병 중이던 그의 아내는 남편의 장로 피택 소식을 듣고 얼마 후 호스피스 병동에서 평화로이 눈을 감았다. 유독 사랑이 깊었던 부부의 별리(別離). 김 장로는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아내도 없는 사람이 무슨 장로임직이냐며 사양하기를 몇 번. 그는 깊은 절망에 빠진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노회에 제출할 장로임직 청원서류 중 하나인 ‘신앙고백서’라며 대학노트에 적은 삐뚤빼뚤 글씨의 종이 한 장을 내게 건넸다. 몇 일 동안 고민했지만 그것뿐이었다며 전날 밤 어렵게 적었노라고 했다.

‘저는 얼마 전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낳고 자라, 한평생 하나님을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죄인입니다. 저 같은 죄인을 하나님은 구원해 주셨고, 지금까지 지켜주셨습니다. 아픔과 고통가운데 하늘나라의 소망을...’

그는 내게 부족한 부분을 고쳐 달라 부탁했고, 나는 먼저 그의 글을 타이핑했다. 그리고 나서 한 줄 한 줄 임직할 장로의 신앙고백문에 어울리는 용어들을 섞어 손을 보았다. 그는 고맙다며 그가 쓴 종이와 내가 쓴 종이를 받아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조용히 교회 사무실에 있는 직원에게 그가 쓴 종이의 내용을 타이핑 해달라고 부탁했다 한다.

아들 또래 밖에 되지 않는 젊은 목사에게 그는 유난히 친근한 마음을 드러내곤 했다. 그와 나누는 대화는 늘 담백하고 진솔했다. 그가 어째서 나와 그토록 수사(修辭) 없는 대화를 하곤 했는지 헤아릴 순 없지만,  ‘순교자’를 추천한 일도 신앙고백서를 보여준 일도 이제 생각해보면 모두 하나로 통하는 어떤 뜻이 흐르고 있다.

다시 순교자로 돌아가 보자. 실성한 채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은 한 목사는 늘 찾아오던 중앙교회에서 숨을 거둔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신은...없어...신은...없어’였다. 여전히 진실을 감추고 있던 신 목사는 마침내 입을 열었고, ‘그가 선택한 진실’을 사람들에게 밝혔다. 신 목사를 이해하고 존경하면서도, 그의 발언을 못마땅해 한 이 대위는 다시 한 번 신 목사에게 묻는다. ‘목사님, 목사님의 신은 저들의 고통을 정말 알고 있을까요?’ 신 목사가 입을 열었다.

‘평생토록 난 신을 찾아 헤맸소. 이 대위!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괴로움과...죽음, 냉혹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뿐이었소. 그 다음은 없소...아무것도 없소...날 좀 도와주시오. 내가 내 백성을, 불쌍하고 고통 받는 내 교인을, 전쟁과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 그리고 삶의 피곤 앞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시오. 괴로움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을 움켜쥐고는 그들을 절망의 바다로 떠내려 보내고 있소.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고 그들을 기다리는 영광과 환영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희망이라는 환상을 준단 말입니까?’
‘그렇소.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이오. 절망은 이 피곤한 생의 질병이요. 무의미한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삶의 질병입니다. 우린 절망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오’
‘당신은? 당신의 절망은 어떡하고 말입니까?’
‘그건 나 자신의 십자가요. 난 혼자 그걸 짊어져야 하오. 모두가 다 십자가를 질수는 없어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이요’

신 목사는 전쟁의 고통과 살육의 현장에서 인간이 희망을 잃었을 때 어떻게 동물이 되며, 약속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야만이 되는지를 보았다고 했다. 그 자신, 한평생 신을 찾아 해맸으나 그가 발견한 것은 인간이었다고 했다. 절망과 싸우고 있는 괴로운 인간들 말이다. 그것을 본 이상, 그는 침묵하는 신을 대신해 십자가를 져야 했다.

김 장로는 내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나보다. 모든 비밀을 다 알기라도 하듯, 자신에 차 외치는 강단의 선포보다 차라리 당신의 아픔, 당신의 고통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랑 깊은 말 한마디가 필요하다고. 아내를 먼저 하나님 품으로 떠나보내고, 안수를 받기 위해 무릎을 꿇으면서 그의 귓가에 닿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은 소설 속 전쟁으로 무너진 중앙교회의 종소리처럼, ‘거룩한 아픔’을 실어 그의 영혼을 만지고 있었나보다.  

새로운 임지로 떠나기 앞서, 당회원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식탁으로 이동하던 길. 김 장로는 어김없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목사님! 많은 것을 가르치려고 조바심 내지 마세요. 교인들도 다 알아요. 그 사람들이 왜 주일 아침마다 피곤에 찌든 몸을 이끌고 교회에 갈까요. 위로 받고 싶은 거예요. 주님은 내 맘 알아주시겠지. 주님은 내 고통 알아주시겠지. 목사님은 예수님의 그림자가 되세요. 그림자라도 보게 해 주세요’

오늘(2월 17일), 김수환 추기경이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예수의 그 삶을 살아보지도 못했노라는 그의 고백이, 땅에 남은 빈가슴들을 채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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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심장이 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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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회원께서 연구소에 선물을 주셨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게 그 선물인데, 심장을 닮은 자작나무 조각입니다.
그분께서 선물하면서 하신 말씀이 "민중신학의 심장이 돼 주세요"였습니다.

심장은 여러 상징으로 사용되지요. 생명을 뜻하기도 하고, 마음을 뜻하기도 하고..

심장은 상징이기도 하고, 몸의 기관이기도 하지요. 저희에게 민중신학의 심장이 돼라는 말씀은, 단순히 상징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시대와 민중의 아픔을 심장으로 느끼고 그 아픔을 신학을 통해 이야기하라는, 그리고 그 아픈 민중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많이 응원하고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희가 잘못하거든 엄하게 꾸짖어주시기 바랍니다.
죽은 나무심장이 아니라 펄떡펄떡 뛰는 산 심장이 되겠습니다.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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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비의 ‘악령’들린 노예소녀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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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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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식스 센스>(The Sixth Sense, 1999)에는 한 소년이 혼령과 대화를 한다. 소년이 공포에 휩싸인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그러나 결국 두려움 없이 혼령과 소통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공포영화다운 어법에서 벗어나 ‘성장담’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나아가 그 소통을 통해 인간의 사회적 행위에 혼령의 언어가 개입되게 한다는 점에서, 하여 폭력적 현실을 정화하는 중개자의 역할을 그 아이가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메시아적 구원담’의 성격도 지닌다. 여기에서 우리는 언어의 확장된 지평을 본다. 언어는 삶과 죽음이라는 고전적 이분법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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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식스센스>에서 8살박이 소년 콜 시어는 혼령과 대화를 한다

정찬의 소설 「별들의 냄새」에는 또 다른 차원의 소통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강문규라는 이는 은행원이었는데,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한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어서,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외상은 다 치료된다. 한데 사고 이후 그의 후각이 갑자기 예민해졌다. 다른 사람이 감지할 수 없는 냄새를 느끼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외양 속에 감추어진 냄새가 그의 예민한 후각을 통해서 인지되었다. 아내만의 고유한 내음을 맡을 수 있었고, 또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의 냄새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꽃 나무 하늘 밤낮 계절 등 삼라만상의 향기가 그를 사로잡았다. 또한 인간 가공물의 악취, 문명의 역겨운 냄새가 자연의 향기로움을 얼마나 착취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되었다. 한갓 인간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세상 만물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을 알게 된 것이다. 해서 그는 ‘환각’에 빠진다. 문명이라는 환각에 빠진 인간과는 다른 종류의 환각이다. 닫힌 문명의 세계를 향한 초문명의 샤먼(자연/우주와 인간을 중개하는)이 된다. 별의 내음을 이야기하는 샤먼이다. 구원을 갈구하면서 말이다. 하여 이 소설은 언어의 지평을 자연, 우주로 확장시킨다. 소통의 당사자는 인간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강문규는 직장을 잃고 정신병원에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아내로부터 버림받아야 했다. 단지 닫힌 세계의 충실한 일원인 ‘나’라는 화자를 향한 구원담화를 위해서 그는 모든 것을 희생한 존재여야 했다. 오늘의 지배적 세계 담론이 은폐한, 감추어진 세계를 발설한 탓일까? 적어도 오늘의 시대엔 그것은 천기에 해당했던 것일까?

「사도행전」 16장 11~40절에는 흥미로운 일화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 바울이 ‘악령’들린 한 소녀를 치유한 이야기다. 그런데 그 소녀는 점쟁이다. 남의 운명을 감지하는 존재다. 그는 무언가 남들이 갖지 못한 언어를 가지고 있고, 남들이 모르는 세계를 이야기한다. 비록 이 일화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도 않고, 심지어 단지 바울 영웅담을 위한 대상화된 몰주체적 존재로만 취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속에는 당시의 사회와 「사도행전」 저자가 꿈꾸는 소통 상황에 대한 하나의 암시가 들어 있다. 거기에는 폭력이, 착취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소녀를 둘러싸고 있는, 이 은폐된 소통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탐구하려 한다.

2

그래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서 드로아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났는데,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본 뒤에,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6장 8~10절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한 뒤에 바나바와 불화하여 갈라진 후, 소아시아 지역을 두루 다니며 선교하던 중 꿈에 마케도니아인의 환상을 본 것을 계기로 그곳을 새로운 선교 개척지로 삼기로 한다. 하여 본문이 묘사하는 대로, 소아시아의 트로아스를 출발하여 사모드라게 섬을 거쳐, 네아폴리스에 당도한 후 빌립보(Philippi)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은 그리스 이북 지역인 마케도니아의 항구도시로, 주전 356년,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립 2세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건설함으로써 도시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이래, 소아시아와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군사적 상업적) 중요한 곳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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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바울의 2차 전도여행과 빌립보

주전 168년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정복하여 이곳을 네 지역으로 분할하여 원로원의 속주로 삼았는데, 빌립보는 동부마케도니아의 속주 수도가 되었다. 후에 아우구스투스(Augustus, 옥타비아누스, BCE. 63~AD 14)가 악티움 해전 이후 투항한 안토니우스의 추종자들을 이 도시에 이주시켜 정착하게 함으로써, 많은 유력한 로마인들이 거주하게 되어 도시의 정치적 위상이 더욱 격상하였다. 즉 이 도시는 고대 지중해 문명의 핵심을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로마적 도시의 전형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울 일행은 이곳에서 유대인들의 모임을 찾았는데, 성밖 외딴 곳에 유대인의 기도처(프로슠헤, προσευχη)가 있었다. 이는 유대인 결사체가 상대적으로 약한 상태임을 말해준다. 이곳에서 바울은 여러 신실한 여인들을 만났는데, 그중 루디아는 초기 바울 선교에서 매우 유력한 활동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비유대인 출신의 부유한 상인(고급의류)이었는데,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 곧 유대교 개종자의 한 사람(「사도」 16,14)으로 공동체에서 유력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 이가 바울의 가르침에 동화되어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고, 자기 집에 그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15절).

어느 날 기도처로 가는 길에, ‘점 치는 귀신’(프뉴마 퓌토나, πνευμα πυθωνα) 붙은 소녀를 만난다. 그리스어로 퓌톤(πυθων)은 ‘점쟁이 영’을 뜻하고, 퓌토네스(πυθωνες)는 ‘복화술사’를 뜻한다. 아마도 점 치는 귀신 붙은 소녀는 복화술사처럼 거의 입을 움직이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들의 감추어진 것들을 이야기하는 부류의 점쟁이였던 것 같다. 이것은 고대인들에게 그녀가 말하는 것이 아닌 그녀 속의 영이 말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그러므로 이런 행태는 신뢰받는 점쟁이의 전형적 모습(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주인들’에 의해 고용되어 있다. 주인이 복수로 나온 것은, 해석하기 매우 어려운 부분이다. 아마도 점쟁이의 상행위에 이러저러하게 얽힌 복잡한 이권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고대인에게 있서 ‘점’은 원래 신탁의 개인적 차원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점술사는 치부를 목적으로 점술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다만 점술의 대가로 일정양의 보답을 받을 수는 있다. 한데 도시화의 진척, 그리고 도시화와 (그 부수적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전쟁 등으로 인한 급속한 인구 이동은 많은 사람들의 비교적 안정된 기초생활을 교란시켰을 뿐 아니라 가치의 붕괴를 초래했다. 일상생활에 관여되는 신뢰 메커니즘의 붕괴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정한 생활 여건을 보상받기 위해 크게 두 유형의 방편을 구축한다. 하나는 실리적 판단의 영역으로, 비교적 강력한 자치 결사체에 소속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혈연적이건 종교적이건) 귀속성이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 유리한 결사체에 소속되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해서 자연스레 사람들은 신비주의적 종교나 점술사 등을 통해서 위안을 구했다. 신앙적 판단의 영역이다.

한편 소비사회인 도시에서 잉여가치의 창출은 비생산적 가치창출을 통해 일어난다. ‘위안’이라는 가치를 창출하는 점술사들은 그렇기 때문에 도시사회의 잉여창출 메커니즘의 도구로서 활용되게 된다. 이런 일은 신성 중심적인 전통적 가치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의 영역인데, 점술사들은 신접 체험을 통해 신성적 가치에 묶여 있기 때문에 대체로 이윤을 위해 자발적으로 일하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해서 브로커가 존재하게 되며 점차 그들에 의해 예속되어 일하게 된다. 

점술업은 구역별로 활동영역이 나뉘고, 그러한 인위적인 구분을 통해서 조합이 결성되었다. 물론 이런 조직화의 주체는 대개 점술가가 아니었다. 구역별 점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후견인들이 생기고, 이들 후견인들은 한편으로는 주먹패들과 결연되어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위와 상위의) 행정 당국과 연계되어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이해의 고리를 형성하며 점술의 상업화가 이루어졌다.

본문에 의하면 점술사 소녀는 바울 일행을 보자 그들의 신원(identity)과 지향 목적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떠벌렸다. 여러 날을 그렇게 하자 바울은 귀찮아서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악령을 내쫓았다고 한다. 이것은 점술을 둘러싼 이권행위를 방해한 것이고, 도시의 상업 질서를 교란시킨 셈이 된다. 결국 바울과 실라(실루아노)는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이야기는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하느님이 그를 구원했으며, 그런 상황에서 하느님이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예시하는 데 초점이 있다. 또한 부수적으로 다른 신이 아닌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점술의 주역임을 증언하고 있다. 즉, 여기서 악령들인 소녀는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도리어 ‘악령’이라는 가치판단을 따라, 소녀도 은연 중 비하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소녀에게서 악령을 추방한 것으로 텍스트는 충분한 선행을 베푼 듯이 묘사한다. 그러나 추정컨대, 이 이야기가 사실적 묘사라면 그녀는 생계 수단을 상실한 셈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 저자의 편견을 본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동시에 대중의 불안감을 깊이 유념하지 않은 채 사회의 구축과 변화를 기도한 주류 사회의 시각과 다르지 않다. 즉, 점술을 한갓 사술로 보는 편견이다. 점술가들은, 마치 태풍이 몰아친다거나 지진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자연의 변화를 미리 알아차리는 동물의 감지 능력과 같은 예지력을 갖춘 존재다. 동물들에게서 그런 것처럼 그것은 예민한 감각의 대가이며, 그런 감각은 소통불가의 타자적 대상과의 소통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즉 점술은 인간의 언어 행위 속에 감추어진 감각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하나의 소통수단이다. 그것이 다른 것의 상위에 있음으로써 다른 의미를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의 의미, 하나의 소통의 결과다. 문제는 그것이 다른 것의 우위에 있다고 보는 것 혹은 그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 이 양극단의 태도에 있다.

「사도행전」 저자는 바울이 이 소녀가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며 자신들이 하느님의 사도며, 구원의 길을 선포하는 자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에 화났다고 한다. 그들이 숨기고 조심스레 해야 할 것을 폭로한 것이 문제가 되었을까? 그러나, 실재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을 기술한 「사도행전」에는 복음 전파를 굳이 숨기고 다녀야 한다는 ‘은폐의 동기’가 별로 부각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에서 바울의 격분은 그 동기가 정당하지 않다. 텍스트는 사도의 격분이라는 권위에 찬 이미지를 구마 과정에 개입시키고 있는 것 같다. 즉 사도는 이미 권위 있는 존재이고, 그런 점에서 대상들에게 자혜로운 이의 모습을 띠고 있지 않다.

여기서 바울은 소녀의 점술을 무가치한 것으로 본다. 로마제국 시대 도시 대중사회의 역경과 그 속에서 잉태한 신앙 유형은 한마디로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만다. 「사도행전」 전체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텍스트의 주된 관심은 신의 말이 인간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중을 향한 신의 말의 ‘내용’에만 관심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상한 말이라고 해도, 때로 그것이 전달되는 방식 때문에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것이 있다. 많은 종교들이 그렇듯이 그리스도교의 제국주의적 선교 행태의 맹아가 여기서 이미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이 텍스트에는 루디아와 악령 들린 소녀가 연이어 나옴으로써 자연스레 그들이 비교되고 있다. 하나는 부유하고 점잖은 부류로서(바울 텍스트에 나오는 활동적인 암시가 여기에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사도를 부양하는 여인의 모습이다. 반면 신들린 여인이 있다. 바울의 텍스트에서 여러 차례 시사되고 있는 것처럼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이런 여인은 거의 언제나 악령 들린 사람으로 묘사할 뿐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 여성상은 특히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교회에서 발화권을 가질 수 있는 주된 통로는 바로 이런 비일상적 소통수단과 관련되어 있고, 그것은 비일상적 감지능력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이 텍스트는 그리스도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언어매체를 제한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서 그 제한된 영역 외부의 언어에 대해서 배제적인 제도화를 구축하고 있다.

3

예수는 막힌 사회를 돌파하는 대중의 언어로 등장했다. 그것은 비록 비현실적이긴 해도, 현실의 닫힌 구조를 비판하는 신랄한 저항담론이자 희망의 이야기였다. 그것은 전파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요소들과 마주치면서 변형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라는 요소는 아마도 예수담론의 비일상성, 그 혁명성을 시대와 어느 정도 타협시키게 하는 결정적인 변수였겠다. 그밖의 여러 요소들 또한 그런 역할을 했다.

이 점에서 「사도행전」은, 특히 점치는 귀신 들린 소녀 텍스트 그리스도교 역사의 뚜렷한 체제내화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생명력을 긴 시간 존속할 수 있게끔 하였지만, 동시에 많은 시대적 한계를 공유하는 존재로서 그리스도교를 재탄생시켰다. 그 중의 한 양태를 「사도행전」 16장의 이른바 ‘점치는 귀신 붙은 소녀’ 텍스트는 보여준다. 인류 문명이 인간 언어를 제한시켰다면, 교회의 문명화 또한 신앙의 언어 양상을 제한시켰다.

‘영’은 자유로움에 그 본질이 있다. 무엇에 구속되지 아니함이다. 어떤 것으로 형태화함에 대한 저항이다. 무한한 일탈인 것이다. 한편, 자유로움의 반대에는 ‘육’이 있다. 그것은 종종 제도화의 신앙적 언어로 쓰인다. 바울이 교회를 주의 몸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그렇다(「고전」 12,27). 바울 후대에 그를 추종하는 한 공동체 또한 이러한 수사어를 제도화의 언어로써 해석하여 계승했다(「에베」 5,30). 교회는 분명 신앙의 제도화의 하나로서 발전했던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발전에서 영은 제도화의 장애물 내지는 견제 장치였다. 육과 영, 이 둘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발전에서 중요한 키워드다. 모두가 예수의 삶과 신앙을 계승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경험의 중요한 요소다. 특히 그 길항성, 서로 모순되면서도 서로 얽힌 관계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신앙의 요소였다.

한데 육의 체계, 곧 교회는 이러한 영의 자유로움을 교회를 통한 신앙의 언어에서 제거시켜버렸다. 그것이 교회의 비극이다. 교회는 제도화에 ‘순응하는 영’만을 허용했고, 자유로움을 신앙 외부를 밀어내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인간과 대화하는 또 하나의 주된 통로를 상실하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대화의 가능성을 잃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교회가 대화할 수 있는 세계가 패권주의적인 문명화의 주체, 도구적 이성의 소유자로서의 인간인 이상, 교회는 인간에 의해 비인간화된, 비주체화된 대상세계를 착취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며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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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하느님을 만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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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하나.

_ 강최예진

나는 꿈속에서 하늘나라에 갔다.
거기서 하느님을 만났다.
그런데 하느님은 아기새가 돼 있었다.
하기새 하느님은 하늘나라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기새를 잡았다.
“고마워, 예진아.”
아기새는 말했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아기새가 말을 하다니, 나는 놀랐다.
하느님 아기새가 말했다.
“안녕, 나는 착한 어린이들을 도와주는 새야.”
나는 하느님 아기새에게 말했다.
“그럼 착한 사람들을 경제위기에서 구해주세요.”
갑자기 아기새가 사라지더니, 나는 꿈에서 깼다.


이야기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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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김선우

오늘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새가 되어 있었다.
새가 되어서 하늘을 높이 높이 날아 비행기에 부딪힐 뻔하고 쉬다가 떨어질 뻔도 하였다.
하늘 나라에 도착했다.
그랬더니 내 모습으로 ‘펑’ 하고 돌아와 버렸다.
하느님은 공중에서 쉬고 있었다.
눈속임수도 아니고, 새도 아니었다.
정말 신기하였다.
아기처럼 작지도 않고 어른처럼 크지도 않았다.
나는 하느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늘에 떠있으세요?”
하느님이 말했다.
“너도 떠있잖아.”
맞았다. 나도 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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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셋.


_ 신윤하

점심 먹고 나른한 어느 오후 갑자기 온갖 새소리가 집 뒤에서 들려 왔다. 약간 무서웠지만 평소에 새들에게 관심있던 나는 어떤 새가 있을지 궁금해서 집 뒤로 나가 산 위로 올라갔다.

그 다음 본 광경은 죽어서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빨간색 웨이브 머리에 하늘하늘한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새들에게 모이를 주며 대화를 하고 있던 것이다!!

엄청 놀랐고 119를 반쯤 누르고 있었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여자는 대답했다. “안녕, 꼬마야. 나는 하느님이란다.” 나는 무척이나 놀랐고 저 여자가 미쳤나보다라고 생각했다. “후훗, 믿든지 말든지는 너에게 달렸어. 그리고 내가 누군지 말을 안 했다면 넌 내가 누구였을지 궁금해서 잠도 못 잤을걸?” 정곡을 찌르셨으므로 나는 그분이 하느님이라고 믿어 주기로 했다.

나는 질문을 했다. “여기에 왜 오셨나요?” “나는 온 게 아니야 항상 여기에 존재하지...” “그렇군요 근데 정말 물어보고 싶언 건 따로 있었어요. 저도 새들에게 모이를 주면 안 될까요?” “그러렴. 여기 모이 받아.” 즐거운 하루였고 해는 머리 위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이야기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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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김신우

나는 길을 걷다가 하느님을 만났다.
3살 정도 된 꼬마였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또 다른 질문을 했다.
“내가 당신을 만났다는 증표를 줄 수 있나요?”
“증표가 꼭 필요할까?”
그가 말했다.
아이의 목소리였다.
아니, 할아버지 같은 목소리이기도 했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밝은 목소리였다.
나는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던 질문의 해답을 찾은 것 같다.
하지만 머리 밖으로 꺼낼 수가 없다.


* 이 글들은 한백교회(hanbaik.or.kr) 어린이들이 만든 신문 <한백이네 놀이터>에서 가져왔습니다. 어린이들의 창의성이 반짝반짝 빛나는 듯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느날 하느님을 만난다면 무엇을 함께 해보고 싶고, 어떤 대화를 나누고 싶은가요? 댓글을 달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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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자필 사망신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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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뭔가 다르겠지.” 이것은 세화여중 김영승 교사의 문제를 놓고 학교측의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동안에 애써 가져본 한 가닥 바람이었다. 그것은 결국 허망한 꿈이었다. 지난 2월 14일 김교사에게 송달된 것은 파면 통고서였다. 지난해 10월에 치른 전국적 초중고등학교 일제고사 사건과 관련하여 서울 지역의 공립학교 초ㆍ중등 교사 7명에게 파면 또는 해임이라는 중징계가 이미 내려졌던 터이지만 세화여중은 사립학교이기 때문에, 참된 교육기관이기를 자부하는 한, 교육청의 압력쯤은 버텨 낼 수 있으며 또 그러해야 마땅할 것이라고 우리는 희망적인 기대를 가져 보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허황한 꿈으로 끝나버렸다.

교사에게 ‘파면’이라는 징계는 사형선고에 해당하는 셈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번 경우에 죽는 것은 어느 쪽인가? 김영승 교사가 잃는 것은 교단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일 따름이다. 그 대신에 학생들 앞에서 참된 스승으로서의 양심에 충실하였다는 그의 명예는 길이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죽는 것은 누구인가? 나의 눈에는 이 파면장의 이면에 씌어 있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것은 ‘사망 신고서’라는 제목 아래 “이렇게 하여 우리는 스스로 죽기로 결의하였음을 만천하에 공고하는 바입니다.” 라는 설명문이 뒤따르고 그 밑에 이 파면을 결의한 징계위원들의 명단과 함께 일주학원이라고 큼직하게 씌어 있었다.

“살아 있으나 죽었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본분을 상실한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교육기관이 교육기관으로서의 본분을 내팽개치면 그 생명은 이미 상실한 것이다. 지난 2월 5일과 12일에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그 때마다 부당 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런데 두 번 다 당사자인 세화여중 앞은 비워 둔 채  그 옆에 있는 반포여중 앞에서 해야 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세화여중 측에서 시위를 봉쇄하기 위하여 자기네 학교 앞 집회 신고를 미리 해서 허가를 받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속임수였다. 교육기관으로서 이러한 속임수를, 그것도 반복해서, 사용했다는 것은 교육기관임을 스스로 포기한 처사이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참된 인간을 육성하는 것 아닌가? ‘정직성’을 빼놓고 인격교육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2회에 걸친 징계위원회는 이러한 속임수 연막 속에서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그 결의는 원천무효이다.

학교가 단지 지식 전수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입시학원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아야 할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민주사회의 건전한 시민에 합당한 인격을 양성하는 것 아닌가. 비판이 없는 민주사회란 바람 없이 연을 날리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비판하고 저항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는 결국 독재적인 암흑사회로 전락한다. 미친 소가 느닷없이 온 나라의 모든 교실에 나타나 날뛰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들이받고 교육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김영승 교사는 교육자적 양심의 눈으로 일제고사가 마치 이 미친 소처럼 우리나라 교육 자체를 황폐화시킨다는 것을 내다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이러한 미친 소의 횡포를 비켜갈 선택의 자유가 있음을 주지시키면서 온 몸으로 감히 이 미친 소의 고삐의 한 가닥을 잡아보려고 나섰던 것이다. 백보를 양보해서 그의 환상이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비판정신과 용기있는 저항은 상찬할 미덕일지언정 징계할 사유가 될 수 없다. 들판에 가 보면 두 종류의 웅덩이를 보게 된다. 하나는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고 다른 하나는 썩은 물이 고인 웅덩이다. 맑은 물 웅덩이는 그 밑바닥에서 작은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것이고 썩은 물 웅덩이는 맑은 물의 공급이 차단된 것이다. 어느 단체나 기관이나 사회든지 밑바닥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비판의 목소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면 결국에 썩고 만다.

일주학원은 지금이라도 김영승 교사의 징계가 부당했음을 자각하고 하루 속히 철회하는 것이 일주학원 자체의 실추된 명예와 질식당하는 이 나라 교육의 생명을 되살리는 길임을 깨달아 하루 속히 현명한 조치를 취하기를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 과거의 거울 속에서 미래를 앞 당겨 바라보지 못하는 자들이 교육현장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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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반쪽이
    2009.03.11 00:4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다시 또 추스려 힘을 내봅니다. 저는, 우리는 이겼습니다. 그걸 더 확실히 보여주는 것만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탈/향 강좌가 드디어 개강합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겨울 강좌는 개설하지 않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간 연구소 내실을 다지며 '각오'를 새롭게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 만큼 2009년 봄 강좌는 전보다 더 알차고 더 좋은 강좌로 준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봄 강좌는 총 2개의 강좌가 열립니다.

강좌 하나. 포스트 예수운동의 사회사 - 역사로 읽는 성서 I

지난해 말 출판기념회로 소개해드린 바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를 토대로, 초기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를 사회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강좌입니다. 역사적 분석을 통해 그리스도교와 성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 강사 :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 수강료 : 8만원 (CMS 후원자 무료)
     ■ 장소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 일정 : 2009년 3월 17일 ~ 5월 19일(매주 화요일) 저녁 7:30~9:30

           << 더 자세한 강좌 안내를 원하시면 click!! >>


강좌 두울. 바울 강좌 (가제)

천주교의 사도 바오로의 해(2008년 6월 28일 ~ 2009년 6월 29일)를 맞아 <우리신학연구소>와 공동기획한 바울 강좌는 두 파트로 구성돼 있습니다. 현대 서양 사상가들이 왜 바울에 관심을 갖는가를 서양 사상사적 맥락에서 설명하는 전반부 강좌(1~2강, 박진우), 바울의 복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사회사적, 신학적 시각으로 설명하는 후반부 강좌(3~5강, 김학철). 6강은 열린강좌로 진행되며, 두 강사님을 모두 모시고 자유롭게 대화 및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 강사 : 박진우 (커뮤니케이션 사회학) / 김학철 (신약학)
     ■ 수강료 : 미정 (추후 공지)
     ■ 장소 : 한백교회
     ■ 일정 : 2009년 4월 3일 ~ 5월 8일(매주 금요일) 저녁 7:30~9:30

(현재 바울 강좌는 강좌명과 수강료에 대해 <우리신학연구소>와 협의 중입니다. 결정되는 대로 공지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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