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윤리(II) – “주체여, 다시 한번!”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프롤로그: 한국땅에서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울화

 

돌이켜보면 학창시절 도덕과 윤리는 늘 재미가 없었다. 회상해보라, <바른생활 (초등학교) -도덕(중학교) -국민윤리(고등학교)>로 이름을 달리하여 불렸던 그 과목들이 얼마나 지루했었나를! 그것은 한국이라는 집단병영(?) 시스템 속에서 독재자들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새마을 운동(박정희)’정의사회 구현(전두환)’으로 대표되는 윤리적 슬로건으로 국민들에게 다가왔다.  잘 살아보세!’로 대변되는 유신정권의 국면전환용 구호와 오랜 윤리적 주제였던 정의를 자신들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끌어들여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정언명령으로 각색한 제5공화국의 그것은 서구윤리 사상의 양대축이라 할 수 있는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를 떠올리게 한다. 전자는 에피쿠르스학파-영국의 경험론-공리주의로 계승되었고, 후자는 스토아학파-대륙의 합리론-칸트로 이어지면서 윤리적 논쟁을 벌여왔음을 고등학교 국민윤리 교과서에 있었던 서구 윤리사상의 발전이라는 장에서 우리는 이미 배웠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전혀 섞일 수 없는 이 두 가지 윤리적 전략을 아우르는 절대적인 음성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분단이다. 한국의 분단체제, 반공이데올로기는 수 천 년간 이어져왔던 서로 다른 윤리적 행위의 원칙을 간단히 하나로 화해시켰다. 그리하여 적어도 남한 땅에서 국민윤리란(북한도 마찬가지겠지만) 북과 맞서는 거대한 상징의 체계,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며 엄하게 타이르던 아버지의 권위,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말라는 금기의 영역으로 등극한다. 어쩌면 한국은 이러한 틀 속에서 집단과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의한 의식의 세례가 거의 무방비적으로 이루어지는, 얼마 전 돌아가신 리영희 선생의 표현대로 야만의 사회이고, 반면 그 이데올로기가 지닌 음모가 놀라우리만큼 약발이 받지 않는 문명화된(?) 사회이기도 하다.

만일, 의식과 집단(체제), 의식과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천착했던 푸코가 이렇듯 기이한 한국땅에서 활동했다면 뭐라 말했을까? 이제서야 겨우 본론으로 넘어간다.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

 


드디어, 푸코와 만나다

 

푸코는 1984 5 25, 그의 나이 57세가 되던 해에 에이즈로 사망했다. 현대 프랑스 철학의 전개과정에서 발생했던 몇몇 뭉클한 장면이 있는데, 하나는 1995년 레비나스가 죽었을 때 데리다가 레비나스의 영전에서 행한 아듀, 레비나스라는 추모사이다. 그다지 관계가 좋지 않았던 둘이었지만 점점 본인 사상의 후반으로 갈수록 레비나스에 다가갔던 데리다였기에 그의 슬픔은 더했다. 레비나스가 죽기 10년 전 푸코가 죽었고, 레비나스를 데리다가 추모하듯, 푸코에 대한 추모는 그의 절친했던 친구인 들뢰즈의 몫이었다. 들뢰즈는 별다른 말없이 푸코가 병상에서 최후로 완성한 성의 역사2권인 <쾌락의 활용>, 3 <자기배려>의 서문을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간다.   

 

데카르트가 보편적이면서도 무역사적인 코기토적인 주체를 말하고, 칸트가 경험에 주어진 한계를 이성을 통해 묶음으로 선험적 주체의 탄생을 기획했다면, 푸코는 성의 역사 3, <자기 배려>에서 이런 근대적 주체와는 구분된, 그 자신의 독특한 성과이자 사상사의 전개 과정에서 주체논의의 새로운 물꼬를 틀었다고 평가받는 자기 soi/self’ 개념을 기존의 주체 subject’ 대신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후 푸코의 자기개념은 지난 호 웹진에서 살펴보았던 주체의 죽음이 운운되는 시대속에서 다시금 주체에 대한 새로운 생기를 부여하였다.[각주:1]

 

그래도, 주체는 계속된다!

우리가 말하는 근대, 즉 인식주체의 인식대상을 향한 포섭과 간섭에 강한 능력과 권한이 부여되었던 그 시대! 인식주체가 기획한 구성아래 세계 축조의 가능성이 조심스레 예감되던 그 시절! 근대적 인간이란 루카치의 표현대로라면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나는 소설속 주인공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무협지의 단골 내용으로 등장하는, 어렸을 때 원수로부터 부모를 여의고 하인 (어김없이 하인은 도망 중 장렬히 사망하고 숨이 넘어가려는 순간에 주인공의 출생의 비밀을 약간 흘린다) 등에 업혀 산사로 피신한 주인공(인식주체)과 같다. 그는 산에서 우연히(아니, 필연적으로) 신의 음성을 지닌 스승을 만나고 각고의 노력 끝에 어느 경지에 이른 후 터미네이터가 되어 하산한다. 그 후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들(인식대상)을 찾아 하나씩 제거하는 내용이 무협지 후반에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삽입되어야 하는 것이 인정투쟁이다. 원수는 성장하여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주인공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 어렸던 네가…! 그때 내가 너를 죽였어야 할 것을분하다!!”, 주인공은 이를 받아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네가 아느냐? 내 칼을 받아라!” 노예의 복종(내지 패배)과 주인의 선포(내지 승리)가 만방에 알려지는 순간이다.   

 

위의 무협지 플롯은 근대적 인식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화이다.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을 잠식해가는 과정이 진보이고 획득이며 발전이라는 근대적 패러다임하에서 객체는 무릎꿇어 인식주체를 향해 패배와 복종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 객체는 자연일 수 있고, 식민지 국가일 수 있으며, 당시에는 세상속에 섞여 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았으나 지금은 사라진 정신병자, 부랑아, 동성애자, 히피들그 밖에 인식주체와는 다른 무리들, 즉 타자라 할 수 있다. 근대는 체제에 의해 타자를 향한 인정투쟁의 거대한 망이 만들어지던 시대였다. 그 망을 통과한 자만이 체제안으로 편입되고 망에 걸린 무리들은 버려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푸코의 근대비판은 시작되는데

 

말과 사물, 광기의 역사 등으로 대표되는 푸코 초기 계보학적 연구들이 역사적으로 힘과 지식의 역학속에 구성된 주체의 허위를 폭로했던 작업이라면, 성의 역사로 대변되는 푸코의 후기 작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허물이 벗겨져 탈영토화된 주체를 어떤식으로 재영토화 시키는가의 문제, 즉 자기가 자기를 형성하는 방식에 관한 몰두로 그 관심이 바뀌었다. 이를 윤리적 화두로 전환하면, 근대 주체 철학 위에 서있었던 도덕이 보편에 개별을 맞추는 입법의 차원이었고, 그러한 도식속에서 윤리란 그 명법을 내 것으로 끌어당겨서 (자발적, 의식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보편을 향해 투항하게 만드는 그런 주체를 위한 윤리였다. 반면, 푸코의 후기사상에 나타나는 윤리적 판단의 근거는 보편보다는 개별에 포커스가 있다는 점에서, 칸트류의 의무론적 윤리나 니체가 비판했던 노예의 도덕과는 사고의 지점도 다르고 전개양상도 판이하다.

 

푸코는 근대 프로젝트 안에 펴져있던 총체적 난맥의 첫 단추를 주체규명에서부터 찾았고, 이런 이유에서 주체대신 자기를 제안한다. ‘자기라는 말은 기존의 철학에서 말해왔던 주체개념과는 다른, 자기의 욕망(혹은 본색)이 더 충실히 반영된, 즉 체제가 선사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기름이 빠진 주체라 할 수 있다.[각주:2] 비록 근대적 주체는 사망했지만, ‘자기라는 이름이 부여된 새로운 주체가 등장한 셈이다. 이는 데카르트이래 등장한 근대적 주체가 절대적 주체로 등극한 이래 한차례도 흔들리지 않았던 서구 주체중심의 철학에 대한 의식적이고도 악의(?)적인 반동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고대 그리스로!

 

서구 현대 사상가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이 당면한 문제의 해법을 찾아 많은 경우 고대 그리스를 향해 회귀한다는 점이다. 마치 교회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를 외치는 듯 말이다. 대표적으로 하이데거가 그랬다. 서구 형이상학에 대해 평하면서 존재망각의 역사였다고 비판하던 하이데거가 내세운 전략이 바로 고대 그리스로의 귀환이었다. 이는 근원적 존재체험과 기원에 대한에 여전한 미련과 애착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하이데거 안에 깃들어있는 사상적 혹은 미적 보수성을 엿볼 수 있다.[각주:3]

 

푸코 역시 자기의식의 단초를 고대 그리스로부터 끌어온다. 하지만 근대적 주체에 대한 문제제기 후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고대그리스의 존재체험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던 하이데거와는 달리, 푸코는 근대적 주체가 해체되어야 하는 이유를 오히려 고대그리스의 존재 체험에 기대어 전개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양자는 확연히 구분된다.[각주:4]

 

고대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선함이란 착함보다는 좋음이었다. 즉 내게 쾌를 선사하는 것이 선한 것이고, 내게 불쾌를 선사하는 것은 악한것이다. 물론 그것은 감각적인 쾌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정신적인 영역까지를 포함한 쾌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윤리학에서 인생의 목표를 행복이라 했을 때 이는 전적으로 좋음을 의식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푸코가 의도했던 것은 그리스적인 좋음을 다시 현대의 윤리적 테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진정 원했던 것은 어떤 보편과 규범에 의해 개인이 함몰되지 않고, 자기가 자발적으로 자기를 구성하는 테크놀로지의 추구이다. 그런 의미에서, 푸코에게 있어 윤리란 미학적 성격을 띤다.[각주:5] 전통적 의미에서 미적 판단력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영향을 받아 예술작품 안에 스며있는 이데아의 순도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방(복사)의 정도가 정교할수록 진품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현대 미학에서는 미적 주체와 미적 대상간의 일치라는 전통적인 미에 대한 의식을 거부한다. 오히려 이데아가 지닌 아우라의 파괴를 통한 새로운 감동, 새로운 가치 창출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푸코는 이러한 현대 미학의 패러다임을 그의 윤리학으로 초대한다.

 

에필로그: 결국, 자기의 윤리란?

 

윤리학은 자고로 본질주의와 토대주의에 입각해 이데아를 상정한 후 윤리적으로 그 본질에 따라 사는 삶을 안내하는 학문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윤리학은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생성으로 보기 때문에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 시간의 경과속에서 창조적인 삶을 사는 것, 그리고 동일성안으로 들어온 창조와 변화를 수렴하고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생성과 창조의 과정속에서 동일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자기의 도덕을 어느 누군가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기의 윤리를 보편성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설득과 대화와 연대의 과정 모두가 윤리학의 범주가 된다. 종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윤리학이 등장한 셈이고, 이에 대한 발전과 도전과 응전은 지금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 웹진 <제3시대>


  1. “자기에 대한 실천에 있어 그 실천의 주된 목표는 자기와의 관계속에서, 바로 자기 자신 속에서 찾아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자기로의) 전환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이동을 뜻한다.”- Michel. Foucault, 『The Care of the Self - Vol 3 of The History of Sexuality』, Translate by Robert Hurly. (New York: Pantheon Books, 1986), 64-65. [본문으로]
  2. “자기체험은 단순히 통제된 힘이나 언제나 반항할 준비가 된 힘에 대한 지배력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자신에 대해 느끼는 일종의 기쁨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 접근할 수 있는 자는 자신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자신의 현 모습에 만족할 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다.”- Michel. Foucault, 『The Care of the Self - Vol 3 of The History of Sexuality』, Translate by Robert Hurly. (New York: Pantheon Books, 1986), 66. [본문으로]
  3. 하이데거가 걸어갔던 그리스전통에로의 복귀에 대한 부분은 2009년 9월 25일 웹진에 게재되었던 졸고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3)”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119)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4. 『성의 역사』 2권과 3권은 주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성도덕을 다루면서 윤리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시도하는데, 특별히 자기이해와 고대 그리스와의 연관에 주목하려면 아래 부분에 주목하기를: Michel. Foucault, 『The Care of the Self - Vol 3 of The History of Sexuality』, Translate by Robert Hurly. (New York: Pantheon Books, 1986), 57이하. [본문으로]
  5. “왜 우리의 삶은 예술작품이 될 수 없는가? 사물은 예술의 대상이 되는데 우리의 삶은 왜 그렇지 못하는가?” - Michel. Foucault, ‘On the Genealogy of Ethics: An Overview of Work in Progress’ in 『The Foucault Reader』, Edited by Paul Rabinow. (New York: Pantheon Books, 1984), 35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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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상 아줌마의 개



오종희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강아지를 끔찍이 좋아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강아지는 더 이상 애완용이 아니다.
‘애완견’이란 말은 어느덧 폭력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가 되어 버렸고
공식적으로는 ‘반려견’, 사적으로는 ‘우리 애기’ ‘우리 막내’로 부르고 있는게 보통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도 ‘개 주인’이란 당최 그 못생긴 명칭 대신
‘엄마, 아빠’라는 가족애 넘치는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나와 우리 딸아이가 ‘동동이’의 엄마, 누나가 된지 벌써 2년째다.
(남편은 아직 동동이 아빠가 되기를 완강히 거부한 채 방황하는 중...)

세상 다른 경우도 그렇지만 개를 키우는 이들에게도 그들끼리의
무언의 소통함이 있는 법이다.
특히나 녀석들을 끌고 산책을 하다 만나는 경우, 마치 남들 아직 이불 속에서 게으름 피우는  일요일 오전, 성경책 한 손에 들고 종종거리며 길을 가다가 저 만치
각진 정장입고 지나쳐가는 어떤 이의 손에도 두꺼운 검정 책이 들려져 있을 때
그럴 때 느끼는 ‘천국 동창 의식’ 뭐 그런 비슷한 걸 강아지 산책 도상에서
서로에게 느끼는 거다.
얼마 전 동동이를 안고 집 앞 슈퍼에 갔을 때의 일이다.
평범하게 생긴 어떤 아주머니가 ‘아기 몇 살이냐고, 착하게 생겼다고 ’ 말하며 다가와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의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 아주머니 말인즉슨, 작년에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단다. 너무 착하고 예쁜 마르티즈였고
한 식구로 살던 개가 죽는 걸 지켜보는 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라 했다.
사실 나도 동동이 전에 키우던 푸들을 하늘로 보낸 적이 있는지라 말하는 우리 둘 다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소통과 고통을 오가고 있었는데
그런데 특이 사항이 그 이 후부터 나타났다.
그 아주머니 왈, 강아지가 죽는 순간 그 강아지가 아주머니에게 하는 말을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단다. 그 강아지가 말하기를
“나는 이제 멀리 가요. 나는 요정이었어요. 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과 사랑을 전해 주기 위해 이 땅에 온 요정이고 천사였어요~
그 순간 나는 ‘아~ 예~’하고 말을 흐리며 재빨리 생각하기 시작했다.
‘혹시 이 분이 살짝~?’ ‘아님, 이 분이 외계인과 소통한다는 그 유명한 빵상 아줌마?’
의심이 거기까지 이르자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마르고 다음에 또 뵙겠다고 건조한 인사를 건넨 뒤 잰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딸아이에게 이상한 아줌마 다 봤다고 한참을 웃고 떠들었는데... 그러나 비웃는 것도 잠깐
아, 이게 무슨 ‘빵상 바이러스’인지 우리 동동이를 볼 때마다 그 아줌마 말이 생각나면서
‘그래 맞아 저렇게 순진한 모습으로 사람의 맘을 맑게 해주는 저 녀석이 천사가 아니면
도대체 뭐가 천사지?’ 하는 감염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였다.
그리고 이제 나는 당근 빵상 아줌마가 되었다.
내 귀에도 ‘나는 천사예요’라 말하는 동동이 말이 확실히 들리니까!


우리 나라에서도 대중성 높은 일본 팝 아티스트 ‘나라요시토모’의 거대한 흰 개 조형물이다.

 



작가가 만든 이야기에 나오는 아주 아주 큰, 너무 커서 육안으론 개 인줄 잘 모르는
그런 놈을 팍 줄여서 그나마 작게 만든 거란다.
개인적으론 일본 네오 팝 작품들의 매끄러운 케릭터들을 그닥 선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본 아오모리현에 있다는 저 흰 개를 눈 앞에서 보면 더 귀여울 거라는 기대치를
덧붙힌 감상이긴 하지만 나는 저 거대한 놈이 참 따뜻하게 느껴진다.
사람의 키로는 우러러 볼 수 밖에 없는 저 <아오모리의 개>는 실재로
집에서 동동이가 앉아 있을 때 녀석의 코 밑에 바로 누워 올려다 보면
따뜻하고 평온하게 내가 지금 위로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던 모습 그대로, 또 내가
소인처럼 작아지고 동동이는 거대하게 커져서 몸 크기가 뒤바뀌는 상상을 하던
그 모습 그대로를 하고 있다.
게다가 저 흰 개의 절대평온의 눈꺼풀을 보라!
어디서 이미 많이 본 거 같지 않은가? 바로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눈꺼풀이다!
그렇다면 <아오모리 개>의 미륵설이나 동동이의 천사설이나 다 동급의 신화가 아닌가.
역시 나라요시토모 또한 같은 빵상과인 거다!


희고 평온하고 빅 사이즈 귀여움이라는 언발란스한 쾌감을 주는 저 <아오모리의 개>는
유치한 것을 내놓고 좋아해도 된다고,
역사적 기념비만이 거대 공간의 주인이 아니라고,
장난스런 강아지 모습도 단단한 소재로 거대하게 표현 할 수 있다고,
그 것이 서브 컬쳐건 뭐건 메인 스트림 눈치를 보며
네 취향을 감추지 않아도 된다고 당당하게 외계 언어로 말 하고 있다.
“빵상~!”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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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지극히 인간적인 책
- 인물로 뒤집어보는 성서(김진호, 삼인)


김재홍
(성공회 부평교회, 진보신당 당원)



《라이프》(Life)라는 잡지에서는 21세기가 임박하였던 1997년에 마르틴 루터의 성서번역을 1천년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고 보았다. 그 이유를 난 성서읽기의 다양성을 발견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개혁이전의 교회에서는 공부를 많이 하였거나 신학교를 나온 지식인을 빼고 대다수 신자들이 라틴어로 쓰인 성서를 읽을 수 있는 학식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가르쳐주는 대로만 성서를 이해하는 것 외에는 성서를 만날 수 없었다. 이를 이용해서 교회에서는 신자들을 지배하였다. 루터의 성서번역은 기독교인들이 교회의 권위가 아닌, 자신의 지성으로 읽을 수 있게 함으로써 성서를 읽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다. 실제로 신학자 김호경은 《l인간의 얼굴을 한 성서》(책세상)에서 루터의 성서번역이 기독교인들의 성서읽기가 교의적인 해석에서 학문적인 해석으로 발전함으로써 성서 비평학이 등장했다고 말한다.

신학자 김진호의 《인물로 뒤집어 보는 성서》는 이러한 성서읽기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성서인물들을 사회에서 소외와 억압을 받는 민중들에 대한 관심으로 재해석하는 비평적 성서읽기를 한다.

이를테면 엘리야 예언자 이야기를 저자는 엘리야 시대에 살던 민중들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이어간다. 흔히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의 대결로만 알려져 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승리한 야훼의 예언자로 찬양될 따름이다.

하지만 저자는 엘리야 예언자 이야기를 지배계급들의 탄압으로 인한 민중의 고통과 투쟁의지가 만들어낸 기억이라고 이해함으로써 엘리야를 재해석한다.

엘리야가 살던 시대는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와 사렙다의 과부 이야기에서 드러나듯이 민중의 수난사였다. 가뭄이 일어났을 때 아합이 걱정한 것이 민중들이 아닌 전쟁에서 부릴 말과 노새였던 것(열왕기상 18:5)이었다는 이야기와 사렙다 아줌마가 엘리야 예언자에게 “저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뒤주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 몇 방울이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조금 주워다가 저희 모자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있는 것이나 모두 먹을 작정이었습니다.”(열왕기상 17:12)라고 말한 이야기는 민중들이 소외와 가난으로 고통 받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사회의 진짜 모습은 오므리 왕조에 의해 형성된 신학인 바알 신앙에 의해 가려진다. 저자의 말대로 오므리 왕조가 만들어낸 ‘국가의 성공’은 국가적인 지원에 힘입은 대규모 제의, 그 화려한 전례행사를 통해 찬양되었고, 이에 도전하는 이들은 탄압받았다.(민중의 예언자 엘리야, p.155)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과의 대결로써 사회의 옳지 못함을 가리는 종교는 거짓에 불과함을 드러낸다. 엘리야 예언자는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인 것이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 주교의 말처럼 성서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고백이다.[각주:1] 이를 우리가 사는 시대의 현실로 읽는다면 인간을 소모품으로 여기고 착취하며 이에 도전하면 억압하는 자들 그리고 이들의 편에 서서 무저항을 강요하는 교회로 인해 고통받는 민중들에 관심을 가지시는 하느님, 그래서 예언자들을 통해 민중의 편에 서시는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 성서이다. 그래서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민중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을 읽어내고 실천하는 것임을 저자는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을 뒤집어 읽어냄으로써 논증한다.

ⓒ 웹진 <제3시대>


 


『인물로 보는 성서 뒤집어 읽기』

지은이 : 김진호

펴낸날 : 2010년 7월 14일
페이지 : 286쪽
정  가 : 12,000원
펴낸곳 : 삼인

             * 책 소개 보러가기

책 소개

김진호 저자가 뒤집어 읽은 성서에는 성적 억압, 가부장주의, 보수적 민족주의, 보복의 정치, 권력과 지배 이데올로기의 야합, 다수성을 용인하지 않는 공동체주의 등이 판을 친다. 이에 저자는 그런 야박한 현실에 짓눌리고, 스러져 간 이름 없는 인물들의 삶을 되살려 낸다.

곧 천상의 복음 아래 은폐된 폭력을 해부하고, 일개 조연으로 또는 무명으로 사라져 간 성서 속 인물들을 복권해, 성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성서를 읽으려는 것이 책의 주제다. 단순한 성서 비판서도 아닌, 그렇다고 교조적인 성서 찬양서도 아닌 <인물로 보는 성서 뒤집어 읽기>는, 성서의 내적 한계를 조망하면서 그 심오한 의미를 재발견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1. 《영원한 인류의 고전 신약성서》/정승우 지음./아이세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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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27 18:1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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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드디어 기다리던 웹진이 나왔습니다. 제 부족한 글을 정성스레 담아주어서 감사드립니다.
    • 2010.12.30 17:3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너무 늦게 나와 죄송할 따름입니다. ^^; 부족한 글이라니요. 저희 웹진이 부족한 거겠지요. 앞으로도 많이 관심 가져주세요. ^^
  2. 2011.01.11 00:59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물론 관심을 가지겠습니다. 그런데 종이잡지는 언제 나옵니까?친한 형님과 신부님이 잡지가 나오면 보여달라고 하셨는데, 아직 잡지가 오지 않아서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 2011.01.12 17:1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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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홍님. 정용택 연구원입니다.

      페이퍼진은 웹진 두 호를 묶고, 상황에 따라 몇 개의 글을 추가해서 발행합니다. 현재 다음호 페이퍼진을 편집 중에 있구요. 이번 달 중으로 아마 발송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후 붕괴 시대, 아주 불편한 진실 조금 불편한 삶』

엮은이 : 한국교회환경연구소
펴낸날 : 2010년 12월 13일
분  야 : 인문 / 종교
판  형 : 신국판
페이지 : 440쪽
정  가 : 16,000원
펴낸곳 : 도서출판 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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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기후 붕괴 시대 원년을 사는 청지기들의 대안

이제 기후 변화 시대를 지나 기후 붕괴 원년을 맞은 우리.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후 재앙은 강 건너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오늘의 뉴스’로 보며 그 폐해를 몸으로 느끼는 절박한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 지구적인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매우 미온적이고, 때로 그에 대한 대비도 사실 막막하기만 하다. 너무 커다란 변화에 대해서 ‘서서히 끓어오르는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그저 무감각해지는 것으로 숨 막히는 하루하루를 넘길 뿐이다. 허나 우유부단하고 임시변통적이며 뒤로 미루기가 통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럴 때 지구 위기의 진실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시대의 징조를’ 읽고 ‘세상을 관리하고 보전하는 것’이 청지기들의 역할임을 깨달은 사람들이 예언자의 목소리를 높여 시대의 징조를 말한다.

이 책은 기후 붕괴 시대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실질적 대안을 함께 엮었다. 한국교회환경연구소는 지난 몇 년 동안 기후 변화 문제를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중요한 신앙적 이슈로 인식하고 그에 대한 성찰을 지속해왔다. 그리고 단지 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의 교회들로 하여금 그 문제를 인식하고 실천하기를 위한 구체적인 묵상, 성경공부, 설교 등의 실천적 프로그램을 제시하였다. 즉 이 땅의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나와 우리의 사회가 일상생활에서 소비하는 에너지와 먹을거리 그리고 상품 소비 등이 어떻게 기후 변화와 직결되어 있는지를 깨닫고 온실가스를 줄이는 생태적 삶을 살도록 돕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기후 변화는 신학적 문제이다

기후 변화로 인한 재앙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많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늘도 여전히 날씨 변화에만 관심을 쏟을 뿐, 그 안에 담긴 시대의 징조를 읽고 우리를 파멸로 몰아가는 성장 지상주의, 물질 만능주의, 그리고 무한 탐욕주의 사회체계를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솔직히 상황은 절망스럽다.

여성생태신학자 샐리 맥페이그의 말을 빌리면 “기후 변화는 신학적 문제이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이 공통의 관심사인 기후 붕괴를 이야기하면서 기독교 신학적인 성찰을 다룬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인간 중심주의에 길들여진 기독교의 폐해를 본질에서 파헤친다. 하나님이 창조 시에 널리 번성하라고 하신 말의 뜻을, 인간 종種만이 지구를 자기 소유인 양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를 돌보는 청지기 역할을 맡기신 것이다. 허나 이즈음까지의 그리스도인들은 청지기가 아니라, 성장 지상과 물질 만능이라는 사회구조를 더욱 가속했다는 점에서 자기반성의 가슴 찢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

한국의 근세사를 비견하면 근대화가 산업화의 동일어로 여겨지듯이 서구화와 기독교화 또한 동일어로 여길 수 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물질 만능과 인간 중심의 사상의 책임을 회개해야 한다. 여기가 기후 붕괴 시대와 그리스도교 신학적 성찰이 만나는 지점이다.

기후 붕괴의 문제를 결국 인간의 문제이며 지식과 기술의 문제를 넘어 인간의 인식과 태도 그리고 실천의 문제이다.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접근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총체적 위기의 시대에는 우리 모두의 의식을 전환해서 신생대에서 ‘생태대Ecozico’로 넘어서지 않으면, 이 시대에 희망이 없다는 시대의 사명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노아의 방주를 만들 듯이, 각자의 삶에서 구체적인 몸실천이 없다면 기후 붕괴 시대를 넘길 수 없다는 절체절명의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금 불편한 삶으로 온 생명과 더불어 살기

과연 우리에게 희망은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어떤 희망일까? 만약 그것이 진정한 희망이라면 거기로 가는 구체적인 길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성경은 말한다.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요엘 2:12-13)

이 책은 세상을 관리하고 보전하는 청지기 책임을 맡은 우리가 화석연료에 기댄 문명에 서 있는데, 이 문명이 과연 축복인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 성장만이 살 길이라며, 모든 것을 경제적 효율성으로 평가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돌이켜야만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파괴하고 착취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품고 있는 우리의 친구요 형제자매로 느끼며, 우리 모두가 생명의 끈으로 엮여 있음을 깨닫고 생명을 살리는 삶으로 전화하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마음을 찢는 회개라고 한다.

눈앞에 다가오는 지구적 규모의 근본적인 기후 변화를 겪으면서 인류는 생존의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고 한다. 앞으로 기후 변화로 인한 재난이 닥쳐온다면 재난이 초래하는 위협 그 자체보다 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적 태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새로운 인간성을 획득한다면 기후 변화가 몰고올 고통스러운 시험을 통과하고 한 단계 도약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것이다. 만일 재난을 겪고 있는 인류 공동체가 서로 돕고 나누며 극복하려 한다면 비록 많은 손실은 있겠지만 인류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노아의 홍수 뒤에 보여준 무지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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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건너, 요단강 넘어』
- 서용문 목사 순교 60주년 추모문집

지은이 : 서광선 서인선 서철선 서만선 홍경만
펴낸날 : 2010년 10월 23일
분  야 : 에세이
판  형 : 신국판
페이지 : 248쪽
정  가 : 12,000원
펴낸곳 : 도서출판 동연
ISBN : 978-89-6447-127-2 03200


주요검색어 : 순교자/아버지/박해와 순교/추모 에세이/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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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요단강을 넘어 가나안 복지, 통일한국을 염원하며

올해는 6・25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순교 당한 기독교인들의 순교 60주년이기도 하다. 고 서용문 목사는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탄압을 견디다 못해 만주로 건너갔고, 그후 해방을 맞아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 북한공산당에 맞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다가 남한과 UN군의 평양 수복 때 후퇴하는 북한군에 의해 총살로 순교당한 장로교 목사이다.

아버님의 순교 60주년을 맞아 슬하의 5남매 중 남한에 피난 온 4남매가 추모문집을 엮었다. 유족을 대표한 맏아들 서광선 박사(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아버지의 순교 60주년을 추모하면서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기도합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 되고 평화롭게 통일을 이루는 날을 위하여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전쟁을 치룬 세대는 평화통일의 날을 맞이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대동강을 넘어 한강에 와서 60년의 세월을 살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평화통일의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세가 건너지 못한 요단강 강가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우리 책 제목을 [대동강 건너, 요단강을 바라보며]라고 붙였습니다.”라고 말한다.

즉, 이 책은 반공 목사인 아버지의 죽음을 다음세대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펴 낸 것이다. 그래서 서광선 박사는 머리말에 “이 책을 요단강 넘어 가나안 복지, 통일 한국을 바라보며 이를 위해서 노심초사 통일 운동과 평화 운동에 헌신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칩니다.”라는 헌사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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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두 진리』
-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종합

지은이 : 데이비드 레이 그리핀
옮긴이 : 김희헌
펴낸날 : 2010년 12월 9일
분  야 : 인문
판  형 : 신국판
페이지 : 264쪽
정  가 : 12,000원
펴낸곳 : 도서출판 동연
ISBN : 978-89-6447-128-9 9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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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아직도 기독교 신앙과 과학적 자연주의와의 화해는 요원하다. 이 책은 과정사상가이며, 화이트헤드의 뒤를 이어 과정신학의 계보를 잇는 존 캅의 제자이고 <과정사상연구소>를 함께 운영했던 지은이의 책이다.

근대 이후 그 골은 더욱 깊어져, 과학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만큼 ‘과학적’(논리적)이 됐으며, 그에 반하여 기독교 신앙은 더욱 근본주의로 치닫고 있다. 데이비드 레이 그리핀 박사는 과학과 종교 간의 논쟁에 대해,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을 끌어들여서 때때로 전적으로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두 세계관의 근본적인 종합을 제안한다. 그는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이란 이름으로 명명되어 온 두 전통 모두가 위대한 진리 즉, 보편적 정당성과 중요성을 지닌 진리를 구현하고 있지만, 양자 모두 왜곡되어 왔으며, 또한 과학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가 지닌 비전 사이에 갈등을 부추겨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핀은 과학 또는 그것이 정당하게 전제해 온 형태의 자연주의와 기독교 복음이 지닌 본래적인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이해되어 온 기독교 신앙 이 둘 사이에 본래적인 갈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과정사상으로 모색한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과의 화해

기독교의 본래적인 믿음과 가르침을 유신론적 자연주의로 복원시켜낼 수 있는가? 그리핀이 던진 이 질문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인뿐만 아니라, 이 시대 대부분의 지성인에게도 매우 낯선 것이다. 근대 후기(19세기 중반 이후)에 접어들면서 ‘자연주의’라는 개념은 매우 한정된 세계관 즉, 감각주의적 인식론과 유물론적 존재론의 조합으로 구성된 세계관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에 맞서 교회는 과학이나 철학과의 대화에서 반지성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초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을 고집하며 기독교 신앙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유신론과 과학적 자연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이 적대적인 관계는 불가피한 것인가? 이 책에서 그리핀은 서구 지성사에서 벌어진 기독교 신앙과 과학/철학과의 관계를 살펴 양자의 애증관계를 먼저 해명한다. 이로써 현대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적 관념 체계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반지성주의를 극복함과 동시에, 무신론으로 귀착된 근대의 과학적 자연주의의 한계와 모순을 밝히려 한다. 그리핀은 양자의 대립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힐 뿐만 아니라, 양자의 관심과 해명을 종합하려는 데까지 나가면서 자신의 구성주의적 포스트모던 신학constructive postmodern theology을 전개한다. 탁월한 과정사상가인 그리핀에게 이 작업은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낼 수 있는 일반적 사유체계”를 구성하고자 하는 과정철학의 핵심적 이상을 구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신)전통주의적 신학에 익숙한 기독교 신앙인은 그리핀의 통합적 방법론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 한 가지 뼈아픈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를 간추려보면 이렇다. 과학적 신념과 종교적 신앙이 조화로운 관계를 누렸던 17세기가 지나고, 기독교 신학이 이신론deism으로 굳어져 가던 18세기에 과학과 종교는 갈등과 균열을 경험하게 된다. 이 시기에 기독교 신학은 과학적 자연주의와 계몽주의 철학의 파고를 넘기 위해 이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 대화를 시도한 “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신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다지 믿음을 주지 못하는 까닭은 그 신학 방법론이 열정의 진실함에서는 의심할 바 없지만 해명의 깊이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물론 만일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유럽의 기독교 교회는 19세기를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의 신학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리핀에 따르면, 그 이유는 자유주의 신학이 결코 종교적 세계관을 담을 수 없는 왜곡된 자연주의(Naturalismsam)를 자신의 도구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몰락 이후 기독교 교회가 선택한 방식은 크게 보면 두 가지다. 하나는 평화로웠던 (17, 18세기적) 과거의 기억(이신론)으로 회귀하여 안전(무신론으로부터의 문단속)을 도모했던 유아론적 시대 역행이다. 이 시대착오적 흐름은 교회의 안전에 대한 열망이 진실했기 때문에 신앙인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에 재등장한 옛 정신으로서 자기 시대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투밖에 없었다. 이 전투적인 정신이 근본주의 신학이란 이름으로 19세기 말에 등장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근본주의 신학이 교회 안에서 승리할수록, 교회는 시대정신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기 시대를 이탈한 정신은 결코 안전할 수도 없다는 뚜렷한 가르침만 남겼다. 다른 하나는 소위 신정통주의 신학이다. 이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지성을 흡수했지만, 그 방법론(과학적 자연주의의 활용)을 활용하지는 않았다. 대신 기독교 신학의 성격과 과제를 “독립”시켜, 기독교 신학의 독자성을 얻으려 했다. 어쩌면 이것은 밀려오는 시대사조에 대한 소심한 대응이요, ‘진정한 진리는 서로 대립될 수 없다’는 직관을 언어에 담으려고 했던 기독교 신학의 이상에서 이탈한 현상학적 차이에 대한 호소라고 하겠다.

이안 바버가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라는 책에서 “갈등”도 “독립”도 “대화”도 오늘날의 기독교 신학의 모델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통합” 모델을 제시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엔 갈등의 독선으로, 독립의 순수만으로, 대화의 열정만으로 오늘날 기독교 신학이 위치한 포스트모던 시대를 헤쳐 갈 수 없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리핀처럼 이안 바버 역시 과정철학의 세례를 받고 있다는 점을 눈치 챈 사람들은 그 주장의 진정성을 의심할지도 모른다. 특히 “일반적 사유체계로의 통합”이라는 사상적 목표에 대해서 포스트모던의 해체주의 정신은 정당한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핀이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을 따라가며 배우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특히 기독교 신학이 (초)자연주의와 맺어 온 다채로운 관계를 훑어가다 보면 초자연주의에 경도된 오늘날 기독교 교회의 사고방식이 지닌 편향을 보게 될 것이고, 과학적 자연주의가 근대 초기에서 후기로 이행하는 동안 겪게 된 변화를 이해할 때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사적 가치와 한계를 알게 될 것이며, 유신론적 자연주의 세계관의 가능성을 발견할 때 교리주의적 집착을 끊을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보다 풍요로운 기독교 신학의 전통을 경험하고 보다 창조적인 기독교 신학의 미래를 꿈꾸게 될 것이다.

실로 기독교 신학의 전통은 오늘 신봉하는 교리보다 훨씬 크다. 책임 있는 기독교 신학은 교리를 단순히 “희화화해서 전복”시키려하지 않고, 교리의 잘못된 기제를 무력화할 수 있는 “창조적인 긍정”을 통해서 전통의 참된 의미를 오늘에 되살려 갈 것이다. 그리핀의 신학은 기독교의 “본래적 가르침primary doctrine”을 창조적으로 긍정하는 방식을 취해 온 과정신학의 이 전통에 충실하다.

이 책은 그리핀 박사가 은퇴할 무렵에 출판된 것(2004년)으로, 그의 사상적 원숙미가 잘 드러나 있다. 다른 저술에 비해 비교적 작은 분량으로 한정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리핀의 과정신학적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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