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들만의 '5.18'?


황용연
(미국 GTU 박사과정)

 
야구팬인 필자가 미국에서 주로 찾는 한국 인터넷 사이트 중에 하나는 한국프로야구 관련 사이트이다. 그런데 필자가 주로 구경하는, 한국프로야구 관련 사이트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축에 속하는 사이트 A에서는 최근 특이한 현상 하나가 벌어지고 있다. 이 사이트와 규모에서 경쟁 관계에 놓이는 다른 야구 관련 사이트 B에서 시시때때로 A사이트를 게시판 도배와 욕설, 비꼼 등의 방법으로 공격하는데, 그 공격의 내용이 주로 '호남 비하'인 것이다.

A사이트에는 일반적으로 광주 연고의 KIA 타이거즈 팬이 가장 많다고 여겨지며, 또한 A 사이트의 정치적 성향은 주로 '반한나라당'으로 인식된다(이 사이트는 2008년 촛불시위와 연관되어 언급된 사이트이기도 하다). 그래서 A사이트가 공격받을 때, 공격하는 B사이트 이용자들은 A사이트를 호남 사람들에 대한 비하어인 '홍어'들이 주로 모인 '홍팍'이라고 지칭하며, 공격하는 날짜는 예를 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일이라거나 전두환의 생일 등이고, 공격내용은 전라도에 대한 비하, 5.18 항쟁에 대한 '폭도' 비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비하 등이다. A사이트의 회원들은 5월 18일이 또다른 공격의 날이 될 것이라고 예측할 지경이다.

물론 이런 현상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호남차별과 5.18 항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수구적 입장의 표출이다. '민주화 이후'의 시기에도 이런 현상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인식되고 비판되어야 할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호남차별과 5.18 불인정이라는 나쁜 행태의 지속이라고만 일축하기에는 생각할 여지가 남는다. 왜냐하면, 위에서 서술한 B사이트의 호남차별과 5.18 불인정의 행태에 대해서, 그 행태가 어떤 굳건한 신념으로 인해 이루어졌다기보다는 그냥 싫은 대상인 A사이트에 대한 편가르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한 인터넷 위키사이트의 설명은 필자의 이런 의문을 뒷받침하는데, 그 설명에 따르면 B사이트의 경향이 보수적이고 호남차별적이 된 것은, '반한나라당' 성향이고 KIA 타이거즈 팬이 많다는 A사이트와 경쟁 관계에 놓이다 보니 A사이트의 반대 성향을 추구하게 되어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신념이라기보다는 편가르기일 뿐일지라도 '나쁜 생각'을 선택한 것 자체는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의문의 방향을 조금 다르게 잡아 보고 싶다. 그렇다면 '좋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은 '편가르기'에서 자유로울까.

경북 지역 대학의 어느 교수는 자신의 연구에서 흥미로운 진술을 한다. 1980년대 이후 5.18 항쟁이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 되면서 국가적으로 기념되자, 다른 지역에서는 '우리 지역'의 민주화운동을 찾아 기념하는 의례들을 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각 지역별로 민주화운동의 전통이 개발되고 있다는 것이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5.18 항쟁은 '호남'의 것일 뿐이니 그것보다는 '우리 지역'의 것이 더 좋다라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A, B 사이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5.18 항쟁을 비롯한 민주화운동은 '우리 편'이 아닌, '호남'이나 '운동했다는 사람들' 등의 '저 편'의 것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민주화운동'이 '편가르기'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은 '상대편'이 그 의미를 접하지 않으려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그렇다면 '민주화운동 지지'나 '반한나라당' 동의 '좋은 생각'을 한다는 사람들은 과연 '편가르기' 이상의 의미를 창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 '좋은 생각'을 한다는 사람들이 공유한다는 가장 흔한 어휘부터가 '반한나라당'인 것에서 보듯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보다는 '한나라당'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를 훨씬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 현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긍정적으로 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여기에다가 '한나라당'을 일단 몰아내고 봐야 한다는, 마치 악당을 최후의 한판으로 쓰러뜨린다는 식의 무협지 내지는 액션영화스러운 상상력이 덧붙여진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물론 지금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너도나도 '보편적 복지'라는 답을 내놓고 있긴 하다. 그런데, 지금 너도나도 외치는 '보편적 복지'란 말 속에는, 그 '복지'의 기반이 되는 사회구조와 현재 한국 사회의 구조가 어떻게 다르고 그래서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보편적 복지를 하면 이렇게 좋아요"라는 프로파간다만이 보이고, 그래서 '답'이 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질문에 대한 '얼버무림'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필자만의 지나친 생각일지.

상황이 이렇다면 5.18 항쟁에 관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왜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않는가를 한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반복의 의도가 어떻든 또다시 '편가르기'에 빠질 테니까. 오히려 필요한 것은 5.18 항쟁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던 사람들의 '자기 해체'일지도 모르겠다. '민주화운동'을 해왔다는, '수구세력'과 싸워왔다는, 거기에 덧붙인다면 그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사람 중에서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더 '왼쪽'으로 가서 '진보운동'을 했다는, 그 코드 외의 다른 현실과 맞닥뜨리기 위한 '자기 해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사실 5.18 항쟁이야말로, 바로 그 '운동'을 해 왔다는 사람들의 코드 밖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던가.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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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학규
    2011.05.19 17:2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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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갑습니다~^^
    이렇게 웹진도 발간하며 활발하게 움직이고 계셨군요~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한국땅에서 라깡적으로 윤리하기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라깡으로 <트루먼 쇼> 읽기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내 삶 전체가 몰래카메라의 내용이 되어 시청자들에게 다 전달되고 있었다면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라깡이론의 윤리적 전회를 논하기 이전에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짐 케리 주연의 영화 <트루먼 쇼>를 소개하기 위함이다. 평범한 보험회사 직원 트루먼 버뱅크(짐 케리)의 삶이 그랬다. 그 쇼는 거대한 돔 안에 인공도시를 짓고 5천대의 카메라를 도시곳곳에 숨겨 24시간 내내 트루먼의 일거수일투족을 30년 동안 생중계 했다. 트루먼에게 있어 세트장, 아니 영화속 도시 시헤이븐은 완벽한 아내, 좋은 친구들, 따뜻한 이웃들, 온화한 기후를 갖춘 완벽한 삶의 공간(상징계)이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대상소타자가 상징계를 뚫고 실재계의 모습을 간헐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촬영용 조명이 떨어지고,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은 아버지를 길에서 만나는 등 납득이 안가는 일이 벌어질 무렵, 트루먼은 대학 시절 여자친구였던 실비아로부터 자신의 삶이 모두 연출이고 조작된 삶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어느날 갑자기 실재(the real)가 확 내게로 다가온 것이다. 이후 트루먼은 안락했던 상징계의 질서를 박차고 실재계를 향해 항해를 한 후 세상끝(세트장끝)에 도착하여 마침내 실재계와 상징계의 경계라 할 수 있는 세트장의 벽을 뚫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트루먼의 의지와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진하게 눈물 한 방울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사회는 그런 트루먼 같은 사람들을 돈키호테니, 소영웅주의자니, 감상적 낭만주의자니 하면서 시대착오적 인물로 낙인찍는다. 보통의 우리는 현실(상징적 질서)에 구멍이 뚫려 자신의 존재를 들키는 순간 재빨리 이를 봉합하여 현실(상징적 질서)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강박적 주체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상징계를 벗어날 수 없고, 세상과 등을 져서도 안 된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트루먼처럼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상징계 전체를 배반하고 실재계를 찾아 투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상징계에 갇혀있는 존재가 아니라 상징계를 변형시키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정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라깡이 제안하는 정신분석학적 윤리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라깡, 칸트에 反하다

라깡의 윤리는 근대 서구윤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칸트 윤리학과의 숙명적인 대결을 수반한다. 왜냐하면, 라깡과 칸트 모두 실재계에 대해 언급하였고, 실재에 대한 규정에서부터 윤리학이 나왔기 때문에 그렇다. 칸트에게 있어 실재, 즉 물자체란 인간의 현상계와 단절되어 있는 부분이다. 칸트는 물자체를 신앙의 영역에 포함시켜 언표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였던 서구형이상학의 전통을 비판한 후에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중세 1000년을 이어왔던 무한의 철학에 대한 폐기였다. 이는 은총의 빛으로, 신의 시선으로부터 독립한 불안하고 불안전한 인간이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함을 의미한다. 아울러, 무한철학의 폐기에 따른 물자체에 대한 선언은 ‘인간의 의식은 인간 스스로가 구성하는 것이다’라는 근대 주체철학을 낳았다. 현실의 사건과 증상들은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계시의 빛과 목소리를 통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틀, 입장, 경험을 통해 (이를 칸트는 범주라 표현하였다) 우리 스스로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범주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후에 등장하는 많은 사조들이 칸트 철학의 완고한 틀을 언급하면서 그 구조 역시 계급, 역사, 문명, 성에 따라 조건지어졌음을 비판하지만 말이다. 칸트의 범주 혹은 인식의 틀은 라깡적으로 말하면 상징계의 질서라 말할 수 있다. ‘저 하늘에 별이 빛나듯 내 마음에 도덕율이 빛난다’는 칸트의 발언과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 타당한 입법에 맞게 행위 하라’는 칸트의 요구는 비록 실재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실재에 대한 접근이 상징계 안에 있음을 혹은 실재에 대한 인식이 상징계를 통해야함을 전제한다. 그 결과 ‘도덕율’과 ‘의지의 준칙’이 상징계 안에서 마치 실재의 목소리인양 울려 퍼지게 되었다. 기표에 대한 욕망은 보호하고 실재에 대한 향유는 억압된 윤리, 숭고한 이성의 이름으로 상징계의 질서를 합리화하는 윤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결국, 우리의 감각적 경험 너머의 것에 대해 인간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던 칸트는, 나중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캄캄한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좌표를 표시하듯 우리마음에도 우리를 이끌어갈 무엇인가를 상정해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칸트에게 있어 윤리란 상징계의 질서들을 굳건히 구축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이유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대문밖으로 추방시켰던 물자체를 실천이성을 언급하면서 다시 후문을 통해 불러들였다는 비아냥을 듣게 된다.

반면, 라깡의 실재계는 칸트와는 다르게 현상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 곳곳에서 출현하는 무엇이다. 우리는 상징계의 막을 찢고 나오는 불순물들(대상소타자)을 통해 실재와 대면한다. 하지만, 영화 <트루먼 쇼>에 나오는 짐 케리와는 달리 현실에서의 인간은 그 실재를 끌어당길 힘이 없다. 트루먼처럼 기표체계를 무시할 수도 없고, 영화에서처럼 실재계가 세트 뒤에 뚜렷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 지점이 바로 라깡의 윤리가 다다른 마지막 지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란 무엇인가?’라는 궁극적 질문과 다시 대면한다. 윤리를 우리의 삶과 공동체속에서 타자와 관계맺는 방식과 절차에 관한 문제라고 봤을 때, 윤리의 대상인 타자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그리고 타자는 필연적으로 그 타자를 상정하는 주체의 문제를 야기시킨다. 라깡에 의하면 주체는 이원화되어 있다. ‘욕망하는 주체’와 ‘향유하는 주체’가 그것이다. 상징계의 시스템 속에서 일정한 기표를 차지하고 있는 주체는 항상 상징계 속 기표들의 차이에 따라 옮겨다니며 놀이를 한다. 그러나, 그 기표란 사회적 인정과 사회적 합의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내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상징계속 기표의 지배를 받은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로 걸러진다. 문제는 상징계속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 또 다른 주체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분명히 다가오지는 않지만 나를 가만히 놔주지 않고 나를 정신적으로 가위눌리게 하는 그 무엇 말이다. 시인 류시화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애절함으로 그 갈증과 답답함을 훌륭히 표현하였다. 라깡은 이 주체를 ‘욕망하는 주체’와는 구분하여 ‘향유하는 주체’라 부른다.

라깡의 윤리학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욕망하는 주체’에서 ‘향유하는 주체’로의 이월이다. 라깡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 기표시스템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밝혀냈고, 그 위선적 현실을 변혁시킬 원동력을 실재계에서 끌어온다. 그것은 뾰족한 것(대상소타자)을 가지고 상징계를 둘러싸고 있는 막에 구멍을 내어 현실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것이고, 현실의 영역, 상징의 영역, 욕망의 세계가 강제하는 요구에 맞서 마치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실재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그 무엇이다.


한국땅에서 라깡적으로 윤리하기

9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앨범 중에 <환상속의 그대>라는 노래가 있었다. 문득 그 곡의 가사 한 구절이 떠오른다: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쩌면 현실(상징계의 질서)은 환상(판타지)일런지 모른다. 영화 <트루먼 쇼>에서 짐 케리의 일상이 판타지였던 것처럼, 한국땅에서 뉴타운이다 영어공교육이다 하면서 일확천금과 유창한 영어실력을 꿈꾸는 것 또한 환상이다. 그 환상이 있기에 서태지의 노래 속 가사처럼,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있어도 우리는 지금 나의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환상은 절대로 현실의 나에게는 발생하지 않는다. 누구나 허각처럼 몇 십만대 일의 경쟁을 뚫고 슈퍼스타 K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환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 퍼져있는 환상에 대한 집단적 열정 내지 무의식의 강도는 가히 놀랍다. 국내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밖에 나와 다른 민족들과 어울리고, 다른 문화를 접할수록 판타스틱 코리아에 대한 환상은 굳어져만 간다. 그것이 한강의 기적, 다이나믹 코리아, 2002년 월드컵 4강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이었다고 애써 긍정적 평가를 할 수도 있겠지만 난 못 믿겠다. 그 환상을 말이다.

라깡적 관점에서 볼 때 상징계속 기표의 욕망을 부추기는 한국 사회, 그리고 그 욕망을 욕망하는 우리는 너무나도 비윤리적 체제, 그리고 존재이다. 욕망에 대한 추구는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똑같다. 보수적인 사람은 대놓고(까놓고) 그 욕망을 아무데서나 배설하고, 진보적인 사람들은 겸연쩍어 하면서도 슬그머니 그 욕망을 수음한다. 형태는 다르지만 그 놈이 그 놈이다. 특별히, 자식교육에 대한 욕망의 강도는 보혁에 관계없이 100% 균일하다. 재산증식에 대한 추구에 있어서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의 욕망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려는 지점은 어딜까? 아마도 부와 지식의 대물림이 아닐까 싶다. 가히, 그것은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강력한 리비도라 할만하다. 재벌은 말할 것도 없고, 필자가 머물고 있는 시카고의 대표적 명문대학인 노스웨스턴 대학,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교수님, 사장님, 의사, 변호사, 정부고위관료 아드님 따님들이다. 심지어 가장 숭고해야 할 교회 역시 아비 목사에게서 아들목사로의 세습이 상식화 되어가는, 聖과 俗이 맞물려 집단으로 난교를 벌이는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이토록 황당한 현실이 용인되는 이유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역시 그 욕망을 욕망하기에, 우리 역시 상징계속 기표들의 놀이를 즐기고 있기에, 우리 역시 그 주인공이 되고 싶기에 이 모두를 관대히 용서한다.


결론적으로, 현실 속 상징, 욕망, 그리고 환상은 실재(the Real)위를 떠다니는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체계이다. 우리의 불행은 어쩌면 여기(불확실한 환상을 쫓는 현실)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전통적으로 윤리란 그 시스템을 뒷바침하는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기존의 윤리는 상징계에 타격을 가하면서 실재를 드러내는 대상소타자를 악성코드 혹은 악성 바이러스 같은 것으로 간주하여 진압해왔다. 하지만, 더 이상 큰 타자와 제휴하는 윤리, 사회적 욕망을 인정하고 욕망의 충족을 위한 정글의 법칙을 합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윤리의 역할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상징계의 질서를 보존하는 윤리가 아니라 그것의 전복을 꿈꾸는 위험한 윤리를 말해야 한다. 윤리를 도덕이라는 체제에 의해 오염된 해석의 잣대에서 해방시켜 더 이상 그것이 나를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로 호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결국, 라깡은 실재(the Real)의 빈번한 출현으로 인해 상징계의 균열이 폭로되고, 그로 인해 세상의 모순과 진리가 드러날 때 인간은 드디어 윤리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었다. 바로 이점이 라깡식 윤리의 미덕이고, 그것은 오늘날 슬라보예 지젝으로 전해져 맹렬히 진화중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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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비평’이다, 또한 ‘비평되는’ 텍스트다
- 설교 쓰기/말하기, 설교 읽기/듣기에 관한 하나의 생각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기독교 출판물 가운데 스태디셀러 중 하나는 설교집 장르의 책이다. 전국의 목사들 거의 모두에게 설교는 가장 큰 부담거리의 하나인 탓이다. 대개의 담임목사들은 주일 예배를 절대로 남에게 양도하지 않는다. 그것은 담임목사의 철칙에 가깝다. 게다가 수요일 예배와 금요일 예배가 있다. 또한 매일 새벽에도 예배가 있고, 1년에 두 차례씩 교인들의 집을 방문하는 심방예배가 있으며, 그 외에 결혼식, 장례식 등 이런 저런 예배들이 일년 전체를 가득 채운다.

개신교에서 설교는 모든 예배의 하이라이트이니 빠뜨릴 수 없지만, 그 많은 예배를 일일이 준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해서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주일 예배 외에 다른 예배의 설교는 부목사나 전도사 등과 분담하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설교 수가 너무 많다. 게다가 교회 행정, 교인 관리, 교회간 정치 등 목사에게 부여된 일은 생각보다 과중하다. 이런 일로 시달리다 보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러니 설교를 하려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난감함에 빠진다. 하여 많은 목사들은 원고 없이 설교를 하며, 그중 적지 않은 설교는 거의 즉석설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순발력에만 의존한다.

그래도 설교를 전혀 준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것이 많은 목사들이 남의 설교집을 참조해야 하는 이유다. 여러 개를 펴 놓고,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내고 다른 데서 예화를 빌리며, 또 다른 데서 해석을 발췌한다. 이런 것들이 조합되어 한 편의 설교가 만들어지곤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대개의 설교들은 내용이 그저 그렇다. 깊이는 말할 것도 없고 귀담아 들을 만한 내용도 찾아보기 힘들다. 상투적인 말들, 안 해도 그만인, 입에 발린 말들로 가득하다. 대형교회의 경우는 이른바 설교용역을 주는 경우도 있다. 자료를 준비해주는 ‘알바’를 고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사정이 달라지는 건 별로 없다. 지식만 현란하게 나열될 뿐이지 생각의 깊이가 배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곰곰이 생각하고 삶을 성찰하는 시간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해서 훌륭한 설교를 하는 이들의 경우는 거의 예외 없이 설교 편수를 줄이고 기타 업무를 줄이는 ‘목회의 기술’을 발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한 달에 네 번은 해야 한다. 더구나 설교 내용이 좋기로 유명한 목사들의 경우는 교인들이 설교노트를 만들고, 녹음테이프나 녹화테이프를 구해다 반복해서 듣고 본다. 심지어 인터넷을 통해 무차별 대중에게 공개되곤 하니, 아무리 업무를 줄이고 설교 횟수를 줄여도 한주 내내, 아니 일년 내내, 시도 때도 없이 설교 생각에 정신이 스탠바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탄성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빛나는 설교를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정말로 대단한 필력과 사고력, 그리고 몸과 영혼이 지쳐도 정신의 기복이 남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다.

공적으로 글을 쓴 경력이 20년이 넘었어도 그이들 정도의 지력이나 필력이 따라붙지 못하는 나에게 한 달 네 번의 설교는 불가능에 가깝다. 목사로서 교회를 전담해본 8년의 시간이 있었지만, 그 때에도 보통 한 달에 3회 정도를 했고, 네 번을 했던 경우는 손에 꼽힌다. 더구나 목회를 그만 둔 지금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설교를 하는 셈이어서, 대개의 목회자들의 경험과 정신의 수고를 대신하는 글을 쓸 자격은 내게 없다. 다만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 살아온 세월이 20년이 넘은 덕에, 나름의 설교에 관한 관점도 생기고 나름의 스타일도 만들어졌으니, 설교쓰기에 관한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는 있을 것 같다.

우선 내가 설교하는 교회 얘기를 해야겠다. 여기에서 나의 첫 설교가 1988년에 있었으니 20여년이 되는 동안 나의 설교관과 스타일이 형성된 토양이다. 그중 6년간은 목회 보조자였고, 8년간은 담임목회자였으며, 목사직을 사임한 이후 9년 동안은 교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으면서 고정 설교자로서 한 달에 한 번 설교를 맡아 한다.

이 교회에서는 ‘설교’라는 말 대신에 ‘하늘뜻 나누기’라는 명칭을 붙였다. 이것은 나름의 신학적 주장을 담고 있다. 핵심은 ‘하늘뜻+나누기’라는 데 있다.

전통적인 견해는 ‘하늘뜻’은 ‘선포하기’ 혹은 ‘펴기’ 같은 말과 결합되어, ‘하늘뜻+선포하기’, ‘하늘뜻+펴기’이어야 한다. 여기서 ‘선포하다’, ‘펴다’라는 말이 시사하듯 ‘하늘뜻’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경로는 일방향적이고, 하향적이다. 이때 선포자가 설교의 중심에 있음은 물론이다. 청중은 수동적으로 듣는 자다. 그이들에게 부여된 자율권은 그 선포된 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한정된다. 일방향적, 하향적, 수직적인 하느님의 말은 절대불변의 것이다. 그 말의 뜻은 이미 결정된 채로 사람들에게 설교자를 통해 전해진다.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일지 거절할지 선택해야 한다.

해서 전통적인 설교학은 선포의 주체는 하느님이고, 선포자, 곧 설교자는 하느님의 말을 대언하는 자다. 해서 설교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명제가 제기되었다. ‘설교자는 설교하는 순간 하느님의 말을 하는 것이다.’ 서양의 종교개혁기부터 정립된 관점으로, 설교자는 바로 이 설교의 순간 역할상 신을 대리한다.

반면 ‘나누기’와 결합된 ‘하늘뜻’은 사뭇 다른 방식으로 사람과 엮인다. ‘나눔’, 곧 수평적인 방식으로 신과 사람이 뜻으로 얽힌다는 얘기다. 또한 그 뜻은 미리 결정된 의미가 단지 선포되는 게 아니라, 나눔으로써 형성된다. 사람과 사람, 신과 사람의 나눔, 곧 대화의 과정에서 ‘하늘뜻’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은 이 교회만의 독특한 설교 제도를 만들어냈다. 설교자의 설교가 끝나면서 예배는 곧바로 ‘대화나눔’으로 이어진다. 곧 이 교회의 ‘하늘뜻 나누기’는 ‘설교+대화나눔’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오랜 실험을 거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형성된 관행이다. 모두들 설교를 두고 바로 대화나눔을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해서 예배를 마치고 토론을 하거나, 애초부터 집단설교를 하면서 토론을 하거나, 혹은 토론 주제를 놓고 난상토론을 하거나, ......, 이런 시도 저런 시도를 했다. 그러다 발견된 것이 ‘수다떨기’였다. 주제를 두고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설교 속에서 발견된 ‘소재’를 두고 말꼬리를 이어가며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주제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어떤 때는 설교자가 던진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다른 때는 설교에서 떠오른 말을 소재삼아 자기 얘기를 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맞장구를 치기도 하며, 또는 말이 이어지지 않으면, 자기가 느낀 것을 얘기하기도 한다. 형식과 내용에 대한 제약을 최소화하니 얘깃거리가 다양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시간 동안 설교자의 말을 듣고, 또 다른 이가 하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며 자기 말을 한다. 때로 이야기를 독점하려는 이가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해서 하늘뜻나누기 전담 사회자가 생겼다. 예배 전체의 사회자와는 별도로 말이다. 그이의 역할을 특정인이 이야기를 독점하지 않도록 하고, 말이 끊길 때 말이 나오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한다. 사회자는 한 달 단위로 돌아가며 맡는다.
 
여기서 하나 첨언하면, 이 교회의 대화나눔 속에는 갈등도 포함된다. 그것은 종종 얼굴을 붉히는 것으로 이어지며, 어떤 경우는 설교자가 상처를 받고 더 이상 설교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난감한 일이 벌어질 때 예상외로 교인들 중에 그런 난감함을 중개하고 갈등의 당사자들의 상처를 봉합해주는 이들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상처받은 이를 껴안아 주고 보듬는 이도 있었다. 또 어떤 경우는 설교자의 말에 혼란과 상처를 입은 이가 사적으로 설교자를 찾아와 그 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것은 충분한 대화로 이어지면서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서로의 말을 들으면서 자기의 생각의 폭을 넓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해서 이 교회의 ‘하늘뜻나누기’의 대화나눔은 예배 안에서만이 아니라, 예배가 끝난 이후에도 이어진다. 그러한 과정에서 하늘뜻이 서로에게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설교자의 말을 실마리 삼아 자유롭게 서로 수다떨기를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 각자가 자기의 성찰에 이를 때 그것이 바로 ‘하늘뜻’이다. 이 교회가 말하는 설교의 신학에 의하면 말이다. ‘하늘뜻’은 내려오는 게 아니라, 남의 말을 듣는 ‘과정’이고, 그 말에 자기의 말을 섞는 ‘과정’이며, 그러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람들 각자가 대화를 통해서 ‘뜻’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 곧 ‘하늘뜻’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늘뜻’의 ‘뜻’은 함석헌의 용어에 영향 받은 것이다. 그이는 역사 현실 속에 내재된 신의 형상을 ‘뜻’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역사의 운동과 함께 존재하며,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신을 발견하는 과정, 달리 말하면 역사라는 장(fields)에서 사람들이 신과 대화하는 과정이다. 매순간 역사가 달라질 때마다 뜻은 변모하며, 그 변모 속에는 신과 사람들의 만남이 다르게 구현된다. 뜻은 현실 너머에서 내려오는 고정불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역사 과정에서,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함께 나누면서 만들어내는 진리인 셈이다. 그것을 함석헌 선생은 역사에 구현된 하늘의 형상으로서의 ‘뜻’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뜻’의 의미가 이 교회의 ‘하늘뜻’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설교를 일방적인 말하기가 아니라 말하고 듣기, 그리고 듣고 말하기가 교차되는 과정이라고 하면, 더 이상 설교자는 특별한 사람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설교자가 설교하는 순간 신의 말을 대언한다거나 그이가 그 순간 신의 모상(image)이라거나 하는 주장이 전제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

일반적으로 설교학에서는 이런 주장을 보충하기 위해 설교자의 ‘소명’을 강조했다. 이때 소명은 주관적인 인식작용이다. 그것은 원리상 부름의 주체인 신과 부름의 대상인 특정인 사이에서 일어난 내밀한 관계 맺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것을 다시 다른 요소가 보충해야 한다. 바로 설교자의 ‘객관적 자격’이 부여되어야 하는 것이다. 개신교에서 설교는 목사의 고유 권한이다. 예외적 상황이 아닌 한 다른 이는 설교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교단마다 조금씩은 달라도 목사가 되려면 신학대학원을 나와야 하고, 목사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하며, 유급의 목회 경력을 일정기간 거쳐야 하고, 마지막으로 그이를 목사로 받아들이는 교회의 ‘청빙’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논리상의 위기가 있다. 소명이라는 주관적 인식작용과 목사가 되는 객관적 자격조건 사이에는 어떤 필연성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실재로는 후자가 전자를 대체하며, 그렇게 목사가 된 사람은 자기의 말이 설교 시에 신의 말이 된다는 신학적 주장으로 무장하며 설교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를 내장한 논리 아닌 논리는 신학적 주장이라기보다는 ‘신학적 억지’에 가깝다.

반면 하늘뜻의 나눔으로서의 설교론은 특화된 특정인만이 맡아 하는 설교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린 설교를 지향한다. 누구든 설교자가 될 수 있다. 하여 내가 설교자로 참여하는 교회에서는 여러 명이 돌아가며 설교를 맡는다. 그중에는 목사도 있고 목사 아닌 이도 있으며, 종종 집단으로 하는 설교도 있다. 그리고 언제나 설교 후에는 대화나눔이 이어진다. 물론 실재로 설교자의 자격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지만, 공동체가 동의할 만한 이가 설교자로 선임된다. 목사인지 여부가 아니라 대중이 그이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지 여부가 암묵적인 자격 조건이다.
이 교회는 3명의 고정 설교자가 있으며, 그이들의 설교 주기는 담임목사가 예배위원회, 그리고 설교자들과 협의하여 조정한다. 그리고 고정 설교자 외에 간간이 설교자로 참여하는 이가 몇이 더 있고, 교인들의 조직이 자발적으로 기획하여 진행하는 설교도 횟수가 연 단위로 정해져 있는데, 이 경우 대개 집단설교나 퍼포먼스의 형식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서 설교는 잘 분담되어 있으며, 누구도 과중한 설교의 짐을 지고 있지 않다. 내가 보기엔 이것은 설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다. 특출한 필력과 사고력을 가진 ‘슈퍼휴먼’이 아니어도, 설교자로서 충분히 생각하고 나름 깊게 연구할 틈을 통해 교인과 교인, 교인과 신의 대화나눔 과정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설교의 말을 구성할 최소한의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와 그 설교신학에 대해 얘기가 길었다. 이제 설교쓰기에 관해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눠보겠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설교란 그것이 연행(performance)되는 ‘현장의 언어’라는 점이다. 인터넷에 원고가 공개되고, 그 녹음 혹은 녹화한 것이 무차별 대중에게 바로 공개된다고 해도 원칙적으로 설교는 설교자와 대중이 마주보며 일어나는 그 현장의 것을 옮겨온 것이다. 물론 미국에서 시작된, 이른바 방송설교라는 현장 해체적 설교도 있지만, 그것은 아직까지 설교의 예외적 현상일 뿐이다. 

설교 쓰기 과정에서부터 현장은 설교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일종의 ‘예비검열’(preparatory inspection)이 작동하는 것이다. 청중과 대화할 수 없는 언어를 선택하며 설교를 연행하는 이는 없다. 이때 예비검열자인 청중은 그 교회가 오랫동안 펼쳐오면서 제도화된 예배와 설교 신학 속에 응축되어 있다. 즉 교회가 공유하는 예배와 설교 신학은 설교자가 상상하는 청중의 이미지인 것이다. 특히 일반적인 교회의 관례를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경험을 녹이면서 제도를 구축해온 실험적 교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내가 설교하는 교회도, 갖가지 실험을 하면서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나름의 관행을 정착시킨 예에 속한다. 이 관행 속에는 갖은 실험과 문제의식이 얽혀 있다. 그것은 이 교회가 발전시킨 예배와 설교 신학인 셈이다.

설교쓰기에서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다. 각 교회의 교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예배와 설교 신학 속에는 시공간에 대한 공통감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현장감각이겠다. 가장 간단하고 직접적인 시간의 문제는 얼마간 설교를 하느냐의 문제다. 교인들이 생각하는 적정한 시간보다 넘치면 너무 길고 모자라면 너무 허전하다. 매주 반복되는 설교를 통해 교인들은 적정시간을 몸에 간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설교의 내용을 가장 효과적으로 기억하는 그 교회 나름의 시간감각인 것이다.

이것은 글쓰기의 분량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금석이다. 내가 설교하는 교회의 경우 30분 설교와 30분 토론이 적정시간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데, 거기에 알맞은 나의 글의 분량은 200자 원고지 23매 정도다. 그만큼의 분량 속에 글이 구성되도록 생각을 배분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설교자의 말의 속도와 스타일에 따라 그 분량은 달라진다. 또 가장 간단한 공간의 문제는 설교와 대화나눔이 연행되는 장소에 관한 것이다. 나의 경우 적정한 공간은 둘러앉았을 때 각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 반응을 살필 수 있을 정도다.

시공간에 관한 가장 복잡한 문제는 ‘지금’과 ‘여기’의 해석에 관한 것이다. 교인들이 공지하고 있는 구체적 사건에서 출발하며, 그 사건에 관한 교인들의 이해의 틀, 혹은 교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회 일반적인 이해의 틀에서 제기할 논점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 사건을 좀 더 광역의 시공간 속에서 다시 생각해본다. 즉 ‘지금 여기’의 사건을 하나의 국부적 사건이 아니라 보다 넓은 사회적 역사적 맥락과 연관시켜 그 사건에 관한 종전의 생각을 더욱 깊게 발전시킨다. 하여 여기에서 교인들에게 일반적인 이해의 틀을 넘어서서 생각할 수 있는 대화의 실마리를 제기한다. 요컨대 ‘지금’과 ‘여기’에 대한 해석은 설교의 출발점이고 또 종착점이다. ‘지금’과 ‘여기’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하고, ‘지금’과 ‘여기’에 대한 성찰에서 끝나는 것이다.

다음은 ‘지금 여기’에 대한 문제의식과 성찰에 관한 설교의 한 사례로, 나의 설교 중에서 퍼뜩 떠오르는 것 하나를 선택했다. 선택하고 나서 이 글을 쓰는 중에 확인해보니 이 설교는 수련회 때에 다른 교회와 연합하여 나눈 예배의 설교인 탓에 대화나눔이 생략된 것이었다. 낭패감에 다른 설교로 이 글을 다시 쓸까 했으나,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왜냐면 그날 밤 여러 사람과 길게 얘기를 나누었으니, 사실상은 하늘뜻나누기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독주에 제동을 건 시민의 승리.’ 이번 선거 결과를 놓고 많은 이들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저 역시, 대반전의 스펙터클을 통해 드러난 선거 결과에 고무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 천안함의 정치, 과학주의의 형식을 빌려 전 세계를 향해 타전된 북한 테러리즘에 대한 폭로의 정치가 뜻밖에도 한국의 시민사회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선거 때마다 등장했던 이른바 ‘북풍’은 무력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의 해석에 의하면, 정부가 주도한 천안함의 과학주의적 네러티브가 신냉전주의로 귀결되는 것에 시민사회가 주저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해 5월 13일에 발생했던 천안함 침몰사건과 6.2지방선거 직후에 있었던 설교의 한 부분이다(<욕망의 습격>. 2010.6.13). 이 설교의 출발점이 된 ‘지금 여기’는 천안함 사건에도 불구하고 북풍이 부는 대신 정부, 여당에게 지방선거에서 치명적인 실패를 안겨준 성숙한 시민정신에 많은 이들이 고무되어 있던 상황 인식과 관련이 있다. 그런 사정은 교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인식이라는 시공간적 좌표가 바로 이 설교의 출발점인 것이다.

시민사회가 선거를 통해 보여준 것은 MB 정부의 토건주의적 행보에 제동을 건 것이 아니라, 신냉전주의적 정치의 호전성이 담고 있는 정치적 불안에 대한 반대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정부의 일방적 토건주의 정치가 오히려 더 불안을 야기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대인지도 모릅니다.

해서 나는 MB 정부의 토건주의에 대한 우려 못지않게 우리 자신의 욕망 분출의 전략에 대해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절제하는 삶을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MB의 토건주의를 좌초시키는 데 성공할지라도 우리는 또 다른 ‘MB’를 불러오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같은 설교의 맺음부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6.2지방선거의 결과는 ‘성숙한 시민정신’ 덕이 아니라 ‘시민의 넘치는 욕망’ 탓일 수 있다는 문제제기에 있다. 소비사회가 도래하면서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시민의 게걸스런 자산 축적의 욕망이, 그리고 그러한 삶의 전략이 과하게 고조되고 있는 시기에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다. 더욱이 지구화의 광폭한 태풍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치열하게 욕망의 게임에 몰두하게 만들고 있던 시기다. 그런데 정부가 담론화하던 천안함 사건에 관한 해석들은 전쟁의 위기의식을 한층 고취시켰다. 이것은 주가를 떨어뜨리고 부동산 경기를 침체하게 하고 국제무역에서 좋지 않은 징후로 해석될 수 있었다. 시민사회는 그렇게 이해했다. 즉 정부와 여당은 천안함 사건을 위기담론으로 해석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는데, 시민사회는 그것에서 자신의 이익이 침해될 수 있다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선거에서 여당에 반대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인 것은, 이 선거의 민심이 4대강 사업 같은 정부의 토건주의 정치를 반대하게 하는 동력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다. 교회가 지향하는 하느님나라의 질서에 반하는, 땅을 착취하고 농민과 서민의 건강한 삶을 유린하는 자본 친화적인 MB 정부의 토건주의 정책이 이번 선거로 그다지 제동이 걸릴 것 같지 않다는 문제제기다. 하여 너무 낙관적인 마음으로 ‘지금 여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좀 더 냉철하게 사태를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설교 후 ‘지금 여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관한 격렬한 토론을 낳았다. 선거결과를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거행위가 이 설교에서 모욕을 당했다는 느낌을 받았던 모양이다. 반대로 다른 이들은 설교의 주장에 공감했다. 그이 중에 한 사람이 부동산에 관한 사람들의 욕망이 어떤지에 대해 자기의 기억을 풀어놓았다. 그러자 욕망에 관한 얘기가 꽃을 피웠고, 그 욕망을 어떻게 절제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생각을 나눴다. 거기에는 무소유를 주장하는 스님의 책 얘기도 나왔고, 동양고전에 관한 얘기를 꺼낸 이도 있었다. 또 예수에 관한 생각을 펴는 이도 있었다. 

하여 설교자의 생각을 사람들이 지지하든 않든, 이 설교는 하나의 생각의 실마리가 되어, ‘지금’과 ‘여기’를 보다 냉철하게 생각하고 성찰하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에 관한 사회의 일반적인 이해의 틀에서부터 교인들 각자가 품은 자기 자신의 욕망까지 되돌아보면서 이 사건에 관한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 설교의 ‘지금 여기’에 대한 문제의식과 성찰 사이에는 ‘성서 읽기’가 있다. 시공간에 대한 이해가 설교에서 특별히 고려해야 하는 첫 번째라면, 성서 읽기는 두 번째 요소다.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적 이해가 현재라면, 성서는 ‘과거의 텍스트’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동원하는 방식, 그것이 설교의 중요한 형식적 틀이다. 즉 설교는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현재(‘지금 여기’)를 다르게 바라보고 성찰에 이르게 안내하는 데 목적을 둔 텍스트다.

위의 설교로 돌아가 보자. 생각의 실마리로 선택한 성서 구절은 「창세기」 6장 2절이다.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것은 기원전 3세기에 널리 회자된 묵시적 구문의 하나인데, 5개 묵시록의 묶음집인 『에녹1서』에 수록된 「파수꾼의 책」에서는 이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들어 있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타락한 천사’라고. 다시 이 설교의 한 부분을 인용해보자. 

한데 그것에 제동을 걸 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타락한 천사 아사엘은 심판을 받지만, 그 종말을 되돌리게 할 이는 부재합니다. 어느 인간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천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신조차도 불가능합니다. 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재앙 이후 역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뿐입니다. 욕망의 침입은, 그 절정에 이르면 이렇게 환원 불가능한 파멸로 인간을 몰아간다는 것, 이것이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시대, 그 욕망의 질주 시대를 맞아 「파수꾼의 책」을 저술한 한 묵시가의 문명비평적 고언(苦言)입니다.
타락한 천사들이 인간에게 신의 비밀을 발설하였다. 가령, 아사엘은 야금술을 가르쳤다. 그것은 문명을 낳았고, 그 결과 제국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 식민지 사회에서 형성된 묵시록들의 문명인식의 한 단면이다. 발전된 문명의 추동자인 제국의 치하에서 식민지인 팔레스티나는 적지 않은 발전을 이룩했다. 물론 그것은 ‘더 많은’ 땅을 병합한 지주들과 그들의 하수인인 토지관리인(청지기), 그리고 몰락의 위기에 놓인 농민들과 이미 몰락하여 떠돌이가 되어버린 이들로 사회적 계층 분화를 심화시켰고, 성장의 꿈에 부푼 이들의 향락과 몰락의 나락에 떨어진 이들의 비탄이 겹쳐지는 사회를 낳았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한 묵시가는 부풀려진 욕망, 그 욕망의 습격으로 환각에 빠진 영혼들의 파멸을 상상한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6장 2절의 구문 속에 담긴 종말론적 비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성서는 ‘지금 여기’에서의 문제의식과 성찰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키며, 그 사이를 괜한 낙관으로 메우는 대신 문명에 대한 종말의 위기의식으로 채워 넣는다. 천안함 사건이 6.2선거에서 북풍으로 귀결되지 않고 오히려 정부와 여당에게 패배를 안겨준 것은, 시민정신의 발로가 아니라 소비사회를 사는 우리 모두가 탐닉하고 있는 욕망의 경제학 탓이라고, 그런데 이것은 우리 모두의 파멸을 부르고 있다고 ......

여기서 우리는 설교에서 고려해야 하는 세 번째 요소에 이른다. 현장의 대중에게 던지는 논점이다. 논점은 청중에게 불편한 진실 혹은 낯선 진실을 가지고 설득하려 할 때 형성되곤 한다. 물론 모든 설교가, 언제 어디서나 이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위로가 필요하고 때로 슬픔을 공감하거나 분노를 공유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설교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낯설거나 불편한 진실에 생각이 헛갈리게 하고 때로 반감을 불러일으키게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당연한 생각의 코드를 교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해석은 하나의 자명한 진실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의 틀도 가능하다는 다중의 현실에 직면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설교의 말/글은 신학적으로 예언이며 문예학적으로 ‘비평’이다.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말하되, 그 사건에 대해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는 스토리라인을 빗대면서, 그 담론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 말을 찾아내고 또 말하고 있는 은폐된 소리를 들춰낸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생각을 발전시키고 성찰에 이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언 또는 비평으로서의 설교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설교를 다른 점에서 불편해 한다. 그것은 설교가 예언이고 비평이어서가 아니라, 뜬금없는 소리이거나 아무 의미 없는 소리로서, 현장도 없고 진정성도 없는 메아리로만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보다 생각을 지우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화 중에 “너 설교하니”라는 말은 아무런 애정도 진실도 담기지 않는 ‘훈장짓’ 하는 말을 뜻한다. 실재로 많은 설교가 그렇다. 

일차적인 책임은 목사들에게 있겠다. 동시에 그러한 설교 말을 공명하는 교회와 교인에게도 책임이 있다. 이러한 나쁜 관행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이 있다. 그것은 ‘설교가 비평인 것처럼 설교도 비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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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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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그릇으로 드리는 기도』
- 성공회 최상석 사제 생명 묵상집

지은이 : 최상석
펴낸날 : 2011년 4월 20일
분  야 : 에세이
판   형 : 신국판
페이지 : 308쪽
정  가 : 13,000원
펴낸곳 : 도서출판 동연

책소개

밥 한 그릇 안에 담긴 생명에 대한 경배

성공회 신부가 자신의 20년 사제생활을 되돌아보며, ‘밥 한 그릇’이라는 화두를 들어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먹음의 참된 의미에 대해 말씀의 소박한 밥상을 차려냈다. 신앙생활을 ‘밥 한 그릇’ 바르게 먹는 일이요, 그동안 밥이 되어 준 수많은 고마운 존재들을 생각하며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밥값’ 하며 사는 삶이라는 단순한 진리로 따듯하게 차려놓은 투박하지만 마음 가득 차오르는 단편의 글에서 생명의 입맛을 되살려준다.

누구에게나 마음이 따듯해지고 맑아지며 거룩해지는 지점이 있다. 신이 거주하는 예배소가 될 수도 있고, 망망대해가 펼쳐진 바닷가나 산세 웅장한 산 정상일 수도 있으며, 장엄한 일출이나 낙조를 볼 때 혹은 어머니 품에서 젖을 먹다 이내 잠든 어린아이 얼굴을 볼 때일 수도 있다. 지은이는 ‘소박한 밥상’, 반찬 서너 가지에 밥 한 그릇 올려 있는 밥상에서 자신의 성소를 찾는다. 모락모락 김과 함께 퍼지는 구수한 밥 냄새가 있고, 가족의 웃음이 있고, 고마움이 있고, 행복이 있는 포근한 곳. 어렸을 적 밥을 남기거나  욕심내서 먹으면 하늘이 복을 주지 않는다고 늘 이야기하시던 돌아가신 할머님의 말씀이 있는 곳. 반찬투정을 한다며 때로 엄하게 꾸짖으시던 아버지의 훈화가 있고, 식구들이 다 먹은 다음에 ‘나는 이런 것들이 더 맛있다’ 하시며 늘 남은 반찬에 손을 대시던 어머니의 물기 묻은 손길이 있고, 좋은 반찬 더 먹으려 아옹다옹하던 어릴 적 형제들의 반찬다툼이 있고, 때로 먹을 것이 없어 밥 때 맞추어 찾아 온 길손을 맞아 나누던 시골 인심의 넉넉함이 있는 곳. 그런 곳이 지은이가 삶을 재생하는 성소로 여기는 밥상이며, 밥 한 그릇 위에 모락거리는 기억이다.
또한 지은이가 말하는 밥이란,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먹이’ 곧 ‘양식’이 되어 준 모든 것이다. 공기(空氣)도 밥이요, 물도 밥이요, 채소도 밥이요, 오곡도 밥이요, 어머니의 말씀 없는 사랑도 아버지의 엄한 사랑도 밥이요,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 따듯한 말도 밥인 것이다. 또한 영의 양식인 하느님의 말씀은 밥 중의 밥이다.
밥값을 하며 살자. 지은이가 말하는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 따듯한 밥 한 그릇 되어 주며 살자는 평범하지만 우리 시대가 잊고 살아가는 실천하기 어려운 진리이다. 모든 것이 넘쳐서 병이 되는 시대, 다른 생명들을 무작위로 소비만 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한 세상을 다 마쳐도 이루기 어려운 단순한 진리이다.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기도하는 삶이라면 설익은 밥만을 만들 수밖에 없다. 지은이는 성공회 사제이지만 종교를 넘어선, 모든 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으로 ‘밥 한 그릇’의 고마움, 즉 다른 생명의 고마움을 아는 사회적 영성을 꿈꾼다. ‘밥 한 그릇’의 고마움을 아는 일이 이 시대의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며 사는 일이라는 지은이의 단순한 결론은 20년을 사제생활의 한 길을 걸으며 고슬고슬 뜸을 들여 온 생각이기에 가마솥에 갓 지은 밥처럼 깊은 맛을 낸다.


지은이 소개

최상석(崔相錫)

1961년 경기도 남양주 북한강변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알리는 영혼 구원의 사목과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서로 하나라는 깨달음 아래 환경운동과 생명선교에 임하고 있다.
1991년 성공회 사제로 서품을 받고 서울교구 교무국, 간석교회(인천), 광명교회, 서울주교좌성당, 안양교회, 서울교구 선교교육원에서 함께 주님을 섬겼고, 현재 미국 워싱턴 한인성공회 사목을 준비하고 있다.

1984년 연세대학교 지구시스템과학과 졸업
1988년 연세대학교 신학과 졸업
1989년 성공회 사목신학연구원 졸업
1991년 대한성공회 사제 수품
1995년 신학석사(연세대연합신학대학원)
2009년 목회학박사(성공회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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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차 월례포럼은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가 주최하고 우리신학연구소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공동 주관하는 <한국사회 우파의 형성과 그리스도교> 포럼으로 대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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