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유리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하느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9~20절


“그룹들(Cherubim)은 주님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무르고,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하느님의 카보드)이 그들 위에 머물렀다.” 「에스겔서」 1장 19절입니다. 이 구절을 보면 마치 ‘하느님의 영광’이 존재처럼 움직여 어느 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곳은 성전입니다. 바벨로니아 유배시대 예언자의 말이지만, 이것은 훗날 성전종교가 탄생하는 하나의 계기가 됩니다. 그때까지 야훼종교는 왕실종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야훼는 왕실과 더불어 존재했고, 왕실의 후견인으로 있었으며, 왕실의 몰락은 야훼의 몰락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그 왕실이 진짜로 몰락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야훼신학은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이때 바벨로니아 식민지 시대, 유배된 공동체 사이에서 활동했던 예언자 에스겔은 환상 속에서 야훼가 성전에 머무르는 것을 봅니다. 왕실이 없어도 성전만 있다면 그분은 존재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성전도 불타고 없었던 때입니다.  

하지만 훗날 성전이 다시 지어졌을 때, 이 예언자의 환상은 하나의 종교를 탄생시키는 전거가 됩니다. 바야흐로 성전종교가 등장하게 됩니다. ‘유대교’라는 야훼신앙의 한 변종은 이렇게 해서 역사에 태동하였습니다.

한데 여기서 하나 더 언급해야 합니다. 에스겔은 하느님을 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하느님은 너무 숭고하고 초월적이어서 볼 수 없습니다. 유대교는 이렇게 너무나 초월적인, 범접할 수 없는 이, 바로 그분을 숭배합니다. 그분은 성전 안에 계십니다. 아무도, 제사장만이, 아니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하루 들어갈 수 있다는 성전 지성소 안에 계십니다. 아니, 아니, 성전 지성소 안에서 뵐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이렇게 유대교는 성전 안에 지극히 초월적인 하느님의 영광이 머물고 계신다는 믿음 위에서 출발한 종교입니다.

한데 바울은 오늘 읽은 본문에서 그러한 유대교의 초월적 신성에 대해 반론을 폅니다.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본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지은 만물 속에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유대교는 하느님을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분은 성전 속에,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더구나 그 안에는 하느님이 아닌, 그분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나마 그 영광을 볼 수 있는 것도 대제사장뿐입니다. 하여 유대교에서 ‘봄’은 권력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시선의 권력’에 의해 엄히 통제되는 종교인 것입니다.

반면 바울은 다른 패러다임으로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낸다고 주장합니다. 하느님을 보고자 하는 이는 볼 수 없으나, 그분은 당신이 지은 존재들 속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더욱이 바울의 표현을 보십시오. 그분은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또한 그분을 볼 수 있는 이는 대제사장만이 아닙니다. “그 지으신 만물을 보”는 이는 누구나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초월자를 보고자 하는 이는, 권력의 시선에만 찔끔 드러낼 뿐,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만물 속에 내재하는 신을 보고자 하는 이는 그분을 환히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존재들을 보고, 그 존재들의 고통과 신음 소리를 애틋하게 들을 줄 아는 이는 모두가 그분을 봅니다. “모든 피조물이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서」 8,22)

하여 바울은 하느님을 보는 것에 관한 신학적 주장에서 ‘시선의 권력’을 해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장막 대신에 ‘투명유리’를 두었고, 그 유리를 통해서 하느님을 모두에게 환히 드러내고 있다고 강변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내가 사는 지역의 구청 청사가 새로 지어졌습니다. 그 전면이 시멘트가 아니라 유리로 되어 있는 건물입니다. 옛날 청사는 8차선 도로에서 좁은 길을 따라 50미터는 올라가야 있습니다. 학교 운동장 절반만한 주차장 저편에 청사 건물들이 있습니다. 언덕에 위치한 청사 주위에는 높은 담장이 있고, 담장을 따라 나무가 또 하나의 담벼락처럼 줄지어 서 있으니, 흡사 하나의 작은 성채 같은 구조물입니다. 닫힌 구조, 왠지 중차대한 일이 있지 않는 한, 출입하지 않는 게 나을 법한 구조입니다.

과거에 성전도 그랬겠지요. 친근감보다는 경외감으로 둘러싸인 건조물일 테니 말입니다. 그곳에 높은 분이 있고, 그이를 만나려면 충분한 자격을 갖춰야만 할 것 같은, 그런 곳입니다. 유리가 아닌 벽으로 폐쇄된 둘러싸인 ‘막힘의 공간’입니다.

한데 새 청사는 언덕이 아니라 평지에 지어졌습니다. 같은 8차선 도로지만, 더 넓어 보이는 도로 한편에 담장도 없이, 모두에게 열린 문처럼 개방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더욱이 그 전면이 유리이니, 마치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듯합니다. 투명한 행정, 누구에게나 공개되고 누구나 쉽게 드나들어도 될 것 같은, 들어가면 구청장이 환한 얼굴로 나를 반겨줄 것 같은, 하여 나의 민원에 귀 기울일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합니다.

여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서울과 인근 신도시에 건설된 구청과 시청 청사는 유리벽 전면인 경우가 유난히 많습니다. 필경 투명한 행정을 과시하려는 것이겠지요. 필경 모두에게 열린 개방된 공간임을 자부하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실은 그 안으로 들어가면 밖이 훤히 보이지만 밖에서 안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 유리는 투명유리가 아니라 반(半)투명유리인 것입니다. 아예 투명함을 포기한 듯, 폐쇄 양식의 건조물은 안이든 밖이든 서로를 볼 수 없게 하는 구조입니다. 반면 투명한 듯 착각을 일으키지만 투명함을 거부하는 투명유리 아니 반투명유리 양식은 ‘보는 것이 권력인 사회’의 건조물을 뜻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 효과를 통해 지배를 실현하는 사회를 상징합니다. 하나는, 밖에 있는 자에게는 마치 투명하고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는 듯 착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안에 있는 자는 밖을 훤히 응시할 수 있는 능력, 아니 권력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로 그곳, 시청과 구청에서 수많은 재개발밀약이 맺어졌습니다. 건설에 살고 건설에 죽는 나라의 미친 재개발사업의 ‘밀실 삼각동맹’이라는 ‘행정관서-금융기관-건설주’의 밀약은 바로 이 투명건물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맺어졌습니다. 밖의 시민사회는 그 안을 모릅니다. 그리고 마치 법이 평등하다는 착각 아래서 그 재개발사업에 환호하고 욕망합니다.

한데 부패지수가 대단히 높은 우리사회에서 1990년부터 2006년까지 언론에 보도된 부패사건을 분석하면 전체 부패건수의 55% 이상이 건설과 주택 관련 분야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실제로 수많은 건물들에는 소송이 걸려 있고, 또 정치자금이 은닉되는 가장 좋은 장소가 건축물들이라고 합니다. 시민사회의 각각은 그 부패양상이 너무나 일상화되어서 경각심조차 갖지 않고 건축 메커니즘에 일원으로 끼어들며, 시민의 무분별한 욕망이 가장 불꽃을 일으키는 분야가 바로 건축입니다.

도시재개발사업의 경우는 규모가 휄씬 커서 행정관서-금융기관-건축주의 삼각동맹은 합법적 틀을 따라 진행되곤 합니다. 건설 투자가 총투자액의 20%를 넘나들고, 건설업이 국민총생산의 20%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는, 하여 OECD 평균의 두 배나 되는, 건설에 미친 사회에서 법은 이미 이들 재개발주체에게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니 법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면서 재개발에 환호하고 욕망을 나누었던 평범한 시민은, 그중 많은 이들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몰락하곤 합니다. 특히 서울지역에서만 재개발지구가 96개나 되는 올해의 경우, 재개발사업으로 인한 피해자의 규모와 정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광범위해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상업지구의 경우 그 피해가 더욱 심각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저 끔찍한 용산의 철거투쟁과 홍대 역 근처의 두리반 투쟁은 그 심각성에 시민사회적 경각심을 한층 높여놓았지만 정부는 밀실 삼각동맹에서 한 발짝도 빠져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며칠 전 만난 명동 철거지역의 한 카페주인은 억대를 훨씬 넘는 권리금과 시설투자비는 고사하고, 1,700만원의 보증금에서 단 1,000만원만 받아가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하소연하였습니다. 일부 중산층은 이렇게 재개발사업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법 운용으로 인해 몰락의 위기에 몰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 관공서의 투명유리는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더 높은 장벽을 상징할 뿐입니다. 적어도 현 정부는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곧 이 투명유리는 민주주의적 공공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공공성, 곧 사회적 정의는 부재하며, 더 강하고 더 교묘해진 권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교의 폐쇄성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 닫힌 신앙구조는 극소수의 엘리트에게만 드러내는 신에 관한 종교였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종교의 신의 폐쇄성을 해체하고, 신을 공공화하는 종교로 재탄생시킨 것입니다.

바울의 예수 따르기는 이러했습니다. 그는 반투명유리로 된 성전체제를 해체하고, 투명유리로 된 신을, 초월적인 닫힌 신을 대중에게 훤히 드러내주는 새 종교의 등장을 위해 열정을 다해 권력과 싸웠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울에게서, 그의 「로마서」에서 얻어야 할 배움의 요체는 바로 이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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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향한 서로 다른 포물선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유감레비나스

레비나스가 걸어온 사유의 여정은 감동적이다. 현대 사상계의 화려하고 감각적인 내공을 지닌 고수들과 달리 레비나스는 평생 타자와 윤리라는 밋밋한 주제를 갖고 강호를 누볐다. 이런 그의 완고함과 철저함으로 인해 감히 함부로 레비나스와 맞짱을 뜨려는 검객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데리다가 그의 생의 초반에 썼던 논문 ‘Violence and Metaphysis: An Essay on the Thought of Emmanuel Levinas’ (『Writing and Difference 』,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pp.79-153)에서 잠시 레비나스를 향해 딴지를 걸었던 것을 빼곤 별로 기억나는 레비나스 비판은 없다.

하지만, 레비나스 윤리학이 선사하는 이러한 감동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는 내가 닿을 수 없는 저편에 존재한다. 쇼펜하우어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비판한 것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레비나스의 ‘표상할 수 없는 타자’라는 테제 앞에서 혼란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이 타자와 관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에 그렇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레비나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왜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작아지는가? 급격한 초월의 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때문이다. 그 벽은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이 드러날 때 겨우 열린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초월적 타자와 수직적으로 만난다. 레비나스의 사상은 그 순간을 감지하고 찬양하는 숭고함이다.

하지만, 현실의 세계는 양자간의 초월적 관계만으로는 구성되지 않는다. 수많이 타자들이 자아내는 다름과 차이에 대한 숙고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곳이 지금의 세계이다. 그렇다고 볼 때 레비나스의 윤리는 작금의 다원화된 세계화된 사회에서 유통가능한 복수의 윤리를 담아내기에는 지나치게 순결하고 완고하다. 위에서 언급한 레비나스 윤리의 완고함 내지 우직함은 레비나스 사상을 지배하는 유대교적 철저함, 즉 무한인 하나님은 오직 타자의 얼굴을 통해 드러낸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궁극적으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신비로 밀어붙였던 것이다.[각주:1] 여기에는 제3자가 끼어들 틈이 없다. 공동체의 자리, 즉 다른 타자들과의 횡적연대를 도모할 여지가 남겨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로 위치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와는 다른 구조이고, (교회) 공동체에 대한 여전한 신뢰를 놓치고 있지 않는 그리스도교의 그것과도 차이가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번 웹진에서 레비나스 윤리의 외연 확대를 위해 그리스도론에 입각하여 타자의 윤리를 전개하는 본회퍼를 끌고 올 것이다. 본회퍼의 ‘타자를 위한 존재’가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을 강화시킬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본회퍼의 기독교 윤리

일반적으로 본회퍼는 본인의 신학과 삶을 통해 신앙과 사회적 책임이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해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루터의 ‘두 왕국설’을 임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거나, 나치로 상징되는 정치지도자들이 행하는 악에 방관했던 당시의 교회현실에 맞서 사회적 책임이 신앙의 영역에 포괄된다는 사실을 주장했고 이러한 본회퍼의 사회윤리는 후에 서구의 정치신학과 세속화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각주:2]

본회퍼 신학의 출발점은 언제나 현실이었다. 인간은 추상적 관계의 총체가 아니라 공동체에 바탕한 구체적 관계의 총체이다. 본회퍼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 총체성의 중앙에 위치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계시의 현실’[각주:3] 속에서 모든 개인들은 얽히고 연대하여 하나로 모아진다. 그러므로 본회퍼 윤리의 최대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고 주어진 하나님의 현실성과 세계의 현실성이 하나가 되는 과정에 우리가 얼마만큼 긴밀하게 참여할 수 있는가에 집중된다.

기독교윤리의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이 그 피조물 가운데서 실현되어 가는 것이다. 다른 모든 윤리에 있어서는 당위와 존재, 이념과 실현, 동기와 결과의 대립에 의해 그 특징이 드러나지만 기독교 윤리에서는 현실과 현실화, 과거와 현재, 역사와 사건의 관계나 애매한 개념들을 사건의 불분명한 이름으로 대치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가 문제된다. 선에 대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현실에 참여하는 문제가 된다.[각주:4]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본회퍼는 칸트 이래 서구 윤리학이 걸어왔던 개인적 차원의 심정윤리학도 거부하였고 동시대에 미국에서 활동했던 라인홀드 니버의 분열된 현실인식 또한 부정한다. 본회퍼에 있어 윤리란 인간의 의지나 정신적 행위에 역점을 두는 존재의 윤리도 아니고, 업적이나 성공, 지위를 강조하는 행위의 윤리도 아니다. 본회퍼에 이르러 주체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로 선언되었고, 이 주체는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묻는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Dietrich Bonhoeffer (1906-45)



타자를 위한 존재

‘그리스도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끌어낼 수 있는가?’ 본회퍼 신학이 묻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회퍼의 하나님은 고통가운데 숨어계시는, ‘없이 계시는 하나님이다.’[각주:5] 하지만, 자칫 이 말은 악으로 가득 찬 세상 가운데 침묵하시는 하나님으로 비쳐질 우려가 있다. 강성영은 이러한 의심에 맞서 본회퍼가 주장하는 신의 자기은폐는 십자가상에서 피조세계의 고통에 참여하는 신의 탄식이었음을 분명히 한다.[각주:6] 이는 그리스도교만이 가지는 독특한 신 이해이라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본회퍼는 비로소 본인의 윤리적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본회퍼의 ‘십자가 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단어가 ‘대리(stellvertretung)’이다. 본회퍼는 1941년 여름부터 1942년 초 사이에 쓴 『기독교 윤리』에서 책임의 문제를 다루었다. 본회퍼는 그의 책임윤리를 그리스도론으로 설명하면서 책임적인 삶의 형태가 ‘속박(Bindung)’과 ‘자유(Freiheit)’에 의해 이중적으로 규정됨을 밝힌다. ‘속박’은 ‘대리’와 ‘현실적응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는 ‘생활과 행동의 자기음미’와 ‘구체적인 결단의 모험’으로 드러난다. 본회퍼는 책임이 대리행위를 근거로 생겨난다고 보았고,[각주:7] 그 다음 페이지에서 본인의 사상을 지탱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에 대한 중요한 서술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생명자체이고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대신 사셨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그가 대신 사신 삶이다. 예수는 결코 스스로가 완전성에 도달하려고 한 단독자가 아니라, 단지 자신에 의해서 모든 인간의 나를 받아들이고 감당하신 분으로 사신사신 것이다. 그의 생활, 행위, 노력의 전체는 대리다. 인간이 살고, 행동하고, 괴로워해야 할 것이 그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의 인간적인 실존을 형성하고 있는 이 진실한 대리의 행위에서 그는 책임을 지는자가 되었다. 그는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에 의해서 모든 생명은 대리된 것으로서 규정된다.[각주:8]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적 타자인 하나님에게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방법과 가능성은 없다.신의 입장에서도 인간은 타자이어야 한다. 그래야 신의 신다움이 보장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대리를 통해 양자간의 극복될 수 없었던 타자성은 긍정될 수 있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대리적 죽음으로 파악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철저히 ‘타자를 위한 존재’로 규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것은 인간의 전존재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경험이요, 예수는 오직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경험이다. 예수가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초월경험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죽기까지 타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에서 비로소 전능, 전지, 편재가 유래한다. 신앙이란 예수의 이러한 존재에 관여하는 일이다.(수육,십자가,부활). 신에 대한 우리들의 관계는 생각할 수 있는 사고상의 최고, 지대, 최선의 존재-이것은 결코 진정한 초월이 아니다-에 대한 종교적 관계가 아니다. 신에 대한 우리들의 관계는 “타인을 위한 존재”에 있어서의, 곧 예수의 존재에의 관여에 있어서의 새로운 생이다.[각주:9]

이제 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드러난 ‘타자를 위한 삶‘을 통해 새로운 자기동일성을 획득하였다. 신은 자기동일적인 공간이 아니라, 세상과 타자를 위해 자기를 개방할 때 비로소 신의 신됨이 선포된다. 그리스도의 대리에 나타난 하나님 현현이 그것을 보증한다. 이렇듯 ‘타자를 위한 존재’로 특징지어지는 본회퍼의 사상은 그의 윤리뿐 아니라 교회론에도 영향을 끼쳤다.[각주:10] 이 말은 윤리란 개인의 실존과 공동체를 양대축으로 삼고 전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본회퍼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개인과 공동체를 매개하는 이음새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레비나스는 그리스도를 타자를 위한 대리자로 고백하는 본회퍼의 사상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 당연히 거부할 것이다. 왜냐하면, 레비나스에게 있어 무한은 오직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은 타자의 얼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통해 발견되어지는 것이지, 성육신의 도그마에 의존하는 본회퍼의 그리스도 이해를 따라 하나님 앞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고 레비나스는 답할 것이다.

솔직히 나는 레비나스의 신인식에 대해서는 반박할 필요를 못 느끼겠고, 또 그럴만한 내공도 없다. 개신교 목사라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유대교 석학의 신 이해에 대해 그것이 나의 고백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딴지를 건다면 신앙의 오만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윤리’에 대해서는 그의 신 인식과는 별개로 묻고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임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1996), 85. [본문으로]
  2. 본회퍼 연구가 강성영(한신대, 기독교윤리)은 그의 논문 “타자와 민중을 향한 외침: 본회퍼 신학과 한국교회의 미래”에서 이러한 본회퍼의 신학을 ‘실천적 해석학’, ‘참여의 해석학’, 그리고 ‘타자를 위한 삶’으로 요약하고 있다 - 강성영. 『생명 .문화. 윤리: 기독교 사회윤리학의 주제탐구』,(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6), 252. [본문으로]
  3. 본회퍼 저/손규태 역. 『기독교윤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4), 162. [본문으로]
  4. Ibid., 163. [본문으로]
  5.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없이”- D. Bonhoeffer, Widerstand and Ergebung, Neuausgabe, hrsg.v.E. Bethge, 3. Aufl, Munchen: 1985(=WEN), 27. 강성영, 앞의 책, 238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6. “그는 하나님의 초월을 피안의 초월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의 삶의 한가운데 있는 초월을 말하였고, 하나님의 전능을 그의 권력과 지배로 보지 않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배척받고 십자가에서 고난당하는 무기력함과 약함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랑의 전능으로 이해하였다.”- 강성영. 『생명 .문화. 윤리: 기독교 사회윤리학의 주제탐구』, 238. [본문으로]
  7. 본회퍼 저/손규태 역. 『기독교윤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4), 193. [본문으로]
  8. Ibid., 194-195. [본문으로]
  9. 본회퍼 저/고범서 역. 『옥중서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0 개정3판), 229. [본문으로]
  10. “The church is the church only when it exists for others.”- D. Bonhoeffer, Letters & Papres from Prison, ed. E.Bethge.(NY: The Macmillan, 1971), 38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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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만드는 행복한 나라


 


조병환
(본 연구소 회원)


우리나라는 36년 동안 일본의 강압적 지배하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살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자신의 살길을 찾아 일본에 빌붙어서 자기 민족을 가열차게 짓밟는 자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이 모두 글깨나 배운 자들이었습니다.
해방이 된 뒤에도 이 반역의 무리들이 이 나라를 다스리는 실권을 가지고 자기 민족을 지배하는 역사가 되풀이되어 힘없는 국민은 주인만 바꾸어 섬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IMF가 무엇입니까? 이 나라의 종합금융사가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돈장사를 하다가 그 덫에 걸려 모든 국민이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IMF가 들어왔지만 오히려 그들의 비싼 이자에 못 견디고 좋은 기업을 헐값에 넘겨버린 것이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이 지도층이 저지른 죄악입니다.

우리는 지금 더 잘 사는 선진국으로 가는 덫에 걸려 고통을 당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 덫은 국제자본인 부채입니다.
이 빚으로 집 사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전세값이 올라 못살겠다고 하면 전세자금 빌려 가라고 하고, 등록금이 너무 비싸다고 하면 학자금대출로 갖다 쓰라고 합니다.
기업인에게는 기업자금이 대출되고 은행은 높은 이자 받으니까 좋습니다. 아파트집단 대출은 은행들이 못해서 안달입니다. 정책담당자는 인기가 올라가서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은행은 원래 돈벌이가 본업이긴 하지만 정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도를 넘은 부실 대출에 서민들 돈을 마구잡이로 먹어치우는 “막 먹어버린 대출”, 받을 수 없는 대출들로 부산저축은행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힘깨나 쓰는 권력자가 개입한 은행 대출은 대부분 부실 대출로 국가 경제를 좀먹습니다.

금융위기가 무엇입니까? 극복방안이 무엇이었습니까?
정책 담당자와 은행이 잘못한 것을 국민세금으로 땜질하는 것을 끝났습니다.
이런 제도는 국민을 못살게 만드는 잘못된 정책입니다..
정부는 은행돈을 마구 먹어치운 도둑놈 편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추상 같은 처벌은 물론,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인간의 한없는 탐욕인 ‘더 잘 살아보겠다’는 욕망을 이용하여 대통령이 된 이명박 씨는 더 잘 살게 해준다더니 국민 건강을 뒷전으로 하는 쇠고기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인권 유린이 자행되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남북관계 악화는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노사합의 후 노동자에게 가하는 고통은 인간성을 짓밟는 악행입니다.
노동자는 이 나라 경제를 일으키는 주체로서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일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중산층을 두텁게 서민을 따뜻하게”는 좋은 정책입니다.
이런 정책을 실현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돈은 상위 20%에게 가버리고 정부는 빚만 늘어가서는 좋은 정책을 펼 수가 없습니다.

22조원이 들어가는 4대강사업, 친토건정책, 부자 감세, 재벌특혜정책, 경인운하, 각종 전시장과 경기장 건설, 지자체의 호화 청사 건설 등은 모두 국고를 거덜나게 하는 일입니다.
부자나 재벌들은 정부가 가만히 놓아두어도 잘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온갖 특혜에 세금 감면까지 한 결과 15대 재벌들의 곳간에는 57조원의 보유금이 쌓이고 국고는 부채가 차지했습니다.

2010년 말 통계를 보면 정부도 국민도 모두 빚쟁이가 되었습니다. 참고해 보십시오.

1. 개인부채 937조 2,837억 원
2. 정부부채 
    지방자치부채 367조 1,016억 원
   
사회보장부채
3. 기업부채 1,286조 8,392억 원
    부채합계 2,586조 2,245억 원

부채가 명목국내총생산 1,172조 원의 2배가 넘습니다.
그런데 최근 수개월 동안 국가부채가 수조 원 더 늘었습니다.

부자들의 재테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첫째, 주식을 통해서 불어난 돈이 13조 원 재산이 늘었고
둘째, 주식배당을 통해서 받은 돈은 홍석현 사장이 삼성 이건희 회장을 제치고 2,464 억원으로 제일 많고, 허정수 회장이 103억 원이 제일 적습니다. 그리고 14명이 100억 원 이상의 주식배당금을 받았습니다.
셋째, 이들은 또한 자회사 일감 몰아주기로 10조 원의 이익을 챙겼습니다.

2007년 10월, 웃지못할 이건희 씨의 4조 5천억 원 비자금 사건이 터졌습니다. 비자금이란 이익이 난 회삿돈을 자기 돈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자금도 회사를 위해 사용하면 죄가 안 된다는 세상입니다. 무엇 때문에 비자금을 만드는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비자금 사건으로 고발당한 이건희 씨는 2,508억 원을 낼 테니 선처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이 돈을 납부했습니다.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했겠지요.
그런데 재판 결과 국가에 납부할 돈은 277억 원으로 줄어들었고 무죄가 선고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건희 씨가 다시 찾아간 돈이 2,281억 원입니다. 찾아간 그 돈은 누구를 위해 사용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판결을 한 판사가 누군지 모르지만! 참 한심스런 일입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삼성특검을 담당했던 검사는 최근 삼성전자 부사장으로 갔습니다.
그런가 하면 최월영 판사는 전환사채 건으로 이건희 씨에게 130억 원 배상판결을 했습니다. 이런 판사님도 계십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건희 회장을 특별사면 복권시켰습니다.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라는 뜻이겠지만, 우리 국민들은 이에 대해 한번 잘 생각해 볼 일입니다.
탈법을 저지르면서 나라 위해 큰일을 하기보다는, 너와 내가 다같이 법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민주사회일 것입니다. 국민들은 이것을 더 원하고 있습니다.

이 정부는 재벌들에게 턴키 방식 공사발주로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가만히 놓아두어도 돈 버는 데는 귀재들인데 이들을 돕고 특혜까지 베풀고 있습니다.
경쟁입찰이면 20%-30%는 공사대금이 줄어들 것인데도 턴키 방식으로 하는 바람에 국민이 내는 세금이 재벌들에게 손쉽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또 돈에 혈안이 된 대기업은 골목상권까지 침투해 서민들은 먹고 살 것이 없어집니다. 무슨 사업을 해도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돈은 상위 20%에게 가버리고 하위 20%와의 격차는 6.2배에 이릅니다. 이들은 세계적인 명품에만 눈을 돌리고 이웃의 고통은 안중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산층은 두터워진 것이 아니라 차츰 없어지고 서민층은 여전히 더 춥습니다. 너무 큰 빈부격차는 인권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전셋값은 치솟고 물가는 계속 올라가고 공공요금까지 덩달아 오르고, 개인 부채가 천조 원에 육박하는데 이런 때에 금리까지 올립니다.
법인세는 25%에서 20%까지 내릴 계획을 세워놓고 있으면서 전 국민이 골고루 납부하는 부가세는 왜 내릴 생각을 안 하는 걸까요?
부가세 때문에 물가가 오른 것이 너무 많습니다.
개인부채가 많아지지 않도록 일찍 금리를 올렸어야 하는데, 개인부채가 천조 원이 된 후에야 금리를 올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미친 등록금에 끝없이 올라가는 물가, 살인적인 사교육비, 이래 가지고는 국민들이 잘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은 국민들에게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수출해서 돈을 벌면 세금을 충실하게 내서 그 혜택이 국민에게 돌아와야 하는데 탈법, 불법승계 비자금 등으로 들어가 버리고 정작 국민들에게 돌아오는 건 많지 않습니다.
삼성이 부담한 세금은 중소기업만도 못하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자국민에게 파는 물건은 질도 좋지 않고 비싸기만 합니다.
이제 FTA 세계경제체제 속에서는 대기업들이 관세 없이 물건을 팔아먹는 길이 열려 수지가 맞게 되었습니다. 국내 소비자들에게도 질 좋고 싸게 공급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돈 있는 20%의 잔치는 너무나도 호화로운데 세금 올리자고 하면 서민층이 나서서 올리지 말자고 합니다. 서민층이 돈 많은 재벌들의 편에 서서 말하고 있으니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노동자 편에 서야 할 서민층은 재벌의 소리를 대변하듯 재벌들의 편에 서서 자기 아들딸들인 노동자들의 잘못만 말하고 규탄합니다.
그래서 노사합의 후에 노동자가 당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래서는 누가 노동자로 일할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일하는 사람, 노동자가 대접받는 세상이 되어야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이기 때문에 사람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정부도 재벌들 편에 서서 문제 생긴 기업을 돕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가혹하게 막고 물대포와 곤봉으로 처리해서야 되겠습니까.
물대포 뒤에 숨은 사장을 불러 일하는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나서주어야 함이 온당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아 놓기만 합니다. 그리고는 네 맘대로 하라는 거지요.
뽑은 후에는 예산을 날치기로 통과시켜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세금이 어디에 쓰이는지도 관심 없습니다.
민주주의가 후퇴해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인권이 유린되어도 나만 괜찮으면 가만히 있습니다.
국가부채는 왜 늘어났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자고로 빚 무서운 줄 모르는 사람의 말로가 어떠했습니까?
아파트 담보 대출은 곧 은행에다 월세를 내는 형태인데 많은 대출은 자기가 사는 아파트 팔지 않으면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많기 때문에 아파트값은 몸부림을 치면서 떨어지게 되어 있는데 정부는 집값 띄우는 정책으로 큰 대가만 지불하고 거품은 거품이니까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간의 채무도 주는 자는 받을 것을 생각해서 주는 것입니다.
대기업이 수출을 많이 하고 돈을 많이 벌었다는데 그들의 주식값은 올라가지만 국고는 거덜 나고 빚만 늘어갑니다. 이제는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쓸 만 한 기업을 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천신공항을 대통령 조카, 이상득 의원의 아들이 대표로 있는 외국계 자산운용회사에 헐값에 매각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습니다. 이는 결코 무리한 의혹이 아닙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한국의 재벌들은 쓸 만한 기업 민영화시키는 데 외국인에게 넘어가는 것보다 같은 나라 사람에게 넘기는 것이 더 좋다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건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서울대학을 법인화시키려 하는데, 법인화시켜서 어쩌겠다는 말입니까?
수출을 위해 환율 방어하다가 3조 5천억을 날렸다고 하는데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국가는 손해나고 대기업은 돈을 벌고’입니다.
4대강 사업도 사전 조치 없이 마음대로 자기들끼리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은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22조 원이 넘는 공사를 그렇게 쉽게 해치우다 보면 부작용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공사를 경쟁입찰이 아닌 턴키식 발주로 해서 20-30%의 높은 공사비가 국민의 세금으로 지출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어 상위 20%가 하위 계층의 6배 이상의 호화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 결과가 어떨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돈이 많은 이들은 외국산 명품 사들이기에 혈안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나라 경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실업자만 늘리는 결과만 나옵니다.
빈부격차를 줄이는 방법은 비정규직을 비롯한 하위층 근로자들의 처우 개선만이 해결책입니다.
이런 조치 없이는 ‘중산층을 두텁게, 서민을 따뜻하게’ 라는 아름다운 구호가 서민들을 더 화나게 만들 뿐입니다.

지금 세계는 금융재벌들의 지배 하에 놓여 있습니다.
이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과거의 식민지 시절보다 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국가 부채가 한계선을 넘어가면 돈을 받기 위해 그리스나 이탈리아 같이 국민의 허리띠 졸라매고 복지 줄이라고 소릴 지릅니다.
그렇게 하다가 견디다 못하면 좋은 기업을 넘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GDP가 올라가도 서민복지가 줄어들고 국민들에게 내핍을 강요하면 그 정부는 위험수위에 이른 것입니다.
한번 높이 맛본 생활수준은 다시 내리기 힘듭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금융재벌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돈 빌려줄 것이니 좀더 편안하고 문화생활하면서 즐겁게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선진국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빌려준 돈을 갚기가 어렵겠다 싶으면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받아냅니다. 이익을 챙겨가기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일상이 되고 맙니다.
국민과 정부가 충돌하고 국가제반시설이 파괴되고 자국민들끼리의 반목, 질시, 폭력이 자행됩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불특정다수인을 겨냥한 위험한 행동이 나타납니다.
모든 국민은 두려움과 큰 고통에 빠집니다.

미국의 부자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은 자기 나라를 살리기 위해 50%의 재산을 기부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국의 부자가 700억 원의 무상급식과 대학등록금을 해결한다면 돈 가진 자의 긍지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 나라의 부채처리 방법을 말해 보라고 말입니다.
국민소득 2만 불, 수출실적 역대 최고라고 큰소리는 치는데, 복지는 줄어들고 중산층는 엷어진 것이 아니라 아예 사라지고 서민층은 더욱 추워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기본합의가 중요하고 기본합의에 충실한 정치를 해야 합니다.
기본합의는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기본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입니다.

1. 국민의 의식주 안정입니다. 의식주에 고통이 따르면 안됩니다.
2. 교육은 국가가 책임져야 합니다. 교육으로 돈 버는 세상은 안됩니다.
3. 사교육비도 국가가 책임져야 합니다. 사교육비는 그 돈을 국가가 받아서 지급해야 합니다. 이럴 때 사교육이 사라집니다. 교육비가 투자가 된다면 많이 배운 자가 큰도둑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교육비 투자는 국가가 해야 됩니다.
4. 병 나면 누구나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5. 노동자는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6.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보다 더 좋은 기본합의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수입이 적어도 안정된 사회가 됩니다.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무리한 경쟁도 사라집니다.
가난한 사람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부자가 실패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렇게 될 때 국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옳은 일을 하고 삼대가 빌어먹으면 그 사회가 온전한 사회입니까? 온전한 국가입니까?
국민이 국가에 고마움을 느끼고 살아가야 애국심이 생깁니다.

기본합의는 잣대가 됩니다.
정당이나 정치인을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는 기준이 생깁니다.
투표하는 기준이 됩니다.
기본합의에 역행한 자는 퇴출시킬 것입니다.
정치의 방향이 이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무슨 돈을 가지고 이렇게 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국민소득 2만 불에 적정한 기본합의의 방향대로 완급을 좇아 나아가면 됩니다.
이런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정치인 아닙니까?
한국에서의 위인은 죽은 뒤에 동상이나 세우고 그때 가서나 알아줍니다.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짓입니다.
위대한 정치가가 살아 있을 때 알아보고 그가 하는 말을 따라야 합니다.
죽은 뒤에 되살리려고 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습니다.
선거 한 번 해버리면 그만인 민주주의는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4년짜리, 5년짜리 계획으로 자기를 위한 정치가의 모습은 사라져야 합니다.

투표의 기준은 전라도나 경상도가 아닙니다. 여당이나 야당도 아닙니다.
투표의 기준은 기본합의에 있습니다. 그 다음은 기본합의에 충실하게 일하는지 감시가 중요합니다.
감시할 줄 모르면 주인 자격이 없습니다. 식민지나 신식민지시대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저력 있게 기반을 쌓아 가야 합니다.
기본합의에 충실할 때 정치인의 위상을 올라가고 존경받게 될 것입니다.
수출 많이 하는 기업이 국민의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가야 할 앞길이 보일 것입니다.
노동자는 저임금에도 안심하고 기쁘게 일할 것입니다.
노동자의 이름은 평생고생이라는 딱지가 없어질 것입니다.
부자도 불안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기본합의가 있으니 안심이 됩니다.

대통령이나 정치인, 모든 유력한 사람들도 기본합의에 충실하면 독재, 독단에서 해방됩니다.
권력도 부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가능성입니다.
정치를 마음대로 하려고 독재를 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돈을 마음대로 하려고 독재를 합니다.
국민은 독재하는 사람을 일단 큰 도둑놈으로 보고 물리쳐야 합니다.
권력을 구축해 놓아도 국민의 힘에 밀리면 거기에 붙어 있는 자들도 신세를 망치게 됩니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은 몰상식을 추방합니다.

아무쪼록 기본합의가 불문율이 되어서 우리 모두의 가슴에 새겨져서 모든 정치가 이런 방향으로 간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 즐거운 세상살이가 되겠습니까.
나는 이런 희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희망을 함께 공유해서 다같이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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