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생매장 돼지의 절규”는 2011년 1월11일 경기도 이천시 대월면의 두 매립지에서 생매장 당하는 1,900마리 돼지의 매립 장면을 촬영한 것입니다.

이 영상은 '안전한 먹거리'와 '청정국 지위'를 핑계로 자행되고 있는 생명 학살의 현장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구제역 살처분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이 영상을 많은 분들이 퍼가고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참고로, 본 영상에는 잔인한 살처분 과정이 여과없이 담겨 있으니 노약자나 심신이 약한 분은 시청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영상은 동물사랑실천협회가 제공했으며, 지난 23일 5개 종교(천도교, 원불교, 천주교, 개신교, 불교) 35개 단체가 주최한 <구제역 살처분 방식의 개선을 촉구하는 동영상 - “생매장 돼지의 절규” 공개 기자회견 및 문화제>에서 처음 공개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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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과 최악 사이
- 인간중심적인, 너무나 인간중심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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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인간없는 세상_임옥상

“사람이 산다는 것이 벌인가?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악인가?
아니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죄인가?
인간도 축생에 다름 아니어늘....
미안하다 용서라 잘 가라


 

1. 헤겔은 인간의 역사 발전 과정을 인간 자유의 신장(伸張)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즉 오직 한 사람만이 자유를 누리던 군주독재 체제가 소수의 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귀족정치체제로 바뀌고 귀족정치체제가 많은 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민주정치체제로 바뀌었다고 보았습니다. 1789년의 불란서 혁명은 왕과 귀족계급이 독점한 권력을 일반시민도 정치적 권리에 참여할 자유를 안겨주었습니다. 불란서혁명은 시민들이 자기네의 권리를 쟁취하는 이른바 시민혁명이었습니다. 자유가 한 사람만의 전유물에서 소수 사람의 소유물로, 소수 사람의 소유물에서 모든 시민의 소유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볼 때에 불란서 혁명은 인간 자유의 신장 과정에 획기적인 찬란한 이정표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 ‘시민’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명칭이 아니고 도시에서 상공업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이른바 제3계급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귀족과 성직자 계급인 제1계급과 사회의 밑마닥에 속하는 인민들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계급으로서의 제3계급이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자본주의 혁명과 더불어 사회의 주도권을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불란서혁명을 통해서, 그리고 잇따른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서 명목상으로 모든 사람에게 자유가 보장되었다 하더라도 인종적인 차별, 성적인 차별, 빈부상의 차별, 등등 갖가지 차별이 잔존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흑인민권운동, 여성해방운동, 가난한 사람의 해방을 외치는 해방신학, 억압받고 차별받는 소외된 민중의 해방을 부르짖는 민중신학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역사’라는 용어 자체가 완전히 인간중심적인 사고의 산물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인간이 이룩한 일, 인간 사회의 변천을 문제삽습니다. ‘역사’에 대립되는 용어로서 ‘자연사’(自然史, natural history)란 것이 있습니다. 자연사는 자연의 변천사. 즉 하천의 생성과 변화, 화산과 지진의 발생, 지질의 생성, 기후의 변화 등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역사가는 자연사는 역사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자연적 사건, 예를 들어 큰 지진이나 홍수, 화산폭발 등이 인간의 역사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한에서 역사학의 대상으로 편입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신구약성서에 기록된 역사를 특히 ‘구원사’(救援史, salvation history, redemptive history)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역사를 뜻합니다. 인간이 구원을 문제삼는다고 하면서도 유대교에서는 유대민족의 구원을 중심문제로 다루었으며 그리스도교는 만민족의 구원을 주장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에 국한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대체적인 사조였습니다. 여기에서 남미 해방신학, 흑인해방신학, 여성해방신학, 한국의 민중신학은 각각 가난한 사람, 흑인, 여성, 민중을 구원의 중심 주체로 삼고 있습니다.

구원사의 중심 대상은 오로지 인간입니다. 자연계의 구원은 거의 관심 밖이거나 있다하더라도 겨우 끝자락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인간 구원이 너무나 중요하고 급선무라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변명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2. 독일에서 겪은 이야기입니다. ‘고려영행사’라고 하는 한국여행사가 개설되어 지사장이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이사왔습니다. 한국에서 가정부 아가씨도 대려왔습니다. 집에서 애완견을 키웠는데 병이 들어 설사를 하는 바람에 마루 바닥은 물론이요 애써 빨아놓은 침대 시트나 소파를 가리지 않고 똥을 마구 싸기 때문에 가정부가 화가 나서 막대기로 개를 때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가 “깽깽” 하고 울어댔습니다. 얼마 후에 경찰 들이닥쳤습니다. 그 아가씨는 동물학대죄로 경찰에 끌려 갔습니다. “깽깽”하는 개 울음 소리를 듣고 이웃집에서 경찰에 동물학대행위로 신고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에 “참 한가한 나라로구나!”하고 속으로 빈정그러렸습니다. 제3세계에는 인권문제로 치열한 투쟁을 벌이는데 너희들은 ‘견권’(犬權)을 가지고 아단법석이니 가소롭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일 학생들 중에서도 제3세계의 인권문제, 반독대 민주화 투쟁등에 연대해서 데모도 하고 운동을 하는 학생들도 있는 반면에 ‘동물학대 방지 운동’을 벌이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닭들이 빽빽한 닭장에 갇혀서 추럭에 실려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확대해서 걸어놓고 닭들이 누려야 권리를 외첬습니다. 그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게도, 그 때에는 나는 이들의 주장에 별다른 감명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모피옷 반대 캠패인도 벌였습니다. 나는 “그러면 너희들은 구두와 허릿띠는 가죽 대신에 헝겁으로 만들어 쓰느냐?” 하고 속으로 빈정그렸습니다.

 

3. 지난 해 11월 23일에 경북 안동에서 구제역이 발생한 이래 2011년 1월 28일 현재까지 돼지와 소가 287만 여 마리가 매몰 처리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지난 18일에 200만 마리 였던 것이 10일 사이에 근 100만 마리가 늘어난 셈입니다.

[*구제역(口蹄疫 foot-and-mouth disease; 소, 돼지, 양, 염소, 사슴 등 발굽이 둘로 갈라진 동물(우제류)에 감염되는 질병으로 전염성이 매우 강하며 입술, 혀, 잇몸, 코, 발굽 사이등에 물집이 생기며 체온이 급격히 상승되고 식욕이 저하되어 심하게 앓거나 죽게 되는 질병으로 국제수역사무국(OIE)에서 A급질병(전파력이 빠르고 국제교역상 경제피해가 매우 큰 질병)으로 분류하며 우리나라 제1종 가축전염병으로 지정되어 있음. 입 구(口), (발)굽 제(蹄), 전염병 역(疫)]

1월 28일 현재 구제역에 걸린 돼지 272만 8천 328 마리 중에서
                                             
263만 1천 240 마리 (96.4%) 살처분 매몰
                         
"        "     소  14만 5천 823 마리 중에서
                                             
14만 4천 589 마리 (99.2%) 살처분 매몰
여기에는 조류 인풀루앤자 살처분된 닭과 오리 약 350만 마리는 계산되지 않았습니다.

히틀러 정권하에서 유대인 600만명을 살해한 사건을 역사가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수치(羞恥)라고 일컫습니다. 그것을 흔히 ‘유대인 학살 사건’이라 합니다. ‘학살’은 ‘참혹하게 마구 무찔러 죽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300만 마리에 가까운 돼지와 소 (닭과 오리를 합치면 600만 마리가 훨씬 넘을)를 맹매장 하다 싶이 해서 죽이는 것을 일컬어 ‘학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살처분’(殺處分)했다고 합니다. ‘처분’이라는 말은 ① 처리하여 다룸 ② 행정, 사법 관청이 법규를 적용하는 행위 ③ 권리를 행사하는 일을 뜻한다. 살처분이라는 것은 죽여서 처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살처분이라는 말 속에는 법규의 집행이요 권리의 행사이기 때문에 그 말 자체 속에는 하등의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셈입니다. 인간은 가축에 대해서 무슨 일이든지 행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살처분에 대한 비판이 있다면 살처분 자체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축을 안락사 시키지 않고 어미 돼지와 새끼 돼지를 산 채로 한 꺼번에 포크래인으로 짂어서 구덩이에 내던져 생매장하는 비인도적 잔인성에 대한 규탄 정도입니다.

 

4. 인간에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마 16:26) 그래서 십계명 중에도 “살인하지 말라”는 조항이 인간 관계에서 행하지 말아야 행위 중에서 제일 첫째 조항으로 등장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선포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는 전혀 사용하지 아니고 그대신에 ‘생명’ 또는 ‘영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라는 중요한 내용을 ‘생명’ 또는 ‘영생’이라는 개념과 바꾸어서 이해해도 될만큼 ‘생명’ / ‘영생’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은 인간에게 가장 귀중한 가치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생명이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무슨 대가를 치러더라도/ 어떠한 희생을 치러더라도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때에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절대로 최선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마 10:39) 이것은 올바르게 사는 것이 참으로 사는 방법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5.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하여 던지신 물음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에 아무리 바보이고 아무리 욕심에 눈이 먼 사람이라 하더라도 정답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물음 1: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물음 2: “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는 것이 옳으냐?”

선한 일과 악한 일 중에서 선한 일을 택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며 A라는 친밀한 한 사람의 목숨/생명을 두고 그것을 살릴 것이냐 죽일 것이냐 중에서 살리는 것을 택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좋으냐? 나쁘냐?”는 물음에는 간단히 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선 무슨 일이냐가 문제되고 또 그 일이 안식일에도 불구하고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시급하고 중대하냐를 따져야 할 것입니다. 또 단순히 A라는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것이냐, 죽일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A라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B라는 사람 또는 그 외의 C, D라는 다른 사람의 희생이 요구되는 경우에는 그 답변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인간의 윤리사상은 어떤 사람의 목적에 어떤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악으로 규정했습니다마는 인간 이외의 어떠한 자연물 -무생물이나 생물을 막론하고 - 도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인간에게 무한대의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인간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 언제부터인가 인간에게 육식할 권리가 허용되었다 하더라도 현재 인간들은 식도락적 향략을 위해서 고기를 과소비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축산업자들은 자본논리로 공장식 사육을 함으로써 가축을 학대하고 가축의 면역성을 저하시켰습니다. 현재로 기아에 허덕이는 인구가 수억인데 그 기아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을 분량의 곡물을 사료로 사용하여 생산한 육류로 가진 자들의 입의 향락을 도와주며 그것으로 돈을 버는 것은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초지를 만들기 위해서 삼림을 무제한적으로 베어냄으로써 기후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석유자원의 무제한적 사용의 부작용으로 환경오염의 정도를 넘어 이제는 기후붕괴의 원년으로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6. 1897년에 영국의 작가 B. Skoker가 “드라큘라” (Dracula)라는 소설을 써냈습니다. ‘드라큘라’는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성주였는데 이 사람은 죽었으나 밤마다 관속에서 깨어나와서 산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수 많은 흡혈귀 영화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재작년에 박찬욱 감독이 제작한 “박쥐”라는 영화도 장르상으로는 ‘흡혈귀’ 영화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흡혈귀가 된 어떤 특종의 인간이 벌이는 괴이한 행동을 서술한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고발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에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인 신부 현상현 (송강호)이 병원에서 이상한 병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바라보면서 무력감에 빠집니다. .ㄱ 때에 세계 모처에서 이 병에 대한 백식 개발을 위해서 비밀리에 생체실험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실험대상이 되겠다고 자원해서 찾아갑니다. 실험 대상이 된 사람으로서 살아나온 사람이 없습니다. 실험대상으로서 현상현도 거의 죽게 되었다가 이상한 피를 수혈받고 살아나서 돌아오게 됩니다. 본국에서는 기적을 일으킨 성자로 그를 추앙하며 그에게 안수 받으러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 때에 그가 옛날 고아원 시절에 알고 지내던 친구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이야가는 본 궤도로 접어듭니다. 상현의 친구 강우는 정신박약 장애인입니다. 그에게는 태주 (김옥빈)라는 예쁜 아내가 있었습니다.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생체실험소에서 현상현에게 주입된 이상한 혈액은 상현의 목숨을 구해주었지만 그 대신 그를 흡혈귀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피를 먹지 않으면 얼굴에 흉칙한 물집이 생깁니다. 상현이 견지지 못하는 수혈하는 환자의 피를 한 모금 빨아먹는 순간 흉칙한 물집은 순간적으로 깜쪽같이 사라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피를 먹고 나면 그는 초인적인 괴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친구 강우는 어머니가 포목상을 하면서 유족하게 살아가는 가정. 강우는 정신박약 장애인. 태주(김옥빈)라는 예쁜 아내가 있음. 태주는 아마 의리 때문에 결혼했겠지마는 그녀의 결혼 생활은 생지옥과 같았습니다.

강우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 상현은 강위 아내 태주와 눈길이 마주칩니다. 태주의 애처로운 눈길에 사로잡힙니다. 병원으로 돌아온 상현은 신앙과 애욕 사이의 갈등에 빠집니다. 그는 육체적 욕망의 유혹을 물리치려고 자기 몸에 물리적 고통을 가하면서 발버둥칩니다.

한편 태주는 생지옥과 같은 숨막히는 가정에서 한 순간이라도 도피하기 위하여 상현이 근무하는 병원에 밤에 자원봉사원으로 오게 됩니다. 이라햐여 두 사람은 사랑의 불꽃 속으로 몸울 내던지게 됩니다.

상현, 강우, 태주 세 사람은 물놀이를 갔습니다. 태주는 남편을 물에 빠뜨려 익사십니다. 상현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강우의 시신을 수몰된 가옥의 장농 속에 숨겨놓음으로써 살인사건이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합니다.

그 사이 태주도 자원해서 흡혈귀가 됩니다. 그녀는 더 대담해져서 수혈용 죽은 피를 더 이상 먹으려 하지 않고 산 사람의 신선한 피를 먹으려고 살인을 서스럼없이 행합니다. 어느날 밥입니다. 태주의 집 (사실은 시어머니의 집)에 늘상 와서 마작놀이를 하는 손님들이 모였습니다. 상현과 태주는 그 손님들을 모조리 죽여 피를 빨아먹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승용차로 밤길을 달립니다. 흡혈귀는 아침 햇살을 보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동해의 아침 햇살을 맞으며 죽기 위하여 달리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면서 눈을 감습니다.

상현과 태주는 사람의 피가 필요합니다. 자살한다는 것은 자기의 생명이라 하더라도 생명을 죽이는 것이니까 죄악입니다. 자살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생명의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사는 것도 죄요 죽는 것도 죄라는 모순 속에서 수행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 하겠습니다.

 

7.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은 반드시 다른 생명을 요구합니다. 생명이 유지되려는 다른 생명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다만 식물의 생명만은 무기물을 가지고 광합성 작용을 하여 생명을 현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곤충, 물고기, 짐승, 사람 등의 동물은 반드시 다른 생명체를 먹이로 하여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맹수는 배가 고플 때에만 먹이를 사냥합니다. 일정하게 배가 차면 더 이상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먹이사슬의 최고봉에 있는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향락하기 위하여 먹으며 축재하기 위하여 먹이를 무한대로 생산합니다. 다른 생명을 많이 희생시키고 많이 소유할 수록 성공지수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영화 “박쥐”에서 보듯이 인간의 살아 있는 피를 먹을 때에, 즉 인간을 희생 제물로 삼는 인간일 수록 더욱 더 위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Vampire가 된 상현과 태주가 오래 생명을 유지하면 할 수록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하고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악행은 끝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죄악입니다.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다른 생명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선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최선도 아니고 최악도 아닌 그 양자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동물의 생명 뿐만 아니라 식물의 생명까지도, 심지어는 무기물까지라도 인간이 무한대로 남용할 권리가 있다고 주제넘게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오늘 이 시점에서 인간이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가장 큰 죄악의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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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II : 은희경 <새의 선물>에 빚지다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은희경의 새의 선물과 김형경의 세월을 이야기하면서 서른이었던 나는 당시 스물 넷이었던 김희선을 만났다. 신춘문예 등단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고 허풍을 떠는 나, 그리고 은희경과 김형경을 자기와 함께 이야기하는 나를 바라보며 김희선은 내게 조금씩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그래서 지금도 죽기 전에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신춘문예 등단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늘 마음 한 구석에 빚진 마음으로 있다.

나와 내 아내 김희선을 연결시켜줬던 <새의 선물>(문학동네,1995)은 은희경이라는 작가를 세상에 알린 작품이다. 이 책으로 은희경은 문화동네에서 수여하는 무슨 작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으로 진출하였고, 15년이 지난 지금 은희경은 한국문학의 얼굴이 되었다. 그 무렵 한국 문학계는90년대 이전 분단문학, 이념지향적 사회풍자적 작품으로 넘쳐나던 황금기(?)를 지나 사회주의 붕괴와 포스트 모더니즘의 광풍으로 인한 정신적 공황에 시달리며 심한 가슴앓이를 하던 때였다. 몇몇 전시대의 풍조와는 다른 도발적이고 그 당시로서는 실험적이고 신선한 작가들이 등장했고 은희경 역시 그 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새의 선물>은 성장소설이다. 60년대 말 12살 소녀 진희와 진희와 함께 살아가는 외갓집 식구들,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과 일상을 12살 소녀의 시선으로, 하지만 전혀 12살 같지 않은 조숙함과 영악함으로 바라본 이 소설은 인간에 대한 진실, 사랑, 거짓, 풍자를 섬세하게 그리고 섬뜩하게 미장센한다. 갑자기 헤겔을 이야기하려는 지금 <새의 선물>에 등장하는12살 소녀 진희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헤겔철학의 체계가 마치 소설 속에 등장하는 12살 소녀가 사람들(타자)을 만나고 이해하고 종합하듯, 헤겔의 그것 역시 근대가 선사하는 온갖 타자적인 것들을 만나고 이해하고 종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예감에서이다.        

    이 글의 주된 포인트는 <정신현상학> 4장에서 헤겔이 언급하는 자기의식, 즉 타자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고 보존하는 주체에 대한 주목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프랑스 철학자 알렉산드르 꼬제브의 헤겔해석에 기대어 근대적 사유에서 나타나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추적해 갈 것이다. 글의 후반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헤겔철학의 현재성에 대한 논의를 간략하게 정리할 생각이고, 글의 시작은 칸트와 다른 헤겔철학의 독특성을 열거하는 것으로 문을 연다.

 

 

 

 

 

헤겔을 위한 예비적 지식

 

지난 웹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근대 이전까지 서양철학의 전통적 입장은 유한과 무한, 주체와 대상, 존재와 사유가 빛과 계시에 의해 하나로 이어져 안정적인 구도를 띄었고, 이러한 사회속에 사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낙관적이고 명료한 세계관을 지녔다. 근대란 유한한 존재와 무한한 사유를 이어주던 끈이 분리되는 전환점이었다. 영국 경험론(Empiricism)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경험 너머의 것에 대한 의심은 칸트에 이르러 물자체(Ding-an-sich, 物自體)에 대한 판단불가로 선포되었고,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빛의 차단, 계시의 실종, 교회의 추락, 세속화, 주체의 등장으로 명명되는 근대성의 도미노를 낳았다.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헤겔은 근대가 이룩한 성과는 계승하고 좌절은 봉합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근대가 이룩한 성과라 함은 세계가 신적 계시에 의한 완벽한 세계가 아니라 불연속적이고 우발적이라는 것, 결론적으로 인간에 의해 세계가 재구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선언했다는 점이고, 근대의 좌절이란 무한과 유한을 이어주던 빛의 몰락으로 인한 전체성의 상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로 대표되는 근대철학이 빛과 어둠을 나누고 빛의 영역을 인식의 영역, 어둠의 영역을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물자체, 즉 타자로 남겨둔 채 판단중지를 선언했다면, 헤겔은 칸트가 남겨놓은 타자를 다시 정신 속으로 흡수하려했다. 근대철학이 떼어놓은 무한과 유한의 재결합을 다루는 책이 바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다.

적절한 비유일런지는 모르겠지만, 칸트철학을 수학적으로 비유하면 미분으로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력비판으로 이어지는 칸트의 비판철학은 인간정신의 역할, 능력, 한계 등에 대한 조밀한 해부라 할 수 있다. 반면, 헤겔은 칸트가 미분해놓은 성과들을 적분하여 다시 하나로 엮어나간다. 그리하여, 헤겔은 인간정신의 가장 낮은 단계라 할 수 있는 감각적 확신에서 오성, 자기의식, 불행한 의식, 이성, 도덕과 양심, 종교 등의 단계를 거치면서 어떻게 정신이 절대지에 이르는지, 즉 소박한 의식수준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성숙한 의식에 이르는지를 설명해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헤겔을 처음 접했던 시절, 헤겔에 대한 주석서 중 기억에 남는 책을 꼽으라면 단연 프랑스 철학자 알렉산드르 꼬제브(Alexandre Kojeve)가 쓴 Hegel (역사와 현실 변증법, 설헌영 역, 한벗출판사,1981)과 이폴리트(Jean Hyppolite)헤겔의 정신현상학 I,II(이종철 역,문예출판사,1986)이다. 후자가 비교적 원전에 충실했던 해설서였다면, 꼬제브의 책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은 독특한 헤겔 주석서로 평가 받는다. 이러한 꼬제브의 헤겔 해석은 후에 등장하는 프랑스철학자들의 헤겔 이해에 절대적 영향을 끼쳐고, 특별히 라깡의 욕망이론에 공헌했다고 평가받는다.[각주:1]

꼬제브는 근대적 사유에서 획득되는 타자성이 근대성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 주목하면서,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각주:2]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였다고 밝힌다. 가령, 여기에 나는 나!’라고 외치는 두 주체가 있다고 가정하자. 둘은 상호인정을 위한 투쟁에 돌입한다. 그래서 싸움이 시작되고, 싸움이 끝나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면 승자는 주인이 되고 패자는 노예가 된다. 승자인 주인은 노예를 죽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인의 목적은 단순히 타자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에 있지 않다. 타자인 노예로 하여금 주인에 의해 본인이 정복되었음을 인정케하는 것이다. 결국, 헤겔은 타자가 주체앞에서 거울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코 주체는 자신을 자각 할 수 없으며, 주체로 인식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자 자신을 고립 속에서 절대 파악할 수 없다. 나는 타자를 내 앞에 무릎 꿇게 한 후, 그가 나를 인정하고 주인으로 바라보며 내 말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주체로 우뚝 설 수 있다. 주체란 타자와 분열된 주체이고 타자에 대한 욕망을 전제로 한 주체인 셈이다. 이렇듯 헤겔식 근대적 자기의식이란 타자에 대한 배제와 부정, 타자와의 투쟁, 타자로부터의 인정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각주:3]

 

 

 

헤겔의 유산

 

1. _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본다면, 인간은 이기적 욕망과 열정을 지닌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역사발전의 원리에 따르면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은 신의 섭리에 힘입어 신의 자기현현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된다. 이를 통해 헤겔은 그리스도교의 신개념을 수정한다. 칸트는 이론적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신을 물자체의 영역으로 추방시켰으나, 헤겔에게 있어 신은 인간세계와 동떨어진 저 높은 곳에 초월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구체적 현실속에서 속물 같은 우리의 욕망과 삶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내재적인 신이다. 영원불변한 고정되어 있는 신이 아니라, 인간사(세계사)를 통해 인간의 역사와 함께 변화하는 동태적인 신으로 (헤겔에 의해) 신은 거듭난다.

 

2. 욕망/윤리_ 칸트의 윤리에 있어 욕망은 억압과 배제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욕망은 실천이성(윤리)으로 환원할 수 없었던 이성의 타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겔은 칸트와는 달리 욕망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렸다. 헤겔은 이기적 욕망을 오히려 삶을 구동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보기에 욕망과 개인의 쾌락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칸트의 정언명법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헤겔에게 있어 자기의식은 후에 보편적 자아의식, 즉 이성으로 나가기 위한 전 단계였고, 욕망은 이러한 헤겔철학의 밑그림 속에서 일정구간 헤겔의 법칙을 실현시키기 위한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헤겔의 관점은 후에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담론윤리학, 즉 욕망과 개인의 이해관심을 일반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와 대화적 이성(원할한 의사소통)에 입각해 합의를 추구하는 윤리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요약하면 이렇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드러난 욕망의 주체는 개별적 자아의식을 극복하고 보편적 자아의식으로 성장하여 공존의 윤리를 터득하게 되는데, 이 모든 과정은 이성의 모든 타자적인 것을 변증법적으로 사변의 총체성 안에서 통합시키려했던 헤겔철학의 믿음 위에 서있다.

 

3. 理性_ 우리는 헤겔에게서 근대적 이성의 이중성과 대면한다. 타자를 대상화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는 주체의 논리가 첫 번째 근대성의 원리라면, 이성의 남용(무한신뢰)으로부터 야기된 근대성의 문제를 이성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이 근대성의 두 번째 원칙이다. 근대성의 문제를 지목하는 학자들의 대안 역시 헤겔철학의 이러한 이중성에 기반한다.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이성옹호론자들은 후자에 기대어 근대성이 야기시킨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풀어나가려 한다. 하지만 이들이 시도했던 이성에 의한 이성의 자기 극복은 결국 그들이 문제 삼았던 이성을 또다시 긍정해야만 하는 수행적 모순을 되풀이한다는 비난을 (포스트모던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받는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사상가들은 근대적 인식론 자체에 대한 전면적 회의와 해체의 틀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주체의 동일성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이는 헤겔식 사유를 거부하고, 주체의 동일성밖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타자에 주목하는 것이 탈근대적 사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타자_ 헤겔의 타자론은 주체와 주체 사이의 상호인정투쟁에서부터 시작된다. 데카르트적인 주체가 자족적인 코기토를 상정하고, 칸트의 그것이 선험적 주체를 내세우며 타자와 무관한 주체를 말했다면, 헤겔에게 있어 주체란 타자와 상관없는 내적사유 속에서 직관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나를 비추는 타자를 통해 비로소 주체성이 획득되는 존재이다. 헤겔은 이렇듯 이기적 욕망뿐 아니라 모든 타자적인 것들을 절대정신에 이르는 과정으로 포섭한다. 소설 <새의 선물>에서 12살 소녀 진희가 성장하면서 만나는 모든 타자적인 것을 섭취하면서 성인으로 되어가듯, 헤겔 역시 모든 이성의 타자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절대정신을 향해 성장해 간다. 그렇다고 볼 때, 헤겔철학은 정신의 거대한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안에 감추어진 헤겔철학의 함의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헤겔의 타자론은 후에 라깡에게 영향을 끼쳐 라깡의 거울단계’, 그리고 욕망이론을 전개하는데 중요한 이론적 토대로 다시 인용된다. 

 

<다음 웹진부터는 프로이트와 라깡으로 대표되는 정신분석학적 타자론이 이어집니다>

 

 

 ⓒ 웹진 <제3시대>


  1. 꼬제브의 헤겔해석이 라깡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Mardan Sarup, Jaques Lacan, (Toronto and Buffal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2), 31-34 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2. 헤겔은 주체를 타자와의 관계下에서 다름과 같이 규명한다: “주인은 물론 대자적 의식을 뜻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의식을 결코 자기에 대한 개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의식은 하나의 또다른 의식, 다시 말하면 스스로 자립적인 존재나 물성 일반과 종합, 연계되는 것을 자기의 본질로 삼는 그러한 의식에 의해서 스스로 매개된 자기확인자로서의 대자적 의식인 것이다.” – 헤겔, 『정신현상학』, 임석진 역, (서울: 분도출판사,1981), 264 [본문으로]
  3. Alexandre Kojeve, Hegel , 『역사와 현실 변증법』, 설헌영 역, (서울: 한벗출판사,1981), 27-2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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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처분, 생매장 당한 190만 생명을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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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들꽃향린교회 담임목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당신께서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은
높은 지능을 가진 피조물이나
낮은 지능을 가진 피조물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당신께서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은
천년을 사는 학이나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가
모두 형제요 자매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을 조화롭게 이끌어야할 책임을 주신 인간이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모든 피조물들 위에 군림하며
마치 자신이 창조주라도 된 듯이
천지만물을 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는 죄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창조의 하나님,
당신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안식하셨습니다.
이는 단지 일을 마치고 쉬신 것이 아니라
우주 만물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우주 만물의 안식이고
세상이 조화와 평화를 누려야 함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저희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들이 아버지의 가슴을 도려내고
어머니인 강을 파헤쳤으며
자매인 물고기에 몸에 콘크리트를 드리붓고,
집에서 함께 마음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형제인 가축들을 산채로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강산은 수려한데 골골을 원망의 곡소리로 채워 버렸습니다.

눈 마주치고 정을 나누던 생명들인데
단지 감염의 위험이 있다하여 그리했습니다.
심장을 멈추게 하는 주사마저도 번거러워
칼이 달린 기계로 사지를 잘라내고
아직 숨이 벌떡이는 모가지를 썰어 버렸습니다.
자식같은 생명이라 말했지만
마지막 여물한번 챙겨주지도 못한채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웅덩이로 밀어 넣었습니다.

마지막 발버둥......
그 마저도 보이지 않도록,
작별 인사를 대신한
한스런 비명마저도 들리지 않도록,
아니 차마 들을 수가 없어서
서둘러 덮어버렸습니다.

말 못하는 벗님들,
우리만 바라보고 살던
190만의 생명들과의 관계를
그렇게 끊어 버렸습니다.
단지 보다 우월한 무역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단지 구제역 청정지역이라는 상품의 딱지가 그리워서

오 하나님
그들의 넋 앞에 머리숙여 참회합니다.
다하지 못한 발버둥을
외치지 못한 울음들을
여기 이 기도로 대신합니다.
영들이여 편히 가소서.

오 하나님 이들의 생명을 당신의 품에 맞아주시고
다시는 이러한 배신과 왜곡이 없는 세상으로 불러주옵소서.

그들이 빼앗긴 것이 어디 죽음뿐이겠습니까?
초원을 뛰어 놀며 꼴을 먹고
만나고 사랑하고 새 생명을 이어가야할 삶조차도
나면서부터 거세되고 인공수정으로 앗아갔습니다.

축산물 공장에서 마치 공산품처럼 대량 사육되며
단지 인간의 먹이감으로 제조되는
반 생명의 비정함을
오 하나님, 용서해 주옵소서.

속성사육을 위해
네 번 되새김할 뱃속에
식도만 넘어가면 바로 흡수되는
사료로 성장촉진제로 채워넣어
창조질서를 거역한 죄를
오 하나님, 용서해 주옵소서.

마아블링 일등육 품질을 위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밀집사육을 하며
움직이는 동물에게 도저히 못할 죄를 행한 것을
오 하나님, 용서해 주옵소서.

하마 스트레스 받아 병들까봐 항생제 범벅이 된 먹이로
아프고 죽을 권리도 빼앗겨 버린 반 생명의 사육을
이 비정한 탐욕의 폭력을
오 하나님, 용서해 주옵소서.

이렇게 동물의 권리, 생명의 권리를 무참히 짖밟은 사육인데
한꺼번에 살처분 되든, 하나씩 도살되든
언젠가는 그렇게 가야할 운명이라면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새와 짐승을 손수 빚어 만드셨다는 것은
그들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미지,
당신의 형상대로 빚으셨다는 것이지만
막내로 세상에 온 인간이
먼저 있던 형님이며 언니인 생명들에게 행한
반 인륜의 죄악들을 오 하나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몸을 입고 오셨다고 하는데
그 몸은 사람의 몸 뿐만이 아니라
또한 씨앗의 몸, 짐승의 몸, 새의 몸, 물고기의 몸으로 오심을 믿습니다.

오 하나님,
그 몸들이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나고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나고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는
우주 만물의 부활을 믿습니다(고전 15장).

오 하나님,
우리들의 무한한 욕심에 토대한 이기심이
서로 공존하고 함께 평화를 누리는 관계로
오직 인간 중심의 일방적인 관계가
서로 돕고 존중하는 성숙한 관계로 변화되게 하시고
우리들의 불균형적인 관계가
서로 사랑 안에서 완성하는 관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기도드립니다. 아멘.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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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직교사의 '삶의 고백'


김영승
(한백교회 교인)

 

지난 월요일은 해직된 지 만 2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어느새?' 싶을 정도로 빨리 지나간 것 같기도 하고 그동안의 여러 일들을 생각하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최소한 훨씬 덤덤한 마음으로 삶의 고백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은 지났나 봅니다.

2008년의 교육감 선거 관련 형사소송은 대법원에, 1차 파면무효 민사소송도 작년 12월 승소해서 대법원에, 2차 파면은 이제 3월에 행정소송 1심이 시작됩니다.

법원에서 날아오는 여러 우편물이 어떤 것들은 뜯기지도 않은 채 탁자 위에, 신발장 위에 , 피아노 위에,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쌓일 정도로 이젠 아내와 아이들한테까지도 긴장감을 주지 못하는 시간이 해결해주는 일들로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해직 1년차에는 해고의 부당성과 일제고사 등 이명박 정부의 경쟁강화 교육정책을 규탄하는데 쓰이느라 농성도 많이 하고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2년차에는 재판이 진행되면서 해고는 너무 심했기에 무효다라는 판결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동시에 내용적으로는 교육의 문제를 교육적 관점에서 제대로 판단해줄 리 없는 이명박 정부의 사법부에게 패소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재판 열심히 준비하여 복직을 위해 노력하는 것과 전교조 업무를 하나 맡아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 해직 3년차.
학교에 있으면 아이들, 동료교사들과 있으면서 자연스레 휴식과 충전도 되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이기에 혼자 알아서 쉬고 알아서 충전해야 하는 터라 조금 뺀질거리면서 숨을 고르려하고 있습니다. 제가 봐도 큰 변화입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변명으로 새로운 일을 찾아볼 생각도 않고, 버거운 일은 과감히 내 역할과 일이 아니라며 도망쳐버립니다. 12월말부터 한달반 가까이 쉬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소설책도 빌려보고, 클래식기타도 하나 사서 틈나는대로 만져봅니다. 설 연휴 마치고 사무실에 출근하면서는 8km 다되는 길을 그냥 걸어서 갑니다. 자꾸 나오는 뱃살도 뺄 겸 그냥 운동 삼아 또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지며 걷기도 합니다.

지나온 2년은 13년쯤 열심히 살아서 주어진 휴가였고, 앞으로의 시간은 이제 복직하면 또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미리 당겨주는 휴가일거라고, 그래도 이런 휴가라도 받는 나는 참 운 좋은 놈이라고 생각하기로하고, 그렇게 걷습니다.

사실은 좀더 뺀질거리면서 출근을 늦추려고 했는데 얼마 전 신우와 의견충돌이 있은 후 일부러 아빠 들으라고 그랬는지 엄마에게 "아빠는 도대체 언제 출근해?"라고 신우가 소리지르는 것을 듣고는 그 다음 날도 집에서 빈둥거릴 수는 없었습니다.

둘째 선우는 아빠의 해직이 자기와 더 많은 시간 놀아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나 봅니다. 그래서 아빠는 왜 학교도 안나가면서 나와 놀아주지 않느냐고 따질 땐 아빠는 그것으로 자기에게 미안함을 대신해야한다고 항변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큰녀석 신우는 아빠가 자기 삶에 너무 간섭하는게 싫습니다. 부모로부터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은 사춘기에 아빠는 자기에게 많은 불안 요소를 주었을 뿐 아니라 남는 시간으로 자기 삶에 간섭하니 그 불만이 엄청납니다.

제 주변 사람들에게 신우의 별명은 '우리 신우'입니다. 나 자신도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기에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심을 떠버리더니 아이를 낳고 나서는 "우리 신우가요...","우리 신우는요..."하고 아이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산다고 주변 사람들이 붙여 준 별명입니다. 신우는 제게 그런 딸이었습니다.

선우가 소년과학동아를 보고 싶다며 정기구독시켜달라고 할 때 "너 조.중.동.이 뭔지 알아? 조선, 중앙, 동아의 줄인 말인데 소년과학동아의 동아가 바로 그 동아야. 아빠 학교에서 쫓겨난거 당연하다고 하는 신문. 너 그런데도 그책 봐야겠어?"라며 동생을 철없다고 해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너무 알게한 건 아닌지,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하고 싶지 않은데도 고집을 부려 대견하기보다 미안한 마음까지 들게 했던 그런 딸입니다.

근데 그 딸이 사춘기를 겪으면서 옳은 것 그른 것, 바람직한 것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판단보다는 맘에 드는 것 그렇지 않은 것, 친구들이 많이 하는 것 그렇지 않은 것, 귀찮은 것 그렇지 않은 것으로만 세상을 구분하는 것처럼만 보여 대의와 합리성을 고집하는 소심한 아빠와 갈등이 심합니다.

학교에서 학생들한테는 져주고 기다려주면서 왜 내 딸한테 그렇지는 못할까 내 딸이라 그런가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2차 파면 당했을 때 "나 중학생 되기 전엔 복직한다더니 중학교 졸업 전에도 복직 못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해, 안심시키려고 지나가는 말로 했던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사실에 놀라며 한참 민감할 나이에 아빠의 해직이 많은 아픔이 되었을 아이에게 잘해주고 싶은데, 아빠의 그런 마음을 이용할 줄도 아는 영악함에 놀라 경계를 하게도 합니다.

인생 쉽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2년의 해직생활이 주는 깨달음입니다.

쉽지 않지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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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몰락』

지은이 : 서보명
펴낸날 : 2011년 1월 31일
분  야 : 인문 / 교육
판  형 : 신국판 변형
페이지 : 264쪽
정  가 : 12,000원
펴낸곳 : 도서출판 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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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대학,
어디에 존재하는가?

‘경계에 선 지식인’인 재미교포(1.5세대) 교수가 쓴 대학의 ‘철학사’이며, 자본에 함몰된 대학에 대한 성찰을 담은 책이다. 최근 지식의 위기와 대학의 몰락을 말하는 이들이 많다. 이 위기의 요체는 ‘대학의 자본화’에 있다. 대학이 자본과 지식의 중개자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신학자이자 철학자이고 한국인이자 미국인으로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경계에 선 지식인인 저자는 한국의 대학에서 방문교수 체험을 한 뒤에 이 시대 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 반향 없는 물음들이 솟아나왔고, 그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대학의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하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 현대의 대학들이 ‘경계선 위의 지식’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자본에 함몰되어 몰락을 향해 질주하는 미친 마차와 같다고 느낀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교육공학의 전문적인 지식을 풀어내는 것도 아니고 교육학의 이론을 펼치지도 않는다. 오히려 원론으로 돌아가 자본에 함몰된 대학을 목도하고 우리 시대에 대학은 어디에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대학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 묻는다. 저자는 대학은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런 물음은 우리 사회가 경쟁과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경쟁 사회에서 사용될 수 있는 물건 같은 ‘생산성 높은 학생’들을 만들어내면서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질문이라고 치부한 것들이다. 고갱이가 빠져나간 대학의 존재 이유를 다시 들추는 물음이기에, 이 시대가 외면하는 질문이기에, 저자 자신 또한 현실성 없는 물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자본에, 체제에 종속된 대학의 자화상을 다시 원점에서 그리지 않으면, 대학의 역사가 현실과 대학의 미래가 없다는 저자의 진단은 ‘미래의 대학’을 꿈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한 철학자의 아픈 반성이며, 시대가 함께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대학의 현실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비판하고, 협곡의 단층을 보여주듯 대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기술하며,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에 매몰되어 잃어버린 대학의 위상을 다시 찾는다.

취직도 어려운 마당에
구태의연한 고민을 해야 하나?

“대학이 현실, 그것도 체제를 섬기는 하부조직으로 전락했을 때, 대학이란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까? 대학이 체제와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주장하는 자율을 밥그릇 싸움 그 이상이라 할 수 있을까? 정신과 이상의 가치를 이념으로 생각하지 않는 대학을 대학이라 할 수 있을까? 정신과 이상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대학이 현재 가능하기는 할 것인가? 그런 가능성이 없을 때, 대학은 어디에 존재해야 하는가?”
저자가 이 책에서 던지는 이런 물음들은 시대에 이미 뒤떨어진 물음들이 됐다. 대학이 취업을 위해 이력서 한 줄 메울 수 있게 하는 곳으로 변질하고, 공부는 토플, 토익 점수를 높이거나 공무원 시험 예상문제 풀이하는 것으로 전락한 실정이기에. 그렇게 우리 시대는 대학의 존재 가치에 대한 물음을 예전에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드디어 대학 붕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터졌다. ‘김예슬 선언’이라 불리는 한 대학생의 <대학자퇴서>가 언론을 뜨겁게 달궜다. 한편 그 붕괴는 이미 예정된 것이었고 대학은 내부에서 자본화가 완결된 상태였다. 그것이 곪아 터진 것일 뿐,  과거에 시대와, 체제와 거리를 유지하며 찾았던 대학의 정체성이 완전히 소멸한 상황. 저자는 대학과 공부의 고갱이가 다 빠져나가는 위기 상황을 진단한다.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이렇다.
“대학은 신학과 철학이 부여하는 이상에 의해 유지되어왔으며, 대학의 이상향으로 삼은 것은 한 시대, 그 문화권의 선을 추구하는 세계관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의 체제는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생산과 소비와 경쟁이라는 이념을 따라 대학이 움직이기를 요구한다. 학문의 이상은 인간에게 초월적인 숭고함이나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도록 하지만, 자본주의 이념은 철저하게 물신주의의 이윤과 소비의 행위만 앞세우게 한다. 이와 같은 시대성에 함몰된 대학은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대학의 학문과 제도를 기업자본주의의 생산과 판매의 모델로 이해하는 것은, 오래된 대학의 자의식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을 잃어버렸을 때는 그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필수이다. 철학 교수인 저자는 대학을 개혁할 프로그램이나 이념을 앞세우기 이전에, 과거의 대학이란 어떤 곳이었고, 현재의 대학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질문을 과거에는 대학의 본질과 사명이라는 차원에서 논의했다면, 과연 이 시대에 적합하고 수용 가능한 본질과 사명은 무엇인지 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물음을 던지는 것 자체가 바로 이 시대가 잃어버린 대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낡은 질문으로 보이지만 황량한 몰락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비상구이기에 절체절명의 물음인 것이다.

쓸데없는 공부, 큰 배움으로서의 대학은
꿈일 수밖에 없는가?

현재의 실상을 떠난 대학의 미래는 없다. 현재의 모습이 대학이 몰락하는 과정이라면, 대학의 미래는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아도 암울하다. 소위 경쟁력이 있다고 하는 대학들은 앞으로도 기업자본주의의 한 축으로 지식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백화점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대학이 성찰과 비판의 공간으로, 지식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의 덕목으로 인간을 형성하는 사명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명을 더 이상 수행할 의지가 없는 대학을 ‘대학’이라 부를 수 있을까? 큰 배움으로서의 대학, 시대와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이상을 잃지 않은 대학, 비현실적인 대학이다. 이 시대에 그런 대학을 생각한다는 것조차 “꿈꾸고 있네!”로 치부된다. 그 ‘꿈꾸고 있네’의 대학은 이렇다. 기업 정신을 멀리하는 대학, 건물 건축을 성장이라고 여기지 않는 대학, 투자를 통한 자산 증식을 대학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대학, 학생들의 지적인 성장과 인격 형성을 제일 중요하게 치는 대학, 수치와 소문을 통계 내어 대학 줄 세우기(서열화) 행태를 거부하는 대학, 사실과 가치만을 말하지 않고 진리도 생각하려는 의지가 있는 대학. 즉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시대의 이단이 될 의지가 있는 대학이다. 아마 그런 대학은 없다. 하지만 없기에 더욱 필요한 것이다. 저자는 큰 배움으로서의 대학의 이상에 대해 시장이 된 대학 밖의 대학을 꿈꾸며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맺는다.
“〈인간이나 이상이나 진리와 같은 한가한 주제들〉이 중요하다고 인식되려면, 자본과 시장과 경쟁이라는 이 시대 대학의 우상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 … 따라서 이 시대에 대학의 이상이 지켜나갈 대학이 있다면 그것은 대학 밖의 대학일지도 모른다(260쪽).” “배움을 통해 삶을 돌아보고, 시대를 직시하고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은 시장이 아닌 소크라테스의 ‘아고라’일 것이며, ‘큰 배움’으로서의 대학이 존재하는 곳이리라(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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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1.02.26 07:1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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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소에서 기획한 책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 같아 기쁩니다. 얼마전 시카고로 배달된 책을 교수님으로부터 한 권 받아 읽었습니다. 오래간만에 한국말 책을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읽으니 좋네요. 서보명 교수의 신간 <대학의 몰락>은 신자유주의 체제속에서 대학이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직업연수원(혹은 직업소개소)로 전락해가는 대학의 현주소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서구사회에서 발전되어 왔던 대학의 역사를 마치 나무의 나이테를 들여다보듯 생생히 전해줌과 동시에 신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전개되는 미국대학의 변천과 한국대학의 타락을 맞물려 보여주면서 신자유주의가 지닌 파괴적 본성을 폭로합니다. 서교수는 이 책에서 단순히 대학이 몰락했다고 선언하지도 또 그것에 대해 탄식하지도 않습니다. 그 보다는 마치 협곡을 지나듯 서구 대학의 역사를 굽이쳐 가면서 오늘의 대학을 진단하고, 시대의 변화에 맞춰(혹은 대항하며) 올바른 대학을 구현하려 했던 사람들의 음성을 통해 앞으로의 대학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독자들과 함께 고민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독자들은 현재의 대학이 지닌 문제들을 다시 새롬게 발견할 수 있고, 아울러 '대학의 몰락'을, 아니 신자유주의 체제속에서 전개되는 삶의 몰락을 처방할 해법을 조심스레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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